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은 기록된 ‘성경’이 아니다.

 

일점일획(一點一畫)을 가감할 수 없는 성경과는 달리 사도신경은 기독교 이천 년 동안 교회가 만들어 낸 교회의 산물이다. 

개혁교회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면 변함없는 진리인 성경의 기초 위에 교회와 교회의 신경은 발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자칫 발전이 아니라 타락으로 전락할 수 있지만, 그것이 두려워 새로운 개혁(도전)을 하지 못하면 후대 한국교회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00년 동안 이 작업을 하지 못하였다면 이제라도 시도하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이 점에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 간의 차이점이 있다. 로마교회 편에서 신조는 단지 교회 전승의 일부분이다. 그래서 교회 전승의 한 부분인 교의(신조)는 절대로 그릇됨이 없다. 하지만 개혁교회는 교회의 무오성(無誤性)을 부정한다. 따라서 교의(creed)의 진리는 그 가르침이 교회의 탐구적인 성도들의 체험에 비추어서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고 증명될 때 한하여 인정받을 수 있다. 이럴 때 성도들은 그들의 신앙고백이 본질적으로 성경에 근거를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고신대 유해무 교수는 “한글 번역의 사도신경은 한국 교회사에서 의미 있는 위치를 차지하지 못 한 것이 사실이다.

한국 장로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장로교 전체가 심도 있는 신학적인 해석이나 교리사적인 연구나 국문학적인 접근이 부족하였다. 한글 번역의 배경이 무엇인지 알려진 바가 없다. 신경은 공적인 목적을 위하여 발생하였고 존속한다.

 

한글 번역이 어떤 공적 회의의 결정으로 번역이 제안되었고 그 회의 위임을 누가 받아 번역하였고, 공적인 그 번역이 검증되었는지 어떤 회의가 그것을 사용하도록 결의하였는지 전혀 알려진 바 없다. 더구나 한글 번역을 어느 원문을 원자료로 삼았는지에 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런 견지에서 한글 사도신경에서 누락된 음부 강하의 부분이 새로운 각도에서 연구되어 복원된다면 복원되지 않을 때보다 더 큰 유익을 한국교회에 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단순히 천주교의 림보나 이중(二重) 구원, 보편 구원론의 가능성에 대한 성도들의 오해 때문에 복원이 불가하다면 그것은 한국교회를 무지한 자들의 공동체로 여기는 것이 될 것이다.

 

한국교회의 사도신경 음부 강하 이해

 

한국교회는 음부 강하 부분이 빠진 사도신경에 대하여 그 후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몇몇 학자들에 의해서 사도신경의 그리스도의 음부 강하에 대한 복원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또한, 교단 차원에서 이에 대한 연구와 검토와 그 대안을 내놓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는 이 음부 강하의 교리로 등장하는 성경 본문에 대한 한국교회의 신학적 해석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즉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음부 강하에 대한 한국교회의 신학적 입장이다.

 

1) 음부 강하에 대한 본문 해석

  그리스도의 음부 강하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성경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1) 베드로의 해석(벧전 3:18-19; 4:6, 행 2:27, 31; 시 16:8-10)

 

- 베드로전서 3:18-19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이 본문에 대해서 2세기 이후로 수많은 학자에 의해 해석이 시도되어왔다.

그만큼 난해하다는 뜻도 되고 사도신경의 그리스도의 음부 강하의 교리에 기초가 되는 중요한 구절이라는 뜻도 된다. 하지만 해석상 논란의 중심 거리이다. 로마 가톨릭은 이 구절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음부 강하설의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어 부활하기까지 3일 동안 영으로 죽은 자들이 있는 음부에 내려가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후에 연옥에 있는 영혼들도 구원 얻을 기회가 있다는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주장일 뿐 성경적 근거는 없다.

 

표면적으로 볼 때 예수는 옥에 갇힌 영들, 즉 죽은 자들에게 전도하였다.

이것에 대하여 완전히 설명해 보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수긍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 본문을 이해하고자 하면 이 서신의 첫 부분으로 돌아간다면(1:10-12) 우리는 베드로가 선지자들 속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더욱이 베드로후서 2장 5절에서는 노아는 의를 전파하는 자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전도는 실제로 노아의 시대에 행해진 것이라는 논의가 있다. 아마 노아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은 그때 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파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음부 강하의 교리는 헛된 것이 된다. 그리스도가 성육신 전에 성령으로 노아를 통해 당시의 패역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전도했다는 것이다.

 

본 절의 ‘옥’은 이 세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옥에 있는 자들이란 노아 시대에 죄에 갇혀있었던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다.

메튜 헨리도 지금 지옥에 가 있는 영들(노아 시대에 생존하였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노아 시대에 전파하였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어거스틴도 이 구절을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으심과 부활 사이에 하신 일이 아니라 노아의 때에 영적인 실존의 영역에서 하신 일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그는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그리스도께 서는 영으로 노아를 통하여 노아의 주변에 있던 핍박하는 불신자들에게 전파하셨다는 것이다.

 

즉, 어거스틴은 ‘옥’을 ‘무지의 흑암’으로 이해하고 노아의 시대에 사람들의 영혼은 옥에 갇힘같이 무지의 흑암에 갇혔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전파하셨으나 육신에 있어서 하지 않으신 것은 그는 아직 성육신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오직 영으로 그의 신성으로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노아를 통해 전파하신 대상은 노아의 때에 살던 불신자들이지만 베드로는 그들을 옥에 있는 영들이라고 부른다. 전파되었을 때는 그들이 영이 아니라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지금은 지옥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지금은 옥에 있는 영들이지만, 그들이 지상에 있을 때 전파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본문은 노아의 때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논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는 성육신하시기 이전의 성자의 예언 사역의 하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든지 아니면 그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는 영의 그리스도 성육신 이전의 사역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많은 신학자가 이 해석에 동의하고 있다.

 

서철원 박사는 이 구절에 대하여 베드로의 가르침은 영으로 노아 홍수 때의 극악한 자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함이 아니고, 그가 영의 권세로 구속사건을 선포하심이 된다. 즉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그것이 옥에 갇혀있는 가장 악한 자들에게까지 복음이 선포됨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은 전 우주적 사건이므로 지옥에까지 이 복음이 선포되었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영혼이 희생제물이 되었지만, 그로 인해 버림받은 자들의 자리인 지옥에 갈 수 없다고 하였다.

 

또 다른 해석은 옥에 있는 영들이란 절대 인간이 아니라 사악하고 거역적이며, 불순종하는 천사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베드로후서 2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러한 천사들은 용서치 않고 저승(Tartarus, 지옥)에 던져 넣고, 어두운 함정 속에 가두셨다. 베드로가 이런 식으로 이해했다면 그것은 곧 예수께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판결을 거역한 천사들에게 선포하신 것을 의미한다.

 

또는 오랜 교회의 사상 속에 뿌리박힌 것은 그리스도가 음부(하데스)에 들어가 구약의 성도들에게 전도하셨다는 것이다. ‘옥에 있는 영’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왔다. ‘옥’(fulakh'/)이란 고대인들이 가진 우주관으로 악한 영들과 귀신들 그리고 죽은 자들이 갇혀있는 곳으로 나아가서는 악인들이 심판받는 곳이다. 옥은 문자적으로 가두어 두는 곳이므로 자유가 없고 소망이 없으며 고통스러운 곳이다. 거기에 있는 영들은 20절의 불순종의 영들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영임에 틀림없다. 그리스도께서 그 옥에 갇혀있는 영들에게 가서 자신이 부활함으로써 사단과 죽음의 세력을 이기셨다는 사실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그 시기가 성육신 전의 영이든지, 십자가와 부활 사이든지, 오순절 이후든지, 그리고 영은 성령이며, 음부로 내려가신 목적은 노아 시대에 불순종했던 자들(20절)의 영들에게 설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배경을 근거로 슈라게(W. Schrage)는 그리스도가 하데스에서 구원을 선포했다는 것은 그리스도 구속의 힘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세계의 가장 깊은 곳까지도 미치며 그의 권능은 죽음에 의해서도 제약받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음부에 가서 전도했다고 하지만 성과나 효과에 대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원과 그의 말씀의 능력이 죽음의 세계까지 미치며 그것은 가장 심한 타락까지도 극복한다는 것이다.

 

본문은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만나지도 못하고, 복음을 들을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들을 위하여 목회적인 의도에서 말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죄와 죽음과 마귀를 이기신 승리는 산 자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도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승리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제자들의 증언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에게까지도 미친다는 것이다.

 

이상의 것들을 요약하면 3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많은 교부와 천주교의 관점으로 그리스도가 죽으심과 부활하심 사이에 예수님께서 죽음의 영역인 하데스의 죽은 자들에게 전파하셨다.

둘째는 많은 종교개혁자와 한국 보수교회 신학자의 관점으로 노아의 시대 사람들에게 노아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셨다.

셋째로 오늘날 많은 신학자의 관점인 부활 전에 혹은 후에 예수께서 타락한 천사들에 대하여 승리를 전파하셨다.

 

이런 여러 가지 의미 중에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본문이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죽으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본문임을 인정하면 이 구절은

생각할수록 신학적인 사상이라기보다는 시적(詩的)인 사상의 영역에 속해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베드로전서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

 

이 본문의 해석은 ‘죽은 자’(nekroi'")가 누구인가에 대한 해석에 달려 있다.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으나 육체적으로는 죽어있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관점이다.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이전의 의인들이라고 할 수 없다. 이보다 선행하는 5절에서 ‘산 자와 죽은 자’란 영혼이 산자와 영혼이 죽은 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딤후 4:1-2)

즉, 산 자는 육체의 남은 때를 소유한 자들이며, 죽은 자는 육체의 남은 때가 없는 자 곧 일반적으로 이미 죽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 주되셔서 심판하실 때 6절의 죽은 자는 불신자로 죽은 자들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육체로는 죽은 자들이 되는 것이다.

즉, 6절의 죽은 자는 당연히 영이 죽은 자가 아니라 육체가 죽은 자 곧 영과 육이 분리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귀결된다. 따라서 이 자들을 하나님의 심판에 때에 하나님의 영으로 살리시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 절의 ‘죽은 자’는 살아있을 동안에 복음을 듣고 회개하였으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하기 전에 죽은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 그래서 본문을 연옥설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는 것은 물론이며, 지옥 고통의 음부 행(승귀의 시작)으로 보는 루터교의 교리의 배경으로 삼는 것은 부당하다.

 

- 시편 16:8-10 (행 2:27, 31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9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인 사도행전 2:27, 31절에서 인용되는 본문으로 음부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하데스(ἁδες)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기 위하여 인용되었다.

바빙크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한다.그러나 여기서 음부라는 단어는 무덤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으로 낙원에 계셨으나 그의 몸으로는 무덤에 누워 계셨으므로 그의 죽으심과 부활 사이에 기간 동안 그는 죽음의 상태에 계셨던 것이라고 하였다.

박형룡 박사도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의 지배를 받지 않고 그의 영혼이 음부에 버려지지 않고 부활하신 것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도 역시 사망의 상태에 버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칼빈은 베드로가 인용한 시편 16장 10절은 필연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 예언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성경의 양식으로 볼 때 지옥과 지옥의 고통은 가장 참혹한 고통을 나타낸다. 이 구절들은 육신에 심각한 고통을 말하고 있다.

신조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지극한 중압과 특별한 침묵함으로 통과하지 않았다. 이 구절은 육신의 비천함과 영혼의 슬픔을 말하는 듯하다. 불변하며 분리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은, 우리로 인한 형벌로 인하여 영혼과 육신으로 고난당하는 분임을 감추지 않는다. 그분은 지옥의 세력과 영원한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상대로 맞붙어 싸워야 하셨다. 이 본문에 대하여 많은 신학자가 같은 해석을 한다.

 

(2) 바울의 해석(롬 10:6-7, 엡 4:9, 빌 2:9-11, 딤전 3:16)

 

- 로마서 10:6-7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음부’(a[busson)’는 일반적으로 하늘과 땅을 대조해서 쓰이지만, 본문에서는 특히 죽은 사람이 머무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영어번역(KJV, NIV)은 “into the deep”으로 공동번역은 “깊은 땅속까지”, 개역개정은 “무저갱”으로 번역하였다. 

바울은 신명기 30장 12~13절을 변형시켜 그리스도를 만나려고 하늘에 올라가는 수고를 할 필요 없고 음부에 내려갈 필요가 없음을 대구법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이 땅에 보내셨고, 또한 음부에서 썩지 않도록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음부는 장소적인 의미가 있다. 그래서 바클레이는 바울은 예수께서 그의 죽으심과 부활 사이에 음부에 계셨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했다.

 

- 에베소서 4: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땅 아래 곳’에 해당하는 “th'" gh'"”에는 많은 견해가 있다. 단지 하늘에 비해 낮은 지상을 말하며 그리스도의 생애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하데스”로 내려가신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본문에 대하여 벌코프, 박형룡, 서철원, 웨인 그루뎀 등 많은 학자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이 “땅 아래 곳으로 내리셨던”으로 해석하였다.

 

- 빌립보서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에서 ‘하늘에 있는 자’는 천사들과 이 세상을 떠나 구속받은 모든 성도이며, ‘땅에 있는 자’는 지금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며, ‘땅 아래 있는 자들’은 지하에 잠든 죽은 자들이다. 이처럼 모든 부류의 존재들이 예수님께 무릎을 꿇는 것은 예수님이 승귀하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지으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장소에서 그리스도의 우주적 승리로 보아야 한다. 이와 유사한 본문이 요한계시록 5장 13절에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라는 본문이 등장한다. 요한계시록 5장 3절에도 나타난다.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모든 피조 세계에 선포하며 요한계시록 5장 13절에서 온 우주 전체가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린다는 뜻이다.

 

- 디모데전서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천사들에게 보이시고’에서 과연 이 천사는 누구인가? 혹 예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을 때 타락한 천사들에게 보이신 것인가? 하지만 본문의 “w[fqh ajggevloi"”는 모든 계층의 천사를 다 포함한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언급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특별히 선한 천사에게 사용되기도 하였다.

 

(3) 그 외 본문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께서 단지 “죽은 자”의 땅에 간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의 죄와 불법 때문에 죽은 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가지게 된 사람들에 대한 전도에 관한 언급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상 계시록의 두 구절(5:3과 5:13)을 포함한 10개의 성경 구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음부 강하에 대한 성경 본문 해석은 한국교회 강단이나 신학에서 다음과 같이 이해되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완전히 죽어 죽은 자들이 가는 곳(무덤, 하데스)으로 가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신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주권이 하늘이나 땅이나 죽은 자들이 거하는 곳에도 미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음부에는 가셨지만, 지옥으로는 내려가지 아니하셨다. 즉, 죽은 자들이 가는 무덤에는 묻혔지만, 영원한 심판의 장소에는 가시지 아니하셨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의 말씀처럼 주님의 영혼은 3일 동안 낙원에 계셨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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