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왼쪽엔… 400년 서열싸움 끝

좌 서애 류성룡, 우 학봉 김성일
안동 호계서원 위패 자리 정해져
문중·유림·경북지사 오늘 확약식

 

 

조선 숙종 2년(1676) 퇴계 이황을 모신 호계서원에 제자인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을 추가 배향하면서

누구의 위패를 윗자리에 모셔야 하는지를 두고 다툰 병호시비가 400년 만에 종결됐다.  

퇴계를 가운데 두고 윗자리인 왼쪽엔 서애를, 오른쪽엔 학봉을 모시기로 문중과 후학이 합의한 것이다.

학봉 영정은 청송군 항일의병기념관이 최근 제작한 것이다.

사진 왼쪽부터 서애 류성룡,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400년 가깝게 문중과 후학이 자존심 대결을 벌여온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의 위패 서열 논쟁이 일단락됐다. 이른바 ‘병호시비(屛虎是非)’가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안동 호계서원(虎溪書院) 이석희(88) 복설추진위원장은 14일 “대원군 때 철폐된 뒤 복원작업에 들어갈 호계서원 사당의 위패 서열이 ‘좌 서애 우 학봉’으로 확정됐다”고 밝혔다. 두 문중의 대표와 유림은 김관용 경북도지사와 함께 15일 경북도청에서 이 사실을 확약하는 문건에 조인한다.

 호계서원은 1575년 조선 선조 때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 스승을 기려 안동 월곡면에 세웠다. 이후 1676년(숙종 2년) 퇴계와 함께 두 제자인 서애와 학봉을 추가 배향하면서 퇴계를 중심으로 윗자리인 왼쪽에 누구를 모시느냐로 400년 가까이 후손과 제자들이 자존심 싸움을 해 왔다.

 

호계서원

 

 

 안동에서 나고 자란 학봉 김성일(1538~1593)과 서애 류성룡(1542~1607)은 둘 다 퇴계의 수제자다. 학봉은 임진왜란 발발 전 통신 부사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 초유사로 적과 싸우던 중 병사했다.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 선조를 보필하며 국난을 극복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제자들과 가문끼리 수세기에 걸쳐 위패 서열을 놓고 양보 없는 신경전을 벌여 왔다. 병산서원과 호계서원의 앞 글자를 딴 ‘병호시비’다.

 서애 문중과 제자들은 최고 벼슬인 영의정을 지낸 서애를 퇴계의 왼쪽에 모시는 게 옳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학봉 문중과 제자들은 나이나 학문의 깊이 등으로 미루어 학봉이 차지해야 한다고 맞섰다.

 논쟁은 당시 서애의 제자이자 대학자인 우복 정경세가 “벼슬의 높낮이로 정해야 한다”며 서애의 손을 들어주면서 일단락되는 듯했다. 당시 학봉의 후학들은 스승이 서애보다 네 살 더 많고 학식도 뛰어나다며 반발했지만 세가 약해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한 논쟁은 1805년(순조 5년) 당시 영남의 4현(賢)으로 불리던 서애와 학봉,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의 신주를 문묘에 배향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또다시 불거졌다. 1812년에는 학봉의 후학들이 호계서원에 영남학파 대표 유학자인 대산 이상정(1711~81)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자는 주장을 제기하자 서애의 후학은 호계서원과 절연을 선언했다.

 유림 사이에 반목이 지속되자 1871년 대원군은 호계서원을 철폐했다. 7년 뒤 같은 자리에 서원의 강당이 복원됐지만 안동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놓이자 현재의 임하리로 옮겨졌다. 위패 없는 서원이었다. 이후 2009년 경북도 등을 중심으로 호계서원을 성곡동에 복원하는 사업이 추진돼 왔다.

안동=송의호 기자
 
◆호계서원=경북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임하댐 아래에 있으며, 조선 선조 8년(1575)에 건립됐다. 처음에는 여강서원이라 했으나 숙종 2년(1676)에 현판을 하사받아 호계서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중앙일보] 

201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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