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관한 소고


-슐라이엘마허의 신학 방법론을 중심으로-  


자로출처 천안대학교 주만성 교수


I. 서론

II.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위협: 계몽주의

III. 하나님의 초월성 위협 극복의 움직임들: 하나님의 내재성 강조

IV. 슐라이에르마허 이전의 신학 방법론 비판

V.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 방법론 비판: 내재성을 강조한 주관주의

VI. 결론

 

 

<국문초록>


 교회 역사상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시비는 끊임없이 계속 되고 있다. 초월성과 내재성, 이 둘 사이의 균형이 상실되면 갖가지 심각한 신학적 문제들이 고개를 들게 된다. 초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문화적 상황과의 관련성을 잃게 되고, 반면 내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어떤 특정의 문화에만 얽매이거나 신앙의 특별한 영역을 상실하게 된다.


대체로 18세기 계몽주의 이전에는 신학에 있어 하나님의 초월성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다가 계몽주의 사상이 득세하면서 하나님의 초월성이 위협을 받게되고 그 위협의 극복을 위한 움직임은 하나님의 내재성으로 치우치게 되는데, 계몽주의와 하나님의 내재성 강조의 신학 등장을 이해하기 위해 그 이전의 신학방법론을 알아야 한다.

계몽주의 이전의 정통주의는 학문을 초자연적으로 계시된 진리들에 대한 성찰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했던 신학은 ‘위로부터’의 신학이었다. 한편, 계몽주의적 신학(이신론, Deism)은 그 작업을 하나님에 대한 합리적 사고에 관한 성찰이라고 보고, 일종의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했다. 우리는 전자를 신앙주의, 후자를 객관주의라 부를 수 있겠다.


신앙주의와 객관주의 양자에 다 반기를 들고일어난 것이 주관주의인데, 18세기 계몽주의 이후 슐라이에르마허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그의 신학 방법론에서 주관적인 하나님의 내재성이 두드러지는데 그의 신학 방법론은 계몽주의가 위협을 가한 하나님의 초월성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며 이신론적 계몽주의의 객관주의를 거부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신학 방법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한 주관주의로 흐른다. 그러나 그의 주관주의 역시 인간의 경험과 감정을 토대로 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신앙주의, 객관주의, 주관주의를 모두 극복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균형 있는 신학적 작업이 요청된다.


  I. 서론


하나님은 초월자요 동시에 내재자다. 그래서 신학은 항상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다루어 왔다. 그런데 종종 어떤 신학적 작업은 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분리하기도 하고 혼돈하기도 한다. 초월성과 내재성, 이 둘 사이의 균형이 상실되면 갖가지 심각한 신학적 문제들이 고개를 들게 된다. 초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문화적 상황과의 관련성을 잃게 되고, 내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어떤 특정의 문화에만 얽매이거나1) 신앙의 특별한 영역을 상실하게 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역사상 끊임없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사이에 불균형을 초래하는 일들이 있었다.


대체로 18세기 계몽주의 이전에는 신학에 있어 하나님의 초월성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다가 계몽주의 사상이 등장하면서 하나님의 초월성이 위협을 받게되고 그러자 칸트, 헤겔, 슐라이에르마허를 통해 초월성 위협을 극복하기 위한 내재성이 강조되었다.2) 특히 슐라이에르마허가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하여 차지하는 신학적 비중은 막대하다.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내재성이 강조되는 각종 신학적 움직임은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이며 또 다른 한편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이 강조된다면 이것은 슐라이에르마허의 내재성에 대한 반동으로 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본 논문에서 이 모든 시비를 다 살필 수는 없다. 본 논문의 연구 범위 및 한계는 18세기 계몽주의 등장과 그로 인한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 방법론에 나타난 하나님 내재성 강조와 그 한계 및 문제점을 지적하고, 초월성과 내재성의 조화의 문제를 신학방법론으로 풀어가고자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본 논문의 슐라이에르마흐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내재성 연구는 그가 가졌던 특정한 교리적 견해들보다는 그의 신학적 방법론에 더 초점을 맞출 것이다.


II.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위협: 계몽주의


계몽주의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문제에 획기적인 영향을 끼쳤다. 3) 이 시대의 사상가들은 이제 교리를 더 이상 교회 교의로서 이미 수용된 체계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고전적인 신학적 체계에 호소하는 것만으로 지적 토론을 해결 할 수 없게 되었다. 계몽주의 시대의 지식인들은 종교적 신념들에 대해서는 판별이 가능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제시하는 것들로 제한하려 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접근하도록 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이 계몽주의이다.


계몽주의는 르네상스라는 기초 위에서 중세적 사고와는 궁극적으로 다른 근본적인 사상의 변화를 초래했다.4) 계몽주의 이전 시대에는 안셈(Anselm, 1033-1109)5)의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라는 명제는 지식 추구에 있어 지배적 사상이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 이후로 이 명제는 바뀌어 “나는 내가 이해 할 수 있는 것을 믿는다”라고 선언하게 되었다.6)


교부시대 이래로 중세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라 할 수 있는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초월성에 기울어져 있던 신학의 균형은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깨어지고 말았다.7) 이성을 중시하는 이 시대가 기독교 신학의 기초와 방향을 모두 뒤엎어 놓아버렸기 때문에 계몽주의 이후에는 그 이전의 기독교 신앙으로 다시 돌아가기 어려울 정도였다.8) 그러면 과연 계몽주의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관련하여 그 당시 신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1. 계몽주의 사상의 발생 배경


계몽주의와 같은 획기적 사상의 출현은 역사적, 사상적 배경 없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계몽주의의 출현은 그 때까지의 사회 정치 지적 요소들이 모여 돌출 된 것이다. 17세기에 소위 30년 전쟁9)으로 인한 유럽사회의 황폐화가 있다. 그 전쟁으로 인한 골 깊은 갈등은 상이한 기독교 신앙고백들의 대결양상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 전쟁은 교리적 논란이 과연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회의를 초래했다. 이런 종교적 싸움 외에도 당대의 비판적인 정신에 걸 맞는 지성적 행로를 열어 놓은 것은 상호 연관되어 있는 두 혁명, 즉 철학과 과학 분야에서의 혁명이었다. 10)


 1) 철학적 혁명의 산물

계몽주의는 철학적 혁명의 산물이었다. 물론 그 뿌리는 중세의 신학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겠지만 계몽주의에 대한 철학적 영향은 현대 철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프랑스의 사상가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7) 데카르트의 본래 의도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연구 방법을 고안하려는 것이었고 그가 제안한 방법의 이면에는 수학의 탁월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수학적 모델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일로서, 실재를 이해함에 있어 질적인 차원 보다 수량적인 차원을 강조한 결과였다. 그러한 강조는 케플러와 갈릴레오의 작업에서 대단히 중심적인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당대의 위대한 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학적 논증의 엄격성을 모든 지식 분야에 소개하려 했다는 점에서, 막 부상하고 있는 이성의 시대의 표상이 되었다. 11)


그가 수학적 지식을 우위에 두었던 것은, 수학은 이성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는 경험적 관찰로부터 유래하는 지식 보다 훨씬 더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성의 제 1원리로 ‘회의(懷疑)’를 도입했다. 그러나 그 다음 세기의 어떤 경험주의자들과 달리 회의주의로 나가지는 않았다. 그 반대로 그의 회의는 확신을 낳게 된다. 왜냐하면 이성이 모든 것을 의심할 때 그 회의 의 주체-그 회의를 하고 있는 그 개인-가 존재한다는 확실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언이 생기게 된 것이다.


데카르트의 이와 같은 사상은 그 이후의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이후로는 신적인 계시가 아니라 사고하는 주체가 바로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데카르트가 시작한 이러한 사고 운동은 신학을 난관에 빠트렸다. 신학자들은 이제 계몽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이성의 우위를 인정하고 합리주의적 철학에 기초하여 신학을 하든가, 아니면 이성 자체만으로는 영원한 실재들에 대한 지식을 창출할 수 없다고 해야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12)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음성보다는 내적인 이성의 소리를 강조하는 경향은 데카르트 이후 현대신학의 특징인 신의 내재성으로의 방향전환에 길을 터 주게 되었다. 13)


또한 볼테르 같은 이는 이신론을 추종하며 신이나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 낸 신념에 불과하며 자연이 곧 신이라고 생각했다. 14) 그리고 볼프는 독일의 대표적인 계몽주의자로서 그에게서 이성적 신앙은 그의 철학적 성격을 반영한다. 그는 책을 낼 때 마다 “...에 대한 이성적 생각” 으로 제목을 붙일 정도로 이성주의자였다. 15)


2) 과학 분야의 혁명

철학분야에서 일어난 혁명 외에 계몽주의를 낳은 또 다른 원인은 중세의 세계관과는 급진적인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 과학 분야에서의 혁명인데 새로운 사고의 중심을 이룬 것은 우주관의 변화였다. 이것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이 발단이 된 것이다. 16) 이러한 우주관의 변화는 중세적 관점이 제시했던 천국은 공간적으로 지구 위에 존재하고 있고 지옥은 그 아래 놓여 있다고 하는 우주의 삼층적 구조를 배격하는 것으로, 이것은 물질세계 자체를 이해하는 관점과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적절한 접근 방식에서 일어난 변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중세의 과학은, 모든 사물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목적을 성취해 가는 자연스러운 경향이 있다는 뜻의 ‘자연적 원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내적 목적’에 대한 중세의 토론을 형이상학적 추측이라고 일축해 버린다. 이성의 시대에 와서는 일찍이 사물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묻던 목적인(final causes)에 대한 강조가 퇴색하고 갈릴레오(1564-1642)가 개척한 바 과학적 작업을 수학적으로, 그리고 수량적으로 보는 견해가 부상하게 되었다. 정확한 계량 방법과 수학을 이성의 가장 순수한 방법으로 수용한 것이 자연 현상들을 연구하는 적절한 접근 방법의 도구가 되었다. 관찰자들은 수량적 결과들을 산출해 내는 자연 법칙의 용어들로 현상들을 묘사했다. 계몽주의 시대가 이러한 방법을 고수했다는 것은 그 시대의 사고가 수량적으로 측정 가능한 우주의 양상들만을 현실적인 것으로 취급했음을 의미한다. 17)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데카르트나 갈릴레오와 같은 사상가들이 개척한 새로운 방법론을 지식의 모든 분야에 적용했다. 자연 과학 뿐 아니라 정치학, 윤리학, 형이상학, 신학 등도 이 과학적 표준 규정에 맞춰 보고자 했다. 심지어 철학까지 그 영향을 받았다. 사실, 결과적으로는 인간의 노력이 드는 모든 분야가 자연 과학의 분파로 취급된 것이다. 과학 분야에서의 이러한 혁명은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의 업적을 통하여 그 절정에 다다랐다. 그가 묘사한 우주는 하나의 거대하고도 질서 정연한 기계와 같아서 그것의 움직임들을 알아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우주의 운동들이 관찰 가능한 어떤 법칙들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18) 따라서 뉴턴은 우주를 설명하는 일에 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는 모든 입자의 속성과 행위는 적어도 원칙적인 면에서 볼 때, 얼마 안 되는 소수의 근본 법칙에 의하여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는 작업에 임했다. 게다가 뉴턴이 가지고 있었던 목표는 단순히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것이었다. 그는 과학이 하나님의 위대성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더 고양시켰다고 믿었다. 그의 임무는 어떻게 그것을 발견하느냐는 것이었다. 19세기의 역사학자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는 그의 업적과 그것이 미친 영향을 재미있는 이행 시에 담았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들이 밤 속에 숨어 있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뉴턴이 있으라!”하시니 모든 것이 빛으로 드러났다.“ 19)


2. 계몽주의의 원리


간략히 말해서, 계몽주의를 낳은 철학과 과학 분야에서의 혁명은 ‘미신’보다 이성을 더 높은 위치에 두는 이성의 격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그 시대는 이성이 그 시대의 사고의 중심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성’을 포함한 다른 몇 가지 원리들이 그 특징을 이루는데 그 원리들을 모아 보면 일정한 통합체가 된다.


그 몇 가지 원리들은 곧 ‘이성’, ‘자연’, ‘자율’, ‘조화’ 등이다. Paul Tillich는 그의 신학사에 대한 유용한 연구에서, 이 원리들 중 처음 네 가지를 가지고 계몽주의 사고 방식의 특징을 묘사한다.20)


계몽주의의 제 일 원리는 무엇 보다 이성이다. 이성의 원리란 우주 전체의 바탕을 이루는 근본질서가 무엇인지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가리켰던 말이다. 두 번째 원리는 이성의 원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자연’이다. 이 원리는 ‘물질의 본질’에 내재되어 있고 그 본질로부터 발생하는 것에 대하여 강조한다. 계몽주의자들은 우주를 내재적으로 자연의 법칙을 가지고 있는 질서 정연한 체계라고 간주했다. ‘이성’과 ‘자연’은 계몽주의 사고의 세 번째 원리인 ‘자율’(autonomy)의 길을 열어 놓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시대에는 자율적인 인간이 진리와 행동의 결정권자가 되어 외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교회가 가르침의 직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논리에 호소한다든지, 이것은 성경 말씀이니까, 또는 이것은 기독교의 교리이니까 라는 식으로 호소하는 것이 신앙이나 행위를 부추기는 수긍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한 것이 되지 못한다. 이제는 개인이 권위에 대한 그런 종류의 모든 외적 주장들을 시험해 보려 들기 때문이다. 21)


그러나 자율의 원리가 무법 천지를 용인 한 것은 아니다. 넷째 원리인 ‘조화’는 이성의 시대가 그 원리로 간주한 우주의 합리성과 질서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그 시대의 사상가들에 따르면 우주에는 그것을 지배하는 질서가 특징적으로 내재되어 있어서 우주 안에 존재하는 각 개인이나 물질의 이기적이고 독립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우주 전체가 가장 적절한 모양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계몽주의자들은 ‘적합한 방법론’을 높게 평가했다. 22)


3. 계몽주의 시대의 신학


문화적 자율을 향한 움직임은 그 시대의 새로운 과학적 사고 방식으로 인한 피할 수 없는 결과였고, 그 새로운 과학적 사고 방식은 종교의 본질에 대한 이해 면에서도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점차적으로 신의 존재와 도덕법은 만인에게 알려져 있는 것이고 이성에 의하여 입증될 수 있다고 믿는 ‘자연종교’와 성경과 교회가 가르치는 가르침을 내용으로 하는 ‘계시종교’를 구분했다.23) 이 시대가 진행하여 갈수록, 후자는 점점 공격을 받게 되었고 전자는 진정한 종교의 위치로 높임을 받게 되었다. 결국, 계몽주의 시대의 ‘자연 종교’ 혹은 이성의 종교가 중세와 종교개혁기의 특징이었던 신조(dogma)와 교리에 대한 강조를 대치해 버렸다.


계시 종교보다 자연 종교를 앞세우는 지적 풍토는 영국의 경험론자 존 로크에 의하여 마련되었다. 그는 만일 기독교로부터 그 교조적인 껍데기를 벗겨 버린다면 가장 합리적인 형태의 종교가 될 것이라는 혁명적인 논지를 개진하였다. 이와 같은 로크의 견해를 기초로 하여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전통 교리에 대한 하나의 신학적 대안으로서 이신론(deism)을 내세웠다. 이신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종교를 자신들이 보편적이고 합리적이라 믿었던 기본 원리들로 환원시키려 했다.24)


몇몇 계몽주의자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가혹하리만큼 비판적인 목소리로 주장하기를, 기독교는 적어도 그 전통적인 형태를 놓고 볼 때 이성의 종교가 타락한 모습이라고 했다. 25) 이신론자들의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근본적으로 초월해 있는 신이었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신관에서는 하나님이 자연과 인간의 이성에 근접해 있는데, 너무 근접해 버린 나머지 창조 세계와 이성의 질서 정연한 영역 안에 신이 내재해 있다고 보았고, 그러한 신의 내재성 안에 신의 초월성이 용해되기에 이른다. 계몽주의자들은 이 세상 너머 그 어딘가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궁극적으로 그 안으로 눈길을 돌린 것이다.


18세기가 다 끝나 갈 무렵 계몽주의 시대는, 특히 영국에서 그 수를 다하게 된다. 이 때쯤 많은 사상가들은 혹은 회의론에 빠져서,26) 혹은 종교적 상대주의 때문에27)

이성의 종교를 내던져 버리게 된다. 이 사상가들은 결국 이성은 신, 도덕성 그리고 삶의 의미 등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들을 답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가 그 종말을 고했을지라도, 신학은 결코 과거의 모습과 같을 수는 없었다. 지나간 18세기는 두 가지 대안만을 남겨 놓은 것 같았다. 성경과 교회의 권위에 호소함으로써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을 강조하는 전통적 기독교의 강조점을 택하든지, 아니면 개인적 지성을 강조하는 계몽주의가 낳은 근대의 회의주의적 합리주의를 따르든지 해야 했다 칸트 이전 시대에 대한 맥기퍼트(McGiffert)의 기념비적 연구서에서 결론 내리고 있는 것처럼, “18세기 말의 종교적 위기는 심각한 것이었다.”28)


그러나 19세기의 어떤 신학자들은 그 선택들에만 묶여 있기를 거부했다. 물론 그들도 이제 더 이상 이성의 시대를 거슬러 그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경과 교회의 권위가 영원히 실추되었기 때문에 신학은 예전의 신앙 체계를 결코 다시 부활시킬 수 없었다. 이제 신학이 계몽주의 시대 이전의 교리적 정통으로 회귀한다는 것이 쉽사리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그들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회의주의적 합리론을 유일한 대안으로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이 새로운 종류의 지성들이 계몽주의의 여파를 인정하면서도 진보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계몽주의의 기본 취지를 용인하면서 동시에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길들을 모색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19세기의 신학자들은 계몽주의의 도전과 그러한 도전이 극성을 부린 결과인 회의주의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신학적 작업은 계속될 수 있다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그래서 그들은 계몽주의가 이룬 진보적 결과들을 수용하면서도 계몽주의를 넘어서 그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중세적 균형이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그 어간에 초월성과 내재성 사이에 어떤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계몽주의 이후 19세기 신학을 형성한 세 사람은 모두 독일 사람들로 칸트, 헤겔, 그리고 슐라이에르마흐가 그들이다. 이 세 사상가들은 인간의 삶에서 종교적 부분을 하나의 특별한 영역으로 분리하려 했다는 면에서 유사하다.


III. 하나님의 초월성 위협 극복의 움직임들: 하나님의 내재성 강조


상술한 바와 같이 계몽주의 이후 신학자들은 인간 생활 안에 종교라는 어떤 특정의 자리를 정함으로써 계몽 사상에 의해 초래되었던 곤경을 넘어서고자 했으며, 또한 그 결과로 초월성과 내재성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려고 했다. 그러한 유의 첫 시도는 독일의 철학자 칸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헤겔, 슐라이에르마허로 연결된다.


1.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칸트는 계몽주의를 극복하고 종교의 초점을 ‘순수이성’의 영역(오관에 기초한 인식의 영역)에서 ‘실천이성’의 영역(도덕적으로 조건지어진 존재로서의 인간의 경험에 기초한 인식의 영역)으로 옮겨감으로써 초월성과 내재성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려 했다. 29) 칸트는 종교의 적합한 영역으로서 삶의 실천적 영역, 즉 도덕적 영역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실천이성30) 안에 그 적절한 기초를 두고 초월성과 내재성 사이에 새로운 균형을 맞추어 보려 했다.31)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칸트는 ‘윤리’와 ‘도덕’을 종교라는 특정 차원의 초점으로 제시하였다.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인류를 위한 최고의 선은 덕과 행복이 연결되어 있는 곳에 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 생의 삶 속에서 덕이 항상 보답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칸트의 결론은 덕을 끼치는 삶이 적합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미래적 삶이 있어야 하며 신은 그곳에서 완전한 정의가 정말 유효하게 나타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이로서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32) 그러나 결국 칸트도 세계를 물자체계와 현실계로 이원화함으로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으로 흐르고 말았다. 33) 


2. 헤겔(G. W. F. Hegel, 1770-1831)


계몽주의로 인한 하나님의 초월성 위협에 대한 제 2의 대안은 또 한 명의 위대한 철학자 헤겔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는 이 초점을 지적 또는 사변적 영역으로 이동시켰다. 그는 궁극적인 진리를 인간 역사의 진행과정 그리고 그 과정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 이성의 능력과 연관시켰다. 하지만 헤겔 철학은 이성의 시대와의 중요한 단절을 보여 준다. 당대의 사람들은 자연의 영역에서 신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그들은 자연을 하나의 완결된 산물로, 정적인 실재로 보았다. 헤겔은 이성시대의 경험론자들이 옹호했던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에 대한 강조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오관적 경험이 지식을 위한 유일한 기초라든가 또는 오관적 경험으로부터 관념을 형성하는 것이 지식을 획득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는 등의 주장은 부인했다. 헤겔은 실재란 활동적이며 발전하고 있다고 가르쳤다. 34)


 그리고 헤겔은 철학을 모든 과학 보다 상위에 두는데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는 철학과 역사를 밀접하게 연관 시켰다. 35) 헤겔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첫 번째 관념은 보통 ‘정신’이라고 번역되는 가이스트(Geist)다. 이것은 영어의 mind라는 말에 반영되어 있는 합리성의 개념과 spirit에 나타나는 초 물질적인 차원이 합성 된 말이다. 헤겔에 있어서 이 정신은 실체일 뿐 아니라 주체이며 운동이며 과정이다. 이것은 인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정신과 동일시되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세계의 내적 존재며 절대적인, 그러면서도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36)


헤겔 철학에 있어서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진리를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진리는 과정 그 자체이다. 헤겔은 실재에 대한 진리를 역사의 과정과 연관지었는데 그것을 그는 정신이 자의식을 찾아가는 것으로 보았다.37) 헤겔 철학의 여러 측면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그의 변증법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일반적으로 ‘정-반-합’의 3단계라는 논리학적 용어로 묘사된다. 먼저 하나의 정립(thesis)이 성립하고 이것은 즉시 반정립(antithesis)을 발생시킨다. 그 다음 이 둘은 그 둘의 종합으로 합(synthesis)을 이룬다. 헤겔은 정적 존재에 관한 전통적 개념을 과정이라는 동적 개념으로 대치 시켰다.38) 이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내재성에 있어 헤겔의 견해는 후에 통상 만유재신론이라 불리는 많은 신학적 대안을 위한 모형을 제시하였다. 결국 이후의 모든 만유재신론적 표현은 모두 헤겔을 좇는다.39)


3.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


하나님의 초월성 위협에 대한 극복에 있어 간트와 헤겔의 제안보다 훨씬 더 혁신적인 것은 슐라이에르마허의 제안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초월성이 위협을 받는 이성 시대에 신학의 근거를 찾기 위하여 ‘감정’에 주목했다. 그의 대안은 그가 ‘감정’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특별한 경험, 곧 직관적 삶을 종교의 중심으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이와 같은 발상이 기독교 신학에 끼친 영향력은 뉴턴이 물리학에, 프로이드가 심리학에, 그리고 다윈이 생물학에 끼친 것과 같다고 하겠다. 40) 그는 선구자요 새로운 유행의 창도자로서 후세의 신학자들이 간과할 수 없는 사상가이다. 현대 기독교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슐라이에르마허를 현대 신학의 아버지로 불렀다. 그는 ‘교회의 황태자’로 불려졌고, 또 몇 안 되는 기독교 사상의 거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41) 그리고 존 칼빈 이후 가작 영향력 있는 신학자로, 42) 현대 종교와 신학 사상의 창시자로 불려진다. 43)


 그가 이처럼 걸출하게 내세워지는 까닭은 그가 어떤 특정의 신학 학파를 형성했거나, 그 이후의 많은 신학자들이 그의 제자들이기 때문은 아니다. 다만 슐라이에르마허가 이러한 영예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신학에 있어서 새 시대를 창도했기 때문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내재성이 강조되는 각종 신학적 움직임은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이며 또 다른 모양으로 하나님의 초월성이 강조된다면 이것 역시  슐라이에르마허의 내재성에 대한 반동으로 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이것은 그의 특정 교리보다는 그의 신학 방법론과 관계 된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IV. 슐라이에르마허 이전의 신학 방법론 비판


계몽주의 이전 정통주의는 이 학문을 초자연적으로 계시된 진리들에 대한 성찰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했던 신학은 ‘위로부터’의 신학이었다. 한편, 계몽주의적 신학(이신론, Deism)은 그 작업을 하나님에 대한 합리적 사고에 관한 성찰이라고 보고, 일종의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했다. 44) 우리는 전자를 신앙주의, 후자를 객관주의라 부를 수 있겠다.45)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 방법론은 신앙주의와 객관주의 양자 모두에 대한 반동이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이 두 가지 신학 방법론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1. 신앙주의 


하나님의 초월성 강조는 달리 말하면 계시와 그 계시의 근거로서의 성경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준거 기준이 되고 아울러 신학을 함에 있어 성경이 그 일차적 자료가 되고 원전이 된다고 함에 있어서는 추호의 의심과 이론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신학을 함에 있어 성경 하나만 그 자료로 삼을 수는 없다. 투레틴, 카이퍼, 바빙크, 톤웰, 기라르듀 같은 개혁주의자들도 성경을 가리켜 유일한 원리(principium unicum), 즉 신학의 유일한 원천이요 규범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46)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것은 신학자가 하나님의 일반계시로부터 하나님에 관한 어떤 지식을 전혀 얻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 인간이 하나님의 일반계시로부터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얻는 것은 그것을 오직 성경에 비추어볼 때 왜곡된 부분들이 교정되고 해석된다는 뜻이다.47)


성경이 비록 신학의 제 일차적 자료이긴 하지만 오직 명시된 규칙만이 중요하다면 학자가 개입된 학문적 노력과 판단은 여기서 아무런 필요가 없게 된다. 오직 명시된 명제만 중요할 뿐 학자는 여하한 책임도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학문을 실천으로 실행하는 가운데 과연 개인적 판단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 폴라니의 물음이다. 개인적인 편견의 자취가 일련의 해독 결과에 조직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을 언제나 가정해야 한다. 이러한 영향은 지식을 형성, 전수,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우연히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 없이 과학적 학문적 활동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개인적 판단 행위는 사실상 과학과 학문 전반에 걸쳐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48)


개인적 판단이 학문 활동에 중요하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학자란 주어진 문제를, 주어진 공식에 따라 자동적으로 풀어 가는 기계가 아니다. 학자는 오히려 트럼프를 가지고 노는 사람과 비슷하다. 주어진 규칙이 있지만 이 규칙을 매번 적절하게 적용할 수 있는 자유가 트럼프놀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있듯이 학자에게는 개인적 판단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49)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슐라이에르마허나 리츨 같은 주관주의도 거부하고 동시에 베크(Beck)의 신앙주의도 따르지 않는데 베크(Beck)50)는 신학자는 반드시 자기의 모든 자료를 성경으로부터, 오직 성경으로부터만 모아야 하며 철학적인 모든 이론뿐만 아니라 교회의 전통적인 교리들까지 무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신학자의 사명은 성경에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는 진리를 재생산하는 일뿐이며 그렇게 함에 있어 성경 그 자체가 제시하는 방법만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방법론은 성경이 우리가 쉽게 베낄 수 있는 논리적인 체계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기록으로서 성경이 따르는 순서는 논리적이 아닌 역사적인 순서라는 사실, 신학은 인간 의식이 제것으로 삼아 소화하고 신학자의 자신의 시대에 맞는 언어 및 과학적 형식으로 표현 된 바 하나님에 관한 해설이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신학자는 결코 아무런 전제 없이 신학을 연구할 수 없으며 언제나 특정한 교회적 입장을 나타내고 어떤 개인적인 확신을 담고 있어서 그것이 자연히 자신의 저작에 반영된다는 사실 등을 충분히 고려치 않고 있다. 51)


2. 객관주의


계몽주의 사상은 신학계에도 합리주의를 불러왔고 이 합리주의는 학문의 방법에 있어 객관주의를 취한다. 이 객관주의는 근대를 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식세계의 주도적 이념 으로서52) 이것은 검증과 실증을 요구하는 것이다. 계몽주의 사상에 따른 이와 같은 객관주의에는 중요한 특색이 몇 가지 있는데 첫째, 객관주의는 정확하게 형식화된 지식을 선호한다. 확정과 불확정의 경계선에 있는 지식은 확정할 수 있는 지식으로 환원하고 환원이 되지 않는 지식은 배제한다. 계몽주의의 선구자 데카르트가 절대적 확실한 진리 발견의 방법으로 고안한 것은 17세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수학의 탁월성이다. 53) 객관주의는 측정 가능하고 수학적 공식으로 표현 가능한 것 외에, 부정하거나 모호한 것은 철저히 불신한다. 둘째, 객관주의는 환원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인식론적 관점에서 볼 때 수학과 물리학이 학문의 전형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모든 지식은 끝내 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과학주의는 역시 계몽주의적 산물이다. 54)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오직 물리적 현실만이 참된 현실로 인정되고 환원할 수 없는 것은 참된 현실로 보지 않는다.55) 요컨대 객관주의는 형식화된 지식의 선호, 환원주의, 실증주의 등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56)


이와 같은 객관주의는 연구자의 인격성과 주체성을 배제하고 오직 ‘객관성’만을 유일한 가치로 수용하는데 이것을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인간과 관련된 현상을 탐구하는 인문, 사회과학, 그리고 심지어 종교학이나 신학에까지 적용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객관주의는 무엇보다도 인격적, 개인적, 주관적 요소를 과학적 지식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저들은 인격적, 개인적 요소는 지식의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빙 가능한 지식 체계에서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7)


이에 대해 폴라니와 같은 과학 철학자들이 객관주의를 비판하고 나선 것은 인간적인 지식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성경이 검증 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거부하고 신학에 있어 실증적 증거를 제시하라고 할 때 이와 같은 객관주의에 대해 폴라니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물음을 통해 비판하고 있다. 첫째, 이론 구성과 수용은 관찰과 실험에 의존하는가? 둘째, 형식화된 지식만이 과학적 지식일 수 있는가? 셋째, 과학적 지식은 가치 평가를 배제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객관주의를 가장 강력하게 표방한 실증주의는 관찰 가능한 사실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일에 모든 과학적, 학문적 이론을 제한한다. 만일 실증주의적 가정이 옳다면 이성과 이론은 엄격히 분리되고 자연에 내재된 합리성을 이론이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부인된다. 하지만 폴라니는 『인격적 지식』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구성되는 과정을 검토하는 가운데 실증주의의 기본가정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58)아인슈타인의 증언에 따르면 상대성 이론은 관찰 결과의 성공이나 실패로부터 얻은 것이 아니라 16세 때 얻은 착상을 바탕으로 그 이후 10년 간 골똘히 생각한 결과, 순전히 사변적으로 얻어낸 것이다. 59)


V.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 방법론 비판: 내재성을 강조한 주관주의


슐라이에르 마허의 신학 방법론은 하나님의 초월성 중심의 신앙주의적 방법에 보조를 같이 하면서도 이신론적 계몽주의의 객관주의 역시 거부한 것으로서 주관주의 신학으로 흐른다. 바꾸어 말하면 앞서 언급한 대로 그의 주관주의적 신학 방법의 태동은 신앙주의와 객관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된 것이다.60) 슐라이에르마허61)에 따르면 신앙주의적인 정통적 접근 방법은 권위적 신학이 되게 해서 인간의 창의력을 질식시키고 하나님에 대한 교회의 교의와 하나님 자신을 혼동케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몽주의의 반란은 옳은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객관주의적 이신론적 접근방법은 메마르고 싱거운 자연주의적 신앙으로 인도하여 일종의 종교 철학이나 별다를 것이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칸트는 그것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았다.


슐라이어마흐는 이 두 가지 대안들을 대신하여, 신학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험의 인간적 성찰로 간주함으로써 신학의 전혀 새로운 길을 개척하였다. 이렇게 됨으로써 영원하고 권위적인 명제들이 아닌 종교적 경험이 신학적 성찰의 진정한 근거가 되게 되었다. 62) 슐라이에르마흐는 -종교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있게 마련인 어떤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며, 심지어는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인간의 경험에 기초하는 신학을 시도하려고 했다. 63) 그래서 그는 인간을 희생시키고 하나님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양자 모두를 어떤 고유의 방법으로 묶을 수 있도록 기독교 교리의 재편을 시도하였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기초를 실천 이성에 두려 했던 칸트의 시도나 절대 정신이 역사를 통하여 진행하는 것을 탐색하는 새로운 사변적 합리주의에 신학의 기초를 놓으려고 했던 헤겔의 노력과 함께, 계몽주의의 여파 속에서 신학을 시도했던 세 번째 주요한 노력이다.


슐라이에르마흐는 직관을 통하여 하나의 대안적 접근 방법을 제공하고자 했다.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이며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 곧 실재 전체에 대한 의존 감정에 주목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보다는 태양이 우주의 중심으로 보여질 수 있다면 천문학의 수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처럼, 슐라이에르마흐는 합리주의와 (기독교의)정통 사이에 놓여져 있는 궁색스러운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권위적 명제가 신학의 근거가 되기보다 인간의 경험, 특히 절대 의존 감정이 그 근본이 될 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64)


그의 『담화』에서 그는 자기 자신이 이어받은 경건주의적 유산과 당시의 새로운 문화적 현상이었던 낭만주의를 파들어 감으로써 종교의 진정한 본질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종교의 본질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 증거나 초자연적으로 계시된 교의 또는 교회적 의식이나 절차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문화 속에 있는 ‘근본적이고, 쉽게 식별이 되는 통합적 요소’ 65)-즉 유한한 것들을 통하여 그리고 그들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무한한 것에 대하여 전적으로 의존하는 감정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자 했다.


여기서 슐라이에르마흐가 종교를 ‘감정’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독일어의 Gefuhl이라는 말은 영어로 감정(sensation)이라는 말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깊고 심오한 의식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느낌’이라는 말은 의식 중에 ‘성찰-이전적’ 상태, 곧 뚜렷한 사고나 감정 이전 혹은 그 밑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슐라이에르마흐는 주장하기를, 진정한 종교의 핵심은 모든 유한한 것들이 무한한 것 안에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존재하며, 모든 일시적인 것들이 영원한 것 안에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보편적으로 존재함을 ‘직접적으로 의식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66)


슐라이에르마흐가 『담화』에서 주장했던 것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와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즉 경건은 종교(형상)의 본질이지만, 그것은 항상 어떤 구체적인 종교의 전통(질료)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쨌든 그는 계몽주의자들이 어떤 구체적인 종교 공동체나 그들의 신학 혹은 예배 형태(‘실증적 종교’, Positive Religion)와는 구별된, 어떤 ‘자연적 종교’를 찾으려 했던 것에 대하여 단호하게 거부했다. 67) 그의 위대한 조직 신학적 저서인 『기독교 신앙』에서, 슐라이에르마흐는 신학을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감정을 말로 표현하려는 시도라고 정의했다. 68)


그는 또 절대 의존 감정은 자연의 모든 것, 그것이 부분적이든 전체적이든,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정하신 것이며, 하나님이 그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임을 전제한다. 자연의 질서를 폐기하는 특별한 행동이라는 뜻에서 볼 때, 기적은 이러한 사실과 상반된다는 것이다.69) 그래서 슐라이에르마흐는 기적의 현실성을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기적을 믿는 것은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며 그 원인자이심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슐라이에르마흐는 중보 기도의 효과를 부정했다. 하나님에게 일의 진행 과정을 바꿔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그 일이 하나님과 어느 정도 독립되어 있음을 그리고 하나님이 그 기도하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 의존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물론 기도가 어떤 일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닐지라도, 사람들이 기도하고 또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다만 하나님의 본래 계획의 일부일 뿐이고,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생각은 결국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다.” 70) 이쯤 되면 슐라이에르마흐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전반적 생각을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흐가 초자연이라는 범주를 제거하게 되니까 과학 시대의 기독교가 당면하는 문제에 대한 편리한 해결책이 마련되었다. 그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71)


신학적 방법에서 슐라이에르마흐가 이룬 혁신은 이른바 “믿는 주체로 돌아가라”(turn to the  believing subject)는 데 있다. 신적인 계시에 의한 정보의 어떤 체계가 아니라 믿는 자들의 경험이 신학의 주제이며 기준이다. 그에게 있어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신학이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의식’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가를 결정하기 위하여 기독교의 교리적 형식을 끊임없이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학의 비판적 과제는 교회의 설교나 교리적 형식이 당대에 일구어 놓은 기독교의 ‘하나님-의식’에 대한 최선의 분석에 엄밀하게 일치하는가를 보고서 그들 중 얼마만큼이 유지될 수 있으며, 얼마만큼이 완전히 폐기되어야 하며, 어느 만큼이 수정되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보았다.72) 『기독교 신앙』에서 슐라이에르마흐는 그 비판적 과제를 명민함과 끈기를 가지고 수행했다. 슐라이에르마흐의 신학적 방법은 계몽주의에 의한 진취적 사상을 흡수하는 한편 그것을 넘어서려는 시도였다.


슐라이에르마흐 신학에 있어서 기독교 교리는 일차적으로 또는 전적으로 성경에서만 도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모든 교리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자아-의식’ 즉, 그리스도인들의 내적 경험으로부터 추출되어야 한다”고 썼다. 73) 그에게 있어 성경이 특별한 것은 그것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종교적 경험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권위는 절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특정의 역사적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해석하는 모든 시도들에 대한 모범으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74) 그에 따르면, 성경은 그것이 그리스도 자신의 ‘하나님-의식’을 순전히 반영하는 한에서, 그리고 어디에서든 성경을 통하여 그러한 ‘하나님-의식’의 순수한 모델이 나타날 때마다, 기독교 신학을 위한 하나의 상대적 권위를 가진다. 그러나 신학을 위한 진리의 궁극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성경 자체가 아니라, 후자 곧 그리스도인들의 자의식 안에 재현된 ‘하나님-의식’이다. 슐라이에르마허에게 특이한 것은 기독교의 교리들의 재구성이 아니라, 그 시대 사상과의 갈등 속에 있던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그가 취한 방법과 접근법이었고, 그것은 그 이후 오늘날까지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을 위해 방향을 설정해 주었다.


VI. 결론


세군도(Juann Luis Segundo)는 신학이란 학자들의 학문적 탐구라기 보다 보통 사람들의 실제 삶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군도는 인간의 삶의 현장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신학 방법론은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 circle)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해석학적 순환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변하는 삶의 현장에 맞게 계속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75) 하지만 인간의 삶의 현장과 관련해서 성서의 진리를 적용하여 인간 조건의 개선에 시도한다는 점에서 삶의 현장 혹은 현실적 경험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기독교 진리를 가지고 문제의 해결 가능성을 모색하는 주관주의 신학의 타당성은 당연하지만 기독교가 인본주의 적 성향으로 흐르는 것은 조심해야 할 문제다. 76)


 에질(Edghill)은 슐라이에르마허가 교의를 “늘 변하는 삶”의 표현으로 본다고 하면서  이것은 종교적 “신앙”을 진술함에 있어서 그 어떤 항구적인 권위도 부정하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또 그가 신앙에 대해 말할 때도 교회의 신조에 나타나 있는바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신앙, 즉 내용으로서의 신앙(fides quae creditur)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의미에서의 신앙 곧 신뢰로서의 신앙(fides qua creditur)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77) 그에게 있어 신학적 작업은 성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의식, 다시 말해서 종교적인 경험이나 기독교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다.


신학에 있어서의 종교적 경험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인에 관한 한, 종교적 경험은 확신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을 직접 의식하게 될 때 신자는 깊은 확실성을 발견한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개인적 이해가 있을 때, 어떤 회의주의자도 그 확신을 파괴하지 못하며, 반대로 그러한 경험이 없을 때는 아무리 정교한 증거를 제시해도 그런 경험이 창조될 수 없다. 78)


종교적 경험은 개인의 신앙에 확신을 준다는 이점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경험이 권위의 원천이라든지 모든 다른 권위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권위라든지 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라고 하겠다. 경험은 우리가 발견한 진리를 증언하지만 경험 자체가 진리의 근원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경험은 반드시 성경에 의해 검증되어야 한다. 종교적 경험을 성경의 권위와 관련시켜서 생각해 볼 때, 성경은 경험에 의해서 그 권위가 증명되거나 확증되는 게 아니다. 경험이 성경의 권위를 증명하든 안 하든 성경은 여전히 권위 있는 책인 것이다. 성경이 권위가 있고 그 가르침이 진리이기 때문에 종교적 경험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이 종교적 경험에 의해 판단을 받는 게 아니라, 경험이 성경에 의해서 판단을 받아야 한다. 어떤 경험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할 때, 그 경험은 정당한 것이고, 따라서 신자에게 확신을 준다. 그러나 경험이 성경의 가르침과 상반될 때 우리는 그러한 경험을 강조하거나 거기에 어떤 비중을 두어서는 안 된다. 모든 종교적 경험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경험을 판단할 기준이 있어야 한다. 79)


경험이 우리에게 기독교적 경험의 성격을 정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진리에 대한 수용 및 동화이지 그 역이 아니다. 사람은 자기의 경험을 해석할 때 사람에게서 나온 것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을 혼동할 위험이 있다. 그리고 신학에서 지극히 중요한 많은 진리들은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인간이 어떻게 태초에 말씀으로 되어진 세상의 창조, 로고스의 성육신, 그리스도의 부활 등을 경험 할 수 있겠는가? 80) 혹 이와 관련 된 모종의 경험과 그에 따른 신앙 고백이 있다면, 그것은 그러한 경험과 고백이 가능하도록 영향을 끼친 기록된 성경내용이 선행된 근거일 것이다.


세상을 창조하심으로, 성육신 하심으로 내재된 하나님의 임재는 그 이전의 초월성에 대한 이해 없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내재성이해는 초월성 이해와 분리되어 진행 될 수 없으며 그 역도 그러하다. 초월성과 내재성은 불연속선상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연속선상에서 함께 다루어지는 신학적 작업이 요청된다.


초월성만을 강조한 균형 잃은 신앙주의는 계몽주의를 낳았으며, 이성으로 기울어진 계몽주의적 이신론 신학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왜곡시켰으며, 계몽주의로부터 하나님의 초월성 위협을 방어하고자 내재성으로 치우친 신학은 주관주의로 흘러 성경의 규범성을 위협하고 있으며, 계몽주의의 영향아래 발전된  객관주의는 오늘날 과학주의 접목되어 또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의 초월성을 위협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상적 흐름은 오늘날 온전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모두를 위협하는 현대 신학적 특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앙주의, 객관주의, 주관주의를 모두 극복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균형 있는 신학적 작업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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