과학적 신학이란 무엇인가?

What is Scientific Theology?


박해경
Hae Kyung PARK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Department of Theology,
Baekseok University, Cheonan, Korea
EMail: haggai52@hanmail.net


(Received January 27, 2015
Accepted February 1, 2015)


Karl Barth asserted that the Old Liberal theology is not scientific because of its lack of "Word-event." He thinks that theology can be a scientific in case of taking place "Word-event" in man's existential moment. Recently Alister McGrath made an attempt to do a new Scientific Theology using the method of Natural Theology based on the Reformed tradition. Dr. Chul-Ha Han makes a new evangelical proposal on the method of true scientific theology. According to him, true scientific theology does not use the common approach of the Modern Western theologians. They made a great success of in various fields of visible world through analytical method. It is, however, a grave mistake which the modern Western theology made by applying the same empirical scientific method to theological objects. Scientific theology must be a serving position to give birth to faith, increase it, and reach to its goal in human souls through the Gospel for the purpose of giving the fear of God and the future hope on the eternal blessedness.


I. 서론
II. 과학(학문)으로서의 신학
III. 과학적 신학에 대한 견해들
IV. 칼빈신학의 과학성에 대한 한철하 박사의 해석
V. 결론


I. 서론

알리스터 맥그라스(A. McGrath)는 “복음주의 신학방법론”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복음주의자들이 신학에 대한 높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신학방법론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는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가 지적한 바와 같이 개혁주의나 복음주의 권내에 속한 많은 신학자들이 가장 많이 다루고 있는 칼빈 연구의 경우를 보더라도 칼빈의 생애나 그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과 그의 작품들에 대한 분석은 상당량의 연구서들이 나왔지만 칼빈의 신학방법론에 대해서는 무게있게 다룬 글이 별로 없다. 칼빈의 성경해석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관심이 주어졌지만 그의 신학 원리와 방법에 대해서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세계교회가 기독교의 본질에 대하여 오해나 무관심이 많은 가운데 교회를 바로 인도해야 할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 교수들과 학자들에게 올바른 신학방법론이 제시되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한철하 박사는 우리 시대의 신학적 처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바로 이 신학방법론의 문제임을 지적하였다. 즉 우리나라의 신학계에 있어서 대개는 서양의 신학을 그대로 배워 가지고 돌아와서 답습하다보니 그 신학의 문제점을 그대로 안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현대에 발전된 서양 자유주의 신학들은 기독교의 바른 “신앙”을 세우기보다는 오히려 무너뜨리고 약화시킨다고 하였다.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 그들의 출발점이 불신앙이라는 것과 그 방법론이 일반 경험과학적 방법론을 그대로 성경이나 교회사 자료 및 선교지에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변하였다.

이것을 다시 상세히 설명하면 첫째로 현대 서양신학의 문제점은 신학 자체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점과 신학방법론이 잘못되었다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고 했다. 즉 현대 서양신학은 “신학이 무엇인가?”하는 본질적인 문제에서 궤도를 벗어났고, 방법론에 있어서도 3가지의 오류에 빠졌다는 것이다. 먼저 “신학의 본질” 문제를 살펴본다면 신학이 기독교가 추구하는 목표에 입장을 같이 하지 않고, “이성”으로 “신앙”을 해석하는 일만 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을 발생시키고, “구원”을 얻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학방법론에 있어서는 서양신학이 기독교의 신앙진리를 개념적으로 접근하여 그 교리가 말하고자 하는 “실재성”(reality)이 상실된 것과 이성적, 비판적 방법을 사용하는 결과 성경이 말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초자연적 진리나 실재들을 부인하거나 왜곡하는 사태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콜라주의화의 오류가 있어 기독교 교리의 세부사항에 대해서 분석하고 그 도덕적, 사회적, 자기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잘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복음의 중심점을 잡지 못하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잘못된 방법론의 오류를 한 박사는 한 마디로 신학이 “과학적”이 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신학의 과학성의 기준을 논할 때에 바르트(Barth)나 맥그라스나 토랜스(Torrance)가 말하는 그런 의미가 아닌 전연 다른 차원에서 말하는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고 있다. 바르트는 “말씀 사건”이 발생해야 신학이 과학적이 된다고 보았고, 토랜스나 맥그라스는 자연신학적 접근을 하면서도, 후험적이고, 또 그리스도 중심이라야 과학적이라고 하는데 비하여 한 박사는 예수님의 단순한 가르침, “천국문을 여는 신학이냐?” 아니면 “천국문을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신학이냐?”가 바로 신학의 과학성의 표준이라고 하였다. 신학의 과학성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정확하게 해석하고 그 종교가 목적하는 것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는 가의 여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과학적 신학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박형룡 박사를 꼽았다. 왜냐하면 박형룡 박사는 기독교 진리들을 사실 그대로 믿고, 실재성에 있어서 그것이 초자연적이든, 이성적이든 성경이 증거하는 자료대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목적하는 “믿고 영생얻는” 진리, 즉 구원의 진리를 확집하는데 있어서 이성의 방법이 아니라 신앙의 방법을 따르며, 사실적으로 믿음이 일어나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일깨우는 신학을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한 박사가 박형룡 박사를 세계최고의 신학자라고 칭송하는 이유가 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그가 기독교의 진리들을 이성적, 비판적으로 다루지 않고,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들을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아닌 성경적 입장에서 영적인 과학으로 접근하여 복음의 중심진리를 확고히 하고, 그의 저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신앙이 일어나도록 했다는 점을 크게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법론이 기독교라는 종교의 본질적인 의미에서 볼 때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 필자는 신학의 과학성과 과학적 방법론이 무엇인지를 논함에 있어서 주요 신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고, 한 박사가 주장하는 것의 타당성에 대해서 소개하여 독자들이 스스로 판단해 줄 것을 요청한다.


II. 과학(학문)으로서의 신학

먼저 신학이 하나의 과학(학문)이라고 할 때 그 의미가 무엇인가에 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학(science)이라는 것은 사물의 구조, 성질, 법칙을 탐구하는 인간의 이론적 인식활동 및 그 산물로서의 체계적, 이론적 지식을 말한다. 넓은 의미로는 “학”(學), 또는 “학문”(學問)과 같은 말로 영어의 science와 같다. 그러나 독일어에서는 “학문”(Wissen)과 “과학”(Wissenschaft)이 명백히 구별되며, 후자는 철학, 종교, 예술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수가 많고, 좁은 뜻으로는 “자연과학”(Naturwissenschaft)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사전적인 의미만 가지고는 신학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과학은 반드시 물리적 영역에만 국한되어야 한다는 선입견을 주어 일반인들로 하여금 종교나 예술은 비과학인 듯한 인상을 준다. 사실 근원적으로 생각하면 우주와 인간 삶의 모든 분야는 과학적이 될 때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게 되고, 비과학적이 될 때 우상숭배와 미신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교(기독교), 신학, 음악, 미술, 건축 등은 모두가 과학적일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의 법칙과 질서에서 떠난 것은 모두 비과학이라 해야 하는 것이다.

신학을 전개할 때 인간의 “신앙현상”을 기술하는 것을 방법론으로 삼는 학자들이 있고, 성경과 신조에 입각하여 전통적인 교리를 서술하는 방법이 있는데 후자는 개혁파 학자들이 사용하는 방법론이다. 이 경우 성경을 객관적인 원리로 신앙을 주관적인 원리로 삼는다. 전자를 아래로부터의(from below) 방법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위로부터의(from above) 방법이다. 여기서 어떤 것이 더 과학적이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판넨베르크(Pannenberg)를 위시하여 대다수의 현대신학자들은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야 과학적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기독론의 경우 위로부터의 신학으로 하면 이미 예수의 신성을 전제로 하니까 잘못이라는 것이다. 위로부터의 신학방법은 출발부터 “하나님의 입각점”에 서기 때문에 비과학적이라는 것이다. 역사에 의해서 규정되는 인간적 상황에서 사고하며 출발해야 과학적 인식론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인간은 이 역사적 상황을 뛰어넘지 못하므로 오직 역사 속에서만 계시되는 진리를 파악해야 학문적이며 과학적이 된다. 그러므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나 신학이라야 인간의 인식 가능성이 열리게 됨으로 이 방법이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통 신학자들이 위로부터의 방법으로 기록된 역사적 신조들의 결론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성 일인격(One Person, Two Natures)의 교리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전제를 하는 것은 잘못이다. 기독교의 중요 교리들은 거의 다 위로부터의 방법에 의해 채택되고 고백되어져 내려왔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력이 높지 않은 교인들도 그 교리들을 배우고 깨달아 자신의 고백으로 받아들였고, 그 진리를 이해함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지금도 그런 일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실적으로 발생되고 있는 현상을 무시하고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야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더 비과학적인 태도가 아닌가 하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하지(C. Hodge)는 신학을 하나의 학문(과학, Science)이라고 하는 의미를 설명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과학은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사실(fsct)이고, 다른 하나는 개념(idea), 혹은 사실과 지성(mind)이다. 과학은 지식 이상의 것으로 단순히 사실들을 질서있게 나열하는 것으로 과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신학이 하나의 과학이라면 그것은 사실들에 대한 단순한 지식 이상의 어떤 것을 포함하여야 한다. 신학은 다루는 사실들이 다른 사실들 또는 모든 사실에 대해 가지는 그 내적 관계를 보여주어야 한다. 신학은 어떤 한 가지 사실이 인정된다면 나머지 다른 사실들 역시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사실들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확인한다. 성경도 신학자가 그 내적 상호관계 속에서 수집하고, 증명하고 정리하고 제시해야 하는 진리들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신학은 성경의 사실들을 확인하고 진술하나 조직신학은 그것들의 진리성을 입증하고, 조화와 일관성을 보여주며, 상호간 및 다른 유사진리들과의 관계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카이퍼(A. Kuyper)도 두 가지 의미에서 신학이 과학이라고 하였다. 하나는 신학이 지성적인 노력을 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루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록 신학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증가시킬 수는 없으나 하나님에 대해 계시되어진 지식을 보다 분명하게 알도록 인도한다는 점에서 과학이라고 한다. 마치 현미경이 나비의 날개에 대해 아무 것도 더할 수는 없으나 우리에게 그 날개에 대한 더 풍성한 지식을 주는 것과 같다. 신학은 하나의 과학으로서 다른 모든 과학의 공통 뿌리에서 격리되거나 잘려나갈 필요가 없다. 과학으로서의 신학은 신학의 개념들 안에 주어진 것들에 대한 하나의 특수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신학은 과학으로서 자기의 고유한 자리가 있으며, 그것은 과학의 단위에 있어서 그 본질상 하나의 유기체적 멤버로서 정의되는 자기 위치가 있다. 신학은 탐구대상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계시된 지식을 가지며, 이해의 차원으로 인도한다. 과학으로서의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계시된 지식을 중생된 마음으로 성령의 빛을 받아 그것을 의식하고 반성하는 논리적 활동이다. 즉 과학으로서의 신학이란 거듭난 인간의 의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계시되어진 지식을 과학적으로 통찰하는 것이다.

조직신학자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과학으로서 신학하는 방법론이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는데, 훅세마(Hoeksema)는 신학방법론을 다음과 같이 6가지로 정리한다.

1) 교회적 방법론(ecclesiastical method)-로마교회의 방법론이다. 일면 교권적 신학인데 교회가 이미 결정한 원리와 결론을 따라가는 신학이다.

2) 성서신학(Biblical theology)적 방법-교의적 용어나 결정사항들을 따르기보다는 성경자체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려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통교회의 신학적 작업을 무시하고, 성경에 대한 이해를 할 때 논리적인 사색과 체계화의 필요성을 그 자신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3) 주관주의적 방법(subjectivistic method)-칸트(Kant)와 헤겔(Hegel) 등에 영향받은 것으로 도덕주의나 지성주의, 혹은 신비적 주관주의 등이 있다.

4) 역사비평적-종교사학파적 방법(religious-historical-comparative method)이 있다. 여기에는 객관적인 진리의 기준이 없고, 상대적인 가치만 인정된다.

5) 바르트학파(Barthians school)의 방법-성경을 신학의 신인식을 위한 계시로 보지않고, 실존적 위기의 순간에 사건화될 수 있는 수단으로만 본다.

6) 주석적-종합적 방법(exegetical-synthetical method)-이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훅세마는 말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경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진술하는 것이다.

교권적(교회적) 방법은 학문성이 보장되지 않고, 교회가 이미 결정한 교리를 그대로 수용해야 하기 때문에 과학적이 되기 어렵다. 그것은 칼빈이 비판한 것처럼 맹신(fides implicita)이 되어 진리를 판단 없이 받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문제가 있다. 성서신학의 방법은 성경에서 전체적, 종합적으로 추론하여 교리적 개념을 정리하는 조직신학의 방법을 배격하고, 성경의 시대별, 저자별로 연구하되 주로 역사적 연구를 한다. 조직신학처럼 주제별로 하지 않고, 성경의 본문과 그 배경과 저자의 의도를 찾는데 주력한다. 성서신학에 있어서 보스(Vos)처럼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의 점진적 과정으로 보고 연구하는 학자도 있으나 여러 가지 비평적 방법으로 접근하는 학자들이 더 많다. 그런 경우 성서신학은 여전히 주관주의적이다. 성경 기록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 자료에 대한 과학적 태도가 아니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주관주의와 역사비평적 방법, 혹은 비교종교적, 종교사학파적 방법도 결론은 주관주의 자기 이해의 신학이 되어 성경이라는 근본자료보다 부수적 자료들인 타종교의 경전이나 비평적 연구서들을 동등한 권위로 보는 비과학적 태도가 나타나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불트만(Bultmann)의 양식비평(Form Criticism)은 소위 “삶의 정황”(Sitz-im-Leben)을 연구하는 것을 중시하면서도 신약성경의 시대의 삶의 정황에 훨씬 더 가까이 살았던 교부들의 진술을 믿지않고, 한참이나 후대의 사람들인 근현대 신학자들의 주장을 더 신빙성있게 채용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비과학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르트는 신학이 과학적이 되기 위해서 성경의 기록이 인간 실존의 위기에서 “말씀 사건”으로 사건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그의 성경관이 잘못된 결과로 나타난 주장이다. 그는 자연계시도 부정하며, 성경을 하나의 간증문서로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행동자체로서 그리스도 사건만이 계시라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행동화, 혹은 사건화로서의 계시발생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사색에 불과하다고 벌카워(Berkouwer)는 비평하는데 옳은 관찰이다.

"신학의 과학성"(Wissenschaftlichkeit der Theologie)이라는 말은 바르트가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바르트가 말하는 의미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를 이성으로 재해석하므로 그런 신학은 과학적이 되지 못하고, “말씀” 사건이 일어나는 신학이라야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과학적이 되려면 자연과학의 이론이나 지식들을 알고, 그것들과의 대화와 적응, 조화를 추구하고, 자연신학적 접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III. 과학적 신학에 대한 견해들

A. G. 파젯(Padgett) 박사는 북경대에서 열린 한 심포지엄에서 매우 중요한 주장을 하였다. 그는 과학은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자연과학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과학이라고 하면서 각각은 “창조”에 있어서의 다른 국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은 가치판단과 도덕성에 대해서 독자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종교의 도움을 받는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과학에 있어서 영적인 과학, 혹은 신앙의 과학이 있음을 명백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과학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원리를 파악하고 그것들을 응용하는 지식 활동이라면 창조된 세계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신앙의 세계와 영적인 세계의 법칙들과 원리를 발견하는 일도 과학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진 맥그라스는 최근의 저서에서 영어의 science라는 말이 자연과학을 의미하게 된 것은 비교적 근대의 일이고 그 이전에는 영적인 문제도 과학의 대상으로 취급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각각의 과학은 그것의 대상에 적합한 용어들과 그에 순응하는 방법을 발전시킨다고 한다. 즉 각각의 과학은 제각기 다른 대상을 취급하는 것이며, 개별적인 과학들은 그것들의 독특한 성질에 따라 그 대상에 반응해야만 하는 것이라 하였다. 과학은 그 대상의 고유한 본성을 따라 그것을 탐구해야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이 과학적이 되려면 그 대상을 바로 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캘러(Kähler)나 바르트(Barth), 숄츠(Scholtz), 토랜스(Torrance)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학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으로서 하나님에게 적합한 용어와 접근법을 사용해야 함은 지당한 것이다. 그것은 칼빈에 의하면 “경외”와 “경건”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배우고 그 분의 말씀(성경)의 원리와 방법을 따르는 “순종”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신학이 과학이며, 특히 영적인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카이퍼(Kuyper)도 그의 저서에서 밝힌 바 있다. 그는 신학의 원리와 방법에 대한 훌륭한 글을 남겼다. 그는 과학의 개념들을 논하면서 영적인 과학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으며, 과학과 죄와의 관계, 두 종류의 과학(자연과학과 영적인 과학), 과학으로서의 신학의 개념과 그리고 신학 방법론을 논하였다. 이 책에서 카이퍼도 역시 신학은 그 연구 대상이 “하나님”이시라는 특수한 과학이란 점을 신학사적 고찰로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신학이 과학이라고 하는 점을 설명할 때에는 신학작업도 우리의 지성적 활동이라는 것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계시된 것을 우리가 점점 더 명확히 알아간다는 점에서 과학이라고 하였다. 카이퍼가 신학의 과학성의 기준을 성경에서, 특히 예수님으로부터 찾지 않은 것은 그 자신의 이성적 활동에 치우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르트도 그의 교의학 첫 부분에서 이 문제를 논하고 있다. 그가 신학의 제 분야에 있어서 방향설정을 신본주의로 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는 모든 교리를 하나님과 연관시키며, 또한 “그리스도”라는 계시개념으로 논리의 통일을 기한 것은 매우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신학을 “하나님에 관한 특유의 논설 내용을 교회가 과학적으로 자체 조사하는 활동”으로 규정하였다. 그에 의하면 신학이 과학으로 불리 울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다른 모든 과학들처럼 지식의 분명한 대상에 대한 인간의 관심사이며, 명확하고 일관된 지식에의 추구이고, 그 대상에 대한 추구의 과정(길)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르트가 신학의 대상을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 놓은 것과 참된 신학이란 “위로부터의 신학”이며, 신학의 기능을 복음을 섬기는 순종의 신앙 안에서의 교회의 기능이 되게 한 것은 아주 탁월한 착안이었다. 더구나 바르트가 신학적 사고행위를 “계시”라고 하는 실재(reality)의 객관적 대상보다 앞서지 못하게 하고 그것에 뒤따르는 사고(Nachdenken)로 이해한 점도 과학적 신학을 하고자 하는 좋은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맥그라스가 지적한대로 바르트가 “계시”를 구체적이고 후험적인(a posteriori) 인간 이해의 차원에서 신학의 (인식론적) 원리로만 보고, 형이상학적 기초를 전제로 하는 관점은 맹렬히 배격했기 때문에 결국 초자연적, 형이상학적 차원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성경의 자료들을 공정하게 취급하지 못한 점이 드러났다. 신학이 과학적이 되려면 성경이라는 자료(data)를 공정하게 취급해야 하는데, 바르트는 인식론을 존재론 보다 우위에 두려고 하다가 성경 자료가 증거하고 있는 초자연적 실재계의 사실 자체(res ipsa)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능력도 부인하는 잘못을 범하여 그의 신학을 비과학적이 되게 하고 말았다.

과학의 본질은 그 정확성에 있다. 어떤 과학적 연구이던 취급방법이 정확하게 되려면 연구하는 대상의 그 어떤 자료라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신학이 과학적이 되려면 성경의 어떤 자료든지 공평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처럼 계시를 “그리스도”에게만 제한하거나 성경의 형이상학적 차원을 인식의 틀 밖으로 몰아낸다면 성경이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의 실재를 부인하여 비과학적인 신학이 된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바르트처럼 “말씀”을 그리스도라는 계시사건으로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믿고 순종케 하여 우리를 구원케 하시고, 그 “말씀”과 더불어 “능력”과 “기사(기적)”도 나타내시고, “성례”도 주시며 여러 가지 도움을 우리 “신앙”에 베풀어 주셨다. 이 모든 사실들을 하나라도 경시하지 않아야 진정한 과학적 신학이 될 것이다.

결국 성경 자료들(교리들)의 “실재성”에 대한 신앙의 문제가 신학의 과학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됨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 사고하기 이전부터 존재하신 창조자 하나님과 그의 창조의 실재를(그 능력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때 과학적 신학을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토랜스도 이 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적 신학을 한다고 주장하는 판넨베르크(W. Pannenberg)의 신학은 비과학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는 사람들의 종교경험을 통한 하나님의 지식과 역사적 종교라는 차원에서 연구되어야만 신학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수평적 차원에서 “아래로부터의 신학”이어야 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는 기독론에서 그 출발점을 인간 예수로부터 하며, 전형적인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전개하고 있다.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에서 출발하여 그의 신성에 대한 고백을 알아내자는 방법을 사용한다.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예수의 신성을 전제하니 잘못이고, 구속론적 동기에 지배받고 있어서 잘못이라고 한다. 이 말은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시도해야 인식론적으로 강점이 있다는 사고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기독론은 구속론적 동기에서 나오는 것이며, “위로부터의” 기독론을 고백한 칼케돈 신조를 우리가 “인식”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데도 그는 그것을 문제삼아서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이것은 결국 바르트의 인식론 위주의 신학에 영향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토랜스나 맥그라스가 과학적 신학을 논함에 있어서 “실재”의 중요성을 “언어”와 “인식론”의 범위를 넘어서서 다루고자 하고, “사실”을 “인식” 앞에 둔 것은 과학적 신학의 이해에 커다란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에게도 바르트의 영향력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맥그라스는 과학적 신학이 되려면 4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특히 실재성과 대상의 문제와 후험적인 방법을 강조한다. 토랜스도 신학은 후험적이어야 하고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고 하며 맥그라스와 같은 맥락에서 말한다. 그러나 맥그라스나 토랜스가 신학이 a posteriori 해야 과학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 얻은 진리라야 참 지식이라는 바르트적 사고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신학은 특수과학으로서 영적인 과학이며, 신학의 탐구 대상은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인데, 신학이 논한 대상 자체가 성경이라는 텍스트가 말하는 내용과 꼭 같아야 과학적이라 할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신학은 그 목적이 성경의 목적과 같고, 그 기능이 말씀의 기능, 곧 회개케 하는 일과 믿음을 세워 구원을 얻게 하는 기능에 부합해야 하며, 신학활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경외하는 일이 단어만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신학은 “신학 밖”의 “복음”을 찾고, 하나님의 능력을 통한 복음전도와 구원의 역사(役事)에 도달하게 하는 원리를 지키고, 교회를 섬기는 기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IV. 칼빈신학의 과학성에 대한 한철하 박사의 해석


 

한철하 박사는 칼빈의 신학이 왜 과학적인가에 대해서 3가지 차원으로 설명한다. 첫째는 신학의 정의와 목표에서, 둘째는 신학의 위치와 기능에서, 셋째는 신학의 원리와 방법론에서이다.

1. 신학의 정의와 목표에서

칼빈은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별도로 그 정의를 내리거나 집중해서 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기독교강요>의 여러 곳에서 신학이란 무엇이며 그 목표는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에 대해 명백한 진술을 하고 있다. 사실 신학이 무엇인가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기독교가 무엇이냐?”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통해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신학은 기독교의 본질을 밝히 설명하고, 그 본질적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작업이다. 이 문제에 관련하여 칼빈은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에서 “독자에게 드리는 글”(Ioannes Calvinus Lectori)을 통해 신학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거기서 그는 신학의 목적은 순수한 경건의 교리를 가르쳐서(유지되게 해서)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신학도들에게 성경을 바로 읽도록 준비시키고, 기독교의 중심진리를 그 모든 부분적 교리들의 배열 안에서 설명하여 성경에서 무엇을 특별히 찾아야 하고, 그 내용을 어떤 목적에 연관시켜야 하는가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라 하였다. 칼빈은 이 글에서 신학의 정의를 분명히 내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신학이란 성경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며, 그것을 어떤 목적에 연관시키는가를 올바로 하는 것이 신학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학이란 성경의 목적을 이루어 주는 일에 봉사하는 활동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게 하는 것(요 20:30-31, 딤후 3:15)이라면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이 말하는 신학의 정의와 목표는 성경과 동일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점은 1590년에 출간된 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 올레비아누스(Olevianus)가 기록한 내용분석(Methodus et dispositio seu totius operis argumentum) 가운데 <기독교강요>의 목적을 매우 분명하게 제시하였기에 더욱 확실해졌다. 거기서 올레비아누스는 칼빈의 저술 목적을(그것이 바로 신학의 정의이자 목표인데) 두 가지로 말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알게 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지식]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주는 것이다.

올레비아누스는 칼빈의 저술의도, 즉 신학의 목표를 정확히 말하고 있다. “우리를 복된 불멸의 영생(길)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the knowledge of God which leads to blessed immortality)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올레비아누스는 그의 글 끝 부분에서 인간의 창조, 타락, 구속의 순서로 <기독교강요>가 구성되었다고 말하고, 최종적으로는 하늘의 처소(heavenly mansion)에 영원히 거하게 된다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신학(강요)의 본분이라고 보았다.

신학의 목적, 혹은 목표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기독교강요> 초판부터 최종판까지 변함없이 표명된 바와 같이 신학자가 자기 자신의 교리나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복음 진리(구원론)를 말하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리차드 멀러(R. Muller)는 그의 최근 저서에서 칼빈의 <기독교강요>, 주석, 편지들에 나타난 여러 논의(argument), 서문(preface), 혹은 독자에게 드리는 글(to the Reader)을 연구해서 밝힌 바 있다. 여기서 멀러는 칼빈이 우선 자기 자신에게 대하여 많은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전제하고, 그의 글들 속에서 로마서와 같은 구조, 순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신학임을, 즉 구원론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신학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랜달 자크만(R. Zachman)은 칼빈의 신학은 변증법적이며, 수사학적이고, 명상적이라고 하면서, 그가 중요한 문제를 “정의”(定義)해서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정의(definition)란 다루고 있는 문제의 본질(natura), 진의(眞意, vis), 실재(res)를 명백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의 정의는 무엇인가? 칼빈은 신학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으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해 논한 것을 통해서 그가 뜻하는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1권 5장 10절(항)에서 신학의 정의 혹은 목적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지식(신학)은 마땅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고무하며(excitare), 내세의 소망에 대해 일깨워주고(expergefacere), 격려(분발)시켜야 한다(erigere)."

여기서 칼빈은 신학이란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생을 얻게 하도록 고무하고 격려하며 일깨워주는 학문이라고 정의한 셈이다. 만약 성경이 영적인 진리에 대하여 가장 과학적인 책이라고 한다면 성경의 목적과 동일한 목적을 가진 신학이라야 과학적 신학이 될 것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 얻게 하는 것”이 목적임을 그 자체의 증거로서 밝히고 있다(요 20:31).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그 이름을 믿으라는 것, 그리고 영생을 얻는 것이 성경의 목적인데, 대다수의 칼빈 학자들은 “개념적 접근법”으로 연구하다보니 여기서 “그리스도”만을 목표로 삼고, “믿는 일”과 “영생 얻는 일”에 대해 무관심한 것을 볼 수 있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고(성령), 성경의 가르침은 하늘에서(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사실이라면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의도(관심)에 맞는 신학이라야 과학적 신학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과 목적과 의도는 “죄인의 구원”에 있으므로(롬 3:28, 딤전 1:15, 벧후 3:9, 눅 24:45-47) 신앙의 과학인 신학은 하나님의 관심을 신학의 과제와 목표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관심인 “예수 믿고 구원을 얻게 하는 일”이 일어나게 하고, 그 일을 돕는 것이 신학의 목표이다. 칼빈에 의하면 신학과 목회와 선교의 목적은 같은 것으로서 “믿음”을 일으켜서 구원을 받게 하고, 하나님을 참되게 경배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신학의 위치와 기능에서

칼빈은 신학의 위치를 성경의 진리 자체에 봉사하는 데에 두었고, 그 기능은 성경 진리의 어려운 내용을 명료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말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목적을 이루는데 봉사하는 위치(serving position)에 신학의 자리를 두고, 성경 말씀의 한계를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한 것이다. 즉 신학자는 그 생각과 말에 대한 확실한 규범을 성경에서 찾고 마음의 생각과 입에서 나오는 말을 성경에 순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한철하 박사는 바르트가 그의 교의학을 쓰는 이유로 성경 말씀이 “말씀”이 되게 하고 설교의 말씀이 “말씀”이 되게 하자는 데 있다고 하였다. 그의 “말씀의 신학”의 핵심 내용인 “말씀 사건”이 일어나고, “계시 사건”이 일어나게 하자는 것이다. 즉 바르트의 교의학은 그 자체를 잘 알리는 것이 중요하였고, 그것이 가르치는 일들이 강단이나 실생활에서 그와 같은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이 목적이 된다. 바르트 뿐 아니라 모든 (서양의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다 같은 자기신학 이해를 하고 있으나 칼빈은 자기의 신학 그 자체 속에서 의미를 찾게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밖에” 있는 성경 속에서 복음을 찾게 하고, 그 복음을 죄인에게 전하여 구원하는 사역을 하게 한다고 한 박사는 지적하였다.

여기서 칼빈이 말하는 신학의 위치는 성경 말씀에 봉사하는 위치가 되고, 그 기능은 성경의 목적(구원)을 이루는 목회적, 선교적 기능을 하게 함으로써 신학이 자기 자신을 목표로 하지 않도록 바른 위치를 정해주었고, 신학이 단지 관념적인 언어유희의 기능만을 하지 않고 실제로 “믿음”을 일으켜서 구원을 얻게 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는 기능을 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칼빈은 신학의 기능에 대해 “믿음”을 낳게 하고, 증진시키고, 목적지까지 전진시켜주는 것으로 말하면서 결국 그것은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교회를 섬기는 복음사역의 기능과 같은 것으로 설명한다. <기독교강요> 초판부터 그것이 요리문답적 성격을 가졌다는 주장이 많았고, 실제로 판을 거듭하면서 분량이 많아지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 신앙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교리문답의 기능을 한다고 보는 것이 무리한 해석은 아니다. <기독교강요>가 요리문답적 기능을 했다면 틀림없이 교회(하나님의 백성)의 신앙을 위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칼빈이 신학의 기능을 “신앙”확립의 역할에다 둔 것은 <기독교강요> 4권의 초두에서 더 분명하여 진다:

"...우리 안에 믿음을 낳게 하고, 그것을(신앙을) 증대시키고, 그 목표에까지 전진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외적 보조자들을 필요로 한다."

칼빈은 강요 1권에서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2권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논하고 있다. 그런데 창조자 하나님이 구속자 하나님으로 나타나시는 그 목적이 아담 안에서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으로 말한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구원의 방법을 <기독교강요> 3권에서 논하는데, 한 마디로 “그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얻는 것이 사실이다”라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복음 진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어서 4권에서 아무 믿음이나 가르쳐서는 안되므로 “복음신앙”(Fide Evangelii)을 낳게 하고(전도), 증진시키며(양육), 그 목표까지 전진하게 하는(성화와 영화) 교회의 복음 사역을 말하고 있다.

<기독교강요>의 구조와 논의 속에서 칼빈은 신학은 그 위치가 성경 말씀에 봉사하는 것이므로 성경에서 이탈하거나 보다 앞서거나 성경이 말하는 것을 생략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칼빈은 성경의 저자가 성령이시고, 성령은 말씀과 떨어져서 역사(役事)하시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믿음은 성령의 으뜸가는 사역이며, 말씀을 부단히 공급해야 유지되기 때문에 결국 말씀과 성령의 역사는 우리에게 “믿음”을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칼빈의 신학의 원리와 그 기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한철하 박사는 칼빈의 신학의 특징을 “하나님” 중심적이며 “구원”중심적인데, < 기독교강요>에서 그가 <기독교강요> 전체를 “신앙”이라는 한 마디를 중심으로 조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워필드(B. B. Warfield)가 칼빈을 성경의 신학자요 성령의 신학자라고 하였으나 오히려 믿음의 신학자라고 해야 더 적합할 것이다.

교회의 주된 기능이 신앙을 일으키는 일이라고 칼빈은 생각했기 때문에 <기독교강요>를 저작한 동기에 대하여 쓰는 중 그는 “순수한 경건의 교리를 보존하여(가르쳐서)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 외에 어떤 다른 의도도 없다”고 하였다. 여기서 교회를 유익하게 한다(benefit the church, ecclesiae prodesse)는 말은 교회로 하여금 바른 믿음, 즉 복음신앙을 확립하도록 돕는다(이롭게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니까 성경 자체에 봉사한다는 신학의 섬김으로서의 위치가 여기서 분명하여진다. 성경의 목적은 신앙을 세우는데 있고, 신학의 기능은 그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한 마디로 신학은 말씀을 순종하는 위치에서 말씀이 지향하는 그 목표를 따라가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신학자가 자신의 두뇌와 공상을 경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지 말아야 하며, 말씀의 범위와 한계를 넘지 말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그대로의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야만 “무적의 논리로”(invicta ratione) 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치와 기능을 가질 때에 신앙이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게 하고, 또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는 일이 사실적으로 일어나게 하는 과학적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신학의 원리와 방법론에서

칼빈의 신학의 특징을 논함에 있어서 그 지배적 원리나 중심진리를 발견하려고 하거나 그것을 반대하는 여러 연구들이 많았다. 이 원리를 찾고자 애쓴 것은 칼빈의 신학 방법론을 발견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과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방법론이란 원리와 묶여있는 것으로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학문적 수단으로 “축적되고 진전된 결과를 낳게 하는 작업과 관련되며, 규칙적이고 반복해서 일어나는 규범적 패턴”에 대한 연구이다. 말하자면 방법이란 목적을 이루는 원리의 일관성 있는 구체적 적용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다수의 개혁파 신학자들은 그들의 교의학에서 개혁신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칼빈의 신학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여러 학자들의 신학방법을 비판적으로 소개하고 자신은 칼빈주의 스콜라적 전통을 받아들이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 예를 들면, 사색적 방법, 교권적 방법, 주관적 방법, 신비적 방법들을 소개하고, 종합적-발생적 방법을 취한다. 말하자면 신학의 목적을 칼빈에게서 찾지 않고 칼빈주의 전통에서 내려오는 예정론이나 하나님의 주권, 일반은총 등의 개념들을 “성경주의”에 입각하여 진술하고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찰스 하지(C. Hodge)는 다른 학자들에 비하여 독자적인 방법론을 제시했는데, 그것을 귀납적 방법이라 불렀다. 그는 이 방법을 과학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자료들을 수집하고(자연이 과학자의 것이고 성경은 신학자의 것이다), 그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신학자가 자신의 진리 체계를 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체계를 확인하고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는 신학이 과학적이 되려면 귀납적이어야 하고, 성경 자료를 “사실 그대로” 취급해야 한다고 하였으므로 다른 학자들에 비해 상당히 과학적 방법을 시도하였으나 실제 적용면에서는 사색적 합리주의 개념정리 방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이러한 경향이 다른 개혁파 신학자들과 칼빈 연구가들에게도 흔히 발견되기 때문에 우리는 칼빈 자신의 신학 방법론이 과학적임을 확인할 필요성을 더욱 깨닫게 된다.

칼빈의 신학 방법론을 알려면 먼저 신학의 목적을 알아야 하고, 다음에는 그의 해석학적 원리를, 그리고 이 원리를 어떻게 일관성 있게 사용하였는가를 검토해야 한다. 우리는 앞에서 칼빈 신학의 목적이 “믿음”을 일으켜서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목적에 맞는 해석학적 원리와 방법론을 발견하고 적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의 칼빈 연구가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 중심적이면서 “구원” 중심적인, 다시 말해서 칼빈이 의도한 그대로의 방법론을 찾지 못하고 주관적으로 설정한 어떤 한 가지 중심성에 치우치거나 변증법적 해석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려 하거나 아니면 아예 칼빈에게는 중심진리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헤르만 베버(H. Weber)는 칼빈 신학에는 그의 전 사고 구조를 형성하는 최고의 원리가 있으니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또 에르빈 뮬하우프트(Erwin Mülhaupt)는 “하나님” 개념에서, 오토 리츨(Otto Ritschl)은 예정론 교리에서, 토랜스(T. F. Torrance)는 신 인식론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론, 즉 인간론에서, 파커(T. H. L. Parker)와 도위(E. Dowey, Jr.)는 신인식의 이중지식론에서, 크루쉐(W. Krusche)는 성령론에서, 윌리스(D. Willis)는 기독론에서 각각 칼빈 신학의 중요점을 찾으려 했다. 찰스 파티(Charles Partee)는 스토페르(R. Stauffer)가 칼빈의 <기독교강요>보다 설교에 집착하는 것도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는 칼빈에게 있어서 중심 교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헤르만 바우케(H. Bauke)는 칼빈에게서 중심 교리를 찾을 것이 아니라 그의 신학 속에 있는 세 가지 형식 구성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것은 합리주의, “상반되는 것들의 복합”(complexio oppositorum), 그리고 성서주의이다. 이와 같이 칼빈의 중심 진리를 찾는 것을 무익하다고 보는 학자들은 가노치(Ganoczy), 배틀스(Battles), 부스마(Bouwsma), 암스트롱(Armstrong)등이 있고, 알프레드 괼러(A. Göhler)와 웬델(F. Wendel)도 이런 부류에 포함된다.

바우케가 complexio oppositorum을 주장한 이래 칼빈의 신학을 변증법적으로, 혹은 두 극단을 피하는 via media의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고, 여기에 신정통주의 신학의 강력한 힘이 서구 신학자들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게 되어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현대 칼빈 연구에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칼빈의 신학을 근거로 하여 시작된 신 지식론 논쟁은 바르트(Barth)와 부르너(Brunner), 파커(Parker)와 도위(Dowey)를 이어 니이젤(Niesel), 토랜스(Torrance)와 맥그라스(McGrath)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 해석을 가하는 것이 공통점이다. 물론 두메르그(Doumergue)를 따라 칼빈의 신학을 “신(하나님)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으나 최근의 연구가들은 대개가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을 하는데 니이젤이후 더욱 보편화되었고 이러한 해석적 경향은 명백히 칼 바르트 신학의 열매들이다.

신학의 목표와 성경의 목표를 같이 해야 복음주의 신학 방법론이 나오는데, 성경의 목표(과녁, scopus)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글들은 많지 않다. 다루었다고 할지라도 대체로 “그리스도”가 목표라고 하는데, 여기서 문제는 그리스도를 구원론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식론적 차원에서 목표로 설정한다는 데에 있다. 말하자면 성경 저자의 의도를 사실 그대로 파악해서 믿고 구원 얻게 하는 해석적 원리가 확립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바르트 신학의 전제를 가지고 이해하다보니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라야 우리의 인식원리로 접근이 가능하다는 a posteriori 의 방법론을 취하고 있음을 본다.

사실 칼빈의 의도는 그리스도가 신앙의 목표라고는 하지만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그리스도를 함께 말하고, 또 그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 것까지 말한다. 성경자체를 목표로 함이 아니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함이 목표이다. 즉 성경 저자의 의도를 찾는 다는 것은 성경의 인간측 저자의 의도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의도를 찾는 것이다. 그래야 칼빈이 주장한 “믿고 구원받게 하는” 해석학적 원리가 세워지고, “신앙”을 일으키고자 하는 열심도 신학자에게 생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이 아니라 인식원리로서의 그리스도를 찾는 데에 목표를 두려는 것이 현대 신학자들의 통상적 경향이다. 토랜스가 신학을 과학적으로 하자는데에 큰 관심을 가진 학자이지만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신학의 scopus로 하려는 의도는 그가 바르트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신학의 과제를 지나치게 인식론에 둔 느낌을 준다. 이에 대해서 케빈 샤프(K. Sharpe)는 토랜스가 바르트적으로 기울었다고 비판하고, 왜 “성육신”이 그토록 신학작업에서 탁월하고 강력하며 의문의 여지없는 역할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제기한다. 만약 토랜스가 “성육하신 그리스도”개념을 과학적 신학을 위한 존재론적, 인식론적 기준으로 삼았다면 바르트와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맥그라스도 토랜스의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으나 토랜스가 바르트의 성육신 신학을 넘어서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결국 자신도 과학적 신학에 대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토랜스를 따르게 된다. 맥그라스는 토랜스와 마찬가지로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의 신학을 선호하며, 그의 방법론을 따르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아다나시우스가 그의 저서에서(Contra Gentiles, 40) 말한 대로 성육신한 그리스도 사건으로부터 구원론적, 인식론적 근거를 찾았기 때문이다. 맥그라스는 그리스도 중심이라야 과학적 신학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다음의 4 가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역사적 출발점이며, 둘째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계시하며, 셋째로 그가 구원의 담지자(bearer)이며, 네째로 구속받은 삶의 양식을 정의하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적 신학은 성육하신 말씀의 논리학에 근거되고, 지배되며, 기초를 두고, 안내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과학적 신학이란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대의 주장도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로쏘(H. W. Rossouw)는 그의 논문에서 칼빈이 말하는 성경의 목표는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목적을 찾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것(apud se)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구원의 내용을 아는 것이라 했다. 그는 성경의 목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시는 일이라고 말했다. 또한 엥겔브레트(Engelbrecht)도 solus Christus는 하나님의 전체적인 구원의 계획에서 떨어져서는 안되며, 3위1체의 맥락에서 떠난 그리스도는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아버지 없는 그리스도 중심성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스도만”이란 것은 축소주의에 떨어진다고 그는 경고한다. 그는 칼빈에게 있어서 전 성경의 목표를 그리스도로 삼는 것은 잘못이라 하고 오히려, 율법과 선지자와 그리스도가 다 동일한 구원의 담지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칼빈의 신학을 “구원 중심”보다는 “창조”중심으로 해석하여 성육신이란 죄 때문에 필요할 뿐이고, 죄가 제거된 후에는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스런 극장이 될 것이라 하고 이것이 말씀(Word-Christ)의 목표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어떤 해석이 칼빈의 방법을 바로 파악한 것인가? 우리는 칼빈의 글에서 다양한 주제들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일견하여 보면 어떤 중심점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최근에는 칼빈 연구가들이 <기독교강요>만을 다루지 말고 주석과 편지와 다수의 소 논문들, 그리고 학자들의 연구 논문들을 풍부하게 취급하자는 주장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 자신이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의 “독자에게 드리는 글”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나는 지금 나오게 된 이 순서대로 배열되기까지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고 하였고, <기독교강요>의 목적은 순수한 경건의 교리를 보존하여 교회를 유익하게 하려는 것이며, 성경에서 “복음”을 찾게 하며, “신앙”을 일으켜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하나님을 경외케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칼빈의 신학 방법은 바르트식의 “인식론”을 구축하기 위한 논리의 통일 개념으로 “그리스도”만을 찾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죄인에게 말씀을 듣게 하여(교회의 복음 사역) 복음신앙을 낳고, 증대시키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어(벧전 1:21),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어 영생 복락에 들어가는 일이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영적인 사실들이 과학적으로) 일어나게 하는 방법이다.

칼빈에게는 신학함에 있어서 성경이 증거 하는 내용들을 물리적 영역이건, 초자연적 영역이건 사실 그대로 취급하는 것이 중요하였고, 그것이 과학적 태도였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된 실재를 글로 표현하기는 힘들고, 그러나 그 실재성은 분명하므로 부득불 제유법(synecdoche)을 사용하였다. 신학이 단어연구에만 집착하게 되지 않고, 또 언어유희에 빠지지 않게 하며, 단지 개념적 접근만을 하지 않도록 하려면 이와 같은 제유법이 필요하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용 중에는 지상의 차원들을 넘어서는 초자연적, 형이상학적 세계를 언급하신 부분이 많은 까닭이다. 천사, 마귀, 천국, 지옥, 성령, 내세의 삶, 상급과 심판, 영생과 하늘의 친교 등은 19세기 이후의 서양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이성”으로 해석하려 했던 성경의 진리들인데, 칼빈은 이 실재들을 그대로 “사실 자체”(res ipsa)로 취급한다. 즉 단어와 논리보다도 “문제” 자체와 “사실”자체를 있는 그대로 다루려고 하였으므로 이것이 칼빈 신학의 과학성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를 논할 때에도 바르트나 토랜스나 맥그라스가 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신학의 인식원리로서 파악하고 그 중심점을 통해서 논리의 일관성을 잡아 자연과학과의 충돌을 피해 신학을 과학적이 되게 하려는 것과는 다르다. 칼빈은 그리스도를 “사실 그대로, 즉 있는 그대로”, 다시 말해서 그분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한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계시하신 그대로 알자는 것이다. 그래야 “그리스도 밖에는 알 만한 가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그분 그대로(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자는 하늘의 모든 유익을 다 파악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용어 가지고 싸우지 말고, 문제 자체를 가지고 논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소 부정확한 말을 쓰더라도 경건이 유지된다면 사실 자체를 그대로 다루는 것이 신학의 바른 방법임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의 과학적 방법이란 성경이라는 data를 공정하게 다루고, 사실성 있게 취급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서양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성경이 증거 하는 초자연적 실재들을 도덕적 개념으로 대체하거나(Ritschl), 아예 부인하거나(Bultmann), 실존화(새로운 관념으로)하는 (Tillich) 방법이 아니다.

위에서 우리가 주로 비판한 바와 같이 칼빈의 신학을 현대인의 사고, 즉 경험과학만을 과학이라고 생각하는 이성주의에 맞게 그리스도를 인식원리로 삼으려는 바르트적 해석은 “그리스도”를 하늘의 영광을 가져오신 분으로, 또 지금도 하늘에서 지상의 교회에게 회개와 이적의 “능력”을 베푸시는 살아 계신 주님으로 논하는 칼빈의 신학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더구나 신학이 과학적이 되려면 “하나님”과 “죄인”과 “그리스도”의 관계가 “신앙”을 중심으로 “구원론적인 구조”를 가지고 정확하게 논해져야 하고, 실제로 믿고, 회개와 죄 사함이 하늘에서 약속한 대로 우리 경험계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의 신학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못하고, 단지 도덕 개념으로 설명되어 기독교적 가치관만 제시할 뿐이고(Ritschl, Harnack, Barth, Moltmann이 전개 방법만 다르고 결론은 다 같다), 기독교의 교리들이 실재성과 말씀이 신앙을 일으켜서 구원을 얻게 하는 발생적 요소를 잃게 된다. 여기서 신학이 바르트식으로 “말씀 사건”이 일어나는 데다 과학성을 두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서 실제로 믿음을 주고,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원리(principle)가 칼빈에게서 나타나는 과학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칼빈이 말한 대로 기독교가 돌아가는 돌쩌귀(hinge)인 “이신칭의” 교리를 중심진리로 보지 않고, 각 신학자가 나름대로 결정한 특정 개념을 기독교 전체를 해석하는 기준으로 생각한 잘못도 지적해야 한다. 예를 들면, 칸트(Kant)의 “양심”(良心, conscience), 쉴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의 “신의식”(神意識, God-consciousness), 리츨(Ritschl)의 “하나님 나라”, 하르낙(Harnack)의 “하나님의 우주적 부격(父格)과 인류의 형제애”, 바르트(Barth)의 “말씀” 등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신학자가 자기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서 기독교를 대표한다고 생각하는 어떤 의미 있는 진리체계, 혹은 가치체계들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그들이 설정한 중심성이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 합치하고 있는 가 하는 것이다. 만약 “잘못된 중심”을 설정해 놓고 그것이 기독교 진리의 전부를 대변하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비과학적 신학이 된다. 성경의 중심진리는 “이신칭의”교리와 이에 묶여있는 “성화”의 교리이다. 왜냐하면 이 진리는 성경의 목적에 부합하며 역사적 기독교회의 정통 신조들의 주요 주장점과도 합치하기 때문이다.

한철하 박사에 의하면 칼빈은 서양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저들이 생각한 어떤 통일개념을 중심으로 기독교를 체계화하지 않고, 성경과 역사적 정통 신조들이 주장하는 중심진리인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영원한 유업을 중심 하여 summa로 잡고, 그것을 받쳐주는 각각의 교리들(partibus)을 토대로 해서 신학의 구조와 배열을 질서 있게 세웠다고 한다. 칼빈은 summa의 각 부분이 그 자체의 의미 때문에 질서와 배열이 가능한 것으로 하나의 체계를 세웠는데, 이 방법은 아주 과학적이며 칼빈만의 독특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방법은 자유주의자들이 잘못된 중심을 정하여 기독교를 설명하는 오류와 보수주의자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교리수호”의 맹점을 바로잡는 복음주의 신학방법의 표준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해야 신앙의 문법과 같은 교리 조항들이 그 어느 하나라도 실재성을 잃지 않게 되고, 자기 위치를 바로잡을 수 있으며, 각 교리들이 유기적으로 조립되어 “믿음”을 일으켜서(복음신앙) 구원 사건이 일어나고, 또 경외와 경건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산 신앙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V. 결론

이상에서 신학이 과학인가라는 문제와 신학의 과학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가하는 문제들을 살펴보았다. 신학을 하나의 과학으로서의 학문으로 이해하는 학자들은 많이 있으나 대체로 그들은 학문하는 활동의 주체로서의 인간이 논리와 합리성, 법칙, 체계를 추구하는 것과 사실자체를 다룬다는 측면, 자료를 공정하게 취급하고, 과학이 연구하는 대상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점에서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신학이 영적인 과학이라는 사실과 기독교라는 종교가 목적하고, 그 종교가 가지는 진리의 고유성을 온전하게 발생시키는 면에 있어서는 학자들 간에 큰 차이가 나고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과학적 신학을 주창한 바르트의 경우 성경을 계시로 보지는 않고, 하나의 간증문서로 보기 때문에 이 문서가 실존적인 위기상황에서 말씀사건화가 될 때 비로소 계시가 된다는 것을 주장하여 이 사건화가 되도록 하는 것이 신학의 과학성이라고 했다. 한편 맥그라스는 그의 스승 토랜스를 이어받아 구속론보다는 창조론에 입각하여 자연신학적 접근에 공감하면서 신학이 과학적이 되려면 후험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이라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한철하 박사는 칼빈의 신학이 가장 과학적이라고 하면서 기독교가 목적하는 바 “신앙”을 발생시키고, 강화시키는 신학, 즉 칼빈 말로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내세(영생)를 열망하도록” 하는 신학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예수믿어 영생을 얻는 것이 그 목적이기 때문에 신학도 그 목적에 방향을 맞추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관점을 판단해 볼 때 신학의 과학성을 어디에서 잡아야 하는가가 문제의 초점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구자유주의자들은 이성으로 신앙을 해석하는 일을 과학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말씀 사건이 일어나야 과학적이라고 보았다. 맥그라스는 창조론에 입각하여 자연신학에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나섰다. 한철하 박사는 칼빈을 예시하면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는 신학,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학이라야 과학적이라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19세기 자유주의는 인본주의 신학으로 사색적 방법을 썼고, 바르트는 인식론 신학으로 말씀사건을 강조했으며, 맥그라스는 창조에 강조점을 두는 자연신학으로, 한철하 박사는 칼빈의 신학을 구속 중심으로 “신앙”을 일으키는 데에 초점을 두고 이해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방법론에서 합리적 이성의 판단을 진리의 기준이라고 본다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과학적이 될 것이고, 인간 실존의 위기상황에서 말씀사건이 발생해야 과학적이라고 본다면 바르트주의가 옳게 되며, 자연신학으로 복구하면서 후험적으로 하는 것이 과학적 신학의 길이라면 맥그라스의 시도가 정로를 제시하는 것이 되고, 기독교 복음이 목적으로 하는 영생복락과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신앙을 일으키는 신학이 과학적이라고 본다면 칼빈에 대한 한철하 박사의 해석이 타당성을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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