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의 형성 과정


- 박정수 교수

 

I. 서론

 

1. 관점과 위상

유대교를 연구하는 기독교 신학도로서, 나는 먼저 나 자신과 내가 속한 종교적 전통이 유대교에 대한 배타적이고도 공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성찰하는 것이 옳은 자세라고 생각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유대교와 기독교 뿐만 아니라, 모든 개개의 종교적 전통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도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찰이 자신과 자신이 서있는 전통의 위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속의 한 개체의 자기정체성의 표현이야 말로 다원화된 세계의 진정한 가치가 될 수 있다. 거기에서 비로소 우리는 상호간의 대화와 이해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조차 말할 수 없다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 없다면, 그리고 유대교인으로서 유일신 하나님에 대해서나 토라의 본질조차 말할 수 없다면, 둘의 대화나 서로의 관계성에 대한 논의는 무의미하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는 한국과 같은 이천년 기독교 역사의 끝자락에 서있는 극동 아시아의 ‘젊은 기독교’에서는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미국의 기독교에서 조차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는 사회적으로는 몰라도, 종교적으로 그리 큰 이슈가 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천년 기독교 역사를 그대로 품고 있는 유럽은 상황이 다르다.

유럽인 들에게 유대교라고 하면, 단지 저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유대인 수전노나, 늘 그들의 사회 한 구석에서 매우 독특한 삶의 방식을 취했던 “종교적 민족”을 떠올리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서는 오히려 좀 히스테릭한 차원이 더 부각된다. 그들은 유럽역사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반셈족주의(Antisemitism)와, 무엇보다도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오래되지 않은 과거 유럽의 아픈 자화상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근대시대의 기독교의 유대교에 대한 적대적인 관계는 중세 이후 유럽에서, 유대교인들이 무역업을 통한 부의 축적과 그것을 기초로 한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의 유지의 노력이라는 전역사(前歷史)를 가진다.

 

유대교인들은 중세 이후 유럽에서 기독교도들의 끊임없는 박해를 견뎌내며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해 나가는데 정말 많은 대가(代價)를 지불해야 했다. 중세의 기독교는 이슬람 세력의 성장으로 그들과의 세력다툼이 번져 십자군 전쟁까지 이르게 되는 와중에, 유대교는 그야말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었다. 중세 이후의 유대교의 양대 산맥으로 아슈케나짐과 스파라딤이 존재하는데,


아슈케나짐은 동유럽의 비교적 안정된 유대교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스파라딤은 스페인에 뿌리를 둔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은 스페인에서 기독교도의 영토회복 운동으로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추방과 함께, 이교도들로 낙인찍혀 이단재판과 추방으로 내몰려 북아프리카와 중동 터키 일대로 이주했고, 더 나아가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중남미에 까지 퍼지게 되었다.

 

왜 유럽에서는 미국이나 아시아의 기독교와는 달리 유대교와 그토록 기나긴 종교적 논쟁의 시기와 사회적 갈등을 경험해야 했을까? 그것은 단지 기독교의 역사가 그만큼 길었다거나, 기독교인으로서 국가에 종교세를 내었던 유럽이 가질 수 있는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성이라고 간단히 치부해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기독교와 유대교가 가지는 동질성 때문일 수 있다. 두 종교는 같은 뿌리, 즉 고대 이스라엘 종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유일한 한 하나님이신 야웨를 함께 섬기고, 고대의 종교적 유형 가운데에서는 매우 독특했던 이스라엘의 예언자적 전통에 함께 서 있다. 둘은 모두 고대에서는 처음으로 경전을 갖는 종교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게다가 기독교적 가치는 유대교적 가치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이 둘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대한 종말론적 이해, 공동체에 있어서의 정의와 사랑과 같은 삶의 가치의 근본을 공유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를 자신들의 삶의 영원한 패러다임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유대교와 기독교는 서로 평행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중세 이후의 유대교나 기독교의 역사도, 근대 이후 그들의 정치적 역학 관계나 반셈족주의도 아니다. 내게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기독교적 전통에 속하여 신학과 신앙을 실천하고 있는 우리가 유대교와 공유하고 있는 고대 이스라엘 종교를 어떻게 해석하고 실천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기독교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삶을 내용으로 하는 구약성서와 함께, 예수의 생애를 그것의 성취로 이해한 초기 기독교의 해석과 삶이 담긴 신약성서를 경전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대교는 히브리 성서와 함께 그것에 대한 해석과 실천의 집대성인 미쉬나와 탈무드를 가지고 있다.

 

고대의 유대교와 기독교는 이스라엘 종교라는 그들의 공통의 유산에 대한 각자의 해석과 실천이라는 틀에 형성되었다. 그 만큼 양자의 가장 초기의 형성기는 매우 역동적으로 연관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넓게는 포로기 이후에 등장하는 귀환 공동체가 이룩한 페르시아 시대의 원시적 형태의 유대교를 포함해서, 알렉산더 대제에 의한 인류의 최초의 거대한 동서양 문명의 복합체로서 드러난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와, 유대전쟁(C.E. 66-70) 이후에 본격화된 초기기독교와 ‘랍비유대교’의 형성기를 포괄한다. 고대 이스라엘 종교가 재형성되는 거대한 용광로서, 본인은 고대 유대교의 형성과정을 내적으로는 포로기 이후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의 확립으로, 그리고 외적으로는 이 시기의 이스라엘의 이민족과의 상호교류를 통한 사회문화적 정체성의 확립으로 파악하려 한다.

 

초기기독교에 관하여 말하고자 할 때는, 적어도 그것이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 내부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유대교 내부의 종파운동 가운데 하나로 시작하였음을 전제로 하여야 할 것이다. 이시기 종파운동의 본질은 이방인과 이방의 문화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후예인 자신들이 누구이고, 그들의 신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그 안에는 여려 형태의 힘의 스펙트럼이 존재하였지만, 궁극적으로 이시기의 유대교는 이스라엘 전통을 전적으로 유일신에 대한 신앙과 토라의 준수로 수용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유대교가 고대 이스라엘의 전통을 종교적 사회적 차원의 새로운 틀로 형성함으로써 완성해 가는 것이었다. 유대교 안의 힘의 프리즘에서 볼 때, 초기기독교가 갖는 의미는 민족종교와 보편종교의 긴장을 보편종교로 이전하고자 하는 내적인 활력을 의미한다. 이것은 ‘토라의 종교’인 유대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한 ‘은총의 종교’인 기독교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우리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이러한 매트릭스에서 어떠한 요인을 발견하고, 또 거기에서 “예수 운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예수는 유대교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 그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또 그를 따르는 일군의 무리들로부터 시작된 초기기독교 운동은 거대한 고대 유대교의 형성의 용광로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인가?



2. 옛 언약과 새 언약


유대교의 정경인 히브리 성서를 기독교가 자신의 정경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기독교는 히브리 성서를 ‘구약’으로 규정한다. 이 말은 본래 예레미야 31:31에 나오는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diaqh,khn kainh,n) 세우리라”라는 “새 언약”(New Testament) 사상에 대응되는 용어로 사용된 “옛 언약”(Old Testament)에서 유래한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새로운 언약을 수여하였다는 것과 자신들이 이 새로운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파트너로 부름을 받았다는 확신에서 시작되었다. 예수는 그의 피로 제자들과 “새 언약”을 세웠고(눅 22:20), 그들에게 사랑의 “새 계명”을 주었다(요 13:34). 또한 바울은 자신을 이 “새 언약의 일군”임을 확신했으며(고후 3:6), 좀 더 후대에 히브리서 저자는 예레미야의 새 언약을 인용하며(히 8:8), 옛것은 사라져 없어질 것으로 여겼다(히 8,13). 일반적으로 고대의 시대에는 옛것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을 생각하면, 기독교가 자신의 신앙의 내용을 “새로운 것”으로 내세웠던 것은, 고대인들에게 ‘유대교와는 유사하나 그 보다는 하등한 종교’로 인식될 수 있었다. 반면 유대교는 자신의 “옛것”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옛 조상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수여한 율법이야 말로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계약의 근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옛 언약”을 버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또한 그것이 변한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새것이 옛것에 뿌리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는 것이라는 확신에 넘쳐있었다.

 

초기기독교 공동체에 유포된 이러한 신념을 우리는 이른바 “성취인용구”라는 말씀의 전승양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 ...을 이루려 함이라.” 여기서 지시되는 사건은 대부분이 예수의 생애와 사역에, 그리고 선지자의 말씀은 거의 70%이상이 이사야서에 집중되어 있다. 이를테면 예수의 치유사역을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사건’을 초기기독교가 유대교의 경전인 히브리 성서가 성취되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기독교의 이 성취의 관점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에서 확장되어, 예수를 당시 유대교의 사활이 걸린 율법, 그 율법의 성취자로서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 5:17).

 

그러나 유대교는 자신이 전수한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와 그 안에 담긴 율법과 전통들, 그리고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요구한 야웨신앙의 참된 전수자로 확신하고 있다. 만일 유대교에 ‘새것’과 “새 언약”이란 사상이 유효하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율법과 예언” 안에서, 다시 말해서 “옛 언약”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유대인으로서 누구도 그 옛 언약 넘어서는 새로운 성취를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은 기독교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옛 언약”을 무효화시키는 그런 “새 언약”은 기독교에도 없다. 구약은 여전히 기독교의 정경이 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초기기독교와 유대교가 공통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일반적인 명제는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화된 명제로는 2000여년의 역사에서 진행된 유대교와 기독교의 뿌리 깊은 반목과 갈등을 이해할 수 없다. 두 종교는 한 하나님 야웨를 섬기고, “율법과 예언”을 그들의 경전으로 읽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언자들이 수백 년간 그토록 수호해 왔던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야웨 신앙을 예수 그리스도에 연관시켰다. 그것도 유일신 신앙을 훼손하지 않고서 말이다.

 

또한 저 “옛 언약” 이외에도 “새 언약”을 구약이외의 또 다른 경전으로 채택한다. 구약을 훼손하지 않고서도 말이다. 물론 여기에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항상 따라다닌다. 기독교는 유대교에서는 낯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을 통하여 예수와 하나님을 “한 분 하나님”으로 믿는다.


아마도 그리스도(o` cristo,j)라는 직책은 인간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되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에 자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기독교에서 유일한 하나님은 예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이 내용은 기독교의 종교 예식의 핵심에 서게 된다.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종교적 의식인 할례와 성전의 속죄제의를 기독교에서는 세례와 성만찬이 대신하게 된다. 초기기독교의 이러한 일련의 발전은 유대교가 자신의 “거룩한 책”에 대한 척도(canon)를 마련한 것과 같이, 기독교는 이 “새 언약”에 대해 선포한 기록물들에 대한 척도를 마련하게 됨으로써 그 발전의 끝 지점에 오게 된다.

 

유대교 신앙의 가장 본질에 속하는 유일한 하나님 야웨 신앙에 이어, 종교적 상징과 그 제의의 변경, 그리고 다시 유대교적 삶의 초석이 되는 “거룩한 책”에 새로운 관점을 도입한 ‘새로운 책’을 첨가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적 유산을 유대교와 공유했던 기독교가 자신의 모태와도 같은 유대교에서 출생하게 된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역사적으로 이미 기틀을 마련한 유대종교로부터 독립한 기독교의 역사이기도 하다.

 

후기 고대의 시기(late antiquity), 더 구체적으로 기원전후 1세기의 유대교를 구조적으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종파화” 현상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요새퍼스가 언급했던 당시 유대교의 4개의 “종파들”(ai`re,seij 유대전쟁사 2,119-166; 유대고대사 13,171-173)은 그들의 길(ways of belief and life)은 서로 다를지 모르지만, 모두 자신들의 독자적인 방법으로 토라연구와 실천을 통해 이스라엘의 유산에 대한 정통성을 주장했다.

 

그러므로 이 시기 유대교의 내적인 갈등의 대의명분은 “누가 참 이스라엘인가?”라는 정통성의 문제로 요약된다. 요세퍼스가 아직까지 기독교를 하나의 종파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후 사마리아를 통해 시리아까지 진출한 초기기독교 공동체도 유대교의 한 종파로 남아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울이 믿는 사상을 “나사렛인들의 종파”(h` tw/n Nazwrai,wn ai`re,sij 행 24:5)의 것으로 여겼다. 다만 그 규모가 어떠했는가 만이 논쟁의 대상이 된다.

 

어쨌든 유대교는 기독교를 유대교 내부의 새로운 한 종파(ai`re,sij)로 생각했다. 이 파에 속한 사람들은 유대교의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파”였다(행 28:22). 이들 역시 적어도 유대전쟁 이전까지는 자신들이 유대교 밖의 사람들이었다는 의식은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고뇌어린 대화를 바울의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담론(롬 9-11장)에서 발견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

 

역사의 아이러니는 종종 다수와 소수, 그리고 역사의 중앙과 주변의 사람들의 역할이 정반대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가장 극단적인 예를 예전에는 박해자 사울이었다가, 지금은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바울에게서 본다.



3. 용어의 정의

 

우선 유대교라는 명칭에 대해서 살펴보자. 유대교라는 어휘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마카비하 2,21과 8,1과 14,38이다. “그들은 유대적인 것( vIoudaismo,j)을 위해 용감히 싸웠다.”(2,21) 여기서 “유대적인 것”은 무엇인가. 이 말은 히브리어로 옮긴다면 예후도트(twdwhy)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 종교의 변화와 깊이 연관된다. “유대적인 것”은 그 어근이 보여주듯이 유다(?????), 그리스어로 유다스(VIou,daj)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원래 지역적 명칭으로 유다의 통치의 관할권이 지배하는 “유다의 땅” 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유다인( vIoudai/oj)은 그곳에 거주하는 거주민을 의미한다.

 

 K. G. Kuhn은 이 말이 팔레스타인의 랍비 문헌에서는 극히 드물게 사용되었지만, 바빌론의 유대인 랍비들의 문헌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율법의 준수를 중심으로 하는 “유대적인 것”을 매우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James D. G. Dunn이 랍비 문헌들의 사용례를 통해서 잘 지적하였듯이, 유대인이 자신들의 보편적인 칭호를 표현할 때, ‘이스라엘’이라고 하지 결코 ‘유대인’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유대인이라는 용어는 비유대인과 자신을 구별하려 할 때만 사용하는 배타적인 의미의 용어이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은 (유대인을 포함한) 관찰자의 관점을, ‘이스라엘’은 참여자의 관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유대적인 것”의 형성과정에서 ‘유다’는 유대교 신앙의 주체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종교적으로는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의 전승에 대한 주도권 경쟁과 연관되고, 사회정치적으로는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인들과 팔레스타인에 잔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이른바 “#rah ma"(“땅의 사람들”)과의 갈등관계로 해석될 수 있다. 이 갈등은 귀환 공동체의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 승리는 단지 정치적인 권력의 획득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유산 전체에 대한 점유권을 의미했다. 남왕국 유다의 예언자들조차 자신들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예언자로 인식하였던, 이스라엘 종교의 유산은 이제 유다의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바빌론으로 유배된 유대인을 중심으로 반성된 신앙과 삶의 규범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한 귀환공동체의 종교적 사회적 승리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에 대한 신앙은 이제 바빌론에서 야훼 신앙을 보존했던 귀환공동체의 신학과 삶의 형태에서 그 정통성이 부여된 것이다.

 

그러나 이 “유대적인 것”은 역사적으로 페르시아 제국시대를 넘어 헬레니즘 시대에 비로소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고 역사 속에 자신을 규정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유대적인 것”은 앞에서 설명한 팔레스타인 공동체와 귀환 공동체의 내적인 갈등을 통과하고, 헬레니즘이라는 범세계적인 문화의 혼합주의와의 투쟁을 통해서 비로소 유대교로 완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마카비후서 4,13에서는 “유대적인 것”( vIoudaismo,j)이 “헬라적인 것”( `Hllhnismo,j)의 대립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마카비서의 배경이 되는 “유대적인 것을 위해 용감히 싸우는”(2,21) 마카비 형제들의 행동이 본질적으로 “유대적인 것에 머무는 자들”을 대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카비서가 보도하고 있는 에피파네스의 칙령, “모든 자들은 자신의 규범을 포기하라”(마카비전서 1:41ff. cf. 마카비 4서 4,26)은 유대적인 것들을 따라 사는 자들이 범세계화의 요구에서 커다란 위협 속에 처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유대교”는 비유대적인 외부의 힘의 강제에 대한 ‘저항적 의미’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저항의 단초는 마카비 가문의 봉기(B.C.E. 167년)와 하스몬 가문을 주축으로 한 독립국가 형성(B.C.E. 132년)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들은 포로기 이후 처음으로 외세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것을 넘어 자신의 힘으로 유다의 영토를 남으로는 이두매인들의 지역까지, 그리고 북으로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역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지 정치적 군사적인 정복에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정복지의 주민들에게 물리적 강제를 통하여 “유대적인 것”을 따르게 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행해졌던 이 시기의 강제 할례는 “유대적인 것”이 ‘비 유대적인 것’에 대한 저항의 힘으로 역류하여 그것을 “유대화”(ivoudai,zein)하는 동력으로까지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유대교는 “유대적인 것”으로서 비유대적인 것에 대한 저항을 넘어, 유대 민족의 강력한 민족주의적 “열심”(zh,loj)으로 한껏 부풀어 오른 민족적 “자존심”의 발현으로 보려는 M. Hengel의 견해는 정당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대인의 이 민족적 자긍심은 로마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가 시작된 B.C.E. 63년 이후에도 지속되어왔으며, 그것은 유대전쟁(C.E. 66-70)을 통해서 매우 큰 타격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계속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트라야누스의 헬레니즘적 강요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제2차 유대인 봉기(C.E. 115-117)를 지나, 결정적으로 하드리아누스의 계속된 강요로 일어난 바 코흐바의 제 3차 유대인 봉기(C.E. 132-135)에서는 이제 더 이상 하나의 영토를 가진 민족으로서 존립하기가 불가능해졌다.

 

여기서 유대교에 대한 학문적 명칭에 대하여 좀 더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유대교는 역사적 변천과정에 따라 여러 가지로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에 따른 유대교에 대한 명칭은 상당히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우선 19세기 종교사학파는 헬레니즘 시대 이후에 발전된 유대교를 에스라-느헤미야에 의해 추진된 원시적 형태의 유대교와 구분하여 “후기 유대교”(Sp?tjudentum=late Judaism)라는 다소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다. 사실 이 표현은 G. F. Moore, C. Klein, J. Wellhausen, E. Sch?rer, W. Bousset, M. Smith, J. Jeremias, L. Goppelt같은 기독교 학자들에 의해 주로 사용되었는데, 포로기 이후의 유대교는 그 이전의 예언자적 종교의 활력과 역동성을 상실한 “뻣뻣한” 돌출물 같은 것으로 여겼다. 이 포로기 이후의 “후기 유대교”의 정신과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바리새적 유대교”이고, 이 바리새주의야 말로 “자기 의”를 주장하는 종교의 본질보다 외연을 치장하는 위선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유대교의 밑그림은 물론 신약성경의 “반유대주의”(Anti-Judaism)의 영향아래서 진행되었다. 적어도 19세기초반부터 2차대전까지의 유대교 연구는 이러한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유대교 연구 자료는 거의 신약성서와 기독교적 자료를 원천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쿰란과 같은 고고학적 자료들과 비문들의 연구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했고, 무엇보다도 이전에 사용되었던 유대교의 외경과 위경들을 역사적으로 해석하게 됨으로 이러한 해석은 기독교적으로 “편향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또 다른 표현은 이시기의 유대교를 “성경과 미쉬나” 사이의 시기라고 규정하여, 이른바 "Post-Biblical Judaism"이라고 쓰기도 한다. 이것도 정경으로서의 히브리 성서가 묘사하고 있는 시대이후, 그러니까 최대한으로 늦추어 잡아 에스라 느헤미야의 귀환과 개혁시기(대략 B.C.E. 458년) 이후의 유대교를 지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시기의 유대교를 외적으로 상징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성전중심의 유대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시기의 유대교를 “제 2 성전기의 유대교”(Second Temple Judaism)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성전재건(B.C.E. 515 )에서 파멸(C.E. 66)까지 대략 550년간의 유대교를 지칭한다.


포로기 이후 형성된 유대교의 명칭에 대한 이러한 모호성은 이 시기에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 유대교의 역사적 상황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본인이 이해하는 한 유대교의 명칭은 적어도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유대교-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초기 유대교-형성기의 유대교)-랍비유대교-근대유대교.

우선 그 변천을 일반적인 연대기로 나눈다면, 고대 유대교(Ancient Judaism), 그리고 중세와 근대의 유대교(Middle Age & Modern Judaism)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연대기적 구분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고대 유대교의 말기에 형성된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가 중세와 근대의 유대교의 근본 틀을 유지하며, 현대까지 정통 유대교로서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고대 유대교를 지칭할 때 그것은 랍비 유대교가 형성되기 이전까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학도들 조차 이 구분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종종 본다. 그것은 랍비 유대교의 형성을 어느 시점으로 잡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랍비 유대교의 기원에 대하여 이제까지 알려졌던 것은 요한난 벤 자카이(Johanan ben Jakkai)의 활동을 들 수 있다. 바리새파의 지도자로 알려졌던, 그는 70년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의 함락 직전에 이 성을 빠져나와 야브네에서 종교와 학문 활동을 하면서, 이 곳을 유대교의 입법, 사법, 행정의 기능을 하는 산헤드린의 중심지로 세워나갔다. 그에 대한 많은 랍비문헌들이 전하는 전설들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90년 이 곳에서 토라, 예언서 그리고 성문서로 구성된 39권의 구약성서, 즉 “타낙”(Tanak)을 최종적으로 확정했다는 것이다.

 

고대의 유대인의 삶과 신앙의 핵심이 되는 정경의 확정은 결코 사적인 차원에서 규정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협의를 이끌어 가면서 탄생한 것이 “랍비 위원회”(Rabbinate)였다. 이 랍비위원회는 팔레스타인 중심으로 일어났던 유대교의 마지막 저항이었던 바 코흐바(Bar Kokhba)의 봉기(C.E. 132-135) 이후, 본토와 디아스포라의 유대교 전체는 랍비들을 중심으로 한 제도적 협의체로 자리잡아갔다.


이른바 “랍비유대교”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다. 그런데 이 “랍비”들은 미쉬나의 편집시기인 약 200년경부터 팔레스타인의 탈무드(약 400년경 완성)에 이어 완성된 바빌론 탈무드가 완성된 500 년경에 이르기 까지, 유대교의 방대한 문헌 형성의 주체가 된다. 이것은 후기 고대시대의 유대교의 본질인 이른바 “책의 종교”가 랍비 유대교의 특징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의 세계에서 “랍비 유대교”의 형성은 주후 1세기 말까지는 아직도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랍비 유대교의 중심에 서 있는 “타낙”의 해석에 결정적인 길을 연 미쉬나의 편찬시기를 랍비유대교 형성의 결정적인 단계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미쉬나는 대략 B.C.E. 50년 이후부터 행해진 랍비들의 재판 기록과 율법에 대한 해석을 담은 것인데, 학자들은 미쉬나가 약 C.E. 200년경 당시 유대교의 최고 지도자(ha-Nasi = patriarch)격이었던 “랍비” 유다("Rabbi" Judah)가 셋포리스에서 편찬하였다고 본다. 그러므로 유대전쟁으로 인한 성전의 파괴이후 미쉬나의 편집시기까지의 고대 유대교는 근대 이후까지 유대교의 골격을 이루게 된 시기로서, 랍비 유대교가 형성되는 과도기의 유대교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유대전쟁 이후 유대교에 있어서 또 한번의 대대적인 반로마 봉기가 일어났던 바 코흐바의 반란까지, 즉 C.E. 70-135년 까지는 유대전쟁으로 인한 성전 파괴가 유대교 전체의 구조에 대한 심각한 위기를 만났던 것은 틀림이 없었다. 이 시기의 특징에 대하여 이제까지 널리 퍼져왔던 일반적인 설명은 이런 것이다:

 

기원전 2세기 중엽 하스몬 왕조의 팔레스타인 지배부터 구체화된 유대교의 “종파화”는 기원 후 1세기 가 유대전쟁으로 인한 유대교의 성전의 멸망과 함께, 바리새파의 주도권 하에서 새로운 형태의 유대교로 재편되는 과정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요새퍼스가 언급했던 당시의 유대교의 4개의 “종파들”(ai`re,seij 유대전쟁사 2,119-166; 유대고대사 18,11-25)가운데서 바리새파를 제외한 다른 모든 종파들은 모두 유대교의 주류(main stream)에서 멀어져 갔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쿰란-엣센 종파는 결정적으로 마사다에서 로마인들의 공격에 죽음으로 저항한 이후 역사에서 점차 사라져갔고, 제2성전기 초기부터 성전을 중심으로 한 대제사장의 권력을 독점하였던 사독계열의 후예인 사두개파는 그 성전의 소실로 몰락의 길을 걸어감으로서 유일하게 바리새파만이 유대교의 재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후 성립되었던 랍비 유대교는 결국 이들 바리새적 유대교가 기초를 놓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19세기 종교사학파 이래에 구축된 이러한 관점과는 대립되는 관점이 그 이후에 제시될 수 있었다. 그것은 성전파괴로 인한 유대교의 재편성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유대교의 여러 종파가 심각한 변화를 경험했다할 지라도, 그것이 바리새파를 제외한 모든 종파의 소멸과 바리새파의 전적인 승리로 끝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전쟁 후 적어도 유대교에는 아직도 다음 세 가지 흐름을 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a. 성전의 파괴를 깊이 탄식해야 했던 에스라 2서와 바룩 2서와 같은 그룹,


b. “내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마 9:13=호 6:6 e;leoj qe,lw kai. ouv qusi,an\)를 주장한 Johanan ben Zakkai와 같이, 성전 없이도 가능한 유대교의 “실용주의”적인 노선, c. 그리고 요세퍼스가 언급한 혁명적 세력인 이른바, “제4의 종파”는 유대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팔레스타인의 주변부에 남아있어 132년의 바 코흐바의 봉기에까지 연관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유대 전쟁 이후 디아스포라를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해 온 초기기독교 공동체를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반된 논의가 진행된 것은, 무엇보다 유대전쟁 이전의 자료들과는 달리 이 시기의 역사적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로마의 역사가나 기독교 역사가들의 글을 단편적으로 재구성하여 추론된 가설의 역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기(C.E. 70-135년)를 유대전쟁 이후 바 코흐바 봉기로 더 이상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민족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던 팔레스타인에서, 유대민족이 이른바 “후기 종파시대”로서 여러 종파들의 재형성기로 존재하였던 시기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는 아직 랍비유대교라는 정형적인 틀이 구축되기 이전의 유대교로서 이른바 “형성기의 유대교”(Formative Judaism)이라고 명해도 좋겠다.


 이 “형성기의 유대교”는 무엇보다도 초기기독교의 형성기와 정확히 대면하고 있기에 기독교와는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즉, 이 시기에 복음서가 기록되었고, 후기 바울서신과 그 밖의 신약성서가 기록되었으며, 고대 교부들의 저작은 모두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좀 더 정확히 다루어야 할 몫으로 남겨두자.



II. 고대유대교의 기초: 페르시아 시대

 

1. 포로기 이후 ‘유다 공동체’의 성격: 독립종교의 길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의 끝자락에서 유대교의 출현은 바빌론 포로로 인한 이스라엘의 국가체제의 완전한 멸망과 그것을 넘어선 ‘회복’이라는 역사적 전환기에 일어나게 되었다. 멸망은 정치적 차원과 동시에 종교적 차원을 갖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국가의 공식부문인 통치체계와 제의제도의 파멸을 의미했고, 비공식적으로는 가족과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삶의 방법(‘how to live')의 이 그 멸망의 내용이었다.


한 사회의 ‘멸망과 회복’의 전환기에는 늘 그 역사적 공백을 향한 새로운 흐름들의 유입이 가시화 되고, 그것을 주도하는 사회학적 그룹이 부각되게 된다.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의 종교사에서 그것은 옛 전승이 새로운 형태나 내용으로 등장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었다. 예언과 토라, 그리고 지혜라는 이스라엘의 전승의 흐름은 이 시기에 각각의 새로운 삶의 자리를 가지고 이 ‘공백’으로 유입하게 되었다.

 

페르시아가 제국내의 각 민족의 종교의 독립성을 장려하는 정책은 초기의 대왕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포로들을 귀환시키는 정책은 제국의 서쪽 변방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요소를 잠재우기 위한 방편으로 추진되었다. 여기에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한 귀한 공동체의 재건의지는 페르시아 제국의 정부에게는 민족주의적 열망으로 보이기가 쉬었을 것이다.


포로기에 활동한 예언자들의 예언과 시너지 효과를 거두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의 이상은 구체화되는 듯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을 추구하는 대열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합류하게 되었다. 귀환은 일시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고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귀환한 사람들의 인구를 42,360명(에 2:68f; cf. 느 7:69-71)으로 본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기록은 1차 귀환(B.C.E. 538)때의 숫자만은 아니라, 당시의 귀환한 사람들 전체라고 보는 관점이 우세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어떤 독립된 정부의 건설이라는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고, 단지 ‘이방인의 지배’하의 자치권만이 주어졌다. 그러기에 그것은 독립된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현대의 ‘시오니즘’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귀환민의 지도자 스룹바벨이 다윗 가문에 속하였기에 그들을 중심으로 한 이상은 늘 ‘다윗 왕조의 회복’이라는 국가적 회복에 대한 향수와 연결되기는 어렵지 않았다. 성전건축이야 말로 그러한 회복의 비전을 부채질 하는 것이었다.

 

학개와 스가랴(1-8장)의 예언은 그러한 ‘회복’의 비전을 성전과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이상으로 대신했다. 그들이 꿈꾸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자신들만이 고대 이스라엘의 유산의 합법적 후계자라는 확신과 유일신 야웨에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한 유다 공동체의 건설이라는 목표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로기 이후 유다 공동체는 사회사적으로 포로기 이전의 왕정체제와는 다른 형태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페르시아 제국 하에서 왕정은 허락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의 지배구조는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었을까?

 

R. Albertz는 포로기 이후 유다 공동체 사이에 존재했던 여러 집단간의 정치적 관계를 기본적으로 페르시아에 충성하려는 관리들과 이집트의 세력을 얻어 페르시아로부터 독립된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던 민족주의적 집단과의 긴장관계로 서술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사역은 이 긴장관계에서 친 페르시아 정책을 팔레스타인에서 안정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유대인의 자치 기구를 페르시아식 지방 행정조직으로 마련하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자치정부는 귀환과 사회통합과정에서 만들어진 씨족 집단(tAba-tyb 스 2:59=느 7:61 cf. 느 4:7 tAxpvm)에 따라 구성되고 있는데, 우선 평신도 계층에 속하는 족장들로서 유다의 장로들과 같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른바 ‘장로들의 회의’, 다음으로는 이들과는 다른 제사장들과 레위인, 그리고 성전 직원들로 이루어진 ‘제사장 학교’ 집단, 마지막으로는 이 지배집단 하부에 비상시적인 ‘회중의 모임’(lhq 스 10:1,12; 느 5:7,13)이 만들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포로기 이후의 유다 사회가 ‘tAba-tyb’라는 가족 단위 개념이 귀환 공동체의 핵심적 사회단위가 된다는 것에는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이것은 유대교의 모체가 된 페르시아 시대의 유다 공동체가 본질적으로 씨족 관념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R. Albertz는 이 ‘씨족’으로서의 성격이 포로기 전후의 유다 공동체의 사회사적 성격을 각인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을 정확히 보고 있다.


그것은 유다 공동체가 이스라엘의 지파공동체의 ‘하나의’ 구성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자신들의 야웨 신앙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함으로 전체 이스라엘의 유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무엇보다도 역대기 사가의 관점이었다. 이것은 이후 고대 유대교가 ‘종파화’된 성격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왜냐하면 유다 공동체가 이스라엘의 땅과 전통의 계승자가 되었을 때 ‘참다운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신앙고백적인 성격에 의해 결정되는 최초의 역사적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소유권 주장은 이것의 한 예가 된다. 포로기 이후의 구약성서의 문헌들은 유다의 멸망이후 팔레스타인에 남은 자들인 “그 땅의 백성”(#ra-~[ mwld=#rah ma)과 귀환공동체인 “유다백성” (;"ynb hldg"=“hdWhy-~[”)간의 종교적 사회적 대립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보여준다. 그 가운데서도 땅의 소유권 문제에 대한 갈등은 가장 첨예한 양태로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유다 귀환 공동체가 야웨신앙을 지켜온 자들이고, 그 땅에 남은 자들은 야웨 신앙을 저버린 자라는 신학적 주장에 기초하고 있다. 유다 귀환 공동체의 땅의 소유권에 대한 주장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유배에 대한 신학적인 재해석에 근거하고 있다. 즉, 유다의 죄악으로 인해 그 땅이 오염되었고(렘 3:1-5; 16:18; 23:15 cf. 창 15:16), 지금은 이방인들에 의해 더럽혀져 있다는 것이다: 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로 명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에스라 9:11) 그러므로 유다 백성의 바빌론으로의 유배는 그 백성을 정결하게 유지하기 위한 야웨의 한시적 심판과 동시에 구원행위가 된다.


야웨는 그들을 “뽑아”내었으나, 이제 돌이켜 각 사람을 그 고유의 기업과 땅으로 보내 다시 옮기어 심고자 하신다.(렘 12:15; 30:3) 여기에서 귀환공동체가 팔레스타인 공동체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반목이 초래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염된 땅에 거주하며 야웨신앙을 알지 못하는 부정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레미야에 의하면 “저들은 비천하고 어리석을 뿐 아니라, 야웨의 길, 야웨의 법을 알지 못한다.”(렘 5,4 cf. 12,14-15; 24,8-10 사 42,24f) 그것은 팔레스타인에 남은 사람들의 신앙이 혼합주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슥 6,21f; cf. 겔 11,15-18 단 11,31; 12,11)


이러한 갈등은 성전재건에서 고조된다. 에스라 4,1-4에서는 성전재건을 중심으로 한 귀환공동체와 팔레스타인 공동체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들”은 앗시리아에 의해 북왕국이 멸망한 이후 자신들도 이곳에 정착하여 지금까지도 야웨를 예배하였다고 한다: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스 4:2) 그러나 귀환공동체는 그들이 성전 건설에는 참여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의 국면에서 예언자들은 야웨의 우주적 통치를 성전 재건과 결합함으로써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이라는 민족주의적인 사회통합의 이념을 다시금 부흥시키려하였다.

 

특히 학개와 스가랴의 노력은 한편으로는 당시 제사장 계층의 이익과, 페르시아의 후원을 받고 있는 지배층들을 아우를 뿐만 아니라, 국가 회복의 실패로 희망을 잃은 대중들에게도 유토피아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성전건축과 연결 지음으로써(학 1:2-11; 2:3-9; 슥 4:6-10) 어느 정도의 열매를 거두었고 성전은 완공되었다(약 BCE 520-515).

 

결국, 귀환공동체의 야웨신앙과 회복된 성전은 이후 나타날 ‘고대유대교’라는 이스라엘 종교의 새로운 형태를 결정짓게 된다. 이것은 하나의 씨족으로서 귀환한 이 공동체가 자신들이 신앙을 통하여 고대 이스라엘의 후예라는 정통성을 획득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이제 ‘유다 공동체’로 자신을 정의하게 되고, 팔레스타인에서 페르시아 제국하의 자치권을 행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유다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을 단순히 인종학적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F. Cr?semann의 견해에 동의할 수는 없다.

 

귀환 공동체가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하도록 했던 것은(스 10장) 단지 ‘참다운 이스라엘인’이 되기 위한 혈통적 순수성을 추구하는 것으로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포로기 이전에는 족내혼(族內婚)이 일반적이었으나, 그렇다고 족외혼(族外婚)이나 외국인 여자와의 결혼이 전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명기 7:1-4에 나오는 가나안 일곱 부족과 23:2-9절에 나오는 암몬과 모압 부족을 제외하면, 결혼을 통한 이스라엘로의 편입은 일반적으로 열려져 있었다.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의 그러한 혈통적 자기정체성의 추구는 오직 마카비 시대의 혈통주의적 민족주의의 등에서 가장 고조 되지만, 그 이후 유대교에 자리 잡은 개종(改宗)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무너지는데, 개종은 이방인에게 이스라엘인의 정체성을 획득하는 제도화된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의 이방인과의 혼인 금지는 주로 범세계적인 문화에 다시 젖어든 제사장 귀족 계급들에 대한 개혁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역대기 사가(대상 1-9장)와 에스라(2, 8, 10장)와 느헤미야(7, 12장)에게 족보가 중요했던 것은 그들이 “거룩한 자손”(에스라 9:2)으로 자신들을 “이스라엘”의 종교적 유산의 수용과 새로운 해석의 주체로 내세우는 것이었지, 결코 혈통적인 정체성의 구현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포로기 이전처럼 국가적 정체성으로 유지될 수 없었고, 오직 종교적 정체성으로서만 유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외세 치하의 독립 종교로서의 길이야 말로 포로기 이후 유대교의 현실적인 선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R. Albertz가 S. Talmon의 견해를 인용하며, 헬레니즘 시대에 일어난 유대교의 종파의 형성의 기원을 ‘유다 공동체’가 이루어 낸 이 ‘신앙고백적 지위’와 연관시키는 것 역시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포로기 이후의 사회사에 각인된 그러한 신학적 투쟁의 산물이야말로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하나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페르시아 시대의 이스라엘 종교가 헬레니즘 시대의 ‘고대유대교’로 형성되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2. 고대유대교의 틀: 성전과 토라


성전의 재건으로 이스라엘의 국가적 회복은 단지 상징적으로만 성취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성전예배는 국가의 공식부문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종교적 삶의 한 복판에 자리하게 되었다. 성전은 속죄가 이루어지고, 공동체에 속한 백성들의 부정(不淨)이 실제적으로 제거되어 이스라엘의 회복이 구현되는 거룩한 곳으로 확고히 서게 된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도 성도(聖都)로서 이 모든 종교적 상징의 중심에 존재한다. 성전의 이러한 외연적 확장은 “거룩한 땅”에까지 이른다.

 

 귀환공동체는 야웨가 이스라엘의 조상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우상숭배와 음행의 죄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야웨의 이스라엘 회복은 거룩한 땅의 회복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레 18:24-28 cf. 창 15:16 신 9:5). 성전의 지성소에서 이스라엘의 땅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거룩한 것과 부정한 한 것과의 ‘분리’에 대한 유대교적 신앙의 중심에는 포로기 이후에 이루어진 제사문서의 신학이 배후에 있었던 것이다.


 포로기 이후 제사문서에 나타나는 이른바 속죄 공식이 나타나는데 -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레 4:20. 26. 31. 35; 5:10. 13. 16. 18; 6:7 ... )- 이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의 이상에 담겨진 거룩한 구별을 표현하는 종교적 문법이 된다. 이 성전 예배와 속죄를 담당하는 계층으로서 제사장과 성전 관리들이 존재했다. 페르시아 시대에 그들은 성전 자체보다도 그것이 매개하는 국가적 공식부문인 성전 제의를 통해 귀환 공동체의 야웨신앙을 ‘유다 공동체’의 삶의 저변으로 확대함으로써, 고대유대교의 규범적인 틀을 형성해 나갈 수 있었다.

 

성전 재건 이후 통합된 ‘유다 공동체’의 종교적 실천과 사회적 규범은 무엇보다도 귀환공동체의 야웨 신앙을 ‘표준’(canon)으로 세우는 것이었다. 에스라를 중심으로 귀환공동체가 주도한 팔레스타인에서의 개혁 프로그램은 이 ‘표준’에 의해 진행된다. 에스라가 공동체에서 모세의 율법의 책인 ‘토라’(hrth)을 읽어 선포한 것은(느 8:2) 귀환 이후 이스라엘 백성의 삶 전체를 규정했던 토라를 형성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토라의 형성은 단지 귀환 공동체의 신학적인 작업만이 아니라, 사회사적으로 구약성서의 정경화 과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E. Blum에 의하면 에스라의 개혁 프로그램은 페르시아 중앙정부가 실행한 제국내의 지방 자치정부들에 대한 통제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한 바, 제국내의 피통치 민족들의 삶을 규정하는 규범적인 본문들의 형성 작업과 연관되었을 것이고, 그것이 구약성서의 정경화 작업의 첫걸음이었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의 이 정경화 작업은 이후 ‘참다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의 기초 문서가 되는데, Albertz는 이 정경화 작업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집단은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지지 않은 유다 공동체의 지도자 계급이었던, “장로 협의회와 제사장 학교”였다고 규정하며, 제사장 문서가 이들의 신학적 기초를 놓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서의 정경화 작업이 포로기 직후 ‘이스라엘의 회복’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국가적 공식부문의 또 다른 측면이었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정경화 작업에 기여한 그룹들의 신학을 전승사적으로 다루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경화의 핵심은 오경(Pentateuch)을 주축으로, 성전재건이 이루어진 515년경부터 ‘하나님의 율법’을 맡은 제사장과 평신도 지도자 계층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율법의 서기관이며 제사장인 에스라”(스 7:21. cf. 7:11)는 그러한 인물에 가장 잘 부합된다. 이 “모세의 율법”은 이미 포로기 이전에 성문화 되었다.


요시아의 시대에 성전에서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이 발견되었고(대하 34:14), 그것은 “모세의 책들”(대하 25:4)로서 인정되어 있었다. ‘토라’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하였고, 에스라는 이러한 성문화된 토라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토라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프로그램의 또 다른 프로그램인 공식적인 정경의 확립과정에서 성전과 함께 고대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틀로 자리매김 되었다.

 

구약 이스라엘의 종교는 포로기 이후 고대유대교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매우 괄목할만한 변화를 경험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시초는 이미 포로기에 이방인을 통한 이스라엘의 역사 패망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성을 신학화한 이른바 ‘신명기 신학’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스라엘은 야웨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북왕국과 남왕국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선언이다.


신명기 신학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비전은 제시되고 있지 않기에 하나님의 계약의 유효성과 선택에 대한 질문은 중요하였다. 하나님이 그의 선택한 백성을 버리심으로 자신의 은총을 폐기하셨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가 이 세계의 하나님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제 ‘선택된 백성’의 삶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유일한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그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신념, 그리고 종교의 개인화라는 길을 추구하게 된다.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은 이제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해 나간다. 그들에게 야웨 하나님은 “유일하신 한 분”이시다. 그는 민족주의와 보편주의의 긴장 속에서 이제 유일한 한 공동체 속에서 한 민족사를 넘어 세계를 통치하시는 경륜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 다만 연단하실 뿐이다. 그의 은총은 자신이 정하신 도구인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유지하신다.

 

속죄와 성전(聖殿)은 하나님의 용서와 종말론적 임재로서의 그의 통치를 구현하는 가장 상징적 언어이다. 이스라엘에 제사장이 그것을 매개하듯이, 세계에 대하여 이스라엘은 그의 구원을 매개한다. 이제 이스라엘은 명실상부한 ‘거룩한 민족’으로 서게 된 것이다. 이제 ‘참다운 이스라엘’의 삶은 율법을 따르는 삶이다. 율법은 이제 더 이상 하나의 법과 규범이 아니라, 종말의 질서로 살아가는 온 이스라엘의 유일한 삶의 형태로서의 ‘토라’이다. 이 삶의 형태는 그대로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의 예표가 되었던 것이다.



3. 고대유대교의 종교적 현상


역사적으로 페르시아 시대에서 헬레니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즉 이스라엘의 종교사적으로는 고대유대교가 형성되는 기틀을 제공한 포로기 이후의 괄목할 만한 변화의 특징을 한편으로는 신학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사적으로 요약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성전 재건이후 예언자들의 활동은 위축되면서, 이스라엘의 종교사에서 예언은 어떠한 위기와 변형을 겪게 되었는가? 둘째, 포로기 이후 ‘유다 공동체’가 지향한 이스라엘의 국가적 회복이 실패로 돌아간 후, ‘종교적 회복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어떻게 ‘참다운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하였을까? 셋째, 이러한 변화의 상황이 이스라엘의 종교사에서 ‘고대유대교’의 형성을 위한 어떤 사회사적 기초를 제공하였을까?

 

이스라엘의 종교사에서 초기유대교가 형성되는 이 시기, 그러니까 페르시아 시대에서 헬레니즘 시대로 넘어가는 이 포로기 이후의 괄목할 만한 변화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문제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스라엘의 종교사에서 줄기차게 이어져 왔던 예언은 어떠한 변형을 겪게 되었던가? 둘째, 포로기 이후 유다공동체가 ‘종교적 회복’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하려 하였을까? 셋째, 그것은 초기유대교의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

 

1) 예언의 종말과 묵시의 등장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특징적인 것은 성전의 재건이후 예언 활동이 거의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에스겔을 통한 회복의 메시지는 제2이사야를 통해 계속되었다. 그리고 성전재건을 회복의 한 형태로 해석했던 학개를 통해서 계약신학으로 구약신학을 서술하려는 Bernhard W. Anderson는 그의 저작에서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종교의 변화의 한 줄기를 ‘예언에서 묵시로’ 파악하였다. 묵시는 “새로운 어법으로서의 예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묵시문학이 과연 예언으로부터 나온 것인가?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가장 큰 반론은 von Rad에 의해 제기되었다. 묵시문학의 기원은 예언이 아니라, 지혜문학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논쟁의 역사를 자세히 다룰 수는 없다. 다만 포로기 이후의 묵시문학을 깊이 다룬 배정훈 교수의 최근의 논문은 한국의 학계에서 이 문제에 대한 연구사를 가장 잘 다루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글에서는 J. Welhausen은 그의 고전적 저서, Prolegomena to the History of Ancient Israel에서 이스라엘 종교사를 포로기 전과 후로 구분하여 포로기 이후의 특징을 유대교의 형성으로 서술하며, 묵시운동을 구약의 예언서와 페르시아 문헌들의 모방으로 생각했다. 그는 문헌연구를 통해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는데, 이는 향후 묵시문학에 대한 연구의 두 가지 길을 열어놓은 것이었다. 그 하나는 묵시와 예언의 연관성이고, 다른 하나는 묵시문학을 주로 사회정치적 운동으로 규정하여 연구하는 방향에 대한 비판적 경향을 열어놓았다. 두 번째 방향은 이미 H. Gunkel이 사용한 양식비평을 통해서 개진되었는데, 그는 묵시적인 상징의 신화적인 요소가 바벨론의 갈등신화들 속에서 발견된 요소와 동일하다는 견해를 보인다.

 

Wellhausen을 뒤를 이어 묵시문학을 연구한 학자는 R. H. Charles였다. 그는 묵시문학에 대한 문헌적인 연구를 통하여 묵시현상과 그 메시지가 구약의 예언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경향은 더욱 H. H. Rowly와 D. S. Russel에게서 발전되어 나갔다. Rowly는 묵시와 예언에 있어서 동일하게 역사는 이스라엘의 신실한 자들에게 수여될 ‘새롭고 결정적인 날’을 향하고 있다는 확신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연구로 학자들은 묵시문학을 예언서 내에서 찾아보려했고, 그 열매는 대표적으로 H. Gese, Paul이나 D. Hanson과 같은 학자들을 통해서 이사야 24-27장 56-66장 스가랴 9-14장 등에서 이른바 묵시사상의 기원을 발견하게 되었다.


Hanson에 의하면 묵시문학의 기원은 예언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즉, 지혜에서 묵시문학이 나온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는 기원전 3-2세기경에 묵시문학에 지혜의 요소가 첨가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언급한 예언과 묵시 그리고 지혜의 상호연관성을 전승사적 연관으로 구체화하여 나열한 것이다. Hanson은 이사야서에서 예언이 묵시로 변형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전통적인 예언인 이사야 1-39장과 40-55장까지의 회복의 예언과 56-66장의 묵시적 예언은 이러한 변화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사야의 두 번째 예언은 포로기 이후에 야웨의 통치하심에 대한 우주적 환상을 정치적 현실에서 해석하려 하지만, 이러한 낙관주의적 예언은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고, 도리어 귀환공동체 내에서 그러한 예언자들이 억압을 받는 현실로 인하여 결국 비관적인 역사에 대한 인식을 초래한다. 이것은 ‘원묵시’(protoapocalyptic)의 형태로서 이사야의 세 번째 예언과 같은 묵시적 종말론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스가랴 9-14장 역시 그러한 전승사적 고리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R. Albertz는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의 국가적 회복 예언에 대한 실패가 예언의 형태를 변형시켜, 예언을 ‘종말론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는 이 예언의 종말론적 변형이 헬레니즘 시대에 번성하게 된 묵시문학의 뿌리가 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이것은 묵시문학의 기원을 포로기 시대를 넘어 포로기 이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려는 Paul D. Hanson의 견해를 거칠게 반박하는 것이기도 하다.

 

R. Albertz는 묵시의 기원을 예언의 ‘종말론화’와 연결시키는 것을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즉 종말론적 예언과 묵시사상의 삶의 자리를 사회학적으로 동일시하거나 연속성을 갖는 것으로 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승사적으로 가장 후대의 예언이라 할 수 있는 슥 9-14장이나 사 24-27장과 같은 이른바 ‘후기 예언’은 3세기 말경에 비로소 정경으로 완성되었지만, 가장 초기의 묵시라고 볼 수 있는 에녹1서(에디오피아의 에녹서)의 경우 3세기 중엽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묵시적 성격이 강한 다니엘서의 아람어 부분도 이미 3세기 말에 완성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종말론적인 예언 전체를 4세기 이전으로 돌림으로써 초기 묵시적 작품들이 그것을 이어가고 있다는 Hanson의 견해를 반박하며, ‘후기 예언’과 초기의 묵시가 동시대적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더 나아가 Albertz는 초기의 예언과 묵시의 배후에도 서로 상이한 사회학적 집단이 존재했던 것으로 본다. 즉 ‘후기 예언’은 국가 회복이 좌절되고 사회경제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사회적 하층민들에게 접촉함으로써 이들에게서 종말론화 되어갔지만, 이것과는 다르게 초기 묵시는 상층부의 지식인들, 그중에서도 제사장 계층이라기보다는 서기관 계층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쟁은 전적으로 본문의 전승사에 의존하고 있는 것인데, 주지하듯이 이것은 연대기적으로 학자마다 매우 큰 편차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예언활동이 그치기 시작했다는 것과 전승사적으로 묵시라는 새로운 형태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예언과 묵시의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역사에서 이 새로운 운동의 흐름이 왜 일어났고, 어떻게 발전하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K. Koch의 통찰은 중요하다. 그는 포로기 이후 역사에서 예언 활동이 종말을 고하게 된 이유 중 하나를 페르시아 시대 이스라엘은 더 이상 정치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종교적인 ‘예언’의 행동이 단순히 종교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결과를 초래하였고, 예언의 삶의 자리는 정치적인 현실이었다는 그의 관점에 기초한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의 예언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회복에 집중되고 있었으나,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이 더 이상 독립적인 정부로 존속할 수 없었고 하나의 독립 종교로의 길을 가게 됨으로, 예언 전승이 자신의 삶의 자리를 잃었다는 견해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예언활동은 단순히 종교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만이 아니라, 정치 현실에 삶의 자리를 두고 있었다.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에도 예언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복’에 집중되고 있을 만큼 정치적이었다. 그러나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이 독립적인 국가로 존속할 수 없었고, 더 나아가 하나의 독립 종교로의 길을 가게 됨으로, 예언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삶의 자리를 정치적인 현실에 둘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예언은 세계와 이스라엘의 정치적 사회적인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현존 질서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종교적 비전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현실을 지향하게 된다. 그러나 묵시는 그러한 정치적 현실과 멀어지는 경향을 가진다. 묵시는 그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야웨의 주권에 대한 우주적인 상징을 통해서 현실을 이해한다.


다시 말해서, 예언은 역사를 지향하지만, 묵시는 신화를 통해서 역사를 함축적 현실로 파악한다. 그래서 묵시는 탈역사화되지는 않지만, 역사를 넘어서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상호간의 현상을 예언의 ‘메타화’(meta化) 현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예언이나 묵시가 모두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루지만, 예언이 그것의 역사적 회복을 지향한다면, 묵시는 ‘야웨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론적 회복으로 함축되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의 국가적 회복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그것의 전승사적 상관성과 독립적으로 묵시는 예언의 새로운 언어요, “새로운 어법으로서의 예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 예언자들과 묵시가들의 기능은 차별화된다. 즉, 예언자들은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탁의 ‘대언자’이었지만, 이제 묵시가는 역사를 넘어서는 신화적 상징에 대한 ‘해석자’들이다. 전통적인 예언자들의 기능은 “야웨가 말씀하셨다”라는 야웨의 신탁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묵시의 특징은 그것을 받는 자들에게 아직 닫혀 있다는 것이다.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사 29:11).


묵시가의 기능은 오히려 그것을 ‘닫는’ 것으로까지 표현된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12:4). 이것으로 묵시가는 신적인 지혜를 가진 자로 제한된다. 우리는 이것이 고대 이스라엘 종교가 범세계적으로 변형되어 가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대표적인 특징인 예언의 기능이 이와 같이 변형되고 있는 것은, 분명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변화 가운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를 특징짓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이러한 관점으로 우리는 묵시의 기원을 지혜전승과 연결시키고자하는 흐름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Von Rad에 의하면 묵시문학을 예언전통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데,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묵시와 예언전승이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묵시문학은 역사에 대한 결정론적 이해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한 ‘인식의지’는 지혜전통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예언은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야웨에 대한 고백전승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Von Rad의 주장은 그 후 H. P. Mueller에 의해 수정될 수 있었는데, 그는 지혜전승의 흐름을 잠언적인 지혜와 점술적인 지혜(mantic wisdom)로 구분하여, 묵시를 점술적 지혜와 연관시켰다(단 2, 4, 5장 사 19:11-13, 44:25 등). James C. VanderKam은 이 점술적 지혜는 바빌로니아의 지혜와 유사한 것으로 유대의 묵시문헌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제1에녹서 1-36장과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분명 이 묵시저작은 예언전승보다는 우주론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학자들은 제1에녹서 1-36장이 다니엘서와의 연관성을 부각시킨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니엘서가 내포하고 있는 묵시의 두가지 현상, 즉 예언과 지혜의 요소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묵시의 기원을 예언, 혹은 지혜로 양분된 시각을 교정할 필요가 있다. 묵시문학이 예언적인 요소와 지혜문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 자체로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종교의 역동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관점으로 다음 장에서 구체적인 문헌들을 다루며 지혜와 묵시의 성격을 규명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전승의 역동적 진화현상은 변화하고 있는 세계를 단지 역사 안에서 뿐만 아니라 신화 안에서 파악하고, 이스라엘의 구원자 야웨를 동시에 우주론적 계획을 지배하는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은 이제 이 역사 안에서 만이 아니라, 역사 밖으로 이전되는 어떤 것이 된다.

예언자들은 더 이상 이 땅의 일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신탁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그들은 좀 더 환상적인(visionary) 상징 언어로 보편적인 구원과 세계질서 안에서 현실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상징 언어는 묵시가들에 의해서만 해독될 수 있는 암호(code)화 되어 있다. 비록 그들이 한 개인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들 배후에는 이 세상에서는 이룰 수 없는 묵시로 살아가는 어떤 동질의 집단이 존재한다. 그들의 묵시는 현실과의 긴장(구심력과 원심력)에서 지속적으로 종말을 향해 뻗어나간다.

 

2) 토라와 지혜의 만남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내적인 변화를 파악하는 또 다른 전승은 토라와 지혜이다. 앞에서 설명한대로 성전 재건 이후 ‘유다 공동체’의 목표는 귀환공동체의 야웨 신앙을 ‘표준으로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표준’은 단지 국가적 차원에서만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에서 구현하는 것으로 집중되었다. 그것이 토라의 연구이다. 토라의 연구는 이스라엘 땅에서의 성전 예배가 가능하지 않았던 유배지에서, 그것에 대한 대안이 되는 종교적 실천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토라의 연구가 성전 자체의 기능을 대치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제2성전의 파멸이후에나 가능했지만, 회당을 중심으로 한 토라 연구는 포로기 이후 유대교적 삶을 구현하는 매우 중요하고도 현실적인 수단이 되었다.


토라는 성전 예배 자체를 규정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성전 제의가 추구하는 이스라엘의 삶의 정결을 구체화하는 삶의 규범이기도 했었다. 그러기에 이제 토라는 이스라엘의 삶의 전통적인 방법을 표현하는 지혜와 만나게 된다. 이렇게 성전과 토라는 고대 이스라엘의 유산을 물려받은 ‘참다운 이스라엘’의 민족적 정체성을 종교적으로 구현하는 핵심에 서게 된다. 이제 이스라엘 종교는 새로운 민족종교로의 길을 간다. 이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정치적이 독립이 아닌 종교적 독립으로 방향을 전환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토라는 이제 모세의 성문율법만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조상들의 삶의 경험인 학가다와 그것을 준행하는 방법을 제시한 토라의 해석인 할라카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토라는 ‘율법의 가르침’ 전체를 지칭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후로 유대교의 모든 성전에서의 하나님 예배와 의식, 그리고 개인의 삶을 규정하는 살아있는 실체가 되었다. 이것은 귀환 공동체의 삶의 기초를 토라위에 놓아, 이른바 ‘율법의 백성’을 만들어 가는 것이었다. 토라가 이스라엘의 삶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에 있었다면,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 나갈 것인가’라는 질문은 토라의 올바른 실천과 연관되었다.

 

M. Noth는 이스라엘의 지혜전승의 흐름을 제도적 차원의 다양성에 따라 “씨족 지혜,” “궁중 지혜,” 그리고 “율법 지혜”로 분류한다. 이들 지혜의 삶의 자리는 각각 가족과 부족, 국가, 그리고 포로기로부터 본격화 된 토라 해석 및 적용이었으며, 그 전승자들은 부모 와 장로, 국가 서기관, 그리고 율법 서기관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 서기관의 등장은 시기적으로 포로기 직전의 신명기적 서기관에 기원을 두었으나, 에스라나 느헤미야 시대에 귀환공동체의 이스라엘의 회복 프로그램과 연관될 것이다.

 

 M. Noth는 이들 신명기적 서기관들은 지혜전승에 대해 호감을 갖는 자들로서 지혜와 토라를 동등하게 다루려는 경향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이 경향은 지혜의 삶의 자리와 전승자들을 정치적 서기관들에게서 종교적 법률적 서기관들에게로 이전시키는 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국가가 임명한 공식부문에서 율법을 다루는 서기관들이 아니라, 새로운 종교적(유대교적) 틀 속에서 토라를 다루는 이른바 “완성된 토라 서기관”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토라와 지혜의 만남을 율법서 자체에서 발견하게 된다:

“너희는 [그것들을]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신 4:6). 좀 더 후기에 속하는 구약의 시편들 가운데 지혜적인 언어와 사상을 담은 ‘율법시편’들(1장 119장)에서도 율법과 지혜가 연관되고 있다: “내가 주의 계명을 믿었사오니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시 119:66).


더 나아가 지혜는 세계의 모든 영역에서 매우 경험적인 사색을 통하여 한 개인이 세계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를 추구하는 삶의 방식의 문제와 직결되었다. 그래서 지혜는 율법이나 예언과 같은 전통적인 하나님의 계시와는 다른 형태로 사회적 관계와 정치질서, 그리고 가정 등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 관계되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집단적 정체성에 대한 회의와 ‘개인’의 부각, 이유 없는 고난에 대한 질문, 인간의 궁극적 한계와 운명에 대한 질문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을 아우르게 된다. 이제 지혜는 토라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유산을 전수하려는 모든 유대교적 삶과 연관된다.


우리는 다음 절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벤 시라서에서 바로 이러한 토라와 지혜의 합류된 전승의 최고봉을 보게 된다. 벤 시라는 그의 선조들과 같이 토라의 중심에 서 있는 ‘하나님 경외’를 지혜의 본질로 이해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지혜를 갈망한다면 계명을 지키라. 주께서 그것을 네게 주셨다.”(벤 시라 1:26 cf. 1:16; 19:20; 21:11: 23:27) 말하자면 그는 기나긴 토라의 전통을 지혜자로서 수용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3) 이스라엘 종교의 새로운 길  

가. 개인적 차원의 토라 경건

앞에서 설명했듯이 포로기 이후 정치적 단위로서의 국가 이스라엘은 유대인에게 큰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었다.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공동체는 실제로 지파(tribes)단위가 아닌 씨족(clans)으로서 돌아왔다. 지파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의 국가적 형태는 포로기 이후 파괴되었다. 이것은 이미 북왕국의 멸망이후에 시작되었고, 귀환 후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도했던 “유다인” 공동체의 특성에서 가시화된다.


외국 왕의 통치하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국가가 아닌, 종교로서 그 정체성으로서만 유지 될 수 있었던 포로기 이후의 상황에서 유대교의 현실적인 선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다인 공동체가 자신들을 “이스라엘”의 종교적 유산의 수용과 새로운 해석의 주체로 내세웠다 할지라도, 야웨 하나님의 계약의 파트너로서의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결코 혈통적 근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었다(앞의 II. 1. 1)참조)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토라에 대한 전적인 순종이야말로 “참 이스라엘”이 되는 유일한 척도가 되었다. 제2성전기 후기로 갈수록 토라의 실천이 점점 더 강화된 이른바 ‘토라 경건’의 배경에는, 창조주 야웨가 이방인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을 희망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세계관과 신앙이 자리하고 있었다.

 

종교적 무게 중심이 ‘토라 경건’으로 이전되면서, 고대 이스라엘 종교는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유대교적 신앙은 성전예배이외에도 토라의 연구, 안식일의 준수, 기도와 주기적인 금식을 통하여 실천되어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대교적 세계관과 신앙의 중심인 토라에 대한 실천과 연구는 이 모든 것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토라의 연구는 모든 유대인들의 삶에서 야웨를 체험하는 경건의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f).

 

이 율법 연구에 헌신된 사람들은 물론 제사장이다. 그러나 점차 지혜의 전수자였던 서기관들이 전문적으로 토라연구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것이 토라와 지혜가 밀접하게 연관된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로써 유대교에서 서기관이라는 제도화된 토라연구가들은 본격적인 활동과 기능을 하게 된다. 이들은 상류층의 지혜와 경건을 제도화된 영역에서 발전시킬 수 있을만한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시 119:90f).


그러나 그들은 상류층이라기보다는 중류층에 속한 자들로서 개인적인 토라경건을 통해 사회적인 하층민들의 경건과 융합함으로써 사회적인 통합의 기능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실천해야할 모든 개개의 유대인들에게 길과 방법을 제시하는 제도화된 기능인이었다. 그들 자신과 개개의 유대인들 모두는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종교적 개인’으로 서 있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시 119:15f).

 

그러나 이러한 ‘토라경건’이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에 서 있는 희생제사나 하나님의 선택과 그 갱신, 그리고 하나님의 계약의 영원성에 대한 신념을 대치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국가로서 존립했던 포로기 이전의 이른바 ‘공식 부문’이 폐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것은 유대교라는 새로운 종교적 공동체 의식 속에서 더욱 강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지 포로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이스라엘 종교의 비공식 부문인 개인 경건이 더욱 활성화 되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개인경건의 요소는 포로기 이후 지혜문학의 변화의 내용으로 부각된 이른바 ‘신학화된 지혜’와 관련이 있다. 지혜가 제시하는 삶의 형태는 토라가 가르쳐주는 종교적이고 도덕적 요구, 즉 ‘하나님 경외’로 집약된다. 이것은 변화된 ‘세계에의 순응’이라는 개인 처한 삶의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지혜로운 삶의 집약이다. 왜냐하면 지혜는 단순히 토라와 연관 될 뿐만 아니라, 이제 창조된 세계의 질서를 ‘이해’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대 유대교에서 “창조 지혜”의 형성과정에서 이러한 지혜의 변천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일찍이 Westermann은 창세기 1:1-2:4에 대한 그의 주석에서 사제학파가 가지고 있는 창조세계에 대한 “학적”이해를 발견하려 하였다. 이른바 종(種)과 유(類)를 통한 자연에 대한 분석적 사고의 맹아가 창조의 날의 분류에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전통에서는 매우 낯선 이러한 합리적 이성의 맹아를 욥기와 창조시편(특히 104장)들 속에서 발견한다. 시편 19장은 이러한 창조 지혜와 토라가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가를 가장 분명히 드러내어 준다. 시인은 하늘과 태양의 현상들 배후에 있는 “지식”이 어떻게 “세계 끝가지” 이해가능하게 전달되는가를 노래한다(19:2-4). 그리고 시의 2번째 부분에서 이렇게 선포한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7f). 이것은 “토라를 준수함으로써 얻어지는 삶의 질서는 전체로서 하나님의 질서에 근거한 창조질서와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창조 지혜”가 추구하는 우주의 질서와 잠언의 지혜가 추구하는 사회적 안정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왕에게 필요한 정의의 수호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보호는 야웨의 법을 따르는 사회적 규범이 되고(잠 29:4, 14; 29,7), 탐심에 대한 경고(23:20f; 5:8), 사회적 성실(6:6-11), 가족의 지속(5:18-20)은 교훈의 중요한 내용이 되고, 아비와 어미는 이것을 자녀에게 훈계하여야 한다(23: 13f, 22). 지혜는 결국 토라를 통하여 개인을 종교적 도덕적 요구에 세운다. 욥기 역시 이러한 종교적 합리적 사색을 회의주로 치우치지도 않고, 인과응보라는 이스라엘의 집단적 사고에 머물지 않고, 비평적이면서 개인적인 사색이 주를 이룬다.

 

이렇게 보면 개인적인 “토라 경건”은 이스라엘의 종교의 공식부문이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를 더욱 포괄적으로 맺어주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시 119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시편은 19편과 같은 환경에서 자라난 것으로 생각하는데, 언어나 주제에 있어서 같은 범주에 있다고 생각된다.


이 시편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토라 역시 개인이 신뢰할 만한 것이라는 토라신앙을 발전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그것이 하나님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정초하는 핵심이기 때문이었다: “여호와여 주의 규례들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 (시 119:149). 토라가 살아있는 실존으로 인식되고, 그것에 대한 열망과 경외심은 바로 그러한 ‘토라 경건’을 전제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밤과 낮으로 그것을 묵상하며(997, 164. 147f절) 연구(45, 94절)하고 이해하고(79, 125, 152절) 배워야(7, 71, 73절) 하는 것이었다. 이제 개인적인 모든 관심과 삶의 길은 토라가 지시하는 삶의 길과 일치해야만 한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의 도(길)를 내게 보여주소서, 그리하면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119: 33. cf. 119: 27. 32-35).

 

나. 종교적 리더십의 변화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종교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신정통치의 강화이다. 그것은 정치적 현실로는 가능하지 않은 하나님의 통치를 우주적 구원의 임재로 이해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예언에서 묵시로의 변화에 담겨진 것인데, 이것의 가시적 제도화가 급속히 강화되어 이른바 제사장적 신정통치로 정립된다. 고대 이스라엘 종교를 이끌었던 왕, 예언자, 제사장, 그리고 현자(賢者)이라는 주요한 기능은 포로기 이후 고대 유대교의 형성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변형을 겪는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앞에서 설명한 종교의 내적인 변화에 기인한다. 그 내적인 변화의 요체는 전승이지만, 외적인 변화는 그 전승의 담지자이 살았던 사회학적 삶의 자리의 변화로 제도화된다.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에서 예언자에게는 역사 속에 계시하는 하나님 신탁의 전달이, 제사장에게는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 그리고 현자에게는 그러한 계시의 실천 방법을 전달하는 기능이 요청되었다. 그러나 유대교의 형성과정에서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지배체제가 확립해 나간다. 그들의 기능은 점점 성전업무를 중심으로 되었고, 경제적 정치적 관료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이들은 야웨를 섬기는 기능에서 이제 백성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반면 예언자들은 점차 현실에서 유리되어, 예언 자체가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에 매여 있지 않고, 세계의 모든 통치자들을 대상으로 한 하나님의 보편적 통치와 구원을 꿈꾼다.

 

이러한 사회적 삶의 자리의 급격한 변화에 대하여 Hanson은, 묵시의 담당자들이었던 예언자들이 처하게 된 혹독한 정치적 현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포로기 이후의 예언자들은 이미 레위지파와의 성전 주도권 경쟁에서 승리한 사독계열의 제사장들에 의해 성전 예배에서 배제되어,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의 회복의 프로그램에서 사회적으로 아무런 지위를 가지지 못한 채 묵시적 집단으로 밀려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175B.C.E. 헬레니즘의 과격파 메넬라오스가 비합법 대사제로 다스리던 때와 “불경한 대사제”(요나단?)이 다스리던 때를 제외한다면 예수시대와 유대전쟁까지 제사장 반열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어떤 형식으로든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의 다수당이었던 사두개파와 관련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예언자들은 현재는 악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그 질서는 심판 앞에 서 있고, 그 심판 너머 의로운 자들을 위한 새 세계가 준비되고 있다는 묵시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심판으로 분절된 두 시대(aeon) 가운데, 현재의 악의 세력은 다가 올 하나님의 필연적인 승리의 압박아래 놓여있다. 그 때는 멀지 않다.


이 세대에 있는 의로운 종이요 고난 받는 종(사 63; 65장; 53장)은 악에게 굴복하지 않는 신실한 자들이다. 구약성서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죽은 자의 부활(단 12:2)에 대한 신앙은 이러한 의로운 자의 순교라는 맥락가운데서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묵시문학적 ‘프로그램’은 필연적으로 이 묵시를 받은 그룹을 구원받은 자들로 인식하게 한다.

 

이로써 이스라엘 종교의 핵심적 기능이요 특징이었던 예언자와 왕의 긴장은 제사장적 종교 안에서 해소되어간다. 예언은 묵시로, 이스라엘의 삶은 토라에 의해 개인화된 경건을 추구하게 되고, 왕의 통치는 종교 공동체의 이상을 상징화하는 제사장적 신정통치로 대치된다. 이스라엘의 삶은 이제 이 토라와 성전의 종교적 상징의 조합 내에서 종말의 통치로 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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