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선교 역사


 

   1. 구츨라프(Karl.F.A.Gutzlaff)

  구츨라프는 우리 나라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이다. 그는 네델란드에서 파송된 중국 선교사였다.  그는 중국에서 영국의 동인도회사 무역선 로드앰허스트호를 타고 1832년 황해도 백령도를 지나 충청도 볼모도에 도착하여 고대도에 예인되었다. 그는 지방관을 통해 조선 정부에 통상을 요구했다. 그는 중국에서 한문을 공부해서 한문을 자유 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지방 관리를 통해 국왕 순조에게 통상을 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면서 한문 성경 2권을 함께 보냈다. 그는 회신이 올 때까지 고대도에 머물면서 주민들과 주기도문에 한글로 토를 달아 문답을 했고 성경을 배포했다. 또한 감기든 자에게 의약품을 주었고 배고픔에 허덕이는 그들에게 감자를 주고 한문으로 감자 재배법을 적어 주었다. 그러나 조선 정부에서 중국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어떤 나라와도 통상을 할 수 없다는 회신이 오자 그 곳을 떠나게 되었다.

 

   2. 토마스(Robert.J.Thomas)

  토마스는 영국에서 파송된 중국 선교사였다.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도중에 아내 캐롤라인이 아이를 낳다가 병으로 죽게 되었다. 그 일로 인해 한 때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다 중국에서 조선 사람을 만나 조선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고 1865년 조선을 방문하기 위해 황해도 장연군 소래 앞바다에 도착했다. 그의 생각은 그곳에서 선교하면서 한국어를 습득하고 장차 서울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서울로 가는 도중 폭풍우를 만나 실패하고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다. 1866년 무장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에 승선하였다. 그는 조선어와 조선 지리를 알았기 때문에 제너럴셔먼호를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 배가 대동강으로 들어올 때는 홍수로 인해 물이 불었기 때문에 순조로왔지만 며칠이 지나자 물이 빠졌고 결국 배는 모래톱에 좌초되고 말았다. 평양감사 박규수는 관리를 보내 입국 까닭을 묻고 군사들을 통해 허가없이 불법으로 들어온 것을 제재하려 했다. 그런 과정에서 제너럴샤먼호는 조선군의 화공으로 인해 불타게 되었다. 선원들은 배에서 뛰어 내려 뭍에 오르게 되었고 도끼와 칼에 죽임을 당했다. 토마스는 선원들이 살기 위해 배에서 뛰어내릴 때 성경을 한 권이라도 더 전달하기 위해 성경을 대동강에 던졌다. 그리고 뭍으로 올라왔을 때 참수하려던 박춘권 포교에게 성경책을 건네 주고 야소(예수)를 외치며 죽었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였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이 한창일 때 한 사람이 선교사에 성경을 가지고와 건네면서 "이것이 우리 할아버지께서 옛날 토마스 선교사가 죽을 때 얻은 성경이다"고 했다고 한다.

 

   3. 로스(John Ross)와 맥킨타이어(John McIntyre)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스코틀랜드에서 파송된 중국 선교사였다. 로스의 여동생과 맥킨타이가 결혼을 한 관계로서 처남 매부 지간이다. 그들은 조선이 대원군 집권 이래 쇄국정책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조선은 외국 선교사나 외국 종교를 받아 들이는 자는 사형을 시키는 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먼저 성경을 번역하여 전하는 전략을 세웠다. 이른바 속인주의(人主義) 선교방식 곧 대인 선교방식이었다. 그래서 로스는 조선에서 나온 조선인을 접촉하려 했다. 당시 북경에는 만주인들과 고려인들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 곧 고려게이트가 있었다. 주로 만주인들은 약품과 비단을, 고려인은 홍삼을 거래했다. 로스는 그 곳에서 조선인을 접촉하려 했으나 조선인들은 그들과 접촉한 사실이 알려지면 내통죄를 면할 수 없었고 관념적으로 서양인을 짐승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접촉할 수 없었다. 로스가 1년을 노력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그 후에 맥킨타이어가 1년을 다니다가 이응찬을 만나게 되었다. 평안도 의주 출신으로서 식솔이 많았고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 행상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맥킨타이어는 그에게 많은 사례비를 약속하고 한국어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이응찬은 내통죄로 잡혀 죽더라도 그 많은 돈을 한 번 벌어보기 위해 허락했다. 그런데 그는 500단어 정도 밖에 몰랐다. 후에 이응찬의 친구 서상윤이 중국에 장사를 하러 왔다. 서상윤이 장티프스에 걸려 한 주막에 거하게 되었다. 맥킨타이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의사를 데리고 가서 계속 왕진하게 했고 맥킨타이어는 15일 동안 그를 떠나지 않고 간호를 했다. 감동을 받았다. 짐승에게 간호를 받는다는 것과 서양인에게 자신을 드려야 된다는 심성 때문에 갈등했다. 서상윤은 "어찌 그리 오랜 동안 생명 부지한 나를 위해 헌신하고 고통을 자초하느냐" "그런 긍휼 베풂이 당신이 갖고 있는 도 때문인 바 그 도에 대해서 나도 알고자 하노라" "나의 생명은 당신의 것이니 나를 가져다 요긴하다가 쓰라"고 했다. 서상윤은 보통 5,000단어 정도를 사용했다. 그래서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서상윤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한문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데 더 큰 힘을 얻었다. 그 후에 김진기, 백홍기 등도 들어와 번역사역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렇게 차려진 번역팀이 2년 동안 노력한 끝에 번역성경이 나오게 되었다. 번역죈 성경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이었다. 서상윤은 번역 사역을 하는 동안 신앙이 생겨 세례를 받기를 희망했다. 로스가 그들의 위험 때문에 거절하지만 간청에 못 이겨 세례를 주었다. 서상윤은 번역된 성경을 한국에 들어가 전할 결심했다. 그는 스코트랜드성서공회와 대영성서공회로부터 권서전도인(책을 팔면서 전도하는 사람)으로 임명을 받고 조선국경수비대를 통과하기 위해 한쪽은 주역, 한쪽은 성경을 기록하여 가지고 들어왔다. 또한 그릇같은 물건을 싸는 종이로 가장하여 들어오기도 했다. 그리고는 그것을 다리미로 다리고 묶어서 밤새 필사했다. 한 번은 서상윤이 걸려 감옥에 가게 되었다. 감옥에 아는 사람이 풀어 주고 책은 암수했는데 그것을 보다가 베끼고 서상윤 갔다 준 다음에 그 책 읽고 전도자가 되기도 했다. 서상윤은 동생 서경조와 함께 고향 황해도 의주를 떠나 황해도 소래로 가서 전도를 했다. 그래서 그 곳에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1884년에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소래교회이다. 서상윤은 이후에 서울에 성서반포소 만들었다. 거기서 맥킨타이어가 인천으로 보낸 성경을 받아 판매했고. 행상인처럼 다니며 책을 팔면서 '예수젼'을 팔았고 그로 인하여 많은 신자가 생겼다. 그로 인해 서울에도 기독교 공동체가 생겨 1887년에 새문안교회가 세워졌다.  

 

  4. 이수정(李樹廷)

  이수정은 임오군란 때 고종의 왕비 민씨를 구해준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임오군후 벼슬자리를 주겠다는 것을 거절하고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1882년 민영익, 김옥균이 일본에 갈 때 그들과 함께 40세 나이로 농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일본에서 농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안종수로부터 농학에 조회가 깊은 쯔다를 소개 받은 바 있어 쯔다(津田仙)를 만났다. 그런데 쯔다는 기독교인이었다. 이수정은 쯔다 집을 방문하여 그 집 벽에 걸려 있는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의 성경 구절을 보고 놀랍게 생각하여 쯔다와 대화를 나누었고 쯔다로부터 일본에 와 있던 미국 선교사들과 접촉을 하였다. 이수정은 미국 선교사 죠지 낙스(George W. Knox), 로버트 맥클래이(Robert S. Maclay), 헨리 루미스(Henry Loomis)를 만나 세례를 받고 농학보다는 예수교에 더 큰 열정을 보였다. 헨리 루미스 목사는 이수정이 학문이 높은 임물이며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자극을 주었다. 그래서 1883년 4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내용으로 한 현토한한신약성서(懸吐漢韓新約聖書)가 번역되었다. 제목 그대로 한문에 토를 단 성경이었다. 1885년에는 마가복음은 순수 한국어로 번역했다. 그리고 미국 선교 본부와 미국 선교 잡지에 한국에도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는 요청의 글을 썼다. 미국에서는 일본에 있는 선교사를 한국으로 파송하자는 논의가 일자, 한국과 일본은 문화적 차이가 크고 한국이 일본보다 문화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직접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미국에서 직접 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한국은 개화파와 보수파가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수정은 일본으로 망명온 김옥균측의 자객으로부터 2번이나 권총에 맞았다. 이수정은 1886년 귀국하였으나 권총에 맞은 후유증으로 질병을 앓다가 죽었다.  

 

  5.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와 아펜젤러(Heny G. Appenzeller)

  언더우드와 아펜젤라는 미국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인데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교에 파송했고 아펜젤러는 미국 북감리교에서 파송했다. 그들은 우리 나라에 오기 위해 일본에 들렀는데 그 곳에서 몇 달간 머물면서 이수정을 만나 한국어를 배우고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 마가복음을 가지고 우리 나라에 들어왔다. 당시에는 한미 조약이 이루어진 터라 저항 없이 들어올 수 있었다. 그들은 1885년 부활절에 제물포(인천)항에 도착하여 서울로 들어왔다. 이 선교방식은 속지주의(屬地主義)선교이며 대지선교방식이었다. 한편 황해도 의주의 서상윤팀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서울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도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달라고 요청했고, 언더우드가 가서 세례문답을 해보니 미국교회보다 나았고, 언더우드는 자신이 씨를 뿌리러 왔는데 거두고 있다고 말했다. 언더우드는 거기에서 33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언더우드는 이미 기독교 공동체를 이루던 성도들은 언더우드를 초청하여 예배를 드리고 정동교회(새문안교회)를 세웠다. 그 때 창립예배를 드릴 때 14명이었는데 12명은 서상윤에게 전도받은 사람들이고 2명은 언더우드에게 전도받은 사람이었다. 그 예배에 만주에서 활동하던 로스 선교사도 초청되어 함께 예배를 드렸다. 언더우드는 로스가 서상윤과 번역한 성경을 재번역하였다. 그것은 로스가 주도한 성경 번역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평안도 의주 사람들이어서 평안도 사투리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시편23편 같으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를 "여호와래 내게 목자니끼니 내게 뭐래 캥길게 있갔니~"로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성경의 전신이다. 언더우드는 그 외에도 평생을 교육, 의료, 복지에 관한 선교를 했다. 그는 형이 타자기 회사로 돈을 벌 때에 편지 보내 왔다. 한국에서 고생하지 말고 미국에 와서 회사 일을 도와 달라고.... 그는 힘들 때마다 그 편지 잃었으나 돌아가지 않았다. 형이 돈을 보내 주어 연희전문학교(연세대)를 짓고 나서 힘들어서 병이 났다. 한국에서 고칠 수 없는 병이었기 때문에 병을 고치고 와서 사역을 하려고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소천했다. 아펜젤러는 목포에서 열리는 선교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가던 중 군산 앞 바다에서 그 배가 밤 안개 때문에 다른 배와 부딪혀 침몰했다. 그 침몰하는 배에 한 여학생이 타고 있었는데 아펜젤러는 혼자 살려고 했으면 살았을 텐데 그 여학생을 살리려 하다가 못 빠져 나오고 죽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아펜젤러는 서울에 들어온 후 시내 남쪽에 집을 구해 벧엘예배당이라 이름하고 첫예배를 드렸다. 후에 정동제일감리교회가 되었다. 그는 목포에 선교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가던 중 군산 앞 바다에서 밤 안개 때문에 그 배가 다른 배와 부딪혀 침몰했다. 그 침몰하는 배에 한 여학생이 타고 있었는데 아펜젤러는 혼자 살려고 했으면 살았을 텐데 여학생 살리려 하다가 못 빠져 나오고 죽었다. 이때 아펜절러의 나이는 44세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통해 미국 북장로교와 북감리회가 들어온 이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도 들어와 순천을 중심으로 해서 광주 목포에 선교를 했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장인 인요한(John Linton)은 그들의 후손이다. 전라도에서 선교하던 그 부모들은 풍토병을 이기기 위해 여름이 되면 지리산 노고단 꼭대기에 올라가 몇 개월씩 살았다. 그들이 살았던 건물 잔해는 지금도 있다.

 

  한국의 선교역사를 보면 첫째,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한국어 성경이 번역되어 들어왔고 그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인이 된 자생적 신앙 공동체가 있었다. 이는 세계 선교 역사에서 어느 나라에도 없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둘째, 선교사들의 희생이다. 당시 선교사 파송 국가들에서는 한국을 선교 대상에서 제외했고 선교사들도 한국에는 오지 않으려 했다. 그런 불모지에 선교사들이 와서 순교하거나 병들어 죽었다. 그들은 자기 나라와 고향과 미래의 보장된 자리를 내놓고 와서 생명을 내놓았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 전해진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고 한국교회가 유래없는 '제 2의 예루살렘'으로 불리울 정도로 부흥했다.


경제적으로도 세계 10위 권에 들게 했다. 세계에서 선교사를 2번째로 많이 보내고 선교비로는 첫번째로 많이 보내는 국가가 되었다. 하나님이 우리 나라를 선교 국가로 세우려는 섭리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의 빚진 자요 희생과 헌신에 빚진 자이다. 바울은 로마서1:14에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다 (롬8:12, 15:27). 이제 우리도 힘든 형편에 있을지라도 다른 나라에 선교를 해야 한다. 선교사로 가기도 하고 선교사를 후원하기도 하고 선교금을 보내기도 해야 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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