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과 자유의지
글 / 김한규목사
'예정과 자유의지'에 관해서는 다음의 다섯 가지의 의견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모든 일은 예정된 길을 따라 진행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 주장은 흔히 말하는 '예정설'로 어거스틴의 신학적 입장을 받아들인 칼빈이 주장했습니다.
칼빈은 우연이나 운명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노력이나 열심이 하나님의 예정된 길을 바꾸지는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둘째,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협력해서 성취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 견해는 '신인협동론'이라고 불리며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폈습니다.
구도자 들이 열심으로 '도'를 추구하는 것은 이러한 입장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셋째,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예견된, 그러나 예정되지 않은 길을 따라 진행하나 그 길에 인간의 의지가 어느 정도 개입되어 새로운 상황을 연출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 의견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펴는 입장입니다.
넷째,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예견된 길을 따라 진행하고 있으나 그 길에 어느 정도의 인간의 의지가 개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의 의지는 성령의 전적인 인도하심을 입은 의지이다"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 입장은 웨슬리안 알미니안의 입장입니다.
다섯째, "모든 일은 그것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운명이다"라는 입장이 있습니다. 이 입장은 이성주의자들이 취하는 입장입니다.
스토아 학파의 숙명론도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 '예정과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는 장로교와 그외의 교단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장로교 신학의 가장 중요한 뼈대는 '칼빈의 5대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모두 예정론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칼빈의 5대 강령은 보통 '튜울립(TULIP)'라고 불려집니다. 튜울립이란 각 강령의 영문 첫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입니다. TULIP의 'T'는 '전적인 부패'를 의미하는 영문 Total depravity의 첫 글자이고, 'U'는 '무조건적인 선택'을 의미하는 영문 Unconditional election 의 첫 글자이고, 'L'은 '제한된 속죄'를 의미하는 영문 Limited atonement의 첫 글자이며, 'I'는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의미하는 영문 Irresistible grace의 첫 글자이며, 'P'는 '성도 들의 견인'을 의미하는 Perseverance fo the Saints의 첫 글자입니다.
전적인 부패,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된 속죄, 불가항력적인 은혜, 성도들의 견인, 이 다섯 가지가 장로교 신학의 뼈대라고 할 수 있는 칼빈의 5대 강령인데 이 모두가 칼빈의 예정론 이라는 거대한 기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뼈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적인 부패'란 "모든 인간이 완전히 부패했다"는 주장입니다.
'무조건적인 선택'이란 "하나님은 인간의 어떤 조건과는 관계없이 구원받을 자를 선택하셨다"는 주장입니다. '제한된 속죄'란 "하나님은 어떤 사람만 구원을 하시고 다른 사람은 버리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주장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은총'이란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모습이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펼쳐진다"는 주장입니다.
'성도의 견인'이란 "한번 택함을 받은 자는 끝까지 그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장로교는 이러한 예정론 교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성서에 서는 예정론에 대해 완성된 이론이나 근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나치게 예정론에 얽매여 교리의 노예가 되는 것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이 예정론 교리는 많은 사람들의 '신앙적 의욕'을 대단히 감퇴시키는 폐해가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 이후로 새롭게 일어난 여러 부흥운동, 즉 18세기의 '웨슬레 부흥운동'이나 19세기의 '성결 운동'이나 20세기의 '오순절 운동' 등이 모두 칼빈주의적 경직된 교리를 거부하는 경향을 띄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17세기 초 네덜란드의 알미니우스는 칼빈주의의 예정론을 반대하는 주장을 하게 되었는데 그의 주장을 칼빈주의와는 반대 개념으로 '알미니안주의'라고 부릅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칼빈의 오대 강령 중 '전적인 타락'만 동의하고 나머지는 상반된 의견을 제시 하고 있습니다.
즉 칼빈주의는 '무조건적 선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반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조건적 선택'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원하지만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만 궁극적으로 구원하신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칼빈주의는 '제한된 속죄'를 주장하는데 반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보편적 속죄'를 받아들이며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칼빈주의는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주장하는데 반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항거할 수 있는 은총'을 주장하며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칼빈주의는 '성도의 견인'을 주장하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성도의 타락 가능성을 인정하여 "구원받은 성도라도 계속해서 믿음 안에 있지 아니하면 다시 범죄하여 타락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알미니안주의적 입장은 신앙생활의 활성화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이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을 침해하고 인간의 의지로 하나님의 계획을 어느 정도 수정시킬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신인협동론'과 같은 잘못된 사고로 흐를 위험이 큽니다. 그래서 칼빈주의의 경직성도 탈피하고 알미니안주의의 위험성도 탈피하기 위해 나온 중간적 성격을 가진 것이 '웨슬리안 알미니안주의'입니다. 오늘날 장로교 이 외의 대부분의 복음주의적 교단은 이러한 입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웨슬리안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의지를 전적으로 무시하지도 않고 그것을 앞세우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요소에서 인간의 의지를 말하지만 그 의지는 성령의 인도함을 입는 의지임을 주장하여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중간적 입장을 취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떠한 입장이 더 정통적인 것인가를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정과 자유의지'에 관한 성경적인 확실한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교단이 칼빈주의 또는 웨슬리안 알미나안주의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특히 한국 실정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자기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으면 '정통적이 아닌' 단체인 것처럼 하는 경향입니다.
우리는 정통주의자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무지한 태도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정통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것에만 집착하는 아집은 대단히 나쁜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정통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통'을 쫓는 것이 아니라 '아집'을 쫓는 경향이 많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집에 사로잡혀서는 안될 것입니다. 말씀에 의거하여 항상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가 있어야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의 폭도 더욱 폭넓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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