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聖公會, Anglican communion)

 







 

세계 성공회 공동체(Anglican communion)의 문양. Anglican Rose라고도 불린다.

가운데에는 그리스어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요한 복음서 832절의 일부이다. 

 

잉글랜드 교회(Church of England)에서 기원한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이고, 종교개혁 정신이 반영된 교회로서 흔히 개신교로 분류된다. 다만 다른 개신교 교파들과 달리 겉보기에 가톨릭과 공유하는 전통이 많다는 특징이 있는데 조직적인 면으로나 교리적인 면으로나 개신교에 해당한다. 다만 교회 제도나 전례나 전통에 있어 성공회 독립 이전의 기존 가톨릭 요소를 전부 폐지한 것은 아니고, 일부 고교회파는 교리적인 측면에서도 가톨릭적인 요소를 일부 간직하고 있다.

 

성공회는 세계적으로 8천만-1억의 신자가 소속된 메이저 개신교 교단이다. 24억 정도 되는 기독교인 가운데 천주교 교인이 12억 정도로 제일 많으며, 정교회 교인이 둘째로 약 3, 그 다음이 침례교 교인과 성공회 교인으로 1억 정도다. 다시 말해, 성공회는 기독교 가운데 3-4번째로 큰 교파이며, 개신교 내에서는 침례교와 더불어 1-2위를 다투는 규모를 지닌다. 개신교 신자 수가 6억 정도이므로, 성공회의 규모는 개신교 전체 신자 중 약 15%를 차지한다.

 

영어로는 anglican church가 가장 일반적인 명칭이며, 미국이나 스코틀랜드와 같이 역사적으로 잉글랜드에 대해 반감이 있던 지역에서는 episcopal church라는 이름을 쓴다. 한자문화권인 대한민국/일본/중국에서는 '聖公會'라는 한자어를 각자의 한자 읽는 방식대로 읽는다. -공회(-公會)지 성공-(成功-)가 아니다. 성공회(聖公會)'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라는 뜻으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나오는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공교회(公會)' 및 사도신경에 나오는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거룩한() 공교회(公會)'를 한자어로 조합해서 만든 명칭이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 발간한 책자에 따르면, 성공회를 다른 교단과 연관지어 말한다면 '개혁된 가톨릭'(reformed catholic), '교황 없는 천주교', '교리에 너그러운 정교회', '가톨릭 전통을 유지하는 개신교' 등으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해외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 브릿지 교회(Bridge Church)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정교회와의 관계도 돈독한 편으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사이에서도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내에서 성공회의 포지션은 약간 미묘한 면이 있어서 기독교인들마다 인식이 제각각 조금씩 다르다.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교리상으로 완전히 개신교에 해당하기 때문에 성공회를 개신교의 한 교파/분파로 분류하는 데에 문제가 없다고 본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다른 개신교 교파의 신자들 사이에서도 성공회 교인들을 같은 개신교 신자로 받아들이는 데에 큰 무리가 없다. 전례상 옛 가톨릭식 요소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좀 특이하게 볼 수는 있으나, 성공회를 개신교가 아니라고 말하는 개신교 신자는 드물다. 천주교 신자들 중에는 형식적인 면이 닮아있기 때문에 다른 개신교보다 성공회에 친근함을 느껴서 교황이 없는 천주교 정도로 보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보수적인 천주교 신자들은 성공회를 그저 천주교 흉내내는 개신교(열교)로 본다. 교회 간 교류에 무관심한 기독교인들 중에는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 있는 독립된 종파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가톨릭 교회, 정교회, 개신교의 전통을 고루 교회의 전통으로 받아들이는 역사적 배경을 고려해 "다 필요 없고성공회는 성공회다"라고 생각하는 부류 또한 마찬가지. 그리고 성공회 신자들 중에서도 이유가 뭐든 자신들의 종파를 그렇게 정의하는(혹은 그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국내에서는 외형상 성공회와 비슷한 루터교회만 하더라도 개신교의 장자 교파라는 인식이 있지만, 성공회는 뚜렷한 포지션을 갖고 있지 못한 점이 아쉬운 점이다. 국내의 일반인들에게는 성공회가 개신교의 일파라는 인식, 천주교와 개신교가 혼합된 독립된 종파라는 인식, 천주교의 진보적인 한 갈래('이혼이 허용된 천주교' 또는 '사제의 혼인이 허락된 천주교')라는 인식 등이 뒤섞여 있는 듯하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성공회가 개신교 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크고 인지도도 높기 때문에 개신교 교단들 중 자유주의적 교단이라고 확실히 인식하고 있다.

 

영국에서 시작된 종파답게 과거 대영제국의 일원이었던 영연방 국가들에 가장 널리 퍼진 종교다. 당연히 영국에서는 주류 종교이고, 뉴질랜드와 나이지리아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기독교 교단이다. 홍콩에서도 주류 종교로 기독교 신자들 중 절반 이상이 성공회 신자들이어서, 홍콩 사람들은 기독교라고 하면 성공회를 떠올린다고 한다. 호주에서는 가톨릭 다음의 종파이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세번째로 큰 기독교 종파이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캐나다에도 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있다.

 

아래 명칭 항목에도 나오겠지만, 영연방 각국의 성공회는 영국 성공회의 지부가 아니라 '해당 국가 성공회'로 불리며, 서로 완전히 독립적이다. 예를 들어 호주에 있는 성공회 교회는 영국 성공회의 호주 지부가 아닌, '호주 성공회'로 불리는 식. 이 규칙은 비영연방 국가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한국의 성공회는 한국이라는 지역 단위로 단일 관구를 이루며 대한성공회라 한다.  



2. 명칭  

 

성공회라는 종교 자체를 설명하는 명칭은 Anglicanism(앵글리커니즘)이다.

 

성공회는 역사적으로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그러다가 18세기부터 영국 이주민과 선교사들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기에 단순 영국 국교회라고 더 이상 보기만은 어려워졌고, 역사상 이전 세기 동안의 종교 갈등를 반성하고, 교회 안의 여러 목소리에 관용을 베풀고 성스럽고 공번된 교회로 거듭나기 위해 19세기 중반부터는 성공회라는 명칭으로 변경하게 된다.

 

성공회 교회와 그 조직을 가리키는 용어는 Anglican Church(앵글리컨 처치)가 일반적으로 쓰이지만 일부 국가/지역에서는 Episcopal Church(이피스코펄/에피스코펄 처치)라고 쓰기도 한다. angl(o)- 자체가 잉글랜드를 의미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잉글랜드 혹은 영국과 대립한 적이 있어서 정서적 거부감이 있거나, 그런 역사를 지닌 국가/지역 성공회가 개척한 경우 Episcopal Church를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스코틀랜드나 미국의 성공회가 잉글랜드/영국과 대립했던 역사 때문에 Episcopal Church를 사용한다. 필리핀의 성공회는 미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미국 성공회의 포교를 받아 설립되었기 때문에 영국과 대립한 적이 없으나 미국을 따라 Episcopal Church를 사용한다. 타이완 성공회도 미국 관구에 속해있고 미국 성공회의 포교를 받아 설립되어 마찬가지로 Episcopal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대한성공회의 영어 명칭에는 Episcopal 대신 Anglican이 들어가는데, 이는 대한성공회는 영국 성공회 선교사에 의해 신앙을 전래받았고, 오랫동안 영국 캔터베리 관구 직할이었던 역사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만 각 나라/지역을 담당하는 성공회 교회 조직의 명칭에 꼭 Anglican이나 Episcopal이 들어가는 건 아니다. 해당 국가/지역의 기독교 교파 중 성공회 신자가 많거나 국교 같은 뭔가 우월한 지위에 놓여 있()던 경우 그냥 Church of 나라/지역이나 Church in 나라/지역의 이름을 붙여 놓은 경우가 많다. 성공회의 모체인 잉글랜드 국교회(Church of England)나 한때 법적으로 국교였던 웨일스 성공회(Church in Wales), 아일랜드 성공회(Church of Ireland)나 영국이 지배한 인도 공화국, 파키스탄, 나이지리아 등의 성공회가 그 예. 물론 영국이 식민지로 지배했다고 해서 꼭 성공회 조직이 이런 식의 이름을 붙인 건 아니니 상황에 따라 다르다. , 홍콩(Hong Kong Sheng Kung Hui)과 일본(Nippon Sei Ko Kai - 일본어 발음)의 성공회처럼 영어로 적을 때에도 현지 언어의 발음을 그대로 로마자로 옮겨 적는 성공회 조직도 있다. 대한성공회는 영어로 Anglican Church of Korea로 표기하지만, 성공회대학교의 표기는 Anglican university 또는 Episcopal university로 쓰지 않고 한국어 발음을 그대로 옮긴 Sungkonghoe University로 적는다.  

 

3. 역사(영국 교회의 역사)  

 

3.1. 성공회의 기원  

흔히 성공회의 기원이 헨리 8세가 로마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것으로부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히만 보기에는 상당히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성공회의 현재모습은 역사적 산물로 헨리 8세 시절의 영국 국교회와는 큰 차이가 있다.

 

역사적 사실을 단편적으로 서술하면, 16세기 종교개혁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으로 잉글랜드 내에서는 로마교회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잉글랜드 국교회가 출범했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대륙의 루터, 칼뱅이 이끈 신앙과 교리의 문제와는 매우 다른 특이한 양상으로 생겨났는데 이는 단선적인 사건은 아니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여러 우연과 영국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일어난 사건의 결과물이지 왕의 단순 이혼 문제라고 보는건 재미는 있겠지만 그렇다고해서 여러 의문점을 설명할 수준은 되지 못한다.

 

실제로 성공회의 기원과 역사들을 연구하는 학자들 조차도 세세히 분석함에 어려움을 느낀다. 일반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영국 교회(성공회)의 출발을 결혼같은 우발적 사건, 우연성, 일탈로만으로는 보기에는 현재 성공회의 정체성이 설명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단 영국 국교회 가톨릭에서 분리된 표면적인 계기는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이다.

 

그런데 이 설명은 어디까지나 로마교회의 단절이 일어나기 직전의 사건만을 요인으로 간주하는 방식으로 앞서 간략히 설명한 여러 복합적 요인중 하나일 뿐이다. 왜냐하면, 성공회의 기원을 단순히 '헨리 8세가 이혼하고 싶어서'라고 하는 것은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만화 세계사에나 나올 법한 단편적인 수준이고, 영국 역사나 교회사를 제대로 아는 수준은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이혼 문제가 표면적 계기라는 설명이 비록 틀린 설명은 아니지만, 성공회에서는 '헨리 8세가 혼인 무효하고 새로 장가가고 싶어서 만든 종파'라는 식으로만 달랑 설명하지는 않고, 당시 잉글랜드가 처한 상황을 설명한다. 16세기 중반 국왕의 혼인문제 때문에 생긴 개인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으로만 본다면 잉글랜드 교회가 거의 천년의 역사 동안 로마의 종주권을 인정하다가 갑자기 전통을 부정했음에도 튜더 왕조의 통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어렵다. 또한 순전히 헨리 8세 개인에게서 원인을 찾기도 어려운 것이, 헨리 8세는 루터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였을지언정,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 등 몇몇 중요한 고문들은 확실히 프로테스탄트적이었다.

 

헨리 8세가 사망하고 메리 1세가 즉위한 후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극심한 반발이 터져나왔고,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 시기에는 영국국교회의 정체성이 강해지면서 국교회 우위가 이어졌으며, 17세기부터는 거의 완전한 개신교 우위 국가가 되었음이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의문에 대해선 일단 전세계 성공회의 역사는 영국에서 출발한 것으로 영국교회의 역사를 먼저 볼 필요가 있다.

 

3.2. 종교개혁 이전  

영국 교회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잉글랜드에는 이미 2세기경부터 켈트 교회(Celtic Church)가 있었는데 나중에 가톨릭 휘하로 들어가게 되었고, 헨리 8세의 혼인 무효 문제로 인해서 이 켈트 교회가 다시 분리된 것이 현대의 성공회라고 말한다. , 성공회는 스스로 초대 교회 시기부터 잉글랜드 지역에 있었던 켈트 교회를 잇는다고 본다. 반면 가톨릭 측에서는 성공회의 켈트 교회 후계성을 부정하며, 로마 교황에 의한 켄터베리 주교 파송을 현 잉글랜드 성공회 + 잉글랜드-웨일즈 가톨릭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1세기 이후 로마 제국 내에서 기독교의 전파는 초기 동방과 로마, 아프리카에서 영국이 속하는 유럽 변방지역까지 제국 전역으로 퍼졌고 , 기원후 2세기경 대륙과 브리튼 섬의 켈트인들 일부가 기독교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인게 사실이다. 켈트인들은 로마인이나 로마화된 곳의 교회와 달리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었다. 수도생활은 서방교회와 공통점이 거의 없었고, 특히나 부활절 날짜를 독특하게 독자적으로 계산할정도. 영국의 주교들이 서기 314년 아를르 교회회의에 참석했던 것으로 보아 역사적으로 브리튼 섬에는 3세기 이전에 이미 선교사가 파견된 걸로 본다. (심지어 아리마태아의 요셉(성배 전승) 등의 떡밥까지 있다.)

 

그러나 로마가 멸망하고 게르만(앵글로 색슨)인들이 영국을 침략하자 기독교를 믿는 켈트인들은 점차 산악으로 밀려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다가 597년 대교황으로 불리는 그레고리오 1세의 시기 로마 태생인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주교로 서임되어 잉글랜드로 건너가 당시 켄트 왕국의 왕 에텔베르트(560-616)에게 잉글랜드 군주 중에 최초로 세례를 주는데 이는 에텔베르트의 왕비 베르타는 프랑크 왕국 계열의 네우스트리아 왕국의 공주로 하리베르트 1세의 딸이며, 앞서 프랑크 왕국은 이미 대륙에서 5세기 클로비스 1세 시절 가톨릭으로 개종했었고, 열렬한 기독교도로 알려진 브륀힐트 여왕의 조카였기 때문에 대륙에서 시집오기 전에 이미 기독교인이었고 로마에서 파견한 선교사들이 켄트 지방 안전하게 상륙하고, 포교할수 있었다. 이를 보아 영국의 지배계층에 기독교인이 상당수 세를 얻고 있었으며, 다른 지배층 또한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목적으로 개종에 거리감이 없었다는걸 보여줄 뿐이다.

 

가톨릭이 서유럽에 퍼지는 과정은 이러한데,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각지에서 기독교화된 로마인들이 순교자들의 유골이 있는곳에 교회를 세우고 그곳 유력자들을 주교로 삼아 이민족 침략자에게 맞서 재산을 기부하여 보호하였고, 각지의 주교구에서 서유럽 교회의 중심지이며 서로마의 상징적 후계인 로마에 정당성을 인정받으려 수위권을 인정한것이 대략적인 서유럽 교회의 성립사이다. 한편 로마제국은 망했어도 로마 도시는 여전히 부유했기 때문에 각지에 자금을 지원해주면서 영향력을 키워갔고, 서로마 권역을 벗어난 동방 시리아까지 로마교회의 자금지원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2세기 헨리 2세는 교회 재산과 성직자 신분에 대한 이견으로 로마 교회와 대립하였다. 성직자의 범죄를 로마 교회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교회 법원뿐만 아니라 세속 법원에서도 재판할 수 있게 하는 클라렌던 헌장을 제정하려 했던 것. 그러던 중에 왕의 기사들이 헨리 2세의 환심을 살 속셈으로 켄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켓을 살해했고, 이로 인하여 헨리 2세는 교회와 세간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듣게 된다. 이후 일련의 사건에 대해 회개하고 교황에게 용서받는 과정 중에, 교회 재산 관리권과 같은 이권이 어느정도 국왕에게 오는 등 실질적인 권한을 차지하게 되었다.

 

헨리 3세는 교황청으로부터 십자군 전쟁에 쓸 군자금이 필요하니 잉글랜드에서 세금을 더 걷으라는 요청을 받는다. 교황청은 이런 무리한 과세 요청에 한 술 더 떠서, 잉글랜드에서 세금을 거두었음에도 만족할만한 모금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헨리 3세에게 예비 파문을 내린다. 이를 고깝게 본 영국의 가톨릭 성직자들은 오히려 국왕의 편을 들었다.

 

14-15세기 백년전쟁 시절에는 가톨릭 교황청이 로마와 아비뇽으로 갈라져있었다. 이 시절 영국 왕실은 로마 교황청 쪽으로 줄을 서서, 아비뇽 교황청을 대놓고 무시하였으며, 대포로 위협하여 도리어 교황에게 돈을 뜯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국 교회는 개신교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를 이미 14세기에 배출했다. 위클리프는 그를 따르는 무리인 롤라드(Lollady) 파와 함께 가톨릭 교회의 전통주의, 중세의 스콜라 철학, 그리고 성인 , 성유물, 성해에 대한 공경을 성경에서 서술을 찾아볼 수 없고 성서상 기독교 교리와도 충돌하는 숭배로 보아 비판하며 성경 중심의 신앙을 주장했고 이를 강조하려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고 성체성사의 화체설, 교황의 수위권 등 교회제도 등에 대해 강한 비판을 했었다. 이는 후대 얀 후스와 종교개혁 시기 마르틴 루터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위클리프에 대해 교황청에서는 1378년 당시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에게 위클리프를 체포하여 정죄할 것을 요구했으나 무시당했고, 로마에선 다시 옥스포드 대학 부총장에게 위클리프 처벌을 지시했지만 잉글랜드 국왕은 옥스퍼드 부총장을 처벌했다. 30여년 후 위클리프와 위클리프주의자들은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보헤미아의 얀 후스와 패키지로 이단자로 선언되고, 위클리프의 유해는 부관참시 당했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은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았을 뿐 잉글랜드 교회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약 20여년 전 1500년대 초반부터 롤라드파의 화체설 교리 비판을 중심으로 가톨릭 교리에 대한 개혁 움직임이 다시 태동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국 역사의 일련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다음 항목에서 기술되는 헨리 8세의 가톨릭과의 단절 선언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3.3. 헨리 8세의 종교개혁  

헨리 8세의 아들낳기 염원과 이혼문제는 헨리 8세와 연관 항목을 참조하면 될 것이고, 이하 종교개혁과 관련된 내용을 설명한다.

 앞서 여러 오해가 있는데 일단 현재는 완전히 개신교인 성공회와 헨리 8세의 영국 국교회의 모습은 상당히 다르다.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교리나 신앙을 조직을 바꾸는 것이 아니었고 조직의 수장 (잉글랜드 내에서) 국왕으로 재확인 하는 것이었다. 교황청이 명목상으론 서방 교회의 전체를 주관하는 권한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이탈리아와 신성로마제국을 제외하면 세속군주에게 교회조직의 운영을 위임했었다. 영국 프랑스와 같은 국가들은 독자적으로 주교를 임명하고 추기경이고 대주교고 간에 멀리 있는 교황청보다 왕의 신하라는 인식이 강했다. 물론 사제계층은 평신도인 왕이 재판할수 없는 신분으로 이론상중세시기 왕이 마음대로 재판할 권한이 없었고, 교회에 조직에 관한, 그리고 교회에서 주관하는 관혼상제는 성직자들이 왕에게 이견이 있을경우 이론상 로마 교황청에 항소할 수 있었는데, 거의 사문화 되었던 로마교회의 이 성직자 신분에 대한 재판 관할권, 영국교회에 관한 처분을 영국외 다른 조직에 대한 상소권을 반역으로 선언한것... 이것이 곧 수장령 (Acts of Supremacy, 首長令)이다.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 이후 메리 1세 때 다시 영국교회는 다시 국가 교회에서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을 인정하여서 가톨릭으로 회귀한 것을 볼 때, 헨리 8세에 의해 영국국교회가 로마교회에서 독립하고,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들어서면서 영국국교회로 회귀하며 지금의 성공회 토대를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리하여 성공회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견해로는 헨리 8세 시절은 잉글랜드가 어떤 일관된 '개신교'가 존재했다는 말을 전혀 할 수가 없다.

헨리 8세 시절은 로마교회에서의 독립으로 영국국교회(성공회)의 역사 시작임은 분명하지만 가톨릭교리를 거의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헨리 8세는 교리상으로는 종교개혁 초반에 루터주의의 영향으로 하나님이 지상권을 군주에게 위임한 것이라는 주장에 매우 호감을 느끼긴했지만 루터주의나 칼뱅주의 자체는 별 관심이 없었고, 온건한 가톨릭 개혁주의 였던 네덜란드 출신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헨리 왕의 성향이었다. 당연히 대체로 가톨릭 신앙을 유지했고, 후반으로 갈수록 이런 경향은 심해졌다. 1543년에 나온 '왕의 책(King's Book)'은 가톨릭 신자들을 안심 시키려는 왕의 견해가 분명히 나타난다. 대륙의 복음주의자 즉 프로테스탄트들이 주장한 대부분의 주장을 배격하는데, 가톨릭 교리인 성체성사의 화체설(성변화), 평신도 양형 영성체 금지, 사제독신, 주교제도, 영어성경 번역 금지 고해성사 등 7성사 제도 옹호, 현실적으로 성당의 주수입원이던 '죽은 자에 대한 미사'(연미사) 등등 기존 가톨릭 교리와 전통을 교황수위권만 제외하면 재확인 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아이러니 하지만 헨리 8세는 가톨릭 교리를 옹호했다.

 

물론 헨리 8세가 가톨릭 교인은 아니다. 당연히 수장령과 이의 후속 법령인 반역법(Treasons Act)를 근거로 (영국 내에서)교황 수위권을 부인을 거부한 토마스 모어와 존 피셔를 처형하긴 했다. 그나마 토머스 모어는 개인적 친분 때문에 살리려고 회유에 갖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여 반역죄를 물어 참수 시켰지만, 이전에 토머스 모어를 대법관으로 기용하여 복음주의 루터파 칼뱅신학에 물든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신학교수들은 40명을 체포하여 고문하다 6명을 이단으로 화형시킨 예도 있다. 사실 헨리 8세는 대륙신학에 영향을 받은 루터/칼뱅주의 복음주의자들을 가톨릭교도 신하들보다 더 많이 처형했다, 앞서 두 출처를 긁어보면 헨리 8세 시기 가톨릭 신하 처형자는 60, 개신교 신하 처형자들은 63명인데 가톨릭 교도들은 반역죄로 처형했다면, 개신교 신앙을 가진 대륙신앙의 복음주의자들은 63명을 종교적 이단이라서 더 심하게 화형을 시켰다.

 

기존 교회세력의 가장 큰 저항인 1536년 요크셔와 링커셔 지방의 '은총의 순례(Pilgrimage of Grace)'가 유명한데 헨리 8세가 종교정책으로 가톨릭만을 탄압했고 극심한 반발이 있었다 주장하는 측도 있지만, 실제 대규모의 반발은 이 경우가 유일했다.

 

그마저도 이 반정부 봉기는 성직자중심으로 일어나긴 했지만 오히려 경제적 이유가 컸다. 성직자들이 봉기를 일으켰던 주요 이유는 정부의 개혁정책으로 여러 교구들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고, 해산당한 수도원의 수도자들을 고위 성직자들이 먹여 살리게 했으며, '첫 열매와 십일조 법령(Act of First Fruits and Tenths)'을 통해 자신들의 수입이 박탈당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종교정책을 바꾸기 원했던 것이라기보다 경제적 불만을 표출하는 일종의 저항의 표시였다.

 

앞서 수도원 몰수도 가톨릭 교도들의 반발... 이 있었다곤 하고 동기도 개혁같은 순수한 의도가 아닌, 현실적인 금전적 욕구에서 몰수한것이긴 한데 여론의 지지 없이 한것이 아니다.

 

이미 중세이후 유럽의 수도원 상태는 영국이라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특권집단화 되어 수도원이 잉글랜드 토지의 1/6을 소유하면서 면세혜택과 치외법권 혜택을 누렸고 이에 특권집단화 된 수도원의 수도를 할 수도자들이 있는 수도원도 있지만 많은 수도원에서 경제적 이득을 쫓는 수도자들이 대거 유입되며 범죄자,문맹자들이 대거 유입 그로인하여 수도원에서 이를 악용하여 이자놀이, 범죄자 숨기기, 도박장 운영... , 농민들 상대로한 경제적 수탈, 등등 다양한 막장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런던등 대도시에서 부르주아들은 물론 독실한 교인들마저 수도원을 갈아엎은건 환영할 정도였다.

 

또한 잉글랜드의 가톨릭으로부터의 독립은 당시 잉글랜드가 처한 국가적 상황과 연결하여 입체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실제로 아무리 왕권이 강하다고 한들, 왕이 이혼하고 싶다고 해서 영국인 전체가 하루아침에 종교를 갈아엎는다는 건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당시 잉글랜드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란머 등 헨리 8세에게 협력한 성직자들이 상당수였고 이들이 영국 교회를 개신적인 신앙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주도했다는 것을 고려하여야 한다. 이들은 이질적인 라틴어 미사를 비롯한 전통이라는 이름에 유지되던 가톨릭적 관습에 깊은 회의를 느꼈고 동시에 섬나라 잉글랜드 교회의 독자적인 특성들에 이해하고 로마 교회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당시 왕의 측근이었던 토마스 크랜머는 왕의 이혼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자신의 숙원이던 '공동기도문(The Book of Common Prayer)를 발간해 지금의 성공회 예배 형식인 감사성찬례의 원형을 만들었다.

 

어쨌든 헨리 8세의 원래 의도도 어디까지나 로마로부터 간섭 받지 않는 교회조직을 만드는 것이지 영국 교회 체제 전체를 전복시키려는 것이 아니었고 실제 개혁을 움직인 성직자들도 급진적인 개혁보다는 잉글랜드 교회만의 독자적인 신학을 정립하려는 의도였기에 사실 단순화시켜서 얘기하면 헨리 8세 당시의 영국 국교회는 가톨릭적인 외적 요소들에 루터교나 장로교의 교리를 조금 첨가해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현대에 이르며 갈수록 넓어지는 스펙트럼을 가진 성공회 신학을 단순히 정의하기는 힘들어졌다. 그렇기에 "성공회는 어떤 기독교입니까?"에 대해서 어떤 성공회 신학자나 성직자 또는 신자도 간단히 답을 내리지 못한다.

 

3.4. 헨리 8세 이후  

헨리 8세 사망 이후 영국 교회는 한동안 혼란을 겪게 된다. 유일한 아들 에드워드 6세시절 에드워드의 외가를 비롯한 대륙의 복음주의 성향 신하들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다시 헨리 8세시절 가톨릭으로 거의 회귀한 영국교회를 대륙에 영향을 받은 개혁신학의 영향을 깊게 받게 된다. 에드워드가 요절하고 짧게 메리 1세 시대가 되자, 메리는 이혼의 원인이 된 아라곤의 캐서린의 딸이며 이혼으로 신분이 격하 되었다가, 헨리 8세의 변덕과 새어머니의 배려로 다시 적자로 되는등 신앙을 떠나 자신의 정통성과 지지세력이 가톨릭이기 때문에 영국교회는 다시 로마가톨릭으로 돌아간다. 이 과정에서 극심한 반발이 터져나왔다. 골수 가톨릭 교도 펠리페 2세와의 결혼은 모든 신하가 반대했고, 여왕의 결혼에 반대하는 폭동이 런던 시내에서 발생했고, 철저히 무력 진압에 나서면서 반대파 숙청에 나서기 시작했고, 대륙의 개혁 신학을 받아들인 청교도, 뿐만 아니라 기존 영국교회의 독자성을 중시하던 고위 성직자들까지 화형을 시키면서 5년 동안 300여명을 화형시키게 된다. 더불어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으로 다져진 스페인인들이 개신교도 색출에 나서자 가톨릭에 동조적인 잉글랜드 인들조차 여왕에 등을 돌리게 된다.물론 이러한 무리한 조치는 짧은 치세동안 되돌리기 어려웠고, 메리 사후 엘리자베스 1세 시기 거의 자발적으로 복귀한다. 메리시절 영국국교회에서 복음주의 반가톨릭성향 사제들 2천명을 쫓아냈으나, 메리 사후 영국 국교회 사제 8천명중 7천명이 제발로 가톨릭을 버리고 국교회로 복귀할정도로 메리의 종교정책은 거의 지지 받지 못했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 초반에는 메리시절 잔혹한 종교탄압과 상반되는 정책을 폈다. 메리 치세 5년간 개신교 복음주의자 화형이 280여건으로 이중 100여명은 당시 사형이 면제되던 여자와 어린이들이었지만 엘리자베스 1세 시기 45년간 가톨릭 순교자는 9명에 불과하다 그것도 1570년 이전에는 아예 0명이다. 엘리자베스 1세 세기 초반 12년 치세에는 귀족들은 종교적 맹세를 면제받고 사실상 종교의 자유를 누렸다. 귀족들이 아니더라도 국교회 예배에 불참시 매달 1실링의 벌금을 내면 그 이상의 제재는 없었고, 엘리자베스 여왕 자체가 메리시절 위장 개종할정도로 그다지 독실한 복음주의 성향도 아닌데다가 가톨릭 성향의 신하들을 통제하기 위해 눈감아줬다는 정치적 배려도 있다.

 

가톨릭 교도가 탄압받기 시작한것은 엘리자베스 주도가 아니라 1570년 교황청에서 가짜군주 엘리자베스를 살해하는것은 신의 뜻에 부합하는일이라 선포하며 엘리자베스를 파문하고 예수회에서 양성한 암살자들이 엘리자베스 처단하고 메리 스튜어트와 노퍽공작 토머스 하워드를 공동왕으로 모시려는 음모가 드러나고서였다. 이여파로 메리 스튜어트와 노퍽공작은 처형당하자 이에 반발한 교황청과 프랑스 스페인같은 가톨릭국가들과 준전시상황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어서 형부인 펠리페 2세가 잉글랜드 침공을 시도하자 그 전후로 가톨릭 교도는 매국노이며 반역자라며 민족감정이 들끓으면서 사회적으로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엘리자베스 시기 후반에 가면 요크셔처럼 가톨릭에 미련이 많던 일부 지역마저 영국국교회 우위가 두드러지게 된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시대에 앞서 헨리 8세 시대에는 개신교와 가톨릭 신앙을 왕권의 방해요소가 아니면 묵인했기에 극심한 탄압이랄것은 없었다. 에드워드 6세 시기는 미성년 국왕 대신 섭정들과 유력가들의 권력 다툼으로 배가 산으로 가던 시기고,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1세는 가톨릭 교도가 아닌 복음주의자들을 극심하게 탄압했다. 여기서 국교회(성공회)신자들이 탄압받지 않았냐는 소리가 나오는데 국교회는 메리가 교황청에 도로 조공으로 바쳤기에 고위 성직자 주교들은 불만을 품은 자들도 있지만 대부분 종교에 그다지 큰 관심 없는 신도들은 국교회나 평생 볼일 없는 교황청이나 그게 그거..라서 차이점을 못 느꼈다 그리고 중요한것은 이 당시 신도들은 종교적으로 열성적인 복음주의자, 기존 전통적 신앙을 지키려는 가톨릭 신도들은 숫적으로 다수가 아니었다. 도시의 일부만 종교개혁을 지지했다는 무리한 의견이 있는데 당시 서유럽 농촌의 문맹률은 거의 95% 이상이고, 도시마저도 교육받은 계층은 절대 소수였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야 성공회니 개신교니 가톨릭이니 교리가 어떠한지의 논쟁은 대부분의 신자들은 노관심을 넘어선 접근 자체가 어려운 수준이었고, 외형적인 교회 예배는 헨리 8세시절 거의 유지했기 때문에 변화자체를 체감 하지 못 했다.

 

어쨌든 종교갈등에 대한 교훈을 얻어 성공회는 가톨릭과 대륙 신학의 개신교도(청교도)들의 과격한 행동을 배격하며 'Via Media'(중용의 길)이라는 모토가 성공회에 자리 잡았다.

 

물론 그 당시 현실에서 제대로 적용된 적은 별로 없었다. 여하튼 이 모토 역시 성공회의 태생과 그 정체성, 현실적 제도와 맞물리면서 그야말로 '개혁하는 보편교회'라는 성공회의 모토를 한 마디로 압축하는 핵심이 되었다. 초대교회의 전통을 보전하면서 신학과 믿음에서는 끊임없는 개혁을 추구하는 점에서 보수와 진보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포용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후임 제임스 1세 때도 유지되어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 1세도 주교제 아래에 움직이며 보편교회와 개신교회를 동시에 추구하는 성공회를 중심으로 국교회 체제를 강화하는 데 일조한다. 다만 제임스 1세 때부터 정치적 견해 차이로 청교도 탄압이 일어났다 애초에 스코틀랜드 국왕 시절 제임스 1세는 칼뱅주의 교육을 받아 교리상 상당한 호의감을 느꼈으나 잉글랜드 국왕 즉위 후 국가 교회와 주교제도에 대단히 만족했는데 청교도들은 이런 제임스 1세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으며, 신학적으로 가톨릭 전통의 일소를 주장했고, 제임스 1세의 왕권신수설과 주교(감독)제도를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후 찰스 1세시기 고교회파로 자신을 비판하는 청교도들의 코와 귀를 베어서 악명과 원성이 높았던 윌리엄 로드 대주교 같은 인물도 개신교의 정체성을 부인하지 않으며, 찰스 1세조차 처형직전 진정한 개신교 신앙을 가졌으며 자식들에게도 그러하길 주문할 정도로 완전히 개신교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올리버 크롬웰 시대에는 청교도가 권력을 잡게 되어 보수적인 장로회 문화로 주교제가 폐지되고 칼뱅주의에 영향받게 된다. 왕정복고이후 독립파 청교도들이 숙청되고 찰스 2- 제임스 2세시기 가톨릭 용인정책으로 다시 기존 국교회 성향과와 개혁파 복음주의 성향 신도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고 1688년 명예 혁명으로 제임스 2세가 쫓겨나자 윌리엄 3세의 관용조치로 영국국교회 39개 신조에 위배되지 않는 이상 국교회를 제외한 다른 개신교 교파에 대해서 불이익을 폐지하게 된다. 사실상 청교도들에 대한 조치였으나 이미 청교도들은 왕정복고시기 네덜란드나 신대륙으로 많이 이민을 가서 크게 의미있는것은 아니었다. 가톨릭 교도 차별정책은 19세기까지 지속된다.

 

이후 한동안 국가교회의 정체성만 간신히 유지하다가 19세기 헨리 뉴먼 등을 중심으로 한 옥스퍼드 운동으로 '보편교회'로서의 정체성과 초대 교회의 전통들을 다시 복원, 확산하게 된다.

 

이 시기 이후 성공회의 이른바 '고교회파(high churchmanship)''저교회파(low churchmanship)'가 확연히 구분되기 시작한다. 고교회파는 하드웨어는 가톨릭과 상당히 유사하지만, 저교회파는 하드웨어든 소프트웨어든 다른 개신교 종파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고교회(high church)'는 엄말한 의미에서 전례적 성찬례를 매주 예배에서 행하는 교회를 칭한다. 소위 로마보다 더 로마적인 전례를 구사하는 '앵글로-가톨릭(Anglo-Catholic)'은 고교회 안에서의 한 흐름일 뿐이지, 고교회파 전부를 앵글로-가톨릭으로 통칭하기는 어렵다. 반면 '저교회(low church)'는 복음주의(Evangelical)파로 흔히들 알려져 있는데, 전례용 예복이나 향, 그레고리안 찬트 등의 전례적 요소 사용을 일체 거부하는 특징이 있다.

 

사실 저교회파는 표면상으로는 일반적안 개신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저교회파와 고교회파의 결정적인 차이는 매주 혹은 매 예배가 성찬례로 봉헌되느냐 여부이다. 옥스퍼드 운동 이전까지의 국교회 흐름처럼 저교회파 역시 한 달에 한 두번 혹은 매 주일 새벽 예배 정도에서만 성찬례를 거행한다. 하지만 가톨릭의 전례개혁의 영향으로 시작된 개신교의 예전갱신운동이 1960년대부터 세계 교회의 흐름을 바꿔놓는다. 전례의 개념이 없던 개신교 주류 교파들도 성찬예배의 전통을 복구하고 스톨(영대)등의 전례복식을 입는 등의 전례적 실천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이 영향으로 대부분 지역의 성공회 교회들 역시 고교회, 저교회 가릴 것 없이 비슷한 전례예문을 채택하고 매 주일의 성찬예배가 암묵적으로 일반화된다. 사실 그런 측면에서 오늘날 저교회와 고교회를 나누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과거와 달리 오늘날 대부분의 세계 성공회 교회에서 성직자는 장백의에 제의를 입고 성찬례를 집전하며, 매 주일의 혹은 매일의 성체성사 역시 일반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다만 그 안에서의 스펙트럼은 나눠볼 수 있다. 이를테면 개신교식의 찬양이 넘치는 예배도 있고, 루터교 예배처럼 어느정도 엄숙하면서 개혁교회 정신에 충실한(부가적 요소가 없는) 예배가 있다. 반면 가톨릭 교회처럼 향을 피우고, 축성 시에 종을 치고, 화려한 전례복식을 유지하는 예배도 있을 뿐이다. 한국 성공회의 경우 '앵글로-가톨릭' 노선을 싫어하던 당시 영국 국교회 성직자들을 피해 '앵글로-가톨릭'주의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파견되었고, 그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가톨릭과 하드웨어만 놓고 보면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국의 모든 성공회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다.

 

'앵글로-가톨릭'이라 해서 그들을 동질적인 그룹으로 보기엔 곤란한 부분이 있다. 영국이나 북미의 '앵글로-가톨릭'주의자들의 경우 전례에 있어 트리엔트 전례의 형태를 온전히 수용하며 '교황 없는 천주교'라는 별명이 어울릴 정도로 신앙관마저도 천주교에 근접한 부류도 있다. 대부분의 '앵글로-가톨릭'주의자들은 성공회 내부중에서도 보수파를 이룬다. 실제로 SSCCBS 같은 영국의 '앵글로-가톨릭'단체들은 여성 성직자를 거부하거나 혹은 그들의 존재는 인정하나 단체 내 목회활동은 금지하는 조항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진보파 역시 적지 않게 있는데(동성애, 여성사제 등의 문제에서). 특히 미국 성공회 등 북미에서 이러한 진보파가 두드러진다.

 

넓은 신학적 저변을 가지고 있고 중도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현대의 성공회는 다른 교파에 비해 적극적인 교회일치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보편교회적인 특성에서 교황의 절대적 수위권을 거부하고 지역교회 간의 자율과 권한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정교회와도 대화할 수 있고, 신학이나 교의적인 측면에서는 단연 다른 개신교 교파들와 연대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교회일치운동에 빼놓을 수 없는 교단이 되었다. 물론 교리상, 전례상으로 가톨릭과의 공통점도 많아서, 가톨릭과의 연대도 가능하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창립멤버이기도 하다.  

 

16세기 이후 서로 대립해오던 세계성공회와 가톨릭은 1970년대부터 '성공회-가톨릭 국제위원회(ARCIC, the Anglican-Roman Catholic International Commission)'를 설립하고 일치를 위한 공식적인 대화의 길을 열게 되었다.

 

본래 교회일치운동에 소극적이던 가톨릭은 지난 1965년 폐막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교회일치운동에 관한 교령을 발표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고, 그 일환으로 성공회와 ARCIC를 발족하게 된 것.

 

이러한 대화의 결과들은 양측의 공동합의문 형태로 발표됐으며 성공회와 가톨릭은 16세기 이후 오랜기간 동안 나눠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학과 교리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후 지난 2000년 캐나다의 미시사가에 모인 양측 대표는 3기 위원회를 구성하고 1기와 2기의 결과 및 새로운 주제들을 선교라는 보다 큰 틀에서 다루기 위해 명칭을 '성공회-가톨릭 일치와 선교를 위한 국제위원회(IARCCUM, the International Anglican-Roman Catholic Commission for Unity and Mission)'로 변경하고 매년 1차례 회의를 개최하며 일치운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40년에 가까운 일치논의에도 두 교단은 교리와 신앙상의 도덕문제를 극복하지 못해 왔다. 더욱이 성공회에서 여성과 동성애자를 사제와 주교로 임명하는 것을 허용하는 문제가 불거지면서 양측간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대립상태에 놓여있는 모습에서 깊어진 골이 확인됐다.

 

또한 계속 제기되고 있는 성체성사 문제 역시 두 교단이 일치 될 수 없는 뜨거운 화두로 작용하고 있다. 성공회 주교들은 가톨릭 신자가 아닌 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가톨릭의 영성체를 허용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영성체 문제는 일치를 이루지 못한 상황이라, 아직도 성공회-가톨릭 공동 예배는 성찬례가 생략된 채로 집전된다.

 

그럼에도 지금도 양측 간 일치 노력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1610월에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교황 프란치스코가 만나 일치를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앞서 20162월에는 헨리 8세의 옛 왕실 예배당에서 450년만에 가톨릭 전례가 드려지는 것이 허용되고, 여기에 성공회 런던 주교가 참석함으로서 교회일치를 향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차이에도 두 교단의 일치문제가 오랫동안 구체적으로 검토된 것은 양측이 다른 개신교보다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개신교 중에서는 가톨릭과 가장 사이가 좋은 편이며, 본고장 격인 영국에서는 이미 많은 행사를 연합해서 치르고, 역사적 건물을 공동관리 하는 등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교리적 차이는 인정하되, 한국에서처럼 누가 옳으네 그르네 하면서 치고받는 모습은 드물다.

 

그리고 2017118일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교회의 분열과 종교개혁 과정에서 빚어진 과도한 폭력에 대해 참회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국내 번역 기사로는 가톨릭 탄압만 나왔는데 영국 교회(Church of England)는 종교개혁 전후로 가톨릭 교도 뿐만아니라 복음주의자 청교도 재세례파 유니테리언들도 심하게 박해한 역사가 있다.

 

최근 보편교회들과의 교류는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여성의 서품으로 정교회에서 사도전승을 인정하려던 입장을 바꾼데다가 일부 정교회 주교들이 제대로 격노했다고 한다. 물론 가톨릭도.. 게다가 성소수자를 옹호하는 광교회파의 행보는 성공회 내부 분란 외에도 이들 보편교회들과 다수 개신교단에게도 경계 대상이다.

  

 

4. 특징  

 

한마디로 'Via Media'(중용의 길)로 표현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위에 기술한 역사적 배경처럼 영국교회가 종교개혁을 바탕으로 국가교회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국민이 믿어야 하는 국가교회의 탄생을 위해서는 기존의 영국에 있었던 가톨릭, 루터교, 장로회 등이 모두 수긍할 수 있는 교리와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탄생한 개념이 'Via Media'. 기존 각 교파들 각각의 극단적인 교리를 좇기 보다는 중용을 통해서 진리를 찾아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교회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다른 그리스도 교단보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타 개신교에서는 교단/개교회에 따라 성만찬 제한이나 출교까지도 고려될 수 있는, 몽소승천/무염시태와 같은 가톨릭만의 특정 성모 교리나 통공 교리, 성체성사의 성변화 교리, 천주교식 묵주 기도, 성모 행진 행사 등이 성공회에서는 관용된다. 여기서 말하는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것은, 성공회가 교단 차원에서 특정 교리에 대한 믿음을 신자 개개인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성공회 주류와 다른 신앙관을 가진다 해서 출교나 영성체 제한과 같은 불이익을 주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해서 성공회가 상대주의나 다원주의적인 관점을 취한다고 보는 건 큰 오산이다. 성공회에서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치를 침해당하면서까지 다양성을 추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성공회가 추구하는 것은 다양성 그 자체가 아닌, 다양성을 통한 진리의 탐색이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됨을, 본질적이지 않은 것에는 다양함을 추구하는 것이 성공회의 모토다.

 

간혹 교리 분야에 있어서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서만 진보적이지, 성공회도 기독교 내 특정 교파인 이상 배타적 의견을 제시하지 않냐는 의견이 있는데, 성공회는 교회 일치 운동의 시초부터 참가 멤버이고, 교회내외의 의견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그리스도 교회 내 불일치에 대해서 일치를 위해서 스스로 사라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 기꺼이 사라지길 다짐하는 교회라는 신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특정 사안에 대해서 확실하고 분명한 정답을 정해놓고 이에 대한 동의 여부에 따라 '성공회 신자냐, 아니냐'로 나누는 경우는 드물다. 기독교의 기본 교리인 삼위일체론, 성육신, 십자가의 고난, 부활 같은 기본적인 것들이 아니면 과거 종교개혁 시기 이래 (성공회 내부에서까지) 갈등을 빚어온 여러 이슈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해석 보다는 교회에서도 교리상 이견에 대해서 용인해주고 있다. 복음주의 성향이 강한 교회라 하여 가톨릭 신앙에 가까운 신자들을 차별하지 않고, 그들의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하지도 않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즉 현대 성공회가 특히 로마 가톨릭교회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그 시대에 따른 개혁과 변화 가능성'이다. 지금 이 시대에 여러 교회 정치제도 중에 최선에 가까운 것이 각 나라 관구별 주교제라고 여겨 선택한 것이지, 개교회 제도 등 다른 정치제도를 주장한다고 해서 성공회 신자로 보지 않는다는 내용은 아니다.

 

너무 극단적이거나 기독교의 핵심적인 개념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어떤 주장을 한다고 해서 성공회 신자로 보지 않는다던지 교회에서 강제로 그 신자를 설득한다던지 하지 않는다. 당장은 교회에서 받아들일 수는 없어도 소중한 교우의 의견으로 존중해 준다. 만약 나중에 시대와 그 시대정신이 바뀌어 주교제보다 더 주님의 뜻에 가까운 정치제도가 나타난다면 교회의 모든 교우들의 기도와 토론을 거쳐 바꿀 수도 있는 곳이 성공회의 특징이다. 성공회 교인들은 성공회를 최고의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공회는 세상의 많은 형제 교회들과 함께 수많은 교회들 중 하나일 뿐이다. 다만 주님 보시기에 최선의 교회가 되도록 처해진 상황에서 항상 부단히(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성공회라는 자기 정체성의 소멸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성공회 신앙관을 이야기하자면 '성서', '전통', '이성'으로 나타낼 수 있다. 성공회는 이 3가지 중에서 그 어느 하나도 덜 중요한 것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3가지 모두를 동등하게 중요하게 여긴다. 개신교이기에 성서가 더 중요하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는데 성서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전통과 이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권위가 성서에 있을지언정 3가지 모두 동등하게 중요하다.

 

또 한 가지 오해하기 쉬운 것이 '이성'인데, 이 이성은 한 개인의 이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이성을 의미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희생은 이성의 희생이 아니다. 성공회에는 전통적으로 존 폴킹혼이나 알리스터 맥그라스와 같은 과학자 출신 성직자들이 존재하여, 과학과 신학의 조화를 꾀했다. 성공회는 기독교가 역사 상 언제나 그러했듯이 지금도 여전히 머리와 가슴을 모두 사로잡는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공회는 과학을 통해 알려진 자연에 대한 이해와 갈등하지 않는다. 성공회는 모든 진리가 하느님에 대한 진리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떤 영역에서 어떤 발견을 하든지 이를 중요하게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이론에 대한 증거가 매우 강력하므로, 성공회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자연선택이 현재 우리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성을 중시하는 성향은 반지성주의로 치닫는 근본주의 개신교와 반대되는 모습이다.

 

즉 개신교가 갖는 종교개혁적 정신과 가톨릭 교회가 갖는 전통, 주교제의 안정감 및 사회적 깨끗함, 그리고 성공회 특유의 이성중시 사상이 결합된 교회다. 우리나라 성공회를 봐도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난다.

 

인권과 진보적인 성향을 추구하는 성공회대학교를 운영하고, 교회의 정치적인 입장을 보면 좌파 일변도의 느낌도 있지만, 정작 성공회 신자들 중에는 조선일보 사주인 방상훈 대표이사,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등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의 신자들도 매우 많다. 중장년, 노년층 성공회 신자들의 정치적인 스탠스가 보수적인 여타 개신교인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교회 분위기상 교회가 신자에게, 신자가 다른 신자에게 '해라, 마라'의 강요가 없는 것도 특징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특정한 사항에 확실한 답을 하지 않는 성향도 동시에 갖고 있다. 이는 '교회가 개인의 신앙에 방해가 되면 안 된다'는 성공회의 가치와 이어진다. 그래서 우리나라 주류 개신교단 또는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교회를 옮긴 신자들은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 결국에는 신자 개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답을 찾아내기를 기대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헌금에 관하여

 

다른 개신교처럼 십일조를 하시는 엄청 독실한 분도 있고, 천주교 같이 1/30 수준의 교무금 정도 하시는 분, 주일 헌금만 하시는 분, 헌금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하면서 아예 안 하시는 분 등 신자 성향이 매우 다양하다.

그런데도 교회는 확실한 답을 알려주지 않고 신자의 개인적 성향에 맡긴다.  

 

주일 감사성찬례/미사/예배를 빠지는 경우

 

개신교: 한두주 빠지는 정도는 그다지 문제삼지 않으나 몇 주 이상 연속해서 빠지면 구역식구, 청년회, 선교회, 나이별 모임 등 교회 인맥들에게 무슨 일 있는 건지 연락이 빗발친다. 구역 목사-전도사가 집에 찾아올 수도 있다.(다만 최근에 젊은 층은 물론 중장년층도 이런 간섭을 싫어해서 신자들에게 자율성이 큰 대형교회로 몰리는 추세)  

 

가톨릭 교회: 교리에서 정한 죄(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십계명을 어긴 대죄)를 지었으니까, 회개하고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해야 영성체(성찬식 참여)가 가능하다. 만일 고해하지 않고 영성체했다가는 대죄(중죄)인 모령성체가 돼서 또 고해를 해야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성공회 :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너무 안 나오면 가끔 신부님이 문자 한번 주긴 하는데, 감사성찬례에 나오라고 강요는 안 한다. 그래서 몇 달 몇 년씩 방황(냉담 또는 다른 교단, 타 종교)하다가 다시 오는 신자가 꽤 있다. 그래도 뭐라고 안 한다. 그냥 신자 스스로 고민해서 돌아오길 바란다.

    

고백예식에 관하여

 

개신교회: 죄의 고백과 용서는 하나님이 하는 것이기에 개인적으로 타인에게 고해(고백) 할 수는 있으나, 성사는 아니며, 목사는 용서할 권한이 없다.

 

 

가톨릭 교회: 하느님이 죄를 사하는 권한을 교회에 주었기에 사제를 통해서 대죄(중죄)를 용서 받아야 한다. 그렇기에 고해성사는 신앙생활에서 필수적이다. 대죄나 중죄가 아닌 소죄는 필수적으로 고해성사 봐야 할 대상은 아니지만 소죄도 고해성사 보는 것은 신앙에 유익하므로 고해가 권장되어 있다.

 

 

성공회: 개신교 스타일대로 하나님께 직접 고백해도 되고, 천주교처럼 사제에게 고해해도 되는 하이브리드한 시스템이다. 공식적인 입장으로는 신앙생활에 매우 유익하므로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가톨릭과 다른 점은 가톨릭은 고해성사를 정기적으로 하도록 의무화 되어 있으나, 성공회는 신자 본인이 진정으로 고해하는 것에 의미가 있지 가톨릭처럼 제도적으로 강제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는 것이다.  

 

외경(2경전)에 관하여

 

개신교회 : 정경이 아니므로 교리의 기초로 삼을 수 없으며, 특히 보수 교단의 경우 학술적인 목적을 제외하면 외경을 읽는 것 자체를 꺼려하기도 한다.

 

가톨릭 교회 : 2경전 또한 39권 구약 경전과 동등한 정경이다. 죽은 이를 위한 기도와 연옥 등 많은 교리가 제2경전을 근거로 하고 있다.  

 

성공회 : 외경(2경전)은 정경으로 삼지 않으며 교리의 기초로 삼을 수 없지만 유익한 책으로 적극 읽기를 권장한다. 가톨릭 외경을 전례용(성경봉독용) 성경에 포함하는 경우가 있다.  

 

성모공경에 관하여

 

개신교회 : 성모 마리아라 하지 않고 마리아라고 하며, 예수님의 어머니이고 굳은 믿음을 가진 신앙의 모범이라는 것은 동의하지만 성경에 나와 있지 않는 전통이기에 인습으로 여기는 경향. 북유럽 루터교회의 경우 국가나 개교회에 따라 성공회처럼 인정하는 경우도 있으나, 원칙적으로는 다른 개신교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가톨릭 교회: 성모 마리아에 대하여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평생 동정설', '원죄 없으신 잉태(무염시태)', '몽소승천'4대 교리를 믿는다. 또한 모든 성인 중에 가장 높으신 분으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간구하시는 분으로 상경지례의 대상이 된다. 저런 교리를 부정하는 것은 파문에 이르는 죄로 여긴다. 또한 가톨릭 신자들은 집에 십자고상과 함께 성모상도 모셔둔다.  

 

성공회: 성모 마리아에 대하여 공식적인 입장은 하느님의 어머니만 천주교와 동일하다. 나머지에 대해서는 개인의 신앙에 맡긴다. 물론 공식적인 입장은 '평생 동정 부정', '무염시태 부정', '성모안식'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강요도 없고 성직자나 평신도 개인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인다. 또한 예수님의 어머님이고 믿음의 모본으로 공경하기에 다른 개신교에 비해서 성모신심이 약간 강한 편이다. 또한 신자 개인이 가톨릭 수준의 매우 강한 성모 신심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를 말리지 않는다. 영미권의 일부 고교회파에서 거행하는 성모상 행렬이 성공회 내에서 용인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한편으로 성당에서 펼치는 성모 축일 행사 등을 거부하지 않는 선에서, 다른 개신교단 신자처럼 개인 신앙생활에서 성모 마리아에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예를 들어 개인 방에 성모상을 안 둔다든지) 신앙생활에 전혀 문제가 없다.

    

성체성사에 관하여

 

개신교회: 단지 예수의 희생과 부활을 기념하는 행사일 뿐이라는 입장에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입장까지 다양하다. 다만 화체설(성변화)을 거부하는 것은 다 동일하다. 성찬식의 경우 1년에 1~2, 많아 봤자 분기당 1번씩이나 매달 1번씩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 주일마다 성찬식을 하는 것은 성체에 대한 숭배로 변질 될 가능성이 있어서 이신칭의 신앙을 해칠 우려가 있으므로 자제해야 된다는 종교개혁 시기의 주장도 있었고, 한국의 주류 개신교 목회자나 평신도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포도주, 면병이 아니고도 포도주스, 효모빵, 카스테라 등으로 할 수 있다. 동방정교/가톨릭/성공회와 달리 성체를 영하는 특별한 예절은 없다.

    

가톨릭: 축성된 면병과 포도주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며("성변화"), 성체를 영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매우 중요한 성사이다. 따라서 매일 미사마다 영성체를 실시한다. 대죄를 진 상태라면 반드시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해야 한다. 면병과 포도주가 성변화를 일으키는 시점은 사제가 제정문을 낭독할 때이다. 그렇기에 가톨릭의 미사의 절정은 제정문을 낭독할 때이다. 가톨릭 신자만이 적법하게 가톨릭 교회에서 성체를 영할 수 있다.

    

성공회: 성체를 영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중요한 성사이고 가톨릭 같이 매 주일 감사성찬례마다 영성체를 실시한다. 다만 가톨릭과 달리 축성된 면병과 포도주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변한다고 믿지는 않는다. 성공회의 주류 입장은 "성사적 임재설"이다. 공식적으로 성공회의 감사성찬례의 절정은 성체 축성시 마침영광송과 대()아멘을 하는 시점이다. 즉 사제와 신자가 함께 아멘을 하는 순간이 성체에 영이 임재하는 순간이다. 천주교와 달리 만인사제설이 반영된 것이다. 영성체를 하기 위해 고해예식을 볼 필요는 없고, 성공회 신자가 아니더라도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파와 상관없이 성공회에서 성체를 영할 수 있다. 모령성체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으로 영성체 참여를 거부하는 태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분위기가 일반적이다.  

 

구원관에 관하여

 

개신교회 : 교파마다 구원관이 제각기 다르지만 한국의 주류 교단인 장로교를 중점으로 설명하자면, 믿음으로써 의로워진다는 이신칭의 구원관이 강하다. 감리회나 침례회는 약간 유연한 해석이지만 역시 이신칭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천주교 구원관과 유사한 구원관을 취한 개교회나 목회자가 이단으로 정죄되는 경우도 있다.

    

가톨릭 : 단순히 마음으로 믿을 뿐만 아니라 행위로서 믿음을 증명하며 성화에 이르러야 한다는 구원관을 갖고 있다. 따라서 개신교의 이신칭의 구원관을 수용하지 않는다.  

 

성공회 : 기본적으로는 온건한 예정론 구원관(장로교의 구원관이 온건화된 것)을 취한다고 하지만(39개 신조), 신자 개인이 감리교식(알마니안) 구원관을 취해도 되고 가톨릭식 구원관과 비슷한 것을 취해도 크게 뭐라고 하지 않는다. , 주류 그리스도교 종파(, 구원파와 같이 이단스러운 구원관이 아닌 이상)의 구원관이라면 개인의 신앙관으로서 존중해준다는 의미다.  

 

성경 번역본 선택에 관하여 (대한민국 기준을 중심으로 설명)

 

개신교회 : 한국의 개신교는 주로 예배용으로 개역개정판을 사용한다. 간혹 표준새번역이나 공동번역 혹은 현대어 성경을 사용하는 교회도 있다. 일부 강경보수 교단을 제외하고는 신자 개개인 통독용 성경에 대해서는 전혀 터치하지 않지만 그래도 개역개정판을 권하는 분위기가 있다. 영어 성경으로는 주로 NIV, ESV, KJV 등이 선호된다.

    

가톨릭 : 전례용(미사용)으로는 교황청이나 주교회의의 인준을 받은 것만 쓰도록 강제되어 있고, 신자 개개인 통독용 성경에 대해서도 교황청이나 주교회의의 인준을 받은 것을 쓰는 것이 강권된다. 영어 성경으로는 NAB, NABSE, RSV-CE, JB 등이 쓰인다.  

 

성공회 : 대한성공회에서는 기본적으로 공동번역성서를 쓰이지만, 신자 개개인 통독용 성경에 대해서는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 성공회 신부님들 중에서도 개신교의 개역개정판, 가톨릭 성경 등 다양하게 읽으시는 분들이 많다. 영어권 성공회에서는 전례용으로 쓸 수 있는 성경 종류가 다양하여 일부 보수적 고교회파에서는 KJV, 광교회파와 일부 고교회파에서는 NRSV, 저교회파에서는 ESV, NIV 등이 쓰인다.  

 

성공회에 입교할 때도 기독교의 웬만한 타 교파에서 받은 세례를 인정해 준다. 심지어 군대 훈련소 시절에 받았던 개신교 진중세례도 세례증명서를 제시하면 인정해준다. 군대 시절 진중세례를 받고도 본인 의사에 따라 다시 정식으로 세례를 받는 문제에 대해서는, 당시 신앙심 없이 단지 부식물(초코파이)를 위해 진중세례에 임했던 경우라면 신부님과 이 문제에 대해 상담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나름 진지하게 진중세례에 임했던 경우라면 다시 세례 받는 것은 신학적인 문제가 크게 걸리므로 다시 세례를 받지 않도록 담당 성직자가 조치한다.  

 

흔히 성공회를 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교파라고 생각하는데, 성공회 교인들은 이 말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성공회의 특징을 진보 혹은 보수 같은 특정 성향보다는 이들을 모두 감싸는 유연성/포용성에서 찾는 것이 성공회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확실하고 분명한 것을 선호하는 우리나라 주류 정서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이성적이고 유연한 신앙생활을 좋아하는 신자에게는 이만한 교회도 없다.

 

현재 성공회는 이런 가치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최고의 교회'보다는 교회가 가지는 단점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중용의 길을 통하여 '최선의 교회'를 추구한다. 그래서 모든 교회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일치(에큐메니즘)를 위해서 가장 애쓰는 교단이다. 심지어 (성공회를 훼방할 목적으로 타 교파에 양다리를 걸치는 경우가 아닌 이상) 장로회 같은 타 교파의 교회와 성공회 모두 다 교인으로 등록하고 양쪽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문제시하지 않는다.

 

키팅 선생님으로 잘 알려진 헐리우드 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말한 성공회 신자의 10가지 장점이 교회의 특징을 잘 말해준다. 조금 재미있게 표현한 것들이 많다. 아래에 나온 특징은 광교회파에서 두드러진다.  

 

즉 성공회 교회는 '다양성을 존중하며, 강요를 원치 않고, 이성적인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하길 원하는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교회이다.

 

4.1. 성공회의 세 흐름과 하나 됨  

성공회 내에는 크게 고교회파(앵글로가톨릭), 저교회파(복음주의), 광교회파(자유주의)라는 세 가지의 흐름(분파)가 있다. 본 문서에 나온 구분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편의상 나눈 것이며,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분파 구분에서, 전례적 측면 뿐만 아니라 교의적 측면도 살펴보아야 성공회 내의 다양한 신학적 스펙트럼을 이해할 수 있다.

 

18세기 경직되었던 영국 성공회에 존 웨슬리 등을 필두로 한 복음주의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당시 가톨릭적인 형식과 보편교회로서의 전통을 고수하던 부류에서 '우리가 고교회(high church)고 복음주의에 영향을 받은 너희들은 저교회(low church).'라며 만든 용어가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당시 웨슬리 혹은 청교도(조지 휫필드 등)복음주의의 영향을 받은 성공회 신자들 중에 성공회에 남은 부류가 저교회파가 되었고, 성공회를 나간 부류가 감리교를 세우게 된다.

또한 20세기 들어 성공회 내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부류가 생겼는데, 이들을 광교회파(broad church)라 한다.

성공회에서 진리 추구의 세가지 기준으로 제시하는 전통, 성서, 이성 중에 고교회파는 전통을, 저교회파는 성서를, 광교회파는 이성을 조금 더 중요시하는 부류라고 이해하면 크게 무리가 없다.

 

고교회파/저교회파/광교회파가 딱딱 나누어져 있지 않고 모자이크처럼 서로 중첩되는 경우도 많다. 전례적인 고교회파라 해서 반드시 교의적으로 고교회파라는 법은 없다는 것. 전례적 고교회파 중 일부는 교의적으로는 저교회파 내지는 광교회파 성향을 가진 경우가 드물지 않지만, 교의적 고교회파가 전례적 저교회파 성향을 가진 경우는 거의 없다.

 

낙태, 동성애, 이혼, 여성사제 서품 등과 같은 사회교리에 대해서는 고교회파, 저교회파, 광교회파로 나눠서 볼 문제는 아니다. 이런 주제에 따라 각 분파 내에 보수파, 중도파, 진보파로 또 갈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고교회파도 존재할 수 있고, 보수적 저교회파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교의적 측면

 

고교회파(앵글로가톨릭) : 신앙관이 가톨릭에 근접하여 신앙생활에서 성모신심, 묵주, 고해성사 등의 가톨릭적 모습을 강하게 드러낸다. 일부 고교회파는 7성사에 대해서 가톨릭, 정교회와 비슷한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성공회 내에서 개신교의 정체성이 가장 약한 분파. '교황 없는 천주교'로 불릴만한 부류이기도 하다. 일부 교의적 고교회파와 가톨릭의 차이점은 무염시태, 성모승천과 같은 가톨릭만의 성모교리 인정여부와 교황수위권 인정여부 정도다.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주교, 사제에 대한 순명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대한성공회의 경우 예전에는 이쪽 계파가 꽤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상당수가 이미 천주교로 갈아탄 상태라서 흔치 않다고 한다.

    

저교회파(복음주의) : 신앙관이 감리교, 루터교 복음주의파, 온건파 장로교에 근접하여 이신칭의 구원관과 성서 중심의 신앙을 중시한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캔터베리 대주교의 수위권에 든 감리교 및 온건 장로교'.  

 

광교회파(자유주의) : 특정한 신앙관에 얽매이지 않고, 신앙의 유연성과 에큐메니즘을 중시한다. 굳이 어느 쪽에 속하냐고 묻는다면 산술평균에 가까운 듯. 대한성공회의 경우 현재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이쪽 성향이 강해지는 중. 성공회 이외에도 광교회주의를 표방하는 군소 개신교 교파가 영미권에 존재한다.

   

전례적 측면

 

고교회파(앵글로가톨릭) : 고교회파 예배는 가톨릭의 미사와 흡사하며 예전성 측면에서 현대 가톨릭 미사보다 장엄한 경우도 많다. 성공회 성찬예배에 대한 공식적인 명칭이 이미 감사성찬례로 바뀌었지만, 고교회파에서는 아직도 관례적으로 '미사'라는 용어가 쓰이는 일이 드물지 않다. 한술 떠서, 영미권의 일부 고교회파는 트리엔트 미사와 유사한 형태의 장엄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예전성이 현대 가톨릭 미사와 유사하더라도 십자고상 입당식, 향 피우기는 항상 한다.

    

저교회파(복음주의) : 저교회파 예배는 감리교 예배와 유사하다. 예배에서 기타 연주를 즐기며 CCM 풍의 성가를 자주 부른다. 한국 천주교의 일부 청년미사와 분위기가 비슷할지도. 한국의 성공회는 전례적 고교회파가 주류여서 전형적인 저교회파 예배를 보려면 영미권으로 가야 한다.

    

광교회파(자유주의) : 굳이 얘기하자면 고교회파와 저교회파 사이의 산술평균적인 예전성을 보인다.

    

이렇듯 성공회는 보편교회(가톨릭)주의, 복음주의, 자유주의를 아우르는 신학의 스펙트럼을 보인다. 성공회 자신의 전통 안에서 이들을 내치지 않고 보듬어 안고 있는 것이다. 다른 어떤 기독교 교파도 가지지 못한 이런 전통은 현재 성공회가 보이는 신학의 유연성과도 직결되며, 교회일치 운동에 앞장설 수 있는 사상적 토대가 된다.

 

성공회 신학에서 경계하는 것은 (고교회파/저교회파/광교회파 등의) 특정한 신학적 입장이 아니라 신학을 대하는 특정한 자세이다. "나는 성경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으니 다른 불순한 것을 들이대지 말라"는 식의 자세는 지양하고 있다. 상대방 의견의 불순/순수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자신의 성경 해석을 성경 자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큰 교만으로 보기 때문에 매우 경계하고 있다. 자신의 성경을 읽는 방식과 신앙 생활의 형태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항상 겸손하게 돌아보아야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4.2. 타 개신교 교파와의 비교  

장로회, 루터교, 감리회, 침례회, 오순절파 등의 여타 개신교 교파처럼 종교개혁 정신을 받아 16세기에 생긴 종파이며, 중세 가톨릭에서 갈라져 나왔고, 역사상으로 개신교 세력과 연대를 많이 하였기에 엄연한 전통적인 개신교 교회다. 대한민국에서도 개신교 신문이나 잡지, 방송 중에서는 기독교방송, 기독교TV, CGNTV 등의 교계뉴스에 보도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교리나 교회제도 등을 보자면 다른 개신교와 차이가 꽤 난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보편교회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3중 성직제도(주교>사제>부제), 주교감독제의 교회제도, 7성사 또는 성사적 행위 등 보편교회에서 찾을 수 있는 특징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의 이름과, 표방하는 모토인 '개혁하는 보편교회(reforming catholic church)'라는 말에서도 그 정체성이 짙게 드러난다.  

 

우리나라에선 학습만화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초기 성공회 교리를 가톨릭에 루터파 양념을 치는 걸로 묘사하긴 했는데, 모든 개신교에서 루터가 주장한 이신칭의와 만인사제설을 받아들이긴 하지만 사실 성공회의 핵심교리는 루터교회 보다는 칼뱅주의에 가깝다. 초기 영국 교회는 교회제도에선 로마식을 유지하고 신학적으론 칼뱅파를 받아들인 중용적인 개혁(via media) 성격이었다. 헨리 8세는 후기에 교황 수위권을 제외하면 후기에 거의 가톨릭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별로 이 시기엔 이야기할건 없고, 후대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6세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영향을 받기 시작하는데 에드워드 6세는 개신교식 교육을 받고 자라서 츠빙글리의 사위 하인리히 불링거를 신학자중 가장 존경했으며, 칼뱅의 제자 존 녹스에게 로체스터 주교직을 제안하기도 했다.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래머는 대륙의 여러 개혁가들을 불러 들였는데 알자스의 슈트라스부르크 출신 마틴 부처(Martin Bucer)가 특히 유명했다. 부처는 초기 종교개혁 시기 츠빙글리 진영에서 있었고 장 칼뱅을 교육하기도 했으며 스위스와 남독일 지역의 개혁을 이끈 개혁자 였는데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나란히 흠정교수로 개혁신학을 소개했고 헨리 8세 시절 가톨릭으로 거의 회귀한 영국 교회 신조를 백지화 했다. 이시기 제일, 제이 공동기도문은 엘리자베스 1세시기 약간 수정된 이후 현재까지도 영국 성공회의 예배지침서로 사용되고 있다. 토마스 크래머는 니콜라스 리들리, 존 녹스와 함께 잉글랜드 교회 신앙고백으로 42개 신조를 만들었다. 42개조 신조는 엘리자베스 여왕시절 켄터베리 대주교 매튜 파커에 의해 수정했는데 주로 칼뱅의 가르침에 비추어 39개 신조를 구성했고 수정을 거쳐 현재 영국 성공회의 신조이기도 하다.

 

칼뱅주의 영향으로 구원론에서는 온건한 예정설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는 장로회와 교리를 공유하고 있고, 가톨릭만큼 성모신심을 강조하지 않아 국내 주류 개신교 교인들 입장에서는 성공회의 성모신심을 받아드리기 어려운 수준은 아니다.

 

다만 앞에서는 구원관에서는 칼뱅주의의 영향으로 온건한 예정설을 받아들인다는 내용이 언급되었지만, 루터파나 스위스 칼뱅주의의 인간관과 구원관 외에 알마니안주의적 구원관 역시 감리교가 성공회에서 분리된 교파인 점을 들어서 존중한다. 고교회파 일부에서는 천주교 구원관에 근접한 구원관을 취하기도 한다.

 

앞서 이야기한 성공회 특유의 정신인 'Via Media'에서 알 수 있듯이 '중용'의 자세를 중시해 가톨릭과 칼뱅주의 개신교를 포함한 여타 개신교나 동방정교 간 균형점을 추구하고, 모든 기독교 종파에 대한 관용을 추구한다. 그렇기에 핵심적인 가치의 일치 아래에서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종파이고, 어느 특정 교리가 정답이라고 단정짓지 않는 경향이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 한국의 개신교가 근본주의 색깔이 강한 것과 대조적으로 성공회는 성향이 온건하다. 다른 선진국 지역의 성공회도 온건한 성향의 교파라는 인식이 강하다.

 

이신칭의 신앙관이 강한(그리하여 일각에서는 무교회주의가 일정부분 용인되는) 여타 개신교회와 달리, 성공회는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 속하는 것을 신자의 의무로 보기에 가톨릭, 정교회와 마찬가지로 무교회주의를 배격하는 입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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