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제니친의 노벨상 수상 강연 (발췌)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Aleksandr Isayevich Solzhenitsyn, 1918, 12, 11, 키슬로보드스크 - 2008, 8, 3, 모스크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농민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장교로 복무했으나 전후 사냥 중에 불행한 사고로 죽었고 이후 신실한 러시아 정교 신자였던 어머니와 가난 속에서 자랐다. 로스토프 국립대학교 물리 수학 학부에 입학하여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대학생활 중에 독학으로 역사, 철학, 문학 등을 공부하다가 모스크바 철학 문학 역사 대학교를 통신과정으로 다녔다.

1940년 같은 대학교 여대생이었던 나탈리야 레쉐톱스카야(1918—2003) 결혼하였고,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포병 장교로 전쟁에 자원입대하였다. 군복무 중 스탈린을 ‘빠한(도적의 우두머리, 노련한 범죄자)’이라고 지칭한 편지를 친구에게 보냈다가 1945년 체포되어 8년간의 수감생활과 3년간의 유형 생활을 했다.

1962년 <<신세계(노브이 미르)>>지 11월호에 중편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발표하여 일약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1963년에는 <<크레체토프카역에서 생긴 일>>과 <<마트료나의 집>>이 발표되었다. 이후 장편 <<암병동>>(1966∼1967)를 발표하면서 작가로의 명성을 이어갔다. 1967년 소련작가대회에 ‘검열폐지’를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이 무렵부터 본국에서 발표하지 못한 작품들이 해외에서 잇달아 간행되었기에 1969년 작가동맹에서 제명당하였다.

1974년 2월 국가 반역죄로 체포되어 시민권이 박탈당하고 강제추방 되어 미국 버몬트주(州)에서 살다가 소련연방 붕괴 후인 1994년, 20년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러시아 시민권을 회복하였다. 귀국할 때 그는 미국에서 비행기로 블라디보스톡으로 와서 거기서 기차를 타고 러시아 전역을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한 후 국회연설을 하였다. 1993년부터 1996년에는 <<신세계(노브이 미르)>지에 ‘2부로 된 단편들’인 <변방들에서>, <에고>, <전환기에서>, <나스텐카>, <살구쨈> 등을 발표하였다.

2007년 6월 푸틴 대통령은 그에게 예술가들의 최고 명예상인 국가공로상을 그의 집으로 방문하여 직접 수여하였고 2008년 8월 3일 심장마비로 타계, 모스크바 돈스코이 수도원에 묻혀있다.

솔제니친은 1970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암병동>>등의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스웨덴 한림원은 그가 "러시아문학의 전통을 도덕적인 힘으로 추구한 점"을 수상 이유로 밝혔다. 러시아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은 1933년 이반 부닌, 1958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1965년 미하일 숄로호프, 1970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87년 조지프 브로드스키이다. 부닌과 브로드스키는 망명작가이고, 파스테르나크는 당국의 압력으로 수상을 거부하였으며,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수상을 수락하였지만 구소련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을 염려해서 수상식에는 불참하였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비 문서에 따르면 이 연설은 “노벨상 수상 수락의 표시로 1972년 4월에 개인 아파트에서 발표할 예정이었고 불법적 채널로 서방에 전달되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예술가들에 대해 “그들은 그 누구보다 민감하다. 그래서 인간이 이 세상에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도, 얼마나 흉포할 수 있는 지도 증명해준다”고 말했다. 아래는 본문의 내용을 발췌 번역한 것인데, 이 수상 연설은 1974년에 러시아에서 추방된 이후 스톡홀롬에서 행해졌다.

---(<에세이플러스> 10월호 특집)

 

    의아해하면서 바다에서 이상한 물체를 건져 올린 야만인은 어떨까요? 모래 퇴적물인가? 또는 하늘에서 떨어진 알 수 없는 물체인가? 구불구불하고 복잡하며 어떤 부분은 검고 어떤 부분은 선명한 빛줄기를 반사합니다. 이리 저리 돌려보고, 또 돌려봅니다. 어떻게 할지 찾아봅니다. 최고의 것에 대해서는 짐작하지도 못한 채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하찮은 일만을 찾게 됩니다. 

 

   예술을 손에 쥐고 우리도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스스로를 그것의 주인이라고 여기며 과감하게 그것을 조정하고 복구하고 개혁하고 선언하고 돈에 팔고 힘 있는 자들의 비위를 맞추고 유행가요나 나이트클럽에까지 유흥을 위해 또는 대리품 마개나 의지할 지팡이로, 정치적인 일시적 필요를 위해 또는 제한된 사회적 요구를 위해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은 우리의 의도로 더럽혀지지 않으며 어떻게 사용되더라도 매번 비밀스런 내부 세계의 일부를 우리에게 나눠주면서 그 근원을 상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세계 전체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누가 감히 예술을 정의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것의 방향 전체를 열거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이미 이해했고 과거 세기들에 우리에게 명명했는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잠시 동안만 거기에 머물러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잠시 귀 기울이다가 무시해버렸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가장 좋은 것도 새로운 것으로 서둘러 바꿔버리면서 거기에서 물러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에게 옛것을 말하면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존재했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중략)

   오랫동안 여러 나라에서 격렬하고 열렬하고 고상하게 예술은 어떠해야만 하고 예술가는 자신을 위해서 살아야만 하는가 아니면 사회에 대한 의무를 영원히 기억하고 그것에 복무해야만 하느냐에 대해 편견이 없지는 않았지만 논쟁해왔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논쟁의 여지도 없고, 또 다시 여러 논거들을 제기하지도 않겠습니다. 이 주제에 대한 가장 눈부신 연설들 중의 하나는 알베르트 카뮤의 노벨상 수상 강연이었고 그것의 결론에 나도 기꺼이 찬동합니다.

 

   문학도 수십 년 동안 이런 경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지나치게 자신을 잃어버리지도 않고 지나치게 태평하게 빈들거리지도 않았습니다. 나도 힘이 닿는 데로 이런 전통을 유지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다. 러시아 문학에서는 오래전부터 작가는 자신의 민족에게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우리에게 친근했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과연 문학이 공공연한 폭력의 무자비한 습격에 대항할 수 있는가라고 우리에게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폭력은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혼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폭력은 거짓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가장 밀접하고 가장 자연적이고 깊숙한 연관이 있습니다. 폭력은 거짓 이외에는 숨을 곳이 없고 거짓은 폭력으로밖에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한 번 폭력을 수단으로 선언한 모든 사람은 거짓을 자신의 원칙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폭력이 탄생되어 공공연하게 자행 되고 심지어 스스로를 자랑스워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폭력이 강해지고 확고해지자마자 자신 주위 공기가 희박해진 것을 감지하게 되고 거짓의 연막 속에서 그것의 감언이설로 은폐하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폭력은 영원히 그리고 반드시 직접적으로 목을 조르지는 않으며, 종속된 사람들에게 거짓 맹서만을, 거짓에의 동참만을 더 자주 요구합니다. 그래서 평범하고 용감한 사람의 간단한 행보는 거짓에 참여하지 않고 거짓된 행위들을 지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도래하고 세상에 만연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나를 통해서는 아닙니다. 작가들과 예술가들에게는 더 많은 것이 가능합니다. 거짓을 이기는 것입니다! 거짓과의 투쟁에서 예술은 항상 승리하였고 항상 승리할 것입니다 - 이것은 모두에게 훤히 보여서 반박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많은 것에 대항해 거짓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에 대항해서만은 아닙니다. 거짓이 흩어지자마자 폭력의 알몸도 혐오스럽게 드러나게 되고 힘을 잃은 폭력은 쓰러지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달구어진 시기에 세상을 도울 수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비무장이라고 거부하거나 태평한 삶에 몸을 맡기지 말고 싸움에 나가야합니다!

러시아어에는 진실에 대한 속담들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 속담들은 적지 않은 힘겨운 민중의 체험을 확고하게 표현해주고 있으며 때로 다음과 같은 말은 감동적입니다. 진실의 말 한 마디가 전세계를 끌어당긴다. 질량과 에너지 보존 법칙의 그런 가상적이고 환상적인 파괴에 내 개인의 활동도, 전세계 작가들에 대한 나의 호소도 기초를 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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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저자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책을 펴는 순간 나는 수용소의 일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췌 854라는 번호를 가슴에 다는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의 시선을 중심으로 보게 된 수용소의 모습은 내가 들어왔던 잔인한, 살육의 현장이 아닌,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 벌거벗은 몸만이 남은, 인간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가지게 하는 강제 노동 수용소의 모습이었다.

 

 슈호프는 아침 일찍 뼈를 에는 가느다란 동풍을 맞으며 점호를 하고, 여분의 빵을 매트 속에 숨기고, 죽을 깨끗이 핥아 먹는다. 대신 소포를 받으러 가기도 하고, 죽 한 그릇을 더 먹기 위해 비열하게 보이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 모습은 내가 읽기에는 인간답지 못한 삶이었다. 그러나 내가 느낀 것은 과연 내가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까였다. 그들은 인간이다. 그리고 삶을 살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이상적인 삶은 아닐지라도 ‘생존’ 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살아간다. 그들에게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다. 눈을 뜨면 눈을 감을 때까지 정해진 일과에 맞추어 일해야 한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도 무디어진 그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신이 참으로 부끄러워 졌다.

 

 수용소의 하루는 말로 이루어 낼 수 없다. 슈호프는 나에게 담담하게 그 하루를 보여주었다. 수용소는 슈호프를 더욱 작게 만들었다. 이들을 약하게,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수용소라는 곳은 이들에게 있어서 수용소 그 이상의 공간이었다. 노동 착취의 공간이 아닌 사람을 추악하게 혹은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공간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는 ‘생존’만을 바라보며 말라간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수, 지배층의 권력에 휘둘리는 약자로 남게 되며,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첨하며 비굴하게 살아간다.

 

 슈호프의 가슴에 달려있는 번호 췌 854. 그 번호만을 보고 짐작하건대, 수용소에서 그가 받는 대우는 췌 854라는 일을 할 수 있는 존재, 그 이상은 되지 못할 것이다. 비단 수용소 안의 동료들에게는 아닐지 몰라도 간수들에게는 그는 한낱 숫자에 불과했다. 하나의 번호로 취급받는 것에 모멸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그는 수용소의 하루를 체화한다. 자신을 수용소에 적응시키나, 타협하지 않았다. 작가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그가 타협하고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그만의 방법으로 부단히 노력하며 수용소의 하루를 살아갔다. 수용소 안의 이들을 살아갈 수 있게 한 것은 제공되는 밥 같지 않은 밥과 일할 가치가 있기에 그곳에 남아있는, 숨을 쉴 수 있는 능력 그 자체 이다.

 

 내가 책을 읽고, 슈호프의 하루를 체감하고, 그를 내 속으로 맞이하여, 그리하여 슈호프가 내 마음에 있다 할지라도 그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를 내 마음에 둔다는 것은 욕심이며 감히 그를 이해하고, 감상을 끼적거린다는 것도 내 욕심이었다.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숭고한 그 정신을 그저 바라볼 따름이다. 슈호프를 있는 그대로 느끼기로 했다. 그는 나와 같은 인간이었다. 결국 다른 곳에 있었을 뿐이다. 그를 가로 막는 것은 강제, 노동, 억압, 부패, 모순.... 수도 없이 많다. 그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몸으로 적응하여 생존하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그것을 이겨낸 것도 슈호프였다. 이 모습을 보면서 지금 이 상황에도 불평만 늘어놓는 내 자신이 너무나 가벼운 존재로 여겨졌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가슴에 주홍글씨로 새겨진 번호나, 간수, 영창은 없지만 심적으로나마 우리에게는 수용소가 있다. 슈호프의 수용소에 비하자면 우리 가슴 속의 수용소는 복에 겨운 수용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놓고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수용소에 갇힌 자신이 존재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 수용소는 한없이 자신을 억누르기만 하는 무의식속의 의식이다. 우리는 무엇을 행할 때 생각을 한다. 이것이 옳은 일인가, 해야 하는가,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등의 생각 말이다. 하고 싶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따지거나 망설이다가 처음의 추진력과 결단력을 잃은 채, 그 무엇을 마음 깊은 속에 가두어 버린다. 그 마음은 수용소가 되어버리고, 내가 먹은 마음은, 즉 내 자신은 그 무엇을 하고픈 욕망을 한없이 억누르는 것이다. 이 가두어진 무엇은 갇혀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수용소라는 것은 어디든지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수용소는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지금 나의 수용소는 무엇인가? 무한경쟁에다 자신이 요구하는 것만을 뱉어내게 하는 사회도 수용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가장 큰 수용소는 자신의 마음이다. 언젠가 친구에게 들은 말이 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생각을 많이 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무언가를 할 때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 보다는 처음 생각했던 그 무언가를 덜 하게 된다고. 덜 충동적이고, 시행착오를 덜 만들어 내려 한다고. 즉 이 말은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다. 수용소에서 죄수를 억누르는 것은 육체적인 노동에서 비롯되는 고통이 아니다. 수용소에서 진정으로 수용하는 것은 육체적 고통, 그리고 간수들에게로 받는 모멸감. 그것으로부터 오는 자기 자신 스스로의 억압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신 속에 있는 자신을 억누르는 것을 없애는 방법뿐이 없다. 슈호프의 육체는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는 숭고한 정신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것을 알기에 진정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이 먼저 자신의 수용소를 없애야 한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해야 한다. 억누르지 말아야한다. ‘생존’만이 인간의 삶의 목표는 아니다. 자유로운 한 인격의 주체로써 정체성을 가지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수용소의 죄수들의 삶을 삶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그들은 하나의 인간으로써 살아간다. 그들은 ‘생존’을 목표로 살지만, 살아있기에 살아있는 그들에게 목표라고 하는 것은 좀 이상하기도 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사치이고 그들에게 모멸일수 있지만 감히 말하자면, 내가 원하는 것은 내 마음의 수용소를 없애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나를 망설이게 하는 그 무언가를 찾아서 없애고 나를 바꾸어 나가고 싶다.

 

 

마뜨료나의 집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벌써 그러저럭 반년은 계속되고 있으리라 ― 모스크바에서 18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이르면 어느 열차건 약속이나 한 듯이 속력을 늦추고, 마치 손더듬으로 걷듯이 천천히 움직인다. 승객은 차창(車窓)에다 얼굴을 들이대기도 하고 승강구로 나가 보기도 한다. 노선의 수리라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운행표(運行表)에서 빗나가기라도 한 걸까.

  그러나 그게 아니다. 건널목을 하나 통과하자, 열차는 다시 속력을 되찾고 승객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제자리로 돌아온다.

  왜 그렇게 되는지, 그 까닭을 알고 또한 잊지 않는 것은 기관수뿐이다. 그리고 나도.

1

  1953년 여름, 먼지투성이의 무더운 사막으로부터 나는 아무런 예정도 없이 그저 무턱대고 러시아로 되돌아왔다. 러시아가 넓다고는 하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 나를 불러들일 사람은 아무데도 없었다. 나는 중부 지방으로 가고 싶었다. 그다지 무덥지 않은 곳, 살랑거리는 숲속의 나뭇잎 소리만 들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상관 없었다. 러시아의 내장(內臟)이라고 할 만한 장소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아직도 살아있다면, 그런 곳으로 들어가 파묻히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1년 전이라면, 우랄산맥 이쪽에서 내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직종이래야 기껏해서 목도꾼 정도가 고작이었으리라. 웬만한 공장에서는 전공(電工)으로조차도 나를 채용해 주지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의 희망은 교사(敎師)가 되는 것이었다.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여러가지로 충고해주었다. 차표 값만 손해 볼 뿐이야, 어디로 가든 안되게 마련이라니까.

 

  그렇지만 무언가가 이미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주(州) 교육부의 층계를 올라가 인사과가 어디냐고 묻자, 놀랍게도 인사과는 검은 가죽을 입힌 출입문 저쪽이 아니라, 흡사 약국처럼 된 유리 칸막이 뒤에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주춤주춤 창구로 다가가 인사를 한 다음 물었다.

 

 “저, 어딘가 철도에서 될수록 떨어진 곳에 수학 교사의 자리는 없을까요 그런 곳에 영주하고 싶습니다만.”

 

  나의 신분증명서는 한 자, 한 자 면밀히 조사되었다. 인사과의 직원들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쉴새없이 드나들며 문의하는 전화를 걸었다. 누구나가 다 도시로, 그것도 될 수 있는 대로 큰 도시로 취직하기를 바라는 세상이라 내 요구 조건 같은 것은 무척 신기했을는지도 모른다. 이윽고 별안간에 임지(任地)가 부여되었다. 브아쏘꼬예 뽀레(높은 들판이라는 뜻―역주)라는 곳이다. 그 지명을 듣기만 해도 나의 가슴은 용솟음쳤다.

 

  지명에는 거짓이 없었다. 양쪽이 골짜기로 파이고 안쪽이 언덕으로 둘러싸인 조그만 고원(高原), 브아쏘꼬예 뽀레에는 울창한 숲이 있고, 못이 있고, 둑이 있어 이런 곳이라면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그다지 괴롭지는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숲속의 나무 그루터기 위에 앉아서 매일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만약 그랬다면 밤마다 이곳을 찾아와서 그 어디에서도 라디오의 음향이 들려오지 않는 전세계의 침묵 속, 지붕 위의 나뭇가지의 술렁임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련만.

 

  결국 슬프게도, 이곳에는 빵을 굽는 가게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음식을 마련할 만한 상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마을 사람들은 가까운 거리에서 먹을 것을 자루 속에 넣어가지고 낑낑거리며 날라오는 것이었다.

 

  나는 인사과로 되돌아와서 창구에 대고 애원했다. 인사과의 직원들은 처음엔 내게 말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간 지나자 또다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드나들고 전화를 걸더니 사각사각 펜 소리를 내면서 서류에 또르포쁘로둑트라고 적어 주었다.

 또르포쁘로둑트(이탄생산(泥炭生)이라는 합성명사)라니? 아아, 투르게네프도 이런 러시아어가 만들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리라.

 

  또르포쁘로둑트 역은 낡은 회색의 목조 가건물(假建物)이었지만 다음과 같은 엄한 게시(揭示)가 눈에 띄었다. “반드시 정거장 옆에서 승차할 것!” 못으로 긁은 낙서가 그 문구를 계속하고 있었다. “차표 없이!” 역시 짓궂은 유머의 소유자의 장난이리라. 매표구 옆에는 ‘차표 매진’이란 문구가 나이프로 영원히 새겨져 있었다. 이와 같은 단서(但書)의 정확한 뜻을 나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또르포쁘로둑트로 찾아오기도 쉽지만, 여기서 떠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는 혁명 전부터 그리고 혁명 후에도 인적미답(人跡未踏)의 원시림이 울창하게 자라 있었다. 그후 이탄(泥炭) 채굴장과 가까운 집단농장(集團農場)의 손으로 벌목(伐木)이 시작되었다. 집단농장 의장(議長)인 샤쉬꼬프는 상당한 면적을 모조리 벌목한 다음 오데사 주(州)에 팔아서 큰 벌이를 했다고 한다.

 

  마을의 집들은 이탄이 매장되어 있는 저지(低地) 사이에 산재해 있었다. 30년대에 세워진 획일적인 바라크가 있는가 하면, 전면(前面)에 조각 무늬를 곁들이고 유리를 낀 베란다를 갖춘 50년대의 주택도 있다. 그러나 그런 주택도 안에 들어가 보면, 천장까지 미치는 칸막이 벽이라는 것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나도 사방이 진짜 벽으로 둘러싸인 방을 빌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마을의 집 위에 우뚝 솟은 공장 굴뚝이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마을 여기저기에 좁은 궤도(軌道)의 레일이 깔리고, 역시 검은 연기를 내뿜는 소형 기관차가 귀청을 뚫을 듯한 기적 소리를 내면서, 갈색 이탄이며, 이탄판(泥炭板)이며, 연탄을 실은 화차를 끌고 있었다. 나의 상상엔 틀림이 없으리라고 생각되지만, 밤이 되면 클럽 입구에서 시끄러운 레코드 음악이 흘러나오고, 한길에선 취한(醉漢)들의 고성방가가 울려퍼지고, 때로는 칼싸움도 벌어지게 마련이리라.

 

  조용한 러시아의 한구석을 꿈꾼 끝에 나는 이런 곳으로 와버리고 만 것이다. 하긴 이곳으로 오기 전만 해도, 나는 사막이 내다뵈는 점토(粘土)로 지은 오막살이에 살고 있지 않았던가. 거기서는 매일 밤마다 무척 상쾌한 바람이 불고, 별들을 수놓은 천개(天蓋)가 끝없이 머리 위에 뻗어 있지 않았던가.

 

  정거장 벤치의 잠자리가 좋지 않았으므로 나는 날이 샐 무렵에 또다시 마을로 되돌아갔다. 이번에는 아주 조그만 노천 시장이 눈에 띄었다. 이른 아침이라서 한 사람의 부인이 우유를 팔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우유 한 병을 사가지고 선 채로 그 자리에서 마시기 시작했다.

 

  부인의 말은 나를 감동시켰다. 부인은 그저 지껄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억양을 붙여 노래하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아시아에 있을 때부터 그토록 그리워하던 바로 그 말이었다.

 

  “마셔요, 실컷 마셔요. 아니, 당신은 딴 곳에서 온 분이 아니세요?”

 

  “아주머님 댁은 어디시죠?” 하고 나는 밝은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지만 이 근처에는 이탄 채굴장뿐만 아니라, 철로 저쪽에는 조그만 산이 있고 그 산 너머에 따리노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여자는 ‘집시’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지주 부인이 살던 때부터, 이 근처가 아직도 무서운 밀림이었을 때부터 그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리노보 마을 저쪽에는 챠스리쯔이 마을, 오빈쯔이 마을, 스뿌드니 마을, 세베르뜨니 마을, 세스찌미로보 마을 등등으로 농촌이 잇달고, 철도에서 벗어나 호수 지대로 다가감에 따라 점점 숲이 깊어진다는 것이다.

 

  이들 마을의 이름은 산들바람처럼 나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그들은 옛날의 좋은 러시아를 약속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새로운 벗에게, 시장이 끝나면 따리노보 마을로 나를 데리고 가서 하숙해줄 만한 집을 물색해줄 수는 없느냐고 부탁했던 것이다.

 

  나는 비교적 조건이 좋은 하숙인인 것 같았다. 학교에서는 하숙비 외에도 겨울철에는 화차 한 대분의 이탄을 약속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의 얼굴에 아까와는 달리 근심어린 빛이 떠올랐다. 이 여자의 집에는 방이 없었으므로 (남편이 있는 데다, 늙을 대로 늙은 모친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선 이 여인의 친척집으로 끌리어 갔다가 그 다음에 다시 다른 친척한테로 안내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독립된 방은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집이건 다 협소하고 시끄러웠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물을 막아서 바닥이 드러나려고 하는 개울에 조그만 다리를 걸어놓은 곳까지 오게 되었다. 이곳 경치는 마을 중에서도 가장 나의 마음에 들었다. 두세 그루의 버드나무가 있는가 하면 기울어져 가는 농가가 있고, 못에서는 오리가 헤엄을 치고, 몸을 털고 물을 가르면서 거위가 못가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럼, 마뜨료나의 집에라도 가 볼까요?”

 나의 안내인도 이젠 싫증이 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마뜨료나의 집은 깨끗하지가 못해요. 앓고 있기 때문에 지저분하게 널려 있어요.”

 

  마뜨료나의 집은 바로 그 옆에 있었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쪽을 향해 네 개의 창문이 나 있고, 판자 지붕은 양쪽으로 경사지고, 장식이 달린 다락방에 창문이 있었다. 그러나 판자 지붕은 썩고, 바깥 테두리를 두른 재목은 잿빛으로 낡고, 한때 튼튼했으리라고 믿어지는 문도 완전히 기울어져 있다.

 

  쪽문에 빗장이 걸려 있었으나 나의 안내인은 노크를 하려고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아래로 손을 밀어넣어 빗장을 벗겼다. 그러고 보면 이것은 남의 가축의 침입을 막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바깥 뜰에는 지붕이 없었지만 그 대신 집안에는 여러 곳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곧 조그만 층계가 있고 그것을 오르면 넓은 판자 마루가 나타난다. 천장은 꽤 높은 편이고, 왼쪽에는 또하나의 층계가 있어서 이층방으로 통하고 있었다. 이 방은 뻬치까가 없는 별실이고, 그 바로 밑에 지하실로 통하는 층계가 있다. 오른쪽은 다락방과 땅속의 광을 겸비한 안채로 되어 있다.

 

  꽤 오래 전에 대가족을 연상해서 지은 견고한 집이었다. 지금 이 집에는 육십에 가까운 여인이 혼자 외로이 살고 있었다.

  내가 들어갔을 때 그 여인은 입구 옆의 순러시아식 뻬치까 위에 누워있었다. 몸에 걸치고 있는 누더기 천은 완전히 검은색으로 변해 있어서 형태조차 구별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것은 일하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귀중한 생활필수품인 것이다.

 

  넓은 집안, 특히 창문 곁에는 걸상과 벤치들이 여러개 놓여 있고, 무화과나무를 심은 항아리며 나무통 들이 놓여 있었다. 말은 없어도 생명력이 넘치는 이들 식물은 이 집 여주인의 고독을 채워주고 있는 것 같았다. 북향 창문의 궁색한 빛을 긁어모아서 무화과나무들은 싱싱하게 성장하고 있다. 식물에 빼앗긴 나머지 빛 속에서, 더구나 굴뚝의 그늘에 있기 때문인지 여주인의 둥근 얼굴은 몹시 노랗고 허약해 보였다. 눈동자의 빛이 흐린 것으로 보아 여주인은 어지간히 몸이 쇠약해 있는 것 같았다.

 

  나하고 말할 때에도 여주인은 뻬치까에 엎드린 채 누워있었다. 베개가 없으므로 머리는 도어에다 받치고 있다. 나는 아래에 그대로 서 있었다. 하숙 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자 여주인은 조금도 기쁜 내색을 하지 않을뿐더러 자기의 병에 대해서만 자꾸 하소연했다. 지금 마침 병이 좀 나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매달 병이 심해지기만 하면, “…이틀이건 사흘이건 누워서 일어나질 못하니, 당신에게 식사를 마련해드릴 수도 없단 말이에요. 하지만 집은 나쁘지 않아요. 당신이 지내는 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그러고 나서 여주인은 좀더 살기 좋은 다른 농가를 일일이 손꼽아 보이면서 그쪽으로 가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나 자신의 운명을 느끼고 있었다. 이 어두컴컴한 시골 농가―거의 모습을 비칠 수도 없을 정도로 그을은 거울이 있고, 그래도 장식을 위해선지 서적 시장과 곡물 수확의 포스터 두 장이 값싼 화려한 색채로 벽을 흥겹게 하고 있는 이 농가에서 나는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마뜨료나 바실리예브나는 다시 한번 마을을 돌아봐 달라고 여전히 끈덕지게 고집을 부렸다. 그리고 내가 또다시 모습을 나타냈을 때에도 그녀는 오랫동안 뭐라고 투덜대는 것이었다.

 

  “제대로 식사 준비도 해드리지 못할 테니, 당신에게 미안해서.”

 

  그러면서도 이번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맞아주었다. 내가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기색이 그녀의 얼굴에 확연히 나타나 있었다.

  하숙비는 학교에서 배급 나올 이탄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마뜨료나 바실리예브나에게는 벌써 몇년 전부터 수입이라고는 한푼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연금(年金)도 받고 있지 않았다. 친척한테서도 원조라고는 거의 없었다.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것도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몸뚱이를 위해서 ― 더러운 노동수첩의 노동일 난(欄)을 몸뚱이로 메우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마뜨료나의 집에 하숙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칸막이로 방을 나누지는 않았다. 마뜨료나의 침상은 문 옆 뻬치까 곁에 있고, 나는 조립식 휴대용 침대를 창문가에 놓았다. 그 다음 마뜨료나가 좋아하는 무화과나무에서 다소나마 빛을 빼앗게는 되었지만 또다른 창가에 책상을 놓았다. 이 마을에도 전기는 들어와 있었다. 샤뚜라 시(市)에서 20년대에 끌어들였다고 한다. 그 당시의 신문에는 ‘일리이치(레닌을 가리킴)의 램프’라고 씌어지고, 농군들은 접시 같은 눈을 하고 “램프의 황제인걸!” 하며 떠들어댔다는 것이었다.

 

  좀더 편한 생활을 하고 있는 마을의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마뜨료나의 농가는 결코 살기 좋은 집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뜨료나와 나는 그 해의 가을에서 겨울에 걸쳐 무척 아늑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이 농가는 아직까지 비가 새지도 않거니와 싸늘한 바람이 불어도 뻬치까의 온기는 새벽녘까지 유지되었다. 틈바귀투성이가 된 바깥쪽으로부터 바람이 새어들어올 때면 특히 뻬치까의 고마움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마뜨료나와 나 이외에도 이 집에는 고양이와 쥐와 바퀴가 살고 있었다.

  고양이는 꽤 나이도 먹었지만, 그보다도 이 고양이의 특징은 절름발이라는 것이었다. 마뜨료나는 그저 불쌍하다는 생각에서 이 고양이를 주워다가 기르게 된 것 같았다. 걸을 때는 네 발로 걷지만 무척 심하게 다리를 전다. 그것은 이 고양이가 불편한 한쪽 발을 아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뻬치까 위에서 마루로 뛰어내릴 때, 마루에 닿는 소리가 다른 고양이처럼 사뿐히 울리지가 않는다. 세 개의 발이 동시에 마루에 닿는 순간 콰당 하는 큰 소리가 나서, 처음 얼마 동안 나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깜짝 놀라곤 했다. 결국 네번째의 발을 소중히 하기 위해서 이 고양이는 다른 세 개의 발을 혹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 집에 쥐가 있다는 것은 절름발이 고양이에게 쥐를 잡을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고양이도 번개처럼 달려가 쥐를 방 한구석으로 몰아넣은 다음 노획물을 물고 의기양양하게 과시하려 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쥐가 없어지지 않는 것은 누군가가 그 옛날, 아마도 유복했던 시대에, 줄무늬가 있는 녹색 벽지를 한 장이 아니라 무려 다섯 장씩이나 이 집 담벽에 발랐다는 것이 그 원인이었다. 다섯 장의 벽지는 종이끼리는 밀착되어 있지만, 여기저기 벽으로부터 뜯겨져, 결국에는 농가 안쪽에 또 한 장의 벽이 생긴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긴 공동(空洞)을 쥐들은 자유자재로 빠져 다닌다. 바스락바스락 철면피한 소음을 내면서 공동을 따라 천장으로까지 기어 올라가곤 한다. 고양이는 분하다는 듯이 그 바스락거리는 행방을 노려보고 있지만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가끔 가다 고양이는 바퀴를 먹을 때도 있었지만, 그런 악식(惡食)은 고양이의 몸에도 변조(變調)를 가져오는 것 같았다. 바퀴들이 범접하지 않는 유일한 곳은, 뻬치까와 부엌을 안채로부터 격리시키고 있는 칸막이 벽의 선(線)이었다. 그 선을 넘어서 안채로 들어오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 대신 밤마다 부엌에 들끓고 있는 모습은 가공할 만했다. 밤늦게 내가 물을 마시려고 부엌의 전등을 켜면, 마루, 벤치, 벽 할 것 없이 온통 갈색으로 와글거리고 있다. 나는 화학 실험실에서 붕사(硼砂)를 얻어다가 그것을 빵가루에 섞어 먹이를 만든 다음 바퀴 퇴치에 달라붙었다. 바퀴의 수효는 얼마간 줄었지만, 마뜨료나는 고양이가 독이 든 먹이를 잘못 먹으면 큰일이라고 말한다. 결국 독살 계획은 중지되고 바퀴의 수는 다시 증가되었던 것이다.

 

  매일 밤, 마뜨료나가 이미 침상에 들고, 내가 책상에 앉아있을 때면, 이따금씩 바스락 소리를 내며 쥐들이 벽지 뒤를 달리고, 그 소리를 엄호하기라도 하는 듯이, 하나로 융합된 바퀴들의 소음이 마치 머나먼 대해원(大海原)의 파도소리처럼 끊임없이 칸막이 벽 저쪽에서 들려온다. 그러나 나는 그 소리에 익숙해졌다. 그 소리에는 아무런 악의(惡意)도 없고 아무런 거짓도 없는 거다. 그 소음은 그들 바퀴의 생활 그 자체가 아니냔 말이다.

 

  그리고 또 포스터에 그려진 철면피한 미녀 ― 하루 종일 내게 벨린스키(19세기 러시아의 대표적인 문예비평가), 빤표로프(소련의 작가), 그 밖의 여러가지의 잡다한 책을 들이댄 채 침묵을 지키고 있는 미녀에게도 나는 익숙해졌다. 마뜨료나의 집에 있는 모든 것에 나는 익숙해진 것이다.

 

  마뜨료나는 아침 네시나 다섯시경에 일어난다. 마뜨료나의 기둥시계는 27년 전에 농촌소비조합에서 산 것이다. 이 시계는 언제나 빨리 가기가 일쑤지만, 마뜨료나는 한번도 투정을 한 적이 없었다. 늦게만 가지 않는다면 그쪽이 오히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좋다고 말한다. 자리에서 빠져나오면, 마뜨료나는 칸막이 벽 위에 있는 부엌 전등을 켜고 소리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살며시 빼치까를 지핀다. 그러고 나서 산양(山羊)의 젖을 짜러 가고(마뜨료나 집의 가축이라고는 뿔이 굽은 더러운 산양 한 마리뿐이었다). 물을 길어온 다음, 주물(鑄物) 냄비를 세 개 올려놓고 취사를 시작했다. 냄비 하나는 내 것이고 또 하나는 산양의 먹이이다. 산양에게는 땅 밑 광에서 골라온 가장 씨알이 작은 감자를, 자기한테는 조금 더 큰 것을, 나한테는 달걀 정도로 큰 것을 삶는다. 마뜨료나의 밭은 모래땅인 데다가 전쟁 전부터 비료를 주지 않고 매년 계속해서 감자만 심어 왔기 때문에 그보다 더 큰 감자는 얻으려야 얻을 수가 없다.

 

  아침을 준비하는 이런 소리를 나는 거의 듣지를 못한다. 곤히 잠들고 있던 나는 늦은 겨울 햇빛을 받고서야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켠 다음, 모포와 털외투 밑에서 머리를 내민다. 모포와 털외투, 거기다가 수용소 시절에 입던 솜이 든 동복을 발에 얹고, 몸뚱이 밑에는 짚을 가득 넣은 자루―이것만 있으면 허술한 유리창을 통해서 사나운 북쪽 한파가 침입해 들어오는 밤일지라도 침상의 온기를 잃을 염려는 없다. 칸막이 벽 뒤에서 조심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언제나 원기 있게 소리친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마뜨료나 바실리예브나!”

 

  그러면 언제나 똑같이 대답은, 정다운 느낌을 주는 대답이 칸막이 벽 저쪽에서 울려온다. 말의 시작은 흡사 옛날이야기의 노래처럼 온정이 깃든 나직한 중얼거림이다.

 

 “저런, 저런, 저런… 벌써 깼구먼 그래?”

 

  그러고는 이윽고

  “자, 아침이 준비됐어요.”

 

  마뜨료나는 아침식사에 무엇이 나온다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간단히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껍질을 벗기지 않은 감자죽이거나 까르똔(마분지, 까르또펠리 ‘감자’가 변해서 까르똔이 됨) 수프이거나(이 고장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니면 보릿가루가 든 수프이기 마련이다(다른 곡식 가루는 또르포쁘로둑트 거리에서 올해엔 살 수가 없었다. 보릿가루도 돼지 사료로서는 가장 값이 싼 관계로 모두들 자루로 사 가기 때문에 좀체로 손에 넣기가 힘들다). 이런 요리에는 언제나 적당한 염분(鹽分)이 들어있지 않았다. 그뿐더러 가끔 타기까지 했다. 먹은 다음에는 위턱이며 잇몸이 엉망이 되고 반드시 가슴앓이를 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뜨료나의 죄는 아니었다. 또르포쁘로둑트 거리에서는 버터와 마아가린이 부족해서 자유로이 살 수 있는 것은 합성유뿐이었다. 게다가 순러시아식 뻬치까는 내가 보는 한 요리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냄비를 괴는 장소가 조리를 하는 사람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곳에 있고, 냄비를 가열(加熱)시키는 데 있어서도 방향에 따라 고르지가 않다. 그러나 그 대신 아침에 한번 지펴놓기만 하면 가축용 먹이나 물을, 그리고 사람이 먹을 음식이나 음료수를 하루 종일 따스하게 보존해 둘 수가 있고 잘 때에도 따스하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이 뻬치까라는 것은 석기시대(石器時代)로부터 우리들의 조상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계승되어 내려오며 사용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앞으로 놓여진 것은 무엇이든 깨끗이 처리하고 뭔가 이물질(異物質)이 들어있으면 끈기있게 거두어 냈다 ― 머리칼이며, 이탄 부스러기며, 바퀴의 다리등. 마뜨료나를 책망할 용기는 내게 없다. 애초부터 마뜨료나 자신이 말하지 않았느냐 말이다 ― “제대로 식사 준비도 해드리지 못할 테니 당신에게 미안해서”라고.

 

  “잘 먹었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말한다.

 

  “잘 드셨다고요? 이런 식사를?” 하고 마뜨료나의 얼굴은 미소로 빛난다. 그러고는 푸르스름한 눈을 천진스럽게 뜨며 묻는다.

 

  “그럼 밤참은 무엇으로 하죠?”

  밤참이란 저녁식사를 말하는 거다. 나는 전쟁터에 있었을 때처럼 하루에 두 끼밖에 먹지를 않는다. 밤참에 무엇을 주문할 수 있겠는가. 역시 감자죽이 아니면 마분지 수프 중의 한 가지에 틀림없다.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 경험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생존의 의의를 음식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배워 왔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는 마뜨료나의 둥근 얼굴에 감도는 미소 쪽이 내게는 더욱 귀중했다. 그 미소를 사진에 담으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언제나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싸늘한 렌즈를 돌리기만 하면 마뜨료나의 표정은 부자연스러워지든가, 아니면 이상할 정도로 근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 번 마뜨료나가 창밖의 무엇인가를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는 있었다.

 

  그 해 가을 마뜨료나에게는 고통이 그치지를 않았다. 이웃 사람들은 연금(年金)을 받도록 해보라고 마뜨료나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아무튼 의지할 만한 사람이라고는 가까이에 아무도 없었고, 병세가 심해진 후로는 집단농장에서도 내쫓긴 상태에 있었다. 마뜨료나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는 점들이 수없이 많았다. 우선 병을 앓고 있는 몸인데도 폐질자(癈疾者)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25년 남짓이나 집단농장에서 일했는데도 그것이 공장이 아니라 집단농장이라는 이유에서, 연금은 마뜨료나 자신에게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남편에 대해서, 즉 호주의 상실이라는 사태에 대해서 지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뜨료나의 남편이 소식을 끊은 것은 벌써 12년 전, 전쟁 초였기 때문에, 지금 사방으로 문의하는 편지를 띄워서 남편의 급료가 얼마였는지 조사한다는 것은 무척 곤란한 일이었다. 귀찮은 수속 절차를 예로 든다면, 우선 그런 문의를 해야만 했고, 그 결과가 어떻든 간에 남편의 수입이 이를테면 월 3백 루블이라는 식으로 서류의 앞뒤를 들어맞추어야만 한다. 그 다음에는, 마뜨료나가 현재 혼자 살고 있으며 어느 누구의 원조도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 받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 연령을 기입한다. 이렇게 모든 서류를 갖춘 다음 사회보장과(社會保障課)로 가지고 간다. 그러나 서식(書式)이 틀렸다고 해서 다시 가지고 돌아간다. 틀린 곳을 고친 다음 다시 가져간다. 그리고 맨 나중에는, 연금의 허가가 내렸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다시 물으러 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수속을 더욱 복잡하게 하는 것은 따리노보 마을의 사회보장과가 마뜨료나의 집에서 동쪽으로 2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에 있고, 마을 관청이 서쪽으로 10킬로미터, 부락 출장소까지도 북쪽으로 걸어서 한 시간이나 되는 거리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뜨료나의 사소한 구두점(句讀點)이나 동그라미의 잘못 때문에 이런 관청에서 저런 관청으로 거의 두 달 동안이나 싸돌아다녀야 했다. 한 관청에 다녀오기만 해도 하루 품이 걸렸다. 마을 관청에 가면, 오늘은 서기가 없다고 한다. 농촌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일단 없다고 하면 그날은 도저히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튿날 다시 찾아간다. 이번에는 서기는 있지만 도장이 없다. 다시 다음날에 간다. 그리고 나흘째에 또 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관청 측에서 근시안 때문에 딴 서류에 서명을 해 버리고, 진짜 서류는 마뜨료나가 핀으로 꽂아 한꺼번에 챙겨가지고 돌아갔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걸까, 이그나찌치.”

 

관청에서 헛걸음을 치고 돌아왔을 때 마뜨료나는 언제나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젠 녹초가 됐어.”

 

 

  그러나 마뜨료나의 이마는 언제까지나 찌푸려 있지는 않았다. 나는 이 여성이 좋은 정신상태를 되찾는 확실한 방법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일을 하는 것이다. 금방 시름에 잠겨 있다가도 어느새 삽을 들고 감자를 캐러 간다. 어떤 때는 자루를 겨드랑이에 끼고 이탄을 주우러 가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수피(樹皮) 광주리를 들고 멀리 떨어진 숲속으로 딸기를 따러 가기도 한다. 그리고, 관청의 데스크가 아니라 무성한 숲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중하(重荷)에 등이 구부러져 돌아오는 마뜨료나는 이미 맑게 개인 만족스러운 표정이어서 평상시의 그 선량한 미소를 되찾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은 편했어요, 이그나찌치, 좋은 장소를 발견했거든요.”

 

  이탄을 주워 왔을 때 마뜨료나는 이렇게 말했다.

 

  “굉장히 좋은 장소여서,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도 있고 얼마든지 주울 수가 있었다우!”

 

  “마뜨료나 바실리예브나, 제 이탄을 가지고는 모자랍니까? 한 차(車)분이나 되는데.”

 

  “휴우! 당신의 이탄 말인가요! 자라려면 아직도 멀었어요. 이곳 겨울로 말하자면 그야말로 격투와 다름없으니까요. 아무리 때도 틈바귀로 들어오는 통풍이 심해서, 작년에도 얼마나 이탄을 긁어모았던지! 아마 세 차분은 될 거야. 하지만 웃사람들이 시끄럽게 굴어서, 이 마을 여자 한 사람이 재판에 걸렸지 뭐유.”

 

  그렇다, 그건 사실이었다. 벌써 겨울의 무서운 입김이 느껴지기 시작할 때가 된 것이다. 주위는 숲 천지인데도, 연료를 구할 장소가 없다는 것은 어째서일까. 근처의 늪에서는 굴착기가 짖어대고 있지만, 이 부근의 주민들은 이탄을 살 수가 없었다. 높은 사람이나 그들의 심복(心腹) 부하한테로 운반될 뿐이다. 교사나 의사, 공장 노동자들한테 트럭으로 운송될 뿐이다. 따리노보의 주민들에게는 연료의 할당이 전혀 없었고, 그것을 요구하는 것도 허용되고 있지 않았다. 집단농장의 의장은 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모든 사람의 표정을 살피는 듯이 여러가지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지만, 연료에 대해서만은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장 자신이 연료를 담뿍 저축해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겨울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옛날 지주의 숲에서 나무를 훔쳤듯이, 지금은 국영기업의 이탄을 긁어오는 것이었다. 여자들은 담력을 기르기 위해서 다섯 사람, 열 사람씩 떼를 진다. 그리고 주간에 행동한다. 여름에 캐낸 이탄은 사방에 쌓아올려진 채 건조를 위해 방지되고 있다. 캐낸 것을 곧 수송할 수 없다는 것이 이탄의 좋은 점이다. 적어도 가을까지 교통이 두절되지 않는 한 눈이 올 때까지 건조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이 사이에 여자들의 활약이 시작된다. 자루로 한 번에 나를 수 있는 양(量)은 축축한 이탄덩어리라면 여섯 개, 마른 것이라면 열 개 정도다. 이렇게 해서 3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를 운반해 온 부대(무게는 여덟 관 정도)가 만 1주야의 연료가 된다.

 

  그러나 겨울은 2백 일이나 계속되는 것이다. 연료를 떨어뜨릴 수는 없다. 아침에는 러시아식 뻬치까에 불을 지피고 밤에는 네덜란드식 난로를 땐다.

 

  “갱부(坑夫)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지!” 하고 마뜨료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방에게 화를 내며 말하는 것이었다. “말이 없어지고 나서부터는 무엇이건 다 짊어지게 됐으니. 짊어지지 않는 거라곤 하나도 없거든. 등이 펴질 사이가 어디 있어야 말이지. 겨울엔 썰매 대신, 여름엔 짐마차 대신에 연료를 나르니 말씀이야. 정말이지 이게 무슨 꼴이람.”

 

  여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훔치러 갔다. 운수가 좋은 날이면 마뜨료나는 여섯 부대까지도 날라오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가져온 공인(公認)된 이탄은 보란 듯이 쌓아올리고 자기가 운반해 온 것은 마루 판자 밑에 감추고 매일 밤처럼 그 입구를 판자로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적(敵)이 눈치를 챘다 해도”

  이마의 땀을 닦아내면서 마뜨료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해두면, 절대로 발견될 염려는 없거든.”

 

  국영기업 측에서는 어떻게 손을 써야 좋을까. 그 넓은 늪 전체에 경비원을 배치할 만큼의 인원 할당은 없다. 처음에는 보고서에 채굴량을 듬뿍 기입해 두었다가, 나중에는 탄 찌꺼기며 비 탓으로 돌려 채굴량을 줄이고 말리라. 이따금 발작적으로 순찰을 강화해서 마을 입구에서 여자들을 체포할 때가 있다. 여자들은 부대를 내동댕이치고 사방팔방으로 도망친다. 때로는 밀고를 받은 당국이 농가를 급습해서 규정량 이외의 이탄에 대해서 조서(調書)를 꾸미고 재판에 넘기겠다고 위협을 하기도 한다. 여자들은 당분간 운반을 중지하지만, 다가오는 겨울에 내쫓기기라도 하는 듯이 또다시 매일 밤 썰매로 나르기 시작한다.

 

  마뜨료나를 가까이서 관찰해서 안 일이지만, 취사나 그 밖의 가사를 돌보는 한편, 이 여자에게는 매일처럼 뭔가 적지 않은 양(量)의 일거리가 있고 또 그런 일들의 순서가 머릿속에 정확히 정돈되어 있어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아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이탄을 주워 오는 일, 트랙터가 늪에서 파낸 고목(古木)의 뿌리를 긁어모아 오는 일, 그리고 겨울 3개월 동안 복숭아를 술에 절여 두는 일(들어 봐요, 이가 깨끗해질 테니, 이그나찌치, 하고 내게 권하는 것이었다), 감자를 캐는 일, 연금 건으로 관청에 드나드는 일,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다 해치운 다음에도 다시 한 마리의 더러운 산양을 위하여 건초(乾草)를 어디에서 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왜 소는 기르지 않습니까, 마뜨료나 바실리예브나?”

 

  “그건 말이오, 이그나찌치”

  더러운 앞치마를 두른 모습으로 부엌 문에서 내 책상 쪽을 돌아보며 마뜨료나는 설명하는 것이었다.

 

  “산양의 젖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소 같은 건 몸집이 커서, 거꾸로 내가 다리부터 먹힐 지경인걸요. 그리고 풀을 베려고 해도 철도 부지에 들어가선 안되고, 영림서의 땅으로 들어가도 안되니… 집단농장에도 이젠 들여보내 주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러나 집단농장의 사람들 역시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게 다 집단농장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니, 눈이 녹아서 풀을 벨 때가 돌아오면, 어떻게들 하려는지… 옛날은 정말 흥겨웠어요, 성(聖) 베드로 축일에서 성 일리야 축일까지의 풀 베는 계절엔 말이오. 비단같이 아름다운 풀이 가득 자라 있어서….”

 

  이런 이유에서, 빈약한 산양 한 마리를 위해 건초를 마련하는 것만 해도 현재의 마뜨료나로서는 큰 일이었던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자루를 짊어지고 낫을 들고 마뜨료나는 집을 나선다. 늪의 샛길이며, 강변이며, 조그만 섬에서 기억을 더듬어가며 좋은 풀이 자란 곳을 찾아낸다. 풀을 넣어온 자루는 풀이 마를 때쯤 되면 그대로 건초를 쑤셔넣은 부대로 이용된다.

 

  이곳 집단농장의 의장은 최근에 거리에서 파견되어 온 새 얼굴이었지만, 그는 최초의 사업으로 폐질자(癈疾者)의 사유지를 삭감하는 일을 해치웠다. 마뜨료나에게는 천 5백 평방미터의 사지(砂地)가 남겨지고, 몰수도니 천 평방미터는 울타리 밖에서 잠자고 있다. 그렇지만 일손이 모자라거나 집단농장의 여자들이 완강히 일을 거절할 때 의장의 마누라는 마뜨료나의 집으로 찾아오는 것이었다. 도회지 스타일의 민첩한 여성인 그 마누라도 짧은 회색 반코트와 매서운 눈초리 탓인지 어딘지 모르게 여자군인다운 데가 있어 보였다.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오면 인사도 하지 않고 뚫어질 듯이 마뜨료나를 바라본다. 마뜨료나는 안절부절 못한다.

 

  “이봐요! 마뜨료나!” 의장의 마누라는 또박또박 끊어지는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집단농장 일을 좀 거들어 줘야겠어요! 내일 마구간의 분뇨 운반을 하러 좀 와 주세요!”

 

  마뜨료나의 얼굴에 송구스러운 듯한 미소가 떠오른다. 마치 집단농장이 자기에게 임금(賃金)을 지불하지 못하는 것을 의장 마누라를 대신해서 사과라도 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가도 좋긴 하지만”

  마뜨료나는 느릿느릿 말한다.

 

  “전 몸이 편찮아요. 그리고 또 지금은 댁의 일을 하고 있지도 않아서.”

  그리고 곧 성급히 덧붙인다.

  “몇시에 가면 되죠?”

 

  “갈퀴는 자기 것을 가지고 와 주세요!”

 

  의장의 마누라는 이렇게 다짐을 주고 요란스럽게 스커트 자락 소리를 내면서 나가버린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뒷모습을 전송하면서 마뜨료나는 입들 비쭉거린다.

 

  “갈퀴는 자기 것을 가지고 오라니 말이야! 집단농장에는 삽도 갈퀴도 없단 말인가. 우리집에는 남자 손이라곤 없지만, 난 아직까지 누구한테서 밭일을 거들어 달란 적은 없었어요…”

 

  그러고는 밤새껏 이런 일 저런 일 사색에 잠긴다.

 

  “하지만 이그나찌치! 손을 빌어야 하는 건 당연해요. 비료가 없으면 농작물이 안되니 말씀이야. 그렇지만 그 사람들의 일하는 꼴이란, 정말이지 눈을 뜨곤 볼 수가 없어요. 모두 멍청히 삽에 기대 서서는 빨리 공장에서 열두시 사이렌이 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서도 마치 관청처럼, 누가 출근하고 누가 결근했다고 장부에 기입하고 있으니, 우리가 일하는 방식은 그런 소리로 신호를 하지 않아도 어느새 점심이다, 저녁이다 하는 식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가버리는데 말씀이야”

 

  아침이 되면 결국 마뜨료나는 자기의 갈퀴를 들고 일하러 가는 것이다.

  그러나 집단농장만은 아니었다. 먼 친척이나 이웃 여자들까지 곧잘 마뜨료나의 집으로 찾아와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마뜨료나, 내 일 좀 거들어주지 않겠어요? 감자를 죄다 캐내려고 하는데.” 그러면 마뜨료나는 이미 거절하지 못한다. 자기 일거리를 미루고서라도 이웃집을 도우러 가고, 돌아와서는 조금도 시기하는 빛이 없이 이렇게 말한다.

 

  “이그나찌치, 그 집 감자는 커요! 감자 캐는 게 재미있어서, 일이 끝나는 게 아쉬웠을 정도였어요. 정말이에요.”

 

그리고 또 마뜨료나가 없이는 야채밭에 괭이질을 할 수 없었다. 따리노보 마을의 여자들은 혼자서 밭에 괭이질을 하기보다는 여섯 명이 달라붙어 여섯 군데의 밭을 차례차례 경작하는 쪽이 보다 편하고 능률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때에도 마뜨료나는 내몰아졌다.

 

  “당신네들은 마뜨료나에게 일당(日當)을 지불하고 있습니까?”

나는 언젠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그분은 돈을 받진 않아요. 강제로라도 쥐어주곤 있습니다만.”

 

  그러고 나서도 번거로운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산양(山羊) 몰이꾼들의 식사대접을 할 차례가 마뜨료나에게 찾아들었을 때이다. 산양 몰이꾼 중 한 사람은 귀머거리에다가 벙어리인 건강한 사내이고, 또하나는 언제나 콧물을 흘리고 다니는 소년이었다. 이 당번은 한 달 반에 한 번씩 돌아오고 있었지만, 마뜨료나는 그때마다 굉장한 소비를 하는 것이다. 그는 소비조합에 가서 생선 통조림을 사기도 하고, 자기는 입에 넣어본 적도 없는 설탕이며 버터를 준비하기도 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농가의 여인들은 산양 몰이꾼들에게 조금이라도 다른 집보다 나은 대접을 하려고 서로서로 심한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재봉사와 산양 몰이꾼은 무섭거든” 하고 마뜨료나는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조금이라도 기분을 상하게 하면, 온 마을에다가 있는 일, 없는 일, 나쁜 소문을 마구 퍼뜨리기 때문에.”

 

  이 정도로 심로가 심한 생활에 가끔 무서운 병이 파고드는 것이다. 일단 자리에 누워버리면 하루건 이틀이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마뜨료나는 고통을 호소하거나 신음을 하지 않지만, 마치 죽은 사람처럼 옴짝달싹 않는다. 그럴 때면, 마뜨료나의 친구인 젊은 마이사가 산양을 거두고 뻬치까를 지피러 찾아온다. 마뜨료나 자신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무엇을 원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마을의 진료소에서 의사를 부른다는 것은 따리노보 마을로서는 놀라운 일이고, 또 이웃을 봐서도 소견머리 없는 일이었다. 어느 공주(公主)님에게 저럴까 하며 뒤에서 험담들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 한 번 의사를 부른 적이 있었는데 찾아온 여의사는 새침한 표정으로, 좀 누워있다가 웬만해지면 진료소로 직접 찾아오라고 마뜨료나에게 지시했다. 마뜨료나는 정직하게도 아픈 몸을 이끌고 찾아갔고, 그 진찰 결과는 구립(區立) 병원으로 보내어졌지만, 그후로는 소식이 없었다. 여기에는 어느 정도 마뜨료나 자신의 책임도 없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일이 병을 고친다. 이윽고 마뜨료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고, 처음엔 느리지만 곧 활발히 돌아다니게 되었다.

 

  “당신은 옛날의 저를 모르시겠죠, 이그나찌치” 하고 마뜨료나는 변명 비슷하게 말했다. “옛날 저는 언제나 2뿌드(약 82킬로미터) 이상이나 짐을 져서 시어머님한테 욕을 먹곤 했어요 ― ‘마뜨료나, 등골이 부러져도 난 모른다!’ 제가 짐을 실은 달구지에는 말도 싫어서 다가오질 않는 거예요. 우리집 말은 보르쵸크란 군마(軍馬)였는데 힘이 장사였다우.”

 

  “어떻게 군마가 있었지요?”

 

  “전에 있던 말은 전쟁으로 끌려가고, 그 대신 부상당한 군마가 온 거예요. 그놈이 글쎄, 언젠가 심술을 부리느라고 썰매를 끈 채 당장 호수로 달려가질 않겠어요. 사내들은 모두 도망쳐버리고 고삐를 잡아 멈추게 한 것은 저였습니다. 그 말은 귀리를 좋아했어요. 사내들도 말한테 사료를 주는 것만은 잘 거들어주었어요. 귀리를 먹는 말은 지칠 줄을 모른다고 하면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마뜨료나는 결코 무서움을 모르는 여자는 아니었다. 마뜨료나가 무서워하는 것은 화재와 천둥과, 그리고 어떻게 되어선지 기차를 특히 무서워하고 있었다.

 

  “언젠가 체르스찌에 볼일이 있어서 갔을 때, 네차예프끼에서 기차가 레일을 덜컹거리면서 이렇게 큰 눈깔을 하고 달려오질 않겠어요. 몸이 불덩이처럼 되고 무릎이 덜덜 떨리는 거예요. 그렇게 무서웠던 적은 그후에도, 그전에도 없었어요.”

 마뜨료나는 어깨를 흠칫했다.

 

  “그건 차표를 사기가 힘들었던 탓도 있지 않을까요, 마뜨료나 바실리예브나?”

 

  “역의 창구에서 말이지요? 그래요, 일등 차표밖에 팔질 않더군요. 그러는 사이에 기차는 벌써 움질일 것 같고! 머리만 상기된 채 이쪽 저쪽으로 갈팡질팡하는 거예요! 사내들은 사다리를 타고 기차 지붕으로 올라타더군요. 우리는 열려진 입구를 찾은 다음 무턱대고 차표도 없이 타버렸지요. 타고 보니 모두가 평민들뿐, 마룻바닥에 뒹굴며 자고 있는 거예요. 왜 차표를 팔지 않는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는 진드기같이 물인정한 사람들도 많더군요…”

 

  그러나 그 해 겨울 마뜨료나의 살림은 전보다도 훨씬 편해졌다. 가까스로 80루블 가량의 연금을 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밖에도 학교와 나한테서 받는 백 루블과 다소의 수입도 있다.

 

  “저런! 그러니 마뜨료나도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군 그래?” 하고 이웃 여자들은 벌써부터 샘을 내기 시작했다.

 

  “저런 노파한테 갑자기 돈이 들어왔으니, 처치하기도 힘들지 않을까?”

 

  마뜨료나는 새로운 펠트화(靴)를 주문했다. 솜이 든 새 동복도 샀다. 옛날에 이 집에 살던 양녀 끼이라는 체르스찌의 기관수하고 살고 있었는데, 그 사내한테서 철도원들이 입는 헌 외투를 받아가지고 그것을 자기 외투로 고쳤다. 마을의 꼽추 재봉사에게 부탁해서 솜을 넣으니 훌륭한 외투가 된 것이다. 육십 평생에 이런 외투를 입기는 처음이라고 한다.

  겨울이 한창인 어느 날, 마뜨료나는 이 외투의 안감에 장례비용으로 2백 루블을 넣고 꿰매었다. 그러고는 기쁜 듯이 이렇게 말했다.

 

  “이걸로 이젠 다소 마음이 놓이는군, 이그나찌치.”

 

  12월이 지나고 정월이 지나는 두 달 동안 마뜨료나는 병을 앓지 않았다. 한가한 날 밤 마뜨료나는 마아샤네 집에 놀러가서, 해바라기 씨를 까면서 잡담에 젖는 일이 빈번해졌다. 내 일에 마음을 쓰기 때문인지 마뜨료나는 자기 집으로 손님을 부르지는 않았다. 그저 주현절(主顯節)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집 안에서 댄스를 하고 있어서, 나는 마뜨료나의 친동생 세 사람에게 소개되었다. 세 사람은 마뜨료나를 ‘언니’ 혹은 ‘보스’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날까지 나는 마뜨료나의 동생에 대해서는 들은 적도 없었다. 동생들은 언니가 돈이라도 꾸어달라지 않을까 해서 두려웠던 것일까.

 

  한 가지의 사건이랄까, 전조(前兆)와도 같은 것이, 이날 마뜨료나의 마음을 흐리게 했다. 50리나 떨어진 교회의 세례식에 참석해서, 다른 주전자 사이에 자기 주전자를 놓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세례식이 끝난 다음, 여자들이 이리 밀치고 저리 밀리며 주전자를 가지러 갔을 때―마뜨료나는 늦어서 줄 뒤에 있었지만 ― 마뜨료나의 주전자는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주전자 대신에 다른 그릇이 남아있지도 않았다. 마치 악마가 빼앗아가기라도 한 듯이 주전자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이봐요, 여러분!”

  마뜨료나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여자들 사이를 기웃거렸다.

 

  “누가 남의 성수(聖水)를 잘못 가져가지 않았어요? 주전자에 든 것을?”

 

  아무도 고백하지 않는다. 애들이 많았기 때문에 애들의 장난으로 돌리고 말았다. 마뜨료나는 슬픈 얼굴을 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마뜨료나는 특히 신앙이 깊은 여자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어느 편인가 하면, 이교도(異敎徒)여서 몹시 미신에 집착하는 버릇이 있었다. 성(聖) 요한의 정진일(精進日)에 야채밭에 들어가면 다음해에는 흉작이 온다든가, 눈보라가 소용돌이칠 때에는 누군가가 어디서 목을 맸다든가, 문에 발을 찧으면 손님이 온다든가 했다. 내가 하숙하고 있을 동안, 마뜨료나가 기도를 드리거나 성호를 긋고 있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무슨 일을 하거나 간에 마뜨료나는 “하느님과 함께!”라고 말하고, 나를 학교에 내보낼 때에도 반드시 “하느님과 함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마음속으로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지만, 나를 경원해서 아니면 강요하는 것 같아서 겉으로는 나타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 집에는 성상(聖像)이 걸려 있었다. 평상시는 어둡게 하고 있지만 종야 기도식이나 축일에는 잊지 않고 등잔을 밝힌다.

  어쨌든 마뜨료나의 죄는 절름발이 고양이보다 가벼웠으리라. 고양이는 쥐라도 죽었으니까…. 

 

  괴로운 살림살이에서 다소 피어났으므로 마뜨료나는 나의 라디오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나는 매일 밤 꼭 스위쵸를 넣었다 ― 마뜨료나는 스위치를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계가 발명되었다는 뉴스를 들으면 마뜨료나는 부엌에서 웅얼웅얼 중얼거린다.

 

  “새 기계, 새 기계 하며 모두들 낡은 것을 쓰려고 하지 않지만, 낡은 것은 다 어디 갔는지.”

 

  비행기로 구름을 내쫓는다는 뉴스를 들으면, 마뜨료나는 뻬치까 위에서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면서 말한다.

 

  “저런, 저런, 저런, 무엇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군요. 겨울에도, 여름에도.”

 

  샤라삔(세계적으로 유명한 러시아의 가수)이 러시아 민요를 부른다. 마뜨료나는 다소곳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딱 잘라 말한다.

 

  “정말 잘해, 외국인 같군.”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마뜨료나 바실리예브나, 잘 들어 봐요!”

  마뜨료나는 다시 귀를 기울인다. 그러고는 입술을 깨문다.

 

  “그래, 틀려요. 넘어가는 게 외국인 솜씨거든. 목소리를 내는 법도.”

 

  그 대신 마뜨료나에게 칭찬을 받은 적도 있다. 어느날 글린까의 가곡 연주회가 중계되었다.

  실내적(室內的)인 가곡이 다섯 곡(曲) 가량 계속되었을 때, 별안간 감격에 겨운 마뜨료나가 앞치마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칸막이 벽 뒤에서 나온 것이다. 시력이 약한 두 눈에는 글썽하게 눈물이 괴어 있었다.

 

  “이거야말로 우리들의 노래야…” 하고 마뜨료나는 속삭이었다.

2

  이렇게 마뜨료나와 나는 서로 친한 사이가 되어 화목스럽게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귀찮은 질문으로 고통받을 때라곤 한 번도 없었다. 그 정도로 여자다운 호기심이 결핍되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저 마음씨가 섬세했기 때문인지, 마뜨료나는 나의 결혼 여부에 대해서는 결코 물으려고 하지 않았다. 따리노보 마을의 여자들은 모두 마뜨료나한테서 나에 대한 것을 알아내고 싶어했다. 그러면 마뜨료나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게 알고 싶다면 직접 물어봐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분이 먼 곳에서 왔다는 것뿐이니까.”

 

  얼마 동안 지난 다음, 내가 오랫동안 형무소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도 마뜨료나는 전부터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내쪽에서도 현재의 마뜨료나, 이 의지할 곳 없는 노파를 바라보기만 할 뿐 그녀의 과거를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억지로 캐내어 들을 만한 과거도 없을 것같이 생각되었던 것이다.

 

  분명치는 않지만, 마뜨료나가 결혼한 것은 혁명 전의 일로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으로 시집을 오자 곧 뻬치까를 다루기 시작했다고 한다 (즉, 시어머니도 올케도 없었기 때문에 신혼 생활 첫날 아침부터 뻬치까의 화젓가락을 잡게 된 셈이다). 자식은 여섯을 낳았지만 갓난애 때부터 하나씩 계속해서 죽었고, 마지막 두 애는 처음부터 사산(死産)이었다. 그 후 끼이라라는 여자애를 양녀로 맞아들였다. 마뜨료나의 남편은 이번 전쟁에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장례식도 아직은 치루지 않고 있었다. 이 마을 출신으로 남편과 같은 부대에 있었다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마뜨료나의 남편은 포로가 되었는지 아니면 전사를 했는지, 아무튼 시체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8년이 지나자 마뜨료나도 과연 남편은 살아있지 않다고 단념하게 되었다. 차라리 살아있지 않는 편이 낫다. 만약 살아있다고 한다면, 브라질이나 오스트레일리아 근처에서 다시 장가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따리노보 마을도, 러시아어도 이미 오래 전에 잊고 말았으리라.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마뜨료나의 집에 손님이 와 있었다. 검은 수염의 키가 큰 노인은 모자를 무릎 위에 놓고 있고, 마뜨료나는 방 한복판 네덜란드식 난로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노인의 얼굴은 거의 흰털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새까만 수염으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폭넓게 밀생한 턱수염이 짚은 코밑 수염과 교차되고 있어서 입은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거뭇거뭇하게 밀생한 볼수염은 거의 귀를 가릴 정도여서 정수리로부터 늘어진 검은 모발과 연결되고 있다. 눈썹은 더욱 까맣고 두꺼워서 양쪽 관자놀이를 다리처럼 연결시키고 있다. 그저 이마만이 둥근 지붕처럼 벗겨져서 제법 뒤로 후퇴하고 있다. 나는 이 용모 전체에서 지혜와 인덕(人德)이 넘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노인은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고, 두 손으로 정중히 지팡이를 붙잡고, 지팡이는 묵직하게 마루에 안정되어 있었다. 칸막이 벽 뒤에서 바쁜 듯이 서서 일하고 있는 마뜨료나하고는 그다지 말도 건네지 않으면서 끈기 있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내가 들어가자 노인은 그 훌륭한 머리를 경쾌하게 내 쪽으로 돌리고는 느닷없이 내 이름을 불렀다.

 

  “아아, 선생님!… 눈이 흐려서 선생님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만, 집의 자식놈이 신세를 지고 있읍죠. 그리고리예프 안또쉬까 말입니다….”

 

  다음엔 들을 필요가 없었다… 훌륭한 노인에 대한 격한 동정 때문에 나는 이 사람이 말함직한 것을 순식간에 알아채고 황급히 상대방의 말을 멈추게 한 것이다. 그리고리예프 안또쉬까는 토실토실 살찐, 볼이 빨간 8학년 G반의 생도였다. 빵 케이크를 지나치게 처먹은 수코양이와도 같은 느낌을 주는 아이다. 학교에 오는 것을 휴식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책상에 앉아서도 언제나 싱글벙글 웃고 있을 뿐 예습이라고는 해온 적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학교 측이 이 지구(地區)나 이 주(州) 아동의 학력 수준만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 아이를 매년 다른 학교로 전학시킨다는 것이었다. 안또쉬까도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아무리 선생한테서 욕을 먹더라도, 어차피 학년 말에는 전학되려니 하고 전혀 공부할 생각을 않는다. 도대체가 우리 교사를 우롱하고 있는 듯한 데가 있었다. 이제 8학년인데도 분수의 계산도 못하고 삼각형의 종류도 식별하지 못한다. 제1학기 성적은 2(소련은 5점 만점제이므로 2점은 낙제 점수)투성이고, 3학기가 되어도 그 성적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 반(半) 장님 노인, 안또쉬까의 부친이라기보다는 조부에 흡사한 연배의 사람에게, 더욱이 이렇게 허리를 굽히고 내게 인사까지 하러 온 분에게, 학교는 매년 댁의 자식을 배반하고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이상 더 계속해서 배반할 수는 없다. 그런 짓을 하면 학급 전체가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나 자신이 거짓말쟁이가 되고 나 자신의 일과 지위를 스스로 비하(卑下)시키게 되는 거다, 등등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그래서 나는 참을성 있게 이렇게 말했다 ― 댁의 자제분은 다소 방임되고 있는 듯한 기미가 있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 좀더 자주 일기를 점검해서 학교와 가정 양쪽으로부터 엄하게 지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무척 엄하게 다루고 있답니다” 하고 손님은 내게 장담을 했다. “호되게 두드려 패고 있어요. 제 팔은 아직도 단단하거든요.”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생각났지만, 예전에 마뜨료나는 이 안또쉬까라는 아이의 점수를 좀 후하게 줘달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애가 당신의 친척이냐고 묻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그 부탁을 거절하고 말았던 것이다. 문득 바라보니 지금 또 마뜨료나는 부엌 문까지 나와서는 아무 말도 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안또쉬까에게 동정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 파제이 미로노비치 노인이 앞으론 꼭 엄하게 다루겠다고 약속하고 떠나간 다음 나는 마뜨료나에게 물었다.

 

  “영문을 모르겠군요. 마뜨료나 바실리예브나, 당신은 왜 저 안또쉬까에게 마음을 쓰는 거죠?”

 

  “아주버님의 아들인걸요” 하고 마뜨료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하고는 산양의 젖을 짜려고 나갔다.

 

  그러고 보면, 저 수염이 짙은 참을성 있는 노인은 행방불명이 된 마뜨료나의 남편의 형님이 되는 셈이다.

  기나긴 밤의 시간이 흘러갔다. 마뜨료나는 더이상 그 화제를 건드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밤도 깊었을 때, 나도 이미 노인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바퀴가 달리는 소리와 기둥 시계 소리를 반주 삼아 조용한 집 안에서 일을 계속하고 있을 때, 갑자기 마뜨료나는 어두컴컴한 쪽 구석으로부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난 말이오, 이그나찌치, 하마터면 그분하고 결혼할 뻔했다우.”

 

  나는 마뜨료나가 한 방 안에 있다는 것조차도 잊고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 던져진 마뜨료나의 말 속에는 마치 지금 그 노인한테서 사랑을 호소받고 있기라도 한 듯한 절실한 음향이 깃들어 있었다.

  마뜨료나는 밤새껏 그 일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남루한 누더기를 깐 침상에서 일어나자 자기의 말을 쫓기라도 하는 듯이 마뜨료나는 나에게로 다가왔다. 나는 몸을 젖히고 이때 처음으로 전혀 새로운 마뜨료나의 모습을 본 것이다.

  무화과나무투성이의 이 넓은 방에는 천장에서 비치는 불빛이 없다. 테이블 스탠드의 빛은 나의 노트 언저리만을 비치고 있어서 몸을 돌려 방 안을 둘러보니 장밋빛이 깃든 어스름만 퍼지고 있을 뿐이다. 그 어스름 속에 마뜨료나가 나왔다. 그녀의 볼은 언제나처럼 황색이 아니라 역시 장밋빛으로 물들어있는 것 같았다.

 

  “그분이었어요. 맨 처음 나하고 결혼하자고 말한 사람은… 예핌보다도 전이었죠… 그분이 형님이었으니까… 나는 열아홉, 파제이는 스물셋일 때예요… 이 집에 살고 있었지요, 파제이와 예핌은. 두 사람의 집이었으니까요. 두 분의 아버지께서 지은 집이에요.”

 

  나는 엉겁결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고색창연하게 낡아빠진 회색의 집이, 쥐들이 달리는 퇴색한 벽지 저쪽으로부터 느닷없이 젊은 모습을 드러낸 것같이 생각되었다. 아직 이런 식으로 더러움을 타기 전, 방금 대패질을 마친 기둥으로부터 상쾌환 수지(樹脂) 향기를 발산하던 때의 그 모습.

 

  “그래서 당신은 그분을…?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요?”

 

  “그 해 여름… 그분하고 자주 숲으로 가곤 했어요” 하고 마뜨료나는 속삭였다. “그 근처의 숲은 벌채되어 지금은 양마장(養馬場)이 되고 말았지만, 조금만 더 있었으면 그분하고 결혼할 뻔했던 거라우, 이그나찌치. 그런데, 독일하고 전쟁이 터져서, 파제이는 군대로 끌려가고 만 거죠.”

 

  이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나의 눈앞에는 청색과 백색과 황색의 1914년 7월의 광경이 떠올랐다. 구름이 흐르는 아직도 평화로운 하늘과 수확에 용솟음치는 사람들. 나는 상상 속에 두 사람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등에 큰 낫을 짊어진 거무죽죽한 건장한 사내. 보리 다발을 가슴에 안은 볼이 빨간 여자. 그리고 노래. 야외의 노래. 기계를 사용하게 된 요즈음에는 결코 부르지 않는 노래.

 

  “전쟁에 나가서 영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나는 3년이나 꾹 참고 기다렸죠. 그래도 소식도 없구, 소문도 없구…”

 

  색이 바랜 낡은 머릿수건을 쓴 마뜨료나의 둥근 얼굴은 스탠드의 아늑한 조명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름살이며 평상시의 남루한 복장으로부터 해방이라도 된 듯이 무서운 선택을 앞에 놓고 전율하는 처녀의 얼굴.

 

  그렇다… 잘 아는 일이다… 나뭇잎이 지고 눈이 오고 그 눈도 녹았다. 다시 경작하고, 다시 씨를 뿌리고, 다시 곡식을 거두어들인다. 또다시 나뭇잎이 지고 다시 눈이 내린다. 그리고 하나의 혁명. 이어서 또하나의 혁명. 그러고는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졌다.

 

  “그쪽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예핌이 결혼을 신청하더군요. 이 집에 일단 들어오기로 작정했던 이상 역시 이 집으로 오라는 거예요. 예핌은 나보다 한살 아래였죠. 이 근처에서 성모 축일(음력 10월 1일) 후에 시집가는 것은 영리한 처녀고 성 베드로 축일(음력 629일) 뒤에 가는 것은 바보 처녀라고들 말하지만, 예핌 가(家)에서는 일손이 모자랐기 때문에 나는 바보 처녀가 돼서… 결혼식은 바로 성 베드로 축일이었어요. 그런데 그 해 성 니꼴라 축일(음력 12월 6일) 조금 전에… 파제이가 돌아오질 않았겠어요… 헝가리에 포로로 잡혀있었다는 거예요.”

 

  마뜨료나는 눈을 감았다.

  나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뜨료나는 그때의 일을 재현하는 듯이 문간으로 얼굴을 돌렸다.

 

  “느닷없이 문지방에 서 있는 거예요. 나는 그만 앗 하고 비명을 질렀어요! 달려가서 껴안고 싶더군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지요… 그러자 그분이 말하는 거예요 ― 이 놈이 친동생이 아니었다면 너희 둘 다 도끼로 박살을 내고 마는 건데!”

 

  나는 부르르 몸부림을 쳤다. 마뜨료나의 긴장감과 공포감으로부터 나는 캄캄한 문지방에 선 검은 수염의 사내가 마뜨료나를 향해서 도끼를 들어올린 광경을 생생히 머릿속으로 그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마뜨료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앞에 놓인 의자 등에 몸을 기댄 채 노래하듯이 이야기를 계속 했다.

 

  “정말이지 그분은 별난 사람이에요! 이 마을에도 젊은 처녀는 많았는데 좀처럼 장가를 들지 않는 거예요. 너하고 같은 이름을 찾는다, 두번째의 마뜨료나를 찾는다고 하면서. 결국 리뽀브까 마을에서 정말 마뜨료나라는 처녀를 데려다가 따로 농가를 짓고 지금도 거기서 살고 있어요. 당신도 학교에 나갈 때 매일 그 옆을 지날 테지만.”

 

  아아, 그랬었구나! 그 제2의 마뜨료나라면 나도 몇번 만난 적이 있다. 나는 그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마뜨료나한테 언제나 불평을 하러 오곤 했다. 올 때마다 남편이 주먹질을 한다거나, 남편이 인색하다거나, 이렇게 쓰라린 생활은 없을 거라고 말하면서 오랫동안 울곤 한다. 그 음성은 언제나 우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 마뜨료나는 이젠 조금도 그 여자에게 동정을 하고 있지 않았다. 파제이가 두번째의 마뜨료나를 때리고 집안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비단 어제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한 번도 얻어맞진 않았지요” 하고 마뜨료나는 예핌의 일을 상기하고 있었다. 

 

“다른 사내들하고는 싸움도 했지만 나를 때린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아, 딱 한 번, 내가 올케하고 싸움을 했더니, 성을 내며 내 이마를 스푼으로 내리쳐 상처를 낸 적이 있었어요. 나는 확 달아올라 식탁 테이블에서 일어나서는, 너희들은 목을 매 죽어야 해, 게으름뱅이 같으니라고! 이렇게 말하고 숲속으로 도망쳤답니다. 그 다음부터는 손을 대지 않더군요.”

 

  파제이 쪽에서도 불편을 할 만한 이유라곤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두번째의 마뜨료나는 여섯 아이를 낳아서(그 막둥이 반편이 내 학급의 안또쉬까인 것이다) 여섯 다 무사히 길렀는데, 이 마뜨료나와 예핌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애건 간에 생후 3개월도 지나기 전에 큰병도 앓지 않고 모두 죽고 만 것이다.

 

  “엘레나라는 계집애는 목욕을 시키는 사이에 죽고 말았어요. 모처럼의 목욕물도 보람이 없이… 내가 시집온 날은 성 베드로 축일이었는데, 알렉산드르라는 여섯번째 애의 장례식도 공교롭게 성 베드로 축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마뜨료나의 몸 어딘가에 썩은 곳이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내 몸 어딘가가 썩어 있는 거예요!”

  지금도 마뜨료나는 정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한번은 옛날의 여승(女僧)한테로 끌려갔더니, 자꾸 재채기를 하라는 것예요. 썩은 곳이 재채기와 함께 개구리처럼 뛰어나온다고 하면서. 그래도 역시 뛰어나오진 않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갔다… 1941년, 파제이는 시력이 좋지 않아 군대로 끌려가지 않았지만 그 대신 예핌이 징집되어 갔다. 그리고 제1차 대전 때에 형이 행방불명이 되었듯이, 제2차 대전 때에는 동생이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 그러나 동생은 두번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다. 옛날에는 흥청거렸으나 지금은 휑뎅그렁하게 텅 빈 이 집은 점점 헐어갔고, 의지할 곳 없는 마뜨료나도 이 집에서 점점 늙어갔다.

 

  그래서 마뜨료나는 학대받고 있는 또 한 사람의 마뜨료나에게 당신이 낳은 자식을 (혹은 파제이의 피를 계승한 자식을) 갖고 싶다고 말하고 맏딸 끼이라를 양녀로 맞아들였다.

  끼이라는 이 집에서 친딸과 다름없이 마뜨료나의 죽은 아이들의 대상(代償)으로 10년 동안 양육되었다. 그리고 내가 하숙을 정하기 조금 전에 체르스찌의 젊은 기관수한테 시집을 갔다. 지금 마뜨료나를 원조하고 있는 것은 이 끼이라뿐이다. 때때로 설탕을 보내주기도 하고 돼지를 잡았을 때는 비계 덩어리를 조금씩 나누어주기도 한다.

 

  병에 시달려 죽을 날이 그다지 멀지 않다고 예상한 마뜨료나는 벌써부터 유언 비슷한 것을 공표하고 있었다. 이른바 이층방이라고 불리는 안채와 연결된 별실은 마뜨료나가 죽은 후 끼이라의 재산이 된다. 그러나 안채에 대해서는 분명한 말이 없었다. 마뜨료나의 세 동생은 이 안채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되어, 그날 밤 마뜨료나의 비밀은 내 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흔히 그렇듯이, 내가 마뜨료나의 삶의 비밀들을 알게 되자 그것들은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끼이라가 체르스찌에서 찾아왔고, 늙은 노인 파제이가 안달복달하기 시작했다. 젊은 부부가 체르스찌에서 사유지(私有地)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그 땅 위에 집을 짓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목적을 위해서는 마뜨료나의 이층방이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다른 곳에서는 재목을 입수할 만한 가망성이 없다. 그리고 끼이라 자신이나 끼이라 남편보다도 오히려 파제이 노인 쪽이 더 체르스찌의 사유지를 손에 넣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노인은 그후에도 두세 번 찾아와 끈덕지게 이야기를 되풀이하면서, 마뜨료나가 살아있을 때 지금 곧 이층방을 양도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의 파제이 노인은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지팡이에 의지한 노인, 난폭한 말을 던지거나 조금만 밀쳐도 쓰러지고 말 듯한 그런 허약한 노인은 아니었다. 허리는 굽어있지만 아직도 몸 전체의 균형은 잡혀있어서, 육십이 넘었다는데도 젊은이처럼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를 보존하고 있는 이 노인은 열띤 어조로 끊임없이 자기 주장만을 고집했다.

 

  마뜨료나는 이틀 밤이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좀처럼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층방 그 자체는 평상시에도 사용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깝지는 않았다. 본디 마뜨료나는 자기의 노력이나 재산을 아낀 적이라곤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40년이나 살아온 집을 파괴한다는 것이 마뜨료나로서는 두려웠던 것이다. 제3자인 내가 상상해 봐도 이 집에서 널빤지를 떼고 기둥을 뽑는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물며 마뜨료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그녀의 생애에 종지부(終止符)를 찍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나 마뜨료나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사람들은 생전에 집을 부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내 2월의 어느날 아침, 파제이 노인이 자식과 사위를 데리고 왔다. 다섯 자루의 도끼가 무딘 소리를 내고, 널빤지가 뜯겨지며 우지끈거렸다. 파제이의 두 눈은 바쁘게 번쩍이고 있었다. 등이 굽었는데도 노인은 재치있게 서까래 밑으로 기어들어가, 분주히 걸어다니면서 일을 거드는 사내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파제이는 청년 시절에 아버지하고 둘이서 이 집을 지었던 것이다. 특히 이 이층방은 장남 파제이가 신부하고 살기 위해 지은 것이었다. 그 본인이 지금 힘차게 돌아다니면서 대들보를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기둥과 천장판에 번호가 찍혀지고 드디어 이층방이 아래층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짧은 다리로 연결되고 있던 안채하고의 경계에는 임시로 판자벽이 만들어졌다. 그 벽은 구멍투성이였으나, 사내들은 파괴하러 온 것이지 벽을 만들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마뜨료나가 이 집에서 살 날도 앞으로 그다지 길지는 않을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했으리라.

 

  사내들이 집을 부수고 있는 동안, 여자들은 운반의 날에 대비해서 탁주를 준비했다. 보드카는 값이 많이 먹히기 때문이다. 끼이라는 모스크바 주에서 설탕 1뿌드를 운반하여 왔다. 마뜨료나 바실리예브나는 밤을 이용해서 그 설탕과 술병을 탁주 제조업자한테로 가지고 갔다.

  뜯어낸 재목은 문 앞에 쌓아올려지고, 기관사인 사위가 트랙터를 빌리려고 체르스찌로 떠나갔다.

 

  그러나 그날부터 눈보라가 ― 마뜨료나의 표현을 빌자면 격투가 시작되었다. 만 2주야 동안 사나운 눈보라가 휩쓸며 소용돌이쳐서 길은 가는 곳마다 깊은 눈더미에 잠기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얼마간 길이 굳어지고 트럭이 한두 대 다니는가 했더니 ― 갑자기 날이 따스해졌다. 하룻 만에 눈이 녹고, 습기 찬 안개가 끼고,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장화를 신은 발은 장화 목둘레까지 진흙에 빠졌다.

 

  그러니까 뜯어낸 이층방을 트랙터가 운반하러 올 때까지 무려 2주일이 걸린 셈이다. 그 2주일 동안 마뜨료나는 안절부절 못하며 걸어다녔다. 특히 괴로웠던 일은, 세 여동생이 찾아와서는 이층방을 깨끗이 내준 언니는 바보라고 서로 입을 모아 꾸짖고 나서 두번 다시 언니의 얼굴은 보고 싶지도 않다고 말하고 떠나갔다는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바로 같은 무렵, 절름발이 고양이가 슬며시 뜰에서 나간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설상가상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조그만 사건도 마뜨료나에게는 심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눈이 녹던 길도 가까스로 한기(寒氣)에 굳어졌다. 맑은 날이 찾아들어 기분도 상쾌해졌다. 그날 새벽녘에 마뜨료나는 뭔지는 몰라도 좋은 꿈을 꾸었다. 아침에 내가 낡은 직조기를 짜고 있는 어떤 여자를 사진에 담고 싶다고 말하자 (아직도 두 농가에 그런 직조기가 남아있어서 거친 천을 짜고 있었다), 마뜨료나는 겸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앞으로 이삼일만 기다려요, 이그나찌치. 이층방을 날라가면 우리집에 있는 직조기를 조립해 드릴 테니. 집의 것은 아직도 못쓰게 되지 않았어요. 꼭 내 직조기를 사진에 찍도록 해요, 정말!”

 

  마뜨료나는 자기가 낡은 기계 앞에 서고 싶었던 것이리라. 엄동의 태양은 이층방을 떼어낸 이 집 우리창을 연한 장밋빛으로 물들이고 그 빛은 마뜨료나의 얼굴에도 반영되고 있었다. 자기의 양심과 엇갈리지 않는 사람의 얼굴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법이다.

 

  저녁 무렵 가까이 학교에서 돌아오니 우리 집 앞은 소란하기 짝이 없었다. 트랙터가 달린 신형의 큰 썰매에는 벌써 재목이 실려져 있었지만 아직도 싣지 못한 재목이 많이 남아있었으므로, 파제이 노인의 일가인, 일을 도우러 온 사람들은 또 한 대의 썰매를 손으로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후한 품삯이나 맛있는 음식이 기다리고 있을 때는 언제나 그렇게 마련이지만 모두 미친 듯이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서로 고함을 치기도 하고 말다툼을 하기도 하면서.

 

  논쟁의 초점은 두 대의 썰매를 어떻게 끄느냐 ― 다시 말해서 따로따로 끄느냐, 아니면 두 대 한꺼번에 끄느냐 하는 것이었다. 파제이의 아들 중의 하나인 절름발이 사내와 사위인 기관사는 한꺼번에 두 대의 썰매를 끄는 것은 무리라, 트랙터에는 그만한 마력(馬力)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트랙터의 운전수는 보기에도 뻔뻔스럽게 생긴 자신만만한 거인이었지만 목청을 돋우어 쉰 목소리를 내면서, 트랙터의 일이라면 나한테 맡겨라, 운전수는 나다, 썰매 두 대는 한꺼번에 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운전수의 속은 뻔히 들여다보였다. 이 사내는 이층방을 운반하는 약속으로 품삯을 정했지만 그것은 트랙터의 주행(走行) 킬로미터 수(數)하고는 무관한 것이다. 25킬로미터의 거리를 하룻밤에 두 왕복을 해서는 도저히 수지가 맞지 않는다. 게다가 트랙터는 몰래 차고에서 끌어내 온 것이고, 이것은 이른바 과외 벌이이기 때문에 적어도 아침까지는 차고로 되돌려 놓아야 하는 것이다.

 

  파제이 노인은 물론 오늘 중으로 운반을 마치고 싶었으므로 아들과 사위에게 논쟁을 그만두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급조된 두번째 썰매는 튼튼한 첫번째 썰매에 연결되었다.

  마뜨료나는 사내들 사이를 분주히 돌아다니면서 썰매에 재목을 싣는 일을 거들고 있었다. 문득 바라보니 마뜨료나는 내 동복을 입고 있었다. 재목에 묻어있던 진흙 때문에 동복 소매가 많이 더럽혀져 있었다. 나는 화가 나서 마뜨료나를 붙잡고 그 일을 말해 주었다. 그 동복은 괴로운 지난날에 내 몸을 녹여준 귀중한 기념품인 것이다. 내가 마뜨료나 바실리예브나에게 화를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생각한다.

 

  “저런, 저런, 내가 정신이 나갔군!” 하고 마뜨료나는 당황해 하며 말했다. “덤비며 나오는 바람에 당신 것을 잘못 입었군요. 미안해요, 이그나찌치” 그러고는 곧 동복을 벗은 다음 장대에 걸어 말리는 것이었다.

 

  적하 작업이 끝났다. 일을 마친 열명 안팎의 사내들은 우르르 내 책상 옆을 지나 커튼을 들치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되는 대로 마구 컵을 놓는 소리, 때때로 술병과 컵이 마주치는 소리가 부엌으로부터 들려왔다. 이야기 소리가 조금씩 높아지더니 자기 자랑의 이야기들이 점점 심해져 간다. 특히 재미있게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 있던 사람은 트랙터 운전수였다. 혼탁한 탁주 냄새가 나 있는 곳까지 풍겨왔다. 그러나 음주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너무 어둡기 전에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사내들은 부엌에서 나왔다. 트랙터 운전수는 만족해 보였으나 그 얼굴 표정은 잔혹했다. 기관사 사위와 파제이의 절름발이 아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조카아들이 썰매를 따라 체르스찌까지 가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 자기 집으로 흩어져 갔다. 파제이는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누군가를 따라잡은 후 뭐라고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다. 절름발이 아들은 내 책상 앞에 걸음을 멈추더니 담배에 불을 당긴 후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자기는 마뜨료나 아주머니를 무척 사랑하고 있으며 얼마 전에 장가를 들어서 최근에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말했다. 바로 여기까지 말했을 때 밖에서 누가 불러 절름발이 아들은 나가버렸다. 창 밖에서 트랙터의 엔진이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맨 끝으로 칸막이 벽 뒤에서 허둥지둥 마뜨료나가 나왔다. 마뜨료나는 밖으로 나간 사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근심스러운 듯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동복을 입고 머플러를 썼다. 그녀는 문간에서 내게 말했다.

 

  “트랙터를 두 대 빌렸으면 좋았을걸. 한 대가 고장나도 나머지 한 대로 끌 수가 있으니까, 저것 한 대 가지고는 어떻게 될지 누가 안담!”

 

  그러고는 사내들을 좇아 나가버렸다. 음주와 논쟁과 대소동이 있은 후, 인적기가 사라진 농가 안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수없이 문을 여닫았으므로 방 안은 완전히 식어있었다. 창 밖에는 이미 어둠이 깔려있었다. 나도 동복을 입고 노트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트랙터의 음향도 멀리 사라졌다.

 

  한 시간이 지나고 또 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또 한 시간. 마뜨료나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썰매를 전송한 후 마아샤네 집에라도 놀러간 거겠지.

  다시 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또 한 시간. 어둠뿐만 아니라 그 어떤 깊은 정적이 마을을 휩싸고 있었다.

 

  그때는 정적의 원인을 깨닫지 못했지만, 저녁 때부터 지금까지 마을에서 5리 가량 떨어진 철로 위를 기차가 한 번도 통과하지 않은 것 같았다. 쥐들의 소음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시끄럽게 느껴졌다. 시간이 감에 따라 쥐들은 점점더 시끄럽게, 뻔뻔스럽게 벽지 뒤를 달리면서 찍찍 울어댔다.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새벽 한시가 되었는데도 마뜨료나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멀리서 소란스러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지만, 그들은 이 집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예상은 들어맞았다. 이윽고 세차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 낯선 거만한 목소리가 문을 열라고 소리친다. 나는 회중전등을 들고 짙은 어둠 속으로 걸어나갔다. 온 마을이 잠들어 어느 창문에서도 불빛은 보이지 않았고, 며칠 전부터 녹기 시작한 눈도 전혀 빛을 반사하지 않는다. 나는 문에서 빗장을 벗기고 밖의 사람들을 들어오게 했다. 외투를 입은 네 명의 사내가 농가로 들어왔다. 한밤중에 외투를 입은 사내에게 침입당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불빛에 비쳐 보니, 그 중 두 사람은 철도원 외투를 입고 있었다. 아까 그 트랙터 운전수와 똑같은 얼굴을 한 거만스러운 중년 사내가 물었다.

 

  “아주머니는 어디 갔지?”

  “모르겠습니다.”

  “썰매를 끈 트랙터는 이 집에서 나갔겠지?”

  “그렇습니다.”

  “떠나기 전에 여기서 술을 마셨지?”

 

  네 명의 사내는 스탠드의 불빛이 미치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체포되었거나 아니면 이제부터 체포될 찰나에 있다 ― 나는 순식간에 이렇게 판단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하지만!”

  “술들이 취해 떠났지?”

  “여기서 마셨지?”

 

  도대체 누가 누구를 죽인 걸까. 그렇지 않다면, 이층방을 이동하는 것도 금지되고 있었던 걸까. 사내들의 태도는 몹시 사나웠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여기서 만약 탁주가 발견되면 마뜨료나가 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부엌문 앞으로 뒷걸음질을 쳐서 부엌 입구를 몸으로 가로막았다.

 

  “정말 모릅니다. 마시는 건 보지 못했습니다.”

  (정말 나는 보지 못했다. 소리만 들었을 뿐이니까)

 

  그 다음 나는 일무러 난처하다는 듯한 몸짓으로 빙그르 손을 움직여 농가 안을 가리켜 보였다. 서적이며 노트를 비치고 있는 평화로운 스탠드 불빛. 겁에 질린 듯한 무화과나무의 무리들. 은자(隱者)의 조잡한 침대. 술을 마신 흔적이라곤 아무 데도 없다.

  그 사람들도 여기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여기선 술을 마시지 않은 것 같지만 마신 것만은 틀림없어, 이렇게 말하며 그들은 나가려고 했다. 나는 그들을 전송하면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캐내려고 했다. 울타리 근처에서 겨우 한 사람이 중얼거렸다. 

 

  “그놈들은 모두 산산조각이 났어. 아마 주워모으기도 힘들걸.”

  또 한 사람이 덧붙였다

  “그런 건 문제가 아냐. 21시의 급행이 하마터면 탈선할 뻔한 것이 더 큰 문제지.”

  그들은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농가로 돌아왔다. ‘그놈들’이란 누굴까. ‘모두’라는 건 누구를 가리키는 걸까. 마뜨료나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나는 문지방을 넘어 부엌으로 들어갔다. 탁주의 악취가 코를 쿡 찌른다. 마치 싸늘하게 식은 옛 전쟁터 같다. 주인을 잃은 걸상이며 벤치, 떼굴떼굴 구르고 있는 텅빈 술통, 아직도 약간 남아있는 술병, 수많은 컵, 먹다 남은 청어와 파, 잘리고 뜯겨진 돼지비계.

 

  모든 게 다 죽어 있었다. 바퀴들만이 조용히 전쟁터를 기어다니고 있다. 그 사람들은 21시의 급행이 어쩌구저쩌구 말하고 있었다. 그건 무슨 뜻일까… 어쩌면, 그들에게 이 부엌을 보인 쪽이 더 좋지나 않았을까. 나는 벌써 동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 그런 일을 할 수는 없다. 관리도 아닌 내가 무엇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 말이다. 느닷없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황급히 문간으로 나갔다.

 

  “마뜨료나?”

 

  문이 열렸다. 양 손바닥을 마주 잡고 비틀거리면서 들어온 것은 마뜨료나의 친구 마아샤였다.

 

  “마뜨료나가… 마뜨료나가 말이오, 이그나찌치…”

 

  나는 마아샤를 앉혔다. 소리내어 울면서 마아샤는 이야기해 주었다.

  건널목은 좀 높은 데 있고 양쪽은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 건널목에는 횡목(橫木)이 없다. 트랙터에 끌린 첫번째 썰매는 무사히 건널목을 건넜지만, 로프가 끊어지는 바람에 급조된 두번째의 썰매는 건널목에 들어박힌 채 부서지기 시작했다. 이 썰매를 만들 때 파제이는 좋은 재목을 아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첫번째 썰매를 조금 앞으로 끌어당긴 다음 트랙터는 건널목으로 돌아와서 두번째의 썰매에 로프를 다시 걸려고 했다. 트랙터 운전수와 파제이의 절름발이 아들, 그리고 마뜨료나가 트랙터와 썰매 사이로 들어갔다. 마뜨료나는 왜 그런 일에까지 참견하면서 사내들의 일을 거들려고 했을까. 사내들의 일을 거드는 것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마뜨료나의 나쁜 습성이다. 언젠가도 사납게 날뛰는 말에 끌려 하마터면 호수의 얼음 구멍으로 빠질 뻔한 적이 있다. 그건 그렇고, 왜 그런 건널목까지 따라간 걸까. 이층방을 내주기만 하면 그것만으로도 마뜨료나의 일은 끝난 건데…. 끼이라의 남편인 기관수는 체르스찌 방향으로부터 기차가 오지 않나 감시하고 있었다. 멀리서 불이 보이면 곧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반대쪽인 또르포쁘로둑트 역으로부터 연결된 2량의 기관차가 불도 켜지 않고 뒷걸음질쳐 왔다. 왜 불을 켜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기관차가 뒷걸음질칠 때에는 탄수차(炭水車)에서 석탄가루가 날아와서 기관수에게는 거의 뒤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충돌이 일어났다. 트랙터와 썰매 사이에 있던 세 사람은 산산이 짓이겨졌다. 트랙터는 고장나고, 썰매는 산산조각이 나고, 레일은 휘어지고, 2량의 기관차는 탈선했다.

 

  “왜 기관차가 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요?”

  “트랙터의 엔진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은 거예요.”

  “시체는?”

  “내주질 않는군요. 주위에 새끼줄을 쳐 두고.”

  “아까 온 사람들이 급행이 어쩌니저쩌니 하고 말하고 있었습니다만… 급행 열차가 어떻게 됐습니까?”

  “10시 급행이 바로 그때 또르포쁘로둑트 역에서 나와 건널목을 향해 달려왔어요. 그러나 탈선한 기관차에서 뛰어내린 기관수 두 사람은 상처를 입지 않고 있었으므로, 레일 위에서 손을 흔들어 위험 직전에 급행을 멈출 수 있었던 거예요… 파제이의 조카애도 재목 때문에 약간의 상처를 입었지만, 지금 끌라브까네 집에 숨어있어요. 건널목에 있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증인으로 끌려가… 죄인 취급을 당할 테니까 싫다는 거죠… 끼이라의 남편은 상처 하나 안 입었어요. 목을 매 죽겠다고 떠드는 것을 모두가 말렸답니다. 내 탓으로 장모님과 처남을 죽였다면서 우는 거예요. 그 사람은 자진해서 나가 끌려갔어요. 하지만 형무소가 아니라 정신병원으로 끌려가지나 않을지. 아아, 마뜨료나, 마뜨료나…”

 

  마뜨료나는 이미 없다. 다정한 사람은 죽었다. 마지막 날, 동복 때문에 나는 마뜨료나에게 화를 내지 않았던가, 적황색(赤黃色)으로 그려진 서적 시장 포스터의 여인은 즐거운 듯이 미소짓고 있다. 마아샤는 얼마 동안 울고 있었다. 이윽고 평정을 되찾고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이렇게 물었다.

 

  “이그나찌치! 저 회색 스웨터가 있었지요, 마뜨료나의… 죽으면 우리집 따니까에게 준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세요?”

 

  어스름 속에서 마아샤는 희망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잊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는 듯이.

  그러나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네, 그렇게 말했었죠.”

  “그럼 지금 가져가도 괜찮을까요. 내일 아침만 되면 친척들이 많이 모일 테니, 얻어가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러고는 다시, 애원하듯이 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반세기(半世紀)에 걸친 마뜨료나의 벗, 이 마을에서 마뜨료나를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있던 단 한 사람의 여인….

  아마 그래도 괜찮으리라.

 

  “좋아요… 가져가세요…” 하고 나는 허가했다.

  마아샤는 장롱을 열고, 스웨터를 끄집어내서, 그것을 옷자락 밑에 감추고 떠나갔다….

 

  쥐들은 마치 뭔가에 찔리기라도 한 듯이 벽을 따라 달음질치고 있었다. 초록색 벽지는 쥐의 등에 눌려서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내일은 학교에 나가야 한다. 벌써 새벽 두시가 지나 있었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단 하나 문에 자물쇠를 잠그고 잠드는 일이다.

  마뜨료나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물쇠를 잠가야 하는 것이다.

 

  불을 끄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 쥐들은 찍찍 울고, 거의 신음소리에 가까운 소리를 내면서 계속 달리고 있었다. 피로에 지쳐 마비된 두뇌를 이따금씩 가느다란 진동이 줄달음쳤다. 그건 눈에 보이지 않는 마뜨료나가 몸부림을 치며 자기 집에 작별 인사를 고하는 목소리가 아닐까. 돌연 어두컴컴한 문지방 위에 검은 수염의, 젊은 날의 파제이가 도끼를 치켜들고 서 있는 모습을 나는 본 것 같았다.

 

  “네가 친동생이 아니었다면, 너희 둘 다 도끼로 박살을 내고 말았을 거다!”

 

  그 무서운 말은 40년 동안 낡은 손도끼처럼 이 집 한구석에 늘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도끼는 내려쳐진 것이었다.

3

  새벽녘에 여자들은 마뜨료나의 시체의 나머지를 썰매에 싣고 더러운 자루를 덮은 다음 건널목으로부터 운반해 왔다. 시체를 씻기 위해 자루를 들쳐보니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두 다리와 동체의 절반과 왼쪽 팔이 없다. 한 여인이 말했다.

 

  “오른팔은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하느님이 남겨주셨군. 오른팔로라도 기도 드릴 수 있게…”

 

  마뜨료나가 그토록 사랑하던 무화과나무 ― 언젠가 밤중에 연기에 싸여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불을 끄기보다 앞서 무화과나무부터 마루에 던졌던 것이다(무화과나무가 연기에 상하지 않도록) ― 그토록 사랑하던 무화과나무는 모두 바깥으로 운반되었다. 마루도 깨끗이 씻겨졌다. 그을어서 잘 보이지 않는 마뜨료나의 거울은 손으로 짠, 폭넓은 낡은 천으로 덮여졌다. 화려한 포스터 두 장은 벽에서 뜯겨지고 나의 책상도 이동되었다. 창문 옆, 성상 밑에 걸상이 놓여지고 그 위에 아무 장식도 없는 관(棺)이 놓여졌다.

 

  마뜨료나는 관 속에 누워있었다. 처참한 몸체는 청결한 시트로 덮여지고 머리는 하얀스커트로 둘러져 있었으나, 그 평온한 표정을 띤 순질스러운 얼굴은 사자(死者)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생자(生者)의 얼굴에 가까웠다.

 

  마을 사람들이 고인(故人)을 보려고 찾아왔다. 여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는 죽은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울음소리가 터지면, 그저 호기심에서 들렀던 여자들까지도 마치 코러스의 반주처럼 문간과 벽 옆에서 곡(哭)을 했다. 남자들은 모자를 벗고 묵묵히 부동 자세로 서 있었다.

 

  곡(哭)의 실마리를 만드는 것은 언제나 친척들이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안 것이지만 냉정히 계산된 그 울음소리 속에는 옛날부터의 관습으로 통용되어 내려온 법칙이 있는 것 같았다. 비교적 먼 친척들은 관 옆에 서 있는 시간도 짧고 기도하는 소리도 그다지 크지가 않다. 고인하고 친한 사이였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문지방을 넘기가 무섭게 울음을 터뜨리고, 관 옆에 이르면 고인의 얼굴에 볼을 비비다시피 하고 울부짖는다. 곡의 멜로디는 여자 나름대로 각각 독특한 억양이 있었다. 그리고 독특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또 한 가지 알게 된 것은, 고인을 추도하는 울음소리는 단순한 울음소리가 아니라 일종의 거래 방식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마뜨료나의 세 동생들은 재빨리 달려와서 농가와 산양, 뻬치까를 확고히 장악한 후 마뜨료나의 장롱에 자물쇠를 채웠다. 그러고는 외투 안감에서 2백 루블의 장례 비용을 끄집어낸 후 조문객들을 향하여 마뜨료나하고 친했던 것은 우리들뿐이라고 끊임없이 강조했던 것이지만, 이 세 동생들의 곡법(哭法)은 다음과 같았다.

 

  “아이구! 언니, 언니, 아이구, 우리 기둥이었던 언니, 하나밖에 없는 우리 언니, 왜 좀더 살지 못하구, 우리도 좀더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는데! 그런데, 저, 이층방 때문에 죽었군요. 그 무서운 이층방 때문에 박살이 난 거군요. 왜 이층방을 헐으셨어요? 왜 우리 말을 안 들으셨어요?”

 

  결국 동생들의 호곡은 마뜨료나의 남편측 친척에 대한 비난의 말인 것이다. 마뜨료나에게 이층방을 부수게 한 것은 잘못이었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이층방은 너희들에게 빼앗겼지만 이 안채만은 양보하지 않겠다는 뜻이 포함되고 있다).

  남편측 친척―마뜨료나의 시누이뻘이 되는 예핌과 파제이의 여동생들, 그리고 사방에서 모여든 조카들은 이렇게 울었다.

 

  “아이고, 아주머니, 아주머니! 왜 좀더 몸을 소중히 하지 않으셨어요! 이렇게 됐다고 저 사람들은 우리에게 화를 내고 있군요! 아아, 상냥하셨던 아주머니, 잘못하신 건 아주머니예요! 이층하곤 아무 관계도 없어요. 왜 그런 무서운 곳으로 가셨나요! 누가 부탁했던 것도 아니잖아요. 왜 좀더 조심을 하시지 않구! 왜 우리 말을 듣지 않으셨어요?…”

  (이 호곡에서 얻어지는 결론은 ― 이분이 죽은 것은 우리들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니 안채에 대해서는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그러나 머리 모양이 보기 흉한 제2의 마뜨료나 ― 옛날 파제이가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아내로 맞아들인 마뜨료나의 대역(代役)은 이런 거래 방식에서 떠나 있었다. 그녀는 관에 달라붙어 소박하게 울부짖었다.

 

  “아이고, 나의 언니! 저에 대해서 노하시지는 않으셨나요? 오오, 이게 무슨 변입니까… 우리는 곧잘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었지요! 죄 많은 저를 용서해 주셔요. 이게 무슨 일입니까? ― 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시다니! 제가 죽을 때 마중나와 주셔요! 아아,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오오,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하고 말할 때마다 이 마뜨료나는 문자 그대로 자기의 혼(魂)을 송두리째 내뱉기라도 하는 듯이 관 허리에 가슴을 내리치는 것이었다. 이 여자의 호곡이 관습으로 정해진 기준량을 넘으려고 하면, 다른 여자들은 이젠 그만큼 울었으면 되었다는 듯이, 모두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한다.

 

  “이젠 그만 해요, 그만 해요!”

 

  마뜨료나는 일단 관에서 떠나지만,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다가가서는 아까보다 더 격한 목소리로 울부짖는다. 그러나 방 한구석으로부터 최연장 노파가 걸어나가서 마뜨료나의 어깨에 손을 얹고 준엄한 어조로 말한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수수께끼가 있느니라. 어느 누구건 태어날 때를 기억 못하고, 어느 누구건 죽을 때를 모르느니라.”

 

  그러자 마뜨료나는 곧 진정하고, 주위의 여자들도 쥐죽은 듯이 고요해진다. 그러나 이 노파, 다른 노파보다도 연장이고 마뜨료나하고는 남남과도 다름없다는 이 노파도 잠시 후에는 역시 울음을 터뜨렸다.

 

  “아아, 불쌍한 마뜨료나! 아아, 나의 마뜨료나! 아아, 이게 무슨 꼴이람, 너희들이 나보다도 먼저들 가니!”

 

  그리고 완전히 관습을 떠나, 현대식으로 단순 소박한 통곡을 들려준 것은 불행한 마뜨료나의 양녀 ― 체르스찌 거리로 시집간 후, 문제의 이층방을 파괴하는 원인이 된 바로 그 끼이라였다. 돌돌 말렸던 끼이라의 머리칼은 보기에도 가련하게 풀려져 있었다. 눈은 충혈되어 빨갰다. 지독한 추위인데도 스커트가 흘러내린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외투 소매에도 손이 통해 있지 않다. 양모(養母)의 관이 있는 집에서 형제의 관이 있는 집으로 끼이라는 정신없이 걸음을 옮겼다. 모두들 끼이라가 미치지나 않을까 하고 근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중적인 슬픔 뒤에는 또하나의 슬픔인 남편의 재판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끼이라의 남편은 두 가지 점에서 문책을 받으리라고들 말했다. 즉 이층방을 운반한 것뿐만 아니라, 철도원이란 신분으로 보아 횡목이 없는 건널목의 규칙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때 우선 역으로 가서 트랙터가 통과한다는 것을 신고해야만 했었다. 그곳을 통과하려던 우랄행(行)의 급행 열차에는 천 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차내의 희미한 불빛을 받으면서, 침대차의 상단이며 하단에서 평화롭게 잠들고 있던 천 명의 생명이 위기에 처해졌던 셈이다. 약간의 사유지를 손에 넣고 싶다거나, 하룻밤에 트랙터로 두 왕복을 하고 싶지 않다거나 하는 몇몇 인간의 에고이즘 때문에, 혹은 파제이가 파괴를 결심한 이래 저주를 받고 있었던 그 이층방 때문에, 그러나 트랙터의 운전수는 이미 인간의 제재가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가 버렸다. 그리고 비교적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건널목에 횡목을 달아놓지 않았다는 점이며, 2량 연결의 기관차가 등불을 달고 있지 않았다는 점 등으로 해서 철도 당국에도 책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철도 당국은 맨 처음 모든 책임을 술 탓으로 돌리려고 했고, 나중에는 재판 그 자체까지도 뭉개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레일과 노반(路盤)이 심한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그로부터 3일간, 마침 두 개의 관이 각자의 집에 안치되고 있을 동안, 열차는 모두 지선(支線)을 우회했다.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의 사흘 동안 ― 사고 조사를 마치고 매장하는 날까지 ― 건널목에서는 밤낮 계속해서 수복 공사가 행해졌다. 때마침 맹렬한 추위가 다가왔으므로 수리공들은 몸을 녹이기 위해서, 그리고 밤에는 조명을 위해서도, 건널목 근처에 산재해 있는 두번째 썰매의 재목이나 널빤지를 연료로 사용하여 경비가 들지 않는 모닥불을 피웠다.

 

  첫번째 썰매는 고스란히 짐을 실은 채 건널목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방치되고 있었다.

  금요일과 토요일의 이틀 동안, 텁석부리 파제이 노인의 마음을 괴롭힌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 즉, 첫번째의 썰매는 언제라도 끌고 갈 수 있게 거기에 있고, 두번째 썰매는 잘만 하면 모닥불에서 구해낼 수도 있었다. 자기 딸은 반 미치다시피 되고, 사위는 재판의 위협을 받고 있으며, 집안에는 자식이 든 관이 놓여 있고,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는 옛날에 사랑했던 여인의 시체가 누워있다고 하는데도, 이 파제이가 수염을 잡아뜯으며 두 관 옆에 서 있는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노인의 아름다운 이마는 괴로운 생각으로 흐려 있었으나, 그 생각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여 이층방의 재목을 모닥불에서 구해내고, 마뜨료나의 세 동생들의 간계로부터 구해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따리노보 마을의 사람들과 교제해서 안 일이지만, 이 파제이와 같은 인간은 결코 진기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이 국가의 것이건 개인의 것이건 간에 소유물로 나타내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도브로(재산과 이란 두 가지 뜻이 있다)라는 낱말을 생각할수록 기묘한 느낌이 든다. 게다가 그것을 상실한다는 것은 면목이 없는 어리석은 행위로 간주되고 있다.

 

  파제이는 한시도 가만히 붙어있지를 않고 마을과 역을 찾아가서는 발이 닳도록 관청에서 관청을 드나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굽은 등을 더욱 굽히고 지팡이에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제발 나의 연령을 고려해서라도 이층방을 돌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리고 실제로 누군가가 그것을 허용한 것이다. 파이제는 곧 살아남은 자식들과 사위와 조카들을 동원해서 집단농장으로부터 말을 빌린 다음, 세 개의 마을을 지나는 우회로를 거쳐 건널목 뒤로 나와서는 이층방의 재목을 송두리째 자기 집으로 운반했다. 이 작업은 토요일과 일요일에 걸친 밤 사이에 완료되었다.

 

  일요일 낮에 장례식이 행해졌다. 두 개의 관은 마을 중앙에서 마주치고, 어느 관을 먼저 통과시키느냐는 문제로 친척들은 옥신각신 언쟁을 했다. 결국 숙모와 조카는 한 썰매 위에 나란히 뉘어지고, 흐린 하늘 밑 또다시 녹기 시작한 2월의 눈길을 따라 두 사람의 사자(死者)는 두 마을 건너에 있는 교회 묘지까지 운반되었다. 바람이 강한 불순한 날씨 때문에 사제(司祭)는 마중하러 나오지도 않고 교회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교회의 울타리까지 사람들이 느릿느릿 행진하며 합창을 했다. 이윽고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장례식 전날 밤이 되어도 집 안에서는 여인들의 소동이 그칠 줄을 몰랐다. 관 옆에 달라붙은 한 노파는〈시편(詩篇)〉의 문구를 중얼거리고, 마뜨료나의 동생들은 화젓가락을 잡고 뻬치까 앞에 진을 치고, 뻬치까의 전면은 이탄의 열을 받아 빨갛게 타올랐다. 그것은 멀리 떨어진 늪에서 마뜨료나가 자루에 넣어 날라온 이탄이다. 여자들은 거친 밀가루를 사용해서 맛없는 삐로그(만두의 일종)를 만들었다.

 

  일요일, 장례식에서 돌아왔을 때 이미 저녁 무렵이 가까웠으나 그후 곧 추도식이 시작되었다. 몇개의 책상을 모아 긴 테이블을 만들고, 아침까지 관이 놓여 있던 장소는 연회장으로 변했다. 먼저 일동은 테이블 주위에 늘어섰다. 마뜨료나의 시누이 남편뻘이 되는 노인이〈하느님 아버지시여를 외었다. 그러고 나서 모든 사람에게 조금씩 벌꿀주가 따라졌다. 조금밖에 안 따르는 이유는 모두가 싫증이 나도록 벌꿀주를 마셨기 때문이다.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우리는 그것을 스푼으로 떠 마셨다. 그 다음 마른 안주가 나오고 보드카가 나오고 회화는 점점 흥겨워 갔다. 젤리가 나오자 모두 일어나서〈영원의 추억을 노래했다 (젤리 전에는 반드시 이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누군가가 설명해 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술.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고, 화제는 이미 오래 전에 마뜨료나에게서 떠나 있었다. 마뜨료나의 시누이 남편은 자랑조로 말했다.

 

  “다들 느끼셨나요? 믿음이 깊은 여러분, 오늘의 장례식은 무척 느리게 진행됐죠? 그건 미하일 신부가 나를 인정해 줬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사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다면,〈성자와 함께 평안히, 아멘만으로 끝나고 마는 겁니다.”

 

  가까스로 식사가 끝났다. 또다시 일동은 기립하고〈하느님의 양식의 합창, 그리고 영원한 추억! 영원한 추억! 영원한 추억! 하고 삼창을 했다. 그러나 어느 목소리이건 다 쉬고 맞지를 않고 모두 취한 얼굴들이어서, 어느 누구도 이 영원의 추억을 진심으로 되뇌이는 사람은 없었다.

 

  이것으로 추도회는 일단 끝나고 친척들만 남아서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농담을 하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행방불명이 된 마뜨료나의 남편 이야기가 나오자, 시누이의 남편은 가슴을 두드리고는 나와, 마뜨료나의 한 동생의 남편인 제화공을 향해서 자신 있게 말했다.

 

  “죽었어요, 예핌은 죽었어요! 그렇지 않다면 돌아오지 않을 리가 없쟎습니까, 조국에 돌아가면 잡혀 간다는 것을 알더라도 나 같으면 돌아오겠어요!”

 

  제화공은 수긍이 간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 제화공은 탈주병이었지만, 그러면서도 결코 조국을 버리지는 않았다. 즉, 전쟁이 끝날 때까지 쭉 어머니의 집 지하실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뻬치까 위의 높은 자리에는 말수가 적은 최연장자인 노파가 앉아있었다. 그녀는 철없이 떠들고 있는 50대, 60대의 젊은이들을 비난의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집에서 자라난, 저 불행한 양녀만이 칸막이 벽 뒤에서 울고 있었다.


  파제이는 마뜨료나의 추도회에 오지 않았다. 자기 아들의 추도회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후, 두 번씩이나 이 집을 방문해서는 마뜨료나의 동생들이며 탈주병 출신인 제화공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논쟁의 초점은 안채에 있었다. 안채는 동생 중의 하나가 차지하느냐, 아니면 양녀가 차지하느냐. 문제가 복잡해져서 하마터면 재판 사태로 번지지나 않을까 걱정했으나, 재판에 걸리면 이 안채는 마을의 공유 재산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양자는 타협하기로 결말을 지었다. 즉, 산양은 동생 중의 하나가 차지하고 안채는 제화공과 그 아내가 차지한다. 파제이의 몫으로는 “이 집 기둥 하나하나가 모두 파제이의 손이 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층방이 이미 파제이의 집으로 운반되었다는 사실 등을 고려한 끝에, 산양의 막사와 뜰과 야채밭 사이의 안쪽 벽 전부를 노인이 갖기로 했다.

 

  여기서 다시 한번 탐욕스러운 노인은 전신의 허약이며 요통(痛)을 극복하고 생생한 젊음을 되찾았다. 또다시 살아남은 아들이며 사위를 동원해서, 산양의 막사와 내벽의 파괴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8학년 G반의 안또쉬까도 이번만은 게으름뱅이가 아니어서 썰매 뒤를 미는 등 일을 거들고 있었다.


  마뜨료나의 집은 봄까지 파괴되고 말았으므로, 나는 거기서 얼마 멀지 않은 시누이의 한 집으로 이사를 갔다. 그녀는 기회 있을 때마다 마뜨료나의 추억담을 조금씩 이야기해 주어서, 나는 고인에 대한 새로운 측면을 알게 되었다.

 

  “예핌은 마뜨료나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나는 문화적인 복장을 한 여자가 좋아, 그녀의 옷을 좀 보라구, 그야말로 시골뜨기지 뭔가, 하고 말하곤 했어요. 그렇게 옷에 돈을 들이기가 싫다면 마음대로 해, 하면서 여분의 돈을 모조리 마셔버린 적도 있었답니다. 나하고 함께 거리로 돈벌이를 나가면, 언제나 색싯집에 들르곤 했지요. 마뜨료나한테는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마뜨료나에 대한 비평은 모두 좋지 않은 것들뿐이었다. 우선 외모가 단정하지 못했고, 가구를 갖추려고도 하지 않았고, 전체적으로 보아 어딘지 모르게 얼빠진 사람 같았다. 어째선지, 사료를 주기 싫어해서 돼지를 기르지도 않았다. 그런데 바보처럼 사람만은 좋아서 남에게 무료 봉사만 해주었다 (쟁기로 야채밭을 일굴 때 거들어줄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이 마뜨료나를 회상하는 가장 큰 실마리였다).

 

  그리고 마뜨료나의 성의와 소박함을 인정하긴 해도, 시누이는 올캐의 말을 할 때면, 분명히 멸시어린 동정의 어조로 바뀌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듣고 ― 시누이의 좋지 않은 비평을 듣고, 처음으로 나는 눈앞에 마뜨료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같은 지붕 밑에 살고 있으면서도 끝내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마뜨료나의 모습이.

 

  정말이다! 어느 농가에서도 돼지를 기르고 있다. 그러나 마뜨료나의 집에는 돼지가 없었다. 먹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식충이 돼지, 거기에 사료를 주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루 세 번 먹이를 끓여주고 여러가지 시중을 해준 끝에 도살해서 비계를 잘라낸다.

  그러나 마뜨료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가구를 갖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건 다시 말해서 악착같이 돈을 저축해서 물건을 산 다음, 그 물건을 인간의 생명보다도 소중히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고운 옷도 원치 않았다. 악덕이나 기형(奇型)을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한 고운 옷을.

  

자기 남편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한 채 버림받은 여인. 여섯 자식을 차례차례 잃었지만, 선량 그대로의 그 성격은 결코 잃은 적이 없는 여인. 동생이나 시누이하고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생애를 보낸 여인. 남을 위해 무료 봉사를 하는 얼빠진 바보 같은 여인. 이 여인은 죽었을 때 아무 저축도 없었다. 더러운 산양과 절름발이 고양이와 무화과나무뿐….

 

  우리는 이 여인 바로 옆에 살면서 누구 한 사람도 이 여인이 의인(義人)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가 없으면 어떠한 도시도 서 있을 수 없다는 바로 그 의인 말이다.  

  도시뿐이랴, 온 세계도…. (김학수 옮김)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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