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이주 430년 간의 침묵 시대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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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지방(현재의 헬리오폴리스) 전경

 

 

“야곱의 이집트 이주는 힉소스 족의 이집트 침입 이전에 이뤄져”

 

출애굽기 12장 40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 삼십 년이라 사백 삼십 년이 끝나는 그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에서 나왔은즉” 이라는 기록이다. 즉 창세기 50장에서 출애굽기로 넘어가는 시간의 세월이 430년이 흘렀다는 언급이다.

 

정통 성경 연대기로 계산하면 야곱이 이집트로 이주한 때인 주전 1876년경으로부터 출애굽한 시기의 때인 주전 1446년의 기간을 계산한 연대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는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고 그의 아버지 야곱, 즉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이주하였을 때의 바로는 세누스레트 3세(Senusret Ⅲ, 1878-1843 BC)가 통치하던 시기로 볼 수 있다.

 

요셉이 감옥에서 오랜 기간 투옥되어 있었을 때의 이집트를 통치하였던 바로는 (1889 BC) 세누스레트 2세(1897-1878 BC) 통치시기로 본다(G. Posenor, ‘The Middle Kingdom in Egypt’ in CAH 1. 2. p. 502-04).

 

Eugene H. Merrill에 의한 연대기는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활동하였던 시기의 바로가 이집트 중 왕국(Middle Kingdom) 시대의 위대한 바로였던 세누스레트 3세(Senusret Ⅲ or Senusret Ⅲ, 1878-1843 BC)로 보며 이 시기를 이집트의 중왕국 제12왕조 시대의 황금기로 보고 있다.

 

세누스레트 3세는 37년 간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그의 화강암으로 조각된 좌상은 수심에 가득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선 왕조시대의 바로의 신격화된 조각상보다는 매우 사실적으로 제작되었는데 7년 흉년의 시기(창 41:53-57)를 극복한 이후 당시의 바로들이 백성들의 복지에 많은 정책을 세웠다는 간접적인 표현이 아닌가 해석할 수 있다.

 

세소스트리스라는 이름은 그리이스식 이름이며 세누스레트는 이집트 이름의 명칭인데 그 뜻은 여신의 남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왕을 위한 큰 기념물을 세우지 않았으며 왕을 신격화하는 건축물이나 정책에 자원을 집중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농업정책이나 관계수로를 정비하는 일에 많은 투자를 하였는데 이러한 정책적 변화는 바로 제상 요셉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세소스트리스 왕가는 이집트 국경을 뛰어넘어 리비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9년 동안 아시아 지역까지 정복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가 이집트로 귀환하였을 때 친동생의 음모로 암살위기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많은 전쟁 포로들과 채무자 들을 해방시켰으며 많은 신전을 세우고 특별히 그의 재임시절 나일강과 홍해 사이에 거대한 운하도 건설하였다.

 

당시 제상 요셉은 온(혹은 헬리오 폴리스:Heliopolis)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Asenath)과 결혼한다. 요셉은 출옥 후 당시의 바로 세누스레트 2세 앞에 알현하였을 때 그는 왕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면도를 하였다. 이 사실 자체가 당시의 힉소스 족의 이집트 침입이전으로 생각할 수 있다(Pritchard, Ancient Near Eastern Texts, pp 18-22, Alan Gardiner, Egypt of the Pharaoh, London:Oxford Univ Press,1961, p. 130).

 

그의 통치 16년이 되는 해 국경을 표시하는 지역에 비석을 세우고 “나는 국경을 정하였다. 나는 선조들이 도달하였던 국경을 넘어섰다. 나는 물려받은 것을 더 늘렸다. 나는 말씀을 전하는 바로이며 나는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는 행동을 보인다”라고 새겨 놓았다. 그는 제2폭포 남방, 엘레판틴과 셈나 사이에 13개의 요세를 세우며 영토를 굳건히 하였다. 고지대와 섬 위에 세운 요세들은 누비아 지역을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기의 이집트는 문화의 시대였다. 특별히 보석 세공술은 과히 황금시대라 할 만큼 장인들에 의해서 발달하였다. 더구나 이 시기의 문학작품인 시누헤의 이야기(Story of Sinuhe)는 단편적인 파피루스 자료들과 굴껍질에 새겨진 문서들을 종합하여 완벽하게 재구성되어 학계에 발표되었다.

 

프리챠드(Pritchard)에 의해 정리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구성하여 보았다. 시누헤의 이야기가 쓰여진 시기를 메릴은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있던 때였다고 하였다(Eugene H. Merrill, Kingdom of Priests, Grand Rapids, Michigan, 1997, p. 65).

 

평범한 환경에서 태어난 관리 시누헤는 라쉬트 궁전에서 교육을 받았다. 시누헤는 세누스레트 1세의 아내인 스네프루(Snefru) 왕비의 하렘의 시종이었다. 세누스레트 1세는 그의 아버지 아메넴하트 1세(Amenemhet Ⅰ, 1991-1962 BC)와 함께 권력을 공유하면서 리비아 지방으로 군사 원정을 떠난다. 그 원정에 참가한 시누헤(Sinuhe)는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복잡한 상황에 휘말리고 말았다. 아메넴하트 1세는 기원전 1962년 세상을 떠난다.

 

원정을 떠났던 세누스레트 1세는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즉시 이집트로 귀국한다. 시누헤는 궁전에서 왕을 축출하려는 일단의 음모를 엿듣고 이집트를 몰래 탈출한다.

 

남동쪽으로 떠난 시누헤는 델타의 남쪽 끝을 지나 국경을 넘었다. 네겝 광야를 지날 때 갈증 속에 죽음이 임박하였음을 알고 도움을 청하려고 주위를 살펴보니 일단의 가축 때를 거느린 베두인들을 보고 도움을 청한다. 그들은 물과 우유를 주며 자기 집으로 데려가 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팔레스타인을 통과하여 멀리 바블로스까지 갔다. 이곳에서 1년 6개월 동안 머물렀다. 팔레스타인 군주는 그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그는 상세하게 그동안의 과정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는 죄가 없다고 변명을 하였다. 결국 팔레스타인의 레테누 왕은 시누헤를 그의 맏딸과 결혼시켜 고위직에 임명하고 좋은 땅을 하사하였다.

 

후일 장군이 된 시누헤는 그의 명성이 날로 높아졌다. 그의 명성을 질투한 장군이 결투를 청한 후 치열한 싸움 끝에 그의 정적을 쓰러뜨렸고 마침내 그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후 그는 이집트로 다시 돌아왔을 때 세누스레트는 시누헤를 기쁨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세누스레트 3세는 이렇게 선언한다. “보시오 시누헤는 유명한 아시아인이 되었고 베두인 같지 않소?” 그는 팔레스틴에서 돌아와 25년을 이집트에서 행복한 말년을 보내었다(Pritchard. Ibid).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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