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예배관


<윤용진 저> 


 

예배의 역사 이 글은 필자의 저서 『예배와 교육』(서울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교육국, 2000)의 제 3장을 인용한 것이다.


- 구약의 예배관을 중심으로 -


    현대 교회가 예배 공동체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예배 역사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이다. 예배의 의의를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하나의 채널로 볼 때 예배의 역사는 창세기에 나타난 에덴 동산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본다. 아담 시대로부터 초대 교회 시대에 이르기까지 성경에 나타난 예배의 역사와 초대 교회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예배의 역사를 살피며 예배의 본질과 형태 그리고 예배의 발전 과정을 알아 보기로 한다.



    1. 모세 이전 시대의 예배


    모세 이전 시대와 모세 이후의 시대를 구분하는 이유는 출애굽을 시발점으로 하는 모세시대에 레위기를 통해 이스라엘 종교사에 큰 획을 긋는 제사제도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모세 이전 시대는 유대교의 가장 원시적인 시기로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한 가정을 창설해 주신 때로부터 아브라함의 후손을 한 민족으로

창설하시며 명실상부한 언약 백성으로서 역사의 무대 위에 올려 놓으실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이 시기의 예배 형태는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을 띠고 있다. 에덴 동산에서 살던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교제하면서 창조주를 경외하였다. 금단의 열매 규정(창2:16-17)은 하나님과 인간의 정상적인 관계가 유지되는 하나의 채널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이 예배의 내용이자 형식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하여 탈선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살 길을 얻게 되었으니 땀 흘려 열심히 경작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창3:17-19).

하나님이 허락하신 땀의 결실로써 제물을 삼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경배하는 것으로 예배의 형태는 바뀌었다(창4:3-5). 이것은 타락 이전부터 맺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연속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쳐죽인 사건(창4:1-15)은 인류 최초의 가정에 일어난 비극으로서 문제의 촛점은 예배의 실패에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cf. 윤용진, “가인과

아벨의 제사문제 소고” : 『개혁신학』제 12집(서울 :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출판부, 2002).


    에덴동산의 풍요로부터 쫓겨난 뒤 아담의 가정은 각기 흩어져서 먹고 살기에 분주했을 것이다.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뼈아픈 경험을 한 아담과 하와로서는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순종하도록 가르쳤어야 했는데 바로 이 점, 예배에 대한 교육을 바로 하지 못했거나 가인이 예배를 소홀히 생각했기 때문에 비극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아들을 잃고 난 뒤 예배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겪은 아담은 후손들에 대한 예배 교육을 제대로 시행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벨

대신에 주신 자식 “셋”을 얻고 셋도 아들 에노스를 낳았을 때 “그 때에야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4:26)는 말씀이 바로잡힌 예배 분위기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 후 하나님과 동행하며 모범된 예배의 삶을 살았던 에녹의 생애(창5:21-24)와 하나님의 명령대로 철저히 순종한 뒤 스스로 제단을 쌓았던 노아의 예배 중심적인 삶

(창8:20)이 예배의 연속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렇듯 역사 초기의 예배 행위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원시인들의 자연 발생적인 미신적 예배와 동일시하면서 기독교 예배의 독특한 성격을 부인한다. 그러나 롤랑 드 보(Roland de Vaux)가 다음 도표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무리들의 예배는 당시 이방 종교의 예배 내용과 본질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방 원시종교의 예배

구약의 초기 예배


1. 해,달,별 등 자연의 신들을 섬기는 다신론적 예배
1.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유일신 사상의 예배
2. 예배 대상인 그들의 신들로부터 아무 응답도 받지 못했음
2. 성경의 제사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인격적인 응답이 있었음
3. 섬기는 신들의 형체를 그리거나 만들어 섬기는 우상종교였음
3. 일체의 형상이 없었으며 절대적인 권위와 말씀에 순종했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별된 민족의 시조로 부름받을 때는 여호와 종교의 예배가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하나의 족장으로서 출발하면서 제사장과 예언자 그리고 통치자의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그는 하나님을 향한 제단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다니면서 어디에서든지 필요성을 느낄 때마다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다(창12:7-8;22:9-10).


    이러한 강한 예배 의식은 그의 후손인 이삭(창22:9-10)과 야곱(창26:24-25)에게 계승되었다. 이 족장들이 행한 예배는 예언적이며 제사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예언적 요소란 족장들 개개인이 하나님과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접근을 통하여 얻은 것들인 데 거기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자기의 목적을 밝히셨으며 또 그들에게

통찰력을 주셨음을 볼 수 있다. 제사적인 요소에서는 그들이 직접 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희생의 제물을 드리면서 인간들이 앞으로 계속해야 할 예배의 모범과

제사의 필요성을 보여 주었다.



    2. 모세 시대의 예배


    모세가 구약의 예배 역사를 살펴봄에 있어서 중요한 이유는 그가 율법서를 기록하면서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예전(禮典)의 구체적인 내용을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율법서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도덕법이고 둘째가 사회법(시민법)이며 마지막 세번째가 제사법(의식법 또는 예배법)이다. 제사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과 하나님과 더불어 지속적인 교제를 하며 동행할 수 있는 방법을 규율하는 것으로서 대부분 레위기에 실려 있다. 레위기에 기록된 예전 절차는 애굽의 노예생활 속에서 직, 간접적으로 다신론적인 이방 종교로 인해 오염되었던 예배 형태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게 해주었다.


    율법서에 나타난 예전의 주요 내용을 보면 십계명이라는 새 계명을 수여하셨고 예배를 위한 성소의 규례와 예배를 집례할 제사장 계열(레위지파)의 확정해 주셨으며 여러 종류의 제사와 제사 방법 등을 제정해 주셨다. 그 중 대표적인 내용을 꼽자면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 예배해야 한다고 십계명을 통하여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신 점과 제사의 종류에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죄 등이 있으며 제사의 방법에는 화제, 요제, 거제, 전제 등이 있다고 상세히 명시한 점이다.


    물론 이 외에도 특별한 목적에 따른 제사들이 있고 상세한 준수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아론이 주도했던 금송아지 우상숭배 사건(참조, 출32장)에서 엿볼 수 있듯이 과거 애굽에서의 무질서했던 여호와 종교의 예배 의식은 모세 시대부터 쇄신되어 정착해 가는 구체적 발전을 하게 된다.


    모세는 예언자로서 여호와를 대면하고 그 말씀을 받아 전달하는 사명자이기도 했다. 그는 최초의 선지자로서 예언적 기능을 가지고 예배 의식을 집례하는 책임있는 존재였다. 모세를 통하여 가르치신 제사법 중에 제단 쌓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흙으로 쌓는 토단이고, 둘째는 다듬지 아니한 자연석으로 쌓는 석단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십계명의 설명 직후에 계시되어 있다(출20:22-26). 그리고 장차 들어갈 가나안 복지에서 안정을 취하거든 3대 절기만큼은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하실 한 곳(예루살렘 성전)에서만 경배하라고 가르치신다(신12; 16장).
  


    3. 모세 이후 시대의 예배


    모세가 죽고 난 후 여호수아의 지도로 가나안 땅에 진입한 이스라엘은 이제까지 겪지 못했던 새로운 종교와 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 광야 시대에 겪었던 바알브올 사건(민25장)의 뼈아픈 기억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경배의 대상이라고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신 율법의 예배규정을 어기었다. 오랜 세월 동안 메마른 광야를 유랑하며 따분하게 지내왔던 그들은 자신들의 단조로운 삶의 양식과 전혀 다른 가나안의 토착 종교에 매력을 느끼고 급속도로 빠져들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풍요와 다산의 신 바알과 여호와를 동일시하여 함께 섬기는 혼합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던 예배와 의식, 기념 축제 등을 바알에게 돌리는 심각한 과오를 범하였다. 개인과 한 가정은 물론이거니와 한 지파 전체가 임의로 제사장을 고용하여 새겨 만든 우상을 섬기고 여호와도 함께 섬기는 혼탁한 상황이 계속되었다(삿18장).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은 거룩한 예배의 집례자로서의 사명을 망각하고 여호와 앞에 불경스런 짓을 범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했기 때문이다”(삼상2:12-17).


    여기에 거짓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혼합 종교로 전락해버린 이스라엘의 타락상에 더욱 부채질하였다. 이러한 예배의 타락상을 가리켜 성경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6;18:1;19:1;21:25)고 당대의 역사를 평가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들의 활동이 아니었더라면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 명맥은 유지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무엘 이후 백성들의 요구대로 왕정이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초대 왕 사울은 하나님께 바칠 예배의 헌물을 빙자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고(삼상15:9,15,19-21), 하나님이 제정하신 거룩한 예배의 질서를 무시하여 제사장의 권한을 침범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다(삼상13:8-12). 그 뿐만 아니라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기념비를 세웠으며(삼상15:12)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무당의 거짓된 초혼술에 자신의 운명을 의지하는 이방의 어리석은 풍습을 좇다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죽었다(삼상28장).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야 예배의 중요성을 새로이 인식하게 되었다. 다윗은 무엇보다도 구약 예배의 중심인 법궤를 제대로 안치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삼하6장). 거룩한 성전을 지어 봉헌하려고 하였으나 아들 솔로몬의 손에 의하여 봉헌받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삼하7장)을 받들어 성전 건축을 위한 철저한 준비를 지시한다(대상28-29장). 레위 자손들의 직제를 개편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필요한 모든 일들을 율법대로 시행하도록 하였고 아론의 자손을 24반차로 나누어 공평하게 섬기도록 예배의 규례를 제정하였다(대상26-27장).


    또한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들 중에서 선별하여 각종 악기와 노래로써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여 일종의 예배 혁신운동을 전개하였다(대상25장). 이러한 예배 혁신운동은 그의 아들 솔로몬 때에 가서 아름답고 거룩한 성전의 봉헌을 계기로 하여 확립되었다.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전은 제의 공동체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과 생활의 중심, 즉 예배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선교의 중심 역할로서의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왕상8:41-43).
혁신된 예배의식의 몇 가지 요소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십계명이 담긴 법궤를 성전에 안치한 것
      (2) 진설병, 황금 등대를 비롯한 기구들로 성전을 화려하게 장식한 것
      (3) 성가대의 찬양에 수금, 나팔 등의 악기를 사용한 것(대상23-25장)
      (4) 예배 참예자들이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예물을 드린 것


    그리고 그들의 예배 행위는 음악, 축송, 춤, 기도, 행렬, 간단한 설교 또는 강화(講話), 선조들에 대한 회상, 고백 등을 하면서 거룩한 식사를 나누는 순서들을 가졌다.


    그러나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 여호와를 떠남으로써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거룩한 예배는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는 이방의 수은 여인들을 사랑함으로써 그녀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예루살렘성 안으로 유입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 결과 성전 예배는 형식적인 의식으로 전락했고 예배의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게 되었다(왕상11:1-8). 솔로몬의 타락은 단지 개인적인 범죄나 왕의 규례를 어김으로 인한 개인적인 품위의 손상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다시 말하자면 여호와 한 분만을 섬기는 신앙 공동체로서의 국가적, 종교적 타락을 의미한다.


    이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 공동체로서의 생명에 위태로운 중대한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거듭된 회개의 촉구와 예배의 회복 요청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조짐이 없자 하나님께서는 10 지파를 떼어 왕손이 아닌 여로보암에게 넘겨 줌으로써 이스라엘을 남과 북으로 갈라놓으실 것을 계획하셨다(왕상11:10-13).


    분단 이후 북조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그릇된 종교정책 - 제사장과 레위인을 폐위하고 뇌물 바친 평민들로 제사장을 삼음 /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우상과 제단을 세우고 거기에서 섬기라고 함 / 초막절기를 8월 15일로 변조시킴 - 과 아합 왕조의 바알 숭배로 인하여 혼합종교로 전락해 버렸다. 남조 유다는 분열 직후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율법에서 가르치신대로 제사장들이 예배를 주도했다. 그러나 먼저 이방종교를 받아 들여 혼합종교로 전락한 북조와의 교류로 인하여 예배의 순수성은 점차 변질되었다.



    4. 선지자들의 예배 갱신 운동


    남과 북으로 나뉘어진 뒤 양쪽의 신앙상태는 시간상의 순서에 차이가 있을 뿐 예배의식의 변질과 타락으로 동일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생명은 율법에 입각한 바른 예배의 여부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북조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는 타락한 예배의 갱신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이교도의 세력과 투쟁했다.


그러나 그들의 개혁의지는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하였고 여호와 신앙은 혼합주의로 완전히 변질되었으며 결국 여호와의 징벌로 말미암아 주전 722년 멸망하게 되었다. 타락한 북조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징벌은 이스라엘의 대적 앗수르를 당신의 진노의 병기요 막대기로 선택하시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치게 하시는 전쟁으로 나타났다(사10:5-11).


    남조 유다에서는 언약 백성으로서의 신앙 공동체라는 자기 정체성을 정치적 지도자인 왕들 - 아사, 히스기야, 요시야 등 - 이 인식하고 극도로 타락한 종교적 상황에서의 개혁을 때때로 전개하였으나 이것 역시 오래 가지 못하고 거듭되는 예전의 타락과 이방종교로 인한 혼합주의적 양상은 다윗언약(삼하7장)의 파기라는 파국의 상황을 향하여 치닫고 있었다.


    특히 요시야 왕 시대에는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에 입각하여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혼합주의로 전락하게 된 대표적인 이방신 바알과 관련된 모든 지방 성소와 제단을 파괴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예배의식을 확립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거룩한 생활을 서약하며 율법에 입각한 인도주의 실천을 다짐하였고 성대한 유월절 의식을 통하여 바른 예배의 모범을 시행하였다.


    요시야가 요절하자 침묵하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의 뒤를 이어 개혁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외형적 의식에 사로잡혀 직업화되어 가는 제사장들의 종교성을 비판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영적인 종교로서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는 제도적인 개혁보다도 개인의 책임성과 심령의 변화가 더 시급함을 주장하며 내재적 종교로서의 개혁을 외롭게 부르짖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유다왕국의 타락상은 주전 586년 바벨론의 침공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시기에는 선지자 에스겔이 죄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성을 강조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예배 회복을 부르짖었다. 그는 예레미야가 형식적인 성전의 예배를 부정했던 것과는 달리 영적 회개와 더불어 새 성소에서의 예배확립을 강조하였다(겔40-48장). 이스라엘의 예배 역사를 회고해 볼 때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예배의 실패는 한 개인 뿐만 아니라 한 가정과 국가의 실패를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5. 포로 후기 유대교의 예배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후 유대인들의 예배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과 더불어 회복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옛적의 영광만은 못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이 갖는 신학적, 역사적 의의는 매우 중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옛 신앙의 회복과 깨져버린 언약관계의 재건을 뜻하였다. 무엇보다도 성전을 중심으로 한 예배의 회복이 거룩한 예배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왜냐하면 포로지에서 임시 방편으로 드렸던 회당 예배는 새로운 정비가 불가피했으며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제사장의 임무도 율법을 가르치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성실한 이행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많은 학자들은 이 때의 성전 회복과 여호와 종교의 재건을 가리켜 하나의 민족적 신기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지적하셨던 유대교는 바로 이 시대를 가리키는 데 초대 교회시대의 예배 형태를 연구함에 있어서 이 시대의 예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초기 기독교의 예전은 이 시대의 예전을 모방하려고 한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이스라엘은 단순한 국가라기보다 종교적 공동체 다시 말하자면 거룩한 공동체였으며 모든 사람들이 이 형태의 지속을 위하여 노력했었다.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회당(synagogue) 예배이다. 회당이 언제 생겨났느냐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요시야 시대설(주전 8-7세기), 바벨론 포로시대설(주전 6-5세기), 포로 후 제 2 성전시대설(주전 5-4세기), 마카비시대설(주전 3-2세기) 등이 있으나 두번째와 세번째 의견이 지배적이다. 바벨론 포로시대설은 유다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인하여 바벨론과 애굽 지역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율법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자녀들에 대한 율법 교육을 시행하게 된 데서 기원을 찾는다.


    포로 후 제 2 성전시대에 회당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페투코브스키(Peteuchowskie)는 제 2 성전이 세워졌지만 제사장의 수가 너무 많아서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제사장의 실직 문제가 회당 출현의 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즉, 전국을 24지역으로 분배하여 각 지역에서 제사장들이 교대로 집례하도록 한 것이다. 제물은 중앙지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리고 각 지역 24곳에서는 매일 정한 시간에 지역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게 하였다. 제사장들은 매 한 주간씩 지역을 교대하여 집무하였고 반년에 한번씩은 예루살렘 성전 예배를 집무하였다.


    이러한 형식이 나중에 회당으로 발전되고 유대교의 예전적 행위가 안식일을 중심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위의 두 가지 견해 중에 후자가 더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하여 회당 예배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에 시행된 예배로 정착되었고 그 예배에서 행하는 중요한 것은 율법을 중심으로 한 기도 예배가 중심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제 회당을 중심으로 하여 이스라엘의 예배는 제물 중심에서 기도 중심의 예배로 전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제물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예배는 바벨론 포로 이후에까지 계속되었는데 역사적으로는 적어도 주후 70년경 로마의 티토 장군에 의한 성전 파괴가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된 것으로 본다.


    회당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신뢰의 관계를 확인하며 기도와 말씀과 찬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약 2세기경까지 진행되었던 유대 회당의 예배 모범은 다음과 같다.


      (1) ‘쉐마’ 즉 ‘이스라엘아 들으라’(신6:4-9;신11:13-21;민15:37-41)는 말씀의  낭독으로 예배는 시작된다.


      (2) ‘기도’가 뒤따르는데 후일에는 매일 드리는 예배에서 쉐마의 낭독 후에 18가지의 기도문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3) ‘성경의 낭독’ - 율법서, 선지서 등을 낭독한다. 그 후에는 말씀에 대한 해석을 통하여 설교가 진행되는데 디아스포라(Diaspora : 흩어진 유대인들)의 환경에서는 그 지방의 언어로 번역되는 것이 동반되었다. 


      (4) ‘축복의 서원’(민6:23-24)으로 예배는 끝난다.

    회당 예배가 결코 신약의 기독교 예배와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예배의 정신사적인 면에서 볼 때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예배의 역사는 출애굽의 역사와 더불어 민족적이고 공동체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험난한 이스라엘의 민족사와 맥을 같이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통의 상처로 얼룩진 험난한 역사의 뒤안길에는 반드시 예배의 실패가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 예수님 시대의 예배


    예수님 시대에는 성전에서의 예배와 회당 예배가 병행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예배에 대한 자세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하라’(요4:23-24)는 것이었다. 그의 입장은 위의 두 가지 형태의 예배 중 어느 것이라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전 예배를 부패하게 만드는 무리들을 향하여 채찍을 들어 예배의 순결성 유지를 몸소 강조하셨고(요2:12-25) 성전 예배의 여러 절기들을 지켰으며(요5,7,8장) 생애의 절정 기간인 수난주간을 대부분 성전에서 보내시는 등(마21:12-16;막12:41;눅2:5) 예수님의 성전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보이셨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시 여러 곳에 산재해 있던 회당을 규칙적으로 둘러 보시며 말씀을 가르치셨다(눅4:16). 여기에서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예배의 단절자가 아니라 예배의 완성자라는 사실이다. 그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주제였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신6:5;레19:18;마22:37-40)는 요약된 계명으로써 예배 중심의 종교성과 실천 중심의 윤리성을 계속 강조하며 가르치셨다. 특히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전은 구약 시대의 성전 예배나 회당 예배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새로운 의미와 내용을 지닌 예배 의식으로서 기독교 예배의 이천 년 역사에 변함없는 예전이 되었고 예배의 구심점으로서 지금까지 지켜 오고 있다.


    예수님과 동행하며 그의 고난과 부활, 승천을 직접 목격한 사도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과 더불어 새로운 형태의 교회 예배를 시작하게 된다. 이들의 예배에 관한 관심과 참여는 다음 세 분야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성전을 중심으로 한 옛 사도들의 예배와 활동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 바로 성전으로 발길을 옮겨 거기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예배 행위를 계속했던 것이다(눅24:53). 그 뿐만 아니라 오순절 사건 이후에도 그들은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께 찬미와 기도를 드리며 성전을 교회 활동의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행2:46-47;3:1;5:42).


    둘째, 회당 중심의 예배와 활동이다. 예루살렘 밖에 사는 유대인들은 언제나 쉽게 모일 수 있는 회당을 가지고 있었다. 이 회당을 예수께서도 안식일마다 정기적으로 찾아가 예배를 드렸고(마4:23;막1:21-28;3:1-6;눅4:15) 바울을 비롯한 많은 사도들도 전도와 예배의 처소로 계속 사용해 왔다(행14:1;17:1,10,17).


    셋째, 사도들의 예배 활동에 있어서 위의 두 가지 모두 유대교의 핍박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예배 예전의 정립이 무척 어려웠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일차적인 관심은 복음의 전파에 있었고 그 일을 위하여 그들은 순교적 자세로 사역에 임하였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때의 예배의 성격이란 구속주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 행위로서의 예배보다는 복음 전파의 과정에서 흔히 병행되는 비예전적 형태를 지속해 나가고 있었다.


    7. 초대 교회시대 이후의 예배


    예수님의 등장으로 신약시대의 예배는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으나 그의 강조점은 유대교의 모든 예전 활동의 종식을 선언하는데 있었으므로 심각한 반대와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는 성전과 회당 예배의 모든 뿌리를 자신의 사건에 근거하도록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예배의 기본적인 사상을 심어 주는 것으로 끝났으며 결코 예배의 정확한 형태나 내용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초대 교회는 예배의 내용이나 형태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집중적인 노력과 정열을 기울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예배를 통하여 초대 교회 성도들의 생명력이 결속되었고 그 중에서도 성만찬을 통하여 늘 새로운 신앙의 활력소를 찾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초대 교회 이후의 예배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핵심 내용을 차지하게 되었고 예수님은 구약에 있는 모든 예언의 성취임을 믿는 신앙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예배의 핵심 순서도 말씀과 성례에 집중되었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새로운 사명을 재확인하는데 역점을 둔 예배의 분위기를 형성해 갔던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온 것은 주후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일이다. 이것은 로마 황제들의 박해로 인하여 개인 가정이나 동굴들을 찾아 이십명 혹은 삼십명씩 분산되어 소집단으로 모이던 크리스챤 무리들을 한 곳에 집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들의 수용을 위하여 대형화된 교회의 건물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한 다수의 성도들이 모여 드리는 예배의 집전을 위하여 성직자의 위치와 권위 역시 점차 확장되어 갔던 것이다.


    이와 같이 급변하는 예배의 조건들은 380년 기독교의 국교화 이후 심화된 일종의 부작용이 예배 현장에 신비적 요소와 미신적 형태를 발생시켜 놓고 만다. 인위적인 정교한 형식은 수많은 기도문을 비롯하여 교독과 교창을 양산하게 되었고 주님의 만찬은 극적인 신비의 현상으로 그릇 이해되는 결과를 가져와 구약의 제사 제도로 회귀하는 느낌마저 갖게 하였다. 더욱이 마리아 숭배를 비롯하여 수많은 성자 및 유물 숭배 사상이 나타나 초대 교회시대에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상태로까지 비약해버리고 말았다. 이토록 비약한 의식 위주의 교회는 드디어 동방 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의 예배 양식에 대한 심각한 대립을 야기시켰으며 결국에는 1054년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분열하는 비극을 낳고 말았다.


    이렇게 분열된 동방 교회는 제정 러시아를 중심으로 존속하였고 서방 교회는 로마 교황의 지배하에 그 영향이 전 세계에 미쳤었다. 그러나 로마 교황의 절대 권위 아래에 있던 서방 교회는 16세기경에 이르러 예배의식에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게 된다. 예를 들면 성만찬에서 화체설(化體說)을 주장하여 미신과 뒤섞인 인상을 주었고 예배의 참석은 등한히 되었으며 성경과 모든 예전은 도무지 알아 듣지 못할 라틴어로 집례되어 회중은 참여자라기보다 성직자에 의하여 연출된 하나의 연극을 구경하는 방관자로 퇴보하는 현상을 가져왔다. 특별히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던 말씀의 증거는 고정된 책자에 의존하여 생명력이 없는 단순한 기록을 읽는데 그치게 되었다. 이처럼 교회의 본래의 모습을 예배 가운데서 상실하고 만 중세 교회는 결국 면죄부의 판매와 같은 계속되는 모순을 범하여 위태한 지경에 빠져 갔다. 이 모순들이 그 시대의 역사를 암흑기로 몰고 가게 되자 드디어 광명의 새 아침을 추구하는 개혁의 일군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8. 종교 개혁과 그 이후의 예배


    종교 개혁은 단순히 예전의 불만과 그 시정을 위하여 발생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자리에 교황이라는 한 인간이 앉아서 믿음보다는 제도 속에서 공적을 더 중요하게 취급하는 비성경적 사실에 대해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하여 종교 개혁자들은 지금까지 예전 속에서 강조되어 온 마리아 숭배와 성자 숭배 그리고 회중이 도무지 알 수 없는 라틴어 집전 등은 시급히 시정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예전에의 새로운 개혁 운동은 크게 세 부류의 경향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로, 루터를 중심한 개혁의 기수들이 취한 경향이다. 이들은 지금껏 전래되어 온 예배의 의식을 개혁할 생각을 좀처럼 하지 않은 지극히 보수적인 사고를 가진 세력이었다. 루터는 카톨릭의 라틴어 미사에서 독일어 사용과 함께 독일어 찬송을 부르는 의식의 변화를 단순히 원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입장은 1530년 찰스 5세에게 바치기 위하여 준비되었던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 제 24장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들이 미사를 폐지한 것으로 오해받고 있습니다. 솔직히 미사는우리 가운데 보다 더 경건과 열정으로 집례되어지고 있습니다. 그 동안 미사의 공적인 집례에 아무런 변동은 없었습니다. 다만 라틴어로 된 응답송에 우리의 독일어 찬송을 첨가하여 불렀을 뿐입니다. 이것은 오직 교인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킬 목적이었을 뿐입니다.”


    예배 의식에 대한 그들의 보수적 성향은 지금도 루터 교회의 예배 현장에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예배 의식은 성공회와 함께 구교의 의식에서 전혀 거리감을 느낄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둘째는, 쯔빙글리, 칼빈, 낙스와 같은 인물들로서 장로교를 중심한 개혁교회의 탄생을 가져온 선구자들의 예배에 대한 관심이다. 이들은 루터 계열의 개혁자들과는 달리 예전에 대한 대폭적인 수정을 가하고 있다. 이들은 구교의 우상 숭배적이며 미신적인 경향에 대하여 “마술사들의 주술”이라고 혹평을 가하면서 성경에 입각한 초대 교회의 예배 형태로 돌아갈 것을 강하게 부르짖었다. 쯔빙글리의 경우 지금껏 말씀과 성례가 함께 있던 것을 설교 중심의 예배는 매주 갖되 성례만을 위한 예배는 연 4회로 국한시킨 바 있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는 설교 중심의 예배에 성례전도 매주 갖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주장이 적용된 교회들은 말씀과 기도와 찬송과 죄의 고백 등을 갖추고 오늘의 개혁 교회의 예배와 같은 형식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셋째로, 급진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던 재침례파를 비롯하여 퀘이커 교도들의 모임같은 자유 교회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지금껏 있었던 예배의 형태를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재침례교의 경우는 침례만을 정당화하고 성직자의 구별을 인정하지 않은 채 회중 중심의 말씀 전파와 그러한 형식의 예배를 강조했다. 그들은 교회 안에는 두 의식, 즉 침례와 주님의 만찬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개혁가들의 예배 의식에 대한 인식에 많은 변화와 차이점이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 활동을 종합해 볼 때 거기에는 다음 두 가지의 공통된 결론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첫째는 루터를 중심한 개혁파들은 예배 의식의 전승을 철저히 지키면서 모국어의 활용 속에 회중의 이해와 참여를 시도해 갔다는 점이다. 둘째로 쯔빙글리와 칼빈은 성상 파괴와 함께 성경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예배 의식 회복을 철저히 시행한 점이다. 이상과 같은 개혁자들의 노력은 루터파의 극단적인 보수주의 계열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원하는 초대 교회의 예배 의식을 되찾는데 대단히 접근했었다. 그들은 기독교 예배란 말씀 중심의 예배여야 한다는 새로운 확신과 함께 14세기와 15세기에 극치를 이룬 로마 교회의 예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게 되었다. 이는 예배의 내용과 형태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실로 거대한 개혁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혁자들의 주장도 영국을 비롯한 유럽 일각에서는 뚜렷한 혁신을 가져 오지 못하고 있었다. 영국의 성공회나 루터교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지역에서는 예배에 있어서 사실상 큰 변화를 이루지 못한 채 지내오다가 마침내 청교도를 중심한 개혁자들의 후예들이 미국으로 이주할 때 본격적인 변화와 함께 결실을 맺게 되었다. 17세기 초반부터 이주를 시작한 이들은 종교 개혁자들에 비해 아무런 속박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교회의 새 역사를 펼쳐 갈 수 있었다. 그들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철저히 시행하면서 교회의 자유로운 형태와 예배의식의 개혁을 인도해 나아갔다. 특별히 1800년 경부터 발생했던 대각성 부흥 운동으로 말미암아 복음주의적 신학의 태동과 함께 탈의식의 예배가 각광을 받게 되었다. 웨슬레의 영향 아래에 있던 감리교는 복음주의적인 열심과 영적인 능력으로 예배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발전을 이루었다. 미국의 루터교회도 전통적인 예배 의식을 강조하면서도 복음주의적 열정을 가지고 설교의 중요성을 잊지 않았다. 미국의 장로교 역시 그들의 예배 형식을 탈의식적이며 복음주의적인 입장에 두고 말씀 위주의 예배로 계속 나아갔다. 교단적인 일정한 예식에 예배의 형태를 묶어 두지 않고 지교회(local church)의 특성과 함께 예배의 모습을 갖추어 갔던 것이다. 한편 성직자의 문제를 비롯하여 교리의 문제, 의식의 문제에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로운 형태 속에 머물면서 오직 말씀의 선포에만 관심을 둔 것은 회중교회와 침례교회들이었다.


    19세기 중엽까지 유럽의 개혁교회들은 예배에 대한 특별한 변동이나 논쟁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의 교회들은 전술한 바와 같이 청교도들의 정신을 그대로 지속시키며 탈의식적이면서도 오직 말씀 중심의 복음주의적인 특성에 정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렇듯 예배에 대한 가벼운 이해와 무관심은 새로운 선교지 아시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지역의 개혁교회에 우려되는 문제를 가져오게 되었다. 의식의 존엄성이 경시된 그 곳 개신교의 예배 현장 속에는 토착화라는 미명하에 비기독교적인 요소가 가미되었고 때로는 토착 종교와의 혼합 현상으로 보이는 위험한 결과도 초래하게 된 것이다.


    19세기 말엽으로 접어 들면서 미국 내에서는 예배 복고운동(liturgical movement)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찰스 베어드가 출간한 「장로교의 예배의식」(1885년)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는데 종교 개혁자들이 주창하고 사용했던 예전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새로운 예식서들이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속간되면서 예배의 기본 질서를 회복하자는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로마 캐톨릭에서는 제 2 바티칸 공의회(1963-1965년)를 통하여 라틴어를 사용하여 미사를 집전하던 관례를 깨고 미사드리는 자들의 모국어로 대체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구교의 이러한 움직임은 개신교에까지 예배의 참 의미 발굴에 촉진제 역할을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예배가 지니고 있는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해 주었다.


    이렇듯 새롭게 일어난 예배에의 관심은 드디어 예배 복고 운동으로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각 교회마다 예배 의식을 돌아보게 되고 예배당 안의 구조를 살피며 성직자의 역할에 대한 관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새로운 각도에서 주시하게 되었다. 예배당 안의 설교단과 제단의 위치가 변화를 가져오면서 성찬상을 설치하고 십자가를 단 위에 세우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껏 잊고 있었던 신앙의 상징들도 만들어 교회 안에 부착시키는 일들이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성만찬의 집례에서도 더욱 진지한 자세를 취하게 되었으며 그 회수도 늘려가게 되었다. 예배 의식에도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예배에의 부름, 죄의 고백, 용서의 선언과 같은 순서를 넣어 훨씬 다양한 의식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목사의 역할도 예배의 집례자로서 뿐만 아니라 복장까지도 개혁 당시처럼 성직자 셔츠를 입기도 하고 강단에서의 가운이나 교회력에 따른 스톨의 착용 등을 활발히 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대 교회의 경향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의 존엄성을 인식시켜 주었으며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행하는 예배의 의미 속에 구체화된 의식의 회복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현대 교회 예배의 변화는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의 개혁 교회 속에 확산되어 가면서 단순히 “듣는” 예배만이 아니라 “드리는” 예배도 겸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깨닫고 이를 힘써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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