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본질


하동행 선교사


1.영이신 하나님

2.인격적인 하나님

3.유일하신 하나님

4.스스로 계신 하나님


하나님의 본질 1  영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정체를 설명코자 하는 접근으로는 그 본질적 규명, 속성적인 접근, 그리고 구약에서 하나님이 갖는 명칭들과 신약에서 갖는 명칭들의 성격을 찾아봄으로써 가능하다. 하나님의 본질은 그가 영이시고 인격적인 존재이심을 우선 들수 있는데 하나님은 그 본질상유일하시고 스스로 계시는 자존자 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영이신 까닭에 시간이나 공간의 제한을 벗어나신다.


하나님은 역사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한 순간에 읽으시므로 그 역사를 경영하여 나가시며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현재 세계는 물론 우주와 사후의 세계까지 통치하신다. 이러하신 하나님은 동시에 인격을 소유하고 계신다. 이러한 점에서 철학적 사고자들의 '막연한 궁극자' 또는 우주 밖에서 세상을 피상적으로 관찰하는 '절대자' 라는 개념의 신관과는 판이하다.


기독교에서 언급되는 성부 하나님은 유일의 하나님인 까닭에 자연주의의 범신론 이나 서방종교의 다신론과 구별되는 독특성을 갖는다. 더구나 인간들의 사고나 필요에 의하여 표상화되어지고 의미가 부여된 타종교의 신과는 달리 우리 하나님은 그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개시하여 주는 자존적 존재이시다. 기독교에 있어 나타나는 독특한 신관은 바로 이 하나님의 본질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봄으로써 그 정체를 보다 적절히 이해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속성에 나열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분의 거룩성이라 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이상 가운데서 하나님께 스랍들이 거룩함을 강조하여 찬양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참조; 사6:2). 하나님은 또 영원하여 시작과 끝이 없으시다. 이 영원하신 하나님은 전능성과 전지성을 겸유하고 계신다. 전능하시므로 무에서 유의 창조를 이끄셨으며 전지하시므로 자신의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전능성과 전진하심은 곧 그 운동 거취의 무소부재하심에 귀결된다.


하나님이 세상의 경영과 우주의 통치에서 일관되게 적용하여 오시는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과 공의의 선하신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속성에 내재된 자비와 진실하심, 그리고 변치 않으심은 이 실천들의 세밀한 구체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1) 하나님은 영이시니(프뉴마 호 데오스)
요한복음은 영(프뉴마)과 육(사르크스)을 구별하여 대립시킨다. 전자는 하나님의 영역을 나타내고 후자는 세상의 영역을 나타낸다. 육(사르크스)은 마귀(디아볼로스)나 세상(코스모스)과 같다. 반면에 하나님은 영(프뉴마)이시다. 인간은 언제나 양자 택일의 책임 앞에 서있다(참조; 요3:6). 즉 육(사르크스)은 차안적이며 인간적인 삶의 양식을 뜻하고, 영(프뉴마)은 피안적이며 신적인 삶의 양식을 뜻하는 것이다.


2) 신령과 진정으로(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
영이신 하나님은 그 예배하는 자들에게 영(프뉴마)과 진리(알레데이아)를 요구하신다. 영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자기의 세계에서 즉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과 유사한 본성 안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 다시 말해 참된 실재의 세계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 하나님의 참된 실재는 그리스도로 세상에 성육신하셨다. 참된 예배는 성육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것만이 참된 예배 곧 진리의 예배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가장 적절하게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원래 히브리어<루아흐>로 묘사된 '영'은 '움직이는 바람'이라는 뜻으로, 죄로 물들고 또 유한한 인생들과 대비하여 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강조하기 위하여 쓰인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움직이는 바람'처럼 '무형적 존재'이시며, 동시에 '행동하는 인격자'이시며, 또 '생명의 근원'이심을 '영'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함께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영'의 성서적 의미


1) '영'에 대한 일반적 인식
 먼저 하나님을 '영'이라고 증언하는 성서적 '영'관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혼동하기 쉬운 일반적인 '영'에 대한 인식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어<루아흐>를 영어성경은 'Sprit'로 번역했고 한글성경은 그것을 '영'으로 번역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영적 존재'에 대해 살펴보면 첫째, 원시적인 관념으로서의 '영'관이 있습니다. 이는 모든 물체 안에는 '정령'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도 아직 그와 같은 원시적인 영관을 생각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도 아직 그와 같은 원시적인 영관을 지닌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골 교회에서는 집 뒷뜰에 있는 '나무'를 베는 일에도 목사님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집사님도 계십니다. 둘째, 미신적인 영관이 있습니다. 이는 죽은 사람의 '귀신'이나 '유령'을 '영'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셋째, 인간의 '영혼'은 불멸 하기에 그 '영혼'을 '영'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넷째, 한발 더 나아가 물질적 세계는 악하고 불안한 '미완의 세계'요 오직 보이지 않는 '본질적 철학의 세계'가 '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로 세계에 대한 관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양으로, 철학으로, 종교적 노력으로 이 불완전한 세계를 탈피하여 어떤 이상적인 세계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세계를 '영적 세계'라고 여깁니다.


2) 성경적 증언
 성경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은 그처럼 인간들이 생각하는 '요정, 유령, 인간의 영혼, 이상적인 세계'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신적인 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적인 특성'이라 한다면, 인간이나 인간 세계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의 고유하신 본질'을 나타내는 말로서 '하나님은 영'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영'이신 하나님과 대비하여 유한한 인생들을 가리켜 '육적 존재'라고 했습니다(참조; 사31:3;롬8:7;롬9:3-5).


2. '영'이신 하나님의 특성


1) 무형적 존재이심
 앞에서도 논의했듯이 '영'은 '바람'이라는 의미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람'이 '무형'이듯 영이신 하나님은 '무형적 존재'이십니다. 결코 인간들의 육체적 '눈'으로는 볼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요한 사도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요1:18)라고 했고, 바울 사도도 그처럼 증언했습니다(참조; 롬1:20; 골1:15; 딤전6:16). 그렇다면 성경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았다는 증언들이 있는데(참조; 창32:30;출3:4;신34:10;사6:1) 그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와 같은 말씀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실체'를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스런 상징을 통하여 가시적 형상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을 보았다는 뜻입니다(참조; 창18:1; 출24:9,10). 죄인인 인간은 본래적으로 하나님을 뵐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은 죄를 용납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2) 비물질적 존재이심
'영'이라는 뜻은 철저히 '비물질적'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늘, 땅, 땅 아래 물 속'(출20:4,5)에 있는 어떤 '물질적 형상'으로도 생각하지 말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께서 '손, 발, 얼굴'(참조; 창3:8;왕상8:29;시34:15;사65:2) 등은 가지고 계신 분으로 묘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표현은 영이신 하나님을 '의인화'하여 우리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도록 한 것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3) 생명의 근원자이심
'바람'은 '생명의 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구약성경 겔1:12에는 모든 '생물'들이 '하나님의 신'에 의해 활동하고 있음을 환성적으로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라고 하는 큰 의미는 만물과 인생에게 '생명과 힘'의 근원자가 되심을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3.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조건


1) 예배의 대상으로 여겨야 함
'육'적인 존재인 인생은 오직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께 '예배'할 수밖에 없는 '본문'을 지녔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이성이나 지혜로 만나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안에서 경배하고 신앙하는 자들만이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2) 신령으로 섬겨야 함
'신령'(요4:24)은 '인간의 정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비물질적 존재이시기에 결코 물질적인 그분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릴 '헌물'이 있다면 바로 '정신'일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 희망, 충성, 뜻'이 깃들어 있는 '정신'을 하나님께 드려야만 진정한 '헌신'이요 '영적 예배'(롬12:1)가 되는 것입니다.


3) 진리를 따라 섬겨야 함
'진실'(요4:24)은 바로 '진리'라는 뜻입니다.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참조;요1:17). '영'이신 하나님이시기에 비진리적인 인간적인 노력과 지혜와 수단으로는 하나님과 친교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오직 '육신의 모양'(롬8:3)으로 친히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은총을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 2 - 인격적인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에피 톤 데오 톤 존타)


성서의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움직이시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바로 이 역사하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시고, 이것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 이스라엘은 곧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장(場)을 제공하고 있다. 성서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소개하는 것은 행동하시는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말하기 위함이다. 하나님 앞에선 이스라엘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요구받는다. 흔히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인격이라는 개념을 의인론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인격(person)이란 말이 라틴어의 persona(가면, 탈)에서 왔다면, 하나님의 인격성이란 역사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활동의 모습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그 인격성은 살아있음에 그 특징이 있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곧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살아 행동하시는 '인격적인 신(神)'으로 계시해 줍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마26:63; 행14:15)이라는 뜻은 바로 하나님의 '인격성'을 강조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인격적이신 하나님은 우상들과는 달리 인간들의 뜻을 초월하셔서 자신의 거룩하신 뜻을 결정하시고, 섭리하시며,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인격'을 살펴봄으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더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인격성에 대한 성경의 증언


1) 하나님의 인격적 요소들
 우리는 '인격의 요소'를 '감정, 지성, 의지'로 봅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세 요소를 하나님께서 지니고 계심을 보여 줍니다.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시고(참조; 창6:6; 시103:8-13) 그 '감수성' 중에 가장 뛰어난 특징을 '사랑'(요3:16) 이라고 증언해 줍니다. 또 완전하신 '지성'을 소유하고 계시며(참조; 창18:19; 출3:7; 행15:18), 거룩하신 '의지'를 소유하고 계십니다(참조; 창3:15; 시115:3; 요6:38).


2) 인격적이신 하나님의 활동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인격'을 지니신 하나님께서는 인생들과 만물들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시고 계시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첫째,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참조; 창1:3).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 즉 '인격성'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한 인생들과 인격적인 대화로 사귐을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대화'를 깨뜨리고, 거절하고 거부하는 것은 결국 '불신앙의 죄'인 셈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성경'과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을 해오시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히1:1)하기를 원하신다고 성경은 증거해 줍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이 곧 '영생'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참조; 요일1:2,3).


둘째, 인생들의 행위를 보시고 듣고 계십니다(참조; 창11:5; 시94:9). 인생들이 자신의 행동과 삶을 책임져야 할 근거는 바로 인격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인생사 모두를 듣고, 보고, 판단하고 계시는 데 있습니다.


셋째, 인생의 '불의'에 대해 진노하십니다(참조; 창6:6; 신1:37). 특히 인생들이 마땅히 섬겨야 할 하나님 대신에 인간과 물질과 세상의 허영들을 '우상화'하는 것에는 맹렬한 '질투'를 하신다고 했습니다(참조; 출20:5).


넷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따뜻한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니다(참조; 시114:4). 이와 같은 인격적 특성을 지니신 하나님은 그 인격의 특성들을 따라서 만물을 창조, 섭리, 보존, 통치하십니다(참조; 행14:15; 느9:6; 시7:6,7).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인격성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10).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한 제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성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밝히 드러났습니다. 그 사실을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셨음
 인생들의 '불의'에 대한 '거룩한 의분'(참조; 마23장), 또 한없으신 '긍휼심'(참조; 마9:36; 요5:6)은 바로 인생을 향하신 '창조주의 감정'을 보여 주신 예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은 '사랑'에서 기인된 것임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세상의 인생들을 사랑하시되 '독생자'까지 이 땅으로 보내 주셨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말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지성'을 보여 주셨음
'산상 수훈'(마5-7장)을 읽어 보십시오. '너희 중에 죄없는 이부터 돌로 치라'시던 그 뛰어나신 '지성'을 생각해 보십시오(참조; 요8:3-9). 또 앞날에 대한 전지하신 통찰력들(참조; 마24장)은 모든 인간들의 지혜를 초월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지성'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특히 사탄과 인간들의 불의를 참으시고 끝까지 '골고다의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얼마나 거룩하신 '지성'의 소유자인지를 보여 준 예가 됩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지'임
'인격적 존재'라는 의미는 한마디로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지'그 자체입니다. '인생 구원'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주 최대의 '결단'을 내리신 사건이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며, 또한 모든 악의 세력들의 도전과 훼방을 물리치시고, 또 '인성'의 한계도 극복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겟세마네의 결단'(참조; 눅22:42)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초의지적 행동'입니다.


3. 인격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조건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인격적 존재'이신 하나님과 교제를 맺으려면 우리 인생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인격적 관계'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이기적 '상업주의' 풍조에 물든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마저도 그와 같이 비인격적으로 섬기려 하고 있습니다(참조; 딤전6:5).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이 없는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값으로 내주시기까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인생들도 '마음과 성품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전인격적으로 응답해야 합니다(참조; 마22:37-40). 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인격을 걸고 언약하신 그 '구원의 약속'을 의심없이 믿고, 그 언약을 끝까지 의뢰하며, 그 언약에 합당한 존재가 되기를 힘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격'을 존중해 드리는 것임을 유념합시다(참조; 요14:21; 히6:16-18).
 
 
 하나님의 본질 3 - 유일하신 하나님


1) 이스라엘아 들으라(아쿠에 이스라엘)
이 부름말은 고대에 제의적인 집회를 시작할 때의 외침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이 말로써 도입되는 외침의 내용이 이방 민족들의 다신교와는 달리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의미에서, 또는 각기 다르게 전해진 신앙 전승들이 여러 가지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분 여호와만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한다. 여호와의 유일성을 외치는 이 말은 그 본문의 서두를 따라 '쉐마'라고 부른다. 히브리어로는 (쉐마 이스라엘)이다.


2) 유일하신 주시라(퀴리오스 에이스 에스티)
 '유일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유일자요 참하나님이시라는 이 정의는 구약성서의 유일무이한 진리라고 할지라도 이스라엘의 종교사 가운데서 비교적 후대에 형성된 개념이다. 이 사상을 조직적으로 발전시키고 정립한 이는 이사야이다. 그는 포로기라는 고난의 역사 한 가운데에서 여호와는 유일신으로 선포하며, 이 전에도 그 이후에도 다른 신은 없다고 외쳤다. 특히 이스라엘을 사로잡아 그 힘과 과시한 바벨론의 위대한 신들조차도 한낱 나무 조각이나 금속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여호와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그분을 부르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존재하시는 신(神)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렇듯 성경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을 증언해 줍니다(참조; 출8:10;사40:18;요일5:7). 그러나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일신론주의'와는 혼동을 피해야 합니다. 이제 그와 같은 내용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유일성의 의미


 하나님께서 유일하시다고 할 때 그 말은 단순히 '수'적인 개념으로 유일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깊은 신앙 고백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1) 존재적으로 단 한 분이라는 의미
 본문에 '오직 하나'로 번역된 히브리 말은 원래 '에하드'라는 뜻입니다. 이는 숫자적으로 '하나'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는 존재적으로 한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와 같은 증거는 성경 곳곳에 있는데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왕상8:60) 했으며, 신약성경에서도 바울 사도가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고전8:5,6)라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이 바알 신들을 섬기고, 또 쥬피터니 아프로디테니 하여 '다신론주의'에 젖어있을 때에도 이스라엘 민족과 기독교인들은 오직 하나님은 '한분' 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2) 질적으로 하나라는 의미
 이 의미는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의 교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계시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나 속성으로나 모두 통일되게 계시다는 의미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부, 성자, 성령의 세인격으로 계신 분이 '하나'라고 하는지 납득이 잘 되지 않으실 줄로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은 '물질'이 아닌 '영'임을 우리는 이미 배웠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시기에 숫자적인 논리로 '삼위일체'의 교리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영'의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신앙을 가지지 못한 '유대교'나 '마호메트교'에서는 '유일하신 하나님'은 믿지만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은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유일하신 하나님'관은 단순히 한 분으로만 계시는 하나님을 뜻함이 아니라 삼위일체로 계시면서도 본질적으로는 한 분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세 위격이 모두 동일하신 신적 능력과 본질과 권위를 가지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참조; 엡4:4-6).


3) 단 한 분만이 신앙의 대상이라는 의미
'카일'이라는 구약 신학자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분이시라는 의미는 신이라고 이름 붙이기에 오직 홀로 합당하다는 뜻이다'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고백하는 의미는 오직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만이 우리가 경배해야 할 참하나님이라는 신앙 고백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입니까…거룩…영광스러우시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출15:11)라고 했습니다.


2. 유일하신 하나님의 행사


 그렇다면 유일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 인생들에게 행사하시는 내용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성경의 증언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유일하신 창조주로서 계심
 이 세상 모든 만물과 인생의 유일하신 주인으로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우리는…한 하나님이 지으신 바가 아니냐'(말2:10) 라고 했는데 이는 창조주는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며 우리 인생들은 본질적으로 '피조자'임을 인식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업적이나 가치관을 이루어 놓았다 해도 겸허하게 이웃을 대하고 내가 무슨 '창조자'나 되듯이 교만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2) 유일하신 구원주이심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딤전2:5)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신'(神)이시요, 창조주이시니 지으신 인생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도 오직 하나님 밖에 안 계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의 힘' 도 또 '인간의 지혜'로 만들어 낸 사상이나 제도도 또 '인간의 탐심'으로 만들어 낸 모든 '신화적 우상'들도 인간의 '의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해 내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시며,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분도 오직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3) 유일하신 심판주이심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약4:12). 인간들이 자꾸 신화와 우상들을 만들어 내는 이유를 어떤 종교심리학자는 '회피와 은혜와 기만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즉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회피하고, 자신의 죄를 전가시키며,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기만하기 위해 여러 신화와 우상들을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아전 인수'격으로 자기들에게 좋은 신들을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일하시기에 그 뜻과 공의가 나뉘지도 않고 변질되지도 않으십니다. 한번 심판하기로 작정하셨다면 기필코 심판하실 뿐입니다(참조; 시139편). 그리고 그 심판을 막아 주거나 그치게 할 다른 신적인 존재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의 진실한 회개만이 그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이 됩니다.


하나님의 본질 4 - 스스로 계신 하나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에흐예 아셰르 에흐예)


모세는 자기를 이스라엘에게로 보내시는 그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다. 그 대답은 이러했다(에흐예 아셰르 에흐예). 그리고 같은 절 안에서 이 말은 다시 한 단어로 줄어져서 표현된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 곧(에흐예)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계시한(에흐예)는 영어로 'be' 동사에 해당하는(하야)의 1인칭 단수형이다. 즉 '나는…이다' 라는 뜻이다. 그런데 구약성서에서 (하야)가 단순히 '존재함' 또는 사람이나 물건의 '정체된 상태'를 나타내는데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의 언어 구조상 영어의 'be' 동사와 같은 것은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즉 '명사 문장'이라는 것을 사용함으로써 동사나 연계사(be동사)가 없이도 하나의 문장은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히브리의 언어 구조는 그들이 정적인 사고에는 익숙하지 못하고 오직 동적인 범주에서 모든 개념을 생각한다는 그들의 사고 경향을 보여 준다.


아삽은 그의 시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성호를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 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시76:1). 하나님의 칭호는 다양합니다. 그 중 제일 독특한 칭호는 오늘 말씀의 제목이 되는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참조; 출15:3). 이 하나님의 칭호는 '여호와'로서 특별히 은혜의 하나님 되심을 밝히는 자기 계시로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겸허한 접근이라 하겠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인지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구속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에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제하에서 말씀을 상고할 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1. 유일하신 하나님


1) 우상과 비교될 수 없음
 고금을 막론하고 우상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 모든 우상들이 저마다의 형상을 가지고 있음에도 예외없이 누군가의 손에 의하여 조각되거나 만들어졌음을 보여 줍니다(참조; 행19:23-26). 그러나 모세의 질문에 응답하는 하나님은 누구에 의하여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되심을 밝혀 줍니다.


2) 구속의 계약을 맺은 인격적 하나님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강요가 아닌 은혜의 계약을 하여 주십니다. '…나는 너의 방패요 상급이라'(창15:1).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2). 또한 중요한 것은 은혜의 계약을 주시는 하나님은 변개치 않으시다는 사실입니다(참조; 말3:6; 레24:4). 이처럼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은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자존자로서의 능력의 소유자이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 역사적인 하나님


 가시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모세는 창조의 역사를 포함한 이스라엘 조상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입니다(참조; 출3:13)


1)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더욱 확고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3:15).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시작한 선민의 하나님으로서 그들의 역사의 중앙에서 어제나 오늘이나 변치않는 동일한 하나님이 되심을 적극적인 계시로서 보여 주셨습니다(참조; 히13:8).


2)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드시는 하나님
 역사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관망자로 그치지 않으십니다.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2:16). 과거의 하나님께서, 오늘의 역사 선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인 모든 성도들을 붙잡고 계신 것입니다(참조; 롬4:16). 뿐만 아니라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은 성도를 떠나지 않고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믿음의 사람들과 언제나 함께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참조; 마1:23).


3. 예배의 대상이 되심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은 홀로 예배의 대상이 되십니다. 전도서 기자는 전도서 12:13절에서 이렇게 결론적 단언을 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그렇다면 어떤 내용의 경배가 가능할까요?


1) 언약의 성취를 바라며, 언약의 성취됨을 기뻐함
 성서에 기록된 수많은 노래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의 성취됨을 즐거워 노래하였습니다(참조; 출15:1).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그리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참조; 눅1:39-5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술에서 '애굽에서 구원'을 베푸신 은혜의 노래가 끊이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참조; 신32:1-47).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언제나 구속의 감격이 떠나지 않는 경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가서는 천국의 영생까지 성취될 것을 바라면서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이것이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참조; 히13:15).


2) 계명을 지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은 곧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예배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참조; 히13:16). 즉 계명을 지켜 사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삶임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30,31). 경배의 대상이 되셔서 예배를 기뻐받으시는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은 계명을 지켜 사는 믿음의 사람들의 삶에 두 가지의 약속을 더하십니다. 하나는, 이 땅의 삶 가운데서의 은혜이며 또 하나는, 천국의 상급으로 기억하며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참조; 마19:28, 29; 히11:6).


모세는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출15:2,3).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되심을 깨달은 모세는 그의 삶속에서 은혜의 계약이 성취됨을 기뻐하며 노래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와 같고(잠18:10)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며(참조; 시76:1) '여호와'의 이름보다 아름다운 이름은 존재 하지 않습니다(참조; 출20:7).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150:6). '할렐루야'의 '야'는 '여호와'의 약어입니다. 오직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만이 모든 입술의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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