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피라미드와 꿈의 석비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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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스핑크스와 꿈의 석비>

 

 

 

“스핑크스(Sphinx)는 고대 이집트의 전설적인 동물”

 

창세기는 인류 역사의 시작과 창조 후의 타락 과정을 그리며 바벨탑 사건 이후(창 11:1-9) 갈데아 우르 사람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는 이스라엘 민족 형성사를 그의 부족과 가계의 형성과 진행 과정(fact)을 통해 기록하고 있다.

 

당대 시대적 배경이 되었던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Sumer), 도시국가 아카드(Akkad), 아모리족과 마리(Mari) 왕국으로 이어지는 초생달 문명과 더불어 이집트 지역의 중간 지대인 가나안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 아브라함이 살았던 삶의 현장을 기술하고 있다.

 

이 무렵 전후로는 고(Old) 바벨론이 가장 강성하였던 시기로서 앗수르(Assur), 우르(Ur), 키쉬(Kish) 등의 도시국가가 성장하고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셈계의 힉소스족이 이집트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에게해에서는 중기 미케네 문명이 진행 중이었고(2200-1600 B.C) 크노소스(Knossos) 섬의 왕조(王朝)는 쇠퇴의 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 시기의 성경에 기록된 창세기의 중심사는 12장부터 아브라함 계보의 족장사로 기술하고 있다. 고대 근동지역(Near East) 전체의 지역적 정황에서 볼 때 이는 한 부족의 부족사에 불과하였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하기 위하여 이집트 이주를 단행하였던 아브라함의 행로는 이집트를 구속사의 흐름에 있어서 한 변방 국가로 소개하고 있다. 이때는 이집트 제4왕조 때 건축한 바로의 피라미드가 세워진 지 5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였다. 그후 이집트와 히브리인과의 관계는 창세기 후반부터 두드러진다(창 39장-50장).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하기 위하여 이집트로 이주하였을 때 이미 위용을 자랑하고 있던 피라미드는 기자(Giza)에 위치하고 있다. 기자의 피라미드보다 앞선 제3왕조 시대 조세르(Djoser, 2668-2649 BC)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제상 임호테프(Imhotep)에 의해 설계되어 건축된 세계 최초의 건축물로 그 위용을 자랑하며 사카라(Saqqara)에 서 있었다. 그후 제4왕조 시대에 접어들면서 피라미드 건축 기술은 더욱 발전하였다.

 

이들은 상상을 초월할만한 천문학, 건축학, 수학, 기하학 등 다양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으며 그 정확도는 현재의 건축 전문가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피라미드가 나타내는 각종 수치와 데이터는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다.

 

또한 이렇게 견고한 바윗돌을 어떻게 정확한 각도로 잘랐으며 2.5톤 이상의 거대한 바위들을 어떻게 146m의 높이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는지는 5000여 년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리이스 역사학자 헤로도투스(Herodotos)는 기원전 5세기경 이집트를 방문한 후 나무로 만든 기중기로 이 돌들을 들어올렸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는 철기나 청동기 시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제2왕조시대(2890-2686 BC)부터 이미 석재를 다루는 건축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돌로 만든 망치와 돌보다 부드러운 구리로 만든 정과 톱을 사용하였다.

 

노동은 고되었지만 바로(Pharaoh)를 위한 노동을 오히려 즐거움으로 여기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기자에서 발견된 당시의 이집트 파피루스 가운데는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간 노동자들이 신을 향해 드리는 제사 때처럼 빵을 배부르게 먹고 맥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피라미드(Pyramid)의 건설은 이집트의 바로가 전력을 기울인 대 역사(役事)였다. 특별히 3대 피라미드가 있는 기자는 카이로 중심가에서 남서쪽으로 13km 떨어진 서안 사막지대의 석회암 언덕 평원지대에 나란히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며 서 있다. 제4왕조의 2대 바로인 쿠푸(Khufu, 2579-2556 BC) 그리고 4대 바로인 카프라(Khafra, 2547-2521 BC)의 피라미드들이다. 그 주변에는 6개의 작은 왕비들의 위성 피라미드가 폐허가 된 체 남아 있고 그 곁에는 거대한 스핑크스가 피라미드를 지키고 있다.

 

스핑크스(Sphinx)는 고대 이집트의 전설적인 동물로 종종 태양신과 같은 존재로 군림하던 바로를 상징하는데 사용되었다. 스핑크스가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힘을 상징하는 것이며, 머리가 사람의 모습으로 조각된 것은 인간의 지혜를 상징하고 있다.

 

수천 개의 스핑크스가 세워졌지만 기자에 남아있는 것이 가장 크고 유명하다. 이 스핑크스는 넓이가 약 70m, 높이가 약 20m가 되는 거상으로 기자에서 두 번째로 큰 카프라의 피라미드와 연결되어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바로의 살아있는 모습이라는 뜻으로 스핑크스를 쉐세프앙크(Shesepankh)라고 불렀다. 이 대 스핑크스(Great Sphinx)는 정확하게 동서로 향하고 있으며 그 눈은 해가 뜨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땅에 묻힌 스핑크스는 1816년 칼비올리아에 의해 발굴이 시작되어 완전하게 끝냈을 때는 1886년이었다.

 

이곳에 우리가 주목하여 보아야 할 유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출애굽 사건의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는 석비의 발견이다. 이 석비는 투트모세 4세(Tuthmose Ⅳ, 1419-1386 BC)의 화강암 돌비석이다. 그는 아멘호텝 2세(Amenhotep Ⅱ, 1453-1419 BC)의 아들로 그가 왕자 시절에 사막에 사냥을 갔다 잠깐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꿈에 스핑크스가 나타나 모래에 막혀 죽을 지경에 있으니 다시 세상에 나를 나타나게 하여 준다면 그에게 왕관을 씌워주겠다고 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사냥과 무술을 좋아하였고 바로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장자가 아니었다. 그는 즉시 모래를 파헤치고 스핑크스를 꺼내 주었다. 당시의 장자는 웨벤세누(Webenseenu)였다. 그러나 장자 웨벤세누가 죽고 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내용의 기념 석비가 이것이다.

 

출애굽 연대기에 비추어 볼 때 이 시기가 이집트의 10대 제앙이 임하였던 시기였고 마지막 장자 재앙 때에 바로는 아멘호텝 2세(Amenhotep Ⅱ, 1453-1419 BC)였으며 하나님의 사람 모세(Moses)와 대결하였던 바로였다.

 

그의 재위 2년에 육로를 이용하여 시리아의 오론테스강까지 진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34년을 치리하였으며 가나안의 갈릴리까지 정벌하러 갔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의 홍해 도강 이후 38년을 광야생활로 유랑할 때 그들을 추격하기 위하여 진군하지 않았나 추론할 수 있다. 그의 장자였던 웨벤세누가 사망한 것은 하나님께서 장자를 치신 시기였다(출 12:29-30).

 

아멘호텝 2세는 왕들의 골짜기에 안장되었다(무덤 KV 35호). 그의 무덤에는 그의 장자 웨벤세누의 미이라와 함께 안장되어 있었는데 그가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였기 때문이다(Charles F. Aling, Egypt and Bible History From Earliest Time to 1000 BC,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1984, p.105).

 

장자 재앙 이후 왕의 차자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가 바로 출애굽 이후의 바로였던 투트모세 4세(Thutmose Ⅳ, 1419-1386 BC)이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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