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근동과 이스라엘의 사회제도 비교

한상인 교수(서울대학교 박사, 한세대학교)



Ⅰ. 들어가는 말   


   사회제도의 연구는 정치조직과 경제구조와 연관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고대 팔레스타인에서는 철기Ⅱ기에1)2)

   도시화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기원전 10세기의 철기 Ⅱ기에 이르면 다윗과 솔로몬 왕국 하에 모든 건축술은 융합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전지역을 지배함에 따라 가나안 도시 국가들의 정치적 독립은 사라지고, 10세기 중반부터는 급격한 변화가 특히 도시 계획에서 나타난다. 수도급 도시들은 다양한 기능을 가진 중심지가 되고, 다른 도시들은 하나의 주기능, 즉 행정 중심이나 병거 도시, 저장 도시, 제의 중심지 등의 기능 수행도시로 세워진다.3)4)


  또한 민족의식은 중앙화나 국가화의 본질적 요소이다. 그렇지만 그 의식은 고고학적으로 밝히기 어려운 것으로 인식되어왔다. 하지만 유물은 개인과 사회의 행위를 반영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물질문화뿐만 아니라 어떤 특정문화의 지표가 된다. 어떤 지역이 일정하고 구별되는 유물조합(assemblages)을5)6)7)8) 아쉴라르 석조기술과9) 나선형(뿔모양) 기둥머리장식, 4개 방의 가옥, 단구형 동굴무덤10)11)


   본고에서 고대근동과 이스라엘의 사회제도를 다룰 때 공간적으로 고대근동에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히타이트, 페르시아가 포함된다. 시간적으로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적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단계에서 고대근동문화의 영향과 교류를 통해 형성된 문화적 유사성과 그 안에서의 변용에  대해서 고찰할 것이다. 이스라엘 사회제도가 비교적 왕국시대로 국한되어 있는데 비하여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는 1천년이 넘는 기간이 망라되고 있으며, 히타이트나 페르시아는 오히려 그보다 짧은 기간의 정황이 해당된다. 그것은 이들 국가들의 사회제도에 관한 자료의 제한성도 있고, 그 자료들이 어떤 특정 시대의 사회현상만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는 한계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자료의 한계상 그 시대적 선후나 상호영향을 고찰하지 않을 것이며, 자료의 누적을 기다리며 보다 포괄적인 사회현상에 중점을 둘 것이다.



Ⅱ. 고대사회의 고고학 연구동향


   고고학적으로 보면 철기Ⅱ기의 이스라엘 왕국시대 동안 국가에 의해 주도되는 거대하고 정형적인 건축시설이 나타나고, 다양한 유물들의 출현을 통해 국가적 번영과 쇠퇴, 그리고 외국과의 교역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기능적 관점에서 고고학 유물에는 경제유물, 가정유물, 정치유물, 종교유물의 네 종류가 포함된다. 경제유물은 재화와 용역의 생산, 분배, 소비와 관계되는 유물이며, 가정유물은 가장의 권위 상징물이나 여성용 장신구 등의 성과 연령에 관한 유물들이고, 정치유물은 공공건물이나 왕에 관계된 유물들이며, 종교유물은 제의와 연관된 다양한 유물들을 말한다.12)


   전통적인 고고학에서는 고고학 자료를 발굴하고 분석하고 민족지 유추 등을 통해 문화를 복원하였다. 예를 들면 출토 유물과 유구의 형태로 추출된 특정한 주거 형태를 지도에 표시하여 분포도를 만든 후 그 분포 영역을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특정 민족집단의 영토로 간주하고, 그 시기에 따른 분포 영역의 변화를 그들 민족집단의 확산 및 이동의 양상으로 해석하였다. 이렇게 해서 고고학적 문화와 문화영역이 만들어지고, 특정 민족의 이주와 문화전파 경로가 설명된 것이다.13)14)15)


   그러나 1970년대 중반부터 현존하는 물질문화와 연관되어 관찰할 수 있는 민족지적 연구를 통하여 과거 물질문화인 고고학 자료에 대해 명확한 행위를 추론할 수 있다는 인간행위에 관한 제일성의 가정(Uniformitarian assumption)은 비판받기 시작하였다. 비판자들은 과거 물질문화는 과거 인간행위의 일부만 반영할 뿐 전체를 반영하지 않으며 특히 과거 인간의 경험 중 사회현상 및 이념에 대한 측면은 거의 투영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후기 과정고고학자들은 종래의 고고학 해석의 일반화 추구 가능성을 포기하고, 특수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모든 물질문화의 의미가 해석되어야 한다는 특수론적 입장, 특히 역사적 특수성을 강조한다.16)


   그에 대해 1990년대 콜린 렌프루(A. Colin Renfrew)를 비롯한 일련의 인지과정 고고학자들은 과거 고고학유물을 통해 얻을 수 있던 경제체계와 사회조직에 대해 보다 우월한 지식을 전달해주는 신고고학의 업적을 뛰어넘어 과거 사람들의 이념에 대한 확실하고 체계적인 추론을 내릴 수 있다고 여긴다. 그것은 이론대로라면 고고학 추론의 단계의 제일 상위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과거 인간의 이념과 상징, 종교에 대해 고고학 물질문화를 통해 확실한 지식을 구축할 수 있다는 야망의 표현이다.17)18)19)20)


   한편 197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구약성서 해석학에는 사회학적 연구방법이 등장하여 성서의 배경이 되는 삶의 정황(Sitz im Leben)을 보다 확실히 규명하고자 하였다.21)


   그러나 고고학 연구방법론의 변화로 직접적으로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러한 사례로써 20세기 중반이 되기까지는 이스라엘에서 발견되는 문헌기록이 극히 드물어서 그 사회의 문자보급율이 매우 낮았던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 말에 이르러 상황이 많이 변해서 수백점의 오스트라카와 수많은 토기나 돌그릇, 상아제품, 저울추, 인장 등에 새겨진 명문, 무덤에 새겨진 명문(銘文) 등 많은 자료가 나타났다.22)23)24)


  

. 왕실 제도


1. 왕정과 왕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기원전 3천년기 초에 도시를 방어하는 성벽을 건설하면서 새로운 통치 계급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이 이른바 왕(수메르어의 Lugal, 아카디아어의 šarrum)이었다.25)26)27)


   이집트에서 왕은 정책 수립자로서 그의 관료들과 함께 정부의 여러 기능을 수행해야 했다.28) 왕의 권위와 왕정은 종교적 신념에 의해 정당화되었으며,29)30)

   히타이트 사회의 최상류층은 왕과 그의 확대된 가족들이 차지하고 있다.31)32) (2) 라바나(Labarna)33) (3) 위대한 왕34) (4) 하티땅의 왕35) (5) 영웅36) (6) 신의 사랑받는 자37)


   이스라엘의 경우 사사시대의 배경 속에서 귀족적인 도시국가들은 서로 다른 정치조직을 가진 백성들의 무리들을 통합시킨 영토국가로 발전해갔다.38)39)40)41)

   이스라엘에서도 왕은 성전 건축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대근동에서 신전건설은 신의 나라와 그 백성을 다스리는 왕의 임무에 속했다.42)

   페르시아 왕의 정의와 심판에 대한 기록은 다리우스의 비문에서 찾아진다.43)44)45)46)


2. 여왕과 왕비와 태후


   여왕(malkāh)은 이스라엘이나 유다에서 왕의 배우자로 사용되지 않았다(예외로 아가 6:8-9). 여왕은 예컨대 스바의 여왕처럼 통치권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사용된다. 왕의 배우자에 대한 일반적 용어는 왕의 아내('iššâ)이며,47)


    히타이트의 왕비는 신들을 경배하는 부조에서 남편인 왕과 함께 묘사된다. 왕비는 고대세계에서 여성으로서의 제한이 있었지만, 어떤 왕비들은 상당히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신왕국 시기의 왕비들은 여왕에 상응되는 위대한 왕비라고 새겨진 인장들을 공식적인 일에 왕과 독립적으로 사용했다. 과부가 된 왕비도 죽을 때까지 권한을 행사했으며, 새로 등극한 왕과의 갈등을 겪다가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 왕비의 권력은 주로 특정 사원의 기금과 자원, 헌물 등의 통제에 관계된 것 같다.48)49)  


   왕의 어머니 태후는 왕좌의 배후에서 권력을 쥔 여인이었다. 히타이트의 무르쉴리 2세의 태후인 타와난나(Tawananna)는 태양여신인 아리나(Arinna)의 대사제였다. 시돈에서도 태후가 여신 아스타르테의 사제였다. 앗시리아의 태후는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성서에서 태후(gēbîrāh)는 “힘있는 여인”을 번역한 말로 유다왕국에서 왕위를 계승한 왕의 어머니와 연관하여 나타난다. 태후는 강력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이며, 권력의 상징인 왕관을 썼다(렘 13:18). 솔로몬은 어머니 밧세바가 나아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절하였으며(왕상 2:19), 아달랴는 그 아들 아하시야에게 악을 행하게 조언하였으며(대하 22:3), 유다의 왕자들이 태후의 아들들에게 문안하러 갔다(왕하 10:13). 이처럼 태후는 공식적인 권력의 자리였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자 유다의 아사왕은 태후 마아가를 폐위시켰다. 마아가는 아마도 아세라를 섬기는 제의적 임무를 박탈당하고 단순히 왕의 어머니(할머니)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50)


3. 왕의 신하


   메소포타미아에서 국가는 왕실경비와 행정조직을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재정이 필요하였다. 국가 소유의 토지는 정부의 관리들에게 생계를 위해 주어졌으며, 밭들도 직업군인들에게 분배되었다. 세금은 왕실 소유의 토지세인 일쿠(ilku)와 일반토지세와 농산물 수확세인 빌툼(biltum), 쉽슘(šibšum), 믹숨(miksum)등이 있었다.51)52)

   메소포타미아와 유사하게 이스라엘에서 국가는 자체의 이익을 보호해야만 했으며, 백성들의 생산물로부터 이득을 얻기 위해 백성들을 제어해야만 했다. 왕궁과 왕실 소유지들, 행정적인 성전들은 요새 도시들과 행정적인 요원들과 마찬가지로 유지되고 운영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합적인 정부 기구들이 발전되었고, 조세 제도의 일부로서 세금 징수와 강제노동이 나타나게 되었다. 왕은 군대의 장관, 제사장, 그리고 레위인을 포함하는 관리들을 임명하였으며, 그러한 관료정치는 나라를 보호하고 제어하기 위하여 나라 전체로 확장되었다. 이스라엘에서 왕의 신민들, 소위 그의 “종들”은 높은 관료직에 있는 그의 아들들과 사위들을 비롯하여  왕궁 관리, 군사적 요원, 국가적 성소의 제사장, 주지사, 노동 감독관, 세금 징수관, 그리고 경찰관들을 포함하는 계급조직을 구성하였다. 또한 마지막의 몇몇 직책들은 레위인들에게 돌려졌다. 그들은 지방행정 중심지와 국고성에서 경찰관, 세금 징수관, 성전 관리, 그리고 공무원들이 될 수 있었다.53)


   이스라엘 왕국 초기의 사울은 대규모의 건축 계획들을 수행하기에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그의 정부에는 군대의 최고 장관이던 아브넬, 제사장 아히야, 그리고 사울의 목자장 도엑과 같은 관리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그의 통치에 있어 최상부의 사람들에 속했다.54)55)56) 고고학적 유물 가운데 무덤 비문과 불라(bulla),57)


   이스라엘 왕국에서는 새로운 통치조직을 창안하지 않았다. 법정과  군대, 그리고 제사장적인 직무들은 오래 전부터 가나안에서 잘 알려져 있었으며, 주변의 강대국인 이집트 파라오의 통치조직과 아마도 히타이트의 궁정조직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58)59)


명   칭

의   미

역할과 임무

비   고

소페르(Sôpēr)

서기관, 

행정관

 왕적인 서기관은 국정일반, 법률과 재정적인 문서를 취급 담당하는 내무적인 대신(왕하22:3)이며, 군대의 서기관은 모병을 담당(렘52: 25).

 아마르나 편지들과 기원전 11세기 웬아문(Wenamun)의 여행기에 나타남

마스길(Mazkîr)

사관

(전달자)

 왕궁의 결정들을 선포하거나 인증하고, 법률적인 의정서를 다루었으며, 국가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왕에게 정보를 제공함(삼하8: 16)

 모압, 암몬, 에돔, 그리고 블레셋의 5대 도시들에서도 존재

요에스(Yôʿēṣ)

모사

 일반적인 지식뿐 아니라, 신탁들과 예언을 통해서 군사적이고 공적인 문제들에 대해 왕에게 조언함

 삼하 15:12 ; 대상27:32 :

 사9;6

사르(Śar)

방백,

군대장관

 많은 경우 방백으로 번역되고(삼상18:30; 왕하10; 1; 대하12:5), 군대장관과 같은 고위군사지도자를 의미함, 요압은 사르 하싸바 (śar haṣṣābāʾ ), 즉 군대의 최고 사령관이었음(삼하 8: 16). 그밖에 천부장과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뜻함(출애굽기 18:21, 25; 신명기 1:15)

 신앗시리아 문서, 히타이트의 문서, 모압왕 메사의 비문 등에 나타남

사르 하이르

(Śar hāʿîr)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

 도시 관리자로 밤의 파수꾼들의 임명을 포함하는 명령들에 대한 임무를 가지고 있어서 군사적인 지휘관이나 마찬가지임(아가서 5:7). 예루살렘 성전 수비대(렘 35:4)

 고위의 도시 관리자에게 왕이 땅과 재산을 수여하여 소위 봉건적 영주들이 될 수 있었다(참조, 대하 21:2-4)


명   칭

의   미

역할과 임무

비   고

레아(Rēaʿ) 

(왕의) 친구

  왕의 친구로서, 특별한 조언자를 언급하는 듯하다. 그는 아마도 그의 공로로 인하여 그러한 신분으로 “격상된” 관리였을 것이며, 동시에 토지를 수여받기도 하였다.

삼상30:26 ; 삼하13:3

나아르(Naʿar)

소년

  기사나 지주로서 왕과 귀족, 고위관리를 보좌하는 직책이며, 군의 장교를 지칭(왕상20:19).

창14:24 : 삼상14:1;

삼하16:2



4. 지방관리


   히타이트에서도 왕실의 확대가족들은 부유한 토지 귀족들의 핵심을 형성하였다. 물론 그 가운데는 왕실과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들과 왕자라고 불리지 않는 고관들도 포함되었으며, 전쟁시에 전차를 모는 기사 계급도 이에 속하였다. 히타이트의 거부들은 토지와 가축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런 토지의 일부는 왕의 하사품이었던 사실이 기록에 보존되어 있다. 부자들은 때때로 종교 축제를 주도하거나, 마을 신전을 건축하고 가구를 비치하고 그곳에 직원을 두는 등의 일을 하였다.60)


   이스라엘에서 솔로몬의 통치지역은 왕국의 지리적인 단위들에 의하여 형성되었으며, 지방관리들의 임무들은 단지 부역을 관리하고 조직하는 것 뿐 만아니라 세금들이 예정된 시간까지 수도로 운반되는지 감찰하는 것이었다(왕상4장). 그 관리들은 왕의 궁전과 왕실 사람들에게 세입과 식량을 공급했으며, 또한 국가의 말들과 다른 동물들을 위하여 짚과 보리를 제공해야만 했다. 솔로몬 왕국의 분열 이후에 북이스라엘의 지역들은 계속해서 존재했을 것이며, 남유다 지역은 개혁되었을 것이다. 후대의 여호사밧왕 때에는 분명히 제의적인 개혁과 함께 재판제도를 개혁한다(대하 17:7-9). 이로써 유다에서 지역적인 분할이 존재했었으며, 그것이 왕에 의해서 개혁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참조; 대하 21:2-3). 몇 번 나오는 감독관인 사레 니싸빔(śārê niṣṣābîm)은 주지사 아래에서 강제적인 노동(mas)을 감독하는 사람들이었다(왕상 5:16).61)


   또한 지역의 중심지들과 국고성, 무역 통로의 요충지. 요새도시, 전략도시, 그밖에 지방의 저장설비들과 포도원들과 포도주 저장소, 기타  농업적 활동지역62)

   이스라엘에서 왕은 일반적으로 왕정의 관리들에게 수여한 땅과 그 소산물을 소유하는 영주와 같은 계층을 형성하였다. 그것은 신이 그 땅을 소유하다는 사상과 충돌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왕은 야웨의 대리자로서 그 땅을 지배하였기 때문이다.63)



Ⅳ. 가족 제도


1. 가정과 가장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으로서 아버지는 아내와 그 자녀에 대해 대단한 권위를 가졌다. 만약 빚에 몰리면 그의 가족으로 빚을 갚을 수 있었으며 그들을 구속해 줄 의무는 없었다. 가장이 죽으면 그 권한은 장남에게로 승계되지만 그가 너무 어릴 때는 어머니가 권리를 갖았다. 후대로 가면 모든 형제들이 재산을 똑같이 상속받지만 장남은 일부를 좀 더 받았는데, 앗시리아와 누지에서 장남은 2배의 상속을 받았다. 수메르와 누지에서는 아들이 없을 경우 딸들이 상속을 받을 수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이외의 지역에서는 부친의 사망 전에 유언(šimtu)을 작성하였으며, 누지나 알랄라크, 우가리트, 에마르(Emar) 등에서는 유언이 발견되었다. 그밖에도 앗시리아에서는 수혼제를 통하여 가장의 권위를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다.64)65)  


   고대 이집트에서 기본적인 사회적 단위는 씨족 같은 확대된 친족인 아니라 오히려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이었다.66)67)68)

   히타이트의 가족관계에 대하여 하투샤의 고문서보관소에 있는 어떤 가정의 목록에 보면69)


    페르시아 가정에서 부모에 대한 존경과 복종은 필수적인 것이었으며, 원칙적으로 아버지는 그의 자녀와 그 집의 구성원들에 대하여 전적인 힘을 가졌다. 페르시아 가족들간의 결속력은 대단해서 고위 관직은 대를 이어가며 지속되었다. 반면에 왕에 대한 반역은 전 가족이 형벌을 받았다. 하만이 에스더 왕비를 범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았을 때 그 자신과 전 가족이 처형당했다(에 7:10; 9:14). 그러나 가족에 대한 이러한 결속과는 달리 5-25세의 페르시아 귀족자녀들은 가정의 범위에서 벗어나 오랫동안 육체적 도덕적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승마와 활쏘기, 창던지기, 진실을 말하기 등의 훈련을 받았고, 무장을 하지 않은 채 광야에서 지내는 통과의식을 행한 후 최종적으로 왕 앞에서 실습을 하고 가장 잘한 사람이 상을 받았다.70)


   이스라엘의 국가조직을 구성하는 기본단위는 아버지의 집(bȇt'ab)이며71), 그 다음이 씨족(mišpāḥâ)72)73)74)    


2. 결혼과 이혼


   메소포타미아에서 대부분의 결혼은 일부일처제이지만, 남자상속의 중요성 때문에 다른 아내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첫째 부인의 우월한 위치는 지속되며 때때로 두 번째 부인을 선택할 권한을 갖는다. 간혹 아이가 없는 부인은 자신의 여동생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게 해주기도 했는데, 그러한 결혼이 아이를 갖는 것이 금지된 여사제(naditū)에게서 시행되었다. 앗시리아에서는 남편이 두 번째 부인을 선택할 자유가 있었지만 그 부인은 첩으로서 두 번째 지위를 가지며, 만일 자녀가 태어나도 첫 번째 부인에게 아들이 있으면 상속자가 될 수 없었다.75)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미 기원전 3천년기부터 여자들이 각종 형태의 재산의 구매자로 나타나고 있다. 비록 여자들이 상속자가 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결혼할 때 가족으로부터 상당한 선물이나 지참금을 받았다. 그 지참금은 보통 동산으로 가구나 그릇, 옷, 노예(부유한 경우) 등으로 구성되며, 때로는 집이나 밭을 받기도 했다. 여자의 재산(šeriktum이나 nudunnûm)은 흔히 결혼할 때 받게 되며 남편이 관리하고 증식할 수 있지만, 이혼할 경우에는 돌려주어야 한다.76)


   메소포타미아에서 결혼 때 신부에게는 며칠 내지 몇 주씩 하는 결혼식 음식뿐 아니라 여러 가지 선물이 주어졌다. 신랑측에서도 선물을 주었는데 그것은 신부 아버지의 지참금과 함께 신부의 소유가 되었다. 이혼은 남편측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임의로 할 수 있었으나 아내의 모든 재산을 상실할 뿐 아니라 그 이외의 돈을 지불해야 하기도 했다.77)78)


    이집트의 결혼예식에 관한 고대자료는 알려져 있지 않다. 결혼식은 제사장이나 관리가 연관되어 있지 않는 세속적이고 개인적 제도이지만 경제적이고 법적인 측면에서는 중요하였다. 남편과 아내는 모두 결혼지참금을 가져왔으며, 후기시대 이후부터는 남편이 아내를 부양할 의무와 이혼시의 재산분배 등에 관한 계약문서가 나타난다. 결혼대상에 있어서 오직 왕만이 때때로 그의 동복자매나 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으며, 이복자매와 결혼하는 것은 평민들도 가능하였다. 일부다처제는 대부분 왕에게 시행되었으며, 평민에게는 극히 드물었지만 첩을 얻을 수 있었다.79)


  고대 이집트 사회는 남성중심이었지만, 여자들도 상당한 법적 권리를 가졌다. 그들은 땅과 집 같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그것을 물려줄 수도 있었으며, 노예를 거느릴 수 있었다. 재산문제에 대해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었고, 중왕국과 신왕국시대에는 여성문학도 나타나고 있다. 아울러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일부 여자들은 신전에서 봉사하였는데, 하돌(Hathor)의 여사제로서뿐 아니라 신전의 가수와 무희로 활약하였다. 특히 신왕국시대부터 26왕조까지 왕실의 부인이나 딸들은 테베의 아문신의 아내역할을 수행했으며, 그 이후 시대에는 제사장의 수반역할을 하기도 했다.80)


   히타이트 가정에서 특별히 후사를 위해 아내가 여자 노예를 주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첩을 얻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아내의 여자 친척과의 성관계도 금지되었다. 히타이트에서 이혼은 한편의 요구가 있으면 적절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도록 구체화되어 있다.81)82)83)


   페르시아에서 결혼식에 대한 상세한 자료는 없지만 공식적인 의식이 있던 것은 분명하며 일종의 합동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여러명의 신랑들이 자리에 앉아 서로의 건강을 위해 건배하면 신부들이 들어와 미래의 남편 옆에 앉았고, 신랑은 신부의 손을 잡고 키스하였다. 페르시아 여자들에게는 상속권이 없었기 때문에 결혼할 때 아버지의 재산을 받았다.84)


   페르시아의 일부다처제는 왕실에서 잘 증명된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다리우스는 고레스의 두 딸을 비롯한 네 명의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그는 이미 전에 두 명의 아내와 결혼하였다. 이처럼 자매를 함께 맞이하는 결혼이나 삼촌과 조카딸 사이의 결혼도 가능하였다. 이처럼 동족결혼의 관습은 왕실에서 특히 잘 확인된다. 다리우스 2세는 이복누이와 결혼했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아들과 딸의 결혼으로 출생한 다리우스 3세는 그의 누이와 결혼하였다. 심지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그의 두 딸과 결혼하였다. 동족결혼이 페르시아의 전통적 관습인지, 이집트에서 유래된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지만, 왕실에서는 왕위계승권의 범위를 좁히는 실제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일반가정에서는 상속권이 직계가족에게 남게 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85)86)


   이스라엘에 있어서 결혼은 가정 사이의 중요한 거래의 하나로써 보통 가장들에 의해 성사되었다.87)


3. 양자


   메소포타미아에서 양자에 관한 언급이 비교적 많이 있다. 누지 문서에 의하면 자녀가 없는 부부가 어떤 사람을 양자로 삼는 것은 하나의 관습이었다.  양자가 되면 그는 양부모가 사는 동안 그들을 부양하고 죽은 후 명예로운 장례를 치러주는 한편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것이다.88)89)


  히타이트에서 양자제도는 분명히 있었지만 그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없으며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왕실의 경우를 보면 하투쉴리 1세(Khattushili Ⅰ)는 그의 손자 무르쉴리를 양자로 삼은 후 후계자로 정했으며, 하투쉴리 3세는 그의 형인 무와탈리 2세(Muwattalli Ⅱ)의 아들을 양자로 삼은 후 왕위에 올랐다.90)


   이스라엘에서 양자상속에 관한 예는 왕국시대보다 족장시대에 몇 번 언급된다. 무자한 아브라함은 다메섹 출신의 엘리에셀로 상속자를 삼으려고 하였다(창15:2).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간 후의 생활을 보면, 라반은 본래 아들이 없고 딸만 있었어서 야곱을 양자겸 사위로 삼았을 것이다. 야곱에게 자식소유(창31:43)와 축첩금지(창31:50)에 대한 라반의 말은 그에게 양부로서의 권한이 있음을 보여준다.91)



Ⅴ. 사회계층


1. 일반 사회계층


   일반적으로 고대 근동사회는 시민으로 묘사되는 원주민과 외국인으로 구별했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모든 시대에 걸쳐 대부분 자유민이었다. 그들의 가정이나 사회, 국가에 대한 의무가 관습과 전통에 의해 주어졌지만, 그 안에서 개인적 자유의 여지가 남아있었다. 자유민 중에서 집과 토지, 정원, 가축, 심지어 노예까지 소유하고 있는 유산계급과92)93)


   이집트인들은 전통적으로 세 계층으로 구분된다. 귀족계급인 파트(pʿt)는 국가 행정과 제사장직, 고급군인을 형성하며, 평민인 레키트(rḫyt)가 두 번째 계층을, 그리고 정확한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헨메메트(ḥnmmt)가 세 번째 계층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파트 이외의 단어는 곧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중왕국시대 관리가 아닌 평범한 사람을 네디에스(nḏs)라고 부르고, 신왕국시대에는 네메히(nmḥy)로 불렀다. 그러나 이외에도 다양한 계층용어가 있다. 켄티우-쉐(ḫntyw-š)는 왕릉의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이며, 메레트(mrt)는 왕실 소유가 아닌 토지에서 일하는 소작인을 가리켰다. 네디에트(nḏt)는 고왕국시대에는 왕실과 신전의 토지와 연관된 사람이며, 신왕국 시대에는 속국에 거주하는 사람, 또는 이누(jnw)라는 세금과 연관된 사람을 의미했다. 요약컨대 이러한 용어들은 신분의 자유로운 상태여부와 그들이 거주하는 토지의 성격, 연관된 세금에 근거하고 있다.94)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고대 이집트 사회계층을 엘리트층과 비엘리트층으로 나누는 것이 유용하다. 그 구분은 대체로 귀족(pʿt)과 평민(rḫyt)과 상응할 것이다. 엘리트 계층은 전인구의 5%를 넘지 않았을 것이다.95)96)97)98)


   이집트에서 중간계층의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보다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노예들도 재산을 모으고 자유민들과 결혼하며 자유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집트는 처음부터, 특히 신왕국시대부터는 다인종 사회를 형성했다. 많은 외국인들이 군대나 전쟁노예 등으로 이집트 사회로 들어왔으며 그 문화에 동화되었다. 이집트 사람과 외국인 모두에게 군대는 상위계층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는데, 신왕국시대 이후로는 군장교가 제사장직과 행정직에 임명되었다. 후기시대에는 농부 출신의 시민군대가 상당한 수에 달했으며, 22왕조와 23왕조의 왕들은 리비아 출신의 군장교의 후손들이었다.99)


   페르시아는 유목민과 농경민으로 크게 구분되고 그 안에서 세분되는 다양한 부족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른 복잡한 사회적 경제적 차이를 나타낸다. 다리우스(Darius)는 그의 비문에서 자신을 권세있는 자(tunavant)와 가난한 자(skauthis)의 중재자라고 언급함으로써 두 부류의 사회계층이 있음을 암시한다.100)101)


   이스라엘 사회계층을 암시하는 말은 비록 지나가는 언급이기는 하지만 성서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런 말들은 단순한 낱말들이기 때문에 소위 후대의 편집자들의 손에 의해 걸러지지 않고 당시 일상생활의 단면을 잘 반영해준다.102) 히브리어 성서에서 사회계층을 암시해주는 용어로는 왕실 관련 용어들과103) 궁중관련용어,104) 군사관련용어,105) 귀족관련용어,106) 전문직업가,107) 종교지도자,108) 상업종사자,109) 각종 기술자,110) 일반노동자,111) 농업종사자,112) 최하층 사람들113)114)


   한편 이스라엘 사회에는 완전한 시민으로 간주되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주민(gērîm)은 기아나 전쟁으로 다른 나라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며, 이스라엘 사람으로 동화되는 과정에 있었다.115)116)



2. 노예


   노예들은 메소포타미아 사회에서는 그레코로만 시대보다 숫자나 경제적 중요성에서 훨씬 덜했다. 남녀노예들은 본래 외국인들로 아마도 전쟁의 노획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삭발, 문신, 낙인 등으로 자유민과 구별되었다. 노예들은 대부분 귀족가문의 가사일에 사용되었지만 기술을 가진 노예들은 주인들을 위해 장인으로 일하거나 고용되어 이익을 주었다. 노예들이 해방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는데, 여자 노예가 낳은 자녀를 입양하여 자유를 주기도 했다. 어떤 노예들은 사원에 바쳐져서 헌납자를 위해 봉사도 하고 사원토지의 노동력으로 일하였다. 외국인이 아닌 수많은 노예들은 빚으로 인해 팔린 자국민들이었다. 신바벨론 제국시대에 채무자들은 감화원으로 보내져서 빚 대신에 노동을 해야 했다.117)118)119)120)


   대부분의 이집트 사람들은 자유롭든지 아니든지 간에 경작자였다. 노예는 고왕국시대에는 없었고, 중왕국시대에는 드물었으며, 신왕국 시대에는 제국주의로 인해 많은 전쟁포로들이 노예가 되었다. 이 노예들은 왕의 처분대로 왕의 소유지를 경작하거나 신전에 바쳐지거나 전공을 세운 군인들에게 상급으로 주어졌다.121)

   히타이트에서 노예는 주인의 소유로 사고 팔 수 있었다122)123)


   이스라엘에는 자유 시민과 노예들, 그리고 거주 외국인을 포함하는 중간계층을 가졌다. 시민들은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일반 이스라엘 사람으로 구분되었다. 그러한 구분과 서열은 역사적 상황과 사상적 배경에 의해 좌우되었다.124)


   노예계층의 형성은 사회변화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노예해방과 토지환원 등을 촉구하는 희년제도의 변화와 연관된다. 마리 문서에 의하면 시리아에서 왕은 강제적으로 모든 거래를 환원하는 제도를 시행하였다.125)126)127)


   이스라엘의 왕국시대인 철기Ⅱ기에 이르면, 특히 기원전 10세기 솔로몬 시대에 이집트와 두로를 비롯한 다양한 국가와의 무역을 실시함으로써 외국의 문물이 밀물처럼 들어오게 되었다.128)



Ⅵ. 나가는 말


    고대근동 세계 속에 위치한 이스라엘의 사회제도는 다른 나라들과 많은 유사성 가운데 독특성을 보여준다. 그러한 독특성은 민족의식의 자각에서 비롯되며, 특히 성서에 나타난 자료의 경우 종교적 차이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 관점에서 본 문화적 독특성도 의미가 있을뿐 아니라, 반대로 문화적 유사성이 종교적 독특성을 부정하는 방편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찰로 여기에서 어떤 총체적인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인데, 그것은 앞으로 자료가 증가할수록 구체적으로 지어져갈 틀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성서의 내용과 병행되는 고대근동의 사회제도를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 짖고자 한다.


     고대근동의 종교생활은 국가와 사회의 안정을 추구하는데 주목적이 있었다. 신전은 도시나 국가, 생활의 구심점이 되었는데 그것은 보이지 않는 신의 영향 아래 사람들을 통합시키고 통치하려는 방책이었다. 그러한 종교정책은 크게는 수도급 도시에서 수행되는 국가제의와 작게는 지방도시의 제의에서 수행되었으며, 보다 직접적인 신의 혜택이나 조상의 은덕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가정에서 종교의식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국가적 종교정책의 정치적 목적이 이스라엘에서도 다른 고대 근동국가들과 유사하게 시행되었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종교적 특성은 결코 다신교가 아니었으며, 조상제의를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에 고고학적으로는 철기시대 이스라엘에서 다양한 우상들과 다신교적 제의형태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어 성서적 증거와 차이가 있다. 이집트에서 제사장을 가족 가운데 일원으로 세우는 것은 이스라엘 사사시대 미가의 경우와 유사하며(삿 17:5), 평민을 제사장으로 만드는 것도 여로보암시대와 병행된다(왕상 12:31).


   고대 근동세계에서 왕은 백성들에 대한 통치권위를 신적기원에 두고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왕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세워지며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양자라는 개념과 다윗언약에 의한 합법성 등이 독특하고 발전된 왕의 제도가 되었다. 국가화의 특징이 혈연관계보다 공식적인 관계가 중시되는 것이지만, 히타이트의 왕실 가족처럼 이스라엘에서도 사울 친척이나 솔로몬의 사위들이 12행정구역으로 나누고 그의 사위들을 지방장관으로 임명하였다(왕상 4:7-9).     이스라엘에서 왕비의 역할이 부각된 시대는 아합의 통치시기였다. 왕비 이세벨은 왕궁터를 넓히는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아합의 어인을 찍은 편지를 나봇이 사는 성읍의 장로와 귀인들에게 보내 나봇을 참살하고 포도원을 빼앗았다(왕상 21:1-16). 이세벨이 어인을 사용한 것은 왕비의 공식적 권한 행사의 가능성도 보여주는데, 우가리트에서 왕비는 농경제의에서 희생제사를 드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보다 확실하게 태후는 왕의 어머니로서 공식적인 권력의 자리였으며 왕에게 나가는 통로역할을 하였다. 히타이트나 시돈의 경우 태후는 여신의 대사제로서 종교적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아사왕이 폐위시킨 태후 마아가도 아세라에 대한 제의를 관할하는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가장이 집을 다스리고 절대적 권위를 가지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일반적인 것이며 가장의 책임에 대해 온 가족이 책임을 지는 것도 유사하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빚을 가족으로 대신 갚는 것과 엘리사의 생도의 자녀가 노예로 팔릴 위험에 처한 것과 병행되며(왕하4:1),  아간의 범죄로 인해 가족이 아골 골짜기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 이집트에서 도망간 범죄자를 잡기 위해 가족을 구금하는 행위와 같은 연좌제법으로 보인다. 페르시아에서 가족의 유대관계는 견고한 것이어서 관직이 상속되는 혜택도 있었지만 반역죄의 경우 온 가족이 처형되었다. 하만이 에스더 왕비를 범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은 후 전 가족이 형벌을 받았다(에 7:10; 9:14).


   다윗이 아브넬의 화친제의에 사울의 딸 미갈을 요구한 것은 그가 사울의 가문의 합법적인 사위인 것을 대의에 천명함으로써 정치적 유익을 얻으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을 것이다.129)130)


  결혼관습을 보면 이스라엘은 메소포타미아나 히타이트와 유사하고, 이집트와는 특히 근친결혼에 있어서 거리가 멀다. 페르시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이 이집트의 영향에 의한 것인지는 잘 알 수 없다. 이스라엘에서 여자들의 법적 권리는 다른 고대 근동국가들보다 더 제한적이어서 이혼을 요구할 수도 없었으며 사회활동도 매우 빈약하였다. 일부 여성들의 경제적 종교적 활동들은 예외적인 것인지 보편적인 활동의 두드러진 경우가 성서에 기록된 것인지 자료의 증가를 더 기다려볼 필요가 있다. 아들이 없을 경우 딸들이 상속받는 것은 드문 일이었을 것이다(민 27:1-11; 36:1-4).


   이스라엘에서 사회계층은 직업에 의한 구분일 뿐 이집트의 경우 두드러진 신분적 차별은 아니었다. 다만 본래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주민과 거류민들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았으며, 외국인 노예도 있었다. 그러한 사회계층의 구분을 이스라엘과 메소포타미아 사회가 유사하다. 노예는 전쟁포로가 중심이 되고 자국민이 노예가 되는 것은 빚으로 팔려가는 경우인 것은 이스라엘과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히타이트가 유사하며, 그 빚으로 된 노예를 일정기간 후 방면하는 제도도 연관되고 있다.

   페르시아의 사회제도가 이스라엘 귀환공동체와 어떤 유사성이나 마찰을 보여주는 예는 드물다.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꿇어 엎드려 절하기를 거절한 것이 확연한 신분의 차이를 거부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종교적 이유로 경배에 대한 요구를 거부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에 3:1-5)

'기독교 이야기 > 유래.역사.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서 위주로 본 세계역사  (0) 2020.01.17
기독교 종파  (0) 2020.01.13
아쉬케나지(Ashkenazim) 유대인   (0) 2019.12.16
수도원의 역사  (0) 2019.12.12
한국 기독교의 역사   (0) 2019.12.1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