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의 기원을 찾아서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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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멘 데드마스크 _ 카이로박물관 소장

 

 

“선박 건조, 금속 재련, 석조 기술 등 고도로 발전해”

 

 

노아의 홍수 사건 이후로 추산되는 기원전 3000년 경, 소위 과학자들이 빙하기 후기 시대라고 일컫는 이때부터 지구의 온난화로 인하여 나일강 유역의 초지들이 말라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서식하던 코끼리, 사자, 기린 등 야생 동물들이 아프리카 밀림 지역으로 서식지를 찾아 이동하였다.

 

원래 나일강은 급류로 인하여 강바닥이 점점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지만 차츰 강물이 마르면서 오랜 기간동안 침식 작용이 진행되던 지류의 변화가 멈추게 되었다. 그 대신 나일강은 1년에 한번 여름이 끝날 시기에만 범람하였다. 범람할 때에는 수위가 무려 6m나 높아져서 강 유역들이 물에 잠겼다. 반면에 우기철이 지나게 되면 멀리 이디오피아 화산에서 흘러내려 온 퇴적물이 델타지역에 쌓이게 되었다.

 

이러한 기후 변화로 인하여 지금의 사하라 지역은 그 울창했던 밀림지대가 사막지대로 변하면서 수렵채집의 문화가 사라져갔다. 사냥터를 찾아 이동하던 고대 이집트인들은 필요에 의해 강 유역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가축을 길들이고 곡식을 재배하는 법을 채득하게 되었다. 그들은 도기를 만들고, 벽돌로 벽을 쌓는 기술도 경험을 통하여 얻게 되었다. 이들은 서서히 정착민이 되면서 부를 축적하였고 이집트 곳곳에서는 그들이 정착하여 큰 도시가 생겨나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이집트 고고학자들은 마디(Maadi) 근처에서 고대 신석기 시대의 유적터를 발굴하였다. 이곳에서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현무암 꽃병과 피륙과 화장품으로 사용되었던 도구들이 발견되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면 고인이 살아 생전에 아꼈던 물품들과 함께 시신을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 매장하였다. 이러한 장례 문화는 고대 이집트의 관습이 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수도는 온(On)이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에는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천체를 관측하는 천문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들의 천체 관측 기술은 시리우스(Sirius) 달력의 기준이 되는 시리우스 별이 온(On)에 떠올랐던 시각(時刻)을 정확하게 기원전 4241년 7월 19일 오전 4시 58분으로 기록을 남길 정도였다(David. R. and David A.E.A Biographical Dictionary of Ancient Egypt. London 1992).

 

이 온(On) 지역은 요셉이 다스리던 지역이었다(창 41:45). 온의 천문학자들은 달의 순환주기를 따르는 자연력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 1년이 354일이지만 태양력을 기준으로 하면 주기가 더 길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태양력은 그들이 섬겼던 태양신 라(Ra)와도 연결시킬 수가 있었다. 또한 계절별로 농사를 짓는 때의 절기 계산을 하는 데도 유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태양력에 따라 한 해가 시작되는 시점이 언제인가가 과제로 남게 되었다. 그들이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시리우스는 늦봄, 달이 두 번 반을 순환하는 동안 가려져 있다가 한번 뜨고 지는 기간의 날 수가 365일로 태양력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렇게 하여 고대 이집트인들은 365일을 30일까지 12달로 나누었으며 남은 5일은 축일로 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인들은 4년마다 하루가 남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온의 천문학자들은 지구의 공전 기간이 365일 하고도 4분의 1에 걸쳐 공전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1년에 4분의 1씩 남다보니 점점 태양력의 틀이 맞지 않게 되었다. 결국 시리우스가 뜨는 날과 1월 1일이 정확하게 겹친 횟수는 이집트력으로 1461년 주기로 단 4차례에 지나지 않았다(기원전 4241년, 2780년, 1321년, AD 142년). 기자의 피라밋 벽에는 태양력과 비슷한 달력이 발견되었는데 이 피라밋은 기원전 2600년 전에 건축되어졌다.

 

온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었던 여러 도시 국가들이 2개의 국가로 통일되었다. 상(上) 이집트의 영토는 나일강 남쪽으로 아스완까지 이어진 지역을 다스렸다. 그리고 하(下) 이집트는 나일 삼각주 델타(Delta) 지역 습지에 자리잡았으며 그 남쪽 끝에는 온이 있었다.

 

상하 이집트는 오랜 기간동안 서로 전쟁을 벌이며 정복하고 정복을 당하는 암흑의 시대가 반복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3100년경 상(上) 이집트의 바로가 나일 삼각주를 점령함으로써 오랜 기간 남북왕조의 갈등은 그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렇게 상하 이집트를 통일한 바로가 나르메르(Narmer, 3150-3050 BC)였다. 그후 상하 이집트의 통일은 이집트 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상하 이집트 통일 이후 부유층들이 소유하고 있던 많은 재원들을 전쟁 경비에 충당하는 대신 예술과 건축 그리고 문화 사업에 투자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착민들로 구성된 농경 도시 국가가 복잡하여지면서 기록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고 문자를 발명하였으며 필사 기술이 발달되었다. 서기관들을 배출하기 위한 학교가 세워졌고 역사라는 개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역사상에 가장 먼저 기록된 바로는 대단한 통치력을 발휘하여 상하 이집트의 국경선이었던 지역에 수도를 정하였는데 하 이집트의 수도였던 온(On)은 외부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쪽으로부터 외세가 침략하여 올 경우 수도를 지킬 수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대신 강 건너 남쪽으로 약 30km 내려간 지역에 대운하와 제방을 쌓고 수도를 세웠다. 이때 쌓은 제방이 흰 흉벽 색깔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백색성벽’이라고 불렀다. 백색은 상 이집트를 상징하는 색깔이었다.

 

제1왕조인 나르메르 이후 수도였던 이 도시의 유적지는 콤알-아마르(Kom-al-Ahamr)라고 불려졌는데 6번째 바로가 이 도읍은 ‘영원하고 아릅답다’는 의미의 네페르(Nepher)로 개명하였다. 그후 호르아하(일명 아네지브, Hor-Aha, 3050-2890 BC) 통치시기에는 수도를 멤피스(Memphs)로 개명했다.

 

이후 이집트의 농경문화는 더욱 발전하였다. 이 문화는 정착문화였으며 특별히 이집트 문명은 문명의 젖줄이었던 나일강을 중심으로 농경문화의 왕조시대를 열었다. 이 시대부터 이집트는 국가행정이 체계적으로 조직화되었고 각종 법제도가 정비되었으며 선박건조, 금속 제련, 석조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였다.

 

멤피스가 통치의 도시로 번영을 누리는 동안 온(On)은 종교의 도시로 발전하였는데 기원전 1800년대에 이 지역의 행정을 다스렸던 히브리인이 요셉이었으며 이집트 이름으로는 사브넷 바네아(Zaphnath Paaneah)였다(창 41:45).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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