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의 역사



수도원이란

수도원이란 세속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안식에 취해서 살고자 원하는 성도들의 집단이다. 

하나님의 마음과 의지를 일부 넘겨 받아서 그 마음과 의지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어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수도자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 신성에 참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곳,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면서도 참여의 노력이 주는 고통에 아파하며 신음하는 곳이 바로 수도원이다.


금욕에서 수도원으로

성경적으로 수도자의 기원은 광야의 예언자 즉, 예수시대의 광야에서 꿀과 메뚜기를 먹으며 예수의 길을 예언한 세례요한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수도자의 특징은 세상사람들의 혼탁한 문화와 떨어져 스스로 절제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는 금욕적인 삶을 추구하였다.


그들이 광야로 나간 이유는

금욕자들에게 세상은 너무 번거로운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정은 물론 교회도 때로는 그들의 영적인 삶,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명상하는 삶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그들은 일반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광야 또는 사막에서 그들의 영성을 수련하였다.


그들이 광야로 나간 또 다른 이유는

그 당시 내외적인 면에서 교회의 세속화에 있었던 것이다.

타락한 세속화된 교회에서는

하나님과 깊은 관계회복의 영성수련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교회를 뛰쳐나와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은밀한 곳을 택하여 집단화된 공동체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신앙형태가 언제부터 인지는 몰라도

아마도 3세기를 전후해서

이집트와 소아시아, 팔레스틴 지역에서

일반적인 생활을 포기하고

개인적으로 광야에 나가

은둔적인 삶,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것이 기독교 최초의 광야금욕이고,

이것이 발전하여 기독교내에 수용되어 제도적으로 형상화된 것이 수도원이다.



3-4세기  최초의 수도자 안토니


수도자적 삶의 모습이 처음으로 나타난 곳은 이집트로 알려져 있다.

이집트에서 나타난 수도자의 삶의 형태가

은둔자적 형태와

공동체적 형태라는

수도원의 전통적인 형태를 고스란히 보여주어,

후대에 기독교 수도자나 수도원의 전형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에서 광야로 나가 기독교적 금욕 이상을 실천하며 은둔자로 산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인물은 이집트인 안토니(? - 356)이다.

이들은 보통 천막이나 무너진 성채나 무덤, 동굴 같은 데서 살았으며 그들의 하루 일과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기도와 명상이었다.


이들은 육체노동을 의무로 여겼고,

보통 광주리나 밧줄 을 만드는 일을 했다.

삶을 위한 최소한의 것을 얻는 수단이자 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안토니 역시 광야금욕 수도자의 삶을 시작했을 때 역시 이런 방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 때에 이미 많은 수의 광야 금욕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에 명망있는 수도자는 자연스럽게 광야 금욕자들의 정신적 구심점을 이루었다.


이렇게 스승이 되는 수도자들의 말은 참생명을 주는 말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들에게는 영적 스승 압바(abba)로 불러지게 되었다.

이들 압바들의 가르치는 말들이 묶여서 처음에는 구전으로 나중에는 기록으로 전해지게 되는데 ,

이것이 발전해서 수도원 규범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공동체수도원 창설자 파코미오


개인적인 금욕의 형태는 한 장소에서 많은 수도자들이 모여서

한 사람의 지도 하에 공동체로서 단일화된 수도생활을 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형태는 4세기경에 이집트의 수도자인 파코미오(? - 347)이다.


원래 은둔 수도자 출신이었던 그는

처음에는 은둔 금욕자의 삶을 살았으나 금욕자들을 조직화하는 재능을 보였다.

원래 그가 사 람들을 모아서 조직체로 만든 이유는 봉사하기 위해서였다.

광야 금욕자들이나 은둔 수도자들에게 방문객이 많이 찾아와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성숙한 인격과 상담에 응할 만한 식견을 가진 수도자들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는 320-325년경 이집트의 척박한 지역인 타베네제지역에 첫 기독교공동체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수도자는 한 마음, 한 영혼이어야 하며 생활에는 최소한의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공동거주, 공동노동, 공동기도, 식사와 삶, 또 의복에서 단순 소박함, 문서로 규정된 공동체적 규범에 따른 생활, 상급자에 대한 순종) .


그가 제정한 규칙에는 순종이 강조되어 있어서 모든 수도자는 상위자인 원장의 말에 순종하는 것을 엄격하게 규정하였다.

파코미오 역시 노동을 통해 생긴 생산물은 자신들이 필요한 최소의 것을 제외하고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4-5세기  베네딕트 수도원


동방교회에서 나름의 독특한 문호로 자리잡은 수도원은 서방교회로 전해졌고,

역시 고유한 신앙기관으로 자리잡으면서 서방교회사에 특별한 족적을 남기게 된다.

특별히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한 프랑크 왕국(서유럽 지역)에서의 역할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수도원은 야만족인 게르만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하고 가르치는 역할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의 기독교를 매개로 전해진 그리스 로마 문명과 문화를 유럽에 심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기 때문이었다.

수도원은 서방에서 문화를 보존하는 자와 전승하는 자로서 서방의 역사를 그리스 로마 사상과 연결된 기독교 문화로 만드는 창구 역할을 하였다.


서방교회 수도원의 역사는 베네딕트 수도원의 역사라는 말이 있을 만큼,

베네딕트 수도원 역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중세를 지나면서

베네딕트 수도 규칙이 서방의 모든 수도규칙의 표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베네딕트 수도원의 창시자인 누르시아의 베네딕트(480 - 547) 라는 이탈리아 사람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로마로 공부하러 갔으나

곧 공부를 중단하고 로마 근처에 있는 험한 골짜기 속의 동굴에서 살면서 은둔과 금욕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마음을 비우기 위하여 많은 고행을 하였고

그 후 그는 다른 금욕자를 돕기 위해서 근교 수도원에 들어 갔지만

그의 엄격함을 싫어한 수도자들 때문에 거기서 나와 독자적으로 수도원을 세웠다.


이것이 529년에 몬태커시노에 세워진 베네딕트 수도원이다.

그는 그 곳에서 73장의 수도규칙을 만들었는데

서론에서 수도생활을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생활"이라고 정의했다.


수도원 조직은 원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수도사가 되기 위해서는 규율준수, 가난, 순결(독신), 순종을 서약해야 하며,

수도자가 된 사람들은 기도와 명상 외에도 육체노동과 공부를 할 것,

또 재산은 공유하고 공동생활을 해야 하며,

최소의 것으로 검소하게 살아야 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6-10세기  클루니 수도원


10세기를 전후한 서방교회의 역사는 혼란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혼란의 내용은 교회권의 타락과 이종족들의 침입이었다.

이것은 중세사회를 질적으로 변모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 당시 대형 수도원은 막대한 영지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이종족들의 약탈의 좋은 먹잇감이 되는 이유이기도 했지만

귀족이나 권력자들에게 수도원을 노릴 이유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도원장이나 성직자의 자리를 돈으로 사고파는 성직매매가 일반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수도원개혁이라는 필요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교권자들로 인하여 개혁을 시도할 수가 없었다.

그 때 클루니 수도원 수도자들이 일어나

베네딕트 수도규칙을 글자 그대로 지키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그 구체적인 모습대로 엄격하게 생활을 하였다.

베네딕트 수도규칙이 아침 찬양에서 저녁기도까지 정해 놓은 규칙을 따른 결과였다.


이것은 외형적으로 '예배의 회복'으로 보였고,

신앙의 경건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이 되었다.

이 흐름이 당연히 많은 수도원들이 권력자의 간섭에 저항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클루니의 개혁운동은 유럽전역으로 확대되었고 개혁이 시대적인 화두가 되었다.

당시 유명한 원장들은 오도와 베드로였는데 이들은 당대 큰 스켄달이었던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결혼문제를 철저하게 금하며 성직자의 기강을 세우는데 앞장을 섰다.

또한 사회개혁으로는 봉주들간의 싸움을 금지시키고 주님의 수난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수요일밤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휴전울 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하여 클루니 수도원은 사회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이웃 수도원들도 이를 모방하여 지원이 되기를 원했다.

이리하여 937년에는 17개의 지수도원이 세워졌고 981년에는 서 유럽에서 제일 큰 교회당의 건물을 가진 수도원이 되었다.



시토 수도원


시토 수도원은 수도자들의 원래 이상인

수도자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길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시토의 총회지침은 다음과 같다.


"공동체는 침묵과 세상에서 분리된 분위기 속에서 산다.

그리고 관상 중에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살도록 조장해 주며 또한 그러한 삶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 새로운 수도원의 특징은 침묵과 은둔으로 요약된다.

침묵과 은둔이라는 이상을 따르는 많은 수도원들은 대부분 황야나 척박한 지역으로 들어가

다시금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에 힘을 쏟았다.


이들은

철저한 공동생활,

자가 경작을 통한 자급자족,

규칙을 따른 관상기도,

렉시오디비나 (성경을 하나님이 주는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묵상하면서 읽는 성경 읽기 방법) 등을 지켰다.


이러한 수도원들은 11-12세기에 유럽 전역에 수백개가 넘게 세워졌다.

이렇게 확장된 수도원 세력은

그들의 이상인 침묵과 은둔에 머물 수가 없었다.

이 시기에 십자군전쟁, 시민계급의 태동, 자본주의의 시작 등으로

여러가지 시대적 문제가 대두되면서

수도사들이 십자군에 가담하고

그리고 사회적으로 거대한 권력기관이 되었다.

그들이 사회적 세력이 되자 수도자들이 다시 개인적 은둔과 침묵을 원했던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12세기에 새로운 수도원들이 나타나는 배경이 되었다.



12-13세기 도미니크 수도원


도미니크 수도원은 소위 이단 운동에 빠진 사람들을 올바른 신앙,

즉 제도권 교회로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세워진 수도원이다.

창설자는 스페인 카스티야 출신인 도미니쿠스 데 구즈만은

1196년 마드리드 근방의 어거스틴 수도자가 되었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공헌은 그들이 가진 목적에서 잘 드러난다.

이 시대는 여성들이 사회의 한 계층으로 새롭게 등장하던 시대였고,

특별히 이단운동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 여자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교회가 여성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기울려야 한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었다.

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이단운동에서는 자연스럽게 교회 남성중심체제에 비판이 터져 나왔다.

이 부분을 중시해서 여성 수도회를 세우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런 해결책은 많은 호응을 받아 독일에서는 여자수도원이 남자수도원의 숫자보다 더 많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도미니크 수도회의 또 다른 특징은 그들이 신학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는 데 있다.

그 당시 이단에 빠진 이들을 신학적으로 가르쳐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한 신학적인 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중세의 스콜라신학을 정리하고 발전시킨 것은 거의 전적으로 도미니크 수도사들의 업적이었다.


그 중 가장 탁월한 인물이 스콜라 신학의 대가인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이다.

그러나 도미니크 수도회는 초기의 목적과는 달리

후대로 가면서 오히려 종교 재판에서 심문을 담당하는 전문가들로 변모한다.

아직은 종교와 정치가 하나가 되어 개인의 신앙고백을 억누르는 중세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탁발수도의 프란시스 수도원


프란시스 수도원은 도미니크 수도원과는 전혀 다른 경로를 통해 세워졌다.

프란시스 수도회는 말 그대로 일반 민중의 신앙이 수도회로 형성되어 나타난

유럽 민중 고유의 수도원이라 할 만하다.

이 수도회의 설립자 프란시스(1181-1226)는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의 소도시 아씨시에서 태어나

직물장사를 하던 아버지 덕에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가 기사가 되어 십자군에 참여하여 군사적으로 명예를 얻고자 하는 꿈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힌 경험과 투병생활을 한 경험 등은

그가 기사로서의 인생이 아니라 영적인 삶을 살도록 준비시켰다.

명상과 기도로 살던 어느날,

그는 폐허가 된 성 다미안 교회에서 기도하다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프란시스, 주의 집을 수리하라, 주의 집이 무너지고 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많은 돈을 가져다 수리비로 주었다.


그 후에 그는 어려운 사람을 돕고, 문둥병자를 간호하고,

기도와 명상을 하면서 지내다가

1208년 아시시에 있는 포르티웅교회에서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두 벌의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마10:9-10)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며 하나님 나라를 설교하고 다녔다.


복음을 따라 사는 그의 생활을 보고 몇 명의 사람들이 함께 살기 시작했고,

곧 작은 무리를 이루었다.

이렇게 무리를 이룬 후 프란시스는 가난을 따르는 삶을 살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내세운 이상은

그리스도의 제자는 단지 봉사하기 위한 존재들로서,

인간과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기 위한 존재,

무조건적으로 남을 사랑하기 위한 존재,

겸손하기 위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프란시스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작은 형제들' 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자들로,

방랑생활을 하면서 경건을 실천에 옮기고,

걸식하면서 식사를 해결했다.

식사를 얻지 못하면 굶었고,

헛간이나 마굿간에서 잠을 잤으며,

잠자리를 얻기 못하면 노천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이런 삶을 살고자 이 대열에 합류하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어났다.

비슷한 모임들도 많이 생겨났다.

결국 이 모임은 조직화된 수도원으로 성장해 갔고,

교황의 승인을 받음으로 공식 수도원이 되었다.



14-16세기 중세 수도원의 질적 변화


전통적으로 14-15세기는 중세의 해체기로 설명된다.

중세의 해체는 곧 중세를 구성하던 기본 요소인 교황제와 교회의 위기를 뜻한다.

십자군 전쟁과 종교 재판 등을 통해 자신의 절대적 지배를 확인했던 교회가

세속권력들에 의해 위축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구체적으로 보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일어났던 백년전쟁(1337-1453)은 중세 해체의 서곡이었다.


두 나라가 전쟁 비용을 위해서 교회에 세금을 물리려 하자

당시 교황 보니페이스8세가 반발하였고

왕들이 교황에게 저항하면서 세속권력과 교황권이 충돌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위기는 곧 수도원의 침체나 몰락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세속권력들은 교회와 수도원에 세금을 물리었고 교회재산을 빼앗기도 하였다.

이것은 전통적 수도원에 닥친 커다란 위기였다 .


그 때 수도원이 내놓은 해결방식은

국가적 또는 국제적으로 연대해 묶여 있던 거대한 수도원 조직을 나눠서

지역의 수도원으로 묶거나 아니면 단독 수도원으로 나뉘는 것이었다.

수도원의 전통적 이상으로 본다면

다시금 세상을 뒤로 하고

묵상과 금욕 등 은둔자적 삶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4-16세기에 이르는 기간은 유럽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은 페스트와 왕위 계승전쟁

그리고 경제, 사회적 불만 때문에 나타난 전쟁과 민란 등 혼란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시련을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했으며,

늘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지금까지 해 오던 방식의 신앙이나 예배로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 수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이 있었고,

이것이 수도자들에게는 은둔해서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14세기 수도원은

전통 적인 모습에서 변화된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들은 규범이나 공동생활보다는 내적인 경건을 추구하는 명상을 중시한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의 수도원이나 수도자들이

신비한 체험이나 환상을 많이 보고,

이웃을 위한 희생이 삶을 사는 경우가 많은 것들로 확인되었다.



공동생활 형제단


이 시대의 수도원이나 수도자를 대표해 주는 경향은

네델란드의 종교개혁가인 게하르트 그루테(1340-1384)에 의해 세워진 이 공동체는

특정한 수도회 명칭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일정한 수도규칙을 따르지도 않았다.


함께 모여서 공동생활을 한다는 것이 수도회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특징이었다.

그들은 손노동을 통해서 직접 생활비를 벌었는 데,

그것은 주로 예배나 교훈적인 책들의 필사였다.


이들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대중과 청소년 선교, 성직자 교육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학문연구에 열심을 내었고,

학교를 세우고 자체 교육을 했기 때문에

네델란드에서 인문주의가 태동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이 공동생활 형제단에서 운영하던 학교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공부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집단의 특징은

신비한 내적 체험이 중요한 요소로 중시하고 있었으며,

신비적 체험의 산실로서 수도원과 수도자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사변적인 스콜라 신학을 폐기하고,

개인적이고 실제적인 삶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며,

관상적 성경읽기, 그리스도의 고난에 신비적 동참,

그리스도의 세상 사역에 동참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이 단체와 관계를 맺고 있던 어거스틴 수도회의 수도자 토마스 아 켐피스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성경 다음으로 유명한 고전이 나오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하여 사제나 평신도 모두 단순한 삶을 살 것이며,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세상을 경멸하며,

장상들에게 겸손히 복종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영적인 진정한 이해는 스콜라주의적인 연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삶에 적응시키고 복음 말씀에 직접 참여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는 것이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한 최고의 겸손이다.


여기에서 끊임없는 내적인 평화와 자유를 맛볼 것이며

그것이 곧 관상의 길이요 하나님과 연합의 원천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 공동체에서 시대 변화에 걸맞는 영적이고 경건한 삶의 모습을 제시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14세기의 변화된 수도회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 이제 규범과 공동생활이 수도원의 특징이 아니라 개인이 신성에 참여하고, 또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수도자이든 일반인들이든 신앙의 궁극적 지향점은 각 개인이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신성에 참여하는 것이므로, 이런 발전을 우리는 개혁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발전은 수도원과 교회의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종교개혁과 수도원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회의 모범적인 수도자였다.

어거스틴 수도회는 성직자 수도회였기에, 신부 서품을 받은 루터는 학자이자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경교수로 활동했던, 성공 적인 수도자로 평가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받은 스콜라식 신학교육과 성경해석 방식은

그가 가진 내적인 고민에 답을 주지 못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 했고,

죽은 후에 천국에 갈 수 있는 확신을 줄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원했다.


성경학자였던 그는 성경 연구를 통하여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이루어지며,

교회나 성례는 이것을 알려주고 가르치기 위한 수단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에게 신앙의 절대적 원칙과 기준은 단지 성경일 뿐이며

다른 어느 것도, 특히 인간의 행위나 노력은 구원에서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이런 주장은 당시 죽은 자의 구원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던 교회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것이었고

마침내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 으로 이어지게 된다.


믿음과 성경만이 구원의 유일한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루터가 보기에 수도자의 삶은 용납될 수 없었다.

그것은 인간의 활동이었고, 수도자가 될 때 서약 하는 수도원 규범 역시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1522년 수도서원에 대해 조목조목 논박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의 요지는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양심보다 수도회 규범을 더 높은 데 두는 수도원 조직은 성경적, 신앙적 타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상을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간섭하시는 현장으로 보았고 물질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루터의 이러한 반박은 수도회나 수도자들을 향해 있던 불만들을 조직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이런 세력을 등에 업고, 종교개혁가들은 수도자라는 신분 자체를 없애버리고 싶어했다.


수많은 수도자들이 수도원을 떠났고,

그 중에 많은 수가 루터을 따르는 충직한 추종자들이 되었다.

중세교회의 권위가 타락하자 영주들은 종교개혁의 이름으로 수도원을 해체하는 정책을 행했다.


이런 움직임은 1526년 제1차 스파이어 제국회의를 통해서 영주가 교회개혁권을 가진다라는 것을 합법화하였다.

그래서 많은 영주들은 이 법을 근거로 수도원 간판을 내리게 하였고 수도자들 을 추방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살아남은 수도원은 개혁 프로그램에 동참해야 했다.

그렇다고 마냥 루터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제를 적극적으로 떠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구제나 봉사활동 등 일반 사람들을 위한 사회활동을 강화하고

이것을 통해 일반인들의 일상적인 삶과 접목된 수도원과 수도자 활동이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났다.



16-18세기  예수회와 이냐시오


예수회의 설립과 활동은 전적으로 설립자 이냐시오 로욜라의 탁월한 활동에 힘입고 있다.

스페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군복무 중 중상을 입고 오랜 병상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 때 많은 경건서적과 영성서적을 탐독하면서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하였다.

프랑스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그는 1534년 8월 15일 여섯 명의 동료와 함께 가난, 순결, 순례와 영혼 구원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고 수도원을 설립했다.


1540년 교황을 방문한 그는

이 수도회를 공식 수도회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고,

당시 교황 바오로3 세는 '예수회'라는 이 수도회를 승인했다.

이 수도원은 전통적인 수도회가 내세우는 서원인 가난, 순결, 순종 외에 '영혼 구원과 믿음의 전파를 위해서 내려지는 교황의 명령을 지체없이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항목이 덧붙여 있다. 이것은 예수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들은 전통적인 수도회의 모습 중에서 필요없다고 생각되는 것은 과감하게 탈피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수도원의 건물 보다는 인적인 관계를 중시했으며,

수도자 복장도 갖추지 않았다.

수도원의 전통적인 영적인 모든 것은 그대로 받되

활동이나 형식은 그 시대에 맞게 자유롭게 변형시켰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들의 활동 내용은 대략 두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전통적 교리체계를 변호하고,

종교개혁자들이 내세우는 개혁신학의 내용을 반박하는 신학활동이었다.

교회에서의 신앙활동을 새롭게 정리해 내서 각 개인들이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 그리고 부활에 동참하는 영적 체험을 할 수 있게 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이냐시오가 쓴 "영신수련"이라는 책에 잘 요약되어 있다.

이 책은 후대에 카톨릭 교회의 피정을 포함한 많은 영적 수련 모임에서 영성수련을 위한 지침서 역할을 하고 있다.



바로크시대와 수도원


16세기 말에서 18세기 초까지의 서구 사회를 보통 바로크시대라고 말한다. 바로크라는 말은 못생긴 진주 또는 비뚤어진 진주를 뜻하는 포르투갈어이다. 이말은 원래 종교개혁의 마무리인 종교전쟁(30년 전쟁, 1618-1648)을 겪고 난 후 전통적인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절대 가치도 만들어 내지 못한 서구 사회의 사상적인 공황을 나타내 주는 말로 사용되었다.


바로크 시대는 절대 권위의 상징인 절대주의와 비판적 지성을 도구로 한 이성주의 시대인 17-18세기인데, 바로크 문화의 본산지인 프랑스에서 수도원을 통해 중세 못지않은 신앙적 경건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교회나 교황의 권위를 넘어 스스로 자신의 실존을 신 앞에서 찾아보려 했던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신성에 참여할 가능성을 역설하였다. 이것은 예수회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신앙인의 신비적 체험에 대한 이해와 접근에서 이를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체험은 말 그대로 신비적인 체험이라서 신비적인 황홀경에서 신과 합일이 이루어지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이라는 이해가 보편적이었다. 이러한 문제가 수도원과 카톨릭 교회 내부의 문제로 떠 오른 것은 선교현장이었다.


예수회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선교를 했던 아시아권에서 소위 적응주의 논쟁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 논쟁의 요점은 피선교지의 토착문화를 어디까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가의 문제로 나타났다. 이들은 대개 피선교지의 전통문화를 수용하고 받아들여, 토착민들의 종교적 풍습을 많은 부분 인정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예를 들면 중국에서는 공자숭배와 조상 제사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른 수도 회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외형적으로 상당히 성공을 거두었던 카톨릭은 사실상 추방되었던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와 수도원


노력을 통해서 개인이 신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신비적 체험을 강조한 것은 17-18세기 기독교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카톨릭 영역에서는 개인의 은혜의 체험을 강조하는 얀센주의, 행위보다는 영적 체험을 중시하는 정적주의가 프랑스에서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야곱 뵈메(1575-1624)이 영국의 조지 폭스가 교리적 전통주의 보다 개인의 신비적 체험을 강조하는 주장들을 내놓고 있었다. 이들의 강조점은 달랐지만, 개인의 영적 체험이나 성령의 지도를 받는 신비한 경험, 또 엄격한 도덕과 윤리적 삶을 중시하는 공동적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나 계몽주의 위협 앞에서 수도원과 수도자의 이상은 지켜지기 어려웠다.


이성을 앞세운 계몽적 합리주의 수도자들의 이상을 근본부터 공격해 들어왔던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은 수도자의 삶이나 그들의 생활방식은 이성에 반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인간의 권리와 본성에 반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들은 수도자들을 광신자, 정신이상자, 얼빠진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삶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합리성이나 유용성을 가지고 삶의 가치를 평가했던 계몽주의자들에게 수도자와 수도원은 넓은 토지 위에 그럴듯하게 세워진 큰 건물 안에서 빈둥거리며 노는 사람들의 장소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주장은 국가가 수도회를 강력하게 통제하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수도회를 폐지하거나 수도자를 추방할 명분을 주었다. 이런 일련의 흐름은 각 나라에서 수도원을 해체하고 폐지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결국 계몽주의 이후 유럽의 전체 분위기기 수도회에 대한 사회적 냉대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중세적이고 구질서적인 것들은 무엇이든 부정하고 싶었던 혁명의 시대는 구질서에 속하는 수도원 제도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21세기 수도원의 부활


근대사회에서 국가가 수도회에 대해 그렇게 혹독한 대접을 했던 이유는 중세 시대에 국가가 교회에 예속되어 당해야 했던 아픔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세 황금기를 나타내 주는 표징인 십자군 전쟁이나 스콜라 신학은 국가와 사상이 교회에 예속되어 있는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는 근대 유럽의 나라들은 교회나 교황으로부터 실질적 독립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수도원에 대한 국가 정책에 그대로 나타나서, 혹독한 세속화 정책으로 수도원을 국가 기관화하거나 해체해서 더 이상 카톨릭의 첨병 노릇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근대의 국가들이 체제를 정비해 중앙 집권적 정치체제가 자리잡게 되고, 시민계급을 통한 정치. 사회적 안정을 갖게 되자 국민과 사회에 대한 복지 문제가 새로운 과제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새로운 사회구조 속에서 국가와 사람들은 수도원과 수도자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다시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 아닐 수가 없다. 그들은 수도자와 수도원이 사는 삶의 방식이 주는 의미, 또 그들의 활동인,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육, 구제, 간호 등의 가치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고, 그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프랑스혁명 때 모든 수도원이 해체되었다고 공식 선포하였던 프랑스정부는 다시1807년에 빈센트 폰 바을 수도회의 여성 수도회의 활동 재개를 허락했다.


이것은 유럽 전역에 수도원 활동을 재개시키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런 흐름은 1814년에 교황 피우스7세에 의한 예수회의 공식부활을 선언하였다. 예수회가 재조직되어 활동에 나서자 카톨릭교회는 다른 수도회 조직을 복원하는 일에 적극 적으로 나섰다.

전통적인 수도원인 시토 수도회, 도미니크 수도회 등이 그 대상이었다. 새롭게 조직되고 부활한 수도원들이 해야 할 일은 처음부터 자명했다. 소위 혁명의 시대를 통해서 사람들 가슴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증오심을 치료해 내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민중의 학교교육이나 구제 그리고 극빈자들에 대한 간호와 교육 등을 담당해서 수도자 활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하였다.

현대 사회의 수도원은 제도권 교회나 교황권의 지도와 감독을 받는 '전통적 수도원'과 어떤 수도원 분파나 계율에 묶이지 아니하고 또 일상적인 삶을 살면서 개인의 신앙에 따라 수도자적인 삶을 사는 '내면적 수도자들'이 공존하고 있는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개신교 수도원


현대사회가 수도회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개신교에서 보여 준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역설이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수도원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나, 재세 례파의 한 뿌리인 헤른후트 공동체는 개신교의 수도원적 공동생활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이 흐름은 17세기에 경건주의를 통해서 계속 이어지게 되는 데,

형제자매단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개신교 조직 내의 디아코니아라는 조직으로 이어져 왔다.

이런 활동은 개신교 안에 남아 있는 수도원 활동의 흔적으로 불러도 좋다.

개신교가 수도원들이 해오던 역할을 넘겨받으면서 구체화되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에 개신교 공동체의 활동은 많이 활발해 졌다.


이런 모임들은 빈민 구제나 선교 등 전통적인 의미의 수도회 활동보다는

신앙적 재각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옛날 수도회들의 신앙적 가치를 재발견해서,

축제적 예배,

공동 기도회,

이웃 사랑의 적극적 실천 등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현대 수도 공동체의 일반적인 특징 들이었다. '


서로 닮아 있음' 과 '활동의 유사함' 은 에큐메니칼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기독교의 분열과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좋은 방편이라는 점에서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전통적으로 수도원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프랑스에 수도원적 개신교 모임인 떼제 공동체가 세워지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이 공동체의 설립자는 스위스 사람으로 로제 슈츠(1915- )로 칼빈주의 신학자이다. 1944년 공동체를 세웠고 1946 년부터는 전통적 수도자의 선서인 재산의 공유, 독신주의, 절대적인 순종을 내세우면서 원장에 취임했다. 원래의 목적은 청소년 운동이었으나 , 교파의 차이를 넘어서 단순 소박한 삶, 관상의 삶을 살도록 하며, 기독교 교회들이 대화를 하도록 하기 위한 새로운 운동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또 하나의 단체는 라브리 공동체이다.

미국인 목사였던 프란시스 쉐퍼는 1955년 스위스에 라브리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아무런 외부의 도움없이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공동체적 삶을 살아갔다.

그들은 아무런 조건없이 집을 개방하고

찾아오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고

함께 예배를 드리고 그들의 삶을 실천해 갔다.

이 공동체의 목적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현재 우리들의 삶에 실제로 활동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공동체는 유럽과 전 세계에 커다란 공명을 일으켰고,

현재는 한국을 포함한 세계 10개국이 넘는 곳에서 지부가 있을 만큼 성공을 거두고 있다.



한국 수도원


한국의 수도원은 한국 교회가 창립되던 때부터 믿음이 두터운 신자들 가운데서 수도생활에 관한 서적을 보거나 신부의 권유로 독신생활과 고행을 하면서 교회봉사에 전념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그때 유교사회에서 공공연히 동정을 지키기가 어려워서 동정부부의 길을 택했던 예들이다. 그러나 박해시대에는 조직적인 수도생활이 불가능했고, 한·불조약이 체결된 1년 뒤인 1888년에 최초의 정식수도회가 들어왔다. 이때 한국에 진출한 프랑스의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는 그 설립목적에 따라 자선사업과 사회사업에 힘썼고, 1900년 이후에는 교육과 본당사목에도 종사하였다.


최초로 한국에 진출한 남자수도회는 <성 베네딕트회>였다. 독일에서 온 이 회의 회원들은 그 무렵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주교의 요청에 따라 서울에 수도원을 두고 교육사업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를 그만 둔 다음 함경남도 덕원으로 수도원을 옮겼다.


이밖에 8·15 전에 한국에 들어온 수도회는 1924년 메리놀교회와 함께 함경도에 온 메리놀수녀회, 25년 원산에 온 성 베네딕트수녀회, 37년 대전에 온 프란체스코회 및 39년 한국에 처음으로 세운 관상수도원인 카르멜여자수도회 등이다. 이 무렵 한국인으로만 구성된 방인수도회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1932년에 평양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가 창설되었고, 35년부터는 포항 예수성심수녀회가 될 동정녀들의 모임이 시작되었다. 현재 카톨릭에는 성베네딕트왜관수도원을 포함하여 40개의 남자수도회가 있으며 100여개의 여자수도회가 있다.


한국 개신교 최초 수도원으로 기록되고 있는 대한수도원은

1940년 무렵 장흥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던 박경룡 목사가 기도처를 찾아다니다 한탄강 계곡에서 기도처를 발견하고 이 곳에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나운몽목사가 1960년에 경북 김천에 있는 용문산에서 남녀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대천덕 신부와 성미가엘신학교 학생들이 1965년도에 강원도 태백 산골짜기에 예수원을 설립하고 베네딕트수도원의 모토로서 남녀 공동체생활을 시작하였다. 엄두섭목사가 경기도 포천에 은성수도원을 79년도에 설립하였다.


그 후에 한국개신교 수도원의 형태로 설립된 기도원은 오산리기도원 한얼산기도원 청계산기도원 등 약 600여개의 기도원이 설립되어 한국교회의 성도들의 영성수련장으로 사용 되고 있다. 그리고 회중교회 송계남선교사가 2004년도에 설립한 인터넷수도원은 21세기의 정보통신사회에 걸맞게 어느 곳에서나 영성수련을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프란시스수도회의 청빈과 사도직 활동 그리고 관상수도생활을 강조하였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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