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란 무엇인가


. 들어가는 글


복음이란 고대 문헌에서는 좋은 기별에 대한 응답 또는 그 메시지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원래는 승리를 전하는 것에 적용되었다. 신약에 75회 이상 사용된 이 말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을 성취하심에 대한, 모두에게 열려있는 구원의 길에 대한 좋은 소식이다(1:14, 4:16이하). 그리스도의 도래에 관한 복음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들 속에 예기되었으며(3:8), 선지자들이 약속한 것이다(1:2). 복음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며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하나님이 능력, 그 자체이다(1:16) 바울은 복음을 자신이 전해야만 하는(고전 9:16) 거룩한 책임으로(딤전 1:11) 이해했다. 복음은 진리의 말씀이며(1:13),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가리워져 있다(고후 4:3,4).

 

그럼, 구체적으로 구약과 신약에서 복음에 대한 용어적인 의미와 연관해서 복음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복음에 대한 책임과 특권들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 구약에서의 복음에 대한 용어적 의미들


구약에서 복음을 의미하는 가장 일반적인 용어로 [바사르]"기쁜 소식을 선포하다"를 의미한다(왕상 1:42). 왕상 1:42의 관점에서 보면, 그 기본적인 의미는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다"를 의미하기보다 그 어조 자체가 기쁨의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승리를 고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용례다. 종교적인 용례로서의 변천은 사무엘상 31:9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블레셋 땅에서의 승리의 선포는 제의적인 성격을 지닌다. 병행되는 구절들은 시편 68:11과 시편 40:9들이다. 이 용어는 특히 이사야 40장 이하에서 사자가 시온에 이르러 구원의 시대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전 세계적인 승리를 선포한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52:7). 이 선포는 단순히 인간의 말과 호흡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선포를 통해 말씀하시며, 그 자신의 창조적인 말씀에 의해 언급된 것을 전달하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宣播)할지어다"라고 한 시편 96:2 이하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위대한 종말론적인 때가 이르렀고,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의 행위와 메시지는 민족들로 퍼져나간다. 실제로 이방인 자신들이 그것을 선포할 것이다(60:6). 사자는 하나님의 왕권 적인 지배를 강력하게 선포함으로써 제의적인 의미를 지니며, 따라서 선지자는 고난 받는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기름부음을 받으자로서 이러한 의미를 공유하게 된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61:1-3). 이러한 모든 주제들 - 종말론적인 대망(大望), 이방인들의 포용, 구원, 의와 평화와의 연결(95:1; 40:9; 52:7)- 은 결국 신약을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단어로는 [베소라]가 있는데, 이는 "기쁜 소식"(삼하 18:20,25,27; 왕하 7:9), "기쁜 소식에 대한 보상"(삼하 4:10; 18:22)을 의미한다.

 

. 구약에 나타난 복음의 상징들


영혼을 구원하는 생명의 복음은 예수님 오신 이후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창세기로부터 시작하여 구약성서에 이미 나타났음을 찾아볼 수 있다.

 

창세기에 나타난 복음 - 창세기 3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인류 역사상 남자없이 태어난 사람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면 그는 우리의 구주가 되실 수 없으며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우리 죄를 대속할 수 없다. 아담과 이브가 범죄 후 벌거벗은 수치가 드러나 무화과나무 숲속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양을 죽여 양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힘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다(3:20). 이것이 인류 최초의 복음이었다.

 

유월절 양 (12) - 바로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보내지 않을 때 하나님이 애굽 온 땅에 장자를 치는 심판을 내렸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흠없는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대문의 문 입방과 문설주에 바름으로 그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 여기서 심판도 면하고 출애굽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어린양의 피 때문이었다. 죽임 당한 흠 없는 양은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출애굽기 1213절에 "...그 피가....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 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이와 같이 장차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할 때 구원받는 유일한 표적은 마음의 문설주에 믿음으로 바른 예수님의 피 밖에 없다.

 

아사셀 양 (16:10, 20-22) - 레위기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아사셀 양을 잡아서 산채로 머리에 안수한 뒤에 모든 죄를 걸머지운 채 광야로 떠나보낸다. 그 아사셀 양은 짐승의 밥이 되어 피흘리고 죽는다. 레위기 1610절에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고 했다. 이것도 세상 죄를 짊어지시고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제단뿔 (27:2, 4:18,25,30,34, 8:15) - 구약의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보면 성막 안에 제단이 있는데 이 제단에는 네 모퉁이에 네 뿔이 있는데 그 뿔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금으로 쌌다. 그리고 제사장은 속죄 제물의 피를 제일 먼저 그 제단 뿔에다 바른다. 그리고 범죄 하여 죽을 죄인이라도 성전에 들어가 제단 뿔을 붙잡으면 죽이지 않았다. 아무리 죽을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만 붙잡는다면 살수가 있다.

 

기생 라합의 붉은 줄 (여호수아 2) - 여리고 성에 살던 기생 라합은 두명의 이스라엘정탐꾼이 위급할 때 숨겨 주어 살렸다. 그 때에 약속하기를 여리고성이 함락될 때에 "창문에 붉은 줄을 드리우면 너와 네 집안에 있는 식구들은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2:18) 그리하여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붉은 줄을 창문에 드리운 라합과 그의 가족은 구원을 얻었다. 라합이 의로워서 구원받은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예수를 믿고 십자가의 피 공로를 의지한 자는 다 구원을 받는다.

 

도피성 (4:42; 19:3, 4, 5, 11) - 신명기에 보면 실수하여 사람을 죽였을 때에 '도피성'이라는 곳을 만들어 그리로 달려가 숨으면 아무도 끌어내거나 죽이지 못했다. "이는 과거에 원혐이 없이 부지중에 오살한 자로 그곳으로 도피케 하기 위함이며 그 한 성읍으로 도피한 자로 그 생명을 보전케 하기 위함이라"(4:42). 예수님은 바로 구원의 도피성이 되신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영접하면 그의 십자가의 피가 그를 보호하고 구원해 준다.

 

놋뱀 (21:9) -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할 때 하나님이 진노하여 불뱀을 보내 물려 죽게 했다. 여기저기서 불 뱀에 물려 쓰러져 죽게 될 때 모세가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 드렸더니 응답하시기를 "놋 뱀을 만들어 높은 장대에 매달고 뱀에 물린 자마다 그 놋 뱀을 쳐다보게 하라"고 하셨다. 부랴부랴 놋 뱀을 만들어 매달고 쳐다보게 했더니 신기하게도 뱀의 독이 사라지고 다 살아났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314-16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시고, 제일 중요한 요절 16절을 말씀하셨다. 구약의 복음서라고 하는 이사야서의 53장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언한 장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복음의 핵심을 예언했다.

 

. 신약에서의 복음에 대한 용어적 의미들


신약에서 복음을 의미하는 용어로는 [유앙겔리조마이] "기쁜 소식을 선포하다"가 있다. 이 동사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주로 사용되며, 바울의 저작들 안에서도 상당히 자주 사용된다.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이 대망하던 마지막 때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한다(11:5).

 

이 메시지는 이 마지막 때의 완성을 전한다. 예수님의 행위들은 메시야 시대의 표적들이다. 나사렛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61:1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킨다(4:18). 그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전파된다(16:16). 8:1 은 예수님의 전 사역을 요약하고 있는데, 이 구절은 예수님을 그 나라의 사자라고 부른다. 그 분의 전 생애가 복음을 선포한다. 그분의 태어나심 자체가 기쁜 소식이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2;10,11). 그의 오심, 사역, 죽으심은 평화의 위대한 선포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2;14). 그는 죽은 자들에게까지도 복음을 선포한다고 베드로는 기록하고 있다(벧전 3:19, 4:6).

 

바울은 롬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의 이사야 52:7을 메시아에게 적용시키지 않고 복음의 사자들에게 적용시키는데,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열두 제자들을 파송하셨으며(9:1), 교회에 복음 전도의 임무를 주었기 때문이다(5:42; 8:12, 35, 40에서의 빌립). 그 메시지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전달된다(11:20). 바울은 특히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전도자로 소명 받는다(1:16; 15:20; 고전 15:1; 고후10:16; 14:10; 17:18).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3:8). 동일한 메시지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전달된다(1:15; 14:15).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그 메시지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예수 자신이며(1:16), 그의 수난이며 부활이며(벧전 1:11; 17:18), 그 나라이며(8:12),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구약이며(8:35), 말씀이며(15:35), 신앙이다(1:23). 이것의 병행 용어들은 설교함, 가르침, 증거함 등이다. 이것은 단순히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표적이 뒤따르는 능력을 가지고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선포는 하나님의 영의 능력 가운데 있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처럼 치료(4:23), 기쁨(8:8), 구원(고전 15:1-2), 중생(벧전 1:23)을 가져다준다.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이 행위는 구원을 제언하는 것이며, 동시에 구원의 능력을 지니는 것이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10:36)처럼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평의 복음이 선포되도록 만드셨다. 예수의 기사는 평화와 기쁨의 하나님의 좋은 소식이다. 10:7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장래의 통치에 대한 기쁜 소식을 구약과 신약의 선지자들인 그의 종들에게 선포하셨다. 1:19에서 가브리엘은 세례 요한의 출생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하며, 2:10에서 천사는 구주의 탄생을 알린다. 이 두 경우 모두에서 메시지는 복음이다. 왜냐하면 구원의 때가 왔고, 그래서 큰 기쁨이 선포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복음에 대한 용어는 [유앙겔리온]인데 이것의 의미는 "기쁜 소식, 복음"이다. 이에 대한 언급은 대부분 바울의 서신들에서 나온다. 그가 이 용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은 이 개념이 그 자신에게와 그의 독자들에게 확고하게 정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후 8:18; 4:3, 15에서 찾아 볼 수 있듯이, 이 용어는 선포의 행위를 언급한다. 그러나 고전 9:14은 또한 이 선포의 내용을 언급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이중적인 의미는 특별히 롬1:1에서 명백하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하심을 입었으니". 바울은 복음의 선포를 위해서 택함을 받았지만, 이 구절은 그 내용을 서술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들은 한 특별한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고전 15:1; 9:14; 2:2; 살전 2:2; 딤후 1:11; 1:5,23; 1:12). 1:1 과 고전 15:1은 그 내용을 요약한다. 그리고 롬 2:16; 16:25 딤후3:8을 참조하라. 1:1 이하로부터 우리는 이 선재하는 아들이 인간이 되셨으며, 열렬하게 기대되던 다윗 가문의 메시아이고, 그의 부활과 더불어 주로 높임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활은 죽음과 수난을 전제한다. 이것은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삶과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메시지로서 복음은 평화를 가져다준다(6:15). 그러나 심판도 또한 이 내용의 일부이다 (2;16)

 

또한 복음은 예수님의 진리와 공존하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섭리에 대한 계시로써 강건함을 가져다준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 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이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16:25, 26). 이것은 구약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복음은 선포에 있어서나 이 메시지에 있어서 모두 약속의 완성이기 때문이다(1:1).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구약은 복음에 속하며, 복음을 민족들에게 알려지도록 만든다(16:26). 새로운 것은 이 메시지가 빚어내는 결과이다. 만일 이 메시지를 단 하나의 단어로 요약한다면, 이 단어는 그리스도이다(15:19; 고전 9:12; 고후 2:12; 1:7; 1:27; 살후 1:8; 1:9). 왜냐하면 높이 들리우시고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는, 복음의 창시자이자 그 내용이기 때문이다.

 

. 신약에 나타난 복음의 의미들


복음은 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지만 이 사건은 일반적인 역사를 초월한다. 복음은 기사들과 가르침으로 구성된다. 또한 인간의 현실과 관련되며 그 자체가 살아있는 능력임을 보여준다. 고전 15:3"우리의 죄를 위하여"는 복음을 심판과 기쁨의 메시지로 만든다. 1:4"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일반적인 부활의 시작임을 보여준다. 복음은 구원의 역사에 대한 증거들이면서 구원 역사 그 자체이다. 왜냐면 복음은 인간의 삶 안으로 들어와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고, 공동체들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방식으로 포착될 수 없으며(고전 4:3), 이것을 근거해서 하나님께서는 설교자를 통해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시며(살후 2::14),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하시며,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신다(10:16; 고후 9:13). 우리는 복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의해서 평가될 것이다(살후 1:8). 복음은 빈 말()이 아니며, 복음은 복음이 말씀하는 것을 실현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창시자가 되시기 때문이다(1:1). 복음은 모든 곳에서 일하고 있다(1:5). 그리고 복음은 이방인들을 약속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3:6). 복음의 선포나 복음의 작용에 있어서 장애가 있어서는 안 되며(고전 9:12), 복음이 작용할 때에 복음은 완성된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15:18).

 

복음은 구원을 가져온다(1:13; 1:16). 복음은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시는 의로움을 계시하며, 심판과 은총을 연결시킨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두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6-17). 믿음은 복음을 통해 발생하며 복음을 향해 있다(1:27). 복음은 새로운 생명을 준다(고전 4:15).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된 생명은 복음을 통하여 현실로 된다(살후 1:10). 복음은 어떤 것의 현재를 미래와 연결시키며(1:5), 따라서 희망을 완성하는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세워짐(22)}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1:23).

 

복음이 선포하는 것을 실현하는 복음은, 그 자체가 구원을 지칭하는 용어가 될 수 있다(살전 2:8). 복음 안에서의 교제는 복음전도 안에서의 협동만이 아니라, 복음이 가져오는 구원 안에서의 교제이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광은 복음 안에서 빛난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고후 4:4). 그리스도는 복음 안에 스스로 현존 하신다 (살전 2:12; 1;10; 1:27).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감옥에 갇혔다(9, 13). 복음은 복음의 동료들처럼(고전 9:23) 우리에게 섬김을 요구한다(1:23). 복음은 바울이 로마서 15:16에서 말하는 바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 하게 하려 하심이라" 제사장적 섬김을 바치는 제의적 기초이다. 그러나 선택과는 달리 복음은 로마서 11:28에서는 구원의 질서이며, 에베소서 6:19에서는 선포된 신비이다.

 

바울은 "우리의"(고후 4:3) 또는 "나의" 복음 (2:16)을 언급하기도 하고, ""가 전했던 복음을 언급하기도 한다(고전 15:1; 1:11; cf 2:2). 이것은 바울이 특별한 복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한 복음만을 공유했다.(1:6). 그는 복음 선포를 위임받았기 때문에 복음은 그의 것이었다(살전 2:4; 딤전1:11). 그는 복음의 사자요, 사도요, 교사이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 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딤후 1:11). 그는 이방인들(1:16)에게 복음을 설교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1:1). 그는 복음전도자로서 그리스도를 섬긴다(1:9). 그는 복음의 동역자이며(고전 9:23), 제사장이며(15:16), 동시에 종(3:7)과도 같다. 그가 당하는 고난은 복음과 더불어 당하는 고난이다(딤후 1:8). 그러나 만일 그가 속박된다고 하더라도 복음이 속박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그가 옥에 갇히는 것은 복음을 옹호하고 확증하기 위한 것이다(1:7). 그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복음을 발전시킨다. 그를 섬기는 자들은 복음을 섬긴다(2:22) 그는 복음을 통하여 디모데의 아버지가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또한, 복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는 율법의 올바른 방법을 가르쳐준다(딤전 1:11). 율법과 복음은 정반대 되는 것들이 아니다. 유대화를 주장하는 자들은 그들의 가르침도 역시 복음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율법의 선포가 된다. 바울이 율법에 대립시키고 있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약속이다. 약속은 율법을 예견하며 구약에서 조차도 용납의 참된 거가 된다.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게 되며 율법의 참된 목적을 열어 보인다. 바울의 복음은 다른 사람들의 복음과 동일한 것이다(1:11; 고전 15:1). 부활하신 주님은 복음의 창시자이다.(24:19) 그러나 이방인들에 대한 사도로서 바울은 율법과 복음의 문제를 대면한 사람이다. 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 관하여 자유로우면서도 율법을 지킨다. 바울 자신도 이렇게 하려고 한다(고전 9:20). 그러나 구원은 할례 자들을 위해서든 무할례 자들을 위해서든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2).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율법주의가 되는 것도 허용하지 않으시며, 또한 방종자가 되는 것도 허용하지 않으신다. 복음은 순종을 요구한다. 이것은 행위의 판단 기준이 된다(1:27). 우리는 사랑의 사역에서 적극적일 때 복음에 순종하게 된다.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고후 9:13)

 

존 스토트는 그의 저서 '로마서 강해-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복음-'에서 로마서 11-6절에 나와 있는 복음에 대한 여섯 가지 근본적인 진리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고, 명확하게 요약하고 있다. 복음의 근원, 즉 기원은 하나님 아버지이며, 그 내용은 칼빈이 "복음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 것처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다. 구약과 신약 성경이 이것들을 충분하고, 완벽하게 증거 해 주며, 그 범위는 모든 열방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우리의 당면한 목적은 사람들이 믿음의 순종을 하도록 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더 큰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여섯 개의 전치사를 사용해서 이 진리를 간단하게 표현한다면, 그 좋은 소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복음으로서(Gospel of God, about Christ), 성경에 따라(according to Scripture), 열방을 위해(for the nations), 믿음의 순종에 이르는(unto the obedience of faith), 그리고 그 이름을 위한(for the sake of the Name)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서술했다.

 

. 복음을 듣는 자들의 책임


이상에서 고찰한 복음의 용어적, 성경적 의미의 내용들을 통해 복음의 충분성과 편만성과 완전성과 유일성 그리고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 등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복음에 대한 인간들의 책임과 특권은 어떠한지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럼 먼저 복음을 듣는 자들의 책임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살펴보자

 

예수님은 영광 중에 재림할 것이며(14:62), 인간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자가 될 것이다(7:22, 23; 25:31-46).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인간들에게 그에 대한 그들이 반응을 결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1:15). 왜냐하면 그의 제의를 거절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며(8:34--38; 참조 마 7:13이하), 무시하는 것은 거절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며, 중립적으로 있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복음 못들은 것에 대해 핑계할 수 없음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점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인간 속에 있으며, 자연 만물에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했다(1:19,20). 또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살후 1:8)이 있음도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복음을 수용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인간됨은 이 의지를 기꺼이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하여,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어야 하는 문제는 위에서 충분히 설명되었다. 물론 우리는 이 복음에 대해 물고기가 물을 거부하고 육지로 나올 자유가 있듯이, 거절 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게 된다면, 이것은 불행하고, 어리석은 일이었음을 쉽게 깨닫게 될 것이다.(참조.14:1). 인간 스스로는 결단코 죄와 사망의 문제에서 벗어 날수가 없다. 죄는 인간이 지었지만, 생명과 영생은 하나님이 주셨다. 이 은혜의 복음만 받아들이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생명과 축복을 소유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과 형벌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일단 예수를 그의 삶과 마음에 영접한 후에는 새로운 책임들이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설교 속에는 많은 윤리적인 요구사항들이 들어있다. 안식에 대한 제공은 또한 순종이라는 새로운 멍에를 부가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의인화된 하나님의 왕적 권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에(7:21,24; 7:16이하; 14:10) 우리가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5:22, 28, 32, 39, 44; 7:24-27). 예수님의 제자들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나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겸손, 성결, 사랑 및 신뢰와 같은 바람직한 태도를 가지고 살 책임이 있는 것이다(5-7, 18).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안에서 하나님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하는데(5:3, 9, 10, 19, 20; 6:33), 이것은 그들의 인격이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반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8).

 

. 복음을 믿는 자들의 책임.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 속에는 윤리적 요구 사항들이 들어있다. 믿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받은 새로운 특권적인 지위는 곧바로 의로운 삶을 살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10). 고후 5:21; 1:22이하; 2:6이하; 2:11-14에서 발견되는 말들 속에 명백히 포함되어 있는 윤리적 의미들을 주목하라. 복음은 "축복된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딤전 1:11)이며, 그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이 이와 같이 말씀하실 때 인간이 청종하고 순종해야만 하는 것이다(고후 9:13; 참조 롬 1:5; 16:26). 믿는 자는 동일하게 "하나님께 합당하며"(살전 2:12),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1:27) 생활을 해야만 한다. 바울은 그의 윤리적 가르침 속에서 종종 그것들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사실들을 명백히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본질적인 사실들에 기초한 상호 관심(15:1-3), 겸손과 형제애(2:1-11), 용서(4:32), 부부애(5:25 이하), 거룩과 순결(6:4; 고전 6:15-20) 및 확신과 희망(고전15:20; 살전 4:13이하)에 대한 권면들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1:7). 그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6:1-11). 그러므로 그들은 거룩한 생활을 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것은 또한 다른 책임들도 포함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자들도 그 경험에 참여해야만 한다(8:17; 벧전 2:21). 그리스도는 복음을 가져오셨기 때문에 이제는 그 복음을 받은 신자들이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 해야만 한다(10:15; 참조. 52:7; 6:15; 딤후 4:5). 예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가르침 속에는 목적이 같은 것이 명백히 나타나있다. 때때로 예수가 실제로 한 말들이 윤리적 교훈 속에 사용되고 있으며(. 20:35) 때로는 산상수훈과 현저한 유사성이 발견되고 있다(. 1:2, 4, 5,20, 22; 2:10, 13; 3:18; 4:4, 10 이하 5:2이하, 10,12).

 

끝으로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와 같이 미래의 심판에 대한 주장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복음에 본질적인 것이고(2:16), 믿는 자들은 항상 자신을 그리스도의 심판의 자리에 비추어 보며 살아야 한다(14:10; 고전 3:10-15; 고후 5:9이하; 벧전 5:4; 참조. 벧후 3:11이하).

 

. 복음을 믿는 자들의 특권


스트래천(R. H. Strachan)은 하늘나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왕국이기 때문에 예수는 하나님의 왕권과 아버지됨 사이에서의 목적과 활동의 동질성을 가르쳤다고 지적하였다 하늘나라에 복종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데려감을 받으며(14:6),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와(18:23-35; 2:5-11; 7:40-48) 평화(14:27)의 경험을 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보호와 공급(6:25-34; 7:7-12; 12:4-7, 22-32) 및 평생 동안 근심을 제거해 줄뿐만 아니라 그 범위에 있었어도 영원한(10:29) 사랑의 보살핌을 받는다. 예수의 복음이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 가져다준 하나님 아버지와의 깊은 관계는 [아바](14:36; 8:15; 4:6)라는 친밀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통해서도 반영이 된다. 예수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그의 제자들의 특권적인 지위에 대해서 말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데 필요한 능력을 제공해 주는 성령을 통하여 기대할 수 있는(11:13; 12:11이하; 14-16) 지시와 인도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또한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이 기다리는 미래의 축복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그 때 그들은 예수님 자신의 왕권의 영광스런 완성과(12:32; 22:29이하) 그의 아버지 집의 영원한 비밀(14:1-6)에 참여할게 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3:8) 그들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특권적인 지위에 대한 압도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한량없는 구원의 축복이,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3:22,25)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2:8; 참조. 20:24)에 의해 주어지는 값없는 선물(3:24; 6:23)이기 때문이다. 이 복음은 예수님이 그이 백성들에게 알게 하신 하나님의 비밀이다(6:19; 1:26).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구원의 능력(1:16)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1:13; 참조. 고전 15:2). 즉 그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고 불경건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은혜스러운 구원의 행위인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 준다(1:17; 3:26; 4:5). 의인, 즉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스럽고 거저주시는 사면을 강조하는 것이 특히 바울의 복음 메시지에 나타난 특징이다(예 롬 4:5 이하; 8:34).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성취된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해를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화해를 이루셨고, 화평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러 오셨기 때문이다(2:16,17; 참조. 6:15). 이 땅에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복음의 시작"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1:1; 참조. 1:1), 2:15-18("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의 문맥 속에 그리스도의 전체 사역이 "그는 화평을 전하였다"(참조. 52:7; 57:19)는 말로 요약되어 있다. 이 화평은 모든 인간에게 다 유익하다. 왜냐하면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경합시키며 양자에게 똑같이 구원이 주어지기 때문이다(3:6). 모든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영적 중생을 경험하고(벧전 1:3; 요일 3:9; 참조. 3:3),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택되는 특권을 알고(8:15이하; 4:5이하; 1:5), 존재의 새로운 질서에 들어간다(고후 5:17). 왜냐하면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으며(6:1-11),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들의 나라 안에 있는(1:13)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의 새로운 삶 속에서, 복음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힘 있는 소식을 가져다준다(16:25). 성령의 선물은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방식을 따라 살도록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8:1-17, 26이하).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그의 백성들의 존재와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동정심을 가지고 있는 완전한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도움과 보살핌을 항상 받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으며, 벧전 2:21-25은 그의 고통 받는 신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이해심을 묘사하고 있다(참조. 벧전 5:10). 그리스도인은 이미 아무것도 그것으로부터 그를 떼어낼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8:28-39), 그는 사후에도 동일한 보장을 받고 있다(고후 5:1-8). 그리스도는 전 우주의 영광 중에 칭송되며(1:20이하; 2:9; 1:15-17), 믿는 자들은 이미 그의 찬양에 함께 참여하며(1:3; 2:6), 회복된 우주 속에서 그의 미래의 주권에 함께 참여할 게 될 것이다(8:17-19; 고전 15:20; 1:5, 27; 딤후 2:12; 2:10).

 

. 나오는 글

예수님과 초대 교회시대에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은 저주였으며, 힘이 곧 진리요 능력인 로마인들에게는 무기력한 것이었으며, 지혜를 중시하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복음이라는 것은 아주 시시한 어떤 것으로밖에 또 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임을 선포했다.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으며, 생명을 걸고 이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며, 수고했다. 저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다고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인간이 의롭기 때문에 복음이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복음을 필요로 하지 않을 뿐이다. 이 세상에서 복음처럼 위대하고, 인류에게 절실한 것은 없다. 이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다. 복음만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시기를 열망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전달자요, 전파자요, 일군이 되어야 한다. 이 복음은 흘러가 한다. 또한 복음은 자라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복음에는 고난이 있다. 그러나 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야 한다. 반드시 주어야 하기 때문에 바울은 '빚진 자'로 자신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상기 내용들은 "아가페판 완벽 성경성구대전 3. 1988", "기독교 대백과사전 7. 1987, 기독교문사", "IVP 성경사전 1992", "신약성서 신학사전(킷텔단권원어사전) 요단출판사 1993", "로마서 강해, 존 스토드, 1999, IVP"외에 인터넷의 각종 정보를 참조하여, 발췌 정리한 것임>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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