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 바른이해

                  ☞고동엽 http://blog.daum.net/ipssen 

   우리의  신앙생활의 최대의 관심사는 경제적인 십일조 문제이다.

어떤이는 십일조가 축복의 통로라고 한다. 그러나 작은 봉급자들은 생활이 너무나 빠듯하다보니 십일조를 힘겹게 생각한다. 그렇다고 안할수도 없다. 또한 제법 큰 사업가들은 너무 큰 액수인지라 실지보다 적게 내자니 양심이 허락치 않다보니, 결국 십일조에 대해서 상당한 고민거리를 않고 교회생활하게 된다.

 

그래서 본인은 이제 이러한 걱정과 고민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믿음의 자유와 기쁨을 가질수 있는(요15장11절) 해답을 성경을 통해서 들여다 보기로 하겠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에서는 그렇게도 중요하게 여기는 그 십일조 문제를  세계 여러나라 교회들이 그것을 일절 철폐했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다음은 십일조를 폐지한 세계교회 나라들

 


*영국..............1688년 폐지
*프랑스............1789년 폐지
*독일..............1807년 폐지
*스페인 ...........1841년 폐지
*아일랜드 .........1869년 폐지
*스코틀랜드........2000년 폐지
*스웨덴 .....세금형태로 교회세를 징수 하였으나, 2000년에 공식적으로 폐지
*이탈리아 ...세금형태로 0.8% 받아 그것을 교회 크기의 비율대로 나눔
*핀란드 .....시에 따라 다르지만, 세금형태로 교회세를 1%~2.25% 징수
*스위스 .....공식적으로 걷는 곳은 없고, 일부 주에서 2.3%까지 세금형태로 거둠
*홀랜드 .....십일조 및 각종 헌금을 일절 철폐하고, 교인들의 생활수준에 따라 갹출
*오스트리아..국가에서 걷는 세금형태(교회세)로 자기 수입의 1%만 냄
*덴마크 .....시에 따라 차이가 조금 있지만, 국가에서 걷는 세금형태로 1%만냄
*북미의 연합감리교회, USA침례교, 미국장로교..............등 모든 교파..모두 폐지 
 (다만, 미국의 남침례교회, 오순절교회 등 극히 일부의 교단은 십일조를 하고 있다)
*멕시코 등 라틴아메리카 여러 국가들................................... 모두 폐지
*그리스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동방정교회,영국국교회(성공회), 루터교회 .모두 폐지
(동방교회는 애초부터 십일조란 개념 자체가 없다) 
*전세계의 개신교회들(아시아,중동,중미,아프리카 등의 교회들)............모두 폐지
*전세계의 모든 가톨릭교회..............................................모두 폐지
*십일조 원조였던  이스라엘의 유대교조차................................모두 폐지
                                                    

 

위에서 본바 같이 세계교회가 일절 폐지했던 그 율법의 십일조가 한국교회에서는  성도들의 믿음생활가운데 깊숙히 개입해서  프리즘안에서 굴절되고 채색된체로  마음속에 자리매김하고 있다는것이다.

 

과거 어둠의 암흑 시대를 장식했던 중세교회가 지금은 클린 이미지로 우리 사회에 어필되고 있지만, 그러나 현 개신교인 한국교회는 도저히 포기를 할 수 없는 자본주의적  맘몬 웰빙복음으로 거의 보편화 되어있다.

 

한국교회의 십일조 제도는 한국교회의 로또이며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기도 하다.  이에 한국교회는 십일조제도라는 뭉치돈으로 인공호홉기를 달았다. 만일 이 십일조제도가 없었다면 한국교회는 이미 뇌사상태일에 빠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머지 한국교회는 현재 이것을 실제적으로 인간의 영혼구원보다도 더 강한 이미지로 브랜드화 하고 있는 현 실정이다.

 

이 십일조 제도는 처음 복음과 함께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백신이 없는 순수한 한국 교회에 상륙했다. 그래서 이것을 통한 더 많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집단  유혹과 기복적 혼혈주의가 가파른 편향성으로 내리 달리면서 심한  동맥경화와  중병을  앓고 있는것이다.

 

 이  바이러스는 순수한 한국교회의 거룩성과 십자가를 근본적으로 무력화시키면서 비판없는 성역화로 모든 성도들의 뇌리에 고착화 돼 있다.

 

한국교회 목회자자들은 이 커튼 넘어에 자신들을 숨기고, 기복(祈福)과 율법의 굴레라는 덫으로 성도들의 영혼을 옥죄며, 실존의 자유를 속박하며, 순수 신앙을 이데올로기로 변질시킨후 자신들은 여기에 안주한다. 영혼의 숨결이 하나의 종교적 의식으로 대체되어가는 서곡이다 .

 

 여기에 도취해 있다보니 이들은  펨토초라는 세계에서 영원히 사는 걸로 착각들 한다.

 

 그러나 찰나로 흘러가는 시간은 반복을 모르고 붙잡을수도 멈출수도 없고 결국 죽음이라는것을 통해서 다시 거둬간다.

 

이것은 곧 어느 누구도 비켜갈수도 넘볼수도 없는  이세상의 최고법으로서 해소불가한 대립이요,  우리삶의 지울수없는 표지이며, 우리의 현존과 상존이 지니고있는 수수께끼의 본질이요  총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영혼 없는 페르소나(mask-가면)를 예수께서는 경고하셨다(마7장15절). 

(마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원래 이 십일조 제도는 중동지방 전역에서 행해졌던 고대 관습인 일종의 세금형태이다.  당시 모든 국민은 누구나 납세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고대역사지리학, 고고학이나, 고문서학, 사회인류학,  즉 그 시대의 인종분포 또그들이 먹었던 음식, 길렀던 목축업, 생활습관, 그 지방을 둘러싼 여러 종합적인 자료등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전문 분야에 대한 전공한 학자가 거의 전무하다. 설상 그것에 대한 전공학자가 있다손 치도래도 한국교회만의 워낙 예민한 사안인지라 한국교회의 독특한 풍토상에서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절대 희박하다. 이러한 베일속에 가려져 있는 이 실체들를 속속히 해부해 들춰낸다는 것은 보장받을수 없는 매우 위험스럽고 부담스런 뇌관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가 다 그렇지는 않지만 베일속에 숨겨 있는 것을 벗기고 나면 허상만 남기 마련이다. 이 허상을 잘 포장하여 이용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결국 73%의 샤머니즘과 신비주의, 기복신앙만을 양산해 냈다. 그런 부분적 그 오류가 놀라운 생명력을 얻어 한국교회 시스템 전체를 장악한다.

 



[말라기 3장 10절]"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교회가 돈을 불리는데 가장 근거가 되는 곳이 바로 이 구절이다. 모두 초관심사로 워낙 예민한 사안이기에 이해를 돕기 위해 원문을 표기해 본다.

הביאו את־כל־המעשר אל־בית  האוצר ויהי  טרף בביתי
    베베티   테레프    비히   하오브차르   뻬이트  엘   함마세르   콜  에트  하비우
 in-house-of-me food that-he-may-be the storage  house-of into the-tithe  whole-of  bring
     나의집에    양식  있게할지니   창고에   나의집   십일조     온전한    들여
ובחנוני ארבות השמים נא בזאת אמר יהוה צבאות אם־לא  
  로  임   체바오브트   아도나이  아마르  바조트  나  하샤마임   아루보보트  우베하누니
  not  if   Hosts   Yahweh  he-says   in-this   now - heavens   floodgates   indeed-test-me
만일 그렇지 아니한--만군의-여호와가  -말한다-  그것으로  하늘들  문   나를 시험하여
אפתח לכם את והריקתי לכם ברכה עד־בלי־די׃
다이   베리  아드  베라카흐   라켐     바하리코티 에트   라켐    에프타흐
 room-enough not until blessing upon-you and-I-pour-out  for-you  I-throw-open 
풍족히 아니하나  까지   복을  너희위에    내가 부은다  너희를 위해      붓다.
 
 
세계 기독교인구 22억 7천만명이다. 이들 모두  세계모든교회가 '이 십일조제도'는 분명히 비성경적이기때문에 일찌기 모두 폐기 처분했다(위의 표 참조). 허지만 유독 한국교회만은 물질만능 적자생존의 자본 주의적 정서를  추구하면서부터 그 검은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진채로 계속 시행하고있다. 한국교회는 이 십일조 제도의 무리수와 자충수로인한 민낯 노출로 그 본질의 빛이 바래버렸다. 이런 일그러진 트라우마가 한국회의 성장 발목을 잡고 있다는것이 문제인것이다.
 
망원경을 통해 보아야 할 진리를 특징적인 몇 구절의 현미경적 시야가  프리즘 안에서 굴절되고 채색된 착시 현상때문에, 한국교회는 지금도 네모난 바퀴로 계속 힘들게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처음 이 십일조 제도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그들의 신앙행위 표현으로 삼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 지방의 많은 나라 즉 로마, 그리이스, 시리아, 카르타고, 우가리트 셈족 등에서 노동이나 전쟁 전리품으로 10분의 1은 문화적 관습속에서 이미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종교적 뿐만 아니라 세상의 통치자들도 일종의 세금 형태로 강제적으로 수탈했었다.
 
삼우엘상 8장 5절에서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달라고 사무엘에게 강한 요구를한다. 그 때 사무엘은 '만일 너희에게 왕을 세우면 너희들이 왕이나 궁정관리에게 십일조를 내야 된다(삼상8장 15절)' 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미 당시에 십일조가 성전만이 아니고 왕에게도 십일조를 바치고 있었슴을 알수 있다.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궁정 관리와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의 일을 가져 갈 것이며 너희는 그 종이 될 것이다"(삼상 8장5절).
 
고대 세속 종교에서 그들의 신에게 10분의 1을 바치는 의미는 땅은 신의 소유이며, 인간은 그 땅을 빌어서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라는 사상이 깊게 자리 하면서 십일조 기원을 삼고 있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왕을 하늘이 내린 신의 아들이라고 인정하고, 신으로 숭배 했기 때문에 왕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다.
 
창세기 47장 24절에는 애급인들은 바로왕에게 10분의 2를 바쳤다는 기록도 나온다. 이 같이 이 십일조 제도는 성경 구약율법에 정식으로 명시하기 이전에 모든 나라에서 보편적인 세금형태로 실시 하고 있었다.
 
다음은 구약성경에서 십일조가 등장하는 구절들이다.
 
먼저 창 14:18-20은- 십일조가 성경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살렘왕 멜기세댁이 빵과 포도주를 갖고 나와서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축복한다. 이에 대해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취한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댁에게 드린다. 그래서 어떤이는 이 십일조 제도는 이미 율법이 있기 전부터 존재했다 라고 하면서 이 구절을 들이 댄다.
 
허지만 이곳의 십일조는 멜기세댁의 제사장 직분이 레위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로서 영원한 대제사장, 즉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모형, 또한 멜기세댁이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것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핵심 내용이기에 십일조 적용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여기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율법 이전 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은 십일조가 절대로 될 수 없다.

오직 십일조는 땅의 소출과 가축 에만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십일조 이야기는 당대 이웃나라 보편화된 문화 따라 행했을 뿐이다. 그래서 율법 전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십일조가 있었다고 하는 주장은 맞지 않다.
 
 그리고 두 번째 창28:20-22 의-  십일조 내용도 야곱이 자기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피난해 도망가는중 하나님께서 자신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또 나중에 아버지집에 돌아오게 까지 인도해 주신다면 자신의 모든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하는 조건적 약속이지만, 그 후 야곱이 맹세한 대로 십일조를 바쳤다는 것도 없거니와 그리고 또 하나님은 인간들 같이 조건적 값싼 흥정의 대상이 될 수가 없으시다.
 
위의 두 아브라함과 야곱의 십일조 이야기는 당대  셈족 이외의 모든 문화권에서 널리 시행되었던 보편화된 문화의 관습일 뿐이다.
 


그러나 오랜세월이 지난후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정확한 십일조를 완전히 명문화 시키신다(레 27:34). 하나님은 십일조에 대해서는 '모세 율법'에 따라 시행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레27장30-33, 신12장5-12).
 
(레 27:30~34)-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또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십일조를 무르려면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할 것이요,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렘33:13, 겔20:37). 그 우열을 가리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무르지 못하리라.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니라.

이것이 곧 하나님이 확실히 정하신 법률안에 명하신 십일조 내용이다.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왕상2장3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곧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으라"(느12장44절).
 

십일조 제도가 정식 규범과 율례으로서 모세 율법에 등장하고, 많은 지파들중에서 땅의 소산을 얻을수 없는 레위 지파의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의식법이나 시민법과 함께 십일조제도가 주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핵심은  '오직 땅의 곡식과 가축에' 만 한정한다는데 가장 큰 의미가 담겨있다.  또 바치는 자들의 의지대로 함부로 하지 못하기 위해 막대기 밑을 통과하는 가축의 열번째를 드리도록 했다. 그것을 어기는 사람에겐 벌금으로 20% 더 내도록도 하였다.오늘의 교회에서 돈으로 내는것과는 개념이 전혀 다르다.
 


다음은 십일조 종류면에서이다.
 
제1의 십일조는 십일조의 십일조이다(민수기 18:26). 십일조를 받는 레위인도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아론 제사장에게 바쳤다(민18:26-29). 그런데 이것 역시 돈이 아니고 농산물이다(민18:27).  
 
제2의 십일조는 축제의 십일조이다(신명기 12:4-19, 신명기 14:22-29, 26:12-15). 하나님이 택하신 그 어떤 장소로 십일조를 가지고 가서 그것으로 잔치를 베푸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인 나그네, 고아, 과부, 자기친족, 종들이 그 십일조를 나누어 함께 즐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제3년차와 제6년차(안식년을 기준해서)십일조가 있는데 이것은 자기가 사는 이웃을 위한 구제금으로 사용하는 십일조이다.
 


우선 한국에는 세계 OECD 국가중 13위의 화려한 착시효과 탓에 모두들 선진국 수준의 삶을 누리고 있는것 같지만 고개를 조금만 돌려 보면, 출구 없는 세상 속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너무나 많다.

                                            

연봉 1억원이 넘는 근로자가 10만명을 넘어섰다지만 사실상 전체 실업자 수가 400만명에 달한다.

종합부동산세를 부담하는 미성년자가 400명이 넘고있는 반면 지금도 점심 끼니를 거르는 결식아동 초등학생이

60만명에 달하는 것이 또한 우리 사회다.


기초수급자가 140여만명,
건강보험료조차 내지못해 병원에도 갈수 없는자들이 150만세대,
겨우 기초노령연금 월20만원으로 생계를 이어가는자들이 185만명,
 
65세 이상 노약자 708여만명중 폐지팔아  8만원으로 한달 생계자가 200여만명,
그리고 그외 절대 빈곤층이 61.7%인  487여만명이다.

이들중 이 절대빈곤 때문에 자살 하는자들이 하루에 40여명이나 된다.  심지어 지난 5년( 2007-2011)간 자살수가 7만1916명이다. 이라크전쟁 사망자 3만8625명 거의 두배에 가깝다.
 
 '불명예 자살국가라는 세계 제1위' 자리를 10년간이나 계속 고수하고 있다.   통계청의 시뮬레이션조차 감당 못할 빛의 속도로 음지의 빈곤화가 진행 중이다.
 
그리고 세계 70억 인구 가운데 하루세끼 밥을 해결 안되는 인구도 9억 7천만명이나 된다고한다. 하나님은 이런이들과  서로 함께  나누라는 것이 제3년차와 제6년차 십일조이다(레14:28). 이렇게 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큰 복을 내리신다고 했다. 이것은 곧 사회보장 복지의 혜택이기도 하다.
 
현재 기독교 신앙정신으로 사회복지제도가 가장 잘 되어진나라가 북 구라파이다.  이것은 공동체가 나눔을 통해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굳게 의미하는것이 십일조의 본질이 담겨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엔 율법에 명시한 십일조제도를 잘 지켜나갔다. 그렇지만 이스라엘도 많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차적으로 변질 되어  결국 아모스 시대에 가서는 형식적인 예배와 십일조가 오늘날의 현대교회가 주장하고 있는 하나의 복의 등식으로 생각하기까지 이르렀다.
 
십일조를 적극적으로 잘하면 큰복 받아  부자 되고, 집안 모두 건강하고, 모든일들이 형통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때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께 그 백성들의 망령된 부패신앙 배역행위를 진술하면서 그들의 벧엘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들을 즐겁기 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책망했다.
 
(아모스 4:4)에'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너희 십일조를 복의 등식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더 큰 복을 받기 위하여 '매 3년마다 드렸던 그 십일조를 이제는 그 기간을 크게 앞땡겨서 3일에 한 번씩 드려보라. 그러면 더 큰 돈복을 받을것이 아니냐? 하면서 그들의 비신앙적 행위를 비꼬았다.
 
그들이 아무리 특심하게도 더 많은 십일조를 바친다 할지라도 성경에 기록된 율법 대로가 아니면 그것이 허사라는것을 아모스 선지자는 그들의 기복적인 십일조에 대해 몹시 꾸짖었다. 오늘날 현대교회 십일조의 기복신앙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원래 구약이 말하는 십일조는 성전 제사를 맡은 레위인이나,과부들,어려운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었다. 그리고 십일조 내용물은 반드시 '밭의 소출과 가축'만으로 한정 되었다(레27:30, 신12:17, 14:23, 느13:5,12).
 
성전이 너무 먼 경우에는 그것들을 일단 돈으로 바꾸었다가 성전에 가서 다시 음식물로 바꾸어 십일조를 드리게 했다(신14:24-26). 그래서 십일조는 당연히 '먹거리'를 생산해 내는 '농민과 목축업자'들만이 한정 된다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
 
그래서 그 외의 다른 직업인들은 모두 십일조가 면제되었던 것이다. 목수였던 예수님이나, 어부였던 제자들에게도 이 십일조는 해당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성전세는 십일조와는 달리 모든 백성이 납부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출30:12-15) 당시 통용되는 돈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납부 하셨다(마17:27). 십일조는 구약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족인 제사장들의 생계수단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 꼭 필요했었다.
 


그러나 성전과 제사장이 없는 신약의 초대교회에서는 이 십일조를 일절 시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도 십일조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이 없는것이 그 이유이다.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완성 하셨기에 십일조를 폐지시키신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십일조가 성립 되려면 반드시 '성전과 제사장'이(필수) 구비 돼 있어야 한다. 이유는 십일조는 오직 성전에서만 또 제사장을 통해서만 드릴수 있기 때문이다. 성전도 제사장도 없는 초대교회가 이 십일조를 시행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무력화 하는것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 행전은 이에 대하여 한마디도 언급이 없고 그 이후 교회는 계속 이어져 오는 동안에도 십일조 제도는 전혀 시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난후 주후 4세기 이후 교회가 구체적으로 조직화 되면서, 결국 인간들의 탐욕으로 다시 십일조 제도를 도입해서 거의 중세 1000년 동안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허지만 이때까지도 십일조는 '돈' 많큼은 제외시키고 오직 '토지소출과 가축'에만 거둬들였다. 성경에서 십일조는 언제나 먹거리로 한정 했기 때문이다.
 
13세기에 이르러서는 교회의 부패와 타락으로 변질 되다보니 이 십일조가 먹거리를 포함해서 '모든 소득' 으로 확대 되었다. 그때부터 교회는 적극적으로 돈의 꿀맛을 알게 되었고 그후 시도때도 없이 각종 집회를 열어 돈을 거둬들였다. 이젠 교회마다 돈이 넘쳐 심지어 십일조를 보관하는 '십일조 금고' 까지 생기게 되었다.
 
교회는 돈이 넘쳐 교회건물들은 너무 화려했고, 교회지도자들은 사치에 여념이 없었다. 교회 지도자들의 주택은 호화궁궐생활인데 반해 그 교회 신도들은 그 궁전 주위에  가마니촌 같은 움막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화려하다못해 교회담임자는 교회직분까지 매매하고, 또 그 교회를 자기자식에까지 변측세습으로 인한 타락이 극에 달했다. 이에 개혁운동이 종종 일어나기는 했지만 실패하고 결국에가서는 1079년도에 청렴한 힐데브란트가 그레고리 7세로서 교황으로 등극 되자마자 신부들의 세습방지책으로 아예 자식을 못낳게하는 사제결혼금지인 독신제도와 성직매매금지를 함께 만들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카톨릭에서는 신부가 독신으로 살고 있는것이 그 이유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후 초대교회에서도 전혀 시행되지 않았던 그 십일조 제도가 중세 카톨릭 시대에 다시 활개를 쳐기 시작해서 얄퍅하고도 아주 교묘한 수법으로 특혜와 특권, 기름진 음식, 그리고 위선이라는 거대한 뱃살을 부풀렸다.
 
허지만 종교개혁 특히 프랑스 대 혁명 1789년과 1848년 이후 교회는 국가와 분리 되면서 십일조 왕국인 한국교회만 제외한 대부분 세계 모든 교회가 이 십일조 제도를 공식적으로 완전 폐지시켰다. 그 내용이 맨 위의 표이다. 더 이상 그 십일조 가지고 교회가 교인들에게 그릇치게 할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 기독교인은 불과 967만명(2016년 12월20일 정부 통계청 발표)으로 세계 기독교 인구 22억7000만명의 263분의 1 뿐이 되질 않는다.그나마 기독교 인구 967만명 가운데에서도 교회목회자들의 무리한 헌금요구 및 윤리 도덕적 개인비리 때문에 교회를 등진 숫자가 현재 360만명이나 된다. 곧 가정에서 예배하는자들이 360만명이나 넘는다는것은  그만큼 성도들이 목회자들의 도덕적 진실에 목마르다는 반증이다.
 
사실 교회는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고, 강단에서는‘물질만능'만을 추구하면서부터, 이들은 큰 부담을 안고 교회를 떠났다. 그것은 하루 밤 사이에 교회당의 십자가가 늘어났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하룻밤 사이에 많은 교회들이 사라지고 있는데서 그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남은 교회마저도  장로, 권사, 안수집사 직분 가진자만들의 기득권이 영역화 돼 버렸다. 과거 조선시대 왜적과 싸우면 양반으로 올려주니 전국에서 의병이 모여들었다. 중세때 교회에 돈을 많이 내면 '연옥에서 천국으로 직행' 한다는 티첼 신부의 능란한 웅변술에 속죄표는 순식간에 동이 났다.
 
교회 장로로 피택해 준다하니 거금 1,000만원씩이나 대끔 낸다. 권사 안수집사 직임주니 500만원~ 1000만원을  거침없이 바로 응답한다. 거리 노숙자에겐 단돈 100원이라도 관심없다. 디자인 마음에 들고 가격 대비 품질이 괜찮다 싶으니 그들은 자연스레이 지갑을 연다.

교회지도자들은 이런 소비자 심리를 본능적으로 직감적으로 꿰뚫고 있다. 조건적 반사이익이다. 교직매매 인상적  세례를 받는다. 그들의 직분에 날개를 달아 주니 신분 수직상승 완장을 차고 교회계급 서열에 화려한 팡파래를 울리며 떳떳이 진입한다. 목회자 친위대 발판삼아 자기들만의 고유영역에 안착한다. 권력의 지평은 변할 수 없는 그들의 생명 다할때가지 콘크리트화가 되어진다.
 
한국기독교가 돈을 너무나 중시하다보니 돈있는자와 권력을 가진자들의 잘못을 정당화 해주는 이념적 정치종교로 변질됐다. 성도들의 믿음의 척도를 ‘헌금의 액수’로 결정하면서 돈이 중심이 되는 집단이 되었다.
 
교회마다 도처에 진실이라고 떠드는 목소리는 넘쳐나는데 진짜 진실은 어디 숨었는지 모르겠다.  나 같은 시력2.0의 눈에는 한국교회의  풍경이 거꾸로 서 있는듯하다. 로마제국은 흔들리면서 1000년을 갔다. 한국교회는 거꾸로 서서 얼마나 갈지 궁금하다.
 
야생 본능과 근육질 몸통을 되찾야 한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해괴한 논리로  자신들에게 기울여 놓은 운동장을 마음껏 뛰놀고 있다. 진리가 그러한곳에서는 비실대고 있다. 일반교인들이야 처음에는 부정하고 의심하지만, 결국은 이를 따르게 된다
 
생명이 없는 돈을 위해 살아 숨 쉬는 생명을 외면하는 꼴이다. 개교회 집단 이익만을 챙기며 사회속 공공이익은 모르쇠로 일관하는 비도덕성 지도자들이다. 우리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윤리,도덕,양심지수는 세계최하위수준이다. 총체적으로 무능한 한국교회는 비스듬히 기운 상태에서 함몰되어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운명을 재촉하는 초침은 빠르게 돌고 있다.
 
한국교회의 신학자들이나 교수들은 대부분 서구나 미국 등지에서 신학 공부할 당시 그 각 나라들의 교회예배 참석을 통해서 그 곳 교회들은 '십일조 제도'가 없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위의 도표에서 보듯이...그러나 겁에 잔뜩 움추린 생계형 학자들은 지금 한국교회 십일조 제도 부조리에 대해 입에 자물쇠를 채운채로  묵언수행만 하고 있다.
 
시한폭탄의 초침은 째깍째깍 도는데 뇌관을 제거할 생각은 않고 오희려 폭약을 더 장착하려는 듯 “ 파격 대우는 혹시 어딘지”에  이곳 저곳만 기웃거린다.
 
때로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진실을 전하기 때문에 그럴까? 아니다. 입을 뻥끗했다간 당장 교단으로부터 교수와 목회면직을 동시에 바로 퇴출당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굳은 신념을 처참하게 쓰레기 통에 던져 버렸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알고도 모른척 한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자들을 향하여 "짖지 못하는 개(이사야 56장10절)" 라고 했다.
 
분명한 확신이 머리 속에 일어난 천재들이라도 그들에게 혼자 왕따 당하지 않으려고 입을 다물게 된다. 그러나 당당하고도 용기 있는 몇몇 신학자들이나 교수, 목회자들은 이 비성경적인 십일조 제도 폐지를 주장하다가 교단 및 신학교, 교회로부터 퇴출 당한자들이 현재에도 적지 않다.
 
다수의 학자들이 진리를 공유하는 그러한 확신속에서 어설프게 그들을 공격하다가는 한 시대의 또라이로 낙인찍혀 학자의 인생을 마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소수의 개혁가는 거대 공룡앞에 속수 무책일수는만은 없다.  역사 속에는 용감한 돌직구 스타일의 학문의 돌연변이 혁명가도 가끔 등장하여 바른 진리가 세워지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 한국교회에서는 교파와 교단을 초월한 모든 교회가 이 십일조 제도를 초교파적으로 정착시키고 있다. 교단과 교단, 교파와 교파 사이에는 교리적으로 조그만 차이가 있어도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싸워댄다. 내가속한 장로교만 하드래도 300개이상으로 갈기갈기 찢어 갈라져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십일조 제도많큼은 모두가 단합하여 한 목소리가 되어 합장하고 있다. 여기엔 어떤 이의가 없다.
 
이러한 현상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성경 구절이 바로 구약의 말라기 3장8절-10절의 잘못된 해석이다. 본인도 과거 50년도 혹은 60년도에 부흥집회를 통해서 수없이 들었던 말씀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 말씀이 기록될 당시의 사회적인 배경과 그 말씀 전후의 유기적인 문맥관계를 고려해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특정 구절들만 떼어서 자신들의 신앙관에 애써 합리화 시켰다.
 
말라기 3장8절-9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덕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 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라는 구절이다.

이 내용에서 그들은 성도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한것으로 심하게 매도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의 바른 해석은 느혜미아서 13장이 자세히 설명한다. 왜냐하면 말라기와 느혜미야는 동시대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내용중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십일조 도둑은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아서 도둑이 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제사장들이 십일조를 몰래 훔쳐 빼돌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둑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바벨론포로에서 돌아온 느혜미야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에게 명령했다. 백성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가져오면 제사장들은 그것들을 받아서 성전 옆 창고에 거둬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당시 제사장 엘리야십과 도비야는 서로 공모해서 백성들이 십일조 가져오면 그것들을 성전옆 창고에 넣는 것이 아니라 성전창고 옆에 또 하나의 자기들의 개인 창고를 만들어 놓고 그리로 계속 빼 돌렸던 것이다.
 
느 13:4- 제사장 엘리야십과 도비야가 서로 연락 공모해서
느 13:5-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만들었으니
         (성전창고 옆 별도로 도비야의 개인 방을 만들었으니).
 
느 13:7-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만든 사실에 대해 악한 일을 알고
         (엘리야십과 도비야가 십일조 빼돌리기 위한 따로 방을 만든 악한 사실에 대해 알고).

느 13:8-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들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니
          (빼돌린 십일조와 헌물등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니라)

제사장 엘리야십과 도비야가 백성들이 가져온 십일조들을 자기들의 개인 창고에 계속 빼 돌렸기 때문에, 
결국 그 성전창고에는 식량이 바닥 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성전 일을 버리고 자기들의 먹고 살길을 찾아 도망가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것이 최초로 제사장에 의한 십일조 도둑 사건인 것이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덕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 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말3:8)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성도들이 십일조를 한번이라도 못내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했다고 욱박지르니 얼마나 어이없고 황당한 일이 아닌가? 십일조를 못내서 도둑이 된것이 아니라 제사장 엘리야십과 도비야가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를 자기들의 개인 창고로 빼돌렸기 때문에 도둑 사건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하게도 엘리야쉽과 도비야가 도둑이라고 지목하는데   교회지도자들은 그것을 바꾸어 성도들의 가슴에 도둑이라고 주홍글씨를 달아맨다. 그리고 그 내용이 자세히 해석되어 있는 느혜미아 13장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내용을 교인들이 혹시라도 알아차릴가봐서 전전긍긍한다. 마치 교회가 1229년 둘러스 대회때  교인들이 성경지식에 대해 무지하도록 성경을 판매 금지한것과 똑같다. 오직 진실에 대한 목마름만 있을 뿐이다.
 
중세시대에 막대한 십일조 수입을 가지고 갖은 비리를 저질렀던 카톨릭조차도 이제는 회개하고 그 십일조 제도를 버렸는데, 카톨릭을 개혁한 루터와 칼빈의 교리를 따른다는 한국의 개신교가 이제와서 오희려 그 비성경적인 십일조 강조 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한국교회의 현 상황을 들여다 보면 십일조와 막대한 헌금수입으로 교회는 돈이 넘쳐난다.


 
어느날 스님이 길을 걷다 동전이 떨어진 것으로 알고 주웠더니 병 뚜껑이었다. 그는 돈에 욕심을 가진 자신이 죄를 졌다고 생각해 6개월 동안 앉아서 참회하다 그만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
 
미국.영국.유럽교회는 교인 250명정도 교회목사도 일반 직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은 시골목회를 원한다. 공기좋고 물좋고 독서하기에 안성 맞춤이고 심방도 자유롭게 한다. 자동차는 거의 없다. 자전거로 모든 교통을 해결한다.
 
월급도 150만원 정도이다. 더군다나 그것도 그들이 받는 월급도 가정 식구따라 다르다. 담임목사 식구가 3명이고 전도사가 4명이명 나이어린 전도사가 더 받는다. 성경적구조제도를 제대로 잘 지킨다. 그들에겐 검소가 몸에 베여 돈쓴일이 없으니 교인들에게 헌금도 강조하는일이 없거니와 그래서  십일조제도 같은것은 아예없다.
 
신부는 아무리 큰 교회에 몸담고 있을지라도 월평균 사례비가 지금도 70만원정도이다. 카톨릭의 프란체스코 교황은 '교회는 가난해야 된다'라고 했다.
 
아모스때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은 모두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크게 번영했다. 남쪽엔 10대 웃시야왕 북쪽엔 13대 여로보암2세때이다. 오늘의 한국이 세계 OECD국가중 13위정도때와 같다.

그래서 외적인 번영으로 북 이스라엘은 오직 자신들의 일신상의 안일만을 위하여

사치와 방탕을 일삼고(암6:4-6),
세법을 악용하여(암5;11),
가난한자를 착취하며(암2;6),
의인 학대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오늘의 한국 교회와 흡사하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유례없는 성공 신화는 대단했지만 너무 빠름이었다. 속도의 빠름은 자극적일지라도 공허만 남기는법이다. 이유는 깊은 울림과 긴 여운을 줄수 없기 때문이다.

교향곡에서 소나타가 오랜 세월 꾸준히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도, 빠른 템포와 느린 템포가 교차되면서 긴장과 감흥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속도의 완급이 주는 템포의 힘이다. 빠른 알레그로만으로는 사람을 흥분시킬 수는 있어도 가슴 저리게 할 수는 없다.  

한국교회의 성장이나 보람은 항상 느리면서 차분한 성찰과 준비를 필요로 했어야 했다.  어차피 교회가 나아가는 목표는 속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세계 모든교회가 그렇게 부러워 하는 세계 10대 교회중 1등에서 5등 까지 모두 다 있다. 전체 부동산이 80조원, 연간 헌금 총액이 4조8천억원이나 되는 세계 최고의 메머드급 수준이다.
 
하루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노숙자에게는 별관심 없다. 그러나 그들은  3억5천만원의 벤틀리 최고급외제 승용차로 바람을 가른다.  또 어느교회  남편목사 1억5천만원의 에쿠스, 부인은 2억원의 벤츠로 사치에 여념이 없다.  또 이들의 삶의 터전은 50평 혹은 80평 아파트가 보통이며  최고급 호텔에 최고급 요리로만 뱃살찌우며 회의도 한다.
 
그리고 이들은 가짜 박사학위로  위안을 삼고,  또 이들은 자신이 말하는 것은 무조건 아멘으로 받아야 한다고 욱박지르기도 한다. 또 교회 부흥회때 헌금을 강조해 부흥사와 담임자가 6:4 비률로 나눠먹기식 꽃놀이패로 우산에 구멍을 뚫는이도 있고, 김일성 김정일에게 뒤질세라 대형교회 만들어 자기 자식들에게 강단을 대물림하는 자들도 있다.

 청년실업자가 101만명이 넘치는 불황에도 수천억원을 쏟아 호화 메가 예배당을 만들기도하고, 자기 신앙에도 투철하지 못하면서 남의 믿음을 업신여기는 근본주의자들, 신앙을 이념으로 변질시킨 많은 정치종교지도자들 때문에 한국교회의 슬픈 현실에 대하여 가슴이 저려온다.
 
또 수억원대의 년봉을 받으면서도 세금한푼 안내려 하는자들,  기독교의 가치는 상실되고 타락되며 조소와 냉소의 대상이 되고만다. 국가는 모든이들의 세금으로 국방과 교육과 치안과 복지 그리고 모든 공공시설 설치 유지 한다. 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세금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면서도 다른사람들의 혈세에는 얄팍한 수법으로 기생해서 자녀들을 학교에 다 보내고 병원복지도 다 누리고 도로위에서는 그들의 고급차들로 휘날린다.
 
이들은 무너져 내린 권위의 파편 더미 속에 헤메고 있다. 이들때문에 한국교회는 터지기 직전의 풍선과 같다. 시한폭탄 초침(秒針)이 돌아가고 있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이 쑈크야말로 거대한 쓰나미가 아닐수 없다.
 
국가에서는 국회의원 300명중 147명이 자칭 크리스챤이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어찌 국가 청렴도 면에서 OECD 국가중 최하위를 면치 못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당 밖에서도 자신의 삶과 직업을 성직(칼빈의 말)으로 수행한다면 이 세상은 기독교인들로 인해 반디불이 살아가는 청정지대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만 하나님을 찾는이들 때문에 이 세상은 어둠속에 갇혀있다. 그것은 가장 자기중심적이고 독선적이기 쉬운, 모든 가치체계가 전도된 자신을 스스로 가두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밤마다 붉은 십자가 기둥이 동네를 붉게 물들이며 무엇을 감당했는가. 셀 교육, 전도폭발, 심령대부흥회, 수험생 100일기도회, 제자훈련, 여리고성기도회 등 수많은 기도회로 모여 그 자리에서 무엇을 깨닫고 어떤 복을 받았으며 얼 만큼 행했는가.
 
한국교회는 물질 만능 불랙홀 속으로 85 가지 이상이나 되는 수 많은 헌금들을 계속 빨아들이게 했다. 성경에는 우리가 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헌신한다고 하는 것을 가르치는 구절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수 많은 헌금들로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큰 부담을 주고 있다. *아래 별도 85가지 헌금종류 글 참조.
        

성경은 우리 모두가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라고 하는데도 엉뚱하게 세례요한의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물끄럼이 쳐다보고 있다. 이 희대의 블랙 코메디를 언제까지 무대에 올릴작정인가. 산상수훈의 설교들은 넘치도록 쏟아 내면서도 산상수훈의 삶은 왜 그리 보여 주지 못하고 있는가.
 
성도들의 가슴속에 울림과 감동으로 맑은 공기 한 모금이라도 그렇게 마시게 할수 없다는건가?  교회 본질의 생명은 나 아닌 그 누구에게라도 연탄 한 장 되어 따스함의 온기를 주는것에 있는데 말이다.
 
교회개혁자 칼빈은 말한다. 예배는 손상되고, 부정한 기복신앙들로 왜곡됨에 따라,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이 모욕당하고 그의 거룩한 이름과 영광이 발아래 짓밟혀 있고 교회들은 자기들의 헛된 돈만을 숭배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교회 지도자들은 율법의 해석자로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권위만 주장하며, 무리한 실천을 강요하고 스스로 본을 보이지 않으면서 지식만 팔고 있다고 했다. 바로 그러한 삯군이 인도하는 예배가 바로 그릇된 예배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한국교회 일부 메가목회자들은 억대의 연봉, 고가의 부동산,  야구장같은 호화 아파트, 연중 수십차례 선교 여행, 교회는 교회대로 대형 교회와 작은 소형교회로 양극화 되어 있다.
 
교회의 예배가 이벤트화 되어 자기 충족과 축제화의 현상이 넘쳐나고 있다.   예배를 드려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내겠다는 기복적 결심들도 야심차다. 그러나 결국은 그것이 잘 안될 때 그들은 서슴없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단계로 들어간다.
 
  이같이 예배가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기호 맞추느라 정신이 없고, 또 예배의 본질이 사실상 헌금으로 이동하여 수많은 헌금들만 발생케 하고 심지어 비성경적인 일천번제나 기복적 감사 헌금들을 범람케 하면서 한국교회의 위험 수위를 넘나들게 하고 있다.
 
아예 헌금을 위한 특별 집회에 축복을 남발하고, 예배가 헌금자들의 기호에 맞추려 심혈을 기우리고 있다. 교회 암흑기에 루터나 칼빈, 쯔빙글리 등 종교 개혁사의 빛나는 별들이 지금 이 시대에 다시 등장 한다해도 그들의 희대의 블랙 코메디 같은 연출을 그 무대에서 사라지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시속 160km으로 날으는 야구공에 파리가 내려 앉는 확률이 더 쉬운일인지도 모르겠다.
 


신앙은 점이 아니라 선이 되어야 한다. 점을 아무리 많이 찍어도 연결이 되지 않으면 선이 되지 못한다. 주일날 아무리 예배를 많이 드려도 형식화 된 예배, 목적이 바르지 못한 예배, 신령과 진리로 삶이 연결이 되지 않으면 점이 되고 만다. 허울 좋은 그리스도 종교인으로만 끝나고 만다.
 
따라서 이제 교회는 이 비성경적인 십일조를 통한 막대한 돈을 거둬들이는 것을 중단하고 연보개념으로만 이뤄나가야 한다(고전 9장5절).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 10장8절에 '제사와 예물과 전제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라고 하였다.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것' 이기 때문이다.
 
현재 십일조를 적극적으로 시행하는 교파들을 보면 '한국엔 초 교파적으로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특히 성결교는 교인 의무적으로 되어 있고, 오순절 교단, 여호와 증인, 몰몬교, 제7일 안식일교 등이 십일조 매우 열성적이다. 모든 종파가 이 십일조 앞에서는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낸다. 물론 세계적으로 십일조를 폐지한 나라들의 교회들도 재정적 어려움이 있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러나 십일조는 분명히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에 폐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십일조는 교회의 재정적, 현실적인 문제이기전에 성경적으로도 근거가 없고, 세계 기독교 추세와도 역행하는 제도이다. 아니 확실한 성경적 근거가 있다면 처음부터 이런 폐지론이 나올 수도 없었고 전 세계 국가들 역시 아직도 십일조를 시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말라기 3장7절-12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실상은 이 '쌓을' 이 단어도 성경 원문에는 없다).
 
본문은 십일조 지지자들과 특히 한국교회 부흥사들에 의해 백배, 천배, 만배, 복의 근거 까지 제시하는 최상의 성경 구절이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이 구절이 가장 좋은 투자처가 아니겠는가. 그 누가 골치 아픈 사업을 하겠는가? 자기 재산 십분의 일만 교회에 갖다 내면 돈이 계속 불어 날텐데. 이같은 매력에 그 누가 눈을 감고 가만히 있겠는가?  
 
그들은 이 십일조를 이야기 할 때마다 항상 등장하는 메뉴가 있는데, 그것은 십일조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물질의 복을 쌓을곳이 없을만치 넘치도록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넘치도록 돈 복을 주시나 아니주시나 하나님을 시험까지 해 보라고 한다.


미국 어느 대형 교회의 목회자는 '만일 90일 동안 십일조를 잘 냈는데도, 성경에 약속된 대로 복을 받지 못한다면 교회는 당신이 낸 십일조를 전부를 환불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센스 있는 해법까지 제시하고 있다.마치 떡 5개와 생선 2마리로 5000명을 먹여 살린 예수님의 오병이어(五餠二魚) 기적처럼.
 
그런데 그 목사는 최 고가의 주택에 살며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연봉이 무려 12억 원이 넘는단다.
이건 약과다. 이 외에도 미국 목사들 축적된 엄청난 재산가들이 있다. 

조이스 메이어 목사:  순자산 약    92억   800만 원
릭 워렌 목사:        순자산 약   287억 7,500만 원
빌리 그래함 목사:    순자산 약   287억 7,500만 원
크레플로 달러 목사:  순자산 약   310억 7,700만 원

조엘 오스틴 목사:       순자산  약    460억 4,000만 원
베니 힌 목사:             순자산  약    483억 4,200만 원
팻 로버트슨 목사:       순자산  약 1,150억 원
케네스 코프랜드 목사: 순자산  약 8,750억 원




하여튼 이들 모두 이 '기복적 십일조 영업'의 묘미를 마음껏 만끽하고 있다.이에 성도들은 저들의  난수표같은 축복구호에 매몰되면서 뿌리째 흔들린다. 신발밑 버블제트는 터지면서 신앙의 치명상을 입는다. 전체 파이는 커지겠지만 전리품은 자기네들이 독식하고야 만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성경을 좀더 자세히 연구하면 금방 알수가 있다. 말씀의 왜곡은 언젠가는 사라질 수 있지만 진실은 영원히 남는법이다. 그래서 먼저 그 시험 이란 용어가 대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겠다.

학문이라는 것이 어려운 전문용어의 옷을 입고 상아탑에 숨어 있으면, 대단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진리의 발견은 평범한 상식에서 시작된다는것도 알아야 할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시험' 이란 단어를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된다. '시험하다'의 원어에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뜻이 있다. 그것은 히브리어 차라프(צרפ )(시련), 나싸(נסה)(시험), 빠한(בחנ)(삶 증명) 등이다.
 

(히)차라프(צרפ) (Trial)

(헬)굼나시아(gumnasia)

시련연단(히5;14)

(히)나싸(נסה)(Temptation)

(헬)페이라조(peirazo)

시험하다(test,)

(히)빠한(בחנ)(Prove)

(헬)도키마조(dokimazw)

마음.삶 증명하다

 

그래서 말라기 3장 10절의 '시험'은 차라프(צרפ-Trial-시련.혹은 연단)도 아니고, 나싸(נסה-Temptation-시험하다)도 아니고  오직 빠한(בחנ- "Prove -마음과 삶으로 증명하다")이다. 이같이 시험이란 용어를 잘못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시험해보라고 까지 부추기는 것은 성경 원어에 대한 얕은지식이다.

 

 성경의 다른 모든 여러 곳에서도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고 할 때 '시험' 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나싸(נסה)(test, tempt)이지만, 그러나 말라기 3장10절의 본문의 시험은 우베하노니-ובחנונ)이다. 즉 '마음과 삶을 통해서 나를 입증해 보라는 것이다.



 히브리어 성경이나 헬라어 성경은 모두 이 두 단어를 명확히 구분하여 번역하고 있지만 우리말 성경은 구분 없이 모두 '시험하다' 라고만 번역함으로서 원어에 대한 깊이가 얕은자들의 혼란만 가중된다.                                                        

 

시험이란 용어 사용에 있어서 인간은 시험 할 수 있으되 하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다. 말라기 3장 10절의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는 십일조 많이 바치라는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을 시험하면 절대로 안된다.


결국 성경 이곳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말씀은 모두가 마음과 삶으로 살피고 입증하라는 말씀이지 하나님을 향하여 흥정하고 시험라는 내용이 아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시험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특히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한다면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자초하는 행위가 된다.

 

그리고 말라기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등을 돌렸던 백성이 이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와 관계회복과 메시아 오심에 대한 약속이다. 제사장들과 레위인이 흠이 있고 의롭지 못한 예물을 하나님께 가져왔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예물을 받지 않으셨지만 메시야가 오셔서 그들을 깨끗케 하심으로써 의로운 제물을 드리실 것이기 때문이다(말3장3절). 그 때 하나님게서는 이스라엘의 제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열국의 제물도 받으시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가 바로 바른 헌물과 제물을 드리는 온전한 제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도 십일조를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 몇군데 있다.

 

마23:23, 눅11:42, 18:12, 히7:1-10 이다.

 

(마23:23, 눅11:42, 18:12) '너희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들을 행하고 저것들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내용이다.

 

이 말씀도 십일조 열성 지지자들에 의해서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구약에서와 같이 십일조 실행을 주장하려고 하신 의도가 아니라 형식을 일삼는 바리새인들을 교훈 하려는데 초점이 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남에게 나타내고 자랑하고 보이기 위해서 보통 사용할 수 없는 조그만 땅에 음식의 향료로 사용하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를 심어 얻었는데 그들은 그것까지 세밀하게 구분해서 십일조를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조그만한것, 별 가치 없는것, 세부적인 것 까지도 십일조는 하였지만 종교적면에서 가장 중요한   ()=공의(公義)[미쉬파트 משפט],   인()=자비(慈悲)[헤쎄드 חסד], 신()=(信仰)[에문 אמנ] 즉 바로 신앙의 본질을 버렸다는 그 모든 외식을 향해 예수님은 책망하신 것이다.

헬라어 원전을 살펴보면----

ouai umin, grammateiV kai farisaioi upokritai, oti apodekatoute to

우아이 휘민 그람마테이스 카이 파리사이오이 휘포크리타 호티   아포데카투테     

Woe 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because ye tithe the

화 있을찐저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여! 외식하는 십일조를

hduosmon kai to anhqon kai to kuminon, kai afh kate ta barutera tou nomou

헤두스몬 카이 토 아네돈 카이 토 쿠미논  카이   아페 카테  타  바루테라 투 노무

mint and the dill and the cummin and ye{haev}left the heavier things of the law,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버렸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바것들인 율법의

thn krisin kai ton eleon kai thn pistin tauta de edei poihsai kakeina mh afienai

텐 크리신 카이 톤 에레오온 카이 텐 피스틴  타우타 데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아페이나이.

judgment and mercy and -- faith but these things it behoved to do and those not to leave

의와 긍휼과 신뢰는 그러나 이것들도 행해야 했으며 저것들도 버리지 말아야 했다.

 

위의 원전에서 보는바 같이 여기 '행하다'의 poihsai(포이에사이) aorist는 계속. 완료. 반복의 뜻을 갖지 않고 단순히 '과거동작의 때' 그 때만을 나타내는 능동형 부정시제 동사로서 원형 포이에오( poiew)에서 유래했다. 그러니까 계속 반복해서 하라는 것이 아니고 십일조를 시행 했을때의 그 시점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afienai(에피에나이) 는 '버리다'의 뜻으로 현재 능동 부정과거 시제인데 원형은 에피에미(afihmi)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저것들 (kakeina-카케이나) 즉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도 행했었어야'했지만, 이것들'(타우타-tauta) 즉 의와 긍휼과 신뢰는 더 중요하게 행했었어야 하는 그 세부지침에 충실의 당위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이지 꼭 그렇게 앞으로도 계속 행하라는 명령형이 아니다. 왜냐하면 동사가 부정과거 시제로서 그 때 그 행위 동작만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허지만 시기적으로 이 때까지는  예수님도 십일조를 인정하셨다고 볼수 있다. 예수님이 십일조를 인정하시고 당위성을 두신것은 아직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 사건 전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시기 전은 예수님께서도 다른 율법인 할례, 안식일, 규례들도 지키셨다. 이 때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아직 완성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구약의 율법들이 유효한 시기이며, 십일조에 대해 충실 해야함은 마땅하다. 이 때엔 성전 예배도 진행 중이었으며, 제사장들과 레위인은 그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 십일조에 필요로 한 시기였다.

 

율법의 마침인 십자가 사건 전 까지는 예수님도 모든 율법을 지키셨다(갈4장4절). 당연히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십일조를 강조하셔야 마땅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바로 시기와 때이다.

 

십자가 사건이후엔 십일조를 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성전이 헐리고 제사장이 없어 졌기 때문이다. 십일조가 성립되려면 분명하게 성전과 제사장이 필수 요건이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 이 말씀은 십일조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없애 버리신다는 의미이다. 성전이 없으면 레위지파의 제사장 임무도 종결 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십일조 뿐만 아니라 성전도, 안식일도, 제사장도, 할례도, 제물도, 레위인도 모두 끝난버린것이다. 여기의 사흘만에 다시 일으킬 성전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의미한다. 주님의 몸이 부활했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율법에 속하는 십일조를 지킨다는 말인가? 예수님이 완성하신 율법을 다시 인간들이 미완성으로 만들겠다는 것인가? 십자가 사건을 무력화 시키겠다는건가?

 

초대교회를 보드래도 일반 헌금에 대한것은 언급되어 있지만 십일조 했다는 기록은 전혀 찾아 볼수가 없다. 그래서 바울도 역시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기 때문에 제자들도 사도들도 초대교회 성도들도 십일조 제도가 유대교의 다른 율법과 함께 폐지 된 것이 당연시 하였다. 그래서 신약의 모든이가 침묵하고 있다.

 

율법이 다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에게서 성취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십일조가 바로 멈췄다. 율법은 그 자체로는 완결되지 않고, 늘 쉼이 없고, 늘 불안해서 참 안식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향해서 달리고 결국은 그리스도에게 와서 구약의 모든 약속들이 다 성취 되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동일한 하나님이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의를 이루셨다. 그래서 십일조(율법)는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과 함께 종지부를 찍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교의 유대인 조차 생활의 법으로 삼았던 그 율법의 십일조를 시행할 수도 없고 또 시행하지도 않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믿는자들이 다른제도들은 그대로 놔두고 유독 십일조만을 계속 시행 한단 말인가.

 

따라서 한국교회가 유대교의 율법의 하나였던 그 십일조를 다시 강요하는 행위는 예수의 십자가를 무르고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서 돌성전도 세우고, 안식일도 지키고, 제사도 지내고, 할례도 지키고, 절기도 지키려고 하는 의도와 전혀 다를바 없다.

 

교회 운영에 대한 돈은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도 목적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수단을 정당화 해서 가르치는 교회지도자들 때문에 오늘의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하는 이유중에 하나이다. 인간의 생명과 영혼은 보이지 않고 집회 참석 인원 머릿수에만 관심두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람들의 머릿수가 아니라 성도들의 가슴속 심장 박동수를 세어야 된다. 막대한 십일조와 헌금에 눈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사람들의 머리 숫자만 계산하고, 정부에서조차도 동네 구멍가게를 살리기 위해 대형마트 버스 돌리는 것을 폐지 시콌는데, 더 모범을 보여야 할 교회가 대형 버스를 이용해 이 동네 저 동네   돌아 다니면서 작은 교회교인들까지 끌어오고, 또 대형 교회들은 지방 곳곳에 지성전을 만들어 놓고 목회자 개인 목회 성공의 자랑거리로 박수의 향기에 취하고 자신들의 능력과 치적에 날개를 단다.  

 

어느 동네에 대형마트가 들어서면 그 주위의 자그만 가게 40여개가 타격받지만, 그러나 기업형 대형교회가 들어서면 그 주위의 작은교회 수백개가 문을 닫는다.그래서 한국에 자그만 교회들은 그 동네에 대형교회들이 들어 설때마다 공포감과 비명소리만 가득하다.

 

지금 한국교회는 르네쌍스가 필요하다. 애초 성도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희망은 교회가 성도들의 안식처였다. 그래서 성도들의 가슴은 뛰었고, 성도들의 교회사랑 열정은 폭발하듯해서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칠때엔 교회는 언제나 우산이 되어주곤 했다.

 

목회자는 목회를 자기의 생명과도 같은 도덕성과 자기 신앙의 인격을 나이테처럼 쌓아 소중한 가치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 화장을 고친다고해서 달라지는건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한국교회는 부활을 꾀해야 한다. 제도적인 시스템에 새로운 모니터링과 정비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디자인 하신 성경적 교회 본질이 회복 되어야 한다. 순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돈에 대해서 부자가 천국가는 것이 밧줄(kamilon 카밀론)이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바울도 돈은 일만악의 뿌리라고 말했다. 이사야서에서는 오히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제물을 역겨워하며 내치시는 하나님의 분노를 볼 수 있기도 한다(사1:12).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깨끗해지려면 우선 돈의 방향부터 바꿔야 할것이다. 그래서 천주교는 지금도 연보라고 한다. 연보는 자기 재물을 내어 남을 도와주는 것으로 일종의 구제금에 더 가깝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연보를 거둬서 바울에게 내 놓았다. 교인들이 십시일반으로 교회 운영비나 교회일을 하는 자들을 위해 내어 놓는 것이 연보이다.

 

고후 8장13절에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케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케 하려 함이라 했다.

 

한국에는 5만개 교회, 15만명의 목회자, 967만명의 성도중 교회 출석교인 500만명(어떤이는 1200만명이라지만 이 숫자는 환상의 꿈에서 피어나는 신기루일 뿐이다) 가운데 1만명 이상 모이는 교회가 19개이지만, 그러나 아직도 50명 이하 미자립교회가 36,000개나 된다. 더 나아가 세계70억인구중 하루세끼 식사 해결이 안된숫자가  9억7천만명이나 된다. 하나님이 요구하는것은 율법보다 더 중요한 '의와 긍휼과 신'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된다고 오늘도 말씀하신다.

 

새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포함해서 모든 율법을 완성 하셨다. 은혜 받은 자는 그 은혜를 나누는 차원에서 사랑의 연보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십일조를 부지런히 잘 내서 백배 천배 만배 복받으라고 한다. 또 십일조 영웅 록펠러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십일조 했더니 복을 받아  후대 자자손손 복받고 아주 잘 산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록펠러에 대해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는 이렇게 혹평했다. 록펠러가  선행을 얼마나 많이  했든지간에 상관없이,  그가 그 수많은 재산을 쌓기 위해 그가 저질렀던 그 악한 행동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납할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록펠러! 그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조금만살펴봐도 금방 알수있다. 다음은 록펠러의 그 이면에 숨겨진  행동이다. *아래 별도 록펠라에 대한 글 참조.        

 

한국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물량 팽창주의적 메가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빚어낸 역사적 진화물이기도 하다.  이  신 자본주의 물결에 젖은 교회정체성은 가장 무게를 두어야 할 신앙도 십자가도 사라져버린 오로지 교인들을  관리하는데만 집중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목회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대형화만를 추구한다.

 

이에 편승한 얄팍하고도 재치꾼 교인들은 큰 교회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해 그곳에 둥지를 튼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구원할 힘은 대형의 힘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작고 약한 것들을 택해서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것을 알아야 할것이다.

 

세상에서 제멋대로 살더라도, 부모 친척이 돈없어 굶어가도, 이웃이 배고파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교회에 아낌없이 무조건 큰 헌금만 하면 하나님이 축복해주실 것이라는 고르반사상때문에  한국교회는 전반적인 사회의 부패요인으로 심한 배척과 질시의 융단폭격을 받고 있다.교회가 비호감 내지는 혐오집단 혹은 공공의 적으로 매도된 현실은 각종 매스컴이나 인터넷 SNS, 여론등을 통해서 알수 있다.

 

한국의 어느 메가교회들은  촘촘한 셀 조직을 만들어놓고 전교인 저인망식 총력전도, 노방전도,심방전도등으로 이웃교회  교인들까지  스며들도록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주일예배로만 끝나지 않고 월요일부터 오는 일요일까지 한 주간 내내 교회내에서 북적거리게 만든다. 즉 셀 소그룹교육, 제자반, 행복학교, 교리학교, 미래목회연구,큐티학교, 밤10시기도회, 월요중보기도회, 축복안수기도회, 목요영성집회, 기도학교, 생수의 강, 큰숲 회복수양회, 후원자 수양회등 시장터서나 볼수 있는 혼난법석을 일으켜 정신을 빼놓게 한다. 일요일의 순교자로 만든다.

 

그리고 또한 십일조를 안내면 안되도록 하는 십일조제도 당위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파 한다. 어떤이는 공개 설교 시간에 십일조를 안하면 저주를 받아 암이 걸려 구원까지 받지 못한다며 갖은 으름장을 놓는자도 있다. 성도들의 영혼과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아무리 사람의 혀에는 뼈가 없다고해서 마치 뼈대 없는 집안에서 막 자란 아이처럼 이렇게 말하는자는  23쌍의 염색체 가운데 가장 저열성이 아니고서 이렇게 말할 수 없다.   

 

또 새해 연초 교회내 여러봉사직분들을 임명 조건으로 십일조 이행 동의서에 강제 서명토록 한다. 그래서 만일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교회내의 여러 봉사들을 제한하고 제외시키며 믿음 없는 자들이라고 낙인 찍는다.

 

이들의 시계는 과거 중세 그때를 향해 거꾸로 돌고 있다. 어디 교회내 봉사기관이 너 한 조각 나 한 조각 나눠먹는 피자 조각이란 말인가. 세탁기 팔 때 끼워주는 하이타이인가?  봉사는 어디까지나 십일조 내고 안내는 조건적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지난 과거 한국교회 성도들의 순수  신앙은 많은 기적을 가져왔다.  하지만 지금은 기억속의 희미한 화석으로만 남아 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는 예수님의 교훈은(눅10장27절) 어디론가 증발돼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다. 어떻게 이들과 같은 산소를 호홉 하고 어떻게 이들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야 할지 고민이 깊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향한 의와 인과 신이 십일조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셨음에도(마23:23), 그리고 또 예수님은 가난한자들이 복이 있다고 했지만(눅6:20) 오희려 그들은 십일조 잘 내는것이 축복의 통로라고 가르친다.예수께서는'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하셨는데 오희려 그들은 십일조와 부담스러운 헌금으로 무거운 멍에로 짐을 씌우고 있다.

 

그래서 현재 오늘의 한국 교회는 그러한 가르침 때문에 기복신앙으로 심한 중병이 들어있다. 복음을 듣고 교회 등록과 동시에 신자들은 교회 조직에 촘촘히 스며 있는 기복주의적 그물망 속으로 무심코 진입해서 거대한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그 공동체의 멤버가 된 그들'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각종 힘겨운 헌금과 교회제도로 인하여 빛이 바랜다. 교회마다 쏟아내는 정책 메뉴들, 목회자들의 야심 찬 목표계획을 감당하면서 오늘까지 지탱왔다는 것이 경이롭다.

 

이에 신자들은 '신앙의 본질'을 버리고 '기복 전문인' 이 되기로 선회 한지 오래됐고,  돈에 대한 집착력은 하늘을 찌를 정도다.

 

이들에겐 맘몬이란 배타적 울타리 안에 스스로 갇혀 물량주의의 일그러진 모습으로 진실된 신앙에서 멀리 떠나 있다. 91년전 이 땅의 교회들은 호화로운 대형 건물이 아니라 불타 버린 47개 예배당의 폐허에서 '빛과 소금' 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자꾸 막장으로 치닫고 있는 임박한 예수 재림의 9회말과 같다.

 

 자신의 마지막 타석의 무리한 스윙으로 자신들의 목회게임을 승부처로 뒤집으려는 그런 부담스런 행동을 거침없이  저질른다. 교회건물 짓는데 제1,2 금융권 은행 빚 10조원, 한달 이자만도 600억원.아프리카 전체 인구 6억8천만명의 절반인 3억4천만명이 한달간 먹을양식을 생명없는 흙속에 던진다.몸 속에 '분열의 유전자, 왜곡의 DNA, 허영의 염색체' 라도 지니지 않고서야 이렇게 까지 빗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예배당 건물 짓는 것을 "하나님 뜻" 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단지 자신의 욕망을 채위기 위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일부 교회들은 오늘날 교회의 세속주의, 부패, 타락, 무능력의 현상을 생산해 냈다.

 

 그런데 큰 것과 화려한 것을 추구했던 건물은 다 무너졌다. 솔로몬은 18만명을 동원해서 성전과  지성소를 모두 금으로 장식한  최고의 성전을 지었지만 얼마안가 바벨론 느브사라단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A.D.63년경 알비누스(Albinus)총독이 80년동안 지었다는 헤롯성전도 돌위에 돌하나 남지 아니하고 무너져 버린 것을 우리는 성경과 역사를 통해서 잘 알수가 있다. 과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유럽의 교회의 건물들도 이제 어렴풋한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성공에 대한 ‘집단 강박증’은 인간 사회의 마지막 보루인 ‘자기 성찰’의 기능마저 마비시킨다.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너나없이 승자가 되겠다고 달려온 결과는 정작 어떠한가. 더욱 안타까운 것은 신자유주의의 화려한 수사(修辭)에 현혹된 우리의 불행한 선택이 부메랑이 되어 현대교회의 성도들의 목을 옥죄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목은 가만 있는데 바람 소리들만 요란하다. 20세기 교회 문맹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말했지만, 21세기 문맹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좀더 긴 호홉을 가질 필요가 있다.개혁은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파충류인 뱀은 자신을 보호해주는 껍질을 목숨을 걸고 벗는다. 건강할수록 자주 벗는다. 탈피(脫皮)를 멈추는 순간 껍질은 나를 가두고 죽이는 감옥으로 변한다. 개혁은 진리의 혁명이다. 진리는 신앙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한국교회는 진리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의 한국 교회 지도자들일부는 본인들은 회개하지 않으면서 다른이에게 회개하라고 큰 소리 친다. 요시야왕은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애통하며 자기 옷을 찟고 유대민족의 죄과를 통회 했던 것처럼 한국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진리의 생명의 말씀을 찾아야 한다. 교주적인 레토릭 설교만을  되풀이하는데서 벗어나 이젠 예수 가르침의 이행을 냉정한 본질로서 짚어봐야 한다.

 

나침반은 아무리 돌려도 북쪽을 가리키는 바늘이 언제나 북극성을 향하고 있다.변화를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목회자 자신의 지향점이 바뀌야 한다. 반딧불이 짙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이유가 자기 안에 빛을 간직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온전히 따뜻하게 할 수는 없지만 마음의 눈으로 세상에 온기를 나눌수 있게 해야 한다.

 

촛불을 세상을 향해 밝히자 하기 보다는 목회자 자신들의 마음속에 켜야 한다.  걸레는 다른 사물에 묻어 있는 더러움을 닦아내게 위해 자신의 살을 헌다. 목회자는 그 비인간화의 속살을 고민 해야된다.

 

성직자라는 직업이 원래 강하다고 하는 것은 오로지 그들에겐 아무것도 잃을게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땅도, 아파트도, 직장 의자도 없다. 신부와 승려에겐 가족도 없다. 스님은 쇠고기도 먹지 않는다. 버릴 것도 없는데 그나마 남은 육신마저 고행으로 가볍게 만든다.

 

역사적으로 성직자들은 가벼운 몸과 강한 정신으로 세속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 넘곤 했다. 로마의 사자밥이 되면서도 굴하지 않았다. 카톨릭 신자들은 대원군의 칼날에 목을 바쳤다. 그래서 성경은 순교라는 뜻과 사도행전 1장8절의 증인(μαρτυσ-말투스)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

 

성직자가 그렇게 강하기 때문에 그들이 움직이면 세속이 긴장하고 떤다. 세상이 얼마나 흔들릴지 세상 사람들은 숨 죽인다. 심장이 두근 거린다. 그러나 안락에 빠진 교회지도자,  연봉이 몇억 혹은 몇십억 받는 자들이 이중과세라고 세금한푼 안내려는 그들, 고상한 깃발 아래 어김없이 광기(狂氣) 에 편승해 오면서 장이 서게 하고 좌판을 깔고 판돈을 챙기는 이들,    성경적이 아닌 십일조를 성경적인 것처럼  말하며 돈 없어 십일조 못하는 성도들을 왕따 시키는  이들, 그러한자들 앞에는 어느 누구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

 

마5:18 에서 예수님께서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하셨고,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그것을 다 이루시었고, 다 성취 하셨다(요19:30).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뤄셨기 때문에 십자가 이후에는 구원의 길로서 십일조 기능은 완전히 종결 되었다.

 

구약의 피 제사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제사에 비하면 그림자요 예표였고 그리스도의 제사는 실체요 그 원형이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구약의 모든 제도들이 그림자 라고 했다.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다. 구약의 모든 제도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므로 없어져 버렸다.

 

또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하기 때문에 히브리서에서는 모세와 그리스도 관계를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로 묘사 하면서 율법의 기능 종결에 대하여 바울보다 더 과격하게 말했다(히7장19절).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희생이 율법의 모든 일점일획까지도 다 이루셨기 때문에(히7장27절), 또 옛 계명이 무익하므로 율법을 폐하셨고(히7장18절), 바울 역시 갈5:4에서 '율법으로 의롭다 하려는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다'고 까지 말했다.

 

종말론적인 성취와 폐지,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것이 성취되므로 구약의 모든 제도들이 폐지된 것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영화에서 실제가 됐다. 옛 언약의 약속과 선지자의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고 종말론적으로 성취됐다. 옛 질서는 해소되고 제거되고 없어져 버려서 전혀 새로운것이 생긴 것이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지막으로서 그리스도가 율법을 다 지키고 성취하므로 십일조까지 폐쇄해 버렸다. 그리스도가 성취 했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모든 정죄를 다 담당 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십일조)이 그리스도를 믿는자들에게서 적용되지 않는다.

 

대신 빚을 다 갚아 주었기 때문에 빚쟁이의 빚 메이는데서 끝났음과 마찬가지이다. 모든 율법(십일조)이 종결되고 그 세력이 파괴 돼서 더 이상 그것이 나에게 구속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완전 무력화 돼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도 받을 필요가 없고, 안식일도 지킬필요가 없고, 절기도 지킬 필요가 없고, 십일조까지 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옛 언약은 새 언약이 옴으로 자동 폐기 되었다. 전자 제품도 신제품이 나오면 옛날 제품은 모두 폐기하기 마련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십일조)의 마침이고(롬10장4절) 완성인데도, 그래도 옛 언약의 백성들은 제사 제도와 십일조등을 계속 할 것을 미리 알고, 하나님은 성전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찟고 자신의 심장을 내 보이시면서 물리적 방법으로 완전히 폐지 하셨다. 성전이 있는한 레위 제사가 계속 될 것이기 때문에 AD 70년에는 로마의 디도 장군을 들어 성전을 옹호하던 유대인 110만명을 죽여버렸고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훼파시켰다.

 

그 후 성전 재건은 아직도 이뤄지지 못했고 또 시온주의 결과로 유대인들이 2차 대전후 팔레스틴에 귀환하여 이스라엘을 세웠어도 아직도 성전많큼은 세울수가 없다.성전이 있으면 십일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전만 아니라 제사장 가문을 완전히 허물어 버리심으로 지금까지도 사독의 뒤를 이은 제사장의 후예를 확인해 낼 길이 없다. 그들의 성씨가 코헨(כהן) 이란 사람을 찾아 제사장으로 세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코헨은(כהן)히브리어로 제사장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헨(כהן)이라는 성씨를 가진 자도 찾을 길이 없다.

 

이 십자가 완성 때문에 한국만 제외한 세계 모든 교회가 이 사실을 깨닫고 십일조를 오래전에 완전 폐지하였다. 한국 교회는 속히 개혁과 회복이 필요하다. 가장 시급한 일이 이 십일조 제도를 중단 해야 한다.  십일조가 복의 근거라는 믿는 그 믿음의 신기루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맘몬 우상을 배격해야 할 것이다.

 

현실의 문턱에서 묻는다.  교회는 무엇으로 생존하는가. 입만 열면 물질축복만을 말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말씀 인가, 아니면 85종류 헌금에 짓눌린 성도들의 한숨 소리인가.

 

'너와 나' 의 시간이란 '항상 지나감'이다. '과거란 항상 미래에 의해 밀려나고 미래는 항상 과거를 뒤쫒지만, 과거와 미래는 둘 다 영원한 현재 안에서 창조되고 흐른다.

 

어둠이 아무리 길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아침이 온다. 아무리 높은 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도 강물은 저 혼자 길을 만들어 바다에 이른다. 복수초는 혹한을 뚫고 땅 위로 올라와 눕고 서기를 반복하면서 스스로 체열을 발산해 주변의 눈과 얼음을 녹이며 꽃을 피운다.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열을 내고, 태양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따뜻한 암술 주변으로 곤충들을 모으고 혼신의 힘을 다해 수정한다. 신비한 생명력을 간직한다.

 

꽃 향기는 주머니에 싸도 퍼지는 법이다. 단단한 얼음은 작은 송곳에 쪼개지고, 두터운 눈은 한 줄기 봄바람에 스러진다. 생명의 신비가 있고, 우주의 문은 열린다. 거센 폭풍이 몰아칠 때 다른 새들은 처마 밑에 숨지만 독수리는 강한 양 날개로 비행을 즐긴다. 사람의 영혼을 천상의 세계로 비상하게 하는 양 날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하심이다.

 

이제 우울한 그늘에도 따뜻한 배려의 시선을 담고, 숲과 도시, 빛과 그늘을 두루 살피는 한국교회의 순혈주의를 끝까지 바램은 모든이의 소망이어야 한다. 푸근한 모습으로 향기를 품고 신비로운 색깔로 사랑의 느낌을 물씬 풍겨주는 한국교회말이다.

 

비록 지금껏 한국교회는 가시밭에 휩쌓여 상처투성 일지라도 필히 개혁을 이뤄내야 한다. 과거 종교 개혁자들에게도 가시가 있었기에, 그 가시가 종교개혁을 이뤄냈다. 가시에 찔리면 고통스럽지만 그럴수록 교회는 든든히 바르게 서 가게 된다. 동풍이 불면 서쪽 가시에 찔리고, 서풍이 불면 동쪽 가시에 찔리고, 찔리울수록 진리의 빛은 더 발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혁이라는 치료약이 우리 영혼에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훗날 이 세상의 아름다운 소풍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돌아갔을때  '그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어' 라고 우리 모두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출처 : 십*일*조
글쓴이 : 고동엽 블러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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