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시대와 신약의 역사


BC 587년 바벨론(이락크) 느브갓네살 왕에게 멸망 당함

BC 538년 메데, 바사(페르시아)고레스에게 바벨론 멸망 ?

BC 537년 포로들 예루살렘 귀환

BC 515년 학개와 스가랴의 독려로 예루살렘 성전 재건

BC 445년 느헤미야에 의해 예루살렘 재건

BC 334년 마케도냐 알렉산더에 의해 페르시아 점령

BC 331년 알렉산더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수리아와 애굽을 정복하고 알렉산드리아 도시건설

BC 323년 알렉산더 바벨론으로 원정하여 제국의 수도를 건설하고자 하다가 열병으로 32세에 절명


*후계자를 세우지 않아 7명의 장군들이 서로 권력을 접고자 싸우다가 3명은 죽고 4명이 남아서

헬라 제국을 통치함.

1)애굽을 통치한 프톨레미 왕조 2)수리아와 동편을 통치한 셀루키드 왕조이다.

BC 320년 팔레스틴과 애굽이 프톨레미 1세에 합병하여 122년동안 다스림.(대체로 안정적, 종교인정)

BC 198년 셀루키드 왕조의 통치자인 안디오쿠스 3세는 애굼을 탈환하여 수리아에 합병하고 유대인들 을 박해함.

(유대인들의 수난기)셀루키드는 피 정복 민들에게 언어와 문화를 강압적으로 주입하고 유대인들은 이로부터 파당이 생겨 헬라의 관습을 따르게 함.

*그러나 대부분의 보수주의 유대인들은 조상들로부터 히브리 사상과 문화를 고수 함(아들을 가르 쳐 하시딤즉 경건주의자 라 부름)

BC 169년 안디옥쿠스 에피파네스가 통치자가 됨.

              그는 미친개처럼 날뛰며 성을 불태우고, 약탈, 학살, 율법주의자, 안식일, 히브리 성경을 가진 자 들을 죽임.

BC 167-12년 유대인과 충돌함.(이를 마카비 반란이라 함)유대인들이 독립을 쟁취하여 안정을 찾음.

BC 63년 로마가 이스라엘을 점령(폼페이우스 장군)

BC 40년 헤롯이 로마에 가서 왕으로 임명받음

BC 37년 예루살렘 장악

BC 37-4년 예루살렘 통치(2:1-)

          헤롯대왕-에돔인 안티파터의 2번째 아들. 안티파터는 본래 폼페이 장군을 지지했으나 그가 BC48년 몰락하자 시저(이사)를 지지함.

          또한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음.

BC 42년 안토니우스가 빌립보 전쟁으로 권세를 잡자 안티파터의 2째 아들 마사엘과 헤롯을 분봉 왕으로 임명하여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함.

          헤롯이 46년 만에 성전을 완공하고(2:20),세금감면, 경제성장, 바리새인들을 존경하는 태도를 보임.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 문에 금 독수리를 세움으로 유대인들과 악화됨
.

        *헤롯은 가정적으로 불행함. (2아내, 3아들, 처남1, 처조부를 살해함.)

          그리고 예수님을 정적으로 보고 죽이려함.(어린아이 800명을 죽임)

BC 4년 헤롯대왕 죽음(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아들
3에게 왕권을 계승:


1)아켈라오(BC4-ADS 6년까지) 사마리아, 유다, 에돔 지역.

2)빌립 동북쪽 갈릴리 지역(빌립이 티베리아를 건설하여 티베리우스에게 선물)

3)안티바-베뢰아, 빌립보 지방

*로마로 가던 중 동생 빌립의 집에서 머물게 되는데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반하여 청혼.

 헤로디아는 그의 부인과 이혼 할 것을 조건부로 승낙함.

 아티바스의 부인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아버지의 나라(아헤타스)로 도망,

헤로디아는 이때부터 안티바와 살면서 유대인들, 예수님, 세례요한으로부터 책망을 받음(10:11)


BC 39년 안티바스는 헤로디아의 말을 듣고 로마에 가서 왕의 칭호를 받으려하지만 한발 빠른 아그립바 에게 밀려(고발)분봉왕 마저도 박탈당하여 쫒겨남.

            아그립바 1세는 야고보를 죽였고(12:1-3)베드로를 체포했고, 교회지도자를 괴롭힌 자.

BC 44년 아그립바 1세가 죽음(아그립바 1세는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로) 헤롯대왕이 죽임.

 

AD 66년 유대인 반란으로 로마와의 전쟁, 네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70년까지 정권을 유지하지만 새 AD 70년 황제인 베스파시안의 아들 티토에 의해 멸망당함

 

예수님 당시 사회적 배경


1)군대: 로마군대-안토니우스 수비대 대장으로 1000여명의 군데를 지휘함.(안토니오의 요새에 주둔)

           헤롯의 군대-사마리아와 가이사랴에서 모집 됨.

           헤롯의 군대는 안토니오의 군대에 소속되었고 가버나움에 주둔함.

2)군대의 임무: 세금징수와 행정관리

                   세금: 토지세와 인두세, 통행세 등.(가버나훔과 여리고)

                            과잉 징수하여 남는 것은 착복(삭개오)

                   행정권: 로마정부는 체대한 행정권을 위임하고, 비정치적인 사법권은 유대인들에게 주고 사형집행권은 총독의 권한에 있었다.


그리스시대(헬라)


AD 4-6세기 지금의 이스탄불을 비잔티움으로 명명

AD 395년 로마제국의 분열

             서 로마제국-캐톨릭 중심

             동 로마제국-동방정교(정교회)하기아 소피아성당을 건축,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불이라 명명

AD 1453년 오스만제국(술탄 메메드2)이 콘스탄티노불을 점령하고 이스탄불이라 부름.

 

에스라 6:1, 페르시아왕 다리오


B.C.539년에 바벨론이 페르시아의 고레스에게 멸망한후 고대 근동은 2세기 동안 페르시아가 지배했습니다 고레스는 모든 서아 시아 지역과 이집트 경계까지 지배했습니다고레스는 B.C.538년에 바벨론 유다 포로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여호와의 집을 건축해도 좋다는 칙령을 반포했습니다. 고레스는 포로들을 본국으로 보내서 자신들의 소망과 이상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 페르시아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동안의 앗시리아와 바벨론의 억압정책은 자국 이익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고레스는 유다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해방시켰고 신전을 회복시켰습니다레스는 예루살렘을 확보하여 교두보로 삼았을 경우, 애굽 정복도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 계열의 세스바살을 예루살렘 총독으로 임명하고 유다 포로들에게 돌아가서 성전을 지어도 좋다고 허락한 것입니다


왕 명

연 대

활 동 내 용

고레스

BC 559-530

BC 538 고레스 칙령으로 1차 포로귀환

캄비세스

BC 530-522

다리오 1(다리우스)

BC 522-486

BC 515 성전완성(520년 재개)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BC 486-465

에스더/ 모르드개 활동

아닥사스다(롱기마누스)

BC 465-424

BC 458 에스라 귀환

 

BC 445 느헤미야 귀환

다리오 2

BC 424-404

아테네 멸망, 스파르타의 지배

다리오 3

BC 335-331

알렉산더 페르시아 정복


<페르시아(바사) 연대기>


 

구 분

귀 환

업 적

1차 귀환

BC 538 스룹바벨 인도(1-2)

지도자: 세스바살, 스룹바벨, 예수아

귀환자수: 49,897

성전 재건

에스라 3-6

2차 귀환

BC 458년 에스라 인도(7-8)

지도자: 에스라

귀환자 수: 1,758

공동체 재건

9-10

 

3차 귀환

BC 444년 느헤미야 인도(1-2)

지도자: 느헤미야

성벽 재건

3-7

 

 

 

    

고레스 칙령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3차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습니다.


 

1차 포로 귀환의 지도자는 세스바살과 스룹바벨(1:12; 3:27, 예수님 족보)입니다.

그러다가 세스바살은 스룹바벨에의해 곧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는 예루살렘에서 B.C.537년에 성전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마리아인들이 성전 건축에 참여하겠다고 신청했고 스룹바벨 등은 이들이 전에 하나님께 불 충성했다는 점을 근거로 이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사마리아인들은 성전 재건을 방해했습니다. 페르시아 왕에게 성전이 재건되면 요새화된다고 중상 모략하였고,

이로 인해 성전 재건은 15년 정도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페르시아에서는 B.C.530년에 고레스가 전사하고 캄비세스가 왕위에 올랐고 이어서 다리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5-6장은 다리오가 왕위에 오르면서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다리오 1세가 고레스 칙령을 확인한 후 성전 재건을 허락하였고, 고레스 칙령으로부터 25년 후에 성전이 완공하게 됩니다. (BC.516). 

다리오의 등극에 대해 많은 논쟁과 불확실성 있습니다. 신비스러운 인물입니다.
고레스가 정복전쟁 중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캄비세스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캄비세스는 제국을 확장하기 위해 이집트 원정을 단행했습니다.

그의 휘하에 다리오가 장군으로 있었습니다.

캄비세스가 이집트 원정 중에 페르시아 본국에서는 매기 부족 출신의 가우마타라고 하는 사람이 스스로 합법적 계승자로 자처했습니다.

그는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많은 페르시아 귀족들에게 땅과 노예와 집을 몰수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이러한 개혁을 보고 그에게 지지를 보냈습니다. 소요 소식을 듣자 캄비세스는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그가 귀국 중에 죽게 됩니다

첫째, 본국에서의 전황이 끝났다는 보고를 듣고 자결했다는 연구가 있고

둘째, 널쩍다리 상처를 받았으며 그 상처가 잘못되어 죽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캅비세스가 죽자 제국의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리오는 여섯 부족의 출신의 귀족들과 함께 매기의 반역자들을 진압했으며

자신이 고레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다리오는 초기에는 크고 작은 반란 진압에 보내게 됩니다.

이러한 반란과 혼란스러운 분위기에서 다리오 통치 2년에 유프라테스 건너편 지역의 총독이

성전 재건 작업에 의문을 갖고 조사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1)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려 문서창고 곧 바벨론의 보물을 쌓아둔 보물전각에서 조사하게 하였다


(2)메대도 악메다궁성에서 한 두루마리를 찾았으니 거기에 기록하였으되,

닷드내는 자신의 서신에서 다리오에게 바벨론에서 왕의 국고에 조사”(5:17)하라고 요청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이 바벨론 지역에서 귀국했기 때문에 그는 고레스의 조서가 왕의국고(문서보관소)에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서적 곳간 곧 바벨론에서 보물을 쌓아둔 곳에서 일차적인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다리오의 서기관들은 바벨론에서 관련 기록을 전혀 찾지 못하자 다음으로 메대도 악메다 궁을 조사했습니다.

메대도 악메다 궁성에서 한 두루마리가 나옵니다.

그 두루마리가 악메다 궁성에서 발견된 것은 고레스가 주전 538여름,

즉 그 조서를 발표하던 때에 악메다에서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고레스 왕 원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하여 이르노니

이 성전 곧 제사 드리는 처소를 건축하되 지대를 견고히 쌓고 그 성전의 높이는 육십 규빗으로, 너비도 육십 규빗으로 하고 


(4)큰 돌 세 켜에 새 나무 한 켜를 놓으라. 그 경비는 다 왕실에서 내리라 


(5)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옮겼던 하나님의 성전

, 은그릇들을 돌려보내어 예루살렘 성전에 가져다가 하나님의 성전 안 각기 제자리에 둘 지니라 하였더라.

이 악메다 문서에는 세 가지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성전을 짓된 높이와 폭을 각각 90피트씩으로 하고 각 큰 돌 셋에 각각 목재 하나씩으로 하라(5:8; 왕상 6:36)

둘째, 성전재건을 위해서 소요되는 경비는 모두 왕실에서 충당한다.

        이 조항은 고레스가 예루살렘 성전재건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려 줍니다.

셋째,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금과 온 기명들을 가져다가 예루살렘 성전의 원래의 자리에 두도록 하라 .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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