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가 왜 기독교를 받아들였는가?



1. 서론

지금 지구상의 1/3이상이 기독교를 믿고 있다. 오래된 종교이지만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지엽적인 종교에 불과했던 기독교가 이렇게 지금까지 건재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이런 세계적인 종교로 올라설 수 있었던 그 이면에는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되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당시 대제국에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로마인들에 의해서 전 세계적으로 뻗어갈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가 전파된 시점에서 그 기독교 전파의 시발점이 된 로마가 왜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게 되면 뭔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애초에는 많은 박해를 했지만 박해속에서도 끈기를 가진 기독교인들의 불굴의 투지가 있었기에 결국에는 기독교가 로마 황실에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로마황제인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인정되었으며, 테오도시우스 황제때에 완전하게 기독교가 국교화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된 이유를 살펴보자



2. 본론


로마인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양한 신들에 대해서 익숙해 있었던 로마인들은 기독교도 한 신을 섬기는 무리들로서 유대교의 한 분파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심각한 박해들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가면서 로마인들은 차츰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이유가 있다.


1) 박해에서의 생존

로마 제국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의 박해는 많은 분야의 학자들에 의해 관심을 끌고 있다. 또한 그 박해가 있었기에 기독교인들은 로마에서 생존할수 있었고 그래서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되게 된 것이다.


생리학적인 용어로 초과 회복의 원리란 것이 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이 운동을 해서 신체를 단련시키고자 할때에는 약간의 근육 파열이 있을 정도로 운동을 하는 것이 단단하게 근육을 만들고 더욱더 신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비결이라고 한다.


이것을 로마제국의 박해와 연관시켜서 이야기한다면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평탄한 상태에서 있었다기보다는 초과회복의 원리효과를 독특히 보았기에 로마에서 승리할수 있었던 것이다. 로마인들과 다른 이방인들에 의한 기독교인 박해로 인해 아픔과 고통은 있었지만 그 박해를 통해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더욱더 돈독한 신앙을 가진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에서 기독교인들이 끊임없이 박해를 받은 이유 2가지를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신경을 건드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심한 박해를 받았다.

둘째는 어디를 가든지 그 나라 사람들이 섬기고 있는 신을 인정치 않고 우상숭배로 정죄하면서 가르치기 때문에 토속종교로부터 심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기독교는 더 빠르게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클라우디우스의 뒤를 이은 황제는 기독교 박해로 유명한 네로황제였다. 네로 황제 재위시에 서기 64년에 로마의 중심가에서 원인 모를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때마침 교외 별장에 있었던 그는 급히 로마로 돌아와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시민들 사이에서는 네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러나 간신배들의 말로 인해 기독교인들이 희생양으로 선택되었다. 기독교인들을 방화범으로 몰기위해 투기장에서 무참하게 학살했다.


계속적으로 기독교 박해가 일어났는데 교세가 확장되어 가던 2세기이후 박해는 점점 심해졌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6년)때에 최대의 박해가 있었는데 칙령(303년)을 발하여 교인의 집회를 금지하고 교회를 부수고 성경을 불태울 것을 명했으며 신자로부터 모든 관직을 박탈하고 자유민의 경우 법의 보호마저 박탈했다. 이런 강력한 박해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때에 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기독교가 강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의 20년동안에 기독교에 대한 시각이 변화되는 기간이 있었다. 그것은 전통적인 신들은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기대한 도움을 가져다 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기독교의 신앙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로마 정부 당국은 자포자기 상태에서 나오는 힘으로 일해 나갔다. 락탄티우스는 박해자들의 맹목적이고 이성을 잃은 포악성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동방에서는 이것이 박해가 아니라 결국에는 어느 한쪽이 승리를 거두게 될 전쟁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시기 즈음에 들어서서는 교회에 대한 여론들이 많이 변하였다는 사실을 감지할수 있다. 락틴우스는 하나님은 이교자들을 교회라는 공동체에 들어오게 하기위해서 박해를 허용했던 것이라고 쓰고 있다.


이것들을 보게 되면 박해를 통해서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물론 로마인들조차도 교회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생겼고 또한 기독교인들의 박해에 굴복하지 않고 믿는 그 신앙심으로 생동감을 느껴서 저들도 기독교인들로 동화되었던 것이다.


2) 로마의 쇠퇴

로마 제국의 지식인들은 3세기 이전에만 하더라도 당당하게 현세주의를 내세워서, 그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로마는 그리스를 정복했지만, 문화에서는 그리스에 정복당했다”고 기원전 1세기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말하면 동석한 사람들은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까지도 “옳은 말씀”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철학과 예술과 과학은 모두 그리스인에게 맡기고, 현세의 생활에 필요한 안전보장이나 법률에 따른 정치, 인프라 정비, 식량보장은 우리 로마인이 책임지고 맡겠다는 식이다. 이 시대의 로마인들에게는 ‘정체성 위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왜 살고 있는가에 대해 자신있게 답변할수 있었다.


그런데 3세기에는 정체성의 위기가 오면서 이 질문에 자신있게 답변할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황제부터 일반인들에게 이르기까지 로마의 미래는 장밋빛이 아니라 회색빛이라는 그 불안함이 모두에게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인들은 사후나 장래에 대한 불안보다 지금 현재 눈앞에 있는 결핍과 불안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듭되는 야만족의 침입에 따른 살육과 약탈과 방화로 인해 농경지가 황페해지고 인구가 감소하게 되었다.


또한 생산력이 떨어지고 있는데도 국방비를 늘리기위해 거듭되는 특별세가 부과되었으며 이것을 피해서 도시로 흘러왔지만 과밀화한 도시에서는 일자리를 찾지못해 가족과 함께 어찌할바를 모르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사회복지 정책이 약화하여 전에는 훌륭하게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던 식량 무료배급이나 빈곤 가정 자녀를 위한 양육비의 형태로 불우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정책도 황제의 체면이 걸려있는 수도 로마에서만 간신히 지속되고 있을 뿐 부유한 개인의 기부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부유흥의 공공심이 줄어들면서 빈 껍데기만 남은 형편이었다. 이런 결과로 인해 희망을 상실한 많은 로마인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실제적으로 로마가 계속 강성한 상태에 있었다면 기독교가 성장할수 있었겠느냐하는 것은 의문이다. ‘팍스 로마나’가 완벽하게 기능을 발휘하고 있던 시대의 로마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필요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특히 다양한 신을 섬기면서 저들을 통해서 자신들의 부가 이룩되었다는 믿음, 선택해서 믿을수 있고 필요할때에 거기에 해당되는 신을 찾아가서 구해서 응답받았다는 믿음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삶을 살았던 저들이었기에 초창기에는 기독교가 득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3세기에 들어서면서 로마에 많은 위기가 닥치기 시작했다. 내란으로 인한 경제적 파멸이 뒤따랐고, 가공할 전염병인 페스트가 15년 동안 엄청난 인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뿐만 아니라 서쪽의 게르만족과 동쪽의 페르시아 인들은 옛 로마 방어선을 돌파하고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처형하기도 했다. 이런 불안한 현상들이 로마인들을 기독교로 개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이다.


3) 기독교 인정/국교화

여러 불안한 상황에 있던 로마는 디오클레티누스가 물러나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그는 서로마의 정제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지난번 정제의 아들인 막센티우스라는 자가 자기가 서로마의 정제라고 선언하고 나섰다. 근위군과 아프리카의 기병을 동원해서 콘스탄티누스를 역적으로 몰았다.


이때 콘스탄티누스는 깊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로마 시민의 사절단이 와서 그에게 막센티우스의 야망에서 로마를 건져야 한다는 부탁을 받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막센티우스의 군대를 무찌르고 로마로 진격했다. 진격하는 도중에 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나 “이것으로 이겨라”하는 글씨가 하늘에 새겨지는 것을 전 군대가 다 보았다고 한다. 도망간 막센티우스와 혈전을 벌인 것에 배반한 부하의 손에 막센티우스는 죽고 승리했다. 로마로 입성한 콘스탄티누스는 어머니 헬라나를 만나서 교회를 건축하고 어머니의 신앙을 따라 기독교를 믿고는 이듬해 313년 동로마 정제와 함께 밀라노에서 기독교를 인정하는 밀라노 칙령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동로마 황제 리키니우스가 기독교를 사교라고 선포하고 정면으로 콘스탄티누스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크게 다짐하기를 “로마를 위하여, 기독교를 위하여”하고 나아가 싸우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끈질긴 전투였는지 그 전쟁은 9년이나 하다가 끝내고 323년에 로마제국이 통일된 것과 더불어 기독교의 자유를 선포하게 되었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까지만 해도 로마인들과 다른 이교도와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던 반면에 기독교를 믿는 자유를 허락하자 기독교 교리간의 논쟁이 많이 일어나게 되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5년 6월 니케아회의를 소집해서 기독론 논쟁에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는 서기 336년에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거기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후에 기독교가 국교로 성립되는데 일조한 황제가 바로 테오도시우스 황제(379-395년)이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원래 기독교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동로마 정제가 된 첫 해에 야만족을 상대로 지나치게 분투했는지 겨울로 접어들자 중병에 걸려 눕고 말았다. 그때 데살로니가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이후에 앓은 중병이 나아버렸다. 이듬해부터 다시 정력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자신이 세례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다고 믿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기회로 인해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 국교화 정책을 자신의 통치기간 15년동안에 15가지 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을 지키지 않으면 추방형, 재산몰수형, 벌금형, 사형을 실시했다.


이렇게 지배계층에서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고 자유화 하면서 기독교인들이 지배계층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믿게 되자 기독교가 테오도시우스 황제때에 로마의 국교가 된 것이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88년에 동로마에서 로마로 와서 반란군을 제압하고 막시무스를 처형한 후에 동서로마 통합황제에 오르는 공적을 등에 업고 처음으로 수도를 방문한다. 그리고 바로 원로원으로 달려가서 모인 의원들 앞에서 선택을 강요하는 질문을 하나 던진다.


“로마인의 종교로써 그대들은 유피테르가 좋다고 보는가, 아니면 그리스도가 좋다고 보는가?”


아무리 토론을 거듭해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원하는 답을 줄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원로원에서 그리스도를 선택했다. 이날을 계기로 기독교가 국교가 된 것이다.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화 함을 통해서 황제는 백성들을 하나로 묶을수 있는 정신적 매개체가 생겼던 것이다. 로마인들에게는 국가에 대한 중요한 의무였던 병역인데 기독교회는 처음 탄생때부터 병역의 의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할 것을 이야기했다. 신약성서에도 사도행전에도 로마군 병사라는 이유만으로 비난 대상이 된 예는 없다. 그러기는 커녕 규율을 지키는 로마군 병사의 생활방식은 칭찬의 대상이 되었고 기독교도도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3. 결론


우리는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이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박해를 당해도 끈질긴 생명력이 있었고, 로마가 경제적, 정치적으로 쇠퇴하게 되면서 국민들의 정신적 불안정 부분을 정확하게 파고 들었으며,

또한 지배계층에서 경험되어진 기독교의 기적과 같은 능력을 통해서 저들이 큰 은혜를 경험할수 있었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물론 다른 입장에서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다양한 이유가 많을 것이다.

실례로 에드워드 기번은 5가지로 잘 표현하고 있다.


첫째, 단호하게 유일신을 관철한 것이다.

유일신을 관철한 기독교의 열의는 완고하고 편협하다 해도 좋은 정도였다.

이런 습성은 유대교로부터 받았지만 기독교는 사람들이 유대교를 거부한 원인이었던 지나친 엄격함에서는 벗어나 사회성을 약간 띤 형태로 등장했다.


둘째, 영혼불멸로 상징되는 미래의 삶을 보장하는 교리를 세운 것이다.

이 교리가 성도를 늘리는 강력한 무기가 될수 있었던데에는

제국의 종말도 가까워진게 아닐까하는 로마인들의 막연한 두려움이 작용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이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다.


넷째, 기독교에 귀의한 사람들의 순수하고 금욕적인 생활방식이다.


다섯째, 규율과 단결을 특징으로 하는 기독교도 공동체가 날이 갈수록 독립된 사회를 구성하게 되었고

그 기독교도 사회가 로마 제국안에서 국가 속의 국가가 되어갔던 것이다.


에릭도즈도 4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 기독교 자체가 가진 절대적인 배타성이 자유주의 종교보다 더 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기독교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서 차별이 없이 평등했다는 것이다.

셋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데 성공해서 내세에 대해서는 눈부시게 빛나는 세계로 비추어졌다는 것이다.

넷째, 기독교에 귀의하는 것이 현실 생활에서도 이익을 가져다 준 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서로간에 많은 도움이 되고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3가지의 성공요인을 살펴보게 되면 동일하게 흐르는 패턴이 몇가지 있음을 발견한다.


첫째, 유일신 사상으로 인해 어떤 박해가 오더라도 하나님이 그를 구원해 주신다는 강한 믿음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박해도 극복할수 있는 용기있는 힘이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모두에게 열려진 기독교로서 지배계층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문이 열려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계층의 구분없이 평등하게 열려진 문으로 인해 모두다 혜택을 누릴수 있다는 솔깃함이 있었다.

래서 경제적으로 많이 쇠퇴해 가며 또한 로마의 미래에 대해서 불안한 생각을 가졌던 많은 사람들이 내세에 보장된 진리를 가르쳐 주는 기독교를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 지도계층에서 인정해 버린 종교이기에 다들 따르면 편하게 살수 있다는 안정성도 보장된 종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3세기에 널리 확산되어 4세기에 로마에 국교화 된 기독교를 왜 로마가 받아들이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우리가 살펴본 것을 잘 기억해서 이제는 기독교 초기의 로마 전파의 성공요인을 마음에 새기고 나중에 활용하는 삶을 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노우호, 쉽게 이해되는 신구약 중간사. 서울: 도서출판 하나, 2005,

안효상, 지혜가 드는 창 5 -상식 밖의 세계사, 서울: 새길, 1994,

http://tong.nate.com/hur396/22335811(2007년 6월 5일 검색)

지동식 역, 로마제국과 기독교.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0,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13: 위기로 치닫는 제국. 김석희 옮김, 서울: 한길사, 2004,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14: 그리스도의 승리. 김석희 옮김. 서울:한길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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