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교리와 학문의 정체와 그 허상

 


성경이란 어떤 책입니까? 성경은 위대한 사상을 담은 책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 사상서와는 아주 다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위대한 철학자나 위대한 종교가들의 철학이나 사상을 추앙하고 믿고 가르칩니다. 성경도 위대한 사상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면 성경과 이 세상 사상은 같은 종류의 책인가요? 물론 성경도 전부 인간이 쓴 책이기 때문에 인간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고 이 세상 종교나 철학 사상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신학이라는 말로 이야기합니다하나님의 말씀을 곧 신학이라고 말해버립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학은 학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학문의 산물이 아닙니다. 이것을 철저히 구별해야 합니다.

 

⚫시편 1편과 2편 등 성경에서는 이 세상의 지혜와 술책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과 어떻게 다르며 서로 대적하는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세상 학문과 지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대적하며  결국 무리를 이루고 권력과 결탁하고 세력을 형성하여 이 세상 군왕들과 관원들이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에 사용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코 이 세상 지식과 학문이 무장이 해제되지 않은 가운데 하나님의 게시의 말씀과 동거할 수 없음을 성경은 철저히 가르칩니다. 시편119편에서는 계시의 말씀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얼마나 사모하고 중시해야 하는지를 잘 가르칩니다. 이런 가르침은 에수님의 가르침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유대교가 타락한 것은 성경 계시의 말씀 위에 타락한 인간 학자들의 신학을 둔 데에서 비롯합니다. 랍비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는데 압장섰습니다. 실상은 오늘날로 말하면 신학자들이 실제적으로 서기관들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력한 마귀의 도구노릇을 해 온 사실을 우리는 똑바로 정신차리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신학이 이 세상 학문과 결탁하여 계시를 공격하는 현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도 바울도 이 세상 학문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신약 성경도 보십시오, 성경이 어디 이 세상 철학과 학문을 옹호하고 받아들여도 좋다고 하던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에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그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경게시의 말씀을 혼잡케 하는 일에 대해서 성경은 강력하게 거부하고 타협하는 것을 금하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이런 거싯 가르침을 매우 강력하게 거부하라는 가르침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누룩 교훈을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물들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게 혼합주의 입니다. 성경의 이런 가르침과는 달리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뒤엎어서 오늘날에 이른 사실에 대해서 여기에서는 다루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 사상서와 분명히 다릅니다. 이 세상 사상은 사람의 지적 체계 안에 사람을 가둡니다. 그러나 성경의 사상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하시는 일을 가르치고 그 분과 교제하고 살아가는 삶을 가르칩니다. 페쇄적인 체게가 아니라 생명을 얻고 살아서 교제하고 살아가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성경의 사상과 이 세상의 사상은 아주 180도 차이가 납니다. 성경의 사상은 살아있는 생명의 사상이고 이 세상 철학과 학문은 죽어있는 체계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영감을 주장하고 가르칩니다. 이 점이 이 세상의 어떤 책과도 다른 점입니다. 성경은 스스로 주장하기를 인간이 쓴 인간의 책이지만 단지 인간의 산물이 아니라 성령께서 인간 저자를 감동하여 쓴 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저자도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책이므로 신적인 것이고 이 세상 다른 사상서와 구별됩니다. 그래서 거룩한 책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책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하나님의 특별계시라고 말합니다.

 

인간 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과 계획과 하시고자 하는 일 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정치와 경제와 사회 등 모든 분야를 다 망라하는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존재와 사건들을 통해서 영원 세계와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심오한 사상을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이처럼 구체적이고 다양하고 방대하게 종합적으로 모든 것들을 아우르며 모든 문제들을 설명하고 소망과 비전을 제시하는 계시야말로 이 세상 어떤 사상서들과 비교하거나 견줄 수 없습니다. 인간이 구원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을 주는 위대한 사상서는 오직 성경뿐입니다.

 

성경계시는 단지 이 세상의 사상서들과 달리 매우 구체적이고 역사적 사건들과 사실들에 바탕을 둔 사상이며 실제적인 수많은 인물들과 사회들이 서로 어울리는 방대한 스케일의 역사가 전개되어 가는 속에 위대한 사상이 담겨있습니다. 단지 저자의 독자적인 상상과 구상 속에서 궁리한 사상서와는 많은 차이가 납니다. 실제적 역사 속의 인물과 사건 속에서 위대한 사상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의 사상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상을 담고 있는 유일무이한 책입니다.  그 사상은 죽어있는  인간 지성의 페쇄적인 체게가 아니라 살아서 꿑틀거리며 생명력을 갖고 울고 웃고 교통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열려잇는 역동적인 사상입니다.

 

⚫신학이란 무엇인가?


①주체: 타락한 인간이 신학을 합니다. 자신의 주관과 시대대적 사회문화적 정치적 배경을 가진 인간의 산물이 신학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의 소속 집단이 있습니다. 학문하는 학자들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경험하고 배워 온 사회의 지적 영향을 안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상적인 전제가 학문을 하는 그 사람 속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결코 그의 주관에서 100%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학문에는 그가 몸담은 집단의 패러다임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고 상대적입니다. 비판을 받아야만 하는 특수한 역사 속의 욕망과 가치를 지닌 존재에서 나오는 산물이 신학입니다. 그의 지성 속에는 그 시대와 사회문화 종교적인 영향이 반드시 반영되어 있습니다.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습니다.


②내용

신학이 다루는 내용은 성경 계시를 다룹니다. 그러나 신학의 분야에 따라서 그 영역에 따른 주제가 있고 그 주제에 맞게 성경계시의 전체가 아닌 부분을 떼어내서 사용합니다. 따라서 신학이 다루는 내용이 성경 계시에서 따 온 재료를 주 재료로 삼지만 학문 하는 과정에서 다른 자료들도 가져와서 요리를 합니다. 그러므로 신학이 순수하게 성경 말씀만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③ 방법

신학하는 방법은 학문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은 서구의 학문을 차용해서 시작했습니다. 출발은 서양의 헬라철학의 방법론을 차용해왔습니다. 단순한 방법론만이 아니라 학문하는 태도, 동기, 내용 등 이런 모든 것들이 함께 작용하여 신학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철학은 곧 학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인문학이나 자연과학 등이 모두 철학에 다 포함되는 시대입니다.그러니까 이 세상의 철학, 학문의 칼로 성경 게시를 칼질해서 계시를 철학적인 학문의 언어 개념으로 해석하고 가동해서 재조립한 것이 신학입니다. 그러니까 계시를 철학이라는 칼로 난조질해서 자신의 구미에 맞게 요리해서 내 놓은 것이 신학입니다. 그 신학을 가지고 다시 만든 것이 교리 입니다. 그러니까 신학 속에는 철학의 방법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모든 것들이 필요에 따라서 다 작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론상으로 보면 철학과 계시가 혼합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계시가 철학이라는 칼에 의해서 난도질 당하는 운명입니다. 비유하자면 철학이 자신은 신학의 시녀로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계시와 신학을 일치시켜버립닏. 계시와 신학은 분명히 다른 것이거든요. 그러면서 게시를 자신의 칼로 사정없이 쥐어뜯고 난도질해서 피를 빼고 완전히 죽여버립니다. 계시의 본질을 죽이고 철학의 본질로 그 논리성, 실증성, 객관성, 보편타당성 등을 이야기해 가면서 차거운 추상화된 개념의 언어로 바꾸어서 내놓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살아있는 생멸력이 제거해버리고 죽어있는 폐좨적인 언어로 가공해서 내놓는 것입니다. 그러고서 그럴듯하게 잘 포장합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신을 높이고 존경하고 존중하는 언어로 내놓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정체를 드러내어 신학이라는 학문까지 대학에서 내쫓고 그런 사태가 발생하지만 처음에는 아주 말로는 왕으로 대접해주고 자기는 종으로 자처합니다. 아주 무섭고 간교한 마귀의 농간입니다. 이 무서운 마귀의 속임수가 이 신학 속에는 담겨 있습니다. 사전을 보십시오. 학문이란 이런 것이라고 얼마나 속입니까? 그러다가 이 세상 철학자들은 스스로 안에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과연 학문이 가치중립적인 것이냐 진리를 말하는것이냐 결국 자기 정치적 욕망과 주관적 가치가 담겨 있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인데 절대적이고 개관적 진리로 가장했다고 철학 학문 스스로 세계 내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성찰이 있어서 오늘날 철학 학문의 세게에서 옛날 처럼 자기 주장을 못합니다. 이렇게 이 세상 철학과 학문의 세계에서는 정체가 폭로되고 그 가면이 벗겨져 있는 상태인데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라는 종교 속으로 들어와서 자리잡은 신학은 마귀의 수중에서 자기 반성은 커녕 아직도 계시를 갖고 놀면서 자기 정체를 숨기고 있습니다. 21세기 오늘날 까지 무식한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는 이미 정체가 밝혀진 학문의 정체를 신학에는 적용하지 않고 있는 바보들입니다. 무식한 자라고 노골적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보통 말하면 안 들으니까 심하게 욕이라도 해야 정신을 차릴까요? 그만큼 영적으로 살아잇고 민감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마귀에게 사로잡혀 이 세상 사람도 다 아는 그 거짓에 사로잡혀 신학과 학문의 정체를 모르고 거기에 사로잡혀서 마귀에 조롱당하고 살아가면서도 자신들이 정통리라고 자부하면서 신학과 교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강하게 몽둥이로 내려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만큼 어둠에 사로잡혀서 보통 점잖은 말로 하면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이처럼 교회들이 집단적으로 마귀에게 사로잡히면 둔감해집니다. 그래서 제가 도적놈, 사기군들이라느 말도 합니다. 그렇게 심한 말을 해야 정신 좀 차릴가요? 너무나 그 세계 속에 사로잡혀 있어서 영적으로 지적으로 마비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④신학이 난도질해서 계시에서 제거해버린 것들이 무엇인가?

 신학이 철학의 칼로 계시를 난도질 해서 제거해버린 것이 영적 생명력입니다. 신학을 계시와 동일시하고 실상은 계시 위에 서버렸습니다. 그러면서 그 일을 시도하는 신학자도 성경 위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상은 사람인 신학자가 성경 위에 군립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랍비들이고 서기관들 아닙니까? 그들이 만든 교리와 제도가 유대교를 장악했고 그 교권주의 제도를 통해서 에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또 사도와 교회를 박해했지요. 그것이 교회사에도 반복되는 것을 아시지요? 신학자들이 교회를 주도합니다. 성도들 위에 군림합니다. 바로 도적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성령님께서 교회의 실제적인 왕좌에서 쫓겨나서 수호신으로 전락합니다. 구데타가 서서히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콘스탄틴 대제가 교회를 장악하기 이전에 이미 교회는 성직자들과 그들의 신학과 교리와 제도르서 마귀의 수중에 들어가서 서서히 부패한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 과정이 슬그머니 서서히 진행되었기 대문에 교회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당한것이지요, 개구를 물에 넣고 서서히 끊이면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완전히 당하는 것처럼 교묘한 마귀의 전술에 교회가 휘말려 그만 감족같이 교회가 세속화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후에 가서 교회제가 되고 중세 부패한 것들이 드러나니까 그 때에야 교회가 타락했다고 말하는 데 그것은 웃기는 자들의 이야기이고 이미 전쟁에서 교회가 패배한 것이 오래됩니다.


결국 이렇게 신학이 계시를 난도질해서 게시의 생명력을 제거하고 그래서 계시가 가지고 있는 유기성, 신비성, 생명력, 역동성, 서사성, 서정성, 심미성, 언어의 일상성, 역사성, 영광의 무게와 매력, 온도, 맛과 색과 분이기 언어의 개방성 등 다양한 요소들이 제거되어 버립니다. 성경이 담고 있는 주제들과 내용이 얼마나 다양하고 풍부합니까? 무엇보다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신학적 논쟁에 의해서 설명이되고 해석이 되는 주제로 전락하여 자신을 주권적으로 계시하시는 주님은 무시되어버립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방법으로 자신을 게시하셨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시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닙니까? 하나님으 아는 일이 제일 우선 중요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알도록 계시의 말씀 전체를 주셨단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부지런히 성경의 방식으로 연구해서 경외하는 마음으로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대신 이 세상 철학의 방법으로 계시를 난도질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에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논하면서 정치적인 싸움을 벌입니다. 얼마나 개자식들입니까? 이런 데에서는 욕을 바가지로 해야 합니다. 이 도적놈들이 하나님을 위한다고요? 그런데 자기들은 굉장히 하나님을 위한다고 떠들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계시의 말씀을 무시하고 이 세상 철학으로 삼위일체를 옹호하고 에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옹호하면서 교회를 말아먹고 에수님을 수호신으로 전락시켜요? 도적놈들의 간교한 술책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교회가 지금도 한심합니다. 아직도 역사를 논하는 사람들이 이 점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죽어있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실상은 신학에 의해서 하나님이 철저히 농락을 당한 것입니다. 삼위일체 논쟁 종교회의를 하고 종교회의에서 어떤 사람들의 주장을 정통으로 인정해주고 이 짓이 무엇하는 것입니까? 성경계시를 무시하고 어디 왕제가 진리를 결정하고 논하는데에 끼어듭니까? 그리고 신학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게시를 철저히 무시하면서 주님을 옹호해요? 실제적으로 그들 자신이 교회위에 성경위에 군림하여 타락한 이 세상 지성으로 마귀의 앞잡이 노릇하면서?


신학과 교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신학자들 성직자들 교회 제도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판단할 수 잇는 역사적 사건들과 자료들은 흘러넘칩니다. 다만 사람들이 관심이 없고 세뇌되어서 볼 힘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서서히 라틴어를 내세우면서 히브리어, 헬라어는 사장되고 그러니 원전말씀이 번역본으로 대체되고 성경을 교회에서 빼앗아 가고 성경이 사라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계시의 말씀이 완전히 묻히지요. 다른 언어로 번역하려니까 화형시키지요? 종교개혁자들이 성경 제일주의를 내세웠고 성직자들이 원어 연구를 했지만 칼빈도 루터도 원전보다는 그들의 신학이 앞서는 것을 성경해석에서 봅니다. 그래서 개신교마저도 원래의 순수한 복음으로 돌이키는 데 실패했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 온 기독교는 교파주의 기독교가 대부분이이지요. 우리도 그 속에서 배우고 자란 것이 아닙니까?


그런다 보니까 성경을 신학교에서도 무시하지요? 성경 원어를 위해서 히브리어 헬라어를 먼저 배우고 먼저 원어주해부터 가르쳐야 하는데 성경원전은 철저히 무시되고 교파신학으로 무장시킵니다. 그리고 번역이 문제가 있지만 그것만이라도 먼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운 후 신학하는 것이 아니고 신학부터 가르치고 성경 교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교회도 성경에서 교회를 어떻게 가르치느냐가 아니라 자기 교파의 교회관을 가르칩니다. 이렇게 철저히 교회가 성경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대해서 성경이 가르친 것을 성경의 방식으로 알려고 하는 것도 없어요. 조직신학을 통해서 있는 것마저도 잘 안가르칩니다. 그래서 실제로 하나님을 교회가 잘 모르고 실제로 살아계시며 교회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단체제 속에서 목사들에게 이용당하는 바보 수호신으로 가르칩니다. 교회에서 왕으로 직접 통치하시고 자신의 뜻을 알리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교회가 공적으로 주님의 다스림을 연구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안합니다 왜냐? 안 해도 되도록 법이 있거든요. 목사가 판단해서 결정하면 되고요. 재직회에서 의논해서 결정하면 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연구할 필요가 없게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은 체제가 바로 마귀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을 교회에서 내 쫓아내려는 작전에 교회가 걸려서 반역을 시도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교파교회는 껍데기만의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셔야 그것이 교회이지 교회의 공적인 활동 속에서 하나님의 직접 통치를 확인하기 위한 연구와 확인의 작업과 절차도 없이 목사나 장로 제도화된 조직 체제로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살아게신 분으로서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직접 다스려야 그것이 교회이지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실현되지 않고 사람과 교리가 완노릇하는 것은 교회가 실제로는 아닌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이점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신학과 교리는 상대적인 것이고 인간의 산물로서 어디까지나 참고로 할 것이지 그것을 성경의 권위로 승격시켜서는 절대 안 됩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독소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 말씀을 공격하는 독소를 우리는 제거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신학과 어떤 교회의 교리, 신앙고백도 성경 위에 두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사람이 말씀 위에 서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설교도 교리도 그 어떤 것도 성경 말씀으로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은 언제든지 지적하고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권세가 성도에게 있습니다. 성직자(실상은 모두가 성직자임)들이 모든 문제를 결정해버리고 성도들의 비판을 막고 언로를 차단하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단 헌법과 법과 제도들이 성경에서 벗어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오도하고 있습니다. 결코 참 성도들은 이러한 거짓된 실체들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는 그런 것들을 만들고 교회 성경 위에 그것들이 군림하도록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 정체를 똑바로 아십시오!


다시 강조해서 말합니다. 신학은 어디까지나 오류투성이인 인간 신학자가 어떤 전제와 목적의식을 갖고 성경의 가르침을 이용해서 자기 나름대로 성경의 어떤 부분과 주제에 맞춰 개념화된 언어를 사용하여 추상적으로 체계화한 것입니다. 성경의 지식을 가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신학과 성경계시의 말씀을 결코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인간의 지성활동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단 성경은 일반 사상서와는 다릅니다. 철학자들이나 학자들이 인간과 사회와 역사와 문화 등 삶의 전 영역에 걸쳐서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고 세워서 가르치는 그런 철학 혹은 학문과는 다릅니다. 성경은 사람이 만든 이념, 사상도 담겨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성경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는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의 지성활동을 보여줍니다. 인간 일상의 언어로 서술한 인간 지성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철학 사상 학문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계시의 진리를 가르쳐주며 그 안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나라 경영에 대한 사상을 담은 책입니다.

 

계시와 학문의 차이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되 자연계시와 특별계시 두 가지 방법을 다 사용하십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자연과 인간사회, 역사를 보고 깨닫고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진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계시입니다. 성경에는 자연계시에 해당하는 내용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영감으로 된 특별계시로서의 성경은 자연과 사회에 대한 통찰을 하더라도 영감으로 된 것이므로 자연인의 통찰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통찰력이 들어가 있습니다. 전도서라든지 잠언과 같은 책에서는 사람이 자연과 인간의 세계를 통찰하면서 자연인이 깨닫지 못하는 신적 지혜를 제공합니다. 그런 점에서 분명히 인간의 지성활동의 산물로서 위대한 사상과 교훈, 지혜를 담고 있으면서 그 이상의 것을 담고 있습니다. 다른 이야기나 율법 역사 시가 예언 등 다양한 장르의 책들도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적인 통찰력이 담겨있고, 신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욥기에서도 보면 사람들의 지성활동의 산물로서 여러 대화가 전개됩니다. 그 뒤에 하나님의 개입이 나타나고 이것을 통해서 깨달은 신앙의 고백이 나옵니다. 일률적으로 계시가 이런 방법으로 주어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계시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경계시는 서양이나 동양의 철학자들이나 종교가로 일컫는 사람들이 깨달음이나 사상을 진술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실 안 믿는 불신자들의 세계는 어둠의 영들이 지배합니다. 그런 점에서 위대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석가모니, 공자, 노자, 장자 등의 사상들은 어둠의 영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사상은 하나님의 진리를 공격하는 무장된 사상이며 인간 지성활동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와는 충돌되며 다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공격하고 서로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서양의 철학, 과학 등 서구지성의 산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학문은 그 동기나 방법 태도에 있어서 모두 하나님의 계시를 대적합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자연계시(일반계시)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산물로서 이것을 차용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교부, 특히 위대한 어거스틴을 보십시오. 그의 사상은 이 세상 철학 사상과 성경의 가르침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그 이후 유명한 신학자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계시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여 이 세상 학문, 철학의 태도와 방법 등이 계시를 공격하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작용한 것을 그들의 신학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변질되고 왜곡된 것을 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철학이나 학문이 무장이 해제되어 철저히 게시의 말씀에 용해되고 삭혀져서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혼합되면 오히려 독소가 되어 그 사람을 해치고 그 산물이 다른 사람들을 오염시키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유명한 신학자들이 내놓은 신학이 결국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혼잡하게 만들고 오염시켜 변질되며 아주 반신국적인 결과를 내놓는 역할을 하는 것을 교회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 학문과 철학, 사상, 지성활동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이것을 사용할 경우 오히려 인간의 지성과 인격이 세속화되고 타락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면 신앙의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계시의 말씀으로 키워야 합니다. 이 세상 사상과 사유방식으로 자녀들이 오염되기 전에 먼저 진리로 그들의 사유와 사상의 터를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언어는 매우 중요합니다. 언어를 통해서 사고하고 사상을 형성해 갑니다. 어려서부터 오염되지 않도록 계시의 말씀으로 인격의 기초를 닦도록(형성하도록) 가르치라는 것이 성경말씀의 가르침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지혜를 무시하고 신학자들이 이 세상 지식과 학문과 사상에 대한 통찰을 못하고 잘못 가르치니 교회 지도자들도 부모들이 자녀들을 게시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대신 이 세상 선생들과 양육자들에게 맡겨 양육하고 길러도 아무 가르침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잘못한다고 지적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신학교육을 이 세상 것과 계시를 양자를 혼합시켜 하다 보니까 신학이 오염되고 교리와 제도가 혼합된 것이 되어 이 세상의 것들이 신학교와 신학자를 점령하고 교회를 지배하여 결국 비유에서 가라지들이 무성하게 자라나서 곡식이 결실을 못하게 하는 것처럼 교회를 세속화시켜 왔습니다. 이것이 사탄이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오염시켜서 변질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서구교회가 여기에 걸려서 결국은 세속화되고 오염된 것을 종교개혁자들도 눈치체지 못하고 그것이 바로잡혀지지 않은 가운데에서 우리나라 교회에 신학과 교리가 지배하는 그런 왜곡되고 변질된 복음이 들어 온 것입니다. 그 대신 순순한 계시의 말씀은 전달되지 못하고 뒤로 팽개쳐지고 신학교 강단에서는 조직신학자들이 왕좌를 차지하고 신학과 교리와 제도가 지배하는 타락한 교회를 양산해 온 결과 오늘날과 같은 세속화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원인이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순순한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온전한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한 순수한 복음이 바로 전달되지 못하고 변질된 복음이 진리인 것처럼 가르쳐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된 사람들도 신학에 점령되어 버립니다. 먼저 계시의 사람이 되도록 성경 원전의 말씀을 철저히 가르쳐서 이 세상적인 사고방식과 이 세상 사상과 정신으로 오염된 지성과 감성 인격을 치유하고 말씀으로 채워서 거룩한 성경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우선인데 신학자들이 이것을 모르니까 신학부터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신학으로 해석하고 교리로 성경을 해석하니 결국은 계시의 말씀이 인간의 신학과 교리에 의해서 지배되는 설교와 가르침을 제공하고 맙니다. 결국은 그런 교회들을 보면 말씀과 성령의 직접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교단신학과 사람이 성경 위에서 군림하여 지배하고 그리스도는 수호신으로 전락되어 있는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아주 무서운 지성의 타락입니다. 이것이 신학자들로부터 오는데 사람들은 그만 학문의 탈을 쓴 이리, 늑대들을 하나님의 사자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철저히 우선 계시의 말씀으로 가르쳐도 우리의 일상의 삶이 이 세상의 것으로 가득차서 심하게 오염되어 있는데 거기다가 신학과 교리와 제도 자체가 하나님의 것을 가장한 마귀의 도구 역할을 하므로 정통교리와 정통신학의 이름으로 성경을 내세우면서 실상은 성경을 깔아 뭉게 버리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교회에서 축출하는 반역을 아주 당연하고 합법적인 것으로 정당화 합니다. 그래 놓고도 아무 죄의식을 갖지 않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오래 전부터 발생해 온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타락해 온 근원적인 이 현실을 바로 보고 바로잡지 않는 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원어 말씀을 바로 보고 바로 해석하여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급한 일입니다. 오늘날은 철저히 신학에 의해서 계시의 말씀이 왜곡되고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아도 성경의 참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지요. 성경을 제대로 볼 눈을 신학이 막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알려면 계시의 말씀을 직접 원전으로 읽으면서 계시의 말씀을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씀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에 까지도 신학의 영향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무서운 영적 전쟁의 실상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말씀과 씨름하며 계시의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 오염된 신학으로 인한 우리의 왜곡되고 오염된 것을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학과 계시의 차이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신학과 교리와 제도들의 정체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왜 이런 것들을 제가 그토록 많이 거듭 반복해서 말하고 도 말하고 지겹도록 언급하는지 아시겠지요?


마귀가 이런 것들을 사용해서 교회를 공격하고 하나님을 배척하고 제대로 알지 못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마귀의 도구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신학교가 무서운 곳입니다.

하나님,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나 자신을 바로 알려면 이 길 밖에 없습니다. 이미 내 자신이 철저히 오염되고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해서 여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성경원전 연구와 성령님의 깨우쳐주시고 치료해주심을 의지하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가르친 순수한 복음 순수한 성경계시 말씀 중심의 세계를 알고 그 길로 돌이켜야 합니다. 순수하게 성경이 가르친 하나님 나라 교회가 무엇인지 알고 거기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를 교회와 가정 우리의 삶 속에서 찾아 누리는 길을 우리는 가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먼저는 성경계시를 잘 배우고 익히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를 통해서 성경적으로 사고하고 지성활동을 하는 것을 익혀야 합니다. 이 세상 학문, 교육을 통해서 습득한 사고방식과 감정과 습성들을 치유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깊이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 속에 푹 잠기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어떻게 감정을 사용하고 세상과 우주만물들을 보고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성경말씀을 통해서 익혀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성경의 사람이 되고 먼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같이 사귀고 교제하고 활동하면서 서로 서로를 세워주고 치유하며 함께 변화해 나가는 그런 치유와 세움의 과정을 통과해야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설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일반계시로 주어진 것을 연구하는 이 세상 학문과 문화를 습득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일반계시는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오염되어 있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무장된 지식이며 언어이고 문화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그러한 것들을 무장을 해제시켜 사용해야지 그렇지 않고 바로 흡수하면 위험합니다. 성경은 그래서 어려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과 훈계로 지도할 것을 가르칩니다. 교회 교사를 교육하고 교회 직분 자들을 세우고 목회자 신학자들을 세우려면 이런 특별한 과정이 더욱 필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일반 성도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정화와 세움의 과정이 전혀 없이 신학공부 성경공부의 과정을 거치면 곧바로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인위적으로 다 이렇게 저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사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대다수는 이런 타락에 대해서 교단신학과 학문을 옹호하여 결코 집단적으로 회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런 지적에 대해서 오히려 이단 삼단으로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제 말이 틀린 것인지 자세히 서양의 신학과 학문에 대한 이런 저런 비판의 목소리들을 자세히 조사해서 들어보십시오. 이런 지적들이 옛날부터 있었던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냥 저 혼자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결과들을 교회사를 통해서 확인해보십시오. 훤히 보이잖습니까? 마귀의 활동이 얼마나 간교합니까? 나중에 시대가 지나니까 계몽사상을 통해서 노골적으로 정체를 드러내면서 서구 대학에서 신학은 존폐의 위기에 놓입니다. 그래서 슐라이어막허같은 타락한 신학자가 신학의 정당성을 옹호해주고 대학에 신학부가 남아 있잖아요? 그런 것입니다. 처음에는 시녀로 납작 엎드리다가 나중에는 정체를 드러내고 쫓아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신학으로 시작했던 유명한 대학들이 다 세속화되고 신학부도 세속화되든지 쫓겨나든지 그러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를 살피면서 우리는 꼼꼼이 점검하면 이런 것들의 정체가 분명히 보입니다. 물론 그보다 더 말씀을 통해서 분별해야지요. 말씀을 통해서 분별한 것을 역사를 통해서 확인해야 지요. 그런데 이런 지적 작업들이 없이 나름대로 감으로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감으로 이것이 분명히 아닌데 하고 심정적으로 그릇되엇다고 느끼지만 확실한 지성적 기초가 약하면 대안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저극적으로 교회가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이고 하나님을 어떻게 현실 속에서 알고 섬기며 살아갈지 분명히 구별이 되면 적극적으로 길을 가게 되는데 감으로만 살면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런 지적인 통찰력이 약한 성도들이 살아가기에는 참으로 헷갈리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교회라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들 신학자들이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아무 무장도 되지 않았는데 이 세상 사람들에게 집어넣어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녀를 영적으로 살해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교회지도자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교회를 잘못 지도하는 바람에 교회가 겉만 교회이지 실제로는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는, 생활로는 죽어있는 교회, 기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논리성도 체계성도 있고 개념화 추상화 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통 학문이라고 할 때는 상식적인 지식을 이성적인 지성활동을 통하여 논리적으로 체계화 합니다. 일반생활에서 널리 통용되는 지식을 상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을 합리성, 논리성, 추상성, 객관성, 보편타당성, 논리적 필연성을 가진 지식으로 가공하여 체계화하는 작업을 과학 활동이라고 하고 이의 산물을 과학이라고 말합니다. 철학은 이러한 과학적 지식을 좀 더 근원적이고 종합적인 체계를 갖춘 지식의 체계로 가공하는 작업을 철학이라고 합니다. 과학을 좀 더 근원적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연구하는 학문을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성활동을 학문 활동이라고 합니다. 과학, 철학에서는 명석 판명함을 추구합니다. 어떤 지성활동의 대상에 대한 명확하고 분명한 지식을 얻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 인식의 대상에 대해서 과학자, 철학자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객관적으로 보편 타당성 있게 인정할 수 있는 지식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과정과 형식을 중요시합니다.

 

경험과학에서는 실증성(검증성)을 중시합니다. 실험을 통해서 결과가 입증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현대에 와서는 학문의 진리의 조건으로 유용성이 제시되기도 합니다. 근대 과학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학문의 객관성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학문을 통한 과학 철학적인 지식은 가치중립적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특히 수학, 논리학, 경험과학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 가설이 검증이 된 지식은 진리라고 믿었습니다. 학문 특히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며 진리라고 철썩 같이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서구의 지성계를 압도했습니다.

 

그러나 근대사회에서 이러한 주장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사회에 들어와서 이러한 근대적인 신념은 무너졌습니다. 과학이나 철학 등 학문이라는 것이 절대적이고 개관적이고 보편타당성이 있는 진리가 반드시 아니라는 것이지요. 과학적 탐구 절차를 거친 지식도 인간의 주관에서 나온 산물이고 그것이 곧 진리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진리라고 인정받던 이론이 매우 제한적이고 부분적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사람들은 과학 철학도 상대적인 것이며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신학은 무엇인가요? 신학은 하나님의 순수한 계시의 말씀이 아닙니다. 기독교 초기 속사도들의 시대에 호교가들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사도 시대부터 이단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정부의 핍박과 유대인들의 핍박이 끊임없이 교회에 가해졌습니다. 사도들도 이 세상을 따났습니다. 당시 신약 성경은 교회에서 문서들의 형태로 회람되고 있었지만 정경으로 모아져서 읽혀지고 가르쳐지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마귀가 실제로는 성동격서의 전술로 양면에서 교회에 공격을 가한 것입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교회는 이방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이방인들 중에서 지도자들이 생겼습니다. 당연히 이방인 성도들 중에서 학식이 있는 자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사도들로부터 충분히 듣고 배워서 예수님으로부터 전수받은 진리의 터 위에 분명히 서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사정이 그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그리스 철학에 익숙한 지식인들이 하나님의 계시의 탁월함과 위대함을 바로 알고 충분히 계시를 몸에 익힌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철저히 교육을 받은 사도들을 통해서 철저히 계시 중심의 사유와 인격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아니라 철학. 이 세상 학문에 더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 세상 학문, 그리스 철학을 활용하여 기독교의 신학을 정립하고자 했습니다. 터툴리아누스 같은 이는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계시와 철학을 혼합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대세는 변증가들의 편이었습니다. 교회가 점차로 이방인들이 지배적인 교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히브리적이고 사도적인 계시 중심의 유산이 전수되지 않고 그리스 철학을 가지고 기독교의 가르침을 증명하고 변호하려는 신학이 탄생합니다. 그러니까 신학이 철학의 학문하는 정신과 태도와 방법론을 도입하여 그것으로 신학을 정립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혼란하고 어려움에 처하게 만들어 놓은 뒤 슬그머니 이런 사람들을 시용해서 교회를 정면으로 공격한 것입니다. 영적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마귀가 위장전술을 사용하여 감쪽같이 자신을 숨기고 하와에게 접근하여 공격한 것처럼 호교가들을 광명의 천사로 내에워서 그들을 통하여 계시를 사로잡는 신학을 정립하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신하기 하나님의 게시의 말씀을 때려잡는 무기가 되어 온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의 혼합적인 성격과 공격성은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신학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 덫에 걸려서 피해를 입으면서도 그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아주 조용히 이루어진 일이고 감쪽같이 진행된 일이지만 실제로는 무서운 마귀의 공작이며 교회에 대한 사탄의 공격이었고, 하나님의 게시에 대한 정면공격이었습니다. 사탄은 항상 속임수를 씁니다. 사기를 잘 칩니다. 사기꾼입니다. 호교가들은 교회와 기독교 신앙에 호의적이었고 헌신적이었습니다. 매우 도덕적이고 경건한 자들이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가는 교부들이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학문은 마귀의 손 안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학이나 논리학이나 물리학이나 이런 것들도 다 사람들의 마음과 지성활동에서 나온 사회적인 산물입니다. 거기에는 권력이 작용하고 사람들의 신앙, 가치관, 세계관이 들어가 있습니다. 언어활동 속에는 이미 그들의 신앙이 들어가 있습니다. 서구의 학문에도 그들의 이교적인 우상숭배적인 신앙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학문 활동의 산물인 수학이나 과학 철학 모든 학문이 불교나 도교 유교의 경전활동이나 그 산물과 결코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지적 산물들이 일반계시로서 사용되기 위해서는 먼저 성도가 하나님의 계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계시의 사람이 되어서 우리의 사상과 언어와 지성활동이, 우리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이 충분히 하나님의 사람, 계시의 사람으로 선 다음에 이런 것들을 무장 해제시켜 사용해야 하는 것이지 이런 과정도 작업도 없이 그대로 이 세상 학문이나 문화를 도입하여 사용하면 거기에 휘말려 듭니다. 교회도 충분히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치유하고 거룩한 사람들로 세워야 하고 그런 연후에 이런 세상의 문화유산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처음부터 이 세상 철학과 학문과 타협하고 결탁한 결과 신학 자체가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를 망가뜨리고 대적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교회는 기독교라는 종교적 형식을 갖추고 세력으로는 서양 사회를 지배하고 십자군 원정을 일으킬 정도로 거대해졌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은 수호신으로 전락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왜곡 오염되고 오용되고 맙니다. 그리하여 세속화된 기독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종교개혁도 근본적인 개혁을 하지 못하고 여전히 타협한 채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획기적인 변화를 한 것처럼 보이고 전쟁까지 하면서 엄청난 희생을 치뤘지만 실제적으로는 또 하나의 사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속임입니다. 종교개혁도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성경을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외치고 하나님 영광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구호대로 하려면 철저히 신학을 비판하여 신학의 정체를 밝히고 신학의 상대성을 인정하고 신학과 교리를 성경의 위에서 밑으로 내려놓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도화되고 법제화된 교회 정치 행정을 바로잡아 교권주의를 배격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권력과 결탁했고, 성직자주의, 교권주의, 제도주의를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여전히 이 세상 학문과 혼합한 신학과 교리를 그들도 성경 말씀 위에 놓았고, 교단과 성직자들이 제도와 법을 통해서 사람이 교회를 지배하는 정치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말씀을 통한 성령님의 직접 통치를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서구의 세속문화와 철저히 게시 중심의 문화를 구별하고 정화하고 변화시켜 나가는 작업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세속화된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오늘의 세속화된 기독교, 종교화된 기독교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지성활동에 대해서 가르치며 어떻게 언어를 사용하고 학문을 하며 살아갈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책입니다. 비록 사람이 기록하고 사람의 생각이 많이 들어가고 사람의 언어로 된 사람의 책이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감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철인이나 종교인, 위대한 사상가들의 책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지혜와 사상의 원천은 그들의 아비 마귀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성경의 사상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 학문의 소산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지혜나 학문의 산물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하늘과 땅, 하나님과 마귀의 차이입니다.

 

물론 비록 타락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도 보고 배울만한 요소가 있으므로 우리들은 이 세상 지혜와 사상서들을 우리가 보고 배우기도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학문 활동의 산물들을 이용하기도 하고 삽니다. 하지만 우리의 지혜와 사상의 원천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처럼 완벽하고 종합적이며 균형이 잡힌 사상서를 다른 데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진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영적 존재들 그리고 인간과 사회와 자연 학문 예술 등에 관한 종합적이고 균형이 잡힌 이런 가르침을 그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지혜로운 자는 바로 이 성경의 우물에 자신의 생각과 사상의 터를 잡고 이 우물의 물로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고 삶을 살아갑니다.

 

신학자들과 사상가들은 자꾸 성경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고 그것으로 교리를 만들고 교회를 제도화시켜 교회를 거기에 가두려고 합니다. 성도들을 구속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까지도 거기에 맞추도록 강요합니다. 하나님을 그 신학 사상 속에 가두려고 합니다.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짓이며 하나님을 대항하는 짓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가르친다. 성경은 학문처럼 연구하고 하나님도 그렇게 알려고 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성경과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가 열려질 때 그 때에야 진정으로 열려집니다. 진리를 알고 실천을 할 힘이 생깁니다. 성경의 사상은 어떤 인간이 만든 사상의 틀로 성도들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도록 가르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거기에 자신의 것을 첨가시키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성도들은 예민한 관찰력으로 막아야 합니다. 말씀을 통한 분별력으로 항상 분별해야 합니다. 사람을 100% 신뢰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겸허하게 진리 앞에서 배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거주하는 삶을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라고 가르칩니다. 자유롭게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된 삶을 가르친다. 그러나 인간의 사상과 윤리와 도덕은 가장 고상해 보이는 것 같아도 사실은 인간을 그 노예로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정교화 된 사상 체계를 만들어 거기에 거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고 살아가는자유로운 삶을 제시한다. 성경이야말로 모든 이념과 사상, 교리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기도록 해방하는 참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신학과 교리와 교단신학과 전통으로 오늘날 기독교의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세속화되고 말았습니다. 잘못된 신학과 교리는 도적주의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계시의 말씀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그 분이 주시는 말씀을 깨닫게 하고 진리를 적용시키는 통찰력과 지혜를 공급하심으로써 자유롭게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산다고 하는 것을 바로 교리대로 믿고, 교리대로 산다고 하는 말과 동일한 것으로 믿고 가르칩니다. 교리를 바로 우리가 믿어야 할 그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그러나 교리라는 것이 영감된 것이 아닙니다. 신학을 통해 정치적으로 가공한 것입니다. 성경 계시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교리를 만든 사람들이 성경에 충실해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성경계시를 이 세상 학문, 철학으로 연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이 세상 철학, 학문의 방법론과 정신을 도입하여 신학을 정립하고 거기에서 나온 것이 교리입니다. 교리는 어느 시대 특정한 교파와 그 지도자들이 모여서 합의해서 만든 것입니다. 거기에는 권력이 작용하고 이해관계가 작용합니다. 그 시대 그 사회 문화적 특성도 반영합니다. 지도자들의 권위주의, 엘리트주의도 들어있습니다. 이 세상 철학과 학문도 스며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리를 중요한 참고 자료로 비판해서 사용해야지 무턱대고 성경의 가르침과 동일시해서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전혀 틀림이 없는 교리의 명제도 그것 자체가 딱딱한 학문적 언어로 제시되어 생명력이 상실되어 있다는 점을 우리는 속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으로 신학적으로 가공되어 나온 산물임을 알고 계시의 많은 부분들이 삭제되고 죽어있는 언어로 제시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유대교처럼 기독교인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이 매우 어리석은 과오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위대함과 속성을 모르고 하나님의 계시를 탐구하는 데 이 세상의 철학, 학문을 이용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철부지들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른 사람들이 아닌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교회는 아직도 이 타락을 슬퍼하고 바로잡기는커녕 오히려 아직도 분별을 못하고 그들을 추앙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이 서글픈 현실을 우리는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유대교를 빗나가게 한 장본인들이 서기관들과 랍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위험성을 보았으면서도 오늘날 똑같은 실수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신학자 학자 교사들의 가르침, 유전, 전통, 교단, 잘못된 관습들입니다. 바로 다름이 아닌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만든 것들입니다. 교회의 교리를 만든 사람들이 교회를 무너뜨린 장본인들입니다. 처음에 이 일을 한 사람들이 호교가(好敎家, 辨證家)들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이다. 오리게네스, 클레멘트, 저스틴과 같은 사람들이다. 성 어거스틴도 어기에 해당합니다. 그들은 그리스 철학을 공부하고 그리스 철학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연구하여 신학을 정립하려고 시도한 자들입니다. 그들 이후로 교회의 대부분은 이 세상 학문과 계시를 혼합시켜 신학을 해 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 학문은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학문 활동도 인간의 삶의 활동입니다. 인간의 사회적 활동이며 정치 종교 문화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 활동의 산물도 그들의 세계를 반영합니다. 학문 활동의 산물 속에는 그들의 지성활동의 동기와 목적이 반영됩니다. 그들의 신앙과 가치관 종교가 반영이 됩니다. 따라서 서양 철학, 서양 학문 동양의 의술 학문도 다 무장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이 세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대적하는 마귀의 편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무장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를 공격합니다. 이 두 가지가 혼합될 때 그 결과는 뻔합니다. 두 적대적인 것이 혼합될 수 없습니다. 완전히 무장을 해제시켜 계시 속에 그것이 녹아들어가서 흡수되지 않으면 그것이 계시를 무장 해제시켜 오히려 게시를 변화시키고 맙니다. 그러므로 철학은 신학의 시녀이다라는 말은 실제로는 철학이 하나님의 게시를 갖고 놀면서 조롱하는 말입니다. 그 말을 쓴 당사자는 몰랐겠지만 실상은 계시가 조롱, 모독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신학은 어떤 상태에서 출발했는가? 이 세상 철학으로 계시를 무장 해제시켜 이 세상의 학문의 틀 속에 집어넣고 가공하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계시는 논리성, 체계성, 추상성, 보편타당성, 객관성을 지향하는 학문 철학과는 다릅니다. 명석 판명함을 추구하는 학문과 달리 계시 언어는 초월적 존재의 신비가 담겨있습니다. 인격적이고 일상적이며 존재의 영광과 무게 매력을 담아 표현하는 살아있는 역동적인 언어입니다. 언어가 존재의 신비를 다 담지 못하는 것을 고백하는 열린 언어입니다. 마치 언어가 존재를 다 담은 것처럼 말하는 학문의 폐쇄적인 언어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계시를 통해서도 우리가 부분적으로 희미하게 안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언어가 존재와 존재의 활동을 다 담지 못하는 것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러나 인간의 철학 학문의 지식은 권력 지향적이고 오만하고 인본주의적입니다.

마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장된 마귀가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마치 이 세상 지식이 음식으로 비유한다면 음식을 조리해서 냉장고에 넣어 식어진 것을 먹는 것이라면 계시는 바로 조리해서 만든 따끈따끈하고 습도가 있고 체온이 살아서 숨 쉬는 생명력이 있는 서사적 서정적 구조 속에서 다양한 문학적 형식으로 주어지는 살아있는 언어입니다. 겸손하고 열려있는 언어입니다. 생명력이 철철 넘치는 경건한 언어입니다. 영광의 아름다움이 살아있는 일상 언어입니다. 이것을 현미를 깍듯이 계속해서 논리적 추상적 개념적 객관적 체계적 언어로 깎아서 이런 것들을 영양분을 모두 제거해 버렸습니다. 신학이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한 교회의 이런 지도자들은 유기적으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교회, 성령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교회를 인간 지도자의 권력을 강화시키고 제도를 강화시켜 하나님의 직접 통치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세상 지성과 더불어 문화를 도입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같이 따라오게 되어 잇습니다. 병행합니다. 자유로운 복음의 진리를 이 세상의 도덕으로 바꾸었습니다. 도덕이 좋은 것 같지만 실상은 인간을 구속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도덕주의를 넘어섭니다. 성령의 인도와 힘주심에 의해서 인간의 도덕을 넘어선 새로운 생명의 발휘를 하는 행동과 삶입니다. 이 세상의 도덕과 다릅니다. 그런데 복음으로 나타난 삶과 이 세상의 도덕을 구분을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삶을 도독주의로 바꾸어버립니다. 이 세상 권력과 타협하게 하고 결국은 이 세상 문화를 도입 혼합시켜버렸습니다. 이것이 소위 서구 교회들이 간 길입니다. 종교개혁자들도 이 근본적인 면들은 개혁하지 못했다. 한국 교회에 전파한 기독교는 이렇게 진리와 문화의 면에서 타락한 것이 전파된 것입니다. 결코 순전한 복음 에수 그리스도가 전한 말씀 하나님 나라와 참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 오늘날도 실제로는 성경말씀의 진수가 신학과 교리에 의해서 바르게 전달되지 못하고 가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말하지만 진정한 성경의 복음이 없는 복음전차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모르는 무서운 현실입니다.


물론 신학의 유산들을 우리가 다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도 소중한 유산입니다. 수천년 연구해 온 유산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성경 말씀으로 잘 비판하고 성찰해서 독소는 제거하고 부족한 부분은 보충하고 생명력이 없으면 불어넣고 죽은 언어를 다시 살아있는 언어로 살려서 사용해야 합니다. 신학을 비판하니까 신학의 유산을 아예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오판해서는 안됩니다. 노골적으로 성경을 비판하는 비평학들의 비평들도 그것을 알면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사실 진보적인 신학이 성경신학 언약사상 구속사 하나님 나라 등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관심과 정립에서 보수 신학에 앞서 갔습니다. 보수신학자들은 그들의 논의를 보면서 다시 신학을 정립하는 어쩌면 후진성을 보여왔습니다. 진보신학이 이 세상 철학의 뒤를 따르고 , 보수 신학이 진보신학의 뒤를 따르며 나아가는 식으로 역사가 흘러 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자들로부터 묻혀져 있던 성경의 진리들이 드러난 경우가 많습니다. 신학과 교리를 비판하니까 제가 그러면 신학은 아예 필요없고 쓸모가 없고 마귀의 것으로 내팽개쳐야 한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잇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학문도 우리가 사용해야 합니다. 다만 사용할 때 무장을 해제시켜서 사용해야 합니다. 무장을 해제시킬 능력이 없는 사람이 그것을 사용하면 실제로 그것에 점령당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부지런히 말씀을 공부해서 말씀에서 서야 할 뿐 아니라 이 세상의 학문과 문화유산들을 비판 소화해서 하나님 나라의 유산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는 전문가들이 나와야 합니다. 이런 지성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필요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런 활동들을 어떻게 해야 하고 그런 활동하는 사람들을 양육하고 길러서 활요하는 일에 교회가 무지합니다. 성경 말씀부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성도들이 방황하고 잇는 것이 현재의 우리의 현실상황입니다.

 

성경의 계시를 이렇게 이 세상 지식과 혼합시켜 교회가 타락했습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성경으로부터 멀어지도록 갖은 수단과 노력을 다해서 교회를 타락시켜 왔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정통교회라고 하지만 실제는 하나님의 말씀과 거리가 먼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피눈물나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이 시상에 파견하셔서 이 문제 많은 전장터에 보내신 주님의 뜻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현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전개되어 온 현실입니다. 따라서 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 용기를 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유산을 물려받아 누리면서 살아가는 적극적인 태도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일은 여러 성도들이 같이 협력하여 전투함으로써 쟁취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세상과 혼합한 타락한 지성과 학문이 아닌 계시 중심의 지성활동을 해야 합니다. 정말 말로만 성경이 아니라 진심으로 원어성경으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깨어있는 지성인들이 모여서 <하나님 나라 연구소>를 세워서 말씀과 하나님 나라를 동시에 연구하면서 교회를 새롭게 갱신하는 일에 협력해 나갑시다! 


 샬롬!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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