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이집트 이주가 주는 의미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70여 명 야곱의 자손들 이집트에서 큰 민족으로 번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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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무리들을 어떻게 인도하시며 구속 완성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하시기 위한 언약서이다.

 

창세기의 마지막 네러티브(narrative)는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에 의해 이스라엘국가 공동체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이루어져 가는 거대한 서사적 드라마이다.

 

유목민들로 족장시대가 계속 이어져 온다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창 12:2)고 말씀하신 계획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왜냐하면 유목사회는 흩어지는 사회이지 큰 민족을 형성하는 정착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여 보았다. 이제는 요셉을 이집트로 인도하시는 뜻을 사회학적 개념에서 성서의 사실(a historical fact)을 기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이들의 가나안 생활은 양들을 기르는 목자로 살았다(창 46:31-34; 47:3). 유목민들은 천막생활을 하며 계절을 따라 목초지를 따라 유랑하였다. 이들은 믿을만한 길을 따라 새로운 목초지나 물이 있는 곳을 찾아 유랑한다. 유목민들은 무엇보다도 정착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정한 거주지역에 묶여 있지 않는다.

 

이처럼 유목사회는 지역적으로 연관성이 없다. 그리고 행정이 조직화되어 있지도 않다. 그리고 부족과 씨족 단위로 혈연과 인척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창세기 12장 1절에 기록되어 있는 ‘아버지의 집’(father's house)이란 가정보다는 큰 집단, 즉 가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유목사회는 자손들이 각각 독립하여 독립된 가정과 가문을 형성함으로써 새로운 개체를 형성하는 문화이다(한동구, 고대 이스라엘 사회사, 서울:대한기독교서회, 2001, p.16-17). 그러므로 이스라엘 집단 공동체인 12지파에 의해 결성되는 이스라엘 국가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농경문화의 삶인 정착문화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러한 삶의 전환을 위해서는 바로 이집트로 이주하는 것이다. 당시 이집트는 목축업을 천하게 여기고 있엇겼다.

 

이들이 이집트로 내려온 후 43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70여명의 야곱의 자손들(창 46:26-27)은 큰 민족으로 번성하게 된다.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이 이집트로 내려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번성하게 된 것이다(신 10:22). 이 과정에서 요셉의 생애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비유할 정도로 애매히 고난받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창 37:18-24; 39:19-20).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섭리 아래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몽하게, 되고 총리대신의 자리에 오르게 되며, 사브낫바네아(Zaphnath panneah)라는 이집트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창 41:45). 그리고 고센에 정착한다.

 

고센은 70인역(LXX)에서 헬리오폴리스(Heliopolis)라고 불렀다. 즉 태양의 도시라는 뜻이다. 고센의 수도 온(On)을 가리키기도 하고 요즈음 지명으로는 알마타리아(Armatailia)라고 부르기도 한다. 알마타리아는 카이로(Cairo) 북쪽 자이툰 지역에서 동북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요셉이 꿈을 해몽하여준 당시의 바로는 누구였을까? 마네토의 연대기를 기준으로 볼 때 당시 바로는 다름아닌 세누스트리스 2세(Senusret Ⅱ, 1895-1878 BC) 통치시기로 보고 있다.

 

기원전 1895년 그가 사망하자 세소스트리스 2세(혹은 세소스레트 2세)가 왕위에 오른다. 기록에 의하면 세소스트리스는 아버지와 적어도 3년 간 공동통치를 하면서 지도자 수업을 쌓았다. 요셉은 이집트로 끌려온 지 약 10년 후 세소스트리스 2세의 꿈을 해몽하였을 것이다.

 

고고학자 피트리(Petrie)에 의해 이 시대에 해당하는 라훈(Lohoun)에 있는 그의 피라미드 근처에서 1913년 대대적인 발굴을 시작하여 네 개의 수갱묘를 발굴하였고, 피라미드 공사에 동원된 노종자들의 거주지도 발굴하였다. 당시에 이 지역명을 헤테프세누스레트, 즉 ‘세누스트레스가 만족했다’는 이름을 붙인 마을이었다. 이처럼 세소스트리스 2세 통치시기에는 대규모 치수사업과 토지개발을 하였다.

 

파윰 분지(Fayyum basin)와 나일강을 연결하기 위한 수로공사를 그가 완성하였는데 고대에는 이 운하의 유적을 요셉의 강(Bahr Yusef)이라고 불렀으며 오늘날에도 동일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Pasener, ‘Middle Kingdom’ in Cambridge Ancient History 1, 2. p. 505-511).

 

그의 아들 세누스트레스 3세(Senusret Ⅲ, 1878-1841 BC)는 선대의 7년 흉년이라는 엄청난 국가적 재난을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을 위한 피라미드 건설 등의 정책을 포기하고 백성의 복지에 모든 정책을 입안하였고 농업과 관련된 개혁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북부와 남부 그리고 최남부 지역으로 분할하고 각 행정구역에 총리 직속 셈족의 고급관리를 이용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세누스트레스 3세의 선대 대부분 바로들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피라미드를 비롯한 자신의 사후를 위한 준비를 하는데 비하여 그가 백성들의 복지와 농업개량 치수사업(flood Control)에 치중하였던 것은 선대 바로 시절의 요셉 정책을 참고하였을 것이다(Pater A Clayton, Chronide of the Pharaohs, London and New York, 1990, p. 108).

 

오셉의 이집트 이주가 의미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요셉의 발언 속에 나타난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이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6:13-14).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정착 농경민으로 430년을 보내게 됨으로 비로소 흩어지지 않는 큰 민족으로 형성되기 때문이었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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