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계식 前회장이 카이스트 대학원생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大怒했다는데… 

 

민계식 전 현대중공업 회장의 이력은 그 자체로 ‘입지전(立志傳)’입니다. 미국 유학시절 미숙아를 둔 가장(家長)이라는 힘겨운 짐을 지고 고학(苦學) 끝에 MIT 박사가 됐고, 귀국해서는 대우조선을 거쳐 현대중공업(CEO) 최고경영자로서 ‘대한민국 조선산업 세계 1위’을 만들고 수성(守成)까지 했습니다.

 

 

울산의 현대중공업에서 일할 때 민 전 회장은 거의 매일 새벽 2~3시까지 일하고 일주일에 하루이틀은 아예 밤을 샜다고 합니다. 덕분에 국내 재계 순위 10위 안에 드는 대기업을 경영하면서도 웬만한 공대 교수들보다 많은 300건의 특허를 출원하고 280건의 기술논문까지 쓸 수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일했던 중역들에 따르면, 민 전 회장도 낮엔 잠깐씩 눈을 부치긴 했다지만 이런 생활패턴을 22년간이나 이어갔다고 하니 강철 체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11년 12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민 전 회장은 올해 KAIST 해양시스템공학전공 교수와 시민단체인 '선진사회만들기연대'의 공동대표를 맡으면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1942년생, 올해로 71세인 그가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할 수는 그 체력의 비결은 뭘까요?


	사내 마라톤 대회에서 달리고 있는 민계식. 그는 마라톤 풀코스도 매년 2~3차례 완주했다.
사내 마라톤 대회에서 달리고 있는 민계식. 그는 마라톤 풀코스도 매년 2~3차례 완주했다. / 조선일보 DB

71세인 지금도 매주 이틀은 10㎞이상씩 달리기, 토스트와 우유로 少食

 

먼저, 달리기입니다. 울산에 있을 때 그는 매일 조선소 방파제 위를 10㎞씩 뛰는 걸로 유명했습니다. 지금도 일주일에 이틀은 달리기를 한다고 합니다. 한번 뛰면 기본이 10㎞입니다. 그의 분(分)당 심박수는 '산소 탱크' 박지성과 이봉주 수준인 40입니다. 덕분에 겨울에도 두터운 외투를 잘 안 입는다고 합니다. 다만 장갑은 꼭 끼는데 “심장이 적게 뛰어 피가 말단까지 잘 안 돌아서 손발이 차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는 술·담배를 전혀 안 합니다. 담배는 그렇다치고, ROTC 장교 출신에 대기업 중역과 CEO로 33년을 산 사람이 어떻게 금주(禁酒)를 실천했을까요. 그가 장교시절 고공낙하 등 공수특전 훈련을 마치면 연대장부터 일렬로 서서 각자 소주 한병씩을 들이켰다고 합니다.

 

“그럴 때면 병을 입에 갖다대고 ‘후’하면서 마셨어요. 군복 속으로 소주가 콸콸 쏟아지는데 상관들은 ‘민 소위 술 못한더니 잘하네’라고 했죠.” 현대중공업 중역 회식 땐 정주영 회장이 폭탄주를 돌리면 두 잔까지는 어떻게라도 마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고 몇번 정신을 잃었더니 정 회장도 그에게만큼은 술을 안 권했다고 하네요.

 

셋째 소식(少食)식입니다. KAIST 연구실에서 그를 인터뷰를 할 때 접시 위에 은박지로 싼 조그만 뭉치가 있길래 ‘뭐냐’고 물었습니다. 땅콩잼을 바른 토스트 한장이었는데 여기에 바나나 한 조각, 우유 한 잔을 더한 것이 그의 저녁이었습니다. 현대중공업에서 밤늦게 일할 때도 비서가 만들어 놓고 간 토스트 한 장과 우유 한잔이 그의 만찬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육식을 잘 하지 않습니다. 달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릴 적부터 소를 무척 좋아했다는군요. “시골에 가면 소뿔을 잡고 그 이마에다 얼굴을 부벼대며 놀았어요. 덩치 큰 소가 눈만 껌뻑껌뻑하면서 가만 있어요. 얼마나 착해요. 근데 그걸 고기를 먹겠다고 잡는 게 싫었어요.”

 

민 전 회장은 그래서 은퇴 후에 한때 소고기를 인공으로 합성하는 사업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그는 “고기라는 게 화학적으로 보면 질소가 주고 탄소·수소 등으로 이뤄진 것”이라며 “공기 중에 많은 질소와 공해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에서 탄소를 추출해서 인조 고기를 만들자는 생각이었다”는 것입니다.

 

민 전 회장은 “소는 메탄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데 이 가스는 이산화탄소보다 지구온난화에 20배나 더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소는 풀밭에서 노는 거나 보고 먹기 위해 대량으로 사육하고 도살하는 것은 하지 말자는 것이죠. 소고기뿐만 아니라 돼지고기·닭고기를 만들고 지구상에 없는 고기도 합성하고 싶었다는 건데요.

 

그는 “3년 정도 이 분야를 연구한 다음 10년은 산업화해서 후세들에게 물려 주고 가자”는 생각으로 틈틈이 논문을 뒤지고 비슷한 연구를 하는 곳을 샅샅이 찾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 세계 어디에도 그런 주제로 연구를 하는 데가 없었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식품가공학 교수나 전문가한테 물어보면 ‘미친 소리한다’는 반응 뿐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대학 한 곳에서 닭고기 비슷한 걸 합성했다고 들어 반가운 마음에 메일을 보내 알아봤더니 두부로 고기를 만드는 수준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꿈을 접고 말았다는군요.

 

세번째 이유가 좀 길어졌습니다만, 그를 강철로 만든 마지막 요소로 ‘열정’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과거는 접어두고 지금 현재만 봐도 그렇습니다. 민 전 회장은 유명 대학에 석좌교수 등으로 적(籍)만 걸어놓은 채 1년에 한 두번 특강 하는 명사(名士)들과는 달리 맡고 있는 일 하나하나에 열정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카이스트에서 강의도 - 카이스트에서 강의하고 있는 민계식. ‘해상풍력에너지’라는 대학원 과목이다. 그는 “경영을 하면서도 한순간도 연구를 손에서 놓지 않아 강의에 어려움은 없다”고 말했다. 미국 버클리와 MIT 유학 시절 노트도 강의 준비에 활용하고 있다. 그는 “당시 노트를 지금 보니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했나’ 하고 놀란다”며 웃었다.
카이스트에서 강의도 - 카이스트에서 강의하고 있는 민계식. ‘해상풍력에너지’라는 대학원 과목이다. 그는 “경영을 하면서도 한순간도 연구를 손에서 놓지 않아 강의에 어려움은 없다”고 말했다. 미국 버클리와 MIT 유학 시절 노트도 강의 준비에 활용하고 있다. 그는 “당시 노트를 지금 보니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했나’ 하고 놀란다”며 웃었다. / 대전=신현종 기자

美MIT대학원 문제보다 쉽게 다섯문제를 출제했더니 평균 점수가…

올해 1학기 KAIST에서 강의한 ‘해상풍력에너지’라는 과목은 석·박사 과정을 상대로 한 정식 공학 수업입니다. 강의 준비를 위해 그는 미국 UC버클리와 MIT 유학시절에 썼던 엄청난 분량의 강의 노트들까지 가져와 수업 준비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올해 정교수로 부임하기 전엔 학점을 주는 세미나를 맡았습니다. 그때 UC버클리와 MIT에서 초급 대학원생이 배우는 내용을 더 쉽게 바꿔 5개 문제를 출제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평균 80점 정도가 나오는 문제여서 최소 그 이상의 성적을 기대했다고 하는군요.

 

기대와 달리 KAIST 학생들의 성적은 평균 30점 정도였다고 합니다. 채점한 시험지를 나눠주고 정답을 풀어주는 자리에서 그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학과 측에서 “학생들이 실망할 수 있으니 제발 참아달라”고 해서 그만뒀다고 합니다. 민 전 회장은 “학생들이 베이식(basic)한 컨셉을 이해하는대신 그냥 암기하는 건 아닌지”라고 걱정하더군요.

 

한번은 강의를 하다 크게 화를 내고 강의실을 박차고 나간 적도 있다고 합니다. 학생들에게 “현대중공업 CEO 때의 일을 포함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뭐든 마음껏 질문해보라”고 했다고 합니다.


	쿠바의 10페소 지폐에는 ‘에너지 혁명(REVOLUCION ENERGETICA)’이란 문구와 함께 현대중공업이 수출한 이동용 발전기가 그려져 있다. 쿠바 전력의 35% 이상을 담당하는 이 발전기를 돌리는 것이 민계식이 개발한 ‘힘센엔진’이다.
쿠바의 10페소 지폐에는 ‘에너지 혁명(REVOLUCION ENERGETICA)’이란 문구와 함께 현대중공업이 수출한 이동용 발전기가 그려져 있다. 쿠바 전력의 35% 이상을 담당하는 이 발전기를 돌리는 것이 민계식이 개발한 ‘힘센엔진’이다. / 조선일보 DB

그런데 학생들이 “어떤 기업, 종목에 투자하면 좋겠느냐”는 식의 질문만 잇따라 하더라는 겁니다. 성질 급한 민 전 회장은 “질문 같은 질문 좀 하거라, 이놈들아!”라며 버럭 화를 내고 만 것입니다.

 

그는 보수 시민단체 대표를 맡아 “칼럼을 써 언론에 돌리는 정도로 해서는 절대 변화를 만들 수 없다. 우리와 생각이 비슷한 젊은 대학생들을 포섭하자”는 등의 적극적인 아이디어를 내면서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나는 굉장히 젊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2003년 북경(北京)대학 총장을 만난 적이 있는데 당시 그의 나이가 79세였어요. 또 미국 해군연구소에는 지금도 논문을 쓰는 91세 현역이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청년이에요.”

 

어떴습니까? 제2, 제3의 파이팅 인생을 열어가는 71세 청년 민계식 박사님 멋지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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