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의 로마 제국의 정치

 

1. 아우구스투스(주전 2-주후 14년; 눅 2:1)
시이저는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한 후 독재 정치를 펴다가 갑자기 죽임을 당했다(주전 44년).

그리고 그 뒤에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여왕과 함께)와 옥타비아누스가 정권을 놓고 다투다가

결국 옥타비아누스가 승리를 하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권력을 장악 한 후에 자신에게 신의 칭호인 아우구스투스란 칭호를 붙였다.

그는 전쟁을 중지하고 세계 평화를 지향하는 정책을 펴서 온 제국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수많은 건축을 했으며 특히 곳곳마다 도로를 건설했다.

그리고 내적인 개혁도 감행해서 용기와 정의, 그리고 도덕과 교육을 진흥시키려 하였다.

이때에 로마는 윤리적으로 크게 부패해 있었다(롬 1;18-32)  

2. 티베리우스(14-27년; 눅 3:1)

아우구스투스가 14년에 76세의 나이로 죽게되자,

그의 양자로서 56세의 장군이며 정치가였던 티베리우스가 그 뒤를 이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질서 있는 행정을 계속 진행하였다.

이때에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26-36년), 세례 요한이 등장하였으며(눅 3;1),

그리스도께서 유대에서 활동하다가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후에 다시 부활하셨다.    

3. 칼리굴라(37-41)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어 불과 25세의 칼리굴라가 뒤를 이었다.
그는 방종한 생활과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일로 인해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였다.

그의 주위에는 온갖 부패한 정치가들이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몰려들었다.

이때에 헤롯 아그립바 1세도 칼리굴라의 호의를 얻어 팔레스타인의 정권을 얻었다.

그는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 그의 입상을 세우려 하였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짧은기간에 많은적을 만들었고, 결국 궁중혁명으로 인해 그의 통치는 끝나게 되었다(41년).

4. 클라우디우스(41-54년; 행 11:28; 행 18:2)

친위대는 칼리굴라의 숙부였던 클라디우스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그는 정직하였으며 양심에 따라 통치하였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따라 관용으로 다스렸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폭동으로 인해 그는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행 18:2). 
 

5. 네로(54-68년; 행 25:10-12, 27:24, 딤후 4:1-17)
그러나 그의 부인 아그립피나는 그를 독살하고 그의 아들인 네로를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네로는 이때에 17세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철학자였던 세네카에 의해 그 직무가 대행되었다.

이때에 로마는 좋은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네로가 정치를 하게 되면서부터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도시를 불살랐다는 누명을 씌워서 박해하였다.
이때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누명을 쓰고 짐승의 밥이 되고, 불에 타서 죽임을 당했다.     

6. 베스파시안(68-79년; 예루살렘성 멸망)

네로가 죽게 되자 스페인에서는 갈바가, 로마에서는 오토가, 그리고 독일에서는 비텔리우스가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이 모두 황제로 추대되지 못하게 되자, 이로 인해 로마는 새로운 내란의 위험이 직면했다.

바로 이때에 팔레스타인 원정에 참여했던 베스파시안이 그의 군대에 의해 새로운 황제로 추대되었다.   

7. 티투스(79-81년):
베스파시안이 죽은 후에 황제의 자리는 그의 아들인 티투스에게 돌아갔다.  

8. 도미티안(81-96년)-황제숭배 시작-

그리고 3년 뒤에는 다시 도미티안이 새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는 황제의 권력이 절대적임을 강조하면서 자신을 신성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96년에 그는 반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9. 네르바(97-98년)

도미티안의 뒤를 이은 황제는 네르바였다. 그는 스토아 사상에 의거하여 통치하려고 했다.

그는 스토아 정신을 따라 가장 선한 자가 통치를 하고,

그의 직무는 국민을 위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을 따랐다.

10. 트라얀(98-117년)
네르바는 장군인 트라얀을 그의 양자로 삼았으며, 그가 네르바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트라얀은 인도주의적인 정치를 하려고 노력하였다.  

11. 하드리안(118-138년; 132-135년 바르 코흐바의 폭동)

트라얀의 뒤를 이어 세계적인 군주로 알려진 하드리안이 황제가 되었다.
는 할례를 금지하였고, 예루살렘에 주피터를 위한 신전을 세우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일은 유대인의 거센 반발로 이어졌으며
바르 코흐바의 지도 아래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12. 안토니우스 피우스(138-161년), 13) 아우렐리우스(161-180년)

항상 진리를 추구하였고 철학적인 문제에 몰두하였으며, 평화를 유지하고 제국의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함.

스토아 철학에 의해 인도주의 정신을 가지고 그 이상에 충실해 보려고 노력했던 군주들은 아우렐리우스를 끝으로 단절되었다.

그 이후 로마는 항상 평화가 유지되지 못했고, 내외적인 충돌은 군사적인 개입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내적인 번영과 함께 헬라주의적-로마적 문화는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발전하였으며,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연  대

성경의 사건들

유대의  왕들

유대 총독들  

로마 황제들

주전(B. C)

 예수탄생
(주전4년?)

   헤롯 대왕
  (주전37-4년)

 

  아우구스투스
(주전27-주후14년)

주후 10년

 

    아켈라오
 (주전4-주후 6년)
   헤롯 안디바
(주전4-주후 39년)
   분봉왕 빌립
(주전4-주후 34년)

코포니우스(6-9년)

 

     20년

 

마르쿠스
암비비우스(9-12)
안니우스
루프스(12-15)

   티베리우스
   (14-37년)

     30년

세례요한, 예수사역

오순절, 바울의
회심

발레리우스
그라투스(15-26)
본디오 빌라도(26-36)

     40년

헤롯 아그립바
1세 (37-44년)

마르켈리우스
(36-37년)
마룰루스(37-41년)

   칼리굴라
   (37-41년)

     50년

바울의  1, 2, 3
차 전도 여행

헤롯 아그립바
2세 (50-53년)

쿠스피우스파두스
(44-46년)
티베리우스알렉산더
(46-48)

   글라우디오
   (41-54년)

     60년

체포, 로마
항해, 순교

 

쿠마누스(48-52년)
벨릭스(52-60년)

  네로(54-68년)

     70년

예루살렘 멸망

 

베스도(60-62)
알비누스(62-64)
게시우스플로루스
(64-66년)

갈바, 오토, 비텔리
우스(68-69년)

     80년

 

 

 

베스파시안(69-79)티투스(79-81)

     90년

 

 

 

도미티안(81-96년)

    100년

 

 

 

네르바, 트라얀
(98-117년)

 100-140년

 

 

 

하드리안(118-138)

 140-170년

 

 

 

안토니우스 피우스
(138-161)
아우렐리우스
(161-180)



 "황제 숭배에 대해서"


도미티안은 "황제숭배"를 이슈로 제기한 최초의 황제였다.
도미티안 이전에도 네로와 그의 후계자들은 교회를 크게 박해하였으나 그들의 박해는 로마에 인접한 지역에서만 시행되었다.

그러나 도미티안 황제 때에 이르러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로마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로마 공화정 말기와 로마 제국의 초기에는 사람들이 "로마의 정신"을 숭배하였다.

그들은 로마가 세계에 평화와 정의를 가져다 준 것에 대하여 감사하였다.
그런데 이 "로마의 정신"이 후에는 "황제의 인격"을 숭배하는 데로 발전했다.
이때에 로마 제국은 영국에서 유브라데, 다뉴브 강에서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는 이 광대한 영토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통합의 원리로 "가이사 숭배사상" 즉 "황제 숭배사상"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다른 민족의 종교를 완전히 없애고 황제숭배를 절대신앙으로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로마는 단지 로마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1년에 한 번씩만 황제를 위해 소량의 향을 태우고 "가이사는 주님이시다!" 라고 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렇게 한 후에 얼마든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섬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황제 숭배가 아시아 지역에 파급되면서 유일신을 섬기는 교회와 충돌이 일어났다.

기독교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주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숭배와 황제를 주로 부르는 일을 거절하였다.

기독교인들이 황제숭배를 거부하게 되자 로마 당국은 기독교인들을 불충한 백성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교회는 황제들에게 대대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으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했으며,

이러한 순교자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었다.


당시의 교회는 어느 정도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으나,

아직 로마의 질풍과 같은 대 박해를 견디기에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 당시 교회들 중에 일부 교회들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주님께 충성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교회들은 세속화와 사치와 타락에 빠져서 영적인 힘을 완전히 상실하고 무능력한 교회가 되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한쪽으로는 열심히 주님께 충성하면서도 또 다른 한 쪽으로는 세상과 거짓 종교와 타협하고

주님께 대한 사랑을 잃고 영적, 윤리적으로 타락해가고 있었다.

요한 계시록은 바로 이렇게 대 박해 앞에서 신앙을 지켜가던 1세기의 아시아 교회들에게 보낸 메시지였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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