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의 역사


Ⅰ. 전래

 

제 1 장 기독교의 동양 전래(7세기~1593년)


1. 도마와 네스토리우스파의 동양 선교

 

1) 사도 도마의 동양 전도설

기독교의 초기 동방 전도에 관한 전설이나 문헌은 모두 예수의 12제자 중의 한 사람인 도마, 그리고 그와 함께 왔다는 바돌로매를 중심으로 하여 꾸며지고 있다.

인도인들의 전설 중에는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전도할 때, 도마와 바돌로매는 동방으로 진출하여 도마는 인도에서, 바돌로매는 중국에까지 들어가 전도하였다 한다.

 

2)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동방 선교

안디옥학파의 학자이며 콘스탄티노플 감독이었던 네스토리우스는 기독론을 둘러싸고 알렉산드리아학파와 갈등과 마찰이 있던 중 431년 에베소공의회에서 파문당하고 추방당하였다. 이후 그의 추종자들은 동로마황제에게 박해를 당하여 페르시아 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학파는 이단으로 확정되면서 서방교회와는 단절되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674년 페르시아가 회교국인 아라비아에 의해 멸망된 후에도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고 7세기 초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인도와 아라비아 등 외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중앙 아시아를 통해 뚫린 비단길을 타고 중국에까지 선교단이 파견되었고 중국에서 경교란 명칭으로 활발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3) 중국의 경교 전래와 역사

알로펜을 단장으로 한 네스토리우스파 선교단이 중국에 도착한 것이 635년, 당 태종 정관9년이었다. 태종은 이들을 환영하고 당의 수도 장안에 머물게 하며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도록 배려하였다. 이후 태종은 경교를 조정이 인정하는 종교의 하나로 선포하고 장안에 사원을 건축하여 대진사라고 칭하였으며 승려 21명을 두어 포교하도록 하였다. 이는 페르시아를 완충지역으로 삼아 아라비아 회교국을 견제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또한 태종의 출신 성분이 전통 한족 출신이 아니고 한족과 호족의 혼혈이었다는 점에서 외래 종교에 관대하였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태종을 이은 이후 왕들의 통치 아래에서도 1백여 년 동안 경교는 삼이사의 하나로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융성하였다. 또한 경교를 숭배하는 고위관리들이 있었던 점과 이들이 재정적인 후원을 하였다는 점도 경교 융성의 이유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중국의 문화적 전통에 맞추어 선교하려고 노력한 흔적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4) 경교의 쇠퇴

경교는 845년 무종에 의해 실시된 회창멸법조치에 의해 쇠퇴의 결정적 계기를 맞게된다. 무종에 의해 이러한 탄압을 한 것은 안사의 난 이후에 국가 재정이 궁핍해졌는데도 불교 사원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당시 많은 청년들이 군대와 노역을 면제받기 위하여 승려가 되는 경우 등을 바로잡은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호족인 안사가 일으킨 난 때문에 배외 감정이 고조되어 있었다. 여기에 더해 무종은 열렬한 도교 신자이었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요인을 배경으로 하여 불교를 비롯한 외래종교 배척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경교도 그 대상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875년 황소의 난 중에 장안까지 점령한 반란군들이 경교를 비롯한 외래종교 신도를 학살하는 바람에 그나마 남아 있던 경교도들은 살육당하거나 만주나 몽고 등 변방으로 피신하여 경교는 표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2. 중세기 서방 교회의 동양 선교

 

1) 원대의 야리가온

845년의 금교령 이후 경교는 약 4백 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가 원대에 이르러 재흥하는 현상을 보였다. 당 말기의 박해를 피해 변방에 은둔해있던 경교도들과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시리아 문화를 흡수해 살고 있던 네스토리우스파 신도들이 몽고족을 따라 중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을 통해 재흥의 계기를 마련한 네스토리우스파는 경교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복음을 섬기는 자’란 뜻의 ‘야리가온’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몽고족은 변방부족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결혼 정책을 사용하였다. 이로 인해 칭키스칸이 기독교 신자인 케라르트족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이후 야리가온에 대한 원조 왕실의 우호적인 대우로 원대의 기독교는 당대 초기에 나타났던 것과 같은 융성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당대의 경교와 비교할 때 원대의 야리가온은 지배계층의 종교라는 색채가 강했다. 원대의 역사가 변방족인 몽고의 한족의 지배의 역사였던 것과 같이 야리가온은 외래종교로 몽고족의 지원을 받으며 지배계층의 종교로 정착했던 것이다. 이처럼 야리가온이 지배계층의 외래종교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1368년 한족이 다시 일어나 명을 세우고 원을 멸망시켰을 때 야리가온도 함께 소멸되었다.

 

2)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

경교가 중국에 유입되던 시기는 우리나라의 삼국통일기에 해당한다. 이후 신라와 당은 사회·경제·문화면에서 깊은 교류를 갖게 되고 또한 신라의 해상무역은 아라비아·페르시아 지역까지 확장되었음을 볼 때 경교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원대의 야리가온이 유행했던 시기는 우리나라 고려왕조의 무인정권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후기에 속한다. 우리나라가 원에 항복한 후 원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활발한 교류를 추진했다. 특히 ‘고려사’를 보면 몽고인들이 고려로 귀화한 경우와 함께 티베트인·서역인들도 끼어 고려에 귀화하는 예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경주 불국사 석굴암의 신장, 관음상, 나한상, 제석천상 등에서 경교적 흔적을 볼 수 있다고 영국의 고고학자 고든이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아직은 가설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객관적인 입증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3) 로마 가톨릭 교회의 동양 선교

로마 가톨릭 교회의 동양 선교는 13세기에 들어와서 본격화되었다. 1054년 동서방 교회의 대분열이 이루어진 후 로마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이방인 선교에 대한 자각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십자군운동은 미지 상태에 있었던 동방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동방의 이교도에 대한 선교적 관심도 고조 시켰다. 이와 같은 선교적 관심을 구체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여러 수도단체 및 선교간체들이 창설되었다. 그 중에서도 1209년에 창설된 프란체스코회과 1216년에 창설된 도미니쿠스회는 유럽 각 도시에 대학과 수도원을 건립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십자군 운동을 지원하였고 점령지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이교도를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13세기 유럽은 몽고족의 서방 진출로 인해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당시 로마 교황 이노켄티우스 4세는 몽고세력과 타협하여 유럽의 평화를 지키려는 노력을 추진하였다. 몽고족과의 타협을 통해 그들의 서방 진출을 막고 가능하다면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므로 기독교 세력의 확산을 꾀하고자 하였다. 이후 여러 사절과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다.

 

교황 니콜라이 4세의 명령을 받은 코르비노 신부가 중국 본토에 지출하여 원 황실의 지원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폈다. 이로인해 교황 클레멘스 5세는 1307년에 중국 교구를 창설하고 코르비노를 대주교로 임명하여 중국을 중심으로한 동방선교를 관장케 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의 중국선교에는 몇가지 방해를 극복하여야만 했다. 먼저 네스토리우스파 교인들의 방해가 있었다. 또한 가톨릭교회도 몽고인을 주요대상으로 하여 선교하였기 때문에 본토 한인들에게 신앙의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은 후에 원의 멸망과 함께 가톨릭교회도 폐쇄되고마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로마에서 중국까지의 해로를 통한 여행은 많은 선교사들을 죽음과 병으로 이끔으로써 커다란 선교의 장애가 되었다. 결국 원대에 일기 시작했던 가톨릭 선교의 열기는 1세기를 넘지 못하고 시들고 말았다. 

 

 

3.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 교회의 동양 선교

 

1) 종교개혁과 예수회의 동양 선교

16세기 종교개혁에 대한 반작용으로 가톨릭교회 내에서 전개된 자기혁신이라 할 수 있는 운동의 일환으로 형성된 선교단체가 예수회이다. 내적으로는 가톨릭교회를 개혁하고 외적으로는 선교에 주력하여 실추된 교회의 명예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1541년, 예수회의 설립자의 한 사람인 사비에르는 포루투갈 국왕의 지원을 받아 인도 고아에 진출하였다. 이미 인도에는 도미니쿠스회나 피란체스코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활약하고 있었으나 토착민들의 거부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사비에르는 과감하게 토착화 정책을 펴며 병원을 세우고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선교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 결과 8년동안 활동하면서 10만명에게 세례를 베푸는 큰 업적을 남기었다. 그가 선교 거점으로 삼고 있었던 고아는 동방 선교의 관문이 되었을 뿐만 아니하 포르투갈을 비롯한 서방 여러 나라들이 동방에 진출하는 전초기지가 되었다.


이러한 점은 예수회를 비롯한 가톨릭 선교단체들의 동양선교가 복음을 전한다는 순수한 신앙적 동기와 함께 서방 여러 나라 세력의 동양 진출이라는 세속적인 동기가 함께 어울려 추진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추진된 선교였기 때문에 피선교지 국민들로서는 선교사들의 활약을 서방 제국의 침략 행위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었던 것이고 그런 점에서 저항과 박해의 갈등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2) 예수회의 일본 선교

인도 고아에서 선교하던 사비에르는 일본 선교에 착수하여 2년여 동안 머물면서 전도한 결과 1천 5백여 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이후 여러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선교에 활기를 띠게 되었다. 처음에는 선교사들을 통해 포루트갈과의 무역에 관심을 두고 접근했던 영주나 다이묘들 가운데 신앙을 고백하면서 기리시단으로 개종하는 예가 속출하게 되었다. 이로인해 1570~82년의 10여년 간이 일본 기리시단 역사의 절정기를 맞는다. 20여만의 기리시단이 생겨난 것이다.

 

이처럼 빠른 기간 중에 유행하게 된 기리시단 신앙이 정부측의 탄압을 받게된 것은 1587년 무렵부터였다. 당시 일본의 통치자였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집권 초기에 우호적 태도를 보이다가 기리시단 세력을 정치적 위협 요인으로 느끼기 시작하면서 금교령을 내린다. 이후 통치자인 도쿠카와 이에야쓰도 초기에는 묵인하다가 농민주도의 반란에 기리시단 신자들이 많이 참여하였다는 구실로 대대적인 박해를 하고 결국 1639년에는 네덜란드 선박을 제외한 어떤 외국 선박의 입항도 금하는 한편 외국 선교사를 추방하고 기리시단을 박해함으로 기리시단은 표면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853년 안세이 조약의 체결로 문호를 개방하고 기독교 선교가 재개되기까지 거의 200여 년 동안 일본에서는 기독교 역사가 단절될 수 밖에 없었다.

 

3) 예수회의 중국 선교

일본 선교를 개척한 사비에르는 인도 고아로 돌아온 후 중국 선교의 뜻을 두고 중국 광동에서 가까운 상천도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해(1552년) 사망함으로 중국 선교의 뜻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1568년,로마 교황은 카이네이로를 중국 주교로 임명하였다. 뒤이어 1583년 루지에리와 마태오 릿치는 광동성 수도인 조경 지부를 방문하고 선교 요청을 하였다. 선교허락을 받은 지부는 성당을 짓고 신앙서적을 간행하며 세계지도를 소개하는 등 중국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문화적인 접근방법을 썼다. 이같은 방법은 문화전통에 자부심이 강한 중국인들에게 효과가 있었다.

 

4) 중국 천주교회

1589년 릿치는 소주로 간 후 많은 학자들과 고위관료들과 교류하고 중국 황제 신종을 만날 수 있었다.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사찰을 교회로 사용하면서 본격적인 전교사업에 착수하여 2천여 명의 교인을 확보할 수 있었다. 릿치의 사망 이후에 예수회 선교사들은 계속 증파되었고 1630년에 이르러서는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쿠수회도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명나라 왕실과 지배계층의 지원을 업고 급속히 발전한 천주교회는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선 이후에도 계속될 수 있었다. 청 왕실은 예수회의 활동을 묵인하였고 예수회 신부들은 청 왕조에 봉사하였다. 그러나 예수회의 중국문화에 대한 타협적인 선교정책(공자묘 참배, 조상제사 허용)은 다른 선교단체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로 인해 로마교황청에 의해 예수회는 해산되고 말았다. 프란체스코회나 도미니쿠스회는 비타협적인 교황청 중심의 선교를 추진함으로써 청 정부와 마찰을 일으켰고 결국 아편전쟁 후 1842년 남경조약 체결로 중국이 서방에 개방되기까지 1백년 동안 박해받으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예수회의 중국선교는 동양선교의 한 모델로 지적될 수 있다. 토착 문화의 전통에 대한 우호적인 이해와 접근방식, 먼저 과학이나 철학같은 학문적 차원에서 접근하여 토착인들의 인정을 받은 후 본격적으로 선교에 나서는 간접 선교의 방식 등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예수회의 중국 선교는 지나치게 왕실과 유식자 계층 등 지배계층을 대사으로 하여 추진되었기 때문에 민중 속에 뿌리내리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회의 중국 선교는 우리나라 천주교 선교가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특히 예수회 신부들이 저작한 많은 한역 서학서들이 국내에 유입됨으로써 서학, 나아가 천주교 전래와 수용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 2 장 천주교의 한국 전래(1594~1800)

 

1. 일본과 중국을 통한 천주교 접촉

 

1) 임진왜란과 천주교 접촉

일본은 16세기 중엽 오랜 전국 시대를 통일하고 내적인 혼란을 전쟁을 통해 해소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략한다. 이 전쟁 중에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된다. 임진왜란 중에 서양인 성직자가 최초로 이 땅에 발을 내딪게 된 것과 전쟁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이 일본에서 천주교로 개종하게 된 것이다. 이들 중에는 순교의 영광에 이른 사람도 있다. 이때에 조선에 일본군을 위한 사제로서 들어온 세스페데스는 일본 천주교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지 한국 기독교사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사건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중에 잡혀간 포로들 중에 상당수의 개종자들이 나왔고 그들 가운데 복자위에까지 오른 순교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한국 기독교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2) 소현세자와 선교사 교류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볼모생활을 하는 동안 예수회 신부 아담 샬과 사귀게 되었다. 아담 샬로서는 조선의 왕세자와 교류함으로 조선 선교를 추구하려는 계획도 세웠던 것 같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북경 체류가 짧았기 때문에 선교사들의 계획은 구체적으로 추진되지 못했다. 


그러나 소현세자와 선교사의 접촉과 소현세자의 선교사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 등에 관한 이야기는 중국 선교사들을 통해 유럽에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동양 선교사 중원과 후원을 호소하는 한 가지 근거로 인용되기도 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해외선교를 주창하는 팜플릿 속에는 ‘조전 왕자 이야기’로 소현세자 이야기가 등장하였으며 이것이 파리외방선교회 설립의 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이 이 선교단체가 1830년 정식으로 조선교구가 창설된 이후 조선선교를 관장하는 기구가 되었다는 점에서 소현세자와 선교사의 교류는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2. 서학 연구와 신앙 실천운동

 

1) 한역서학서의 유입과 서학 연구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사회가 갖고 있던 구조적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의 지배 이념인 성리학은 이 모순을 극복할 수 없었다. 거기에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조선 후기사회는 집권 양반간의 갈등과 민중으로부터의 다양한 개혁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중국을 통해 한역서학서와 서양 선교사들이 제작한 세계지도를 비롯한 서구 과학기물들이 국내에 유입되었다. 이러한 서학 관계 서적과 기물들은 새로운 학문에의 욕구를 갖고 있던 현실 비판 성향의 학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이러한 새로운 학문 연구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서학파라는 새로운 학풍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2) 서학 실천운동 

17세기 초에 부연사행을 통해 호기심의 단계로 유입되기 시작한 서학은 18세기 중엽부터 이 익·홍대용 등과 같은 실용적 학자들에 의해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 탐구되었다. 서학파·북학파로 구별되는 서학 연구의 붐이 무르익어갈 무렵 서학의 사상적 근거로 등장한 서교, 즉 천주학까지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모험적인 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권철신·권일신·정약용·정약전·정약종·이가환·이 벽·이승훈·이기양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기호지방의 남인계 학자들이었다.

 

최초로 천주학이 요구하는 종교적 계율을 실천에 옮긴 인물은 이 벽의 제자였던 홍유한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홍유한은 1770년에 처음으로 천주학 서적을 보고 그 이후로 7일마다 하루씩 노동을 금하고 기도와 금욕 생활을 실천하였다고 한다.

 

보다 확실한 자료에 의해 밝혀진 신앙실천은 권철신·정약전이 주도한 1777년 겨울의 교리연구회에서 비롯되었다. 권철신·정약전·이 벽을 비롯한 수 명의 학자들이 천주교 교리를 연구할 목적으로 외딴 절에 모였는데 이곳에서 10여일 서학과 천주교 관계 서적을 연구하면서 마침내 종교적 진리에 접근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 모임 후에 아침 저녁 기도, 주일의 노동금지, 금육재 등 천주교에서 요구하는 몇가지 계율을 지켜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교리연구회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주로 천진암, 주어사 등지에서 강학회로 열렸다.

 

초기 강학회의 주동적 인물은 무반 출신의 이 벽이었다. 1783년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이 동지사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북경에 가게 되었다. 이 때 이승훈도 부친을 따라 함께 가기로 되어 있었다. 이 벽은 이승훈을 찾아가 “북경에 가거든 천주당을 찾아보고 그곳에 있는 서양 선비(선교사)를 만나 보고 신경도 얻어오고 아울러 영세도 청하여 받고 오도록” 부탁하였다. 북경에 들어간 이승훈은 이 벽의 말대로 북경의 북천주당을 찾았다. 북천주당은 예수회 해산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이 맡아보고 있었다. 그곳에서 프랑스인 신부를 만나 천주교 서적을 얻어 열심히 읽고 또 신부의 가르침도 받았다. 이 과정 속에 이승훈은 자신이 입교할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고 부친의 동의를 얻어 마침내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란 영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때가 1784년 정월 말경 귀국 직전이었다.


 

3. 조선 천주교회 창설과 초기 박해

 

1) 조선 천주교회 창설

이 벽은 이승훈을 통해 전달받은 천주교 서적을 탐독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보다 확고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 오랜 동안 은둔처에서 책을 읽으면서 천주교 교리에 접했던 그는 신앙의 확신을 가진 후 먼저 이승훈·정약정·정약용 등 가까운 동지들을 찾아가 적극적인 신앙 실천을 요구하고 나섰다. 또한 이 벽은 중인 계층을 주로 전교하는데 힘을 쏟았다. 역관인 최창현·김범우·최인길·지황·김종교 등이 그의 전도를 받아 입교했다. 양반 계층에게도 전도를 계속하여 권일신을 입교 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784년 9월경 이승훈은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후 곳곳에서 전도가 이루어져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온지 불과 1년이 못되어 서울과 경기도 마재·양근·포천 지방, 충청도 내포·예산 지방, 전라도 전주·진산 지방에 천주교 신앙이 확산되었다. 오래지 않아 이 벽·권일신·유항검 등이 주축이 된 일종의 평의회 모임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성사 집행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순수한 의미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인들의 신앙을 북돋아 준다는 목적에서 성사 집행이 추진된 것이다. 따라서 연장자인 권일신이 주교로 지명되었고 이승훈·이존창·유항검·최창현 등이 신부로 선출되었다. 이것은 물론 로마 교황청이나 북경 주교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일종의 불법적 교회조직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가성직제 혹은 가교계제도라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가성직 제도의 부당성이 1787년에 밝혀졌다. 신부 칭호를 갖고 있던 유항검이 여러 교리서를 숙독한 결과 지금 조선 천주교가 실시하고 있는 교회 제도가 불법적인 것이며 특히 무자격자에 의한 성사 집행이 독성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즉시 이승훈에게 이 사실을 편지로 알리고 성사집행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북경에 있는 신부들에게 이사실을 알리고 지시를 받아야 할 것임도 밝혔다. 이에 이승훈·권일신이 대표로 서한을 북경 신부에게 보내는 한편 행하던 성사도 중지하였다. 조선 천주교회 지도자들의 서한은 권일신의 제자 윤유일을 통해 북경에 전달되었다.

 

1789년 서울을 떠나 북경에 도착하여 북천주당을 찾아 로 신부를 만나 조선 천주교의 상황을 알렸다. 구베아 주교를 비롯한 북경의 신부들로서는 충격적이 보고였다. 비록 조선 천주교인들이 불법적인 교회제도를 세운 점에 있어서는 잘못이 있었지만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 순수한 신앙적 열정에 사로잡혀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꾸려나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에게는 깊은 감격을 가져다주었다.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을 통해 알게 된 조선 천주교회 발전에 깊이 고무되어 그들의 신앙과 전교행위를 찬사하면서도 이승훈이나 권일신이 “신품성사를 받지 않았으므로 미사성제를 절대 거행할 없고, 영세를 제외한 성사를 행할 수 절대로 없다는 것을 설명”한 사목교서를 써서 조선천주교인들에게 밝혔다.

이후에 윤유일이 신부 파송 요청을 하러 두 번째 북경에 갔을 때 조상 제사 문제를 비롯한 몇 가지 전통적 신앙행위에 대한 해답을 요구하는 조선 교인들의 질문을 가지고 갔다. 이에 신부 파견을 약속하면서 조상숭배문제에 대해서는 프란치스코 신부였던 구베아 주교가 이를 금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바로 이점이 조선 천주교회가 처음으로 맞을 시련의 계기가 되었다. 조상제사를 금한다는 교회의 입장이 전해지자 아직은 유교적 전통이 강했던 상당수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최초의 세례 교인 이승훈이 교회를 떠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또한 조상제사를 거부하는 종교로 세인들의 눈에 비치게 됨으로 조상숭배를 효의 근본으로 삼고 있던 전통 종교적 상활 속에서 천주교는 배척받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다.

 

2) 을사추조적발사건과 진산사건

1785년 봄에 형조의 금리들이 우연히 명례방 김범우의 집을 지나다가 이상한 집회가 열리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이 벽이 중앙에 앉아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있었고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 권일신, 권상학 부자 등이 모여 있었다. 당시 형조판서 김화진은 집주인인 중인 김범우만 체포하고 나머지 양반계층 교인들은 책유하여 내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이것이 소위 을사추조적박사건이다. 천주교인의 실체가 정부 기관에 의해 최초로 발각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연루, 체포된 김범우는 단양에 유배당한 후 1년 만에 유배지에서 죽음으로 “조선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이때로부터 서학을 연구한 바 있는 학자들에 의해 천주교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익의 문하생이었던 안정복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787년 겨울에 이승훈·정약용·강이원 등이 반촌에 있는 김석태의 집에 모여 서학서를 공부한 사실이 폭로되는 사건이 터졌다. 이것을 정미반회사건이라 하는데 이 사건을 폭로한 인물은 이승훈·정약용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고 처음에는 서학에 호의적 관심을 모였던 이기경이었다. 유하원·이경명 등이 같은 취지의 상소를 계속 올리자 정조는 마침내 그 청을 받아들여 집안에 비장된 서학서들을 모두 불에 태우거나 물에 던져 버리고 북경으로부터 서학서 수입을 엄중 단속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 같은 위기의 상황 속에서 소위 진산 사건이 터졌다.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천주교인 윤지충·권상연이 체포되어 처형당한 사건이 터졌으니 조선 천주교회로서는 처음으로 맞는 대규모 박해였다.

 

정양용의 외종이 되는 윤지충은 진사 시험에 합격한 양반 계층 신분으로 1784년 서울에 갔다가 김범우에 집에 들러 천주실의와 칠극을 얻어 보았으며 고향으로 돌아와 그의 외종형 되는 권상연과 함께 서학을 연구하던 중 둘이 함께 입교하였다. 정미반회사건 이후 정부에서 서학을 금하는 명이 내리자 집에 있던 서학서를 태웠으나 은밀하게 신앙은 계속 지켰다. 그는 1790년 말 윤유일을 통해 북천주교의 조상제사 금지령에 따라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그 신주들을 땅에 묻었다. 그러나 이같은 은밀한 신앙행위가 그 어머니 권씨가 별세하게 됨으로 폭로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문제화시킨 장본인은 홍낙안이었다. 정미년반회사건을 폭로하여 조정으로 하여금 서학서를 불사르도록 명을 내리게 했던 그는 진산사건을 접하자 즉시 당시의 집권자 채제공에게 윤지충을 사형시킬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냈고 진산군수 신사원에게 윤지충의 체포를 촉구하고 나섰다.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은 진산군수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후 곧 전라감사 정민시의 심문을 받았다. 유교는 양반 중심의 종교 체계로서 소수의 양반 계층을 위한 정치·경제·사회적 구조를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유교가 요구하는 제례적 행위를 거부한 것은 곧 양반계층의 권력구조에 대한 저항이었고 이것은 양반으로 상징되는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될 것은 당연했다.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은 사형이 선고되어 1791년 전주 풍남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이같은 위기 상황에서 천주교회를 지켜나간 인물들은 중인 계층의 교인들이었다. 역관 출신인 최창현·윤유일·최인길, 악사 출신인 지 황 등은 양반 계층이 떠나간 초기 천주교회를 지켜나갔다. 이들에 의해 신부 영입 운동이 추진되었고 흩어진 교인 규합이 이루어지게 된다.

 

3)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

진산사건(혹은 신해박해)으로 천주교는 단순한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이며 따라서 전통 유교와는 다른 종교로 인식되었다. 종래의 보유론적인 입장에서 서학을 수용하려 했던 학문적 노력은 이제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서학→천주학→천주교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신앙실천의 용기가 없었던 많은 학자들이 이탈되었으며 더욱이 진산사건으로 인해 천주교가 종교적·정치적 탄압을 받게 되자 역시 많은 양반 계층 교인들이 배교하였다. 그 공백을 중인 계층이 메우게 되었는데 이로써 조선 천주교회의 주체 세력의 변화도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교회를 유지 시켜 나간 최창현·최인길·지 황·윤유일 등은 비록 초기 학자층 양반 교인들만큼 학식이나 명성은 갖추지 못했을지라도 신앙에 대한 열정은 양반 교인들을 능가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선 성사를 집행할 신부가 필요함을 느끼고 먼저 신부 영입 운동을 벌였다. 박해의 여운이 가실 무렵인 1793년말에 윤유일·지 황 등이 북경으로 떠났다.

 

윤유일·지 황 등은 북경에 들어가 그 동안의 박해 상황을 주교에게 보고하는 한편, 조선 천주교회에 대해 북경 주교로부터 “사도직 수행을 위한 일반적인 권한과 비상 권한”을 모두 받은 주문모 신부를 안내하여 1794년 12월23일 압록강을 건너 국내에 잠입하는데 성공하였다. 신부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자 은둔했거나 배교했던 교인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외국인 신부가 국내에 들어와 종교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은 관청에까지 들리게 되었고 1795년 6월 국왕의 신부 체포령이 떨어졌다. 마침내 주문모 신부는 조선인 교인들의 주선으로 체포를 면하여 멀리 연산의 이보현의 집에 숨을 수 있었으나 신부 영입을 주도했던 윤유일·지 황은 물론 신부 사택을 마련했던 최인길까지 체포되었다. 이들은 1795년 6월 28일 처형되었다. 일이 이 정도로 정리된 것은 무엇보다 정조가 과격한 천주교 탄압을 싫어했으며 권력을 잡고 있던 체제공이 남인 시파에 속했던 인물로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들이 대부분 자신과 같은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을 축소화하려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주문모 신부의 활동이 여러 가지 면에서 제약을 받고 있었으나 그의 활약으로 교회는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특히 그가 들어온 이후 조선 천주교회는 여성 교인들의 증가라는 새로운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전통 봉건주의 사회체제 속에서 신분상의 제약을 받아오던 여성들의 신앙 진출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의 주체 세력의 변화는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초기 상류 양반계층이 주도했던 천주교회는 잇단 정부측의 박해로 점차 중인 계층이 주도세력으로 바뀌었음은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는데 이제 또 다른 소외 계층이었던 여성들이 교회에 진출하여 주도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여성 교인들의 신앙지도는 강완숙이 맡았다. 그는 동정녀 윤점혜의 도움으로 여성 교인들의 신앙 생활을 지도해 나갔다. 강완숙의 활약으로 왕족에까지 신앙이 전파되어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그 며느리 신씨가 입교하여 세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양반집 부녀자들과 궁 안의 궁녀들도 여럿 입교하엿다.

 

우리말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주문모 신부는 교인들의 교리연구회 성격을 지닌 명도회를 조직하여 조선인 스스로 신앙훈련을 쌓도록 유도했다. 초대 명도회장으로 정약종을 임명했으며 이 회원들이 열심히 전도하여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전 4천여명에 불과했던 교인 수가 몇 년 후에는 1만 여명에 이르렀다.

 

 

제 3 장 천주교회의 수난과 발전

 

1. 신유박해와 황사영백서사건

 

1) 당파와 신유박해

천주교에 대한 큰 박해 사건은 조선 후기 정파적 분쟁 등 정치권의 변동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정조가 재위하는 동안, 대부분의 천주교 관련 양반들과 같은 정치적 파벌인 남인 시파를 옹호하는 채제공이 정권을 잡고 있었기에 큰 박해는 없었다.

 

1799년 남인 시파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채제공이 죽고 이듬해 정조마저 승하하자 뒤를 이러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게 되었다. 그러자 순조의 증조모이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순왕후 자신을 물론 그의 친척과 주변 인물들이 노론 벽파에 속한 인물들이었다. 수렴청정을 계기로 벽파는 시파에 눌려 정치적으로 배척당했던 한을 풀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고 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용했다. 이같은 정치적 갈등의 배경에서 야기된 천주교 박해가 바로 신유박해이다.

 

정순왕후는 국장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론 벽파 인물들을 주요 요직에 앉혔다. 1801년 1월에는 오가작통법을 작동시켜 전국에 걸친 천주교인 체포를 명하였다. 처음엔 중인 계층 이하의 교인들이 체포되다가 점차 상류 양반 계층 교인들도 체포되었다. 양반 계층 교인들의 천주교 관련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벽파의 처벌 요구는 더욱 가열되었고 마침내 2월에 접어들면서 이가환·정약용·이승훈·권철신·홍낙민·홍교만·정약종 등이 체포되었다. 이들 중 정약종·홍낙민·최창현·홍교남·최필공·이승훈 등 6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이가환·권철신은 옥사하였고, 정약용·정약전은 배교하여 유배당했다. 박해는 지방으로도 확산되어 내포의 이존창, 여주·양근의 원경도·임희영·이중배·유한숙 등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정부는 주문모 신부의 체포에 진력했다. 주문모 신부는 교인들의 피해를 줄일 목적으로 의금부에 자수하였다. 이에 관련된 인물들이 드러나면서 은언군의 부인과 며느리, 궁 안의 여러 교인들이 드러났다. 강완숙을 비롯한 여자 교인들의 실태도 발각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희생된 천주교인의 수는 3백명이 넘는다.

 

2) 황사영백서와 초기 천주교인들의 대외인식

황사영은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배론으로 피신하였으나 박해 초기에 이미 체포령이 내려져 있었다. 이 같은 급박한 상황에 처한 황사영은 배론의 은신처에서 박해 내용을 비단에 적었는데 이를 황사영백서라 한다. 그는 이를 황 심을 통해 북경으로 보내려 했다. 이 백서에서 황사영은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을 세 가지로 제안하고 있다. 첫째는 청의 황제가 직접 조선왕에게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권면하는 방법이다. 둘째는 청의 황제와 친한 중국인 신자를 조선에 파견하여 평양과 안주 사이에 무안사를 두고 조선의 정치를 감호케하고 또 청의 공주를 조선 왕비로 삼게함으로 천주교 신앙을 확산시키는 방법이다. 마지막 셋째 방법은 서양 함대를 동원하여 조선 정부를 위협하여 강제적으로라도 천주교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 백서는 천주교를 대역부도하고 반국가적인 단체로 몰아 넣을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 황사영이 대역부도죄로 능지처참을 당했고 그와 관계 맺었던 현계흠·옥천희·황 심·김한빈 등고 모두 참수되었다. 정부에서는 황사영백서 사건이 일단락되자 1801년 12월 22일 <토사교문>을 발표하여 박해에 대한 정부 측 입장을 정리하였으며 사학죄인에 대한 심문이나 처형을 연말 안에 끝내도록 지시함으로 1년간에 걸친 박해를 마감 지었다.

 

정치적으로 볼 때 신유박해로 남인 시파는 전멸하여 재기불능의 상태에 이르렀다. 박해를 주도한 노론·남인 벽파로 보아서는 완벽한 승리였다. 종교적인 면으로 보아도 사학으로 규정된 천주교는 멸절된 것으로 보였다. 오가작통법은 서울 뿐만 아니라 지방의 교인 색출에 효과적이었다. 천주교를 믿으면 본인은 물롬 가족과 이웃까지 해를 당한다는 인식이 생겨나면서 천주교의 침투가능성은 더욱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천주교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배척의 분위기가 성숙된 것이 보수 세력으로서는 큰 소득이었다.


 

2. 조선교구 창설과 기해·병오 박해

 

1) 조선교구 창설과 파리외방전교회의 조선 선교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교인들은 용기를 갖고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재난을 당한 교인 가족을 돌보고 그런 가족들끼리 모여 공동생활을 꾸려 나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신앙공동체가 재조직되었고 나아가 교우촌 이라는 집단적 교인 촌락이 형성 되었다. 배교하고 나갔던 교인들이 다시 찾아왔으며 몇몇 용기있는 교인들의 순교 장면을 보고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입권을 원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다시 모이기 시작한 교인들을 중심으로 교회 재건운동이 전개되었으니 그 주역들은 초기 천주교 도입에 관련되었던 인물들의 다음 세대, 즉 2세대였다. 권철신의 조카 권기인, 홍낙민의 아들 홍우송,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과 주문모 시절 믿기 시작했던 이여진 및 그의 사촌 신태보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조선 교인들의 끈질긴 신부 영입운동은 마침내 교황의 마음을 움직였다. 유진길이 교황에게쓴 장문의 서한이 1827년 로마의 도착했다. 조선 교인들의 간절한 요청을 받은 교황 레오 12세는 “조선에 독립된 포교지를 설치하여 교황청에 직속하게 하고 포교사업은 파리외방전교회에 맡기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교황청 포교성성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조선선교를 주관할 선교사 선발을 위촉하였고 이에 태국에서 활약 중이던 프랑스 출신의 브뤼기에르 신부가 1831년 조선 선교를 지원하고 나섰다. 브뤼기에르의 요청이 받아들여지고 마침내 1831년 9월 9일(양)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교서를 발표하여 조선 교구 설정을 밝혔다. 그리고 같은 날짜로 브리기에르에게 친서를 보내 그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브뤼기에르가 죽은 후 1836년 4월, 교황은 엥베르를 주교로 임명했다. 그 사이에 모방은 조신철·정하상 등 조선 교인들의 안내를 받아 1936녀 1월 12일 조선에 입국하는데 성공했다. 1867년 1월에는 샤스땅신부가 입국하는 데 성공했고 그해 12월에는 앵베르 주교까지 들어왔다. 프랑스인 신부 3명이 들어와 활동함으로 교회는 급진전을 보였다. 모방이 입국할 당시 6천 명에 미치지 못했던 교인 수가 1838년 말에 이르러 9천 명에 이르고 있었다. 1836년 말 김대건·최양업·최방제 등 조선 청년들이 신학수업을 받기위해 마카오로 간 것도 성숙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 가지 예였다.

 

2) 기해 박해와 병오 박해

1801년의 신유박해를 주도한 장본인 정순왕후 김씨가 1805에 죽었고 대신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것도 천주교에 대한 박해 분위기가 누그러진 동기의 하나였다. 벽파였던 정순왕후 대신 시파였던 김조순이 등장하였는데 이 같은 정세 변화는 천주교 입장에서 볼 때 다행스러운 것이었다. 김조순의 등장은 시파의 득세를 의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소위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는 종래의 당파 정치와 다른 차원의 족벌정치를 야기시켰다. 순조 말기의 들어서면서 안동 김씨 세력은 새로운 족벌정치 세력인 풍양 조씨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된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 부인은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이었다. 1832년 안동 김씨 세력의 핵심이었던 김조순이 죽고 1834년 순조마저 승하하게 되면서 안동 김씨 세력은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 효명세자의 아들이 헌종으로 즉위하였으나 당시 나이 8세밖에 안되어 또다시 수렴청정을 헤야 하는데 순조 왕비였던 순원왕후 김씨가 대왕대비로 정권을 맡게 되었다. 순원왕후가 정사를 맡아보고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이 남아있어 표면상으로는 안동 김씨가 계속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으나 내부적으론 안동 김씨 집권체제가 상당히 불안한 형편이었다. 1839년에 이르러 조만영은 정부의 명령을 관장하는 기관인 홍문관 대제학, 조인영은 이조판서, 그의 조카인 조병현을 형조판서가 되었고 우의정이었던 이지연도 풍양 조씨세력의 편에 서게 됨으로 실질적인 권한은 풍양 조씨 세력이 장악한 셈이었다. 바로 그해, 1839년(헌종 5년)에 신유박해보다 더 치열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으니 그것이 곧 기해박해이다. 이 박해는 이지연을 비롯한 풍양 조씨 세력이 순원왕후에게 천주교 처벌을 끈질기게 요구하여 이를 물리치지 못한 순원왕후의 박해령 포고로 시작되었다.

 

김순성이란 배교인이 있어 교인들에 대한 정보를 정부에 알려주어 많은 지도급 교인들이 체포되었는데 , 유진길·정하상·조신철 등 교회 재건 운동의 주역들이 그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또 김순성의 간계로 앵베르 주교까지 체포되었다. 그리고 모방·샤스땅 신부까지도 앵베르 주교의 자수 권유 서한을 받고 자수하여 체포되었다. 세 명의 프랑스 신부는 국사범으로 취급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고 심문을 받은 후 9월 21에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기해박해는 신유박해 이상 가는 피해를 교회에 안겨주었다. 이무렵 기록된 <긔ㅣ일기>에 따르면 참수된 순교자가 54명, 옥중에서 죽은 자가60여명에 이르고 배교하고 석방된 자가 4,50명에 이른다. 이처럼 처참한 박해를 받았으나 교회의 회복능력도 전보다 강하여 신유박해 때처럼 오랜 세월 폐허상태에 머물지는 않았다. 교황은 앵베르 후임으로 1843년 1월 페레올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여 입국하도록 했다. 김대건은 1845년 8월 한국인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고 마침내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충청도 강경을 통해 입국하는데 성공하였다. 페레올과 다블뤼는 입국 즉시 서울과 충청도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착수했다. 김대건 신부는 만주에서 입국의 기회를 찾고있는 메스트르 신부의 입국을 주선하기 위하여 황해도 해안으로 갔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이사건을 계기로 또 한차례 박해 선풍이 불었다. 이때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현석문·남경문·한이형·임군집 등 기해박해 때 살아남았던 교인들이 처형당했다. 이를 병오박해라 부르나 보통 기해박해의 연장선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해·병오 박해로 순교한 교인 중 79명은 1925년 복자로 시복되었고 다시 1984년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기해·병오 박해는 신유박해에 비해 양반·중인 계층의 구성비가 줄어든 대신 상민 계층이 급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성 교인의 증가도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같은 교인 신분계층의 저변화는 기해박해 이후로도 계속되어 1860년대 병인박해 때에는 무식·빈곤 하층인들이 교회의 기본 세력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병인 박해와 조선 후기의 사회 변화

 

1) 교회의 재건과 발전

1884년 당시 19세이던 철종을 왕으로 세우고 순원왕후가 다시 정사를 맡아보게 되었으니 안동 김씨 세력이 재등장하게 됨은 물론 전통적으로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시파의 복귀도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같은 정치적 변화에 따라 조선 천주교회는 유례없는 발전을 기할 수 있었다. 병오박해 때 체포를 면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주교의 활동과 조선의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를 비롯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의 활약에 힘입어 조선 천주교인의 수가 기해박해 당시 1만 명이 채 안되었던 것에서 1865년에 이르러 2만 3천여 명으로 증가할 수 있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은 조선 천주교회의 자생능력을 키우는 것이 시급함을 알고 그 것을 위해 몇 가지 사업을 추진하였다. 우선 조선인 성직자 양성으로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856년 충청도 배론에 신학당을 설립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말로 된 교리서를 비롯하여 천주교 관계 문헌들을 펴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한글 교리서의 인쇄·보급은 천주교 확산 도구로 그치지 않고 조선 사회에 보다 광범위한 문화적 영향을 끼쳤다. 즉 한글 교리서의 보급으로 한글문화가 재창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조선 후기 사회에 정치적·경제적 피압박 계층이었던 민중 계층이 천주교에 흡수될 수 있었고 현실 비판적이며 강한 내세 지향적 신앙 양태를 표방하게 되었다. 이같은 민중지향적인 교회의 성격은 다른 한편 현실 체제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는 저항 세력으로 발전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면에서 기존의 보수 세력에게는 도전으로 해석되었고 그에 따라 박해가 불가피했다.

 

2) 대원군의 집권과 서양 선박들의 출현

철종 조에 발전하였던 조선 천주교회는 철종이 죽고 고종이 등극하면서 또다시 박해의 회오리에 싸이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집권하자마자 혁신적인 정책을 실시하며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의해 쌓인 사회적 불만과 부정을 추방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서원정리와 같은 정책에서 양반 계층이 불만이 쌓이고 경복국 중건을 위한 무리한 재정정책은 농민들의 지탄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보낸 선박들은 끊임없이 조선 해안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한 것도 또 다른 불안의 한 요인이었다.

 

3) 병인 박해와 봉건세력의 몰락

1866년에 시작된 병인박해는 종래 천주교 박해의 원인이 되었던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루어졌다. 초기 박해였던 신유박해에서 나타났던 전통 유항계층의 수구적인 서학 배척 요인뿐만 아니라 기해박해에서 나타났던 정치 세력간의 갈등에 의한 정치적인 요인에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에 의한 위기의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난 박해였다. 여기에다 오랜 세월 소수 양반·관료 중심의 전제봉건주의의 폐단으로 인해 야기된 민중계층의 사회적 불만을 적절하게 해소시키지 못한 집권세력의 무능도 또 다른 사회불안의 요인이 되고 있었다. 이 같은 복잡한 사회·경제·정치적 상황에서 대원군은 대외적으로 쇄국정책을 표방하여 외국과의 통상이나 교류를 엄금하였고 내적으로는 사회불안요인으로 인식된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가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해 보려 한 것이다.

 

이처럼 복잡하고도 다양한 요인을 갖고 시작한 박해였으므로 그 범위나 정도가 앞에 있었던 어느 박해보다고 크고 넓을 수밖에 없었다. 앞에 있던 박해는 1,2년 안에 마무리되었으나 병인박해는 무려 8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박해의 범위도 한반도 전역에 미쳤으며 순교한 교인의 수는 대략 8천~2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박해가 이처럼 장기간에 걸쳐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천주교회가 한반도 전역에 넓게 확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박해 기간 중에 프랑스·미국·영국의 선박이 계속해서 도래하여 위압적인 자세로 통상을 요구하거나 군사적 도발을 감행하였는데 이로써 야기된 외국 군대와 조선군 사이의 전쟁이 박해를 장기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즉 1866년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양요,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소 도굴 사건, 1871년의 신미양요 등 서양인들과의 무력충돌이 계속 일어남으로 천주교 박해는 단순한 종교적 탄압이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저항의 차원에서 추진된 측면이 없지 않다.

 

 

Ⅱ. 수용

 

제 4 장 개신교의 수용(1876~1884)

 

1. 중국을 통한 한국 선교의 시도

 

1) 귀츨라프의 내한

개신교 선교사로서 가장 먼저 한국을 방문한 사람은 독일 출신의 귀츨라프이다. 이는 서구제국의 동양 진출과 동시에 이루어진 해외 선교와 관계 깊다. 귀츨라프는 당시 중국 무역권을 독점하고 있던 영국의 동인도회사로부터 동아시아 일대를 순방하며 통상에 관한 조사를 목적으로 하는 여행에 통역 겸 선의로 동승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1832.7.23일 충청도 홍주만 고대도에 정박하여 성서 및 전도 문서를 전달하며 조선 정부와의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당시 조선 정부의 배외 정책으로 인하여 실패하고 돌아갔다.

 

2) 윌리암슨의 한국 선교 지원

윌리암슨은, 1807년부터 중국선교를 시작한 런던서교회 소속으로는 1855년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파견 선교사로서는 1863년에 각각 중국에 도착하였다. 윌리암슨은 한국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였다. 1865년 가을 죽음을 무릅쓰고 황해를 건너온 두 한국인을 접촉하였던 토마스 선교사는 이들과 함께 한국에 갈 것을 결심하고 윌리암슨의 후원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윌리암슨은 만주를 통한 한국선교에도 노력하였다. 1867년 만주 여행에서는 봄철 개시에 참여하려는 한국 상인들에게 전도하였고 동시자 일행인 이풍익도 만날 수 있었다. 그해 가을철 개시 때에는 책문에까지 가서 전도하고 한국에 관한 정보를 광범위하게 수집했다. 그의 만주 선교와 만주를 통한 한국선교의 깊은 관심이 로스와 매킨타이어 같은 신실한 후계자를 얻게 되었다. 또한 중국내지 선교회 소속의 의료선교사 다우웨이트가 한국을 방문 선교하게 된 것도 윌리암슨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3) 토마스와 제너럴 셔어먼호 사건

윌리암슨의 후원으로 1차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서해안에 상륙하여 2개월 반 동안 체재하면서 한국어를 습득하면서 성서를 나누어 주고 복음을 전하는 등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 후 서울을 향해 가다가 태풍으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만주를 거쳐 북경으로 되돌아갔다. 북겨에 체류하면서 한국에 대한 뜨거운 선교의 열정을 소망하고 있다가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을 향해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 복음을 전할 수 있으리라는 동기에서 이 배에 동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너럴 셔먼호의 오만한 개항 요구와 평양 군민들에 대한 포악한 행동들은 두 진영 간의 전투로 발전하면서 제너럴 셔먼호는 불타고 선원들 전원 살아 남지 못하였다. 토마스 선교사는 최후의 순간에도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고 그의 순교는 평양 지역에 세워진 수 많은 교회의 거름이 되었다.


 

2. 만주에서의 성경 출판과 전도사업

 

1) 로스·매킨타이어와 한국인 개종자

중국을 통하여 한국 선교를 시도한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만주에 진출했던 선교사들도 한국에 대한 선교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 시도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만주진출에서 시작된다. 로스는 청과 조선의 국경에 위치한 고려문에 도착하여 한국 상인들을 만나 한문성경을 팔며 전도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복음의 진리보다는 영국산 면제품인 양목에만 관심이 있는 것에 실망하였다. 그러나 로스에게서 성경과 소책자를 받아 간 그 상인은 그것을 자신의 아들과 그 친구들에게 주어 읽게 하였고, 이들이 바로 뒷날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수세자들이 되었다. 그 상인이 바로 백홍준의 부친이었다.

 

관서 지방에는 일찍부터 자립적 중산층이 대두하였는데, 청과의 무역을 통해 성장한 상인이 그 대표적 계층으로 특히 의주에는 국경 무역의 관문으로 장사를 통해 부를 축적한 제3계급으로서의 상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개 한문과 만주어에 능통한 학인으로 독서층이었고, 개방적이고 독립적인 의식을 소유하여,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사회질서에 대한 요구가 강했다. 이들이 바로 로스·매킨타이어를 만났고, 성경을 번역하였으며 한국에 복음을 수용하는 통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로스의 두 번째 고려문 방문은, 1876년 3월의 강화도조약에 의한 한국 문호개방 소식에 자극을 받아 4월말에 이루어졌다. 이 여행에서 로스는 어학교사를 얻고자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의주 상인 이응찬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뒤 이응찬이 귀국하자 로스는 서상륜을 만날 수 있었다. 동생 경조와 함께 홍삼 장사차 영구에 왔다가 열병에 걸려 거의 사경에 이르렀다. 친구들의 주선으로 헌터의사의 치료를 받게 된 서상륜은 이때 매킨타이어의 전도를 받았으며 완쾌 후 로스에게 소개되었다. 1879년은 한국교회사에 길이 기억될 해이다. 이 해에 백홍준과 이응찬을 비롯한 4명의 한국인이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이에 따라 한국개신교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천주교의 수용이 양반학자의 학문적 관심에서 나온 주체적인 것이었다면, 개신교의 출발은 중산층 상인들의 종교심에서 발로된 결단 때문이었다고 하겠다.

 

2) 성경 번역과 출판

한국의 쇄국으로 인해 직접 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로스는 선교의 문이 열릴 것을 믿으면서 성경번역 사업을 전력적으로 추진하였고 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출판하게 된다. 로스가 이응찬의 도움으로 번역을 시작한 1877년부터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서>가 간행되는 1887년까지의 10년의 기간을 두고 볼 때 앞날을 내다보는 그의 신앙적인 안목과 그 일에 피땀을 쏟았던 수많은 한국인 개종자들 노고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3) 반포사업과 교회들의 설립

반포 사업의 경우 그 주역은 한국인 개종자들과 권서들이었다. 이들은 마을마다 성서를 짊어지고 들어가 복음의 씨를 뿌린 전도의 선구자들로, 이들의 노력이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인 1880년대 초에 만주와 한반도에 여러 공동체의 설립으로 나타나게 된다. 1882년 3월 예수성교본이 간행되면서, 로스는 먼저 반포가 자유로운 한인촌을 대상으로 반포사업을하기로 작정하고, 식자공인 김청송을 최초로 완성된 복음서를 가진 전도자 겸 권서로 삼아 파송하였다.

 

1884년에는 김청송에게서 받은 성경을 읽고 기독교를 알게 된 여러 명의 한국인들이 진리를 좀 더 알고자 봉천의 로스를 찾아갔다. 이들은 임오군란 이후 평안도로 좌천된 보수파 군인들로 정세변동에 따른 생명의 위협 때문에 한인촌으로 망명한 사람들이었다.


1882년 대영성서공회는 서상륜을 권서로서 한국에 파송하였다. 서상륜은 봉천에 방문하여 국내에 있는 70여 명의 세례 청원자의 존재를 보고하고 다시 한 번 로스의 한국 방문을 요청한 뒤, 의주를 거쳐서 소래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20여 명의 구도자들을 지도하며 성경과 교리를 가르쳤고 개인집을 돌아가면서 예배를 드리다가 1886년 경에는 예배처소를 마련하여 매주일 정기예배를 드린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주체적이고 자립적인 한국교회의 출발의 전형이자 요람으로 불리는 소래 신앙공동체의 시작이었다.


 

3. 일본에서의 성경 출판과 선교사업

 

1) 이수정의 개종과 신앙활동

만주에서 성경출판과 한국인 개종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일본에서도 동일한 일을 행하셨으니, 여기에 쓰임 받는 종으로 이수정이 부름받게 된다. 그는 온건개화파 양반학자였는데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구출한 공으로 1882년 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사실 이수정은 국내에서도 이미 천주교와 개신교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일본에서 기독교인 농학자인 츠다센을 만나 성경공부에 몰두하게 됨에 따라 기독교의 실체에 접근하게 되었다. 이에 미국인 선교사 녹스에 의해 세례를 받아, 도일 7개월 만에 한국인으로서 일본에서 세례받은 첫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이수정은 복음을 당시 김옥균의 인솔로 일본에 가 있던 30여 명의 유학생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다. 이수정의 노력에 따라 유학생들의 세계에서는 개종이라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이는 루미스의 고백대로 하나님의 은혜 그것이었고 한국선교가 절망적이던 당시에 커다란 격려가 되었다. 1883년말에 벌써 7,8명의 한국인 수세자가 동경에 있게 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유학생들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주일마다 설교자를 초청하여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니, 이것이 1883년말 토오쿄에 세워진 최초의 한인교회였다.

 

이수정의 일본에서의 활동은 전도와 성서번역, 그리고 선교사 초치운동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는 세례를 받기 전부터 한국민족에게도 복음의 진리가 하루 빨리 전해져야 한다는 불타는 마음이 솟았고, 이것을 먼저 재일 선교사들에게 전했다. 이수정의 개종은 한국선교의 문을 열어보고자 고심하던 재일선교사들에게 “근대선교사상 가장 괄목할만한 사건으로, 너무 좋아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사건이었다. 녹스는 이수정에게 세례를 준 후 즉시 이 사실을 본국에 알렸다. 미국교회에서는 이수정의 요청을 “한국의 마케도니아인의 부름”으로 불려지게 되었고 이제 막 시작된 한국선교에의 관심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 계속되는 호소에 힘입어 루미스와 녹스는 이에 고무되어 한국탐사여행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김옥균의 친선교사적인 태도 변화가 있게 되었고 매클레이의 내한에 이어 선교사들의 한국 파송이 이루어져 갔던 것이다.

 

2) 성경 번역과 출판·반포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는 이수정을 찾아가서 한국선교의 지름길인 성경번역을 제안하자 이수정을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수정의 번역은 1883년 5월중순에 시작되었다. 먼저 한문 성경에 당시 한국 지식층에서 널리 사용되던 토를 다는 방법으로 소위 현토성서부터 착수하였는데, 이 토달린 한문성경들은 이후 번역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당시 동경의 유학생들에게는 물론 국내에 반포되어 지식층의 환영을 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3) 재일 선교사들의 역할

이수정이 도일한 이듬해인 1883년은 일본교회가 급격한 성장을 이루는 계기가 된 해이다. 이러한 부흥의 열기 속에 한국인 유학생들의 개종이 이루어졌고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간 것이다. 일본에 온 미국선교사들 중 한국선교의 선구자는 장로교의 녹스와 감리교의 매클레이였다. 녹스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수정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그의 신앙성장과 성경 이해를 도와 성경번역에 큰 힘이 되었고, 미국선교본부에 이수정의 선교사 요청을 전달하면서 한국에서의 교육사업과 의료선교의 절대적 필요성을 역설함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한국선교의 문을 열었다.


매클레이는 미감리회의 첫 중국 선교사로 1848년 임명되어 1872년까지 봉사하던 중 해안에 조난되어 온 한국선원들을 본 뒤 한국선교의 꿈을 가지기 시작했고 , 1872년 본국 총회에서 일본과 한국선교를 강조한 뒤 1873년 일본초대 선교사로 부임하였다. 그의 개척자적인 정신과 한국 선교에의 열망이 김옥균과 이수정을 만나게 하였고, 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1884년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한편, 재일선교사들의 한국선교의 노력은 개화파들의 서구문명 수용 열의와 만나게 되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김옥균이었다. 매클레이가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김옥균의 중개로 고종의 선교사업 윤허를 가능케 하는 만남이었다.


 

4. 미국 선교부의 한국 선교 결정

 

1) 한미조약과 견미사절단

 

1882년 한국은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후 견미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한다. 이 여행 도중 미 감리회의 목사인 가우처를 만나게 된다.

이 가우처 목사는 ‘이디오피아 내시 앞에 나타난 빌립’처럼 역할을 하게 되어 한국에 대한 미국선교를 일으키게 된다.

 

2) 미국 개신교 선교부의 한국선교 결정

미국에서는 18세기말에 제2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났고 거기에 따라 일련의 종교적 열정으로 해외선교열이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1884년 말 감리교회 소속의 스크랜튼 박사와 아펜젤러 목사 및 스크랜튼 부인이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미국 장로교에서는 의사 헤론을 한국 최초의 선교사로 임명하고 또한 언더우드를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한국 땅에 가장 먼저 상륙한 선교사는 중국 선교를 목표로 선교지로 떠났던 앨런이었다. 

 

3) 매클레이의 방문과 알렌의 입국

가우처로부터 한국선교에 관한 요청을 받은 일본 주재의 매클레이는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에서도 한국 탐방을 요청받았다. 이에 한국을 방문한 매클레이는 김옥균의 주선으로 조선국왕에게 교육과 의료를 통한 선교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은 매클레이는 며칠 동안 서울에 더 머물며 선교사업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고 대지를 물색하였다. 이에 주한미국공사관 근처에 지역을 매입할 수 잇도록 준비를 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매클레이는 아직도 기독교에 대한 교금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용기를 가지고 미지의 한국에 들어와 미감리회가 교육·의료 사업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획득하여 한국선교의 양부로 추앙받게 되었다. 매클레이의 한국방문 이듬해 아펜젤러가 교육사업을 통한 선교활동을 위하여, 스크랜튼이 의료선교사업을 목표로 각각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알렌은 1884년 9월14일에 상해에서 행선하여 20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22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는 한국에 상주하는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되었다.

 

 

제 5 장 선교의 자유와 초기 선교활동(1885~1906)

 

1. 선교사의 입국과 초기 선교활동

 

1) 초기 선교사들의 한국 정착

한국 개신교 역사의 특징 중 하나를 꼽자면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선구적 구도자들에 의해 복음이 수용되어 상당수의 세례지원자들이 배출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만주와 일본에서 우리말로 된 성서가 나왔고 그것이 여러 경로를 통해 국내에 반입되어 그것을 읽는 사람 가운데, 또한 서상륜과 백홍준 같은 용기있는 전도인들의 활약에 의해 기독교를 믿으려는 의사를 표시한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결심한 구도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매클레이가 김옥균을 통해 고종에게 허락받은 선교사업은 학교와 병원사업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선교부도 선교사를 선발함에 있어 두 가지 사업을 염두에 두고 선발했다. 그 결과 1884년말에 이르러 미국 북장로회에서는 이미 의료선교사로 선발된 알렌과 교육선교사로 언더우드를, 미감리회에서는 의료선교사로 스크랜튼을, 교육선교사로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부인을 각각 선발하였다. 이들의 신분은 의사 혹은 교사였지만 언더우드·스크랜튼·아펜젤러 모두가 안수받은 목사들이어서 복음전도라는 본래의 사명도 수행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영국 성공회 코르프 주교 입국: 벤슨 대주교는 1989년11월11일 영국해군 군종사제 출신인 코르프 신부를 초대 한국주교로 서품하여 영국성공회의 첫 번째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캐나다 장로교회의 메켄지, 게일 입국: 캐나다 장로회의 한국 선교는 1898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캐나다인이 개인자격으로 한국에 와서 선교한 것은 1888년 부터였다. 즉 게일이 터론터 대학의 기독교청년회의 후원을 받아 내한하여 활동을 개시한 것이다. 1893년에는 메켄지가 내한했는데 그는 메리타임지 지역 장로교학교 선교협회의 파송을 받아온 것이다.메켄지는 한국 개신교의 요람인 황해도 소래에 머물면서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을 겪었고 헌신적으로 교인들을 돌보며 교회 건축에 매진하다가 1895년 6월24일에 죽었다. 이에 한국선교에 관심이 고조되어 그리어슨·맥레·푸트 등 3인이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어 1898년 한국에 들어옴으로 캐나다 장로회의 한국선교가 본격화된 것이다.

 

2) 여러 교파 교회의 정착

 

구세군(1908)

동양선교회(성결교회의 모체,1907)

안식교회(1904)

러시아 정교회(1898)

일본조합교회(1909)

1896년 영국에서 시작된 폴리머드 형제단

 

1910년 이전에 한국에 진출한 교회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는 다양한 교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각기 다른 문화적 역사적 생성배경을 지닌 교회들이 그대로 한반도에 이식되는 형태로 개신교 선교가 추진되었다.

교리적인 배경의 차이로 인한 교파 교회의 도입은 불가피했다 할지라도 같은 교파 안에서도 본국에서의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분열되었던 교회가 분열된 실체 그대로 한국에 유입되기도 했다. 이처럼 교파적 특색을 지닌채 정착됨으로써 상호경쟁심을 유발시켜 교회의 발전을 꾀할 수도 있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교회들간의 불필요한 마찰과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부정적인 효과를 나타내 보이기도 했다.

 

둘째, 초기 기독교 선교의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적극적인 도입과 수용의 자세를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가장큰 교파인 장로교와 감리교는 물론이고 성결교, 구세군, 안식교 등도 한국인의 구도 행위와 선교사 파송 요청에 의해 선교를 시작했다.

 

3) 초기의 선교 활동(1) - 의료와 교육선교

1884년 10월에 미국공사관 소속의사 자격으로 들어온 알렌은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함으로 고종과 명성황후 및 정부 측 인사들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는 갑신정변에 연루되었다가 처형된 홍영식의 집(재동에 소재)을 하사 받아 1885년에 광혜원이란 병원을 세웠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보는 서양의 근대식 병원이었다. 이 병원은 위료기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다른 선교기관을 위해서도 훌륭한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다.


1885년 들어온 언더우드가 교사 자격으로 이곳에 머물면서 우리말을 익히기 시작했고 감리교의 스크랜튼도 1885년 6월까지는 이곳에서 의사로 활약하였다. 1885년 여름에 들어온 헤론이나 1886년 여자 의사로는 처음으로 들어온 앨러즈도 이곳에서 활동의 근거를 얻었다. 광혜원(제중원)은 초기 한국선교사들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처음에 조선 정부의 왕립병원으로 출발한 이 병원은 1894년 에비슨에 의해 운영되다가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의 건축기금으로 남대문 밖에 새 건물을 마련하게 되어 오늘의 세브란스 병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885년 9월10일에 정동에서 감리교의 민간의료기관으로 진료소를 시작하였다. 스크랜튼은 새 건물을 마련하고 1886년 6월15일에 정식병원을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시병원이다. 스크랜튼은 정부가 운영하던 제중원과는 달리 민간병원으로 육성하려고 처음부터 노력하였다. 초기 의료선교는 종래 기독교에 대해 가졌던 정부와 민중의 편견에 가까운 인식을 교정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의료선교가 복음전도에 대한 폐쇄적인 분위기에서 전개되었기에 더욱 그 의미는 크다 하겠다.

 

4) 초기의 선교 활동(2) - 성경번역과 문서선교

학교를 통한 교육선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펜젤러는 이미 1885년 11월에 미국공사 폴크를 통해 고종으로부터 학교 설립 허가를 얻어놓았다. 그리고 1886년 6월8일 2명의 학생으로 정식 학교를 시작했다. 이것이 한국 근대교육의 효시인 배재학당의 시작이다.


장로교의 언더우드는 고아원 형태로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정동에 한옥을 구입해 수리하고 학생 1명으로 정식문을 연 것이 1886년 5월11일이었다. 이것이 소위 언더우드학당이라고 불리는 고아원 학교였다. 1905년 경신학당으로 정착하여 오늘의 경신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개신교 선교는 성경 번역과 발행 및 전파 사업과 함께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성경을 일찍이 우리말로 번역해 냄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파악하고 주체적으로 복음을 수용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국내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의료와 교육사업을 우선적으로 착수한 것 외에 성경번역도 즉각 착수하였다. 초기 성경번역에서 선교사들과 한국인 조사들은 유식계층이 아닌 민중계층을 염도에 두고 번역하려고 애썼다.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한 언어, 무식한 계층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문체로 성경을 번역하려 노력한 점은 높이 평가될 만하다. 그것은 성경을 민중계층에 접촉시키는 공로뿐만 아니라 유교중심의 봉건체제 속에서 소외당했던 한글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한글문화를 창출하는데 공헌한 점에서 그렇다.

 

각종 문서와 서적을 출판해 냄으로 기독교 복음 전파가 한결 쉽게 되었고 기독교와 일반 문화발저에 지대한 공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출판에서 한국인 저작이 극히 드문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성서번역이나 정기간행물 발간 등에 한국인이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 참여의 폭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단행본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대부분의 교리·전도서들이 선교사들이 저술하거나 번역한 것이고 한국인의 신앙고백을 담은 것은 극히 적었다. 이같은 사실은 한국인의 초기에 나타났던 주체적 복음 수용을 뒷받침할 만한 신학수립의 기회가 적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증거하고 하겠다. 주체적 복음 수용과 신학 수립이 병행될 때 건전한 기독교 형성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문서사업이 거의 선교사들에 의해 장악되었고 서양의 신학 사상과 조류들이 번역되어 읽혀짐으로 초기부터 한국 교회는 서구의존적 신학풍토속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초기 문서선교가 이룩한 기독교 문화는 전통 동양문화의 파괴를 전제로 한 서구지향적 문화로 흐를 가능성이 짙었다.


 

2. 선교 연합활동과 선교 정책

 

1) 선교부 연합활동

1889년에 미국 북장로회와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 장로교회 사이에 연합선교 공의회가 결성된 것이 선교부간의 첫 협의체가 되었다. 그러나 이 공의회는 1890년에 데이비스가 갑자기 별세함으로 사실상 해체되었다가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의 도착으로 1893년 1월28일에 재조직되었다. 캐나다 장로회와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도 가입하였다. 1910년에 이르러 “한국에서 하나로 조직된 교회가 취할 완벽한 정치체제를 제시하기보다는 실제적인 면에서 가능한 것부터 조화를 추구해 나감으로 우리 교회 생활을 정착시키고 우리가 취하고 있는 초교파적 협력관계에 있어 야기될 수도 있는 마찰의 요인을 제거하는데 즉각적인 효력을 얻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냈고 이것이 연합공의회에 의해 채택됨으로 장·감통합운동은 사실상 끝나고 말았다. 결국 교리적인 면에서는 통합이 가능했으나 정적인 면에서 벽에 부딪히고 만 셈이다.


2) 선교지역 분할

하나의 나라에 여러 교파 선교회가 진출하여 선교함으로 야기될 수도 있는 갈등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선교회간에 지역 분할이 추진되었으니 이것이 ‘교계예양’으로도 불리는 선교지역 분할 협정인 것이다. 이 협정의 근본 목적은 가장 빈번한 마찰의 요인이 되고 있는 사업의 중첩을 피하고 돈과 시간과 힘의 낭비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선교분할협정은 1892년 미감리회와 북장로회 사이에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이같은 협정은1893년 8월에 열린 미감리회 선교회에서 “선교회로서는 이런 규칙에 얽매일 수 없다”는 결의와 함께 위원회에 환부시킴으로 공식적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이후의 선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선교회들 사이의 선교지역 분할의 기본원칙으로 인식되었다. 장로회 선교회들간의 선교지역 분할 협정은 장료교연합선교공의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후에도 선교지역 분할 협정이 계속되었지만 1909년의 미감리회와 북장로회 사이의 협정으로 한반도에 대한 선교 구역이 확정된 셈이다.


이와 같이 선교회간에 지역을 분할하여 선교를 담당함으로 불필요한 마찰이나 재정 낭비는 줄일 수 있었으나 이 같은 분할 규정이 30년 이상 적용되면서 선교회 배경에 따라 교회의 특성이 형성되는 부정적 현상도 나타났다. 즉 기왕에 교파적 교회로 정착된 한국 기독교가 다시 교회 안에서 선교부 배경에 따라 세분되는 분파적 현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이 같은선교회 배경의 분파적요인은 1930년대에 노골화된 지방색에 의한 교권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고 또 해방 후 전개된 교회 분열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3) 네비어스 선교 정책

북장로회 소속이었던 네비어스는 1854년 중국에 도착하여 30년이 넘게 중국 선교에 종사했던 노련한 선교사였다. 그는 서울에 두 주간 머물면서 선교사들과 모임을 가졌다. 이때 한국에 있던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네비어스의 강연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네비어스가 쓴 논문과 저서를 중심으로 그의 선교정책을 연구하면서 그것을 한국에 적용시키는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네비어스 선교정책은 ‘독립하고 자립하며 진취적인 토착교회’의 설립이 목적이다. 그 방법에 있어서 선교부가 전적으로 비용을 부담하는 것보다는 본토 교인들이 스스로가 부담하여 전도하고 교회를 설립하게 하는 것이 장기적인 안목에서 효과적이다는 것이다.

 

이 네비어스 선교 정책은 그 기본이념이 자치전도, 자력운영, 자주치리의 3대 명제로 정리되어 한국 개신교의 대표적인 선교개념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이 정책은 1890-95년 사이에 북장로회 선교정책으로 정착되자 그 후에 들어온 다른 장로교 선교회들도 대체적으로 이의없이 그 정책을 수용하였다. 따라서 이 정책은 한국 장로교회 선교정책으로 정책하게 되었다.

 

네비어스 선교정책이 “하나님의 말씀을 터로 하여 자급자치의 원리 밑에 희생과 봉사를 내용으로 하는 고도의 기독교윤리를 실천하는데서 오늘의 큰 성과”를 얻은 면도 있고 교인들에게 자립정신과 규칙적 헌금의 습관을 가르쳐 주었으며, 한국기독교의 서양화를 방지하였으며, 한국교회의 발전뿐만 아니라, 그 신앙의 형태라든가 교역자의 지적 수준, 교회의 조직에 대해서 무시 못할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천과정에서 한국교회의 장기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들도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인 교역자 양성에 관한 선교회 정책이다. 즉 한국인 한국인 교역자의 교육 수준을 일반인들의 수준 정도로 규정함으로 교역자의 자질향상을 제도적으로 규제한 결과를 빚었다는 것이다.

 

“자주치리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교회안에 계급조직이 생겨났는데 이 조직은 교만한 임원진에 의해 좌우되었다. 교회 조지과 예배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교회가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별개의 공동채가 되어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경향으로 흘렀다. 자급운영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 교회 재정은 교회 조직을 운영하는 데만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어 사회복지 같은 것을 위해 재정을 쓰는 것은 거의 생각지고 못했다.

교회의 조직과 운영 면에서 네비어스 선교정책은 괄목할 만한 효과를 가져왔으나 사회적인 문제나 교회 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원인의 하나였던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교역자의 자질 문제와 함께 대 사회적인 혹은 민족적인 관심사에 대한 몰이해가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병폐의 하나인 점에서 네비어스 선교정책의 한계와 역기능적인 면을 확인할 수 있다.


 

3. 초기 선교과정에서의 갈등과 수난

 

1) 선교사 사이의 불화

선교사간의 선교관의 차이가 갈등과 불화의 원인이 되었다. 즉 알렌은 당시 한국적 상화에서 바로 전도 행위를 하는 것은 경거망동하는 것으로 보았지만, 철저한 칼빈주의 안수목사였던 언더우드를 비롯한 복음주의 선교사들은 입국 즉시 찬송가를 큰 소리로 부르며 직접 지방 전도에 나서려는 등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시도하려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상이한 선교관의 차이는 알렌이 선교사의 임무를 떠나 외교관으로 전향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한국 선교는 후자 측에 의해서 주도하게 되었다.


알렌과 나머지 선교사들 사이에 있었던 불화의 또 다른 요인은 당시 한국의 양분된 정치적 역학 관계과 관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알렌은 갑신정변에서 부상당한 수구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민영익을 치료해줌으로써 왕실과 수구파로부터 총애를 받고 있는데 반하여 언더우드 등 이후 입국한 선교사들은 입국 전 일본에서 개화파를 주도하고 있던 김옥균, 박영호를 만나 그들로부터 한국의 사정과 간단한 한국말을 배운 인연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도움과 알선에 힘입어 입국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알렌이 민영익을 중심한 친수구파적인 입장이었던 반면 언더우드 등은 친개화적인 성격을 띠었다.

 

또한 이들 선교사들 대부분이 20년대의 젊은이였다는 데고 한 이유가 있다. 거기에다 해외선교 경험이 준무한 점도 또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2) 신구교간의 갈등

초기에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천주교의 도움으로 어학을 배우기도 하며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개신교세의 확대로 견제와 대립의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이같은 사례로는 개신교 인사인 남궁억이 발간하는 황성신문에 천주교를 비방하는 듯한 기사가 나가자 천주교 신자들이 황성신문에 난입하여 횡포를 부린 사건이 있는가 하면, 종현성당 신축현장에서의 개신교도와 천주교도간의 충돌을 아펜젤러가 격렬한 항의 편지를 하여 천주교측의 분격을 산 사건이 있었으며, 천주교도들이 개신교도들에게 건축헌금을 강요하며 구타한 <신환포교환>사건, 개신교도의 소가 죽은후 천주교도의 소가 죽자 이에 배상을 요구하여 일어난 <우질사건> 등이 신구교간의 구체적인 갈등이 드러난 사건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1900년대 한국에서의 신·구교 관계는 갈등과 대립, 충돌과 반목의 부정적인 관계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양측의 관계가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없었던 이유는 한국이라는 동일한 선교의 장을 놓고 선교 경쟁을 벌인 데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이 밖에도 상호간에 대화가 단절되었다는 점과 지나친 선교경쟁, 그리고 외국선교사들에게 의탁하려는 한국인 신자들에 대한 상이한 태도와 대응방법에 대한 차이점 등이 이같은 신·구교 갈등과 충돌의 요인으로 작동했다고 하겠다.

 

3) 교폐 문제

교폐란 종교가 민간인에게 끼친 폐해한 뜻이다. 가톨릭 신부와 프랑스 공사관의 위세를 등에 업고 양민을 위협하여 성당 건축기금을 무리하게 모금하는 과정에서 개신교 교인들과 충돌이 일어났던 것이다. 천주교인들이 이처럼 지방의 공권력을 무시한 독단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서양 선교사라는 힘의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이런 것을 흔히 양대인 의식이라고 부른다. 선교사와 일부 한국인 교인 가운데 이 같은 양대인 의식에 사로잡혀 치외법권적인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착각하여 일반 양민들에게 민폐를 끼친 사건들이 종종 일어났던 것이다.



4. 교회의 형성과 발전

 

1) 초기 신앙공동체 형성

정부측의 수구적인 입장이나 선교사들의 신중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신앙공동체 형성을 위한 한국인들의 노력은 초기에 이미 결실을 맺고 있었다. 그것은 선교사들이 도착하자마자 지방에서 교인들이 세례를 받겠다고 자진해서 찾아오는 것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한국에서 이루어진 첫 개신교 세례는 노춘경이 1886년 7월18일 주일 오후에 언더우드의 집례와 아펜젤러의 보좌로 받은 것이다. 또한 1886말에 서상륜과 언더우드가 만났다. 서상륜은 이미 동생과 함께 황해도 소래에서 전도하여 20여 명의 구도자를 일궈냈다. 이들을 중심으로 ‘주일마다 예배드리는’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결실을 남긴 서상륜은 언더우드를 방문하여 세례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선교사의 지방 여행은 아직 불가능하였기에 서상륜이 소래 교인들을 이끌고 서울에 와서 세례를 받았다.

 

초기 선교사들은 이처럼 자진해서 찾아오는 구도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주고 있었다. 1887년 9월27일에 서울 정동 언더우드 사택에서 14명의 세례 교인으로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로 ‘정동교회’가 창설된 것도 이같은 자발적 세례 교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 초기 교회 박해-수구세력과의 갈등

그러나 초기 한국 기독교의 역사가 이처럼 순탄하게 추진된 것만은 아니다. 교회가 설립되고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와 병원을 통해 종래 기독교에 대해 갖고 있던 그릇된 선입견들이 많이 해소되고 긍정적인 평가를 얻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 보수·수구 세력의 기독교에 대한 견제와 탄압도 가볍지 않았다. 기독교의 유입으로 종교뿐 아니라 사회·경제·문화·정치 분야에까지 근대화가 급속히 추진되었고 이에 위기를 느낀 보수 세력의 반동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 구체적인 실례가 영아소동과 평양기독교인 박해 등의 사건이다.

 

박해를 받으면서 교인들의 신앙이 더욱 견고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박해가 두려워 배교하고 떠난 사람도 있었지만 박해를 견뎌낸 소수의 교인들을 중심으로 보다 견실한 신앙굥동체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일련의 박해 사건들은 기독교가 겪어야할 ‘민중 시험’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시험을 거친 후에야 민중은 기독교를 신임하기 시작했다. 권력을 지닌 소수 지배계층의 종교가 아니라 박해받는 민중들의 종교로 정착하게 되는 계기를 맞은 셈이다. 이같은 과정을 통해 기독교는 서서히 민족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3) 청일전쟁과 교회발전-민중계층의 입교

기독교가 한국에서 본격적인 선교를 개시한 19세기말은 우리민족의 역사에서 근대화의 진통을 겪던 시기로서 봉건 지배체제가 붕괴하고 근대 시민사회가 형성되어 가는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수구세력과 개화세력간의 갈등과 마찰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구제국주의 세력이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협하는 시기이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의 민족의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기독교는 이같은 민족의 수난기에 급격한 성장을 이루게 된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민중은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해 종종 종교의 힘을 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라는 외세간의 투쟁 속에서 불안한 민중들이 목숨과 재산을 지키려는 방도에서 교회를 택하였고 그 결과 교인 수가 급증하였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사실 당시 교회가 이같은 민중의 도피처가 되었다는 예는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생명과 재산의 보호 기능을 한 것만이 교인 증가의 요인이하 할 수는 없다. 전쟁을 통해 교인들이 신앙이 확고해졌다는 사실에서 또 다른 성장요인을 찾아 볼 수 있다. 교회에 모여 있는 교회이든, 지방으로 피신한 교인이든 전쟁이란 극한 상황속에서 절대자에게 의존하는 신앙이 깊어졌으며 그것이 전쟁 후 교회발전의 기틀이 되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전쟁을 통해 교인뿐 아니라 교인 가족들의 신앙이 견고해졌고 그것으로 전도의 가능성이 훨씬 늘어났던 것이다. 이뿐 아니라 교인들의 지방 피난으로 종래 도시 중심으로 전개되던 선교가 지방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이루어졌다.

 

4) 독립협회-지식인층의 입교

러일전쟁 이후 조선은 일제의 강제 점령의 수순이 하나 하나 취해지는 처지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주의자들이 정치적인 목적에서 입교하는 사람이 늘어났으며 옥중에서 집단으로 개종하기도 하였다. 이상재, 유성준, 윤치호, 이승만 등이 그들이다. 기독교가 힘의 종교로 인식됨으로써 민중계층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을 지닌 유식계층도 기독교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즉 기독교를 방편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해보려는 의도에서 교회를 찾았다는 말이다. 다음과 같은 샤프의 지적은 당시 기독교가 갖고 있었던 정치적 성격을 감지하게 해준다.


“기독교로 오는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첫 번째 동기는 보호와 힘에 대한 욕구이다. 시기가 불안정한 연고로 사람들은 서로 도움을 얻기 위해 상호 결속하였다. 수없이 많은 단체들이 생겨났는데 모두가 지향하는 바는 정치적인 것이다.”

 

독립협회가 창설되어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을 때 지방 지회 활동이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898년 봄 서울에서 독립협회가 주관하는 만민공동회가 열렸을 때 평양에서도 이를 지원하는 집회가 열렸다.

 

이로써 민중계층이 주류를 이루었던 한국 기독교에 양반·유식 계층이 참여함으로 신분계층의 다양화를 이루게 되었다. 교회 안에서 두 계층간에 갈등이 노출되기도 하였으나 신앙으로 그 갈등을 극복함으로써 기독교는 총체적 민족 종교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국내외적으로 위기 상황에 처해 있는 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추구하려는 지식인들의 의지는 교육과 계몽을 통해 민중에게 확산되엇고 이로써 의식화된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 민족운동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제 6 장 교세확장과 기독교 민족교회(1907~1918)

 

1. 교회의 부흥운동과 교회조직

 

1) 1907년 대부흥운동의 전개과정

1907년 1월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은 이후 전국적으로 파급된 신앙운동으로 한국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이는 1903년 원산에서 열린 감리교 선교사들의 기도회가 그 도화선이 되었다. 기도하는 가운데 캐나다 출신 하디 선교사가 자신의 무능력함과 교만함을 회개하였고 이는 기도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과 은혜가 되는 한편 하디 자신에게는 놀라운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한 선교사의 고백적인 기도가 발단이 된 이 운동은 그후 평양 일대와 전국 각지의 부흥운동과 회개운동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선교사 중심의 기도회로 원산에서 시작된 성령의 역사는 해를 넘겨 1905년 8월 평양에서 다시 일기 시작했다. 한편 이러한 부흥회의 열기는 같은 해 삼남지방 목포에까지 전해져 그곳에서도 다투어 통회하고 자복하는 기도소리와 부흥의 불길이 솟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부흥운동의 불길이 점화되었던 것이다. 장대현교회의 부흥사경회는 매년 있어 왔던 연례행사였다. 첫 날부터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한 평양사경회는 집회가 계속되면서 더욱 고양되었다. 북장로회 소속의 선교사 블레어가 고백적 설교를 하자 통회의 소리가 장내를 뒤덮었고 이 날의 열기는 서양인과 한국인의 구분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하나된 모습이었다. 화해와 사랑의 공동체를 구현한 부흥의 열기는 주일 집회 다음 날로 이어지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사경부흥회 기간에 있었던 회개의 역사는 개인의 내면적 죄만을 고백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거듭나는 중생의 체험이 그러하듯사회도덕적으로 이웃에게 피해를 입힌 행위에 대한 깊은 뉘우침과 용서를 비는 실천적인 회개운동도 함께 진행되었다.

 

‘성령강림’이라는 신비적인 종교체험으로 현현된 이와 같은 부흥운동의 열기는 여성과 학생들에게 전이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한편 이와 같은 경이적인 부흥운동이 전국에 알려지자 각처에서 이 운동에 참여하고자 평양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동시에 길선주 장로와 같은 부흥사를 초빙하여 사경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상과 같은 부흥회의 열기는 중국에까지 알려져 한국과 인접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국인 목사들이 평양을 찾아왔으며 급기야 중국지방에서 또한 부흥운동이 추진되기도 하였다.

 

 

2) 부흥운동의 성격과 의미

대부흥운동은 초기 한국기독교 수용의 성격이 영혼에 대한 깊은 고뇌와 종교적인 사색에서 비롯된 것일 뿐 아니라 대체로 사회정치적인 불안과 동요에서도 기인되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중요한 의미가 깃든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 운동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 또한 지대하였다. 먼저 긍적적인 면에서 끼친 영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운동을 통해 기독교의 순수한 신앙과 정신이 한국기독교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성령임재에 대한 확신과 죄에 대한 고백, 그리고 장래 있을 심판 및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대해 한국교회가 체험적인 이해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한국인 신자와 선교사간의 이해 증진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선교사들의 우월의식과 한국인의 무조건적인 추종 자세 등이 크게 정화되어 서로 신뢰와 이해가 깊어지게 되었다.

 

셋째, 한국교회와 교인의 도덕성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부흥사경회를 통해 개개인의 내면 깊이 숨겨 있던 죄에 대한 고백은 결국 신앙심을 보다 정결하게 해주는 결과를 낳았다.

 

끝으로 주목할 만한 영향은 역시 성경공부와 기도의 열심이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더욱 고양되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세계 기독교사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든 한국교회의 특징의 하나이다.

 

역기능적인 부정적 평가의 대표적인 점은 한국교회의 비정치화 내지 몰역사성의 문제이다. 이로인해 그후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의 제도권 교회의 성격에서 당분간 벗어날 수 없었으며 적지않은 민족지도자급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을 감내해야만 했다.

 

3) 백만명 구령운동

1909~1910년, 일제에 의해 강토가 병탄당하는 비운의 시기에 전개되었던 백만명 구령운동은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또 하나의 간과할 수 없는 신앙운동이다. 1909년 여름 개성에서의 일이다. 스톡스 목사 등 개성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남감리회 소속 선교사 3인이 모임을 갖고 이 일을 위해 1주일간의 입산기도회를 가졌다. 산상기도회를 마치고 내려온 선교사 3인중 스톡스 목사는 곧 지방전도여행에 나섰다. 그런데 전도여행에 앞서 그는 자신아 시무하고 있던 교회의 교인들에게 앞으로 1년 안에 5만 명의 새신자가 늘어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것이 백만구령운동의 발단이다. 이후 5만 명이라는 목표는 곧 20만 명으로 늘어난다.1909년 9월 남감리회 13차 선교연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스톡스 목사 등 3인은 이 대회에 참석하였는데 이 해의 대회 표어가 “20만 명의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처음 5만에서 20만 명으로 전도대상자 수가 늘어난 이 운동은 서울의 선교연회 폐회직후 개최된 복음주의 선교부 통합공의회에서 마침내 “백만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라는 표어로 바뀌게 되었다. 이 표어가 채택되었을 당시 교인의 총수는 장·감을 합해서 불과 ‘8천 명’에 이른 정도였다.




 

선교사들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당시 한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전도운동을 전개하기에 절호의 기회로 파악했던 것이다. 요컨대 자신들이 선교지로 삼아 활동하고 있는 한 나라의 운명이 남에게 넘어간 그 사실에 함께 분노하고 슬퍼하기보다는 이러한 조건을 전도하기에 절정의 날을 만들어 주었다는 입장이었다. 이와같은 견해가 전체 선교사의 뜻은 아니더라도 당시 선교사들의 일반적인 경향성이었다는 점은 부인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부흥운동과 전도운동의 몰역사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4) 교회의 조직과 정비

1907년 9월17일 7인의 한국인 목사가 장립되기 직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장로회 최초의 노회다 결성되었다. 한국인 장로 36명, 4선교부의 선교사 33명, 그리고 찬성원 9명 등 도합 78명이 모인 장로교공의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노회가 창립을 선포하였다.

 

이날 첫노회에서 결의한 가장 중요한 결정은 장로회신경의 채택이었다. 12개 신조로 된 신경은 전문에 “대한예수교에서 이 아래에 기록한 몇 가지 조목으로 신경을 삼아 목사와 및 강도인과 장로와 집사로 하여금 청종케하는 것이 대한교회로 설립한 본 교회의 가르친바 취지와 표준을 버림이 아니요 오히려 찬성함이니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성경요리문답 대소책자로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인즉 우리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 그 중에 성경요리문답책을 더욱 교회문답으로 삼나이다”라고 하여 엄격한 칼빈주의에 입각한 한편 웨스트민스트 표준서들의 미국식 교회정치 규범을 철저히 따를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 신경은 1904년 인도 장로교회에서 채택된 내용을 그대로 본받아서 제정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지적된다. 따라서 한국장로회신경은 한국인의 신앙고백서의 의미가 전혀 배제된 채 선교사들의 의도대로 제정된 것이다.

 

한국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라는 이름으로 장로회 총회가 결성된 것은 1912년 9월이었다. 1901년 9월20일 새문안교회에서 한국인이 장로회의 최고 치리기관에 직접 참여하는 전기가 마련되었고 회의 명칭 또한 이때부터 ‘장로회 공의회’라는 한글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장로회 공의회에 바로 교회의 치리권과 행정권을 부여해주지는 않았다. 이 권한은 1907년 노회가 결성되기까지 선교사들만의 조직체인 선교공의회가 계속 장악하고 있었다.

 

1912년 9월2일 결성된 총회 역시 앞서의 노회가 안고 있는 취양점이 잘 드러나있다. 더욱이 주권이 이미 일제에 병탄 당한 정치적 상황과 선교사들의 묵시적 친일 성향 아래서 조직된 총회에서 한국교회의 독자성을 회복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7개 노회의 총대는 계획된 총회 결성을 위해 1912년 9월1일부터 4일까지 평양신학교 강당에서 모였다. 7개 노회의 총대 곧 선교사를 포함한 목사 96명, 장로 125명 도합 221명이 모여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창립하였다. 지방별 7개 노회가 연합하여 총회를 조직함으로써 임원 선정도 지역 안배가 고려되었다. 특히 이 날 사용한 사회봉 모양이 7노회를 상징하는 일곱까지 색깔로 무늬로 새워 “일곱 노회가 하나의 연합된 몸을 이루고 사회봉이 완전히 제자되기 전에 증정된 것처럼 교회도 우리 주님의 재림 때까지는 미완성된 상태로 있을 것을 의미한다”고 한 점 등도 이때 결성된 총회가 7개 노회의 연합적 성격이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1912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창립됨으로써 한국 장로교회는 조직 교단으로서의 완전한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그 성격은 아직도 선교사 주도하의 교회 성격을 벗어나기에는 여러 가지로 미흡한 상태였다. 총회의 임원 구성에서 주요 임직이 선교사들에 의해서 점유되고 있는 점은 총회의 성격을 잘 암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총회의 기능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인 재정권이 선교사에 의해 점유되고 있다는 점은 아직도 총회가 한국교회의 독자적 운영을 허용치 않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의 임면직에 관해서도 선교사들은 늘 치외법권적인 특별대우를 받고 있었던 점도 이러한 맥락에서 유의되어야 할 점이다. 또한 선교사들의 일반적인 친일적 경향성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일제의 식민지 무단통치체제 내에서 순응과 타협의 굴절된 교회로 형상화시킨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것이다.

 

 

2. 기독교 민족운동의 전개

 

1)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

선교사들의 신교육을 통해 폭넓은 세계관, 즉 기회균등, 남녀평등, 직업관의 변화, 개인존중 등의 의식을 형성하게 되었다. 1905년 이후 해외를 순방하였던 민족지도자들에 의하여 새로운 의식을 형성하고 순방 이후에는 이동휘가 보창학교, 안창호가 대성학교, 이승훈이 오산, 가명, 신흥학교등을 설립하였다. 이 시기 민족의식 고양에 기여한 것 중 지나칠 수 없는 또 하나의 공헌은 언론의 공헌이다. 독립신문, 죠선크리스도인회보, 그리스도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이 그 주역이었다.

 

2) 기독교민족운동과 신민회의 활동

한국 기독교가 근대 한민족의 질곡의 역사와 함께 했던 시기는 서구 자본주의국가들이 치열한 대외 팽창과 세계분할 경쟁에 나섰던 제국주의 시대에 해당되며, 한편 후발 제국주의로 발돋움하던 일본의 대륙침략이 노골화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열악한 대부분의 아시아의 나라들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었다. 이러한 세계사적인 배경하에서 아시아 지역에 전파된 기독교는 거의 예외 없이 제국주의 침략의 도구 내지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유독 한국만은 비기독교 국가인 일본에 의해거 식민지화의 길을 걸었다. 바로 이 점이 한국의경우 기독교와 민족운동이 결합할 수 있었던 요인의 하나이다. 따라서 한국의 기독교는 일정한 기간 제국주의 세력에 저항하는 동력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사회주의 진영과 일부 아시아·아프리카 각국에서 주장하는 기독교를 제국주의 침략의 주구로 비판하는 그런 성격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다.

 

개항 이후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정치·경제적 침투가 강력해지던 시기, 초기 한국의 기독교는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내재적 모순을 타개하는 사회 정화 내지 새로운 문물과 근대적 가치관을 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한국에 수용된 기독교의 사회적 기능은 초기에 정치외적인 사회·문화적 방면에 변혁의 주체로서 봉건성을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또 하나의 역사적 과제, 곧 반외세의 극복에 있어서도 다소간의 취약점과 한계점이 없지 않았으나 이 부분에 대한 기여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3) 신민회의 조직과 활동 

기독교 인사들이 항일 민족운동에 직접 참여한 시기는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외교권이 강탈당하던 1시기, 정미7조약이 체결되던 1907년까지의 2시기, 그리고 1910년 일제에 강토가 병탄되던 3시기 등 3단계로 추진되었다. 제1시기는 대체로 기도회를 통해 민족의 비운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복음주의적인 초보적 민족운동 단계였다. 이러한 기도회는 개인의 이기적 동기에서 입교한 초기 교인들에게 민족정신과 국가의식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제2기에는 안창호에 의해 신민회가 창립되었다. 신민회는 평남에서 지방유지 중심으로 움직였으며 평북의 경우는 상공업자가 중심이 되어 비밀리 활동하였다. 특히 교육기관이 많이 설립되었는데 “교회 옆에는 학교가 있고, 학교 옆에는 교회가 있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전후로 선교사들은 친일적인 성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4) 선교사의 민족운동

선교사들은 당시 교회학교 드에서 실시하고 있는 군사교육과 시위를 중지하라고 말할 수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학생들은 선교사들을 애국투쟁에 나선 자기네의 친구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선교사들이 교회학교의 학생들의 시위행동을 방임하는 불간섭정책을 쓴다면 일본 당국은 선교사들을 친한배일파로 몰았을 것이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고뇌는 오래가지 않았다. 을사조약과 정미조약의 체결로 일본이 한국통치자로 군림하자 선교사들은 통치자 쪽으로 기울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 전체의 성향이 반민족적 입장을 취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 예로써 헐버트의 경우는 한국 민족운동에 실천적으로 참여한 대표적인 선교사이었다. 


 

3. 국권 상실과 기독교의 수난

 

105인사건은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직후 국내의 애국인사를 한꺼번에 제거할 목적으로 날조한 대규모의 항일민족 탄압사건이다.

한편 이 사건은 한국교회사의 측면에서는 일제의 교회에 대한 최대의 박해사건이기도 하다.

 

105인사건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개항 이후 최대의 사건이다. 따라서 이 사건이 갖는 민족사 및 한국교회사적인 의의는 적지 않다. 1900년대 민족운도의 핵심체였던 신민회의 조직과 활동 그리고 그것이 지향하려 했던 독립전쟁 등을 이 사건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외에도 교회사적인 면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의의를 갖고 있다.

 

첫째, 이 사건을 계기로 1905년 이후 ‘합방’에 이르는 과정에서 한국교회, 특히 선교사와 민족운동 진영 사이에 다소간 야기되었던 불신과 괴리의 현상이 크게 회복되었다는 점이다. 이 사건에 임하는 선교사들의 기본적인 입장은 종교상의 이해관계 이상을 넘지 않으려 했다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이 사건의 허위성과 부당성을 세계에 알릴으로써 일제의 올무로부터 항일민족세력을 보호할 수 있었다는 점은 하나의 공헌이 아닐 수 없다.

 

둘째, 이 사건에 일반 기독교인이 다수 연관되어 갖은 고초를 직접 당함으로써 이들이 이전까지 다소 열악했더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읠 결과적으로 고양시켜 주었다는 점이다. 사실상 1907년을 기점으로 볼 때 일반 기독교 신자와 항일운동진영 사이에는 민족운동사적인 측면에서 인식의 편차가 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민족운동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편차가 이 사건을 통하여 일치화될 수 있어 그후 기독교 민족운동의 운동성을 보다 강화시켜 주었던 것이다.

 

끝으로 이 사건의 기독교사적인 의의를 찾는다면 역시 기독교는 고통과 수난을 통하여 보다 성숙한 신앙을 갖데 된다는 기독교 정신의 특성이 이 사건을 통해서 또한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악랄한 고문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그 배면의 힘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깊은 믿음과 신뢰에서 비롯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사에 정신사적으로 그 맥락을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4. 기독교의 항일운동

 

한말의 충군애국운동, 민족계몽운동으로 싹트기 시작한 기독교의 민족운동은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점차 항일독립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항일민족운동은 기도회나 상소운동과 같은 소극적 방법과 함께 ‘일당백’의 기개를 가진 개인적 적극적 무장투쟁으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국권침탈 이후에 전개된 일제의 무자비한 무단통치로 기독교 민족운동은 그 방략을 고쳐야 했다. 증가된 일본의 경찰력과 군사력 때문에 전과 같은 항일투쟁을 국내에서 전개하기한 용이하지 않았다. 105인사건 이후 대부분의 주도급 민족주의자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만주·노령·일본·미주·상해 등지에서 독립운동 전초기지를 설립하게 된 것도 이같은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이로써 항일 민족운동의 구심점이 국내에서 국외로 확산된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분산된 국외의 독립운동 거점마다 기독교인들이 적극 참여하여 민족독립을 염원하는 신앙을 토대로한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미주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는 곧 공립협회(후의 국민회) 본부로 사용되었고 일본 토오쿄에 있던 한국 기독교 청년회 회관은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유학생들의 집합장소였다. 중국 상해 한인교회는 3·1운동의 모체가 되었던 신한청년당을 비롯하여 민족운동단체의 설립 배경이 되었다. 만주, 특히 간도 지역의 교회와 학교들은 국내에서 망명해 간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무대였다.

 

이같이 국외에서 꾸준하게 민족 독립운동이 전개된 것과 함께 국내에서도 의식있는 선각자들에 의해 독립운동이 준비되고 있었다. 비록 1920년 이전과 같은 활발한 투쟁은 찾아볼 수 없지만 교회와 기독교학교는 민족의식을 계승·발전시키는 한편 독립 의지를 키워주려는 신앙훈련과 교육을 추진하였다. 사실 중앙으로부터 전국 각지, 궁벽한 시골에 이르기까지의 조직과 동원체제를 담당했더 점은 당시 기독교가 갖고 있던 최대의 힘이었다. 한편, 일제의 통제가 아직은 교회 내부 조직에까지는 미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기독교는 다른 일반 사회 조직이나 기구가 붕괴된 이후에도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3·1운동과 같은 민족독립운동을 가능케 하는 내재적 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내재적 동력에 불을 당기고 폭발시킨 외적 동기는 국제 정치환경에 민감하고 비교적 객관적으로 국내정세를 판가름할 수 있었던 해외의 민족운동 세력이 국내의 기독교 민족운동 세력과도 비교적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바로 이같은 외적 동기와 내적 동력이 함께 어울려 분출된 사건이 우리 민족사에 큰 획을 그은 3·1운동이었던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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