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Dostoevskii)

 

1821년 11월 11일(러시아) ~

1881년 2월 9일 (향년 59세)

 

토스토예프스키가 위대한 소설가가 된 비밀
  ㅇ 매일매일을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여 열심히 살았음

토스토예프스키의 생애
  ㅇ 24살(1845년)에 <가난한 사람들>로 러시아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

    ⇒ 때 이른 성공이 그에게 공허감을 가져다 줌

    ⇒ 방황하다가 급진적인 정치조직에 가담

  ㅇ 27살(1848년) : 전 유럽에 혁명이 발발,

     토스토예프스키도 혁명에 동참
  ㅇ 28살(1849년)
: 토스토예프스키를 포함한 동지 24명 체포됨,  8개월 수감후 최종판결 받는다는 통보받음
     - 짐짝처럼 마차에 실려간 곳은 교수대가 놓여 있고 구경꾼이 수천명 운집

     - 죄수들은 교수대 앞까지 두줄로 서서 행진

     - 장교 판결문 낭독 : 국가전복 혐의, 유죄, 총살형에 처함

     - 토스토예프스키의 생각

       ① 이토록 빨리 영원히 어둠속으로 들어가는 구나

       ② 만약 내가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면,

           스쳐가는 모든 것을 소중하게 여기리라
           인생의 단 1초도 허비하지 않으리라

     - 사형집행절차는 그대로 진행

       ㆍ 신부가 마지막 성사 집행, 각자의 고해를 들어줌

       ㆍ 먼저 총살당할 3명이 말뚝에 묶임

       ㆍ 두건이 얼굴을 덮음

       ㆍ 토스토예프스키는 앞줄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음

       ㆍ 병사들이 소총을 조준
       ㆍ 그때 마차 한 대가 질주하며 광장에 들어섬 → 차르가 감형해 
          주기로 했다고 통보

     - 토스토예프스키에 내려진 새로운 선고

       ㆍ 4년간 시베리아 강제노동 후 군대 복무

     - 그날 토스토예프스키는 동생에게 편지를 보냄

       ㆍ 지난 일을 돌이켜보고 실수와 게으름으로 허송세월 보냈던 날들을 생각하니 심장이 피를 흘리는 듯하다
       
인생은 신의 선물 - 모든 순간이 영원의 행복일 수도 있었던 것을 젊었을때 알았더라면!
        이제 내인생은 바뀔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다

     - 그후 4년동안 그는 지옥같은 감옥의 조건을 견디었음

        5kg의 쇠고랑을 팔과 다리에 매단채 강제노동

        글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머릿속으로 소설을 쓴 후 모두 외워 두었음
 
  

  ㅇ 36살(1857년) : 작품을 출판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음
     - 전에는 한페이지 가지고 반나절 넘기기 일쑤였지만 이제 그는 오로지 쓰기만 했음

     - 새로운 좌우명 : 최단시간내에 가능한 빨리 끝내기

     - 친구들은 그가 감옥에서 보냈던 시기를 애석하게 여김

       
그는 오히려 화를 내면서 자신은 그 경험을 감사하고 있으며 어떤 괴로움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함
  ㅇ 60살(1881년) : 죽는 날까지 미칠듯한 속도로 집필

     - 죄와 벌,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등을 발표

     - 마치 매일매일이 마지막 날이라는 듯 살았음

죽음에 대한 태도
  ㅇ 죽음은 너무도 두려운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애를 다 씀
  ㅇ 죽음과 거리감을 유지하는 한 우리마음은 잠시 편해질지 모르나 결과는 끔찍함

     ⇒ 시간은 무한하다는 환상을 갖게되고, 일상생활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음. 
직면한 현실로부터 도망침
  ㅇ 죽음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고 진정한 탈출구는 없음

     ⇒ 지금 행동이 인생에서 주사위를 던지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음.
 그 기회를 소중하게 생각하여야 함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지혜의 씨앗을 만나서 인생행로를 바꾸었다.

 

그가 1866년에 발표한 그 유명한 소설『죄와 벌』은 이러한 변화의 결실이었다. 그가 젊었을 때에는 청년 작가로 글줄이나 쓴다고 교만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안하무인격이었다. 그러던 그가 비밀결사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시베리아 벌판으로 떠나게 되었다.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시베리아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기한도 없는 유형의 생활이 계속되었다. 낮에는 강제노동에 시달렸고, 밤이면 어둡고 추운 골방에서 외로이 절망을 달래가며 지냈다.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 성경 한 권을 보내왔다. 그래서 그는 매일 저녁 성경을 읽게 되었다. 그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마침내 그가 온갖 심혈을 기울여 인생말엽에 작품을 하나 내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양심의 문제를 다룬『죄와 벌』이다. 성경 말씀으로 새롭게 태어난 그가 양심의 문제를 깊이 깨달아 성경의 진리를 극적으로, 문학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1. 러시아의 소설가·언론인.
인간 심성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보는 심리적 통찰력으로, 특히 영혼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20세기 소설 문학 전반에 심오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죄와 벌 Prestupleniye i nakazaniye〉·〈백치 Idiot〉·〈악령 Besy〉·〈카라마조프 가(家)의 형제들 Bratya Karamazovy〉 등 그의 장편소설들은 삶의 지혜와 영혼의 울림을 전달하는 데 예술이 매체로 이용된 뛰어난 본보기이며, 그에게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의 한 사람이라는 명성을 안겨주었다.
 
2. 젊은 시절과 문학수업
아버지는 퇴역한 군의관으로 가정문제에 엄격하고 완고한 사람이었다. 훗날 도스토예프스키는 불안정한 중산계층 출신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일컬어 "지적인 프롤레타리아"라 했다. 그의 문학적 관심을 일깨운 환경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젠트리 출신의 이반 투르게네프 및 레프 톨스토이의 환경과는 전혀 달랐다.

 

모스크바의 기숙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그는 16세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육군 공병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종종 군사훈련과 축성술 수업을 몰래 빠져나가 러시아 문학을 비롯한 유럽문학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때 읽은 감상적인 통속소설은 폭력과 범죄를 다루는 그의 취향을 부추겼다.

 

이 형성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그는 밤이 되면 동료 사관생도들과 함께 밖에 나가 맛있는 음식과 술, 재미있는 대화 및 음악과 연극을 즐기고 여자들을 사귀었던 것 같다. 그는 또한 명성과 자기희생적인 행위 및 이상주의적인 우정을 열렬히 꿈꾸었다.

 

공병학교를 졸업한 얼마 뒤 오로지 글 쓰는 일에 몰두하기 위해 과감히 전역했으나 생계를 꾸려나갈 수단이 거의 없었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농노들에게 살해당한 아버지는 유산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중편소설
〈가난한 사람들 Bednyye lyudi〉(1846)의 원고를 완성해놓았던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친구를 통해 유명한 문학평론가인 비사리온 벨린스키에게 이 원고를 보냈다. 벨린스키는 이 무명의 청년 작가를 불러 주인공의 숨겨진 본성을 밝히는 예술적 재능을 칭찬해주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때의 기쁨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이렇게 회상했다. "진실은 예술가인 당신한테 고지되고 선언되었소. 그것은 천부적인 재능으로 주어진 것이라오. 그 재능을 소중히 여기고 거기에 충실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위대한 작가가 될 것이오!" 〈가난한 사람들〉은 별로 노력을 기울인 작품도 아니고 초심자의 기술적 결함으로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었지만, 벨린스키의 칭찬은 예언적인 통찰이었다. 벨린스키는 이 작품에서 러시아 최초의 사회 소설을 읽어낸 것이었다.

 

이 작품은 고아 소녀에 대한 사랑을 아버지다운 애정으로 감추고, 그 애정을 감상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면서 존경을 얻으려고 애쓰는 가난하고 늙은 관리의 절망적인 노력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은 사랑에 빠진 가난한 사람들, 당시의 처참한 사회 상황에 희생된 사람들의 희망과 노력이 아무 결실도 맺지 못하는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보여준다. 주제를 다루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솜씨는 독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그는 종래의 방식에 새로운 차원(주인공의 갈등을 내면에서 관찰하는 심리분석적 관심)을 더했기 때문이다. 그는 형 미하일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접근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종합이 아니라 분석으로 글을 써나갑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깊숙한 곳으로 뚫고 들어가며, 모든 원자를 분석하면서 전체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그는 러시아 사실주의 소설의 독자적인 전통을 수립한 것이다.

 

반면에 그는 문단과 사교계에서는 인상적인 이미지를 창조하지 못했다. 그가 첫번째 성공을 거둔 이후, 문단과 사교계는 그를 명사로 대접하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키가 작달막하고 금발에 작은 회색 눈, 병색이 완연한 얼굴, 신경질적으로 실룩거리는 입술을 가진 그는 그런 사교 무대에서는 침착성을 잃고 어색한 몸짓을 보였다. 그는 창작에서 피난처를 찾았고, 2번째 중편소설인 〈이중인격 Dvoynik〉(1846)을 발표했다. '분열된 자아'(주인공인 하급 관리 골랴트킨은 날로 심해지는 피해 망상으로 고통을 받다가, 그를 없애려는 음모자이며 그와 똑같은 모습을 가진 인물을 만나게 됨)를 탐구한 이 작품은 독자들을 지루하게 했고, 그는 벨린스키의 비평적 지지마저 잃어버렸다. 그러나 덜 분석적인 측면에서 보면, 분열된 자아를 가진 인간을 가리키는 '이중인격자'는 그후 발표된 그의 여러 걸작 장편소설의 주인공들 속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1846~49년에 그는 몇몇 소품과 단편소설 및 중편소설을 잇달아 발표했지만, 거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가 야심적으로 쓰기 시작한 장편소설 〈네토치카 네즈바노바 Netochka Nezvanova〉(1849)가 계획대로 완성되었다면 독자들의 관심을 되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편협하고 변덕스러운 의붓아버지에 대한 소녀의 사랑을 다룬 이 소설은 그의 후기작품에 되풀이하여 나타나는 개념과 이미지 및 장치들을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이다.

 

그러나 그가 국가 전복 혐의로 체포되는 바람에 이 소설은 3편의 긴 삽화만 발표된 채 중단되었고, 그의 문학 제1기도 막을 내렸다. 처음에 발표된 이 3편의 이야기들은 그가 받은 문학적 영향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생활에 대한 그의 관찰을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을 해부하는 진지한 분석은 자신의 심리와 정신을 들여다보는 자기성찰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흥적인 방식이기는 했지만, 이 문학 제1기는 그의 창조적 발전이 앞으로 나아가게 될 주요 방향을 암시해 준다.
 
3. 시베리아 유형
당시 러시아는 니콜라이 1세 황제의 억압 통치 아래 놓여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정치적·사회적 개혁운동에 가담하여, 이상주의자인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의 집에서 금요일마다 열린 토론회에 참석했다. 이 모임에서는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이 토론되었다.

 

그는 이 토론회뿐만 아니라 급진적인 소책자를 불법 출판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소규모 비밀결사에도 참석했다. 서유럽을 휩쓴 혁명운동이 러시아에 미칠 영향을 염려한 정부는 1849년 4월에 페트라셰프스키 서클 회원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같은 해 9월, 오랜 수사가 끝난 뒤 체포당한 218명의 정치범들 가운데 도스토예프스키를 포함한 21명이 총살형을 선고받았는데 그해 말 극적인 해결이 이루어졌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때의 상황을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오늘, 12월 22일, 우리는 모두 세묘노프 광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사형수의로 갈아 입었습니다. 그런 다음 일행 중 3명이 처형장으로 끌려가 기둥에 묶였습니다. 저는 앞에서 6번째였고, 우리는 3명씩 끌려갔으므로, 저는 2번째 그룹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제는 정말이지 1분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옆에서 나팔소리가 울려퍼지더니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기둥에 묶여 있던 사람들이 풀리고, 황제 폐하의 사면을 알리는 칙령이 낭독된 것입니다." 황제의 사면령이 발표되기 직전에 죽음을 각오하고 처형에 대비했던 무시무시한 경험은 그의 기억에 깊이 새겨져, 후기소설에 끊임없이 등장한다. 사형선고는 시베리아의 옴스크 유형지에서 4년 동안 중노동을 하고 다시 4년 동안 군대에서 병졸로 복무하는 것으로 감형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이 중죄를 범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처벌을 당연한 죄값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더없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중노동을 하면서, 가벼운 죄를 지은 일반 죄수들을 '특별한 사람들'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따금 정신적 고통에 짓눌렸고, 이 무렵에 첫번째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 간질병은 그후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유형지에서 그에게 허용된 책은 〈신약성서〉뿐이었는데, 이 책은 1825년 12월의 봉기가 실패로 끝난 뒤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 이른바 데카브리스트의 부인 한 사람이 기증한 것이었다. 그는 이 책을 거듭 읽었다. 〈신약성서〉는 유형지의 고통을 덜어주었고, 그는 이 책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신앙을 배웠다. 죄인을 일으켜 주고, 겸허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었다. 감옥생활은 그가 장차 작가이자 사상가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젊은시절의 급진주의 사상은 기존 질서에 대한 존중과 민중의 메시아적 사명에 대한 믿음으로 바뀌었다. 고통을 통해 세상을 구원한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러시아 정교회의 영성주의가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감옥은 굴욕당하고 상처입은 사람들을 더 깊이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해 주었다.

 


그는 1854년에 석방된 뒤 시베리아의 세미팔라틴스크라는 도시에서 병졸로 복무하게 되었지만, 군인생활은 어떤 의미에서는 유형생활보다 더 지루했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여 결국 하급 장교가 되었고, 친구도 몇 명 사귀었으며, 유형생활 동안 책을 읽지 못해 생긴 공백을 벌충하기 위해 책과 정기간행물을 보내 달라고 형에게 거듭 간청하곤 했다.

 

이 무렵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1857년에 아들 하나가 딸린 과부와 결혼한 일이다. 결핵 환자인 이 과부와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결혼으로 경제적 부담까지 짊어지게 되자, 지난 몇 년 동안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했던 침묵에서 벗어나 다시금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더욱 강해졌다.

 

그는 유형생활중에 생각해둔 다양한 구상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익살스러운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숙부의 꿈 Dyadyushkin Son〉(1859)은 세미팔라틴스크를 모델로 삼았음이 분명한 한 지방도시의 위선적인 사회를 풍자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그보다 앞서 활동한 러시아 소설가 니콜라이 고골리의 창작 방법을 따르고 있다. 뒤이어 좀더 야심적인 중편소설 〈스테판치코보 마을과 주민들 Selo Stepanchikovo i ego obitateli〉(1859)이 발표되었는데, 비록 예술적으로는 균형이 잡혀 있지 않지만, 이중인격자인 주인공 오피스킨에 대한 묘사 덕분에 이 작품은 졸작의 운명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2편의 작품은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 2편의 작품을 발표한 직후, 그는 쇠사슬에 묶여 유형을 떠난 지 만 10년 만에 자유의 몸으로 그가 사랑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와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4. 문학적 부활
러시아 수도의 급진주의자들은 그를 정치범으로 찬미하고 싶어했지만, 그는 그들과 그들의 사상, 특히 종교를 비웃는 그들의 태도를 경멸했다. 그는 새로운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옹호하는 사회개혁에 공감했다. 그의 첫번째 작품집은 1860년에 나왔고, 이듬해 그는 형의 협력을 얻어 〈브레먀 Vremya〉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이 잡지가 주창한 입장은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 양대 지식인 그룹의 이념적 화해였으며, 러시아를 구하기 위해서는 두 파벌이 대중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논설과 소설을 통하여 인텔리겐치아와 민중의 참된 접근방식을 모색했으며, 그 덕분에 잡지는 성공을 거두었다. 시인인 아폴론 마이코프와 비평가인 아폴론 그리고리예프 및 니콜라이 스트라호프 등 그의 견해에 동조하는 친구들이 주위에 모여들었고, 그의 정치적·사회적·예술적 견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죽음의 집의 기록 Zapiski iz myortvogo doma〉(1861~62)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일찍이 누렸던 문학적 명성을 되살려 주었다. 투르게네프가 갈채를 보냈고,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최고 걸작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 소설은 아내를 죽인 혐의로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은 한 남자의 회고록 형식으로 표현되었지만, 사실은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유형지에서 겪은 경험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면서, 유형생활을 묘사하고 특별한 죄수들의 심리를 날카롭게 통찰하는 한편, 감동적인 삽화를 통하여 이 버림받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자유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거의 같은 무렵, 그는 〈브레먀〉에 〈학대받는 사람들 Unizhennye i oskorblyonnye〉(1861)이라는 장편소설을 연재했다. 가족과 인습을 무시하고 남자에게 사랑을 바친 여자의 권리를 다룬 이 소설은 비평가들을 괴롭혔지만, 독자 대중은 무척 기뻐했다. 적어도 몇 개의 초상들, 예를 들면 그가 처음으로 완전히 묘사한 전형적인 이중 정서의 여성인 주인공 나타샤, 어린이의 심리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를 반영하는 어린 넬리, 그리고 고집불통인 악당 발코프스키 등은 그의 주요 소설에 등장할 더욱 인상적인 등장인물의 선구자이다.

 

1862년 여름에 이르자, 도스토예프스키는 〈브레먀〉로 벌어들인 돈으로 오래 전부터 꿈꾸었던 외국 여행을 처음으로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 여행에 자극받아 〈여름의 인상에 대한 겨울의 기록 Zimniye zametki o letnikh vpechatleniyakh〉(1863)이라는 유명한 기사를 통해 여행에서 관찰한 유럽 문명의 악덕 때문에 러시아의 고귀한 운명에 대한 그의 신념이 더욱 강해졌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해에 정부는 〈브레먀〉에 실린 어떤 기사를 스트라호프가 쓴 비애국적인 기사라고 생각하여 〈브레먀〉를 폐간했다. 이 위기가 닥치자, 도스토예프스키는 돈을 빌려 다시 외국으로 나갔다. 지병인 간질 치료가 겉으로 내세운 명목이었지만, 실제로는 독일 비스바덴의 도박장에서 행운을 시험하고, 〈브레먀〉의 기고자이자 이미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폴리나 수슬로바와 밀회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도박과 밀회에서 그의 운은 형편없었지만, 수슬로바와의 관계에서 체험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은 그의 소설에 등장하게 될 이른바 '악마 같은 여인들'을 구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모국으로 돌아온 뒤, 약간의 유산을 받아 형과 함께 〈에포하 Epokha〉라는 잡지를 다시 창간했으며, 이 잡지 창간호에 〈지하 생활자의 수기 Zapiski iz podpolya〉(1864) 제1부를 발표했다. 이 작품의 이름없는 주인공은 합리적인 이기주의가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을 풍자한 것이기도 하지만, 절대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선은 상대적이라고 믿으면서 자신을 날카롭게 분석하는 소외된 개인이기도 하다. 그의 이중성은 의지와 이성의 근본적인 갈등에서 비롯된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자기성찰을 강조하고, 이 자기성찰은 참고 견딜 만한 현실 세계에서 혼란에 빠진 인간의 정신생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성격 묘사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접근방식이 달라진 것을 보여 준다. 본질적으로 〈지하 생활자의 수기〉는 앞으로 그가 쓸 걸작들에 대한 철학적 서론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적·종교적·정치적·사회적 사상과 관련된 걸작 장편소설들의 중심 개념이 이 작품에 거의 모두 나와 있기 때문이다.

 

5. 걸작 장편소설 창작기

1864~65년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불행이 잇따른 시기였다. 아내와 형이 죽었으며, 잡지는 빚더미에 짓눌려 도산했다. 채무자 감옥에 갇힐 위기에 놓이자 그는 수상쩍은 출판업자한테 소설 고료를 선불받아 외국으로 도망쳤다. 이미 상습적인 도박꾼이 되어버린 그는 이번에도 역시 도박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몇몇 여자와 연애를 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고, 외국에서 폴리나 수슬로바를 다시 만났는데 아마 수슬로바와 결혼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수슬로바는 비스바덴에서 그를 버리고 떠났고, 그는 룰렛에서 가진 돈을 몽땅 잃고 옷을 저당잡힐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밀린 숙박비와 모국으로 돌아갈 경비를 빌려 달라고 친구들에게 애원했다. 한 잡지 편집장한테는 〈죄와 벌〉이라는 또 다른 소설을 써줄 테니 선금을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결국 돈이 도착했고, 그는 1865년 10월에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가 〈죄와 벌〉(1866)을 처음 구상한 것은 아마 유형지에 갇혀 있을 때였을 것이다. 이 소설의 구상을 적어 놓은 수많은 작가 노트(그는 그후에도 소설을 쓸 때면 노트에 구상을 적어두곤 했는데, 이 작가 노트들은 그의 창작방법 및 과정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음)에는 그가 이 작품의 예술적 세부에 기울인 끝없는 관심이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부분적으로는 돈을 기본 문제로 삼고 있는 사회소설이다.

 

이 작품의 가난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를 비롯한 급진적 젊은이들의 유물론 사상이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사회에 반항하는 지식인 허무주의자 라스콜리니코프는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데, 그에게는 이성이 삶의 과정을 대신한다. 인도주의적 목적은 사악한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그의 파괴주의적 이론은 결국 그를 살인으로 몰고간다. 감옥에 갇히자 그는 도덕률을 위반하도록 자신을 충동질한 지적 오만을 버리고, 행복은 이성에 바탕을 둔 실존 계획으로는 얻을 수 없으며 고통을 통해 얻어야 한다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마르멜라도프와 그의 아내, 창녀 소냐, 그리고 스비드리가일로프 같은 보조 등장인물들도 뛰어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은 살인을 다룬 흔해빠진 추리소설 속에 주목할 만한 철학적·종교적·사회적 요소들을 집어넣음으로써 평범한 추리소설적 긴장감에 새로운 차원을 더해주었으며, 발표되자마자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소설의 혁신적 기법과 강렬한 문체, 그리고 범죄자와 도덕적 불구자들의 가장 어두운 내면을 밝혀주는 영적 광휘가 독자와 비평가들을 매료시켰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을 완성하기 전에 악덕 출판업자와 이미 맺은 계약을 1개월 안으로 이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계약을 어겼을 경우에는 가혹한 벌금을 물어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에 쫓긴 나머지 안나 스니트키나라는 젊은 여자 속기사를 고용하여 중편소설 1편을 기일 안에 끝냈다. 이렇게 해서 나온 〈도박사 Igrok〉(1866)는 거의 힘들이지 않고 쓴 작품이지만, 도박에 대한 열정과 폴리나 수슬로바와의 애증관계에서 영감을 얻은 힘찬 장면들이 몇 군데 들어 있다.

 

이듬해 그는 이 속기사와 결혼했고, 빚쟁이와 돈을 요구하는 인척들을 피해 아내와 외국으로 가 4년 동안 머물렀다. 두 사람은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살았고, 때로는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는 경우도 많았다. 젊은 아내는 이 모든 고난과 남편의 간질 발작, 끊임없는 노름, 그리고 첫 아이의 죽음을 꿋꿋이 견뎌냈으며 남편과 남편의 천재성에 대한 그녀의 헌신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이 2번째 결혼은 진정한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이었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사건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2번째 걸작 〈백치〉(1868~69)는 이처럼 불우한 상황에서 태어났다. 이 소설의 출발점은 러시아 신문에 보도된 어떤 형사재판 사건 기사였다. 이런 사건들을 그는 '환상적인 사실주의'라고 불렀지만 이것을 소설에 이용할 때는 외부세계가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마음과 정신세계를 강조했다. 그는 평범한 러시아인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지만 '인간 내부의 인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런 문제들을 한 차원 끌어올려 보편적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작가 노트에서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나를 심리학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단지 더 높은 의미에서 사실주의자일 뿐이다.

 

다시 말해 나는 인간 영혼의 모든 심연을 묘사한다." 그는 조카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백치〉의 주요의도는 "절대로 아름다운 인간(즉 도덕적인 의미에서)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절대로 아름다운 인간은 오직 한사람뿐이다. 그는 바로 그리스도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인간의 나약함은 주인공 미슈킨의 순수한 도덕적 성정을 손상시키고, 예판친 집안과 이볼긴 집안, 로고진 그리고 미슈킨의 사랑을 얻기 위해 다투는 유별난 경쟁자 아글라야 및 나스타샤와 그의 관계를 좌우한다. 이 작품에서 이들을 비롯하여 관능·탐욕·범죄에 굴복하는 여러 등장인물들이 미슈킨의 도덕적 신념을 시험하는 장면은 특히 뛰어나다. 이들은 그의 신념과 밝은 성격에 이끌리지만 봉사와 동정심 및 우애를 외치는 그의 계시는 그들을 끌어들이지 못한다. 그의 체험은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들 틈에서 겪었던 체험을 상징한다. 결국 그가 자신의 선량함으로 감동시킨 죄인들은 불행해지고 그 자신은 백치가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직 한 자도 쓰지 않은 장편소설 원고료를 선불받아 이미 다 써 버렸기 때문에 단편소설을 중편소설로 개작하여 다른 출판업자한테서 현금을 받았다. 이 중편소설이 바로 아내를 유혹한 남자에게 복수를 꿈꾸는 배신당한 남편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영원한 남편 Vechny muzh〉(1870)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창조적 예술에서는 특별히 발전한 면모를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그는 〈위대한 죄인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5편의 장편 연작을 쓰겠다는 방대한 계획에 몰두해 있었다. 이 연작의 초안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 소설은 신과 인간에게 몹쓸 죄를 저질렀으나 정신적 순례를 끝낸 뒤 죄를 씻고 구원을 얻는 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삼을 예정이었다. 이 연작은 끝내 씌어지지 않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마지막으로 쓴 3편의 장편소설은 이 작품의 개요에서 사상과 장면 및 등장인물을 빌려온 것이다. 그는 이 3편 가운데 첫번째인 〈악령〉을 1869년 쓰기 시작해 1872년에 끝냈다.

 


〈악령〉의 주요 줄거리는 모스크바의 한 대학생이 배신자로 의심받아 동료 혁명가들의 손에 살해당했다는 선정적인 신문 기사를 계기로 구상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줄거리에 당시 구상하고 있던 〈위대한 죄인의 생애〉의 특징과 인물을 집어넣었는데, 특히 〈악령〉의 중심인물인 스타브로긴의 면모에 그런 특징이 잘 스며들어 있다. 행동과 극적인 사건으로 가득 찬 이 소설에서 그는 혁명 음모가들을 바보와 악당으로 풍자하고 있다. 그들이 희생양으로 삼으려 하는 개심한 샤토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반혁명사상을 반영한다. 이런 반혁명적 태도는 제정 러시아의 미래에 대한 그의 민족주의적 신념을 표현하며, 이 신념은 러시아 정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일부로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악령〉을 지배하는 것은 수수께끼 같은 인물 스타브로긴이다.

 

그의 매력적인 성격은 반역적 급진주의자인 샤토프와 키릴로프뿐만 아니라 흥미있는 자유주의자 스테판 베르호벤스키 노인과 혁명가인 그의 아들 표트르에게도 영향을 주며, 주요한 여자 등장인물인 리자베타와 다리야 및 마리야는 그에게 운명적인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그가 신에 대한 믿음을 잃자 그의 본성인 타고난 선량함은 위축되어버린다. 그가 어린 소녀를 강간하는 것은 그가 악에 완전히 굴복한 것을 상징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교훈적인 의도로 이 작품을 썼지만 이 작품이 과장된 목적소설이 되지 않은 것은 오로지 그의 예술이 갖고 있는 힘 덕분이다. 그는 선정적인 요소와 이념적인 요소를 결합시키기 좋아하지만, 이 작품만큼 뛰어난 예술기법으로 이 요소들을 결합시킨 작품은 드물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악령〉을 끝내기 오래 전에 병에 걸렸고 돈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였지만, 외국에서는 소설을 끝낼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자 걱정이 된 출판업자는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돈을 보내주었다. 이 작품이 예상보다 더 크게 성공한 것은 인상적인 그의 작품 선집 덕분이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다시 사교모임에 초대받기 시작했다. 1873년 그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보수적 주간지 〈그라주다닌 Grazhdanin〉의 편집장이 될 수 있었다. 1년 뒤, 그는 맡은 일이 너무 제한되어 있고 발행인이 지나치게 반동적이라는 이유로 사표를 냈다. 이무렵에는 이미 유능한 아내가 그의 저작을 출판하기 시작하여 상당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1876년에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라주다닌〉지에 기고했던 〈작가일기 Dnevnik pisatelya〉라는 칼럼을 별개의 월간지로 분리했다. 그는 이 간행물을 1년 이상이나 발간했고 1880년과 1881년에도 몇 권을 추가로 발간했다. 이 잡지는 주로 당시의 주요사건에 대한 그의 견해와 문학적 회고담 및 비평으로 채워져 있었으며 소품과 단편소설도 이따금 실었는데, 이 가운데 〈온화한 정신 Krotkaya〉(1876)·〈우스운 인간의 꿈 Son smeshnogo cheloveka〉(1877)은 그의 최고 걸작에 속한다. 그러나 그는 이 잡지를 광범위한 사회·정치·종교 문제에 대한 그의 놀라운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언론과 문학은 그의 마음속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예술과 현실의 상호관계는 일상적인 실존을 관찰한 결과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작가일기〉는 수많은 독자를 끌어모았고 그의 생활과 철학 및 소설, 특히 마지막 2편의 장편소설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작가일기〉에서 그는 〈미성년 Podrostok〉(1875)의 주제를 밝히고 있다. 〈미성년〉은 사생아로 태어난 아르카디 돌고루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아버지 베르실로프의 사랑을 얻으려고 애쓰면서 겪은 모험을 고백한 소설이다. 베르실로프는 한 사람의 이중인격자로서 러시아인은 독특한 민족이고 완전한 세계주의자이며, 유럽 지식인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혁명적 유물론을 신봉하기 때문에 이제 곧 파멸할 운명에 있다는 작가의 확신을 대변해준다. 그는 베르실로프의 이중성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이 주제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처음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이중성을 성찰하여 이중성을 결정하는 심리적 요인들을 관찰하고, 그가 상상력으로 창조해낸 남녀의 생각과 감정 및 행동에 이 심리적 요인들을 반영했다. 그는 몇 개의 곁가지 줄거리 때문에 중심 줄거리가 묻혀 버린 것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 나머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성년〉 속에는 4편의 장편소설이 있소." 비평가들은 대개 이 소설을 그의 다른 작품보다 낮게 평가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1879~80)을 집필하기 시작했을 무렵, 작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성은 러시아 전역에 알려져 있었다. 저명인사들이 그를 방문했고 그는 저명한 편집자이자 작가인 네크라소프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과학 아카데미는 그를 문학부 준회원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1880년에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 추모제에서 행한 연설은 러시아의 세계적 소명을 힘차고 분명하게 예언함으로써 청중들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얼마간 떨어진 작은 휴양지 스타라야루사에서 아내와 두 아이 표도르와 류보프와 함께 조용히 사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이곳에서 그는 규칙적으로 산책하고 글을 쓰는 엄격한 요양법을 지켰으며, 헌신적인 아내는 그가 구술하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속기로 받아썼다. 그가 창작생활을 시작한 이후 줄곧 준비하다시피 한 이 작품은 한마디로 말하면 아버지 살해에 대한 이야기로 심오한 심리적·정신적 암시로 애증의 갈등을 도입하면서 아버지 살해과정을 냉혹하게 전개해간다. 소설 전체를 통해 끈질기게 이어지는 것은 믿음과 신에 대한 추구이며, 이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중심 사상이다. 형제들 가운데 막내인 알료샤는 그리스도교적 이상을 구현한 존재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삶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삶 자체를 사랑한다. 드미트리 역시 삶을 사랑하지만 그 의미는 찾지 못한다. 삶 자체보다 삶의 의미에 더 관심이 많은 이반은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며, 창조자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정신이 형상화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반의 이중성은 인간과 신의 끝없는 투쟁에 집중되어 있다. 그는 반역행위로 시작하여 신의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반란으로 끝을 맺는다. 이반은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신앙을 추구하게 된 동기였던 이른바 저주받은 문제들, 죄와 고통 그리고 이것들과 신의 존재와의 관계에 관심을 갖는다. 이반이 신의 세계를 거부하는 것은 유명한
〈대심문관의 전설〉에 밀도 있게 극화되어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은 소설의 다음 장에서 우주의 조화라는 비밀은 머리가 아닌 가슴과 감정 그리고 믿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조시마 장로의 설교 속에 제시되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알료샤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소설의 속편에서 조시마 장로의 가르침을 실제로 행동으로 보여줄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를 끝낸 지 몇 달 뒤인 1881년 2월 9일(구력 1. 28)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도스토예프스키는 가장 널리 읽히는 19세기 소설가로 손꼽히는데, 그 까닭은 아마 그가 소설 속에서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세대 및 전후세대를 괴롭힌 도덕적·종교적·정치적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극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시인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고, 나치 지배 이전의 한 독일 비평가는 마르틴 루터 다음으로 독일에 가장 큰 정신적 영향을 끼친 인물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라고 말했다.

 

20세기 프랑스의 경우, 소설가 앙드레
말로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자기 세대의 지성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으며,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자신의 실존철학은 이성의 횡포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비난에서 영감을 얻었노라고 말했다. 레닌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대해 "나는 그런 쓰레기를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소련에서도 널리 읽혔으며 유명한 소련 작가들은 그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자신의 이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독자들의 체험을 변형시키는 능력이 작가의 위대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20세기 미국 소설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 소설에서 확신을 갖지 못한 채 회의라는 질병에 허덕이며 신음하는 인물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반영웅적 주인공들로부터 창조된 형상이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감옥으로 끌려갈 때 형에게 쓴 편지 중 발췌 >
형님! 나는 낙담하지 않습니다. 어딜 가도 삶은 삶입니다. 삶은 우리의 내부에 있는 것이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불행 속에 있어도 의기소침하지 않고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생이며 인생의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이 생각이 나의 살과 피가 되었습니다.
여하간 내겐 사랑할 수도 고민할 수도, 기억할 수도 있는 피와 살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처럼 풍부한 정신 세계가 내 내부에 비등한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습니다.

과거를 돌이켜보건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과오와 나태와 무능한 생활을 했는지 후회 막급입니다.
얼마나 시간을 소홀히 했는가. 마음에도 없는 짓을 해왔는가를 생각하면 창자가 잘리는 느낌입니다.
삶은 하늘이 준 선물입니다. 삶 자체가 행복이어야 하는 겁니다.
일순간 일순간을 영원의 행복으로 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형님! 맹세합니다.
나는 희망을 잃지 않고 정신과 육체를 청정(淸淨)하게 지켜나갈 것입니다.
 
<사형직전 삶의 마지막 5분>
어느 젊은 사형수가 있었다.
사형을 집행하던 날.
형장에 도착한 그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5분의 시간이 주어졌다.

최후의 5분...
절체절명의 시간이 초초히 지나고 있었다.
짧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다.

마지막 5분, 이 마지막 5분을 어떻게 쓸까?
그 사형수는 순간 상념에 젖었다.

가족들과 친구들을 생각하는 사이
벌써 2분이 지나버렸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돌이켜 보려는 순간
"아~! 이제 3분 후면 내 인생도 끝이구나."
세월을 금쪽같이 쓰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되었다.

"아~! 다시 한번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
하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순간,
기적적으로 사형집행 중지 명령이 내려와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그는
그 때부터 5분간의 시간을 생각하며
평생 '시간의 소중함'을 간직하고 살았다.

그 결과 날마다....
시간을 5분 단위로 계산하여 살았고,
마지막 삶의 5분처럼 언제나 최선을 다하여
《죄와 벌》,《까라마조프의 형제들》,《영원한 만남》 등
수많은 불후의 명작을 발표한
'도스토예프스키'가 되었다.
 
<죄와 벌>
 

 

 

 

 

 

 

“오늘, 그러니까 12월 22일, 우리는 세묘노프스키 광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십자가에 입맞추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머리 위에서 칼을 빼어들었고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하얀 수의가 주어졌습니다. 이윽고 형이 집행되었고 우리 가운데 세 사람이 처형장 기둥 쪽으로 끌려 나갔습니다. 나는 여섯 번째였고, 세 명씩 호명되었지요. 그러니까 난 두 번째 차례에 속하였습니다. 숨이 붙어있는 시간이 채 1분도 남지 않았습니다. … 그런데 갑자기 집행 중지를 알리는 종이 울렸고 결박되어 있던 사람들이 풀려났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황제폐하가 우리를 살려준다는 특명을 내렸다는 것을 전달했습니다.”


 이 글은 절대왕정의 입장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고골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비사리온 벨린스키(V. Belinsky, 1811~1848)의 ‘사악한’ 편지를 낭독했다는 죄목으로 1849년 11월 13일 사형선고를 받았던 28세의 한 청년이 그의 형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일부입니다.

 이렇듯 극적으로 죽음의 목전에서 겨우 살아난 청년은 그 후 시베리아에 있는 옴스크에서 가족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물론 성서를 제외하고는 책을 읽는 것까지도 제한을 받으며 강제 노동을 해야 하는 4년간의 혹독한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되지요.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한동안 의식을 잃는 간질 발작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육체적 비참함과 정신적 공허뿐만 아니라 천형(天刑)과 같은 질병과도 싸워야 했지요.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그에게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것은 그동안 자신이 지켜온 신념과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청년은 한때 비평가이자 무신론적 사회주의자인 벨린스키에 매료되었고 그의 가르침을 열정적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벨스키를 처음 만난 1846년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난 정열적인 사회주의자로서의 그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재빨리 나에게 무신론을 부르짖어대기 시작했다. 눈부신 통찰력, 극히 깊은 지각 속에서 하나의 관념을 파고들 수 있는 그의 비범한 능력에 나는 놀랐다. 그는 도덕적 원칙들이 모든 것의 기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맹목적으로 그리고 무아지경에 이른 것처럼 사회주의의 모든 새로운 도덕적 원칙들을 믿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사회주의자로서 무엇보다도 기독교를 처단해야만 했다. 혁명은 반드시 무신론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자신이 부정하는 사회의 도덕적 기반을 발생시킨 이 종교를 처치해야만 했던 것이다. 가족, 재산, 개인의 소시민적 도덕 의무, 이런 것들에 대해 그는 강력하게 부인했다.” 


 1840년대, 포이에르바흐와 마르크스를 추종하는 좌파 헤겔주의자들은 헤겔철학 안에 들어있는 추상적인 형이상학과 스스로 단절하고 유물론적 사회주의로의 길을 닦기 시작했지요. 이들에게 종교는 새로운 사회로의 진보를 막는 미신일 뿐이며, 과학이 진리이고 사회주의 사회가 유토피아였던 겁니다. 벨린스키가 바로 그런 사람들 중 가장 극단적인 형태이었지요. 그는 종교 대신 과학에 대한 열정으로 스스로 무장하고 서슴없이 “나는 진리를 획득했습니다. 신과 종교라는 낱말에서 나는 어둠과 불투명함, 사슬과 채찍을 봅니다.”라고 외치는 호전적인 무신론자였습니다. 어느 날 밤, 벨린스키는 청년의 앞에서 마치 시인처럼 외쳤지요.


“당신은 아십니까? 한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사회가 악하고, 경제적인 빈곤이 범죄를 이끌 때, 죄를 범한 사람을 비난하면서 그에게 의무와 뺨을 돌려 댈 것을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말입니다. 당신은 아십니까? 그가 원함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실행에 옮길 수 없는 것을 한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하고 잔인한 짓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청년은 그의 주장이 가진 합리성과 열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참한 용기에 감동하고 그의 극단적인 사회주의 가르침을 그대로 수용했지요. 하지만 4년간의 수용소 생활, 그 말할 수 없이 기나긴 고통의 시간들을 보내면서 청년의 마음속에서는 벨린스키에 대한 의심이 새싹처럼 싹텄고 그와의 치열한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어릴 적부터 신앙으로 받아들인 복음과 벨린스키를 통해 받아들인 사회주의 이론 사이의 투쟁이었지요.

 

 하지만 청년은 벨린스키와 같은 이론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논박할 합리적 근거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그의 편에 서 있다고 말할 준비가 언제나 되어있었지요. 하지만 마음으로는 이미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더 이상 벨린스키에게 굴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1854년 2월 15일, 수용소에서 풀려난 청년은 며칠 후 그가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 복음서를 전해주었던 N. D. 폰비지나(Fonvizina)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N. D., 난 당신이 매우 신앙적이라는 얘기를 많은 사람들로부터 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신앙적이라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 몸소 체험했고 뼈저리게 느끼기에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 그리스도 그분보다 아름답고 심오하며 연민이 넘치며 합리적이고 용기 있고 완벽한 것은 없다고 믿는 것, 아무 것도 없을 뿐 아니라 질투어린 사랑으로도 그런 것은 있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설령 누가 내게 그리스도는 진리 밖에 있다고 증명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나는 진리보다는 그리스도와 함께 남는 쪽을 택할 겁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신념의 변화는 사색을 통한 것이 아니고 체험을 통한 것이며 이론적인 것이 아니고 심증적인 것이기에, 청년은 그 후 오랫동안 내적 갈등을 겪어야만 했지요. 그에게는 자신의 ‘새로운’ 신념을 사색과 이론을 통해서 증명하고 표현해야 할 과제가 주어졌던 겁니다. 다시 말해, 왜 이성과 과학을 숭배하는 ‘합리적인 지식인’들보다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바보 같은 민중’들이 더 지혜로운지, 왜 사회개혁을 위해 고개를 들고 일어서는 혁명가들보다 쓰러진 자들을 돕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민중들이 더 선(善)한지를 - 누구에게보다 우선 자기 자신에게 - 설명해야만 하는 일이 그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졌던 거지요.

 

 그래서 청년은 그 후부터 ‘바로 이 문제’, ‘오직 이 문제’에만 매달려 글을 썼습니다. 그 결과 니콜라이 베르쟈예프(Nicholas Berdyaev)로부터 그를 낳은 것만으로도 ‘러시아 민족의 존재는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라는 평을 들을 만큼 위대한 작가가 되었지요. 이 청년의 이름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881)이고, 바로 이 문제를 다룬 그의 첫 장편소설이 『죄와 벌』(1866)이지요.

 


그는 왜 노파를 살해했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처음에는 「고백」이라는 제목의 1인칭 단편소설로 기획했다가, 생각을 바꾸어 구상 중이던 다른 단편소설 「술주정뱅이」와 결합하여 3인칭 장편으로 구성한 『죄와 벌』의 줄거리는 막대한 분량에 비해 단순합니다.


 페테르부르그에 살며 법학을 전공하는 휴학생 라스콜리니코프가 ‘공기 중에 유유히 떠다니는 이상하고 온전치 못한 사상들’의 지배를 받아 전당포를 경영하는 어떤 노파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지요. 그는 전당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른 선술집에서 알코올 중독자인 퇴역 관리 마르멜라도프를 만납니다. 그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창녀가 되어버린 맏딸 소냐와 그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술주정으로 해대지요. 라스콜리니코프는 만취한 그를 부축하여 데려다주느라 마르멜라도프의 집에 갔다가 가난과 폐병, 그리고 알코올 중독으로 고통 받고 있는 가정의 참상을 목격합니다.

 다음날 라스콜리니코프는 어머니에게서 편지를 받습니다. 편지에는 그의 여동생 두냐가 가정교사로 일하는 집 가장인 스비드리가일로프로부터 음탕한 제안을 받고 억울하게 쫓겨난 사연과 루진이라는 신랑감을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들어있지요. 두냐는 변호사이자 재력가인 루진과 결혼하면 오빠와 가족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와 결혼하려 합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것은 마르멜라도프 가족이 소냐를 창녀로 만들어 연명해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 결혼을 승낙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자신이 여동생과 어머니를 부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더욱 고뇌하게 됩니다.

 그 다음날 온 종일을 ‘열’에 들뜬 상태로 누워있던 라스콜리니코프는 저녁 7시가 지나자 도끼로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전당품과 약간의 돈을 훔치는 데에 성공하지요. 그러나 때마침 일을 마치고 돌아온 노파의 여동생 리자베타와 마주쳐 본의 아니게 그녀마저 살해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에필로그>를 포함하면 총 7부로 구성된 『죄와 벌』의 1부가 끝이 나지요.

 

내용으로 볼 때 여기까지가 ‘죄’에 관한 부분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살인 이후에 나타나는 주인공의 심리적 갈등과 변화, 즉 ‘벌’이 다루어지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에서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죄’에 관한 문제입니다. 무엇보다도 “왜 ‘멋진 검은 눈동자에 짙은 아맛빛 머리털을 가진 미남으로 약간 큰 키에 균형 잡힌 몸매’를 가졌으며, ‘훌륭한 품성을 지닌 지적으로 성숙한 청년’,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했는가?”부터 알아보아야지요.


 표면적으로는 물론 돈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편지를 통해 가족을 위해 결혼해야만 하는 여동생 두냐의 어려운 처지를 듣고, 어머니와 누이를 경제적으로 도움으로써 여동생을 옳지 않은 결혼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범행을 계획하게 된 거지요.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그리 간단하지 않고 복잡한 심리적 요인들이 이 범죄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입니다.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덥고 습한 공기, 혐오스럽고 비열한 범죄의 소굴인 빈민가, 지하실, 선술집 등이 이 끔찍한 범죄의 ‘공범자’라는 거지요. 


 예컨대 러시아 출신의 소르본 대학 문학교수인 콘스탄틴 모출스키(konstantin Mochulskij)는 그의 기념비적 저서 『도스토예프스키; 그의 생애와 작품』에서 『죄와 벌』의 서두 부분에 나오는 구절인 “거리는 지독하게 무더웠다. 게다가 후덥지근한 공기, 혼잡, 여기저기에 놓인 석회석, 목재와 벽돌, 먼지, 근교의 별장을 가지지 못한 페테르부르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독특한 여름의 악취, 이 모든 것들이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청년의 신경을 한꺼번에 흔들어 놓았다.”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대도시의 독기와 그 독기에 감염된 도시의 간헐적인 호흡은 가난한 대학생의 뇌를 파고들어 살인에 대한 생각을 낳는다. 술주정, 가난, 악덕, 증오, 미움, 타락 같은 페테르부르그의 어두운 밑바닥이 살인자를 희생자의 집으로 인도한다. 범죄가 저질러지는 무대, 고리대금업자가 살고 있는 구역과 건물은 주인공의 마음속에 <추악한 꿈>에 못지않은 <극도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이제 그는 <시험해 보기> 위해 그곳으로 간다.”     


 이어서 그는 『죄와 벌』에 “여섯 걸음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새장 같은 방은 먼지 때문에 누렇게 퇴색한 벽지가 그나마 여기저기 떨어져 있어서 보기에도 초라했다.”라고 묘사되어 있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노란색 작은 방’에 대해서도 언급하지요.


“바로 이것이 라스콜리니코프의 <사상>이 지니는 물질적 외양이다. 그의 방은 금욕적인 수도사의 승방이다. 그는 자기 방구석, 자신의 <지하방>에 틀어박힌 채 <관> 속에 드러누워 생각에 빠진다. 그의 삶은 온통 사물에 몰입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게 외적인 세계, 사람들 그리고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사심이 없으면서도 부에 대해 꿈꾸고, 이론가이면서도 실천적 행동을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다. … 그런 비좁고 비참한 골방에서만이 범죄에 대한 야만적인 생각이 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사유가 이전에 지니고 있던 도덕관을 무너트리고, 인간의 심리적 조화를 깨트린다. … <노란 색 작은 방>은 시기심으로 가득 찬 삶, 악마적인 삶, 고독한 삶의 상징이다.”   


 이렇듯 라스콜리니코프의 범죄를 주인공의 ‘심리적 억압’에서 찾는 모출스키의 입장은 이 작품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언급과도 일면 맞아 떨어집니다. 1865년 9월, 작가는 아직 『죄와 벌』을 구상하는 단계에서 <러시아 통보>라는 잡지의 발행인인 마하일 카트코프에게 보낸 편지에 “이 작품은 한 범죄에 대한 심리적 해석입니다.”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해석은 단지 한 측면에서만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내면에는 이보다 훨씬 근원적이고도 본질적인 동기가 깊숙이 숨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 ‘아드리아네의 실타래’를 우리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죽여 나쁜 방법으로 모은 그녀의 재산을 자신이 인류를 위해 봉사하게끔 학비로 사용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사회정의라고 생각하게 되는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우연히 들른 싸구려 술집에서 옆 자리에 앉은 어떤 대학생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되지요.


“한편에는 어리석고, 의미 없고, 하찮고, 못됐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아니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해만 끼치는 그런 병든 노파가 있어. 그 노파는 자기가 왜 사는 줄도 모르고, 또 그렇지 않아도 얼마 안 있으면 저절로 죽게 될 거야. … 다른 한편에는, 도움을 받지 못하면 좌절하고 말 싱싱한 젊은이가 있단 말이야. 그런 젊은이는 도처에 있어! 그리고 수도원으로 가게 될 돈으로 이루어지고 고쳐질 수 있는 수백, 수천 가지의 선한 사업과 계획들이 있단 말이야! 어쩌면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올바른 길로 갈 수도 있고, 수십 가정들이 극빈과 분열, 타락, 성병 치료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도 있어. 이 모든 일이 노파의 돈으로 이루어질 수 있단 말이야. 그래서 빼앗은 돈의 도움을 받아 훗날 전 인류와 공공의 사업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는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겠니? 그 작은 범죄 하나가 수천 가지의 선한 일로 보상될 수는 없는 걸까? 한 사람의 생명 덕분에 수천 명의 삶이 파멸과 분열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고, 한 사람의 죽음과 수백 명의 생명이 교환되는 셈인데, 이건 간단한 계산이 아닌가!”     


 뒤이어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콜리니코프가 그동안 이런 식의 말들을 한두 번 들어 본 것은 아니었지만, “술집에서의 이 하찮은 논쟁은 장차 사건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그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카트코프에게 보낸 위의 편지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대학에서 쫓겨난 하층계급 출신의 가난한 한 젊은이가 경솔함과 관념의 우유부단함에 시달리던 중 공기 중에 유유히 떠다니는 이상하고 ‘온전치 못한’ 사상들의 지배를 받게 되고, 구역질나는 상황에서 빠져나오기로 결심하지요.” 


 요컨대,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콜리니코프가 끔찍한 살인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심리적 억압’ 때문만이 아니라 어떤 ‘합리적인 주장’에도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는 그 ‘온전치 못한 사상들’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것이 청년시절 도스토예프스키가 주위의 여러 사람들에게서, 특히 자신의 초기 작품인 『가난한 사람들』
(1846)을 사회소설로 평가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도록 도왔던 비평가 벨린스키를 통해 건네받은 일종의 사회주의 사상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지요. 당시 사회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형태, 곧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훗날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r, 1848)'에서 ‘유럽을 떠도는 악령’이라고 표현했던 아직 정리되지 않은 초기형태였습니다.

 


유럽을 떠돌던 악령들

 18세기 말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생산의 동력화와 기계화를 통한 미증유의 생산력 확대라는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각종 사회문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무엇보다도 산업혁명은 유럽의 대다수의 사람들을 자신의 노동력만이 유일한 생계수단인 ‘무산계급(proletarian)’으로 만들었지요. 19세기 초, 영국 전체인구의 4/5, 그리고 유럽 전체인구 중에 약 9천만 명이 프롤레타리아트 신분으로 전락하였던 겁니다. 도시에는 부랑자, 실업자, 범죄자, 거지, 알코올 중독자와 같은 소위 ‘위험한 계급’이 산업혁명의 여파로 넘쳐났던 거지요.


 한편, 1789년 일어난 프랑스혁명의 실망스러운 결과는 사회주의 탄생과 성장에 또 다른 여건을 만들어주었지요. 프랑스 대혁명이 성공한 다음 1789년 8월 ‘국민의회’가 채택한 소위 ‘인권선언’의 본명인 ‘인간과 시민의 여러 권리에 관한 선언(Declaration des droitsde l'homme et du citoyen)’에 나타나듯이, 여기에서는 ‘인간’과 ‘시민’이 구분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1조에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명시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권리, 곧 ‘법’ 앞에서의 평등만을 의미했지요.


 이러한 평등은 사회, 경제적 평등도 아니었고, 정치적 평등도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참정권은 ‘모든 인간’에게가 아니고 ‘시민’에게만이 주어졌지요. 개인의 소유권이 투표권 등 시민 권리의 전제 조건으로 등장함으로써 노동자들을 포함한 많은 무산계급들이 시민사회에서 소외된 것입니다. 물론 여성도 제외되었지요. ‘인권선언’은 기본적으로 불평등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무산계급들은 단지 ‘법 앞에서 평등’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조건 속에서의 평등, 예컨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평등을 보장하길 원했지요. 그리고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사회주의 사상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산업혁명이 만든 무산계급과 모든 인간의 전면적 평등이라는 숙제를 던진 프랑스 대혁명이 사회주의가 탄생하고 뿌리내린 토양이었던 겁니다.     


 1830년을 전후하여 ‘사회주의’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1848년 혁명을 전후하여 유럽에서는 ‘반동적 사회주의’, ‘부르주아 사회주의’, ‘무정부적 사회주의’, ‘유토피아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대중적 지위확보를 위해 서로 경쟁하였지요. 청년시절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영향을 준 사회주의는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사회주의들이었던 겁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영국의 오웬, 프랑스의 프리에, 그리고 생시몽 등 초기 사회주의자 3인방이 주장하면서 널리 러시아에까지 퍼져나갔던 유토피아 사회주의(utopian socialism)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되지요. 모출스키에 의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주로 생시몽의 『새로운 기독교 정신』, 카베의 『예수를 따르는 진정한 기독교』, 프루동의 『안식일의 집전』과 같은 책들을 친구에게 빌려 읽었답니다. 그 영향이 『죄와 벌』에도 드러나 있지요.


 예컨대, “한 사람의 생명 덕분에 수천 명의 삶이 파멸과 분열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고, 한 사람의 죽음과 수백 명의 생명이 교환되는 셈인데, 이건 간단한 계산이 아닌가!”라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주장은 공리주의를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인 영국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웬(Robert Owen, 1771~1858)에게서 그 근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다음 작품인 『악령』
(1871)의 중심 테마이기도 하며, 『죄와 벌』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사건을 맡은 예심 판사 포르피리에게 설명하는 ‘새로운 예루살렘’ 역시 그렇지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훗날 「공산당 선언」에서도 언급되는 ‘새로운 예루살렘’이라는 용어는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꿈꾸던 - 예를 들어 푸리에의 팔랑스테르(phalanstre), 카베의 아르카디아(arcadia)와 같은 - 유토피아들의 총칭이었던 겁니다.


 이와 같이 청년시절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자신의 표현대로 ‘공기 중에 유유히 떠다니는’ 이러한 사회주의 사상들을 자연스레 접하였지요. 뿐만 아니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가 “사회성, 사회성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이것이 나의 좌우명이다!”라면서 “만일 인민의 행복을 위해 수십만 명의 목을 잘라야 한다면 그는 그 역할을 기꺼이 맡을 각오가 되어있다.”라고도 장담했던 벨린스키의 과격성까지 수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정의가 구현되는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는 어떤 법률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자연스레 도달하게 된 것이지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이 젊은 시절 한때 가졌던 바로 이 생각을 라스콜리니코프가 저지른 범죄의 사상적 배경으로 설정했던 것입니다. 작품에는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다양한 분야에서 더 좋은 것의 이름으로 현재의 것을 파괴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사상을 위해 시체와 피를 건너뛰어야 한다면, 자기 내면의 양심에 따라 피를 뛰어넘는 걸    스스로에게 용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라스콜리니코프는 단순히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심리적으로 억압받는 자가 아니라 자신이 구축한 사상과 논리로 무장하고 기존의 도덕과 종교 그리고 사회에 반항하는 일종의 혁명가적 기질을 가진 것이지요. 그리고 그가 행한 끔찍한 살인행위 역시 단순한 ‘범죄’라기보다 일종의 ‘시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라스콜리니코프는 『정기 논단』에 실린 그의 논문 「범죄에 관하여」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했지요. 이에 대해 예심판사 포르피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문제는 이 분의 논문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으로 나뉘고 있는 것 같다는 거야. 평범한 사람들은 순종하며 살아야만 하고, 법을 어길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아. 왜냐하면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니까. 비범한 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권리와 법률을 위반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비범하기 때문이라는 거야. 만일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당신의 논문은 그렇게 주장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러자 라스콜리니코프는 고대 스파르타의 법과 시민 생활 규범을 정했던 리쿠로고스나 구약성서에 나오는 솔로몬, 그리고 마호메트와 나폴레옹까지 예로 들면서 새로운 사회와 법률을 위해서는 낡은 법률을 파괴해야만 하는데, 만일 유혈만이 그들을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이 허용된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제 생각으로는 만일 케플러와 뉴턴의 발견이, 그 발견을 방해할지도 모르고 혹은 그 발견의 길에 장애로 작용할 수도 있는 몇몇의 혹은 수십 명, 수백 명의 사람들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도저히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없는 상황이라면, 뉴턴은 자기 발견을 전 인류에게 알리기 위해서 그런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을 제거해야 할 …… 권리가 있고, 또 반드시 그렇게 하는 것이 의미 있는 행동일지 모른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소위 ‘초인사상(超人思想)’으로 일컬어지는 라스콜리니코프(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독특한’ 사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라스콜리니코프가 한 행위는 결코 ‘범죄’가 될 수 없지요. “나는 나폴레옹이 되고 싶었지. 그래서 죽였어.”라는 그에게 살인행위는 - 마치 나폴레옹이 전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했지만 죄가 되지 않는 것처럼 - 법을 초월한 ‘어떤 의미 있는 행동’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훗날 심지어는 자수를 한 다음 유형생활을 할 때까지도 “악행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가? 나의 양심은 편안하다.”라고 고백할 만큼 한 점의 후회나 양심의 가책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커다란 의문에 부딪치게 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왜 이 작품의 제목을 ‘죄와 벌’이라고 했는가? ‘새로운 예루살렘’을 여는 나폴레옹이 되려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해악만 끼칠 뿐 아무 쓸모도 없는 노파 하나를 죽였다고 해서 무엇이 죄라는 말인가? 그리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2장부터 6장까지,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외형상으로도 죄의 문제를 다룬 1장의 5배나 되는 분량을 그의 죄에 대한 ‘벌’에 할애했는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는 ‘죄’, 곧 ‘범죄’의 의미를 초월한 죄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이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죄와 벌』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후기 5대 장편소설로 불리는 작품들, 곧 『백치』
(1868), 『악령』, 『미성년』(1875),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79)을 바로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죄란 무엇인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러시아 정교식 가정교육을 받았지요. 그의 가족들은 평소에는 아버지가 일하는 병원의 사제로부터 종교 교육을 받았고, 매년 성 세르게이 축제 때면 트로이샤(Troytsa)로 순례를 가서 2~3일간 그곳에 머물며 모든 의식에 참여했답니다. 어린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에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고, 생애 마지막까지 이러한 경험들에 대해 감사했다지요. 그는 『작가일기』(1873~77)에 이런 글을 남겼답니다.


 “가족 안에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통해 전해오는 무엇인가 성스럽고 소중한 것이 없다면 우리는 살 수조차 없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러시아 정교에서는 ‘성스러움’을 경험하기 위한 예배에 치중하는 반면에 교리나 철학적 신학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지요.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가 받은 종교 교육은 젊은 날 그가 벨린스키의 무신론적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을 때, 그것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이 되지 못했던 겁니다. 하지만 A. B. 깁슨(A. Boyce Gibson)이 그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에서 언급했듯이, 시베리아에서의 4년간 혹독한 수용소 생활은 그에게 ‘공기 중에 유유히 떠다니는 이상하고 온전치 못한’ 사상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었지요. 깁슨은 이렇게 썼습니다.   

 


“시베리아는 흔적을 남겼다. 그곳은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그리스도교적 확신을 강화시키는 무엇인가를 했다. 무엇보다 시베리아는 다른 선택의 여지를 무너뜨렸고 그리스도적 확신이 자랄 수 있는 경험을 제공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수용소 생활 4년 내내 삶의 벼랑 끝에 서서 유토피아 사회주의 서적 대신 성경을 읽었고, 혁명을 외치는 지식인 대신 생명을 보살피는 민중들을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무엇이 ‘죄’인지를 비로소 깨달은 거지요. 그는 인간이 자신을 믿고 ‘자기중심적으로 되는 것’이 바로 죄이며, 바로 그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러시아 정교를 포함한 동방정교, 그리고 서방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모두 함께 입을 모아 말하는 ‘기독교적 죄’의 의미이기도 하지요.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보시죠! 신은 에덴동산에 만물을 창조하고 그 모든 것을 아담에게 맡기지요. 그리고 말하길,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세기 2 : 16~17)고 당부합니다. 하지만 신이 만든 짐승들 중 가장 간교한 뱀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의 눈이 밝아 하나님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 3 : 5)라며 그 실과를 따먹게끔 유혹했지요. 아담은
필요한 모든 것을 갖고 있었고 괴로워해야 할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하나님같이(sicut Deus)’ 되고 싶었기 때문에 그것을 따먹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신에게 추방당하게 되지요.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란 ‘신을 거역하고 떠나는 것’, 한마디로 ‘신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는 존재이다’라는 뜻을 가진 신의 이름 ‘야훼’(yhwh)가 지시하듯 신은 또한 ‘존재’이기에, 죄 또한 ‘존재를 떠나는 것’ 또는 ‘존재로부터 돌아서는 것’ 곧 ‘존재상실’을 뜻하기도 하지요.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학에서처럼 신을 진리[眞]라고 한다면 죄란 진리로부터 돌아서는 것, 신을 선함[善]이라고 한다면 선으로부터 돌아서는 것, 신을 아름다움[美]이라고 한다면 미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죄, 곧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어떤 도덕이나 법을 범한 것이 아니므로 ‘도덕론적 죄’ 내지 ‘법률상의 죄’가 결코 아닌 겁니다. 이러한 죄는 하나의 존재물인 인간이 그의 바탕인 ‘존재’, 곧 신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기에 ‘존재론적 죄’라고 하지요. 그리고 이 돌아서는 존재론적 행위는 단 한 번의 ‘돌아섬’입니다. 따라서 살인, 도적질, 간음과 같은 도덕론적 또는 법률상의 죄들이 반복하여 복수적(複數的)으로 저질러질 수 있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지요.


 인간은 신에게서 ‘단 한 번’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폴 틸리히도 그의
『그리스도교 사상사』에서 “죄는 죄들(sins)이라고 복수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죄의 개념은 단지 도덕주의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라는 말로 기독교적 죄의 ‘일회적인 돌아섬’ 현상을 강조했지요. 그런데 자고로 모든 돌아섬은 새로운 방향을 향하게 되어있지요.


 신에게서 돌아선 아담은 곧바로
눈이 밝아져 자신의 ‘벌거벗음’을 알고 부끄러워했습니다.(창세기 3 : 7) 이것은 그가 그만큼 자신의 ‘무엇-됨’, 곧 존재물로서의 자기 자신의 ‘어떠함’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지요. 요컨대 무엇이 자신에게 선하고 악한지를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뱀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의 눈이 밝아 하나님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는 말은 곧 자신에게 대한 선악을 알게 된다는 뜻이었던 것이지요.

 그럼으로써 ‘신에게서 돌아섬’이라는 죄의 속성은 곧바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섬’이라는 새로운 방향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또한 ‘존재에 대한 관심의 상실’은 동시에 ‘존재물에 대한 관심의 획득’으로 나타난 겁니다. 이것이 죄의 또 다른 속성이며, 인간이 세상의 모든 존재물들을 향해 ‘탐욕적인’ 이유인 겁니다. ‘신에게서 돌아섬’, ‘존재에 대한 관심의 상실’이 죄의 원초적 내지 일차적 속성이라면, ‘자기에게로 돌아섬’, ‘존재물에 대한 관심의 획득’이 죄의 부수적 내지 이차적 속성이라는 거지요.


 돌이켜 보시죠. “하나님같이 되리라”(Eritis sicut di)가 최초의 인간 아담을 죄로 이끌고 간 원인이었습니다. 때문에 기독교 신학에서는 ‘죄의 원인’을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높이려는 것’으로 규정하지요.
예컨대 위대한 신학자이자 탁월한 철학자이기도 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1)는 이렇게 인간이 신처럼 되려고 자기를 높이는 마음을 라틴어로 ‘슈페르비아(superbia)' 곧 자만(自慢)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의 저서 『자연과 은총에 관하여』에서 “모든 죄의 시작은 자만이다. 그리고 자만의 시작은 사람이 신에게서 돌아서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했지요.


 그런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신에게서 돌아서는 인간은 언제나 곧바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서기 때문에,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자만’을 다른 말로 ‘자존심’(Pride)이라고 표현했고, 독일출신 저명한 신학자인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역시 라틴어로 ‘휘브리스(hybris)’, 곧 스스로를 높이는 ‘자기고양’(自己高揚, self-elevation)이라 불렀지요.


 한마디로, 아담은 자만해져서 자기를 스스로 높여 신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따먹고 신으로부터 자신에게로, 존재에서 존재물에게로 돌아선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라 불리는 이 ‘돌아섬’ 곧 ‘존재상실 사건’은 인간이 ‘신중심주의’에서 ‘자기중심주의’로, ‘존재중심주의’에서 ‘존재물중심주의’로 돌아선 최초의 계기였지요. 따라서 기독교 신학에서는 자만에 의해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것’(Secundum se ipsum vivere)이 곧바로 죄인의 특징이고, 반대로 순종에 의해 ‘신 중심적으로 사는 것’(Secundum Deum vivere)이 의인의 특징이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에게 그가 왜 노파를 죽였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에 ‘특징적으로’ 잘 드러나 있지요.


“… 난 말이야, 소냐, 궤변 없이 그냥, 자신을 위해서,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죽이고 싶었어! 이 점에 대해서 나는 나 자신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어! 어머니를 돕기 위해서 죽인 게 아냐. 그것 헛소리지! 재산과 권력을 얻어서 인류의 은인이 되고 싶어서 죽인 것도 아냐. 그건 거짓말이야! 나는 그냥 죽였어. 나 자신, 나 한 사람을 위해서 죽인 거야. … 중요한 것은, 죽였을 때 내게 필요한 건 돈도 아니었다는 거야. 소냐, 돈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이 필요했어. … 나는 그 때 알고 싶었던 거야. 어서 알고 싶었어. … 내가 선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아니면 넘지 못하는가! 나는 벌벌 떠는 피조물인가, 아니면 권리가 있는가…. … 그 노파를 죽인 것은 악마이지 내가 아냐….”


 라스콜리니코프는 돈을 위해서도, 어머니를 위해서도 아니고 오직 그가 인간을 죽일 권리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살인을 했다고 하지요. 즉, 자신이 ‘초인’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는 한마디로, 자기를 높여 인간을 뛰어넘어 신의 영역에 접근하려 했던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죄라고, 노파를 죽인 행위는 ‘죄’ 다음에는 언제나 따라오기 마련인 ‘악’에 불과하다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하고 있는 거지요.


 이 작품에 ‘죄’라는 의미로 사용된 러시아어 ‘prestuplenie’는 본래 ‘어떤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답니다. 그렇다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단어에 담은 의미는 그 ‘어떤 도덕이나 법률의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일반적인 의미가 전혀 아니지요. 다시 말해 라스콜리니코프가 지은 ‘죄’는 살인이라는 법률상의 ‘범죄’가 아니라,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죄’, 라는 겁니다. 따라서 그가 받게 될 ‘벌’도 마땅히 자기를 높여 신과 같이 되려고 인간을 뛰어넘으려 했던 자가 받는 고통, 곧 기독교적인 의미의 ‘벌’이 되지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보시지요.

 




『죄와 벌』은 죄보다는 오히려 벌에 관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량으로만 보아도 그렇지요. 에필로그(끝맺음 말)를 포함하여 모두 7부로 구성된 이 방대한 작품에서 죄는 100쪽쯤 되는 1부에 다 드러납니다. 나머지 약 700쪽은 모두 그 죄에 대한 지옥체험과 같은 벌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기나긴 소설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겪는 심리적 갈등과 고통을 통해 죄에 대한 벌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지를 생생하게 그려내는 데에 가진 힘을 다 쏟았지요. 그 결과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니체도 “도스토예프스키는 내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심리학자였다.”라고 경탄했답니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 평전을 쓴 러시아 출신의 소르본 대학 문학교수인 콘스탄틴 모출스키(konstantin Mochulskij)는 이렇게 말했지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세계문학사의 위대한 기독교 작가들인 단테, 세르반테스, 밀턴, 파스칼의 옆 자리를 차지한다. 단테처럼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지옥의 모든 단계를 통과한다. 그런데 이 지옥은 『신곡』의 중세적 지옥보다 더 끔찍하다.”


그럼 지금부터 알아보도록 하지요.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죄와 벌』에 나타난 그 벌이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것인지를.

 

 

벌은 시작되었다

 

라스콜리니코프에게 가해지는 끔찍한 벌은 2부와 함께 곧바로 시작합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 라자베타를 살해한 이후 신경발작과 열병으로 앓아눕지요. 다음날 정신이 들자 범행 증거물이 될 만한 것들을 처리하지 못한 것을 알고 참을 수 없이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뭐야! 정말 벌써 시작되었다는 말인가? 형벌이 벌써 이렇게 찾아왔단 말인가? 그래 정말로 그렇구나.”라며 두려움에 떨기도 하지요.

이때 경찰서에서 소환장이 날아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범죄 사실이 발각된 것이 아닌가 걱정하지만 사실인즉 밀린 집세 때문에 집주인이 고소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는 사실을 안 다음 일단 안도했지만 경찰서를 나오다 자기가 저지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신경발작을 일으켜 졸도합니다. 이것이 나중에 예심판사 포르피리 페트로비치에게 의심을 사게 되는 계기가 되지요.

집에 돌아온 라스콜리니코프는 훔친 돈이 든 지갑과 전당품들이 방 안 구석의 벽지 뒤에 그대로 있는 것을 생각해내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강가로 나갑니다. 그러다가 겁에 질려 그 물건들을 그냥 어떤 집 마당 한 구석에 박혀있는 바위 밑에 숨기지요. 그러고는 한편으로는 “그래, 시작되었다는 말이지. 이렇게 시작되었단 말이지. 노파니, 새로운 삶이니 하는 것은 다 악마에게나 잡혀가라고 해! 맙소사! 이 모든 일이 얼마나 추한가!”라고 범행을 후회합니다.

그러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만일 정말로 네가 이 모든 일을 의식적으로 행한 것이라면, 바보스럽게 어쩌다가 저지른 게 아니라, 만일 진정으로 어떤 일정하고 확고한 목적이 있었던 거라면, 너는 왜 지금까지 지갑을 들여다보지도 않았고 네가 무엇을 훔쳤는지 알아보지도 않았느냐?”라고 스스로를 다그치기도 하지요. 그리고는 이내 “내가 병이 나서 이러는 거야.”라며 건강이 회복되고 나면 나아질 것이라고 자위도 합니다.

모출스키가 『도스토예프스키; 그의 생애와 작품』에서 언급했듯이, 라스콜리니코프의 내면에는 이미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격이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자기가 저지른 범죄에 두려워 겁먹고 실수를 연발하며 졸도하는 ‘나약한 인격(the weak personality)’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한 일을 정당화하 잔인하고 오만하고 고독한 ‘강한 인격(the strong personality)’이지요. 이 두 인격의 대립 때문에 라스콜리니코프는 사흘 동안 계속 열병과 기억상실 속에서 보냅니다. 그러나 그가 친구인 라주미힌의 도움으로 마침내 의식을 회복하고 병석에서 다시 일어났을 때는 두려움, 연약한 마음, 육체의 병으로 나타나던 나약한 인격은 사라지고 강한 인격만 남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동물적인 교활함”, “전례 없는 대담성”, “악마적 교만”을 느낍니다. 그는 선술집에서 만난 경찰서 서기관 자메토프에게 자기가 범인이면 어쩔 거냐고 따지기도 하고, 범죄 현장에 찾아가 둘러본 다음 자기 이름과 주소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예심 판사 포르피리가 자기를 의심하고 있는지를 떠보기도 하지요. 그리고 외칩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이지! 그 늙은 할망구와 함께 나도 죽은 것은 아니야! 천단에서 고이 잠드시길. 그걸로 된 거다. 노파도 이제 평안히 쉬셔야지! 이성과 빛의 왕국이 도래했다! … 의지와 의 왕국이 온 거야. … 어디 두고 보자. 한번 겨뤄보자고.”

그런 가운데 소냐의 아버지 마르멜라도프가 마차에 치여 죽게 되지요. 그것을 우연히 목격한 라스콜리니코프가 그의 임종을 지켜주어 소냐와 더욱 가까워집니다. 한편 라스콜리니코프의 여동생 듀냐는 변호사 루과의 결혼을 위해 어머니와 함께 페테르부르그로 올라오지요. 그리고 루과의 결혼을 완강하게 반대하는 오빠와 루을 화해시키기 위해 두 사람이 만나는 자리를 만듭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듀냐는 루의 속물근성과 본색을 파악하게 되고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지요. 반면에 듀냐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반한 라주미힌은 듀냐와 함께 단란하게 살아갈 꿈을 꿉니다.

그러나 자신은 이미 평범한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라스콜리니코프는 절망하여 소냐를 찾아가지요. 그리고 그녀에게 『성경』 가운데 라자로가 부활하는 장면을 읽어달라고 합니다. 그의 내면에 한편으로는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싹트고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지요.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에게 다음에 만났을 때 누가 살인자인지를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옆방에서 가정교사로 일하고 있던 여동생 두냐를 욕보였던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지요. 그는 아내가 죽은 후, 듀냐를 다시 유혹하려고 페테르부르그로 온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다른 ‘악의 짝’이라는 것입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노파를 죽여 그녀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낫다는 사회주의적 이상을 내세워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죄를 지은 사람이라면,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개인의 욕망과 쾌락을 최선으로 여기는 자유주의 이상을 내세워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죄를 짓는 인물이지요.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자유와 쾌락만을 추구하는 호색한입니다. 그는 자신의 정욕과 쾌락을 위해 자기 부인을 살해하고, 하인을 학대하여 죽게 하고, 14세 어린 소녀를 능욕하여 자살하게도 했지요. 그러나 라스콜리니코프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악당은 아닙니다. 그는 듀냐에게 돈을 기부하며 소냐의 집안을 도와주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결코 선을 행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오직 자신의 자유와 쾌락을 위해서입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자만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라스콜리니코프와 스비드리가일로프, 두 사람은 같은 원인에 의해 죄를 짓는 악인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요. 그래서 둘 모두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악행들을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이 전혀 없는 것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악의 짝’이 되는 것이지요.

스비드리가일로프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우리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우린 한 나무에서 열린 두 열매라고 했던 것입니다.”라고 말하지요. 두 사람 사이에 다른 것이 있다면 결과인데 사회적 이상을 추구하려고 범죄를 저지른 라스콜리니코프에게는 내면의 고통과 갈등이 나타나는 반면,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려고 범죄를 저지른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는 권태가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에게 범죄 사실을 고백하는 것을 들은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그것을 미끼로 듀냐와 다시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요. 하지만 듀냐가 완강하게 거부하자, 완력으로나 돈으로는 그녀의 마음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절망과 권태에 지친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결국 권총으로 제 머리를 쏘아 자살하지요.

 

이성이 어떻게 광기를 낳는가

 

여기에서 잠시 돌아봅시다. 우선 죄가 무엇이었는지를. 그래야 벌을 알게 되기 때문이지요. 지난번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통해서 본 ‘죄와 벌’의 의미(1)>에서 설명했듯, 라스콜리니코프의 죄는 ‘자만(superbia)’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말하는 자만은 존재론적인 것으로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신처럼(sicut Deus)’ 높이려는 마음이지요. 그럼으로써 인간이 지켜야 하는 경계를 뛰어넘는 것을 말하지요.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작품에서 ‘죄’라는 의미로 사용한 러시아어 ‘prestuplenie’도 본래 ‘어떤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마음을 처음으로 가진 사람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아담이었지요. 신은 아담에게 모든 것을 허락했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만은 따먹지 말라고 경계했는데, 그는 신처럼 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 이후 인간들은 똑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다 해서 기독교에서는 ‘원죄’라고 부르지요. 원죄는 ‘최초의 죄’ 내지 ‘근원적인 죄’라는 뜻인데,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의 모든 악행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지요.

4년간에 걸친 시베리아 유형생활 중에 『성서』에 몰두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담의 이야기에서 ‘모든 악행의 근원으로서의 죄’라는 개념을 얻어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자 사회개혁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외치던 무신론적 사회주의자 벨린스키를 추종했던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지요. 뿐만 아니라 그가 살고 있던 당시 시대정신이었던 계몽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눈이 뜨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18세기로 접어들며 서구는 계몽(Enlightenment)의 물결에 휩싸였습니다. 계몽이란 ‘이성의 빛으로 밝게 함’을 말하지요. 즉, 합리적인 사고와 그것을 통해 얻어진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그동안 사람들을 지배해오던 사회적 ․ 정치적 ․ 종교적 편견이나 미신, 잘못된 생각들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디드로(D. Diderot, 1713~1784), 달랑베르(J.R. d'Alembert, 1717~1783) 같은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은 우선 ‘18세기 가장 야심적인 출판 사업’이었던 백과사전을 만들었습니다. 『과학, 예술, 직업에 관한 이성적인 백과사전』라는 긴 이름이 붙여진 이 책에서, 그들은 신의 말씀으로 인간과 세계를 설명한 『성경』을 대신해 인간의 이성으로 그것들을 설명하려고 했지요. 그 결과, 한때 ‘학문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신학은 단지 하나의 학과로서 취급되었고, 과학이 대신 그 영광스럽던 자리에 올랐습니다.

계몽주의자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지요. 곧이어 신의 말씀에 의해 만들어지는 ‘하나님의 나라[天國]’ 대신, 인간의 이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민주주의 사회’를 설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루소(J.J. Rousseau, 1712~1778),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 볼테르(Voltaire, 1694~1778) 같은 사상가들이 이 일을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추진했지요.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1787~1799)이 일어나 드디어 그들의 꿈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대혁명 직후부터 민주주의는 곧바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로 갈라지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계몽주의자들은 각각 자신의 방법으로 민중들을 계몽하며 그들의 ‘지상 천국’을 만들어갔지요.

결국 백과사전의 편찬과 프랑스 대혁명은 18세기 계몽주의를 상징하는 두 가지 커다란 사건이자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알리는 일종의 혁명이었습니다. 즉, 계몽주의자들에게 백과사전은 ‘새로운 성경’이었고, 민주 사회는 ‘지상의 천국’이었습니다. 계몽이라는 깃발을 치켜들고 인간의 이성이 신의 자리에 올라앉은, 실로 놀라운 혁명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 이래로 부단히 꿈꾸어온 인류의 염원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러나 빛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어둠도 함께 하는 법인지라, 바로 이것이 ‘모든 악행의 근원으로서의 죄’인 자만의 또 다른 시작이었지요. 계몽주의적 이성은 한편으로는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쓰며 꿈꾸었던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적 결합과 화해”를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을 동반한 ‘전체주의적 획일화와 지배’를 꾸준히 추진했습니다. 어찌 보면 이율배반 같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였지요.

계몽이란 어쨌든 먼저 깨인 사람들이 아직 깨이지 않은 사람들을 깨이게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 할수록 폭력적 지배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의 극단적인 형태가 “만일 인민의 행복을 위해 수십만 명의 목을 잘라야 한다면 그는 그 역할을 기꺼이 맡을 각오가 되어 있다.”라는 벨린스키의 섬뜩한 말에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계몽이 어떻게 야만적일 수 있는가? 이성이 어떻게 광기를 낳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근대성의 특성이자 폐해를 묻는 이 ‘특이한’ 질문들은 20세기로 넘어오면 다음과 같이 계속되지요. 과거 어느 세기보다 더 많은 문명의 해택을 누리며 휴머니즘을 외치던 20세기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집단학살들이 있었는가? 혁명기의 러시아나 2차대전 중 나치 점령지에서 행해진 일천만 명이 넘는 인간 학살들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발칸반도에서 1941년부터 계속되어 그때마다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르비아인들과 크로아티아인들 간의 인종청소가 또 어떻게 가능했던가? 20세기 안에 벌어진 집단학살 가운데 백만 명이 넘는 규모만도 열 건이 넘지 않는가? 한마디로, 도대체 어떻게 사람의 가죽을 벗겨 구두를, 체지방으로 비누를, 머리털로 담요를 만드는 광기가 20세기 문명국가에서 가능했다는 말인가?

아도르노와 함께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끌며 <계몽의 변증법>을 쓴 호르크하이머는 그의 <도구적 이성 비판>에서 바로 이런 고통스러운 물음들에 대해 어렵게 답했지요. 이성이 ‘도구화’하면 맹목적이 되어 오류를 막는 비판적 기능을 상실하고 광기에 빠진다고! 그는 이 말을 “이성이 자기 스스로를 도구화한다면, 이성은 일종의 물질성과 맹목성을 갖게 되고, 정신적으로 경험하기보다는 단지 수용할 뿐인 마술적 실재, 즉 물신이 된다.”라고 표현했지요.

무슨 말일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가령 어떤 운전사가 오직 교통법규에 따라 운행하기 위하여 무단으로 도로를 횡단하던 어린이를 치었다고 하지요. 이때 그 운전사를 이끈 것이 마술적 실재, 곧 ‘도구화된 이성’이라는 것입니다. 호크하이머는 그가 법정에 섰을 때, 재판관이 그에게 ‘이성적으로 운전했는지 여부’를 묻는다면, 그것은 그가 단지 교통법규대로 운전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운전자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법률을 지키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라고 했지요.

즉, 이성이란 목적은 이해하지 못한 채 단지 합당한 수단만을 계산하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성은 목적과 수단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계산하며 또한 그 모두를 비판하는 능력이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한마디로, 화단에 물을 주라고 했다고 비 오는 날에도 물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이성은 그 자체로 일종의 물질성과 맹목성을 가진 마술적 실재, 곧 악령이 된다는 경고지요.

크하이머는 현대사회를 횡행하는 광기와 야만성이 도구적 이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문화 모두를 유용성을 산출하기 위한 대상으로만 파악하는 도구적 이성은 규범의 상실, 이념의 상실, 가치의 상실과 사물화를 가져온다고도 했지요. 따라서 이성이 자기부정과 자기비판을 통해 도구적 이성에 의해 왜곡된 ‘계몽을 계몽하는 것’만이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각종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구약성경』 창세기에 보면, 신은 아담의 자만에 대해 벌을 내리지요.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신은 예초에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 먹으면 그 벌로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막상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에는 그들을 죽이지 않았지요. 단지 낙원에서 추방했습니다. 그럼 성서는 처음부터 신의 거짓말로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학자들의 생각입니다. 기독교에서 신은 곧 생명입니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바로 죽음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을 말합니다.

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기독교에서 신은 빛입니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어둠으로 쫓겨나는 것이지요. 기독교에서 신은 또 진리입니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거짓으로 밀려나는 것이지요. 기독교에서 신은 또 선함입니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악해지는 것이지요. 결국 영혼이 죽은 자는 어둠, 거짓, 악함과 같은 것들을 체험하는 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에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표현된 바로 그 벌이지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이 벌을 받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에게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초인사상’, 곧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자만을 가진 죄 때문에 살인이라는 범죄를, 그 범죄에서 오는 심리적 어둠을, 그 범죄를 숨기려는 온갖 거짓을,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악행들을 차례로 체험하는 벌을 받았지요. 모출스키가 『신곡』의 지옥보다 더 끔찍하다는 바로 그 지옥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벌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그 지옥체험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오직 그것만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수백 쪽에 걸쳐 묘사한 것이지요.

주목해야 할 것은 이때 라스콜리니코프가 받는 벌이 양심의 가책에서 오는 고통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지요. 라스콜리니코프는 극단적 계몽주의자인 벨린스키의 소설 속의 분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구축한 ‘나름의’ 사상과 논리로 무장하고 그것에 의해 범죄를 저질렀지요. 따라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살인, 어둠, 거짓, 악행들 때문에 엄청나게 괴로워하면서도, 계속해서 자신은 정의롭고 고결하고 아름다운 것을 숭배한다고 믿으며 그것을 통해 사회를 개혁하겠다고 자신을 정당화하려 하지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난 나폴레옹이 되고 싶었지. 그래서 죽였어.”라고 외치기도 하지요. 그는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악행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내 양심은 편안하다.”라는 독백도 하지요. 그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는 살인마저도 허락된다는 자기 자신만의 양심을 따로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라스콜리니코프가 괴로워한 것은 오직 악행을 하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벌, 곧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표현된 바로 그 고통스러운 지옥체험 때문이었습니다.

이 벌의 무서움과 끔찍한 성격은 예심판사 포르피리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도망가면 어쩌죠?”라고 묻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자넨 도망가지 않을 거야. … 자네가 도망간다 해도 아마 스스로 되돌아올걸? 자넨 우리 없이 지낼 수 없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포르피리의 예언대로 라스콜리니코프는 결국 지옥과 같은 끔찍한 벌에서 벗어나려고 차라리 자수를 하지요.

결국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에서 말하려는 것은 단순합니다. 개인적 이익과 욕망을 위해서든, 사회적 이익과 개혁을 위해서든,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고 생각하는 자만이 인간에게는 죄라는 것이지요. 자유주의든, 사회주의든, 인간이 자신의 생각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죄의 대가는 어둠, 거짓, 악행 등을 체험하는 지옥보다 더 끔찍한 지옥에 갇히는 것이지요.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라스콜리니코프는 차라리 수용소에 가려고 자수했고,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권총으로 제 머리를 쏘아 자살하지요. 이들에게 수용소나 죽음은 차라리 피난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도스토예프스키로부터 무엇을 배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전히 인간 이성의 완전성과 과학에 대한 깊은 신뢰감, 또한 그것에 의해 이루어질 미래사회에 대한 낙관론에 빠져있었지요. 모두들 자유주의에든, 사회주의에든 몰두하여 극단적 계몽으로 치닫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허용된다고 생각했었지요. 오직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소수의 예민한 천재들만이 이성과 계몽의 위험을 미리 알아채 경고했지요. 이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탈근대(post-modern)의 선봉에 서 있는 것입니다.

1864년 발표한 <지하로부터의 수기> 이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이 스스로 구축한 사상과 논리로 무장하고 한 점의 죄의식도 없이 범죄를 저지른 다음 그것을 정당화하는 악마적 인간들을 줄기차게 창조해냈습니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백치>의 이폴리트, <악령>의 스타브로긴, 키릴로프, 쉬갈로프, <미성년>의 아르카지, 베르실로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이반 등이 그들이지요. 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온 이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악마적 인간들을 통해 이성과 계몽이 지배하는 암울한 미래를 미리 경고하는 데 그의 남은 생을 모두 바친 것이지요. 그러나 공산당 혁명, 아우슈비츠 등으로 상징되는 수많은 피의 대가를 치루고 난 다음인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인류는 비로소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러한 경고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원은 어떻게 오나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도스토예프스키에게로 돌아가 “하나님같이(sicut Deus)” 되려고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근본적인 죄와 그것에서 오는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표현된 지옥체험 같은 벌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대답은 ‘이성은 해체해야만 한다.’(푸코, 라캉, 데리다)든지 또는 ‘계몽을 계몽해야만 한다’(아도르노, 호크하이머, 하버마스)는 탈근대적 사상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의 해법은 무척 소박하고도 단순하지요.

자만(superbia)이 죄의 원인이면 겸허(humilitas)가 해법이라는 것입니다. 다분히 기독교적인 방법이지요. 기독교에서 겸허는 ‘자기를 비우고 낮춤’을 뜻하는 말로, 신에게로 되돌아가는 지름길이며 동시에 죄 사함을 가능케 하는 묘약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높여 신으로부터 떠나게 한 자만과 대립되는 개념이지요. “아담의 자만으로 죄가 인류에게 들어오고 예수의 겸허로 죄가 사해졌다”는 것이 정통 기독교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자만은 우리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겸허는 우리를 온전케 만든다. 하나님은 자만의 상처로부터 인간들을 치료하시기 위하여 겸허하게 오셨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은 이를 뜻하지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좋아하는 표현을 그대로 빌면, “겸허는 자만의 해독제”입니다

따라서 도스토예프스키에 의하면, 인간은 그가 누구든 마땅히, 즉 자유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자신이 옳다는 것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자만한 생각 대신 아무리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위해서라도 넘어서서는 안 될 경계가 있다는 겸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날카로운 이성’이 원인이면 ‘바보 같은 신앙’이 해법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적 욕망이든 아니면 사회개혁이든 타인을 희생시켜 이루려고 하지 말고, 마치 예수가 그랬듯이 타인에 대한 사랑을 갖고 오히려 자기를 희생시켜 이루려고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단순 소박한 해법을 전하기 위해,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5대 장편소설인 <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 그리고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쓴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 다섯 작품 안에는 언제나 ‘자만과 겸손’, ‘타인 희생과 자기희생’, ‘죄와 구원’이라는 대립구조가 들어 있지요. <죄와 벌>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 <백치>에서는 이폴리트, 로고진과 무이쉬킨, <악령>에서는 스타브로긴, 키릴료프, 쉬갈료프와 찌혼 장로, <미성년>에서는 아르카지, 베르실로프와 소피아, 마르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이반, 스메르쟈코프와 조시마 장로, 알로샤 등이 바로 이 대립구조를 대변하는 인물들입니다.

『죄와 벌』에서는 소냐가 라스콜리니코프와 대립하며 그를 구원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녀는 몸을 파는 창녀로 비참하게 살아가지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며 자만보다는 겸허, 타인희생보다는 자기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인간이지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감내하며 인간에 대한 연민에 근거한 사랑을 갖고 새로운 삶을 갈망하는 인물입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악마적 분신인 스비드리가일로프를 보고 비로소 알아채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나폴레옹이 아니라 한 마리 ‘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새로운 예루살렘’을 만들기 위해 “지상에 있는 동안 엄청난 슬픔을 겪는” 영웅이 아니라 한갓 “거미가 기어 다니는 시골 목욕탕”과 같은 범죄인일 뿐이라는 것을 마침내 깨닫기 시작하지요. 그리고 정신착란과 절망 속으로 무너져 내립니다. 이때 자기를 비우고 낮춰 밑에서 그를 떠받치는 사람이 바로 소냐이지요.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런 소냐를 “유로지비”라고 부릅니다. 러시아 정교에서 ‘성스러운 바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용어이지요. 죽은 나무에 수년 동안 물을 길어다 부어 마침내 어느 날 푸른 잎을 피워낸 어떤 수도사처럼 불가능한 일을 믿고 행하려는 사람을 일컬은 말입니다. 비록 어리석어 보이지만 자만과 이기심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를 비우고 희생시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를 구하는 성스러운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이지요. 소냐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성경』에서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기적에 대한 내용을 읽어준 다음, “대지에 입맞추고 자수하라.”, “고난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다시 태어나라.”고 권하지요. 물론 그것만으로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죽은 영혼을 당장 살리지는 못합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지 않고 오히려 ‘지독한 증오심’을 불러내어 자기를 도우려는 소냐에게 오히려 심한 상처를 주지요.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결국 라스콜리니코프를 자수시키고 8년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 받은 그를 따라 갑니다. 그리고 - 죽은 나무에 수년 동안 물을 길어다 부은 수도승처럼 - 변하지 않는 사랑과 자기희생으로 라스콜리니코프의 영혼을 다시 살려내지요. 그럼으로써 그가 받고 있는 벌에서 차츰 그를 구해줍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긴 소설을 다음 같이 끝맺습니다.

 

“이 새로운 이야기, 한 사람이 점차로 소생되어가는 이야기, 그가 새롭게 태어나는 이야기, 그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가는 이야기, 이제까지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현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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