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예배의 네기둥

 

16세기 종교개혁은 단선적이고 획일적인 운동이 아니라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성격을 지닌 운동이었다.
루터파, 츠빙글리파, 칼뱅파, 급진파, 성공회, 가톨릭 모두가 저마다 교회개혁의 기치를 주창하고 나섰다.

이런 여러 흐름 중에서 특별히 스위스에서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을 개혁전통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Huldrich Zwingli, 1484~1531)와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장 칼뱅(Jean Calvin,1509~1564)의 유산을 따르는 것을 개혁교회 전통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개혁교회 전통은 하나님의 주권과 성서,그리스도인의 성화, 그리고 공동체와 사회의 구원에 대한 강조를 통해 다른 전통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면모를 갖추었다. 츠빙글리가 개혁교회 전통의 선구자라면, 칼뱅은 그 전통을 발전시키고 확장시킨 완성자라고 불릴만하다. 이런 개혁교회 전통이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장로교회라는 이름으로 맥을 잇게 되었다.

오늘날 참된 예배의 회복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예배 문제는 종교개혁 시기에도 핵심적인 이슈 중 하나였던 만큼, 종교개혁자들이 예배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숙고해 보는 것이 참된 예배에 대한 우리의 모색에 있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예배에 대해서 종교개혁자들이 성찰한 내용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개혁전통의 확립자라 할 수 있는 칼뱅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일이 현재 우리의 예배를 보다 충실하게 회복시키는 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칼뱅에게 있어서 예배의 회복은 참된 교회로 나아가기 위한 첫 걸음이자 마지막 단추였다. 칼뱅은 사도행전2장 42절의 말씀,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는 말씀 안에 예배의 중요한 요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믿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는 것이요, 서로 교제한다는 것은 성도 간의 섬김과 세상을 향한 구제가 이루어진다는 것이요, 떡을 뗀다는 것은 성만찬이 거행된다는 것이며,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칼뱅은 말씀선포, 구제, 성만찬, 기도(찬양)가 예배의 네 요소라고 보았다.



첫째로, 무엇보다 개혁교회 예배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하고 있다. 사실상 16세기의 초의 신자들은 성서를 읽기는커녕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는 성서 한 권을 가지려면 양을 수백 마리 죽여 그 가죽을 벗겨서 말린 후에 손으로 일일이 필사해야만 가능했다. 설혹 성서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중세 1,000년 이상을 지배해 온 히에로니무스(Eusebius Hieronymus, 흔히 제롬이라 불린다)의 라틴어 불가타 역본이었다. 교육을 받지 않은 신자들로서는 라틴어 성서를 읽는 일이 불가능했다. 뿐만아니라 중세시대에는 설교도 1년에 절기 때 몇 번 라틴어로 행해졌기 때문에 그나마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개혁자들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자국어로 성서를 번역하는 일과 자국어로 설교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성서는 영어(위클리프 성서와 틴데일 성서), 독어(루터 성서와 취리히 성서), 불어(제네바 성서), 체코어(후스파 성서) 등의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했으며,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자국어로 설교가 이루어졌다. 지금은 믿기 힘든 일이지만, 그 당시는 라틴어 성서를 다른 언어로 번역했다는 이유만으로도 화형을 당하였다.


개혁교회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와 설교를 특별히 강조하여, 교회력에 따라 정해진 성서본문만을 설교하던 로마가톨릭과 루터파의 관례를 비판하고 성서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설교하는 강해설교 방식을 출발시켰다. 뿐만 아니라 개혁교회의 모든 목회자들은 매주 빠짐없이 성서본문을 읽고 해석하는 예언모임(prophecy meeting)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전통을 확립시켰다. 이 전통은 청교도를 거쳐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둘째로, 개혁교회 전통은 구제를 예배의 중요한 한 요소로 다루고 있다. 칼뱅은 사도행전 2장 42절의 말씀 중에서 서로 교제한다는 것을 가난한 사람을 돕는 구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구제를 예배의 한 요소로 삼은 것은, 구제가 교회의 부차적인 의무가 아니라 본질적인 사명임을 천명한 것으로 대단히 인상적이다. 칼뱅은 집사(deacon)의 직무는 초대교회에서부터 구제를 위해 세워졌기 때문에 가톨릭교회가 집사를 교회 예전을 돕는 조력자나 사제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정도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하면서, 집사의 직책은 임시적인 것이 아니라 항구적인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칼뱅은 제네바에 있던 ‘종합구빈원’(General Hospital)을 통해 제네바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사역을 펼쳤다. 종합구빈원에는 4명의 행정관과 1명의 구빈원장이 있어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구제활동을 펼쳤으며, 매주일 아침 6시에 모임을 갖고 구제 상황을 점검하는 등 매우 조직적으로 구제를 실천하였다. 뿐만 아니라 제네바의 시민이 아닌 외국인 피난민들, 특히 프랑스에서 건너 온 피난민들을 위해 ‘프랑스기금’이라는 사적인 기구를 만들어서 구제를 펼쳤다.


칼뱅이 여기에 여러 차례 기부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칼뱅의 집에서 이 모임의 총회가 이루어졌다는 보고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16세기 개혁교회의 요람이었던 제네바에서는 오늘날의 사회복지제도를 무색케 할 만큼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구제가 교회를 통해 펼쳐졌으며, 더욱이 이것을 교회의 여러 활동 중 하나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핵심요소로 여겼다는 점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금의 순서를 포함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은 개혁교회의 구제 전통을 잘 대변하고 있다.



셋째로, 칼뱅을 위시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예배의 성만찬에서 신자들에게 빵만 나누어 주는 데 반대하면서 포도주 또한 분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성서에서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빵만이 아니라 잔도 주셨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사제가 축성한 빵과 포도주는 외양은 그대로일지 몰라도 그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뀐다는 화체설을 믿었기 때문에, 혹시나 포도주를 나누다가 흘릴 경우 그리스도의 보혈이 떨어지는 것이 되기에 신자들에게 빵만 입에 직접 넣어주고 잔은 분배하지 않았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이 볼 때에는 화체설 자체가 미신적인 허구에 불과했다. 개혁자들 사이에 성만찬을 둘러싸고 견해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빵뿐 아니라 포도주 잔도 분배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일찍이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는 신자들이 포도주를 받을 권리에 대해 강조했으며, 이 때문에 가톨릭의 모진 박해를 받다가 결국 이단으로 몰려 콘스탄츠공의회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후스파 중 일부는 프라하의 남쪽 도시 타보르(Tabor)에서 성만찬의 잔이 그려진 깃발 아래 결집하여 항전을 벌였다. 지금도 타보르에는 건물 꼭대기나 집의 벽면에 심지어는 쓰레기통에도 포도주 잔의 문양을 그려두고 있어 이곳이 후스파의 도시임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빵과 더불어 포도주까지 나누는 성만찬을 두 가지 종류를 배설하는 만찬이라는 의미에서 ‘이종배찬’(two-kinds distribution)이라 부른다.


오늘날 우리가 예배 시간에 받아 마시는 포도주가 얼마나 어렵게 얻어 낸 권리인지를 생각하면 새삼 새로운 감격이 생길 것이다. 이와 같이 개혁교회를 포함한 종교개혁 전통의 교회에서는 예배 시간에 빵과 잔의 성만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확인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넷째로, 개혁교회 예배의 마지막 요소는 기도(찬양)이다. 우리가 흔히 찬양을 곡조 있는 기도라고 말하는 것처럼, 칼뱅은 찬양이 곧 기도라고 보았다. 중세 가톨릭교회에서는 신자들은 찬송을 부르지 않고 성직자들만 라틴어로 찬송을 불렀다. 하지만 칼뱅은 신자들이 모두 함께 자신들의 언어로 노래하는 회중찬양을 옹호하였다. 더욱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서는 시편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편찬송을 선호하였다.


그리하여 1539년에 <제네바시편찬송가>를 처음으로 출간하였다. 여기에 18곡의 시편찬양이 수록되었는데, 그 중 6곡에 칼뱅 자신이 직접 가사를 붙일 만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제네바 시편찬양은 그 후에 계속 증보되어 1562년에는 시편 전체를 찬양으로 만들게 되었다. 주로 클레망 마로(Clement Marot)와 테오도르 베즈가 시편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루이 부르주아(Louis Bourgeois)와 클로데 구디멜(Claude Goudimel)이곡을 붙였다.


<제네바시편찬송가>의 서문에서 칼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휴식과 즐거움을 위해 주신 것들 가운데 음악은 첫째가는 것이거나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에 속한다. 우리는 음악을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주신 대표적인 하나님의 선물로 평가해야 한다”라고 적고 있다.


칼뱅은 찬양에서 가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시편이 최상의 찬양이 된다고 믿었던 이유도 시편의 고백이야말로 하나님께 드리기에 가장 합당한 가사를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칼뱅은 가사를 듣고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는 요소들은 가능한 한 배제하려고 하였다. 칼뱅이 교회의 예배에서 악기의 사용을 자제하고, 여러 화음으로 노래하기보다는 단음으로 합창하는 것을 선호했던 이유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그렇지만 가정이나 일상생활에서 악기를 사용하고 화음을 넣어서 노래하는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인정하였다.


예배에서 찬양이 중요한 이유는 찬양이 성도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묵상하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영화롭게 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교회 최초의 신학교였던 제네바아카데미(1559년 설립)의 교육과정에는 수업이 있는 날이면 언제나 매일 1시간씩 시편을 노래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와 같이 예배시간에 시편을 찬양하는 것은 개혁교회가 세워진 곳이면 어디서나 특징적인 전통이 되었다.


한국장로교회의 최초 찬송가인 <찬셩시>(1895년)의 재판(1898년)에는 총 84곡 중에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 Pieters)의 시편찬송 14곡이 포함되어 있고, <찬셩시>의 영문이름도 “Psalms and Hymns”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개혁전통을 잇고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찬송가에는 시편찬양이 대부분 제외되어 있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초기 개혁교회의 예배는 말씀선포와 구제와 성만찬과 기도(찬양)로 구성되어 있었다. 물론 16세기의 전통을 오늘날 그대로 재현하려고 하거나 고집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렇지만 원래의 정신과 원리를 오늘날의 예배에 되살려 접목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다. 구제를 예배와 분리시키지 않고 예배의 한 요소로 본 점이나, 시편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합당한 노래를 부르려고 했던 점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취사선택하지 않고 전체를 빠짐없이 성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선포하려고 한 정신이나, 주님의 본을 따라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만찬을 매주 베풀고자 했던 정신만은 여전히 살려야 할 것이다.


예배의 주인공인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예배, 신자들이 감격하고 새로운 삶을 위한 도전을 받는 예배, 삶의 부분이 아니라 삶 전체로 드리는 예배야말로 교회의 핵심적인 존재이유(raison d’etre)가 아닐까?


글| 박경수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바른교회아카데미 연구위원으로 섬기고 있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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