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언

 

1998년 가을에 모 재벌 회장의 자신을 화장해 달라는 유언이 우리 사회에 화장 문화에 대한 대토론을 이끌어 낸 적이 있다. 1995년 보건복지부의 추산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역의 묘지 면적은 982㎢로서 주택 면적 총대지 1,937㎢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고, 전국에 있는 전체 분묘 수는 1,961만 기로 서울 면적의 1.6배, 전국에 있는 공장 부지의 1.2배 정도이며, 그 중 800만 기가 무연고 무덤이라고 한다.

 

1년에 약 20만 기(약 30만평)의 무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것은 여의도 면적의 1.2배 정도의 땅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장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절실히 요구되어지고 또한 실천에 옮겨져야 한다고 본다.

 

모든 사람은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육신의 죽음은 당사자는 물론 당사자와 관련된 모든 사람과 이별을 고하게 한다. 그러나 죽은 이에 대해 어떻게 이별을 고하는 방법의 문제에 있어서 사람에 따라, 사회에 따라, 특히 종교에 따라 현격하게 상이한 양상을 띠고 있다.

 

특히 유교, 불교 그리고 샤머니즘의 문화적인 전통이 뿌리 내린 한국 사회에 짧은 전통을 지닌 기독교는 장례 문화에 있어서 기독교적인 장례 문화를 정착하기에는 아직도 상당한 진통과 시련이 남아 있으리라고 본다.

 

이런 현실에서 기독교적인 장례문화의 정착을 위한 시도로 장례에 관한 교회사적인 변천과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것은 유교적인 장례문화의 전통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장례문화를 재고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며, 어떻게 장례를 기독교적으로 치를 것인가는 복합적인 종교 사회 안에 있는 한국 교회에 최소한 장례문화의 정체성을 세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장례식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음에 임하는 태도이다. 기독교에 장례 문화의 새로운 장을 연 루터의 글을 통하여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죽음에 임해야 하는가를 알아보고 그의 장례식 설교를 통하여 의식과 제식에 그치는 장례 예배가 아닌 복음적인 장례 예배를 연구하고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II. 장례문화에 대한 교회사적 이해

 

1. 고대 교회

 

고대 교회에서 장례는 시체를 치우는 일의 기술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교회에서 가치있게 여겨진 장례는 인간적이고 기독교적인 의무와 경건의 계명이었다. 기독교 이전에 있었던 장례에 관한 예전과 풍습이 고대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며 이것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그러므로 고대 교회의 통일된 장례식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명한 것은 바로 이 적응이 기독교적인 논증을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어거스틴은 장례에 대한 기독교인의 의무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죽은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사람이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이며 부활을 맞이하는 사람이다(Cur. 18).

 

이러한 사실로부터 죽은 사람에 대한 자비로운 마지막 일들이 정당하게 여겨졌다. 사람이 숨을 거두고 나면 죽은 사람의 눈과 입을 막아주었다. 죽은 사람을 씻고 아마포로 덮어 주었다(Tertullian, An. 42; Prudentius, Cath. 10). 왕, 감독 그리고 사제에게는 때때로 그의 제복을 입혀 주었다(Eusebius, V.C.IV, 66 u.a.). 그 후 시체는 관에 눕히고 무덤으로 옮겨졌다.

 

매장은 처음부터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유일하고 타당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에서 예수의 매장은 확실히 무조건적인 모범으로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장례는 늦어도 2세기부터 교회의 과업이 되었다.

 

스스로 기독교인들의 강력한 대적자라는 아포스타타(Julian Apostata)는 기독교를 확장시키는 주요인으로서 죽은 사람들의 무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돌봄을 치겨세우며 내세우고 있다. 근본적으로 여기에는 육신의 부활에 대한 믿음 뿐만 아니라 구원에 참여하는 육신의 영광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순교자에게 있어서 무덤과 신성한 장소는 일치하였다. 근본적으로 死者 崇拜(Totenkult)는 무덤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고대 교회에서 묘지는 거룩한 장소에 속했으며 땅 위나 땅 아래에 자리 잡았다.

 

로마에서 기독교인들은 제2세기부터 4, 5세기까지 혹은 더 오래동안 죽은 이를 카타콤베(???? ??????, catacumbae; 이 이름은 "좁은 골짜기를 따라"라는 뜻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원래 로마 근교의 제바스티안의 카타콤베인데 각 묘지를 정해 놓고 표시하였다)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지하 묘지(특히 로마, 남 이탈리아,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몰타, 북 아프리카, 리비아)에 장사지냈다.

 

제8세기부터 붕괴하기 시작한 로마의 카타콤베가 1593년부터 안토니오 보시오(Antonio Bosio)에 의해 1849년부터는 데 로시(de Rossi) 그리고 1883년부터 빌페르트(Joseph Wilpert)에 의해 탐구되었다.

 

하나의 장례 양식에서 다른 양식으로의 교체는 제2세기로 넘어갈 때 일어났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을 근거로 하여 나타난 관습은 아무런 큰 어려움 없이 일반적인 변화 안에 삽입되었다. 구약 성경적이고 로마적인 관습에서 나온 장례의 세부사항들(예를 들면 주거지로부터 떨어진 곳에 안장하는 것)은 제4세기의 문서에서부터 정확하게 나옴을 알 수 있다.

 

이런 일들로는 시신을 씻는 일, 수건으로 덮는 일, 수의, 입관, 곡(Conclamatio), 기름 바르기, 도유, 상복, 밤샘, 운구, 장례 행렬, 시편 찬송, 죽은 이에 대한 작별인사, 부장품들이 있다. 덧붙혀서 5일, 7일, 30일째 되는 연례기념일에 성묘하는 것과 40일간의 애도, 성만찬(영원한 구원을 위한 제사로서)이 있었다.

 

때때로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의 얼굴이 동쪽을 향하도록 장사하였다. 이것은 그곳으로부터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의미가 있었다. 무덤은 꽃들로 장식되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 장례와 죽은 자에 대한 제식은 전반적으로 죽은 사람에 대한 의무를 완수해야 할 가족의 일이었다.

 

또한 장례는 교회에서 교회의 의무가 되었다: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구성원은 신자들의 공동체로부터 소환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기도와 시편의 찬송으로 그를 무덤까지 수행하였던 것이다.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340/50-420)는 이미 이것을 "기독교의 전통(christiana traditio)"이라고 했다.

 

닛사의 그레고르(Gregor von Nyssa, ca. 330-395)는 그의 자매 마크리나(Macrina)가 죽었을 때 처녀들이 시신 옆에서 기도하고 찬송했으며 그후 함께 온 교인들이 시편을 교창(交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시편 101편이 교창되었다 (Conf. IX,12). 교회는 예배 순서에 들어있는 기도에서 큰 소리의 조사가 아닌 평온한 기도로 교회에 어울리는 슬픔을 표현하였다. 이것은 바로 예배 의식의 기도로 발전하였다.

 

로마 교회의 성사집에는 임종과 장례에서 사용되는 기도 모음집이 들어있다. 이런 것들로는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그레고리의 성사집(Sacramentarium Gregorianum)에 들어 있다: 임종시의 기도들(Orationes inagenda mortuorum), 죽은 사람의 몸을 씻고 난 후의 기도(Orationes post lavationem corporis), 무덤에 묻히기 전의 기도들(Orationes ante sepulcrum, prius sepeliatur), 장사 이후의 기도들(Orationes post sepultum corpus).

 

죽은 사람들을 위해 제물을 바치는 것과 기도를 드리는 것은 후에 신학적으로 문제되었다. 터툴리안(ca. 160-ca. 220)과 카르타고의 시프리안(ca. 210-258)은 이 두 가지를 언급하였다. 고대 교회에서 장례식의 아주 구별되고 확산된 전통이 사도적인 법령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죽은 다음 3일째 되는 날에 죽은 자를 위한 예배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3일째 되는 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9일째 되는 날에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최고의 기념제가 열리며 40일째 되는 날에도 이와 같은 기념제가 열리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매우 오랫동안 애도한데서 유래하였다(신 34:8); 죽음을 기념하는 날에는 죽은 사람의 구원을 기원하는 성찬식이 행해졌다.

 

어거스틴은 '죽은 사람을 위한 보살핌에 관하여(De cura pro mortuis gerenda)'에서 죽은 자를 위한 중보의 기도의 유익에 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18,22): "거룩한 관례에 따라 제단에 있는 제물과 우리들의 기도와 구제의 제물을 통해 우리가 죽은 자들을 위해 탄원한 바로 그것이 죽은 자들에게 유익하다.

 

물론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것이 그들 모두에게 유익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 동안 중보기도의 축복을 확실하게 한 사람들에게만 유익하다는 것을 유보로 한다. 우리는 공을 세운 사람이 누구인지 식별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중보기도를 거듭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바쳐야 한다.

 

그렇게 하면 중보기도를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거나 받아야 할 사람 가운데 지나쳐 버린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될 것이다. 중보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중보기도가 부족한 것보다는, 중보기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는 중보기도의 잉여가 더 낫다."

 

마지막으로 고대 교회의 공동묘지와 무덤의 형태에 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평지로 된 공동묘지에 매장(나무관이나 벽돌로 된 무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은 개인묘지에 가난한 그리스도인들과 묘지를 함께 나누었다. 교회 묘지(Coemeterium)는 자유인들의 무덤 옆에 있는 황제의 빌라에서 시작되었다.

 

공동묘지는 제3세기 로마에서 정확한 경계가 없는 시의 외벽 밖에 있는 토지에서 시작되었다. 3세기의 초반부터 유래된 카타콤베는 가장 오래된 지하 대 묘지였다. 박해를 받던 시대에 사람들은 순교자 무덤들로부터 가까운 곳을 찾았다. - 무덤은 일반적으로 3가지 형태를 띠었다:

1. 최상급: 장식이 있는 석관, 2. 아르코졸(Arkosol) 무덤: 땅으로부터 팽팽하게 반원형의 화살 모양으로 쌓아 올려진 무덤, 3. 가장 단순하고 흔한 무덤: 측면이 긴 좁은 면을 가진 무덤.- 평화로운 시대에는 때때로 전 주거지역 주위에 교회묘지를 지닌 교회당이 성인숭배를 위해 건축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사도교회는 왕후의 영묘를 교회 안에 두고 있다. 이 교회의 원형으로 된 무덤 건축물 안에 콘스탄틴 대제의 석관은 12 사도의 가상 무덤으로 둘러 싸여 있다. 제5세기의 후반부터 무덤은 도시 안에 자주 생겨났다. 여러 종교회의에서 반대하였지만 6세기부터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무덤들이 도시 교회 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2. 중세 교회

 

고대 교회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 제물을 바치고 기도를 드리는 신학적인 입장으로부터 중세 시대에는 '죽은 사람들을 위한 미사(missa pro defuntis)'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마침내 '로마의 의식(Rituale Romanum)'으로 정착되었다.

 

여기에서 위령미사(Exequien)는 발인하기 전에 고인을 축복하고 보내는 교회의 의식, 초상집으로부터 교회로 운구, 시신을 다루는 예식(Totenoffizium), 죽은 이를 위한 미사(Requiem), 교회에서 사죄(Absolution), 좁은 의미에서 매장, 3일, 7일, 30일째 되는 날과 매해의 죽은 이에 대한 기념의 날을 포함하고 있다.

 

라틴교회의 법전(Codex Iuris Canonici, CIC) 1204와 1231조는 위령미사라는 개념 아래 교회에서 행해진 의식만을 포함시키고 있으며 원래의 매장(depositio)과 구별짓고 있다.

 

중요한 것은 위령미사가 의식적인 순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은 이가 예배 의식서적으로 정해진 행위와 교회의 기도에 의해 마지막 시간으로 인도 받는데 있다. 임종에 가까운 사람들은 임종의 성사, 회개, 성만찬 그리고 환자에게 바르는 기름과 임종 기도(commendatio animae)를 받을 수 있다.

 

이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이 세상으로부터 그곳으로 인도하소서 …"라는 요청으로 시작되며 속죄에 대한 청원과 聖人들을 불러내면서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로 이루어진다. 숨을 거둘 때는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스데반의 기도를 말한다: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46) 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행 7:59).

 

숨을 거두면 바로 위령미사가 시작된다. 이 의식은 시신이 얼마 동안 집에서 관대에 얹어 놓은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의식은 시체에 聖水를 뿌리는 일로 시작된다. 사제는 죽은 이를 위해 시편 130편을 낭독한다. 그후 죽은 이는 십자가를 앞세우면서 시편의 기도를 하면서 가는 행렬을 따라 교회 안으로 옮겨지게 된다.

 

교회의 중앙에 시신이 안치되는데 죽은 이의 발이 제단을 향하게 되며, 죽은 사제의 발은 회중을 향하여 안치된다. 그 다음으로 소위 시신을 다루는 예식(Totenoffizium)이라고 말하는 모든 영혼에 대한 특별한 경본 기도의 형식이 수도원에 속한 사람들과 동료들을 위해서 이어진다.

시작이라는 라틴어인 인트로이투스(Introitus) 그리고 죽은 이를 위한 미사라는 라틴어인 레쿠비엠(Requiem)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장례미사라고 불리는데 이것만 일반적으로 행해진다. 일반미사에서는 서원미사와 마찬가지로 '나를 판단하소서(Judica me)', '영광(Gloria)', '나는 믿습니다(Credo)'와 같은 몇 가지 부분이 빠졌다;

 

금식기간과 회개의 성격을 지닌 그 외의 날에 할렐루야 자리에 속창(Traktus)이 온다. 그 다음에 두 개의 성경구절들 사이에 읽혀지는 속송(Sequenz)인 디에스 이레(Dies Irae: 분노의 날)가 온다. 여기에 조사가 이어질 수 있다.

 

조사는 옛날부터 공식적으로 특별히 뛰어난 인물에게만 널리 행해졌다. 1501년 루엔(Rouen)의 종교회의는 글로리오시(gloriosi, 영광스러운), 일루스트레스(illustres, 밝은) 와 베네 메리티 세르모네스 푸네브레스(bene meriti sermones funebres, 장례식 설교의 선한 공로)만을 인정하였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사면(Absolution)은, 여기에서 불러지는 찬송의 첫 구절이 리베라(Libera me, Domine, de morte aeterna…: 나를 구원하소서, 주여, 영원한 죽음으로부터…)라고 불러지기 때문에 리베라라고도 불러지는데 제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 전통은 죽은 이의 생명을 시험해보는 행위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인데 죽은 이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주여, 나를 죽음의 날에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소서. 그리고 난 후 시신을 무덤으로 옮긴다. 이 때에 인 파라디숨(In paradisum, 낙원에서)이라는 답창가(Antiphon)를 부르면서 간다. 무덤에 도착하면 무덤을 축성하는데 전체 무덤을 축성하는 것은 아니다. 관에 성수를 뿌리고 향(Inzensation)을 피운 후 죽은 이를 묻는다.

 

이 때에 "수메 테라, 쿠보드 투움 에스트; 테라 에스 에트 인 테람 이비스(당신의 것인 흙을 맞아들이소서; 당신은 흙이오니 당신은 흙으로 가나이다)" 라는 형식을 지닌 말을 자주 하기도 한다. 그리고 통례적으로 "메멘토 호모, 쿠비아 풀비스 에스 에트 인 풀베렘 레베르테리스(memento homo, quia pulvis es et in pulverem reverteris, 인간이여, 너는 흙이며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임을 기억하라)"라는 말과 함께 땅을 세 번 파 올린다.

 

그 후 시편의 여러 찬송(시 42, 118, 130, 132)과 눅 1:68 이하의 송가(Benedictus)를 부른다. 아이젠호퍼(L. E. Eisenhofer)는 이 송가를 "교회 장례식의 극점"으로서 불렀다: "이것은 교회의 장엄한 감사 찬송이며 교회는 이 찬송을 모든 풍성한 은혜로운 도움을 위해 주 하나님께 바친다.

이 은혜로운 도움은 죽은 이에게 세례로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그의 구원의 모든 원수들을 대항하도록 주어진다. 이와 동시에 죽은 이의 영혼에게 하나님의 면전에서 완전한 은총의 빛을 가능한 빨리 수여하도록 하는 의식적인 청원이 있다." 무덤에서의 일은 요한복음 11:25의 답창가와 죽은 이를 위한 중보 기도로 마치게 된다.

 

장례미사의 구조는 예배당에 시신이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praesente cadavere). 이것은 오늘날 가능하지만 매우 드문 일이다. 각 지역에 따라서 영안실에서 교회로 운구하지 않거나 시신을 영안실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기기도 한다.

 

위령미사는 무덤에 묻히기 바로 전이나 후에 드린다. 교회에서는 관 대신에 관과 비슷한 돌관 모양의 성 유물 상자(Tumba)를 놓기도 한다. 죽은 이의 실질적인 혹은 대용적인 현존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장례식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 있다.

 

죽은 이를 무덤으로 보내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은총과 기도를 얻게하며 그 스스로 사제의 입을 통해 참회자가 된다. 시신은 축성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를 위해 장례설교가 행해지기도 한다. 교회는 죽은 이를 영원의 문까지 데리고 간다.

 

교회 스스로 행동을 통하여 직접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기껏해야 회중에 게 죽은 이의 죽음이 간접적으로 경고될 따름이다. 신자는 직접적인 위로의 말로부터 위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이에게 의식을 행하는 교회의 현존과 신자의 기독교적인 자비의 사역의 참여로부터 받는다.

 

3. 종교개혁시대

종교개혁의 교회들은 죽음 이후에도 기도와 행위로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관념을 버렸다. 이미 1517년 면벌부 논쟁에서 루터는 95개 논제, 특히 제22항 이하에서 이러한 견해를 비판하였다. 개신교에서는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위령미사와 장례미사가 완전히 제거되었다.

 

특히 루터는 '弔歌 모음집의 머리말'(1542)에서 전통과의 논쟁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트의 기초가 되는 신학적인 총괄이 될 만한 언급을 하였다: "우리는 교회 안에 대축일 전야의 철야 기도(Vigilien), 영혼을 위한 미사, 의식, 연옥 그리고 죽은 이들을 움직이게 하고, 해치우고 그리고 순전히 없애 버리는 다른 모든 요술과 같은 교황적인 혐오를 가지고 있다.

 

우리 교회를 더 이상 초상집이나 고난의 장소가 되게 하지 말고 옛 조상들이 말한 것처럼 묘지가 되게 하자. 즉 잠자는 집 그리고 휴식처로 여기자. 우리의 죽은 이들과 무덤 옆에서 슬프고 괴로운 노래를 하지 말고 죄의 용서, 안식, 휴식, 생명 그리고 죽은 기독교인들의 부활의 노래를 부르자. 이로써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고 사람들은 바른 신앙으로 인도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장례를 정당한 것으로 여기고 실행하는 것은 공정하고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의 만족한 조항들, 즉 무서운 원수인 사망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의 부활에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한다."

 

세례식, 혼례식을 집례하는 직무(세례 예식서, 1529년에 나온 루터의 소교리문답과 관련된 혼례 예식서)와는 달리 통일되어 각 지역들을 관장할 수 있는 장례식 규범이 루터교 지역교회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주목을 받을 만 하다. 이것은 또한 개혁교회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와 함께 호평을 받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장례식이 "훌륭하게" 거행된 것에 더 많은 가치가 부여되었다. 이 개념은 16세기에 걸쳐서 수많은 교회규정들(Kirchenordnung)에 스며들어 있으며 공동체의 동의에 근거하여 규정되고 유래와 관습을 존중하며 복음에 따른 장례식을 나타내고 있다:

 

"장례식은 이웃과 친구들과 더불어 훌륭하게 거행되어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장례식에서 우리가 우리 가족에 대해서 가진 사랑을 표시하게 된다.

우리는 이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이들이 죽고 부활하며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먼저 보냄을 받았다는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게 된다. 부연할 것은 우리가 지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헤어질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시간을 주실 것을 또한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 (Pommern 1535: EKO 4, 342f).

 

이전과 마찬가지로 죽은 교인들에게 기독교적인 장례식을 치르는 일은 교회의 사랑의 의무였다. 이와 같이 기독교적인 사랑에서 온 교인에 대한 장례는 기독교적인 증거와 부활의 고백에 대한 동기를 일으키며 각 자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하며 복된 마지막을 청원하기 위해 주의를 준다.

 

이렇게 하여 장례식 규정들은 종교개혁적인 인식에 따라 피해야할 모든 것을 삼가고 있다; 주로 죽은 이와 그의 영혼의 구원에 관련된 행위에서 죽음에 대한 부활의 알림이 되었다. 이 기본적인 결정들은 개신교적인 장례의 형태에 표준적인 것이 되었고, 장례의 구체적인 집행에 더 광범위한 자유와 다양성을 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종교개혁의 시대로부터 장례식이 거행되는 지역적인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a) 무덤으로 가는 코스-교회에서 의식; b) 무덤으로 가는 코스-무덤에서 의식; c) 집 앞에서-무덤에서 의식; d) 집 앞에서-무덤에서-교회에서; e) 집 앞에서-교회에서 f) 집 앞에서. 여기에는 지방적이고 지역적이고 관습이 대단히 지켜졌다. 특히 독일에서는 널리 사회적인 계층에 따른 구별이 나타나게 되었다:

 

성직자 없이 대부분 일찍 무덤에 장사되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 학생들과 함께 한 교사에 의해 자주 이른 오후에 묘지로 운구되는 "중간층"의 시민 그리고 "모든 성직자들"에 의해 무덤으로 인도되는 "신분이 높은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있게 되었다(EKO 1,195).

 

그러나 이 세 계층들에 대한 장사는 논쟁의 여지가 있었으며, 이것을 폐지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알베르트의 작센에서는 1580: EKO 1,438, 1545년 Zerbst에서는 교사와 학생이 없이 장사를 지내서는 안됨: EKO 2, 293f).

 

독일의 다른 지역, 특히 남서부에서는 이러한 사회적인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장례는 "예배"를 통해 거행되었다. 당시의 높은 수준의 도덕성에서 장례에 대한 성직자들의 부담은 특히 설교가 장례와 연결되어 있었을 때 상당한 것이었음을 덧붙여서 참작해야만 한다.

 

그러나 모든 반박들에도 불구하고 설교는 특별하게 독회(讀會)와 나란히 유용되었으며 복음적인 장례는 신학적인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하여 수많은 교회규정들에 설교나 짧은 권면이 배열되어 있다. 이와 같은 복음적인 장례식에는 3 가지의 표식을 가지게 되었다. a) 부활에 대한 공식적인 기별, b) 사랑과 친절에 대한 증거, c) 각자의 죽음에 대한 훈계와 이의 준비에 대한 권면.

 

4. 화장에 대한 교회사적 관점

 

매장은 바빌론, 앗시리아 그리고 이집트에서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서도 논쟁의 여지가 없는 관습이다. 고대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을 매장했다. 시신을 화장하는 것에 대한 고대의 관습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처음부터 거절되었다. 중세 후기에는 화장이 전혀 행해진바 없음을 볼 수 있다.

 

게르만족, 켈트족 그리고 슬라브족에게 선교한 교회는 화장을 접했을 때, 이것을 이교도적인 것으로 낙인찍었다: 칼 대제는 784년 화장 금지를 엄하게 공포했다. 그러나 교회는 이미 화형으로 순교한 사람에 대한 관점에서 매장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결코 주장한 적이 없다. 오늘날에도 카톨릭이나 개신교 신학자들은 화장이 성경이나 교리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위반으로 성립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톨릭 교회는 화장을 악습으로 배척하였으며, 그 결과 카톨릭 교회법은 화장을 금하고 있다(CIC c. 1203,1); 1) 화장을 지시하는 사람은 교회식의 장례권을 잃게 된다(CIC c. 1240, 1,5). "위령미사는 다른 이유 때문에 화장을 해야하고 아무런 불쾌감을 주지 않은 곳에서 시작할 수 있다; 물론 성직자에게 화장터로 가게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Algermissen)". 어떻든 고대 교회에서 기독교의 적들은 화장을 교회를 대항하는 무기로서 여겼던 것은 확실하다: 177년 리용(Lyon)에서 사람들이 순교자의 시체를 화장하였고, 기독교인들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모욕하기 위해 재를 론(Rhone)강에 뿌렸다.

 

그후 17세기부터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교회와 멀어진 사람들은 화장의 고대 관습을 예찬하였다. 1797년 프랑스에서 혁명주의자들은 화장을 법률로 실시하려고 시도하였다. 1848년에 프랑스에서 다시 이러한 방향에서 새로운 정책이 추진되었다; 독일에서는 유물론자들인 폭트(Vogt)와 몰레쇼트(Moleschott)가 화장을 운동하였다.

 

1870년 이들은 이탈리아의 프리메이슨 비밀단원을 선전하였다. 1874년 영국의 화장협회(The Cremation Society of England)가 설립되었다. 지멘스(Simens)가 화장을 위한 근대적인 화덕을 건조한 다음 1876년 고타(Gotha)에서 최초의 화장터를 지었다.

 

1905년 막스주의자들은 "화장을 위한 무신론자 협회(Verein der Freidenker für Feuerbestattung)"을 결성하였다. 1920년대에 "프롤레타리아 무신론자들"은 화장과 교회로부터의 탈퇴를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카톨릭 교회는 화장에 대한 승인은 교회로부터 탈퇴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였다.

 

1885년 베를린의 개신교 고등 교회법원(Oberkirchenrat)은 목사가 목사복을 입든 안입든 화장에 참여하는 것을 금하고 있으며 1898년 "개신교 연맹 아이제나흐 대회(Eisenacher Konferenz ev. Kirchenregierung)"에서 "성직자가 화장터에 성직자의 신분으로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몇 년 후에 고타(Gotha)와 마이닌엔(Meiningen) 그 후 바덴(Baden), 헷센(Hessen), 안할트(Anhalt), 바이마르-아이제나흐(Weimar-Eisenach) 그리고 작센(Sachsen)에서 목사들에게 이와 반대되게 공식적으로 허락되었다. '구 프로이센 연합 교회(Altpreußische Union)'는 가장 늦장을 부렸다:

 

1925년에야 총회는 목사에게 화장에 대한 구속에서 자유를 주었다. 독일 루터교 연맹의 "생활규범"은 이제까지 통례적이던 루터교 목사가 카톨릭 신자의 화장에서 직무를 행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VIII, 3b).

 

멈출지 모르는 화장의 증가에 교회는 더 이상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1933년에는 109개의 화장터가 독일에 있었고, 1939년에는 459,271 건의 장례 가운데 46,091 건이 화장으로 치루어졌다(89.8 : 10.2.%). 오늘날에는 단지 화장에 대한 위생적이고 다른 실제적인 고려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독일 루터교 연맹(Vereinigte Evangelisch-Lutherische Kirche Deutschland; VELKD)은 1955년 "생활규범(Lebensordnung)" VIII, 10에서 다음과 같이 정하고 있다: "교회는 매장과 마찬가지로 화장도 공포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교인들에게 매장을 기독교적인 관습으로 권유한다." 루터교 예배 의식서 또한 화장에 대한 특별한 규정을 제공하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5. 성경적인 장례

성경적인 믿음의 장례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장례와 부활의 소망의 장례이다. 태초에 말씀으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믿는 자는 죽어서 형체가 있든지 없든지 그리스도의 날에 죽음에게 명(命)하시면 바다가 그를 내어 놓을 것이고 화장으로 재가된 물질에 대하여 명령하시면 한곳으로 모으실 것이다. 마치 에스겔에게 보인 환상처럼 주님 안에서 죽은 자가 부활할 것이다.

 

매장(埋葬)은 물적인 시간에서 천천히 산화(酸化)하고 화장(火葬)은 물질적인 시간을 촉진하는 차이 일뿐이다. 주님 안에서는 서서히 산화(酸化) 하든지 빠르게 산화(酸化) 하든지 똑같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주님의 복음 때문에 화형(火刑) 당한 순교자를 주님께서 기억하심 같이 기억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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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埋葬)은 결국 무덤 숭배를 남긴다.

 

종교개혁자요 장로교 창시자인 칼빈은 생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해서 교회를 창립하자 그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건너가서 장로교회를 세웠다.

또한 칼빈의 영향을 받은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유럽 각지로 흩어져 개혁교회들을 세웠다.

칼빈의 무덤으로 가는 길에 여기저기 화려하고 멋진 여러 무덤들이 있었다.

이렇게 크고 웅장한 무덤도 있었고... 마치 성경?을 표현한 듯한 무덤도 있었다.

큰 십자가를 세워 놓은 무덤도 있었다.

 

그런데 칼빈의 무덤은 그들의 무덤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도 볼품 없어 보였다.

이것이 칼빈 묘비이다. 1560년에 제네바에서 칼빈을 받아들이게 된다.

‘왕들의 묘지’라고 하는 이곳은 정치가, 교육가, 자선사업가 등 위대한 사람들만이 매장될 수 있다는 곳으로 이곳에 칼빈의 묘가 있다.

칼빈이 근검하게 살다갔기 때문에 그의 장례절차도 검소하게 치루어졌고, 그 묘비도 처음에는 J. C.라고만 적었다고 한다.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 달라” 는

유언을 남긴 그의 유언을 따라 제네바에 가면,

요한 칼빈의 무덤이라는 첫자 이니셜 이름만 있었다고 한다.

곧 칼빈은 제네바에서 죽으면서 자기를 성자로 숭배하지도 말고,

묘비도 세우지 말고 일반묘지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하고 1564년 5월 27일에 서거했다.

그래서 수백년이 지나도록 그의 무덤을 찾지 못하였다.

그의 무덤을 찾은 것은 최근의 일이라고 한다.

 

칼빈의 무덤을 찾다가 I.C.(Iohan Calvin)라는 이니셜이 있는 무덤을 발견하고,

이것이 칼빈의 무덤이라는 확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칼빈의 제자들이 초라한 묘비의 모습을 반대하여 조금 더 그의 묘지를 장식하였다.

하지만 그의 정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재판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기독교 신앙의 대 선배요 종교개혁자 칼빈의 무덤 앞에서...

많은 여행객들은 칼빈의 묘지를 찾다가 헤맨다고 말한다.

그의 묘지가 눈에 뛰지도 않고 생각한 것보다 너무도 작기때문이다.

 

그리고 막상 찾아서 그의 묘지 앞에 서게되면 대부분 놀라게된다.

나 또한 칼빈의 무덤을 보고 놀랐고 단번에 숙연해 지는 마음과 그의 죽음에 대한 태도에 교훈을 받으며,

그의 삶의 모습에 새로운 도전을 받는 귀한 시간들 이었다.

파넬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모든 자에게 그 분은 사나 죽으나 유익합니다"

 

매장(埋葬)은 결국에 자기의 뜻과 무관하게 후손들에 의해 숭배를 받게 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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