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70인역’은 가장 오래된 <구약성서>의 번역본으로 히브리어 성서 원문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70'을 뜻하는 라틴어 septuaginta에서 유래한 '70인'이라는 명칭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뽑은 72명의 번역자들이 각각 독방에 들어가 〈구약성서〉 전체를 번역했는데, 그들의 번역이 모두 동일했다는 후대의 전설에서 유래했다. 사실 토라(율법서)와 후대의 번역본은 문체와 용례가 많이 다르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사용한 언어는 주로 그리스어였으며, 그리스도교도들은 그리스도가 성취했다는 예언들을 70인역 본문에서 인용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성서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라고 간주하고 70인역 사용을 중단했다. 히브리 정경은 토라· 느비임(예언서)· 케투빔(성문서)의 3부분으로 나뉘는 데 비해, 70인역은 율법서·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의 4부분으로 나뉘며 외경들도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오늘날 서방세계 대부분의 성서 역본들은 계속 이런 식으로 구분되었으나 개신교 역본들의 경우에만 외경을 빼거나 따로 묶는다.

언어분석 결과 토라, 즉 모세 5경(처음 5권)은 BC 3세기 중반에, 나머지 부분은 BC 2세기에 번역되었다고 한다.

3세기에 오리게네스는 70인역에 끼어든 필사자의 오류들을 바로잡으려고 시도했는데, 당시 사본에 따라 여러 가지 많은 오류가 있었다. 다른 학자들도 70인역을 좀 더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 히브리어 본문을 참조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 대한 고대 라틴어역· 콥트어역· 에티오피아어역· 아르메니아어역· 그루지야어역· 슬라브어역, 그리고 아랍어역 일부의 주요근거가 된 것은 히브리어 성서가 아니라 바로 70인역이었다.

그리스 정교회는 70인역을 〈구약성서〉 표준역본으로 인정해왔으며, 히에로니무스는 이 역본을 가지고 불가타 〈구약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교권에서 보존한 70인역은 히브리 정경의 모든 책 외에 소(小)예언서들과 몇몇 책들을 구분했으며, 개신교도들과 유대인들에게는 외경으로, 로마 가톨릭교도들에게는 제2정경으로 알려진 부수적인 책들을 덧붙였다.

70인역의 본문은 몇몇 초기의 사본들에 실려 있지만, 그 사본들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 이 가운데 잘 알려진 사본들은 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바티칸 사본'(B)과 '시나이 사본'(S), 그리고 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알렉산드리아 사본'(A)이다. 그밖에도 이전에 제작된 수많은 파피루스 단편들과 후대의 많은 사본들이 있다. 최초의 70인역 인쇄본은 '콤플루툼 학파 대역성서(對譯聖書)'(1514~22)에 실려 있다.      

 

칠십인역(Septuagint)이란 용어는 흔히 히브리 성경의 헬라어 번역으로 간주된다.

마치 불가타가 라틴어 번역이고 페쉬타가 시리아어 번역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말하면, "칠십인역"과 같은 것은 없다. 무슨 소리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칠십인역(랄프판 또는 브랜튼판)은 "절충판"인데, 무슨 말인가 하면 구약 히브리어 본문의 최초 번역인 헬라어역의 근사치에 가깝도록 재구성한 가장 신뢰할만한 헬라어 사본의 모음집이다.

따라서 우리가 칠십인역이라 할 때는 단일 본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수백년 동안 수많은 서기관들에 의해, 여러 장소에서 제작된 헬라어 번역 모음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통상적으로 오늘날 칠십인역이라는 말은 히브리 성경의 다양한 헬라어 번역판들을 언급하는데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외경이라 부르는 책들도 포함한다.

성격상 다소 전설적이긴 하지만 주전 2세기에 기록된 아리스테아 서신이 칠십인역의 기원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이 서신에 의하면 이집트 왕 프톨레미 필라델푸스(주전 285~246 통치)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자신의 도서관에 보존하기 위하여 히브리 성경의 번역본을 의뢰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72명의 번역자들이 토라(모세오경)를 헬라어로 번역하기 위하여 파로스 섬으로 보내졌다.

70을 의미하는 "셉투아진트"라는 용어는 사실은 72를 뜻하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서 여섯 명씩 선발된 사람들이 이 번역작업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72가 사사오입 원리에 따라 70으로 줄었으며 로마숫자 LXX 으로 표기된다. 히브리 성경의 나머지는 다음 세기에 계속하여 여러 사람들에 의해 번역되었다.

2.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이 왜 필요한가?

히브리어는 바벨론 포로기부터 사용이 중지되었으며(참고, 느13:24) 아람어가 유대인의 공용어(lingua franca)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등장과 헬라 제국의 부상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헬라화되었으며, 특별히 이집트 프톨레미 왕국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헬라어는 제1언어가 되었다. 따라서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칠십인역이 최초의 으뜸가는 번역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칠십인역 학자들의 주요 연구분야 중 하나는 서기관들이 채택한 번역 방법(들)이다. 예를 들면, 번역자들이 문자적 번역 (word for word) 방법을 선택했나 아니면 역동적 동등성 (dynamic eqivalence) 의 방법을 선택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일부 책들은 문자적으로 번역하였으며 또 일부는 영어의 Living Bible처럼 의역한 것도 있다는데 학자들은 동의한다. 이 헬라어 번역 사본은 히브리 성경에 대한 가장 이른 증거가 되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번역한 칠십인역은 본문비평에 상당한 도움을 주며, 의역으로 번역한 부분은 신구약 중간시대의 유대 신학, 철학, 종교 관습 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3. 칠십인역은 신약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어떤 헬라어 학자는 이런 말을 하였다. "칠십인역을 한 시간 애독하는 것이 주석 작업을 하느라 온종일 애쓰는 것보다 바울서신을 주석하는데 있어서 훨씬 더 효과적이다." 칠십인역은 신약성경에 관심을 갖는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칠십인역이 신약성경에 영향을 끼친 몇 가지 분명한 방법이 있다. 예를 들면,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칭호 "그리스도" (χριστος) 는 히브리 단어 메시아 (משיח,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칠십인역에서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들, "영광"(δοξα), "주"(κυριος), "복음"(ευαγγελιον) 같은 단어들은 모두 칠십인역에서 온 것이며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칠십인역의 가장 중요한 연구 분야 중 하나는 신약성경의 구약 인용이다. 그 이유는 신약성경이 인용한 구약은 대부분 히브리 성경이 아니라 칠십인역에서 왔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는 약 300 여개의 구약 인용구절들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신약저자들은 구약을 문자적으로(word for word) 인용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주석 방법을 이용하여 구약본문을 의역해서 인용하였다. 하지만, 구약본문을 문자적으로 인용한 경우에는 맛소라 본문보다 칠십인역을 75퍼센트 더 많이 인용하였다. 학자에 따라서는 90퍼센트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이것은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신약 저자들이 칠십인역을 인용함으로 특별한 신학적 관점을 제시하려는 의도가 있었는가? 아니면 단순히 편의상 번역성경을 사용했는가? 이것은 현대 설교자들이 번역상의 미묘한 차이와 주석적 차이에 상관없이 개역개정이나 개역판 또는 표준새번역 등을 인용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태복음은 칠십인역을 문자적으로 인용하는 경향이 강하다. 1:23은 이사야 7:14을 인용했는데 처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마(עלמה)를 칠십인역은 정확하게 παρθενος(처녀)로 번역하였다. 칠십인역에서 παρθενος 는 주로 히브리어 בתולה (처녀)를 번역한 단어이다. 물론 신약성경의 각 본문은 독립적이고 신중하게 연구해야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칠십인역 인용의 선호도와 우리가 사용하는 핵심적인 신학용어는 칠십인역을 진지하게 대할 필요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4. 칠십인역은 유대신학의 이해에 도움을 준다.

칠십인역은 중간시대의(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대 신학과 예배관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모세오경의 칠십인역본은 제단에 대한 히브리어 מזבח 를 번역할 때, 유대인의 제단을 말할 때는 θυσιαστηριον 으로 옮겼는데 반하여 이방인의 제단을 말할 때는 βωμος 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명백히 번역자들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예배관습을 차별하려는 신학적 의도가 있음을 반영한다.


칠십인역에서 발생하는 신학적 해석의 범위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별히 헬라어 번역이 히브리 성경과 유의미하게 다른 경우는 더욱 그렇다. 어떤이들은 번역자의 주된 목적이 성경을 그 독자들에게 알기 쉽도록 하는 것이라고 본다. 또 다른 사람들은 번역자의 과업이 신학적이고 해석학적인 동기부여를 받아서 공동체를 위하여 성경을 재해석하고 그 상황에 실현시키려는 것이라고 본다.

이 논쟁을 설명하는 한 예는 이사야 53장 10절에 나오는 종의 노래에 대한 헬라어 번역인데 맛소라 본문과는 상당히 다르다.

맛소라 본문: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칠십인역: "주께서 그의 상처를 정결하게 하시기를 원하사"


칠십인역자는 왜 히브리어 "상함"을 "정결"로 번역하였을까? 어떤 학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악의적인 행동과 관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번역자가 종의 고통을 완화시켰다고 보았다.



또 다른 견해는 칠십인역자가 비교적 희귀한 히브리 단어의 의미를 알지 못해서 오역한 것으로 본다.

세번째 가능성은 번역자가 맛소라 본문과는 전혀 다른 본문을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5. 칠십인역과 히브리 성경과의 관계

학자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구약성경의 모든 책에서 칠십인역과 히브리 성경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 5장과 10장에 나오는 족보에서 큰 차이가 발견된다.


구약성경의 대부분의 책, 특별히 민수기, 여호수아, 사무엘서, 열왕기서에서 더해지거나 빠진 부분이 있다.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는 주요한 연대기적 구조가 바뀐다. 칠십인역의 시편은 한장이 추가되었으며, 예레미야서는 히브리 성경보다 훨씬 짧다(1/8). 마지막으로 다니엘서와 에스더서의 칠십인역은 히브리 성경보다 더 추가된 부분이 있다.

가장 초기 본문 또는 원본을 결정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비평에 참여하는 학자들은 헬라어와 히브리어 사본 사이의 차이들을 조사하고 분석한다. 그들은 사본들 사이의 관계와 신뢰성을 결정하기 위하여 구약성경의 여러 단계들과 더불어 이 차이들을 고려한다.


이 연구는 히브리 성경(BHS, BHQ, HUBP)과 헬라어 성경(캠브리지 또는 괴팅겐 칠십인역) 의 비평본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때로는 현대 번역본들에 영향을 끼친다. 영어나 한글과 같은 현대어로 번역할 때에 이 본문들이 최선의 구약성경 번역을 결정하는데 사용된다.


칠십인역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것은 구약과 신약에서 중요한 단어와 신학적 개념들에 많은 도움이 된다. 또한 예수님과 신약의 저자들이 살았던 시대의 종교적, 정치적 맥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어떤 사본이 가장 신뢰성이 있으며, 구약성경의 신뢰할만한 번역으로 이어지는지를 결정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또한 히브리 성경보다 칠십인역을 더 많이 인용했던 교부들에 관한 깊은 통찰력을 얻는데 큰 도움을 준다. 따라서 칠십인역의 중요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해야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고덕길 목사 (이슬라마바드 한인교회)

 

칠십인역
기원전 300년경에 번역되거나 집필된 고대 그리스어인 코이네 그리스어(헬라어)로 작성된 구약성경(또는 히브리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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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인역(70인역, 七十人譯, 라틴어: septuaginta, '70'을 의미, LXX)은 현재 존재하는 구약성경 번역판 중 가장 오래된 판본 가운데 하나이다. 기원전 300년경에 고대 그리스어인 코이네 그리스어(헬라어)로 작성되었으며, 현대에 제작된 많은 기독교 구약성경의 원본으로 사용되었다. 현재까지도 동방 정교회에서 공식 전례 본문으로 인용하고 있다. 히브리어 성경을 정경으로 인정하는 유대교에서는 정경으로 취급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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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전승에 따르면 히브리인의 경전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으로, 기원전 3세기 중엽 부터 기원전 1세기 까지의 기간에 걸쳐, 조금씩 번역 및 편집된 내용들을 집성한 것이다.


칠십인역의 명칭인 '70'을 의미하는 셉투아진타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존재하나, 위서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따르면, 이집트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의 명으로, 이스라엘의 12지파에서 각각 6명씩 파견된 72명의 유대인 번역자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72일간 '율법'(모세 오경)을 번역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단, 이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자체는 70인역이 번역된 시기의 문장을 흉내내어 작성된 후대의 문서로 보며, 따라서 이 문서 자체의 신빙성에 관하여는 부정되어 있다) 72인에 의해 번역된 성경이 언제부터 '70인역'으로 불리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1세기 경의 저술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저서 유대 고대사에서 70인의 장로와 2명의 사자가 알렉산드리아에 파견되었다는 기술이 남아 있어, 적어도 1세기 경에는 70인역이라는 명칭이 통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통적으로 70인역으로 편집된 내용은, 히브리어 및 아람어로 작성된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번역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제외된 문서 가운데 유대인에 의해 작성된 문서로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사이에 완성된, 오늘날 외경 및 위경 등으로 분류되는 문서들 또한 포함되어 있다. 또한 원문이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작성된 것으로 여겨졌으나, 그리스어, 시리아어, 라틴어, 이디오피아어로 된 내용만이 전해지는 문서들도 있다. 토비트처럼, 나중에 사해 문서에서 아람어로 적힌 내용이 발견된 것도 있는가 하면, 제2, 3, 4 마카베오서 처럼, 처음부터 그리스어로 저술된 내용도 70인역의 일부로 존재한다.


현존하는 70인역의 여러 사본(寫本)들은 기원전 3세기경부터 복잡하게 전해져 내려오던 사본들을 오리게네스가 헥사플라에서 집대성하여 편집한 것이다.

성립 배경
70인역이 제작된 시기적 배경으로는, 당시에는 이미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아람어를 사용하게 되며 사어가 된 히브리어를 읽지 못하는 그리스어권에 사는 유대인이 많았으며, 이들의 이용을 위해 번역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른바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헬레니즘에 경도되게 되나, '헬레니스트'(Hellenist)로 불리는 그리스어를 모어로 하는 유대인들은, 알렉산더 3세의 원정 이래, 일정정도 증가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외교문서 또는 교역 관련 문서가 번역되는 경우는 어느 시대에서도 있었을 것이나, 구약성경과 같이 어느 정도 이상의 분량에 율법, 이야기, 시문, 잠언 등의 여러 종류의 문서가 묶여진 서적이 번역되었다는 점에서, 인류사 관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신약성경의 내용에는 구약성경에 해당되는 성경 구절을 인용할 때 이 70인역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신약성경에 포함되는 여러 서간의 저자로 일컬어지는 사도 바울로의 경우, 히브리어 및 아람어의 독해가 가능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나, 그의 서간에서는 일부 인용에서 70인역이 사용되고 있다. 히에로니무스 또한 구약성경의 번역에 이를 참조했다고 한다. 한편 르네상스 이전의 서유럽에서는, 히브리어를 아는 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70인역이 긴요히 사용되었을 것이다. 정교회에서는 70인역을 구약의 정경으로 사용하여, 번역본을 만들 때의 원본은 마소라 본문이 아닌 70인역인 경우가 있다.


이렇듯 바울로를 필두로 당시의 사도들이 인용한 구약성경은 그리스어판의 성경인 70인역이었으며, 따라서 이 70인역은 기독교 연구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70인역은 라틴어, 아르메니아어, 콥트어, 이디오피아어, 조지아어, 고대 슬라브어 등의 초기 기독교회의 각 교회에서 구약성경이 번역될 때의 그 바탕이 되었다.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통역, 또는 번역할 경우 바탕 언어로 말하거나 기술한 내용의 이해가 전제조건이라는 점에서, 70인역 가운데 히브리어 및 아람어에서 번역된 부분은, 구약성경의 가장 오래된 성경해석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70인역은 단순히 히브리어 및 아람어의 구약 원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또는 그 배경이 되는 원전의 재구성을 위한 본문비평을 위해서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70인역을 현대어로 번역하여 여기에 주석을 붙이는 '알렉산드리아 성경'(La Bible d'Alexandrie(영어판))과 같은 판본도 존재한다.


가장 오래된 70인역의 사본은, 파피루스의 일부 단편이 존재하나, 그 외에 바티칸 사본, 시나이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 등, 4~5세기 경의 거의 완전판의 사본이 현대에 남아 있다. 이는 히브리어의 가장 오래된 사본인 레닌그라드 사본(1008년) 보다 훨씬 오래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기원전 4,5세기 경의 히브리어 원전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70인역은 구약성경의 본문비평 작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물론, 70인역의 중동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코이네 그리스어로 번역하면서 번역 단어가 원본 단어와 완전히 일치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제는 번역에는 언제나 존재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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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70인역에 포함되는 문서의 수는 현존하는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사본 보다 많으며, 필사본을 비교하면 동일한 내용에 일부 문장 구조나 단어가 다른 문서 또한 존재한다. 기독교도가 70인역을 자신들의 경전으로 삼는 것에 대해, 1세기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 유일하게 남은 유대종교의 바리새파는 기원후 90년 새로운 바리새파식 유대교를 규정하는 얌니아 회의에서 히브리어 사본이 없는 문서의 배제를 결정하여, 이것이 현재의 마소라 본문의 범위를 결정하였으며, 이 당시 배제된 문서를 유대교에서는 외경으로 취급한다.


기독교에서도 구약성경 부분의 엄밀한 범위를 얌니아 회의에서 확정한 정경의 범위를 받아들이는 신학자가 존재한다. 한편 역사적으로 중세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도의 구약성경은 70인역과 거의 같았는 설 또한 있어, 현재도 로마 가톨릭 및 동방정교회에서는 이를 전통으로 따르고 있다.


70인역의 문서 가운데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근대에 들어와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의 사본이 발견된 문서 또한 존재한다.[1]


마르틴 루터는 구약성경의 바탕을, 히브리어 및 아람어 사본이 있는 것, 즉 마소라 본문 만을 채택했다. 이 영향으로 현대의 개신교의 많은 종파에서는 70인역에만 포함되는 문서를 구약의 외경으로 취급, 성경에 포함되지 않는 문서로 본다. 개신교의 일부(프로테스탄트 성서 주의 등)에서는 얌니아회의 이전부터 구약성경에는 정경으로서의 권위가 있었다고 전제를 두며, 유대교의 얌니아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정경 및 외경의 구별이 존재했다고 전제하고 있다. 한편, 성공회는 성서정과 등에서 집회서를 일부 인용하는 등, 개신교의 일부에는 외경의 일부를, 준(準) 정경 형태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근대에 들어서, 현재의 사본에 기초한 학문적인 70인역의 교정본을 출판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랄프스(A. Rahlfs)는 몇몇 사본을 바탕으로 셉투아진타(Septuaginta)를 1935년에 출판하여, 이는 지금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보다 조금 늦게 독일어권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현존하는 많은 수의 사본, 70인역의 옛 번역판, 고대 교회의 교부들의 70인역의 인용 등을 검토하여, 원시 70인역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학문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출판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완성되지 않았다. 괴팅겐에 있는 70인역 연구소에서 출판했기

때문에 괴팅겐 70인역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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