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파인만

양자물리학 연구로 노벨상 받은 교수 "문학·종교, 비과학으로 배척할 수 없어"
아무리 어려운 이론도 그가 가르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게 변해

 


	리처드 파인만
/조선일보 DB
1962년, 인도와 중국이 영토문제로 마찰을 빚다가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인도군 진영에 수시로 비행기를 띄워 '모택동어록(毛澤東語錄)'이라는 붉은색 표지의 책을 무차별 살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하던 대로 붉은 책을 투하하던 중국 조종사는 아래쪽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인도군이 저마다 붉은 책을 한 권씩 들고 비행기를 향해 신나게 흔들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종사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그 책은 '모택동어록'이 아니었다. 인도군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읽을 정도로 좋아했던 그 책은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1918~1988)의 붉은 책, 바로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였다.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난 지금, '모택동어록'은 구시대의 유물이 됐지만 파인만의 강의록은 여전히 과학 분야의 명저로 남아있다. 그의 강의록은 하버드, 칼텍(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케임브리지 등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인도 변방의 양 치는 소녀에 이르기까지, 실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왔다. 비결은 간단하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인만은 노벨 물리학상과 미국 국가과학상, 아인슈타인상 등을 수상한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이자 칼텍의 교수로서 과학의 상아탑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다. 특히 그가 완성한 양자전기역학(QED)은 물리학 이론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정확한 이론으로 꼽힌다. 이론물리학의 금자탑인 표준모형 이론과 아직 연구 중인 통일장 이론도 여기서 시작됐다. 파인만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여기까지 들려주면 십중팔구 근엄한 노(老)과학자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그는 과학자라기보다 광대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강의가 끝나면 학교 근처의 선술집에서 봉고를 치며 학생들과 신나게 놀았고, 어떤 자물쇠도 열 수 있는 열쇠 수리공이었으며, 마야의 상형문자를 줄줄이 해독하고 생각만으로 고장 난 라디오를 고치는 만능 재주꾼이었다. 1986년에 나사(NASA·미 항공우주국)의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 직후 폭발했을 때, 진상조사위원 중 한 사람으로 위촉된 파인만이 조사 초기단계에서 원형고리(O-ring)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문제를 해결한 사건은 지금까지도 전설로 남아있다.

파인만은 탁월한 교사였다. 그는 평생 수많은 상을 받았으나, 1972년에 받은 외르스테드 메달(훌륭한 교육자에게 주는 상)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석학의 강의는 난해할수록 권위가 높아진다고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물리학 이론도 파인만을 거치면 어린 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돌변하곤 했다. 칼텍의 학생들은 그런 파인만을 존경하기보다 사랑했다.

그러나 파인만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은 물리학과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의 명저 중 하나인 '일반인을 위한 파인만의 QED 강의'에서 그는 광자의 거동 방식을 설명하며 "양자역학은 우리가 볼 때 정말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자연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실험을 통해 사실로 확인된 이상, 터무니없는 세계를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급전이 필요한 나에게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그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따질 필요가 없는 것처럼, 실험을 통해 사실로 판명된 이론은 그것이 왜 사실인지를 따질 필요 없이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극히 현실적이고 안일한 생각 같지만, 사실 이것은 과학의 역할과 범위를 한정 짓는 일종의 선언이다. 그 '왜'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으며, 설령 있다 해도 그는 물리학자가 아닐 것이다.

또한 파인만은 "비과학적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라. 그것은 과학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과학보다 열등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라고 했다. 자연과학은 문학, 예술, 철학 등과 같이 자연을 서술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이기에, 다른 분야와 비교할 필요 없이 자신의 본분에만 충실하면 된다. 물론 그 본분은 가설을 세우고 관측이나 실험을 통해 입증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과하면 그걸로 끝. 남은 일은 우리의 선입견을 사실에 맞게 수정하는 것이다. 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문학이나 철학 등 다른 방법으로 자연에 접근하면 된다.

양자역학을 끝까지 부정하며 "신은 주사위놀음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아인슈타인이 전통적 물리학의 최고봉이라면, 파인만은 그 맞은편 봉우리에서 신명나게 봉고를 두드리며 사람들에게 외친다. "우리 물리학 레스토랑은 메뉴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제시할 뿐입니다. 맘에 안 드시면 옆집 식당으로 가셔도 됩니다. 다만, 맛은 제가 보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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