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이집트 이주로 본 시대적 배경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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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의 양모 하셉수트 장제전 (이집트 소)

 

“이스라엘 민족사는 하나님의 능력 체험하는 역사” 

 

언약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문명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위대한 정치인을 남긴 민족도 아니며 과학적 발명품을 남긴 인물도 없었다. 그러나 이들을 통한 세계 정신사에 미친 영향은 유대교나 기독교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육필로는 그 막대한 영향을 표현하기 힘들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3대 종교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받는 아브라함이지만 그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의 인지도는 무명에 가까웠다. 그러나 생존의 물음(Siz im Leben) 앞에 해답을 주는 유일한 대안인 성경을 통한 구원의 서정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추적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하나의 개인의 삶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있는 그의 삶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필자는 아브라함이라는 한 개인의 인생으로만 접근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정착 농경문화인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갈데아 우르를 떠나 스뎁(steppe) 지역인 하란으로 이주하게 된 경위를 조명함으로써 얻는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우르 제3왕조 시대였으나 엘람의 침공으로 우르 왕조가 멸망의 길을 가던 시기였다. 우르남무(Urnammu)와 그의 아들 슐기(Shulgi)가 통치하던 농경문화의 대표적 도시국가였던 갈데아 우르가 엘람에 의해 멸망 직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가족을 하란으로 이주시키셨다.

 

한편 그의 아내 사라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당시에는 자녀를 낳지 못할 경우 이것은 이혼의 조건이었다.

 

함무라비 법전 제138조에 의하면 자녀가 없을 때에는 이혼의 조건으로 법제화되어 있었다(Herbert Bristho C., Prelude to Emprie;Babylonian Society and Politics 745-626BC. Philadelpia: Univ. Museum, 1984, p.128). 아마 하나님께서 사라를 성태하지 못하게 하신 것은 그들이 살고 있던 우상의 도시 갈데아 우르(Chaldeea Ur)를 떠나 하란(Haran)으로 이주케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농경 정착 문화의 꽃을 피웠던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목 문화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하란으로 이주시킨 정황적 배경에는 나그네적 삶을 발견하게 하신 언약적 섭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창 11:31; 12:1-4). 이러한 유목민적인 삶이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으로 나타나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모습을 나그네의 개념으로 보게 되었다(시 39:12; 창 46:32-34, 47:9).

 

그를 부르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세속적 부를 조건으로 하는 언약을 체결하신다. 이러한 언약의 이면에는 환경을 의지하는 연약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배려하신 측면이 담겨 있었다(창 12:1-3). 그러나 그가 가나안에 도착하자마자 기근이 그 땅에 찾아 왔고 이 기근을 하나님의 언약 파기로 착각한 아브라함은 유목인의 삶을 버리고 이집트로 이주하기에 이르렀다. 아내를 누이로 속이면서까지 말이다(창 12:13).

 

이집트인들은 유목민들을 천하게 여겼다(창 36:43). 유목 생활만이 생존 가치의 수단이었던 유목문화 속에서 혈연관계야말로 그들의 삶의 목적이요 신앙으로 여겼던 아브라함은 극심한 기근 앞에서 그 가치관을 포기할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당시 이집트는 제11왕조 시기였다(2134-1991 BC).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이주하였던 때로 추정되는 인테프 3세(Intef Ⅲ, 2069-2060 BC) 통치시기에는 이집트가 남북왕조로 갈라져 있었으며 아브라함이 일시 이주하였던 지역은 북왕국 수도인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였을 것이다. 당시의 남왕국 수도는 테베(Thebes)였다. 중왕국 11왕조 멘투호테프 2세(Mentugotep Ⅱ, 2060-2010 BC)는 남북왕조를 일시적으로 통일하였던 바로였다.

 

아브라함 당시 유목사회의 특징은 가부장적 사회였다. 때문에 용기를 내어 모험을 감래하고 가족을 위하여 희생해야 하는 혈연공동체의 가치관을 아브라함은 생존을 위하여 버린 것이다.

 

아내를 빼앗긴 이집트에서의 하룻밤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매우 고통스러웠으며 자신의 연약한 실존(實存)을 발견하는 밤이었을 것이다. 사라 또한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아내를 버리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자식을 낳지 못한 슬픈 비애를 가슴에 품고 바로의 궁으로 들어갔을 것이다(창 12:14-17). 그러나 이러한 위기에서 아브라함의 가계를 지켜주신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다.

 

약속의 자손은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나야만 한다. 바로는 사라와 아브라함이 부부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다시 돌려보내며 그의 소유와 함께 가나안으로 돌려보내며 가축과 은, 금이 풍부한 선물을 주어 보낸다(창 12:2). 이후 아브라함은 네게브에서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재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13:4).

 

인간은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철저하게 깨닫게 될 때 회개하며 신앙을 회복한다(눅 15:11-32). 하나님의 섭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인도하실 때 그가 철저한 죄인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하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이주하였을 때 나일강 유역의 관개농업은 정착된 시기였다. 국토의 대부분은 사막으로 둘러 쌓여 있지만 백성들은 나일강변 주위에서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였다. 95%가 사막이라는 어려운 지형여건에도 불구하고 5%의 나일강변을 중심하여 이어지는 농토에서 그들은 식량을 추수하였다.

 

나일강의 길이는 6,690km나 되며 상류에서 하류까지 위도의 격차가 30도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다. 나일강은 6월 중순의 가장 무더운 여름철부터 수량(水量)이 증가하였고 이 시기에 이집트인들은 강의 범람이 시작되는 6월 11일을 ‘눈물의 밤’이라고 불렀다.

 

창세기에는 나일 삼각주의 델타지역을 하나님의 동산으로 비유하였다(창 13:10). 이집트인들은 이처럼 천혜의 땅을 다스리는 태양신 라(La)의 은총을 입은 신의 아들 바로를 전능한 이집트의 왕권을 행사하는 지배자로 생각하였다. 바로는 신전제사를 드리는 공식 석상에 나타날 때는 갈고리와 채찍의 형상으로 된 홀을 들고 의식을 집례하였다.

 

상 이집트의 아부심벨(Abu Simbel), 오시리스신을 섬겼던 아비도스(Abydos), 태양신의 도시 아마르나, 데베의 데이르 엘-바하리(Deir el-Bahri), 하토르 사원의 덴데라 등은 이집트의 신성한 신전이 있는 중요한 도시였다.

 

이러한 신의 아들 바로를 속인자가 아브라함이었다. 그리고 유목민의 족장으로 가솔을 생명처럼 사랑하고 지켜야 할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 사라를 버리는 배신자가 되었다. 그러한 아브라함은 죄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가정을 바로의 손에서 지켜 주셨다.

 

오히려 큰 재물을 바로로부터 하사 받고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재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던 것이다(창 13:4).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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