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동엽 http://blog.daum.net/ipssen
우리의 신앙생활의 최대의 관심사는 경제적인 십일조 문제이다.
어떤이는 십일조가 축복의 통로라고 한다. 그러나 작은 봉급자들은 생활이 너무나 빠듯하다보니 십일조를 힘겹게 생각한다. 그렇다고 안할수도 없다. 또한 제법 큰 사업가들은 너무 큰 액수인지라 실지보다 적게 내자니 양심이 허락치 않다보니, 결국 십일조에 대해서 상당한 고민거리를 않고 교회생활하게 된다.
그래서 본인은 이제 이러한 걱정과 고민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믿음의 자유와 기쁨을 가질수 있는(요15장11절) 해답을 성경을 통해서 들여다 보기로 하겠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에서는 그렇게도 중요하게 여기는 그 십일조 문제를 세계 여러나라 교회들이 그것을 일절 철폐했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위에서 본바 같이 세계교회가 일절 폐지했던 그 율법의 십일조가 한국교회에서는 성도들의 믿음생활가운데 깊숙히 개입해서 프리즘안에서 굴절되고 채색된체로 마음속에 자리매김하고 있다는것이다.
과거 어둠의 암흑 시대를 장식했던 중세교회가 지금은 클린 이미지로 우리 사회에 어필되고 있지만, 그러나 현 개신교인 한국교회는 도저히 포기를 할 수 없는 자본주의적 맘몬 웰빙복음으로 거의 보편화 되어있다.
한국교회의 십일조 제도는 한국교회의 로또이며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기도 하다. 이에 한국교회는 십일조제도라는 뭉치돈으로 인공호홉기를 달았다. 만일 이 십일조제도가 없었다면 한국교회는 이미 뇌사상태일에 빠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머지 한국교회는 현재 이것을 실제적으로 인간의 영혼구원보다도 더 강한 이미지로 브랜드화 하고 있는 현 실정이다.
이 십일조 제도는 처음 복음과 함께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백신이 없는 순수한 한국 교회에 상륙했다. 그래서 이것을 통한 더 많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집단 유혹과 기복적 혼혈주의가 가파른 편향성으로 내리 달리면서 심한 동맥경화와 중병을 앓고 있는것이다.
이 바이러스는 순수한 한국교회의 거룩성과 십자가를 근본적으로 무력화시키면서 비판없는 성역화로 모든 성도들의 뇌리에 고착화 돼 있다.
한국교회 목회자자들은 이 커튼 넘어에 자신들을 숨기고, 기복(祈福)과 율법의 굴레라는 덫으로 성도들의 영혼을 옥죄며, 실존의 자유를 속박하며, 순수 신앙을 이데올로기로 변질시킨후 자신들은 여기에 안주한다. 영혼의 숨결이 하나의 종교적 의식으로 대체되어가는 서곡이다 .
여기에 도취해 있다보니 이들은 펨토초라는 세계에서 영원히 사는 걸로 착각들 한다.
그러나 찰나로 흘러가는 시간은 반복을 모르고 붙잡을수도 멈출수도 없고 결국 죽음이라는것을 통해서 다시 거둬간다.
이것은 곧 어느 누구도 비켜갈수도 넘볼수도 없는 이세상의 최고법으로서 해소불가한 대립이요, 우리삶의 지울수없는 표지이며, 우리의 현존과 상존이 지니고있는 수수께끼의 본질이요 총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영혼 없는 페르소나(mask-가면)를 예수께서는 경고하셨다(마7장15절).
(마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원래 이 십일조 제도는 중동지방 전역에서 행해졌던 고대 관습인 일종의 세금형태이다. 당시 모든 국민은 누구나 납세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고대역사지리학, 고고학이나, 고문서학, 사회인류학, 즉 그 시대의 인종분포 또그들이 먹었던 음식, 길렀던 목축업, 생활습관, 그 지방을 둘러싼 여러 종합적인 자료등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전문 분야에 대한 전공한 학자가 거의 전무하다. 설상 그것에 대한 전공학자가 있다손 치도래도 한국교회만의 워낙 예민한 사안인지라 한국교회의 독특한 풍토상에서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절대 희박하다. 이러한 베일속에 가려져 있는 이 실체들를 속속히 해부해 들춰낸다는 것은 보장받을수 없는 매우 위험스럽고 부담스런 뇌관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가 다 그렇지는 않지만 베일속에 숨겨 있는 것을 벗기고 나면 허상만 남기 마련이다. 이 허상을 잘 포장하여 이용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결국 73%의 샤머니즘과 신비주의, 기복신앙만을 양산해 냈다. 그런 부분적 그 오류가 놀라운 생명력을 얻어 한국교회 시스템 전체를 장악한다.
[말라기 3장 10절]"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교회가 돈을 불리는데 가장 근거가 되는 곳이 바로 이 구절이다. 모두 초관심사로 워낙 예민한 사안이기에 이해를 돕기 위해 원문을 표기해 본다.
연봉 1억원이 넘는 근로자가 10만명을 넘어섰다지만 사실상 전체 실업자 수가 400만명에 달한다.
종합부동산세를 부담하는 미성년자가 400명이 넘고있는 반면 지금도 점심 끼니를 거르는 결식아동 초등학생이
60만명에 달하는 것이 또한 우리 사회다.
릭 워렌 목사: 순자산 약 287억 7,500만 원
빌리 그래함 목사: 순자산 약 287억 7,500만 원
크레플로 달러 목사: 순자산 약 310억 7,700만 원
조엘 오스틴 목사: 순자산 약 460억 4,000만 원
베니 힌 목사: 순자산 약 483억 4,200만 원
팻 로버트슨 목사: 순자산 약 1,150억 원
케네스 코프랜드 목사: 순자산 약 8,750억 원
(히)차라프(צרפ) (Trial) |
(헬)굼나시아(gumnasia) |
시련연단(히5;14) |
(히)나싸(נסה)(Temptation) |
(헬)페이라조(peirazo) |
시험하다(test,) |
(히)빠한(בחנ)(Prove) |
(헬)도키마조(dokimazw) |
마음.삶 증명하다 |
그래서 말라기 3장 10절의 '시험'은 차라프(צרפ-Trial-시련.혹은 연단)도 아니고, 나싸(נסה-Temptation-시험하다)도 아니고 오직 빠한(בחנ- "Prove -마음과 삶으로 증명하다")이다. 이같이 시험이란 용어를 잘못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시험해보라고 까지 부추기는 것은 성경 원어에 대한 얕은지식이다.
성경의 다른 모든 여러 곳에서도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고 할 때 '시험' 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나싸(נסה)(test, tempt)이지만, 그러나 말라기 3장10절의 본문의 시험은 우베하노니-ובחנונ)이다. 즉 '마음과 삶을 통해서 나를 입증해 보라는 것이다.
히브리어 성경이나 헬라어 성경은 모두 이 두 단어를 명확히 구분하여 번역하고 있지만 우리말 성경은 구분 없이 모두 '시험하다' 라고만 번역함으로서 원어에 대한 깊이가 얕은자들의 혼란만 가중된다.
시험이란 용어 사용에 있어서 인간은 시험 할 수 있으되 하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다. 말라기 3장 10절의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는 십일조 많이 바치라는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을 시험하면 절대로 안된다.
결국 성경 이곳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말씀은 모두가 마음과 삶으로 살피고 입증하라는 말씀이지 하나님을 향하여 흥정하고 시험라는 내용이 아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시험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특히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한다면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자초하는 행위가 된다.
그리고 말라기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등을 돌렸던 백성이 이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와 관계회복과 메시아 오심에 대한 약속이다. 제사장들과 레위인이 흠이 있고 의롭지 못한 예물을 하나님께 가져왔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예물을 받지 않으셨지만 메시야가 오셔서 그들을 깨끗케 하심으로써 의로운 제물을 드리실 것이기 때문이다(말3장3절). 그 때 하나님게서는 이스라엘의 제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열국의 제물도 받으시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가 바로 바른 헌물과 제물을 드리는 온전한 제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도 십일조를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 몇군데 있다.
마23:23, 눅11:42, 18:12, 히7:1-10 이다.
(마23:23, 눅11:42, 18:12) '너희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들을 행하고 저것들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내용이다.
이 말씀도 십일조 열성 지지자들에 의해서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구약에서와 같이 십일조 실행을 주장하려고 하신 의도가 아니라 형식을 일삼는 바리새인들을 교훈 하려는데 초점이 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남에게 나타내고 자랑하고 보이기 위해서 보통 사용할 수 없는 조그만 땅에 음식의 향료로 사용하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를 심어 얻었는데 그들은 그것까지 세밀하게 구분해서 십일조를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조그만한것, 별 가치 없는것, 세부적인 것 까지도 십일조는 하였지만 종교적면에서 가장 중요한 의(義)=공의(公義)[미쉬파트 משפט], 인(仁)=자비(慈悲)[헤쎄드 חסד], 신(信)=(信仰)[에문 אמנ] 즉 바로 신앙의 본질을 버렸다는 그 모든 외식을 향해 예수님은 책망하신 것이다.
헬라어 원전을 살펴보면----
ouai umin, grammateiV kai farisaioi upokritai, oti apodekatoute to
우아이 휘민 그람마테이스 카이 파리사이오이 휘포크리타 호티 아포데카투테 토
Woe 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because ye tithe the
화 있을찐저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여! 외식하는 십일조를
hduosmon kai to anhqon kai to kuminon, kai afh kate ta barutera tou nomou
헤두스몬 카이 토 아네돈 카이 토 쿠미논 카이 아페 카테 타 바루테라 투 노무
mint and the dill and the cummin and ye{haev}left the heavier things of the law,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버렸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바것들인 율법의
thn krisin kai ton eleon kai thn pistin tauta de edei poihsai kakeina mh afienai
텐 크리신 카이 톤 에레오온 카이 텐 피스틴 타우타 데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아페이나이.
judgment and mercy and -- faith but these things it behoved to do and those not to leave
의와 긍휼과 신뢰는 그러나 이것들도 행해야 했으며 저것들도 버리지 말아야 했다.
위의 원전에서 보는바 같이 여기 '행하다'의 poihsai(포이에사이) aorist는 계속. 완료. 반복의 뜻을 갖지 않고 단순히 '과거동작의 때' 그 때만을 나타내는 능동형 부정시제 동사로서 원형 포이에오( poiew)에서 유래했다. 그러니까 계속 반복해서 하라는 것이 아니고 십일조를 시행 했을때의 그 시점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afienai(에피에나이) 는 '버리다'의 뜻으로 현재 능동 부정과거 시제인데 원형은 에피에미(afihmi)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저것들 (kakeina-카케이나) 즉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도 행했었어야'했지만, 이것들'(타우타-tauta) 즉 의와 긍휼과 신뢰는 더 중요하게 행했었어야 하는 그 세부지침에 충실의 당위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이지 꼭 그렇게 앞으로도 계속 행하라는 명령형이 아니다. 왜냐하면 동사가 부정과거 시제로서 그 때 그 행위 동작만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허지만 시기적으로 이 때까지는 예수님도 십일조를 인정하셨다고 볼수 있다. 예수님이 십일조를 인정하시고 당위성을 두신것은 아직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 사건 전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시기 전은 예수님께서도 다른 율법인 할례, 안식일, 규례들도 지키셨다. 이 때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아직 완성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구약의 율법들이 유효한 시기이며, 십일조에 대해 충실 해야함은 마땅하다. 이 때엔 성전 예배도 진행 중이었으며, 제사장들과 레위인은 그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 십일조에 필요로 한 시기였다.
율법의 마침인 십자가 사건 전 까지는 예수님도 모든 율법을 지키셨다(갈4장4절). 당연히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십일조를 강조하셔야 마땅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바로 시기와 때이다.
십자가 사건이후엔 십일조를 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성전이 헐리고 제사장이 없어 졌기 때문이다. 십일조가 성립되려면 분명하게 성전과 제사장이 필수 요건이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 이 말씀은 십일조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없애 버리신다는 의미이다. 성전이 없으면 레위지파의 제사장 임무도 종결 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십일조 뿐만 아니라 성전도, 안식일도, 제사장도, 할례도, 제물도, 레위인도 모두 끝난버린것이다. 여기의 사흘만에 다시 일으킬 성전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의미한다. 주님의 몸이 부활했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율법에 속하는 십일조를 지킨다는 말인가? 예수님이 완성하신 율법을 다시 인간들이 미완성으로 만들겠다는 것인가? 십자가 사건을 무력화 시키겠다는건가?
초대교회를 보드래도 일반 헌금에 대한것은 언급되어 있지만 십일조 했다는 기록은 전혀 찾아 볼수가 없다. 그래서 바울도 역시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기 때문에 제자들도 사도들도 초대교회 성도들도 십일조 제도가 유대교의 다른 율법과 함께 폐지 된 것이 당연시 하였다. 그래서 신약의 모든이가 침묵하고 있다.
율법이 다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에게서 성취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십일조가 바로 멈췄다. 율법은 그 자체로는 완결되지 않고, 늘 쉼이 없고, 늘 불안해서 참 안식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향해서 달리고 결국은 그리스도에게 와서 구약의 모든 약속들이 다 성취 되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동일한 하나님이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의를 이루셨다. 그래서 십일조(율법)는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과 함께 종지부를 찍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교의 유대인 조차 생활의 법으로 삼았던 그 율법의 십일조를 시행할 수도 없고 또 시행하지도 않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믿는자들이 다른제도들은 그대로 놔두고 유독 십일조만을 계속 시행 한단 말인가.
따라서 한국교회가 유대교의 율법의 하나였던 그 십일조를 다시 강요하는 행위는 예수의 십자가를 무르고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서 돌성전도 세우고, 안식일도 지키고, 제사도 지내고, 할례도 지키고, 절기도 지키려고 하는 의도와 전혀 다를바 없다.
교회 운영에 대한 돈은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도 목적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수단을 정당화 해서 가르치는 교회지도자들 때문에 오늘의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하는 이유중에 하나이다. 인간의 생명과 영혼은 보이지 않고 집회 참석 인원 머릿수에만 관심두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람들의 머릿수가 아니라 성도들의 가슴속 심장 박동수를 세어야 된다. 막대한 십일조와 헌금에 눈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사람들의 머리 숫자만 계산하고, 정부에서조차도 동네 구멍가게를 살리기 위해 대형마트 버스 돌리는 것을 폐지 시콌는데, 더 모범을 보여야 할 교회가 대형 버스를 이용해 이 동네 저 동네 돌아 다니면서 작은 교회교인들까지 끌어오고, 또 대형 교회들은 지방 곳곳에 지성전을 만들어 놓고 목회자 개인 목회 성공의 자랑거리로 박수의 향기에 취하고 자신들의 능력과 치적에 날개를 단다.
어느 동네에 대형마트가 들어서면 그 주위의 자그만 가게 40여개가 타격받지만, 그러나 기업형 대형교회가 들어서면 그 주위의 작은교회 수백개가 문을 닫는다.그래서 한국에 자그만 교회들은 그 동네에 대형교회들이 들어 설때마다 공포감과 비명소리만 가득하다.
지금 한국교회는 르네쌍스가 필요하다. 애초 성도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희망은 교회가 성도들의 안식처였다. 그래서 성도들의 가슴은 뛰었고, 성도들의 교회사랑 열정은 폭발하듯해서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칠때엔 교회는 언제나 우산이 되어주곤 했다.
목회자는 목회를 자기의 생명과도 같은 도덕성과 자기 신앙의 인격을 나이테처럼 쌓아 소중한 가치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 화장을 고친다고해서 달라지는건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한국교회는 부활을 꾀해야 한다. 제도적인 시스템에 새로운 모니터링과 정비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디자인 하신 성경적 교회 본질이 회복 되어야 한다. 순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돈에 대해서 부자가 천국가는 것이 밧줄(kamilon 카밀론)이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바울도 돈은 일만악의 뿌리라고 말했다. 이사야서에서는 오히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제물을 역겨워하며 내치시는 하나님의 분노를 볼 수 있기도 한다(사1:12).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깨끗해지려면 우선 돈의 방향부터 바꿔야 할것이다. 그래서 천주교는 지금도 연보라고 한다. 연보는 자기 재물을 내어 남을 도와주는 것으로 일종의 구제금에 더 가깝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연보를 거둬서 바울에게 내 놓았다. 교인들이 십시일반으로 교회 운영비나 교회일을 하는 자들을 위해 내어 놓는 것이 연보이다.
고후 8장13절에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케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케 하려 함이라 했다.
한국에는 5만개 교회, 15만명의 목회자, 967만명의 성도중 교회 출석교인 500만명(어떤이는 1200만명이라지만 이 숫자는 환상의 꿈에서 피어나는 신기루일 뿐이다) 가운데 1만명 이상 모이는 교회가 19개이지만, 그러나 아직도 50명 이하 미자립교회가 36,000개나 된다. 더 나아가 세계70억인구중 하루세끼 식사 해결이 안된숫자가 9억7천만명이나 된다. 하나님이 요구하는것은 율법보다 더 중요한 '의와 긍휼과 신'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된다고 오늘도 말씀하신다.
새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포함해서 모든 율법을 완성 하셨다. 은혜 받은 자는 그 은혜를 나누는 차원에서 사랑의 연보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십일조를 부지런히 잘 내서 백배 천배 만배 복받으라고 한다. 또 십일조 영웅 록펠러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십일조 했더니 복을 받아 후대 자자손손 복받고 아주 잘 산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록펠러에 대해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는 이렇게 혹평했다. 록펠러가 선행을 얼마나 많이 했든지간에 상관없이, 그가 그 수많은 재산을 쌓기 위해 그가 저질렀던 그 악한 행동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납할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록펠러! 그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조금만살펴봐도 금방 알수있다. 다음은 록펠러의 그 이면에 숨겨진 행동이다. *아래 별도 록펠라에 대한 글 참조.
한국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물량 팽창주의적 메가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빚어낸 역사적 진화물이기도 하다. 이 신 자본주의 물결에 젖은 교회정체성은 가장 무게를 두어야 할 신앙도 십자가도 사라져버린 오로지 교인들을 관리하는데만 집중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목회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대형화만를 추구한다.
이에 편승한 얄팍하고도 재치꾼 교인들은 큰 교회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해 그곳에 둥지를 튼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구원할 힘은 대형의 힘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작고 약한 것들을 택해서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것을 알아야 할것이다.
세상에서 제멋대로 살더라도, 부모 친척이 돈없어 굶어가도, 이웃이 배고파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교회에 아낌없이 무조건 큰 헌금만 하면 하나님이 축복해주실 것이라는 고르반사상때문에 한국교회는 전반적인 사회의 부패요인으로 심한 배척과 질시의 융단폭격을 받고 있다.교회가 비호감 내지는 혐오집단 혹은 공공의 적으로 매도된 현실은 각종 매스컴이나 인터넷 SNS, 여론등을 통해서 알수 있다.
한국의 어느 메가교회들은 촘촘한 셀 조직을 만들어놓고 전교인 저인망식 총력전도, 노방전도,심방전도등으로 이웃교회 교인들까지 스며들도록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주일예배로만 끝나지 않고 월요일부터 오는 일요일까지 한 주간 내내 교회내에서 북적거리게 만든다. 즉 셀 소그룹교육, 제자반, 행복학교, 교리학교, 미래목회연구,큐티학교, 밤10시기도회, 월요중보기도회, 축복안수기도회, 목요영성집회, 기도학교, 생수의 강, 큰숲 회복수양회, 후원자 수양회등 시장터서나 볼수 있는 혼난법석을 일으켜 정신을 빼놓게 한다. 일요일의 순교자로 만든다.
그리고 또한 십일조를 안내면 안되도록 하는 십일조제도 당위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파 한다. 어떤이는 공개 설교 시간에 십일조를 안하면 저주를 받아 암이 걸려 구원까지 받지 못한다며 갖은 으름장을 놓는자도 있다. 성도들의 영혼과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아무리 사람의 혀에는 뼈가 없다고해서 마치 뼈대 없는 집안에서 막 자란 아이처럼 이렇게 말하는자는 23쌍의 염색체 가운데 가장 저열성이 아니고서 이렇게 말할 수 없다.
또 새해 연초 교회내 여러봉사직분들을 임명 조건으로 십일조 이행 동의서에 강제 서명토록 한다. 그래서 만일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교회내의 여러 봉사들을 제한하고 제외시키며 믿음 없는 자들이라고 낙인 찍는다.
이들의 시계는 과거 중세 그때를 향해 거꾸로 돌고 있다. 어디 교회내 봉사기관이 너 한 조각 나 한 조각 나눠먹는 피자 조각이란 말인가. 세탁기 팔 때 끼워주는 하이타이인가? 봉사는 어디까지나 십일조 내고 안내는 조건적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지난 과거 한국교회 성도들의 순수 신앙은 많은 기적을 가져왔다. 하지만 지금은 기억속의 희미한 화석으로만 남아 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는 예수님의 교훈은(눅10장27절) 어디론가 증발돼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다. 어떻게 이들과 같은 산소를 호홉 하고 어떻게 이들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야 할지 고민이 깊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향한 의와 인과 신이 십일조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셨음에도(마23:23), 그리고 또 예수님은 가난한자들이 복이 있다고 했지만(눅6:20) 오희려 그들은 십일조 잘 내는것이 축복의 통로라고 가르친다.예수께서는'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하셨는데 오희려 그들은 십일조와 부담스러운 헌금으로 무거운 멍에로 짐을 씌우고 있다.
그래서 현재 오늘의 한국 교회는 그러한 가르침 때문에 기복신앙으로 심한 중병이 들어있다. 복음을 듣고 교회 등록과 동시에 신자들은 교회 조직에 촘촘히 스며 있는 기복주의적 그물망 속으로 무심코 진입해서 거대한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그 공동체의 멤버가 된 그들'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각종 힘겨운 헌금과 교회제도로 인하여 빛이 바랜다. 교회마다 쏟아내는 정책 메뉴들, 목회자들의 야심 찬 목표계획을 감당하면서 오늘까지 지탱왔다는 것이 경이롭다.
이에 신자들은 '신앙의 본질'을 버리고 '기복 전문인' 이 되기로 선회 한지 오래됐고, 돈에 대한 집착력은 하늘을 찌를 정도다.
이들에겐 맘몬이란 배타적 울타리 안에 스스로 갇혀 물량주의의 일그러진 모습으로 진실된 신앙에서 멀리 떠나 있다. 91년전 이 땅의 교회들은 호화로운 대형 건물이 아니라 불타 버린 47개 예배당의 폐허에서 '빛과 소금' 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자꾸 막장으로 치닫고 있는 임박한 예수 재림의 9회말과 같다.
자신의 마지막 타석의 무리한 스윙으로 자신들의 목회게임을 승부처로 뒤집으려는 그런 부담스런 행동을 거침없이 저질른다. 교회건물 짓는데 제1,2 금융권 은행 빚 10조원, 한달 이자만도 600억원.아프리카 전체 인구 6억8천만명의 절반인 3억4천만명이 한달간 먹을양식을 생명없는 흙속에 던진다.몸 속에 '분열의 유전자, 왜곡의 DNA, 허영의 염색체' 라도 지니지 않고서야 이렇게 까지 빗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예배당 건물 짓는 것을 "하나님 뜻" 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단지 자신의 욕망을 채위기 위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일부 교회들은 오늘날 교회의 세속주의, 부패, 타락, 무능력의 현상을 생산해 냈다.
그런데 큰 것과 화려한 것을 추구했던 건물은 다 무너졌다. 솔로몬은 18만명을 동원해서 성전과 지성소를 모두 금으로 장식한 최고의 성전을 지었지만 얼마안가 바벨론 느브사라단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A.D.63년경 알비누스(Albinus)총독이 80년동안 지었다는 헤롯성전도 돌위에 돌하나 남지 아니하고 무너져 버린 것을 우리는 성경과 역사를 통해서 잘 알수가 있다. 과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유럽의 교회의 건물들도 이제 어렴풋한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성공에 대한 ‘집단 강박증’은 인간 사회의 마지막 보루인 ‘자기 성찰’의 기능마저 마비시킨다.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너나없이 승자가 되겠다고 달려온 결과는 정작 어떠한가. 더욱 안타까운 것은 신자유주의의 화려한 수사(修辭)에 현혹된 우리의 불행한 선택이 부메랑이 되어 현대교회의 성도들의 목을 옥죄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목은 가만 있는데 바람 소리들만 요란하다. 20세기 교회 문맹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말했지만, 21세기 문맹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좀더 긴 호홉을 가질 필요가 있다.개혁은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파충류인 뱀은 자신을 보호해주는 껍질을 목숨을 걸고 벗는다. 건강할수록 자주 벗는다. 탈피(脫皮)를 멈추는 순간 껍질은 나를 가두고 죽이는 감옥으로 변한다. 개혁은 진리의 혁명이다. 진리는 신앙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한국교회는 진리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의 한국 교회 지도자들일부는 본인들은 회개하지 않으면서 다른이에게 회개하라고 큰 소리 친다. 요시야왕은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애통하며 자기 옷을 찟고 유대민족의 죄과를 통회 했던 것처럼 한국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진리의 생명의 말씀을 찾아야 한다. 교주적인 레토릭 설교만을 되풀이하는데서 벗어나 이젠 예수 가르침의 이행을 냉정한 본질로서 짚어봐야 한다.
나침반은 아무리 돌려도 북쪽을 가리키는 바늘이 언제나 북극성을 향하고 있다.변화를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목회자 자신의 지향점이 바뀌야 한다. 반딧불이 짙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이유가 자기 안에 빛을 간직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온전히 따뜻하게 할 수는 없지만 마음의 눈으로 세상에 온기를 나눌수 있게 해야 한다.
촛불을 세상을 향해 밝히자 하기 보다는 목회자 자신들의 마음속에 켜야 한다. 걸레는 다른 사물에 묻어 있는 더러움을 닦아내게 위해 자신의 살을 헌다. 목회자는 그 비인간화의 속살을 고민 해야된다.
성직자라는 직업이 원래 강하다고 하는 것은 오로지 그들에겐 아무것도 잃을게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땅도, 아파트도, 직장 의자도 없다. 신부와 승려에겐 가족도 없다. 스님은 쇠고기도 먹지 않는다. 버릴 것도 없는데 그나마 남은 육신마저 고행으로 가볍게 만든다.
역사적으로 성직자들은 가벼운 몸과 강한 정신으로 세속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 넘곤 했다. 로마의 사자밥이 되면서도 굴하지 않았다. 카톨릭 신자들은 대원군의 칼날에 목을 바쳤다. 그래서 성경은 순교라는 뜻과 사도행전 1장8절의 증인(μαρτυσ-말투스)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
성직자가 그렇게 강하기 때문에 그들이 움직이면 세속이 긴장하고 떤다. 세상이 얼마나 흔들릴지 세상 사람들은 숨 죽인다. 심장이 두근 거린다. 그러나 안락에 빠진 교회지도자, 연봉이 몇억 혹은 몇십억 받는 자들이 이중과세라고 세금한푼 안내려는 그들, 고상한 깃발 아래 어김없이 광기(狂氣) 에 편승해 오면서 장이 서게 하고 좌판을 깔고 판돈을 챙기는 이들, 성경적이 아닌 십일조를 성경적인 것처럼 말하며 돈 없어 십일조 못하는 성도들을 왕따 시키는 이들, 그러한자들 앞에는 어느 누구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
마5:18 에서 예수님께서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하셨고,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그것을 다 이루시었고, 다 성취 하셨다(요19:30).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뤄셨기 때문에 십자가 이후에는 구원의 길로서 십일조 기능은 완전히 종결 되었다.
구약의 피 제사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제사에 비하면 그림자요 예표였고 그리스도의 제사는 실체요 그 원형이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구약의 모든 제도들이 그림자 라고 했다.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다. 구약의 모든 제도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므로 없어져 버렸다.
또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하기 때문에 히브리서에서는 모세와 그리스도 관계를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로 묘사 하면서 율법의 기능 종결에 대하여 바울보다 더 과격하게 말했다(히7장19절).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희생이 율법의 모든 일점일획까지도 다 이루셨기 때문에(히7장27절), 또 옛 계명이 무익하므로 율법을 폐하셨고(히7장18절), 바울 역시 갈5:4에서 '율법으로 의롭다 하려는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다'고 까지 말했다.
종말론적인 성취와 폐지,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것이 성취되므로 구약의 모든 제도들이 폐지된 것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영화에서 실제가 됐다. 옛 언약의 약속과 선지자의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고 종말론적으로 성취됐다. 옛 질서는 해소되고 제거되고 없어져 버려서 전혀 새로운것이 생긴 것이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지막으로서 그리스도가 율법을 다 지키고 성취하므로 십일조까지 폐쇄해 버렸다. 그리스도가 성취 했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모든 정죄를 다 담당 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십일조)이 그리스도를 믿는자들에게서 적용되지 않는다.
대신 빚을 다 갚아 주었기 때문에 빚쟁이의 빚 메이는데서 끝났음과 마찬가지이다. 모든 율법(십일조)이 종결되고 그 세력이 파괴 돼서 더 이상 그것이 나에게 구속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완전 무력화 돼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도 받을 필요가 없고, 안식일도 지킬필요가 없고, 절기도 지킬 필요가 없고, 십일조까지 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옛 언약은 새 언약이 옴으로 자동 폐기 되었다. 전자 제품도 신제품이 나오면 옛날 제품은 모두 폐기하기 마련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십일조)의 마침이고(롬10장4절) 완성인데도, 그래도 옛 언약의 백성들은 제사 제도와 십일조등을 계속 할 것을 미리 알고, 하나님은 성전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찟고 자신의 심장을 내 보이시면서 물리적 방법으로 완전히 폐지 하셨다. 성전이 있는한 레위 제사가 계속 될 것이기 때문에 AD 70년에는 로마의 디도 장군을 들어 성전을 옹호하던 유대인 110만명을 죽여버렸고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훼파시켰다.
그 후 성전 재건은 아직도 이뤄지지 못했고 또 시온주의 결과로 유대인들이 2차 대전후 팔레스틴에 귀환하여 이스라엘을 세웠어도 아직도 성전많큼은 세울수가 없다.성전이 있으면 십일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전만 아니라 제사장 가문을 완전히 허물어 버리심으로 지금까지도 사독의 뒤를 이은 제사장의 후예를 확인해 낼 길이 없다. 그들의 성씨가 코헨(כהן) 이란 사람을 찾아 제사장으로 세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코헨은(כהן)히브리어로 제사장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헨(כהן)이라는 성씨를 가진 자도 찾을 길이 없다.
이 십자가 완성 때문에 한국만 제외한 세계 모든 교회가 이 사실을 깨닫고 십일조를 오래전에 완전 폐지하였다. 한국 교회는 속히 개혁과 회복이 필요하다. 가장 시급한 일이 이 십일조 제도를 중단 해야 한다. 십일조가 복의 근거라는 믿는 그 믿음의 신기루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맘몬 우상을 배격해야 할 것이다.
현실의 문턱에서 묻는다. 교회는 무엇으로 생존하는가. 입만 열면 물질축복만을 말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말씀 인가, 아니면 85종류 헌금에 짓눌린 성도들의 한숨 소리인가.
'너와 나' 의 시간이란 '항상 지나감'이다. '과거란 항상 미래에 의해 밀려나고 미래는 항상 과거를 뒤쫒지만, 과거와 미래는 둘 다 영원한 현재 안에서 창조되고 흐른다.
어둠이 아무리 길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아침이 온다. 아무리 높은 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도 강물은 저 혼자 길을 만들어 바다에 이른다. 복수초는 혹한을 뚫고 땅 위로 올라와 눕고 서기를 반복하면서 스스로 체열을 발산해 주변의 눈과 얼음을 녹이며 꽃을 피운다.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열을 내고, 태양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따뜻한 암술 주변으로 곤충들을 모으고 혼신의 힘을 다해 수정한다. 신비한 생명력을 간직한다.
꽃 향기는 주머니에 싸도 퍼지는 법이다. 단단한 얼음은 작은 송곳에 쪼개지고, 두터운 눈은 한 줄기 봄바람에 스러진다. 생명의 신비가 있고, 우주의 문은 열린다. 거센 폭풍이 몰아칠 때 다른 새들은 처마 밑에 숨지만 독수리는 강한 양 날개로 비행을 즐긴다. 사람의 영혼을 천상의 세계로 비상하게 하는 양 날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하심이다.
이제 우울한 그늘에도 따뜻한 배려의 시선을 담고, 숲과 도시, 빛과 그늘을 두루 살피는 한국교회의 순혈주의를 끝까지 바램은 모든이의 소망이어야 한다. 푸근한 모습으로 향기를 품고 신비로운 색깔로 사랑의 느낌을 물씬 풍겨주는 한국교회말이다.
비록 지금껏 한국교회는 가시밭에 휩쌓여 상처투성 일지라도 필히 개혁을 이뤄내야 한다. 과거 종교 개혁자들에게도 가시가 있었기에, 그 가시가 종교개혁을 이뤄냈다. 가시에 찔리면 고통스럽지만 그럴수록 교회는 든든히 바르게 서 가게 된다. 동풍이 불면 서쪽 가시에 찔리고, 서풍이 불면 동쪽 가시에 찔리고, 찔리울수록 진리의 빛은 더 발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혁이라는 치료약이 우리 영혼에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훗날 이 세상의 아름다운 소풍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돌아갔을때 '그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어' 라고 우리 모두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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