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에 관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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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초가잔빌 유적지 전경
초가잔빌 지구라트의 원래 모습
남쪽 정문
남서쪽 문과 제단
북동쪽
서쪽
우르의 지구라트
우르의 지구라트는 3층의 기단 윗부분에 主神 난다에게 봉헌한 신전을 배치하고
정면과 양 측면에는 계단을 배치한 구조이다.
이러한 형태의 지구라트는 카시트시대(BC 2000년대 후반) 두르쿠리갈주에서도 볼 수 있다
서기전 2100년경 건설된 우르의 지구라트는지금까지 발견된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전된 것이다. 당시 우르 제III 왕조의 왕 우르-남무는 이 도시의 수호신 난나(Nanna)를
모신 신전을 좀 더 높은 곳에 세워 도시의 중심적인 상징으로 만들고자 했다.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의
원형이기도 한 지구라트는 원래 꼭대기의 신전을 받치기 위한 받침대에 불과하다.
따라서 비록 지구라트가 이집트의 피라미드로부터 그 건축적인 아이디어를 빌려왔지만
이곳에서는 무덤이 아닌 신전 받침대로 활용됐다.재질이 약한 흙벽돌을 주로 건축자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강도를 높이기 위해 역청을 사이사이에 깔았고 어떤 경우에는 갈대로 엮은 매트리스를 일정 간격으로
흙벽돌 사이에 끼워넣기도 했다.
이라크에 있는 많은 지구라트 중 하나의 모습이다.
바빌로니아 전승에 의하면 이 탑은 원래 니므롯이 축조했다고 한다.
아랍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탑이 있는 지역을 Birs Nimrud, 즉 '니므롯의 땅'이라고 부른다.
이 탑은 옛날 하나님이 중단시킨 바벨탑과 동일한 유형의 것이지만 그 보다는 훨씬 작다.
바빌로니아의 신전을 지구라트라고 한다. 그 신전 중 제일 큰 것으로 보이는 탑이 근래에 와서 발견되었다.
바빌로니아 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바빌로니아의 최고 왕이 느부갓네살이고,
예루살렘을 함락한 것이 기원전 586년인데 그 당시에도 이미 지구라트는 오래 된 탑이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건축물은 서로 맞물리는 여덟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위에는 꼭대기에 오르기 위한 나선형의 길이 나 있으며,
그 꼭대기에는 거대한 신전, 바빌로니아의 신의 집을 지어 놓았다고 기록하였다.
이 거대한 건축물은 210m 이상의 높이를 가졌고 한 층을 약 3m로 잡으면 70층이 된다.
수천년 전에 만들어진 이 벽돌 한 장 한 장에는 놀랍게도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자기들이 섬기던 신의 이름인
'마르둑(Marduk)'이라고 쓰여 있다
<16세기 플랑드르 화가 브뤼겔의 "바벨탑">
6층에 바알신의 지성소가 있었다
바빌로니아는 원래 「신의 문」(bab-ili)이라는 뜻이다.
또 고대 도시의 한 복판에 지어진 바벨탑은 하늘과 지상이 통하는 스타게이트였다.
일찍이 바빌로니아에 터를 잡았던 수메르 인들은 높은 산이나 언덕마다 탑을 빼곡하게 올리면서
신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올 때 발을 내딛을 받침대로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바벨탑이 그 전통을 이어받았다.
구약의 예언자 다니엘도 이곳 바벨탑 그늘 아래로 자주 지나 다녔을 것이다.
바벨탑을 목격한 사람은 또 있었다.
기원전 458년 바빌로니아를 방문한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네모반듯한 밑그림에 탑이 서 있었는데, 탑 위에
탑이 올라붙고, 그 위에 또 다른 탑이 올라붙는 식으로 모두 여덟 개의 탑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는데…
맨 꼭대기 탑 위에는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고 전한다(역사 I, 181~183).
모두 벽돌을 구워서 쌓은 탑이었고, 꼭대기의 신전은 지붕에다
파란 유약을 발라서 구운 기와와 황금을 씌워서 멀리서 도시로 들어서는
나그네의 눈을 눈부시게 했다고 한다.
보라 ~ 이 웅장함을...양때치고 유목하는 그때의 인간들이 이 높은 탑을 보고 무슨생각을 했을까?
루카스 반 발켄보르흐의 바벨탑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모세가 직접 창세기를
썼다고 본다면 바벨탑 이야기는 기원전 13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 모세가 바벨탑 이야기를 쓰면서 옛 기록을 다시 정리했다고 치면 더 까마득하게 올라가니까
창세기의 바벨탑은 기원전 1700년께 함무라비 대왕이 건립했다는 첫 바벨탑으로 보아도 좋다.
첫 바벨탑은 천년 넘게 세월을 버티다가 낡아서 허물어졌고, 기원전 600년께 같은
자리에 새 바벨탑이 지어진 뒤, 다시 150여 년이 지난 시점에 헤로도토스가 보았던 것이다.
기원전 597년 예루살렘의 함락과 더불어 낯선 타국 바빌로니아에 강제 이주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찍이 한 차례도 본 적이 없는 거대 도시의 풍경과 만난다.
인구 150만 명에다 18km가 넘는 성벽이 에워싼 철옹성 도시의 위용은 기껏해야 양이나 염소를 치며
빈 들의 우물을 찾아서 유목 생활을 하던 그들에게 신기루 같은 딴 세상의 풍경이었다.
또 고대 최고의 도시가 자랑하는 성역 한 복판에 들어선 바벨탑은 인간의 솜씨로 믿을 수 없는 기적의 건축이었다.
그러나 유다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37~98년)는 바벨탑을 「반항의 건축」이라고 규정한다.
인간이 바벨탑을 높이 쌓아올린 것은 만약 또 한 차례 대 홍수를 일으키더라도 안전하게 피신하려는 속셈이니,
인간의 꾀를 가지고 야훼의 분노를 벗어날 수 있다는 오만의 죄를 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예언자들이 즐겨 입에 담았던 「바빌로니아의 창녀」가 「도시 바빌로니아」를 겨냥한 말이었다니까, 자태가 사뭇
눈부셨다는 바벨탑은 마치 바람난 처녀 바빌로니아의 헤픈 치맛자락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인간은 그후로 계속해서 바벨탑을 세운다....
창세기의 기록
바벨탑 이야기는 성서의 창세기에도 나온다.
『사람들은 동쪽에서 옮아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거기 자리를 잡고 의논하였다. 「
어서 벽돌을 빚어 불에 단단히 구워내자.」 이리하여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쓰게 되었다. 또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의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놓아
사람들을 온 땅에 흩어놓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창세기 11: 2~9)
창세기의 기록은 야훼가 사람들의 말을 뒤섞는 바람에 도시를 세우는 일이 중단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헤로도토스가 보았던 바벨탑은 창세기에 짓다 만 바벨탑과 같은 것이었을까?
이 문제는 쐐기글자로 씌어진 명판의 한 구절이 해독되면서 실마리가 풀렸다.
신 바빌로니아 왕국의 나보폴라살 왕(B.C. 624~604년)이 남긴 기록이었다.
『그때 마르두크 신은 이미 낡아서 붕괴된 바벨탑을 다시 지으라고 나에게 명령을 내렸다.
새 바벨탑은 바닥 돌이 지하세계의 심장에 닿고 탑 끝은 하늘을 찔러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헤로도토스가 보았던 탑은 원래 같은 자리에 있던 옛 바벨탑을 허물고 새로 지은 두 번째 바벨탑이 된다.
공사를 너무 크게 벌인 탓인지 나보폴로살 왕은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바벨탑 공사는 왕위를 계승한 아들
느부갓네살 왕(B.C. 604~562년)이 물려받는다. 그가 남긴 명판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나는 하늘과 어깨를 겨루는 에테메난키의 탑 끝을 올리는 공사에 착수했다』
여기서 에테메난키(E-te-men-an-ki)는 「하늘과 땅의 받침돌」이라는 뜻이니까,
바벨탑 공사는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을 한 코에 꿰는 인류 최대의 역사였던 셈이다.
[한국 컴퓨터 선교회 제공]
바벨탑 [Tower of Babel]
바벨탑 사건과 민족 이동
바벨탑사건과 언어/문자의 계보로 본 인류의 이동경로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사건은 여러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특히, 바른 역사의 복원이라는 차원에서 더욱더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사건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핵심은 인류최초의 집단 반역사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언어 혼잡과 족보의 기록이라는 두 가지의 조처를 취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언어를 혼잡시켜 세상끝까지 인류집단을 흩으시면서도 각 집단 속에서 불신자들 속에서 살아 나갈 경건계열의 성도들이 성결하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생명책의 모형인 족보를 기록해 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바벨탑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 무시무시했던 대홍수의 악몽이 가신지 다섯 세대(약 100년)가 지난 때였습니다. 홍수의 공포로 아라랏산 속에서 어려운 생활을 해 오던 노아의 후손들은 그 일부가 서서히 산의 북, 서, 동편으로 하산하면서 흩어지기 시작했고 그 주력부대 중 일부가 남동쪽의 옛고향을 향하여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곳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라는 거대한 강이 양편으로 흐르는 사이에 위치한 곳이라서 농사짓기에 알맞는 땅이었습니다. 이 기름진 곳에 이르자 이미 믿음을 내 버린 그들에게는 백여년 전에 있었다는 노아 할아버지 시대의 홍수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 엄습해 왔을 법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홍수로 자기네들을 벌하신 하나님께 대해 강한 반항심리가 불같이 일어났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함족에게 더욱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노아 할아버지가 자기네 가나안 후손들에게 형제들의 종의 종이 되도록 저주를 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간파한 함의 손자인 니므롯은 함족을 중심으로 거대한 음모를 꾸미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시날(수메르) 평야에 거대한 성을 쌓아 적의 침입을 막음과 동시에 자기네 집단의 흩어짐을 막기 위해 성곽을 쌓고 성 중앙에는 거대한 탑을 건설하여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사시에 홍수가 다시 덮친다 해도 그 꼭대기로 피신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건축공사를 함으로써 자기들의 단합된 힘을 주변에 과시함으로써 자신의, 아니 저주받은 함족의 통치력을 강화하여 노아의 예언, 아니 더 정확히는 하나님의 예언이 어찌 되는지 지켜 보자는 것입니다. 탑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것은 하나님께 대항하려는 것이고 탑 꼭대기에 사람의 이름을 내자는 것은 인본주의를 표방하자는 것이며, 자기 족속들이 온 지면에 흩어짐을 막자고 한 것은 땅끝까지 정복하여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셨던 창조주의 말씀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추측컨데, 니므롯은 바벨탑을 쌓기 이전에 이미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였던 것 같습니다. 창세기 1O장에 나오는 기록들이 이 같은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동편의 강력한 악카드족과 북방의 앗수르 족을 쳐서 점령하였으며, 더 나아가 레센이라는 커다란 성을 건축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고대 바벨론 제국으로서 세계 최초의 세계제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먼저, 거대한 공사에 필요한 벽돌공장과 이 벽돌들을 서로 단단하게 연결해 주는 접착력이 강한 역청을 고아 내는 공장을 만들었습니다. 후일 조사된 바에 의하면 벽돌에는 자기네들이 당시에 하나님 대신에 창조의 신이라고 믿고있었던 '말둑(Malduk)'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바벨탑사건의 이전에 이미 문자가 존재했었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기도 합니다. 역청은 아스팔트의 원료인 타아르(tar)를 지칭하는 것인데, 이는 그 지방에 노아홍수 때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방대한 양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건축자재를 가지고서 마침내 성곽과 탑쌓기 공사가 착착 진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기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렇게 쌓기 시작한 탑이10M, 20M, 50M높이로 올라갔습니다. 오늘날, 이라크 지방에서 출토한 지글라트는 바벨탑의 흔적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그 중에는 높이가 90M에 이르는 것도 있습니다. 이처럼 탑이 올라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의 무모한 행위를 무작정 묵인만 하고 계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고 그들을 세상 끝까지 흩어지게 하자." 이렇게 말씀하시자 마자 바벨론 제국은 크나큰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지요. 탑의 윗쪽에서 "벽돌 세 가마니를 올려 줘"라고 소리를 치면 아랫쪽에서는 "What did you say?"라 하고, 그러면 탑 중간에서 일하던 자들은 "뿌지타오(不知道)" 라 하고,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또한 무리는 "わかりもせん" 이라고 제각각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여대니 탑쌓는 일은 순식간에 중단될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은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었겠죠. 이렇게 해서 모인 집단이 후일의 민족(民族)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죠. 따라서, 민족의 기원은 언어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어족(語族, language tribe) 라고 부르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언어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민족을 지탱해 주는 혼적(魂的)인 요소라 할 수 있으므로 언어를 잘 가꾸어야만 그 민족의 영속성이 보장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점이 우리 크리스찬 엘리트들이 가슴 깊이 명심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벨론 제국을 일시에 엄습한 언어의 혼잡(confused; balal,히)으로 하늘의 문(babili; gate of heaven,바)을 건설하려 했던 그들의 꿈은 산산조각 무너져 내리게 되었고, 같은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삼삼오오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이동하게 된 것이죠. 이것을 인류이동사(人類移動史)라 하는 것이지요. 이 과정은 수천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도중에 민족들간에 크고 작은 무수한 분쟁을 겪으면서 오늘의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이것을 국가(國家)라 부르게 된 것이죠.
민족의 이동과정은 저의 추측적 견해로서는 멜라닌(melanin) 색소가 많이 분비되어서 피부색이 검은 사람들은 햇볕을 좋아하게 되기 때문에 자연히 햇볕이 많이 내려 쪼이는 남쪽을 향하게 되었을 것이고, 색소의 저분비로 피부가 흰 사람들은 햇볕이 적게 비치는 북녘을 향하게 되었으며, 황색인종들은 해가 돋는 동쪽을 향하여 거의 평행적인 방향으로 이동하게 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 후에, 정착지에서 기후와 풍토에 알맞게 적응하면서 같은 피부의 인종끼리 결합하여 오래 살다보니 피부 색깔이 유전적으로 우성인자가 되어 같은 후손들이 태어나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똑같은 원리로, 골상이나 혈액형도 유전자의 우열의 법칙에 따라서 우성인자가 그 집단에 오래동안 축적되다 보니 오늘날과 같은 인종으로 나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인종의 분포상황으로 미루어 보건데, 셈(Shem)족은 중동지방을 비롯한 적도 북반부의 온난한 지역을 따라서 거주하고 있으며, 캄챠카 반도를 거쳐서 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으로 정착하였고, 함(Ham)족은 중동지방에서 한 부류는 아프리카로, 다른 부류는 동남아를 거쳐서 인도네시아, 오스트랄리아, 폴리네시아 등지로, 야벳족은 지중해연안과 유럽 및 북쪽지방에 거주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부 인종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들도 제기되고 있는 터라 앞으로 더 규명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예컨데, 중국민족은 피부색으로 볼 때에는 셈족이지만 제반 상황을 종합해 보면 야뱃족의 일파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으며,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던 진시황은 함족의 후예로 주장되기도 합니다. 우리 한(韓)민족 역시 피부색으로 볼 때 셈족으로 보고 있으나 바벨론 제국을 건설했던 함족설로부터 힛타이트제국을 건설했던 헷족속의 후예설, 악카드족의 후예설 및 야벳후예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론들이 다양하게 주장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민족은 인류의 이동과정에서 다른 민족에게 혼혈, 동화가 되어 버린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민족을 구성하는 요소로는 오랜 역사, 문화 및 전통의 공유, 같은 신화와 종교, 언어와 문자를 공유하면서 공통의 운명을 같이 해온 집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집단들이 이동할 때에는 그 만한 이유들, 예컨데, 전쟁, 기근, 종교나 미신적 터부, 질병 등이 있어야만 이동하게 되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이동경로는 아직도 베일에 가리워 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아리안족이나, 동/서코오트족, 반달족, 훈족, 투루크족, 기마족의 대륙간 이동은 우리의 주목을 끌만한 커다란 사건들입니다.
이러한 민족단위의 이동은 대개가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스쳐 지나간 곳에는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흔적이 남기 마련입니다. 장례/제사의 흔적이라는 고인돌, 혼혈인종, 주거양식, 음식, 언어와 문자, 화석, 신화와 종교 등이 그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언어와 문자는 웅변적으로 인류의 이동경로를 알려주는 명백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졌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누군가가 강압적으로 없애려 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정시대 때 일본인들이 우리 말을 없애려고 창씨개명에다 초등학교 때부터 일본어를 배우게 했지만 우리 말과 한글은 해방과 더불어 찬란하게 부활하여 배달민족의 문화를 다시 꽃피우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자리를 빌어 언어와 문자 속에 나타난 인류의 이동경로를 어렴풋이나마 여러분과 더불어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
세계의 언어와 문자의 계보
현재, 세계에는 4천여종의 언어가 있으나 이 중에서 문자를 가진 것은 3백여종에 불과합니다. 언어는 크게 나누어 볼 때 인도/아리안어, 중국/말레이어, 앵글로/색슨어, 우랄/알타이어 등으로 분류되고 있지요. 이중에서 지역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은 라틴어(영어)〉러시아어〉아라비아어〉중국어〉인도어〉스페인어 순이며, 인구적으로는 역시 라틴어(영어)에 이어 중국어〉인도어〉아라비아어〉스페인어 순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우리 말은 우랄/알타이어 중에서도 알타이어에 속합니다. 이 부류에는 우리말 외에 일본어, 훈어(몽글어, 터키어), 퉁그스어(만주어)가 포함되어 있지요.
그러면, 이제부터 문자의 계보에 대해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주지하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는 수메르의 점토판문자 입니다. 옛 수메르 지역이었던 지금의 이라크 남부의 우르지방에서 BC 3500여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판문자가 3,900매나 발굴되었는데, 당시에는 종이나 가죽이 없었기 때문에 진흙을 곱게 손질하여 편편하게 만든 후 말려서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그 위에 골필이나 단단한 나무를 뾰족하게 갈아서 토판에 대고 흙을 파내면서 글씨나 그림을 새겨 넣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글씨는 토판의 안쪽으로 파서 새겨졌기 때문에 음각(陰刻)문자라 불러지게 되었지요. 여기에서 수메르쐐기문자(설형문자, BC 31C)와 원(原)엘람상형문자(BC 30C) 및 이집트상형문자(BC 27C)가 파생되었지요. 이 이집트상형문자에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거의 모든 문자들이 파생되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즉, 이집트상형문자에서 고(古)시나이문자를 거쳐서 페니키아문자(BC 12C)가 나왔고, 페니키아문자로부터 남아라비아문자, 그리스문자(BC 8C), 아람문자(BC 31C)가 갈라져 나왔죠. 다시, 남아라비아문자에서는 에티오피아문자가, 그리스문자에서는 라틴문자와 슬라브문자가, 그리고, 아람문자에서는 인도계 제문자(BC 6C)와 히브리문자, 시리아문자(BC 3C)와 알메니아/그루지아문자(BC 5C)가 탄생했습니다. 뒤이어, 시리아문자에서는 위그루(7C), 몽글문자(13C), 만주문자(16C) 등이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한편, 중국한자의 모형으로 알려진 갑골문(甲骨文)은 거북이 껍질이나 짐승의 뼈 위에 새겨진 것으로서 은나라의 유적지에서 발굴이 되었는데 (BC 14C), 4,500여 글자중 겨우 1/3만이 해독이 된 상태라고 합니다. 이 글자형태가 발전하여 나중에 금문(金文, BC 15 ~ AD 3C)을 거쳐서 전서(篆書, BC 3C), 예서(隸書, 1C), 해서(楷書, 5C)의 순으로 발전을 해 왔습니다. 이 해서에서 일본의 가나(假那, 8C), 수문자(水文字, 10C), 글안문자(契安文字, 10C), 서하문자(西夏文字, 11C) 및 여진문자(女眞文字, 12C)가 나온 것이죠.
세계 최고(最古)문자에 속하는 고대 페르시아어와 바벨로니아어 및 엘람어를 처음으로 해독한 사람은 영국의 로린손 (Henry Rawlinson, 1810-1895)이라는 언어학자인데 그 일화가 재미있습니다. 테헤란에서 바그다드로 가는 길목에 케만샤(이란 서부)라는 지역에 100M가 넘는 베히스탄 이라는 바위산 암벽에 가로3M, 세로 5.5M 넓이에 쐐기형의 비문(설형문자)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쳐왔는데, 1833년 어느날 동인도회사의 사관으로 부임한 로린손이라는 젊은이가 페르샤 정부의 군사고문으로 임명이 되어 이곳을 지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암벽의 글자를 보고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후에 혼자서 말을 타고서 두 번을 현지답사 하다가 어느날 마침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하단부의 고대 페르시아어를 필사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대 페르시아어는 당시에 독일 학자인 게오르그 그로테휀트(1775-1853) 및 칼스텐니이불(1733-1815) 등에 의해 어느 정도 해독이 되고 있었던 터라 그는 이러한 자료들을 참고로 하여 4O종에 달하는 문자기호를 완전히 해독하게 되었고, 고대 페르시아어를 라틴어와 영어로 대역하여 "베히스탄에 있는 페르시아어 비문"이라는 논문을 왕립 아시아협회지(1846)에 발표하기에 이르른 것입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니느웨와 니므롯 지방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의 고고학자들이 다수의 설형문자들을 발굴하였는데, 오늘날 이것을 '앗시리아 설형문자'라 칭하며 로린손이 발견한 '바벨로니아 설형문자'와 구분하고 있는데, 이 문자는 후일에 수메르문자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로린손은 이어서 윗 단에 새겨진 엘람어를 구사일생으로 필사하였고, 최상부의 바벨로니아어도 쿠르드족 소년의 도움으로 탁본(拓本)한 후, 1848년부터 2년에 걸쳐 집중적으로 연구를 했다고 합니다. 그 비문엔 300개의 문자가 적혀 있었는데, 그는 바벨로니아문자 연구의 대가였던 에드워드 힌쿠스목사(1792-1866)의 도움을 받아 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1857년 어느날, 윌리엄 탈봇(1800-1877)이 '앗시리아/바벨로니아 설형문자로 기록된 텍스트를 하나 택하여 몇몇 과학자들로 하여금 해독케 하여 그 번역한 내용들을 서로 비교해보기로 하자'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번역용 텍스트로 선택한 것은 앗시리아왕인 디글랏 빌레셋1세(재위 BC 1115-1077)의 육각주(六角柱) 각문(刻文)이었다고 합니다.
이 제안에 응한 사람은 로린손과 프랑스의 설형문 연구자인 쥴 오펠(1825-1905), 그리고 에드워드 힌쿠스 등이었는데, 힌쿠스와 로린손의 해독문은 서로의 내용이 거의 완벽하게 일치했으며, 따라서 1857년의 이날이 앗시리아/바벨로니아문자 해독 기념일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에 의해 해독된 내용에 의하면 세 문자의 내용은 모두 같은 내용을 담고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당시의 아케메네스 왕조가 다민족으로 구성된 제국이었음을 알게 했습니다. 그 내용의 해독한 결과에 의하면 그 비문은 다리우스1세(재위 BC 522-486)가 기록한 것인데 그가 "선왕인 칸비세스 2세의 이집트원정에 따라 갔을 때 선왕의 동생이요 자기에게는 아저씨가 되는 발디라고 자처하면서 왕위를 찬탈한 마고스의 승려인 고오마타라는 자를 다리우스 1세가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암각된 글씨 위에 그려진 그림내용은 다리우스1세가 거짓 왕인 고오마타를 발로 밟고 있는 장면과, 목에 쇠사슬을 메고 끌려가는 9인은 다리오1세의 등극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제국내 여러 부족의 주모자들이라고 합니다. 페르시아의 알케메네스 왕조를 일으킨 큐로스2세(재위BC 559-529)는 칸비세스2세와 발디아의 아버지였으며, 다리우스1세는 이들의 분가(分家)였기 때문에 왕위등극을 정당화할 목적으로 이러한 비문을 만들 필요성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 후에도 로린손은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던 앗시리아계통의 비문들을 1861년부터 1884년에 걸쳐 연구하고 "서아시아 설형문자"(전 5권)를 출판한 후 1895년에 런던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상의 연구내용을 종합해 보자면 티그리스와 유프라데스강 사이에 위치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엔 앗시리아가, 남부엔 바벨로니아가 각각 자기 고유의 말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셈어에 속하는 것입니다. 남부 바벨로니아의 수메르인들이 발명한 수메르어를 바벨론 사람들이 자기 것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바벨로니아 설형문자는 사실은 수메르 설형문자라고 합니다. 베히스탄 비문의 둘째 칸에 새겨진 엘람문자는 수메르어와 같은 계통의 언어였던 것으로 고증이 되고 있습니다.
그 후에 프랑스 연구팀이 고대도시인 라가슈(1877)를, 미국 펜실바니아연구팀이 닛풀(1889)을 각각 발굴했는데, 라가슈에서는 앗시리아/바벨로니아외의 다른 여러 다른 유적들도 발굴이 되었고 닛풀에선 수메르문자의 점토판을 3만점이나 발굴해 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메르인과 수메르어가 어떤 계통의 것인지는 아직도 베일속에 가리워져 있다고 합니다.
“바벨탑을 쌓기까지 수년이 흘렀다. 올라가는 계단과 내려가는 계단은 각각 동쪽과 서쪽에 두었는데, 심히 높은지라 정상까지 오르는 데만 꼬박 1년이 걸렸다. 그래서 인부가 보기에 벽돌 한 장은 인간의 목숨보다 더 소중했다. 사람은 떨어져 죽어도 누구 하나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었지만 벽돌 한 장이 떨어질라치면 그들은 슬피 울었다. 그것을 다시 올리려면 1년이 걸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건설에 전념한 까닭에 임신부가 산통으로 작업이 지연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하늘을 향해 연신 활을 쏘자 피가 묻은 화살이 떨어졌다. 이 같은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우리가 하늘에 있는 사람을 모두 죽였도다!’라며 기고만장해 했으나, 사실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을 유도하여 반역죄를 물을 기회를 찾기 위해 환상을 보이셨던 것이다.”
--- 탈무드 『피르케이 드랍비 엘리에제르Pirke d'Rabbi Eliezer』 중에서)
바벨탑 사건은 이름 석 자를 세상에 내려는 ‘공명주의’를 엄중히 경고하는가 하면 사람이 제멋대로 살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은 거스를 수 없다는 교훈을 주기도 한다.
『창세기』 11장은 온 땅의 ‘입술(싸파)’이 하나고 ‘말(드바림)’이 하나라며 운을 뗀다. 구체적으로 밝혀지진 않았지만 동방에서 온 어떤 족속이 시날 평지에 정착해서는 벽돌을 굽기 시작했다. 그들은 도시와 탑을 건설하며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이름을 내고 서로 흩어지지 말자며 입을 맞추었다. 이때 하나님이 이를 보시고는 “입술”을 혼잡케 하시자,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던 그들은 온 지면으로 흩어지게 된다는 것이 전체 줄거리다.
언어가 달라져 도시를 건설하지 못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념이지만(옛 문헌을 보더라도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여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더러 있다.
(미드라쉬에 따르면, 언어가 혼잡해진 결과, 어떤 이가 “벽돌”을 달라고 하면 상대방은 “역청”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분통이 터진 그는 벽돌로 상대의 머리를 쳐 죽였다고도 하고(미드라쉬), 소통이 결렬된 까닭에 칼로 서로를 찔러 절반이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탈무드))
우선, 앞장(10장)을 보면 셈과 함과 야벳의 후손이 도합 70개의 언어와 종족대로 나누어졌다고 하며, 이때 “언어”는 “mother tongue(어머니의 혀 = 모국어)”에서 쓰이는 “라숀(혀)”이라 기록되었으나, 11장에서는 “라숀”이 단 한 번도 쓰이질 않았고, 바벨탑 사건 때문에 언어가 70개로 갈라졌다면 당시 건설 현장에는 70개의 족속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되지만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반증은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언어는 6,000여 개로 추정되는데 언어가 갈라진 것이 자연발생적인 현상인지, 하나님이 바벨탑 건설 때 혼잡케 하신 결과인지도 곱씹어볼 미스터리 중 하나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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