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시대의 역사


일반적으로 신약 시대라고 할 때에는 B.C.4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부터 재림 때까지 예수께서 자기 살과 퍼로 세우신 새언약을 기초로 하는 전(全)시대를 지칭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신약 시대의 역사는 신약 성경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고 있는 A.D.1세기의 역사와 기독교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1 , 306-337)에 의해 로마 제국의 국교(國交)로 공인된 B. C.313 년까지의 예수시대 및 초대 교회 역사와 속사도 시대의 역사이다.


이 기간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 도로부터 시작된 기독교가 숱한 환난을 겪으면서 점차 팔레스틴 지역에서부터 로마 제국 전체로 전파되어 실로 세계적인 종교로 자리 잡게 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한편 이 시기의 역사를 구분함에 있어서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여기서는 신약 성경의 흐름을 따라 예수의 탄생에서 승천까지, 예수의 승천에서 예루살렘 멸망까지, 예루살렘 멸망에서 계시록 작성까지, 계시록 작성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까지로 구분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예수의 탄생에서 승천까지 

이 시기(B.C.4-A.D.30년)는 다시 예수의 탄생 당시의 역사와 예수 유년 시절의 역사, 그리고 공생애(公生涯) 기간의 역사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1) 예수 탄생 당시의 역사적 배경 이 기간의 역사를 살핌에 있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 가운데 하나는 B.C.4년 예수의 탄생 직후 베들레헴에서 있었던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의 2세 이하의 유아 살해 사건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의 육신의 부모였던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 올라 오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는 사건으로서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Caesa「 Au撚stus)가 내린 인구 조사 명령이다(눅 2'1). 먼저 전자에 관하여, 당시 헤롯 대왕은 집권 말기에 이르러 왕위 계승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는 아마 자신의 권좌를 아무에게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이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큰 아들 안티파터(Antipater)까지도 내란죄로 처형한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동방 박사의 방문으로 인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헤롯이 유아 살해를 실시한 것도 그같은 그의 권력에 대한 집착과 광포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예수는 헤롯이 죽기까지 애굽으로 피신해야 했으며, 헤롯이 죽고 그의 세 아들이 유대 지역을 셋으로 분할 통치하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나사렛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마 2 : 21-23).


둘째로 후자에 관하여, 로마 제국은 로마 시민들의 재산 상황 파악과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매 14년 마다 한번씩 정기적으로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이러한 인구 조사는 로마 시민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의 속주(屬州)에도 실시되었는데 각 속주들의 사정에 따라 그 실시 기간은 조금씩 차이가 났다. 예수 탄생 당시에도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령에 따라 팔레스틴 지역에 인구조사가 실시되었다.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에서 고향 베들레헴으로 올라와야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으굴, 그때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탄 생하리라 했던 미가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미 5 : 2).

 

2) 예수 유년 시절의 역사적 배경 

성경에서는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단지 예수께서 12세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다는 기록 뿐이다(눅 2 : 40-51).

그러나 성경 이외의 역사책에 나타난 이 시기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당시 로마는 헤롯 가문과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 국가는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지 않고 나름대로의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속주로 인정되었다. 이당시 유대 지역에 대한 로마의 통치는 매우 우호적인 것이었다.


특히 로마는 유대교를 로마 제국 안에서 인정된 하나의 종교로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 대한 세금 징수도 약화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로마의 정책은 열심당(the Zealots)에 동조한 유대인들의 독립 운동이 일어나기 전, 즉 유대예 대한 로마의 박해가 본격적으로 가해지기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헤롯 대왕이 죽은 이후 유대는 그의 유언대로 세 명의 아들들에게 분활 통치되었다. 그러나 헤롯의 유언이 그 즉시 효력이 발생된 것은 아니며 로마의 인준(認繼)에 의해 시작 되었다. 왜냐하면 로마는 점령지의 자의적인 왕권 세습을 결코 허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로마가 헤롯 대왕에게는 팔레스틴 전체를 지배할 권한을 부여하고 정식으로 유대 왕이라는 칭호를 주었으나 그 아들들에게는 유대 지역 전체가 아닌 일부 지역만 관할할 수 있는 분봉왕의 직위 밖에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역사가들은 그 아들들의 통치 시기를 가리켜 소위 '분봉왕 시대'(The Tetrarch Era)라고 한다. 이에 이 분봉왕들의 통치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헤롯 아켈라오(Her럼 Archelaus)는 헤롯 대왕이 직접 통치하던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다 스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왕권 계승을 반대하는 유대인 3000명을 학살하는 등 헤롯 대왕과 같은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다가 결국 A.D.6년 아구스도의 재판을 받고 고울(Gaul) 지방으로 추방됨 으로써 그의 통치는 짧게 끝나고 말았다.  둘째,헤롯 안디바(Her떨 Anti럴5)는 B.C.4-A.D.39년까지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으로 통치하였다.


예수의 생애 전체에 걸쳐 밀접한 연관을 갖는 안디바는 아켈라오와 달리 훨씬 성공적인 정책을 폈다. 그는 헤롯과 같이 대규모의 건축 사업을 실시했는데, 특히 그는 아구스도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된 디베료(Tiberius)에게 자기의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갈릴리 호수 서편에 디베랴(Tiberias) 도시를 건설했다. 그러나 안디바는 그의 이복 형제였던 헤롯 빌립(흔히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이었던 신약 시대의 역사적 배경 33


빌립과 구별하기 위해 빌립 1세롤고 부름)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재혼함으로써 경건한 유대인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침례 요한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의 혼인을 반대하는 경건한 유대인들의 불만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침례 요한을 참수시켰다(막 6 . 17-29).


아울러 그는 빌라도의 일임으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고소로 잡혀온 예수를 심문하기도 했다. (눅 23 : 7-12), 한편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이었던 빌립이 죽은 후에 그는 유대 지역 전체의 왕으로 인정받기 위해 당시 로마의 황제 칼리굴라(Caliqula)를 찾아갔지만 이미 헤롯에 의해 제거되었던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 혜롯 아그립 바 1세 (Agrippa I )를 왕으로 내정 했던 황제는 안디 바를 리용(Ly- onto)으로 추방하고 말았다.  


셋째,헤롯에 의해 유대 지역의 분붕왕이 되었던 헤롯의 세 아들들 가운데 드라고닛 지방의 분 봉왕이었던 빌립은 최상의 통치자였다. 하지만 빌립에 관해서 신약성경은 별로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빌립의 통치를 한 마디로 '평온하고 번영했다'는 말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중오심 때문에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을 때, 예수께서 빌립이 다스리는 지역으로 피신하셨다는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입중된다(마 14 : 13-33).


또한 빌립도 그가 통치하던 지역에서 몇개의 중요한 건축사업을 실시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가이사랴 빌립보(Caesa- rec Philippi) 도시의 건설이다. 하지만 빌립도 그의 조카였던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결혼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백성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는데, 당시 이와 같이 헤롯 가문 내에서 자주 일어났던 근친결혼 (近親結婚)은 사회적으로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한편 헤롯 왕가는 신약 성경 시대의 어느 한 시기에 로마 제국의 대리 식민 통치자로서 국한되지 않고 내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본래 이두매 출신인 이들은 일단 헤롯 안티파터 2세가 B.C.48년 유대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한 후 로마제국이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양되는 혼란기를 틈타 로마의 실 력 자들에 게 충성 과 아부를 한 나머 지 그의 아들인 헤롯 2세 때 부터 는 대 왕의 칭 호를 갖고 전 팔레스틴 지역을 통치했다.


그의 사후는 그의 아들과 손자들이 팔레스틴을 분할 통치하면서 결혼관계, 로마 정부와의 정치적 실탁, 자신들까지의 이합집산으로 그 통치 지역이 각 시대마다 뒤바뀌는 혼동 양상이 배출되었다. 이같은 일련의 혜롯 왕가의 흔동스러운 대리 통치와 같은 신약 성경 전체의 역사적 배경은 꼭 이해해 두어야 하는 바 이제 이를 도표로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① 혜롯 안티파터 2세 : 이두매 출신의 토후로서 폼페이 전쟁 당시 케사르를 원조한 공으로 그후 유대 지역의 초대 총독이 됨(B.C.48년).

    향후 1세기 이상 지속된 혜롯 가문의 유대 대리 통치의 기초를 마련한다.  

② 혜롯 1세 . B.C.39년 로마의 최고 통치자 안토니에 의해 유대 지역의 왕으로 임명됨. 헤롯 왕궁과 예루살렘 성전 건축. 베들레헴의 유아 학살 사건을 명령(마 2 : 16).

③ 아켈라오 : 혜롯 사후 B.C.4년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 지방의 분봉왕이 됨(마 2 : 22). A.D.6년 아구스도 황제에 의해 고을 지방으로 추방됨.

④ 해롯 안디바 B.C.4년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이 됨(눅 3 1). 헤로디아와의 불법 결혼으로 침례 요한의 맹렬한 비판을 받음. 후에 침례 요한을 참수시킴

    (마 14. 1-12 ;막 6 : 14-29). 빌라도가 그에게 보낸 예수를 심문함(눅 23 : 8-12).

⑤ 빌립 2세 : B.C.4년 이두매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이 됨(눅 3 1). 혜로디아의 딸 살 로메와 결혼 .

⑥ 례롯 아그립바 1세 : A.D.39년 로마 황제 칼리굴라에 의해 유대 전지역의 왕이 됨,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투옥시킴(행 12'1-4). A.D.썬년 질병으로 죽음(행 12 : 23).

⑦ 해롯 아그립바 2세 아그립바 1세의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빌립 2세가 통치하던 지역의 분봉왕이 됨, 바울의 재판에 참석(행 24 : 13-26 32).

    그의 재임 기간 중 유대 전쟁 발발로 예루살렘 멸망(A. D.66-70년) .

  

3) 예수 공생애 시대의 배경 

헤롯 아켈라오가 아구스도에 의 해 고을 지방으로 추방된 뒤 그가 통치하던 지 역 인 유대와 사마리 아는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로마는 이를 위해 총독을 파견했는데, 예수 공생애 기간에 파견된 총독이 빌라도(Pontius Pilate, A.D.26-36년)이며, 그는 유대에 파견된 제 5대 총 독이었다.


이 총독들은 평상시에는 팔레스틴 지역 전체를 통치하기 위해 로마의 직영으로 세운 도시인 가이사랴에 머물러 있다가 유월절과 같은 명절이나 폭력 사태가 발생될 것이라 우려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집결하는 예루살렘에 임시 총독 관저를 정하고 일정 기간 동안만 머물기도 했다.  


한편 로마 총독은 대개 법률과 치안, 그리고 세금 징수 문제만 관장했으며 나머지는 대개 산헤드린을 통한 유대인의 자치에 맡겨졌다. 그러나 총독이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기 위하여 많은 세리들을 고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A.D.6-7년에는 납세를 위한 대규모 인구 조사를 실시함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로부터 큰 반발을 營다.


그 결과 이 시기에는 갈릴리 유다와 같은 사람들의 지휘 하에 많은 지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행 5 : 37). 또한 총독들은 유대 통치를 원할하게 하기 위하여 유대 사회의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 임명권을 갖기도 했다. 예수를 심문했던 대제사장 가야바◎oseph Caiaphas)도 로마 총독에 의해 임명되어 약 18년 동안 재직하였으며 A.D.36년에 공직에서 물러났다.  


예수의 공생애 기간과 직접 연관된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인들로부터 극심한 미움을 받았다. 왜 냐하면 그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감정을 무시하고 이교도의 신상이 새겨진 동전을 새긴다든지, 황 제들의 조상(彫像)과 로마 군대 깃발들을 예루살렘에 반입하려 하는 등의 일을 서슴지 않았기 때 문이다. 결국 빌라도는 A.D.36년 사마리아인들의 대학살 사건으로 인해 로마로 소환 조치되었다.  

 


2. 예수의 승천에서 예루살렘 멸망까지


 사도행전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시기(A.D.30-70년)는 예수의 승천 이후 기독교(Christie- nitty)가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는 시기였다. 특히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먼저 복음이 유대 지역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물론 선교 초기에는 이방인을 향한 복음 전파의 문제를 놓고 어느 정도의 논쟁이 있었지만 그것은 바울을 통하여 말끔히 해결되었다.


더욱이 선교 역사에 있어 바울의 출현은 매우 획기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3차에 걸친 그의 전도 여행은 지중해를 사이에 둔 여러 지역에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해 매우 많은 결신자를 얻을 수 있었다.  한편 예수의 수난 직후부터 기독교는 계속 박해의 대상이 되어 왔다. 실로 맨처음 즉각적 박해를 가한 것은 이미 예수까지 처형한 바 있는 유대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가 활성화될수록 로마 제국의 박해 또한 더욱 가중되었다. 로마 제국(Roman Empire)은 일찍부터 모든 속주에 대하여 황제 숭배 정책(Emperor-Worship Policy)을 추진하여 왔다. 그런데 기독교들이 유일신 여호와 신 앙으로 이에 대항함으로 말미암아 로마 제국은 클라우디우스(Claudius, B.C.41-54년) 황제 때부터 기독교에 대해 간헐적으로 대대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의 기독교 박해의 대표적인 예로서 A.틸덜년 로마의 대화재 사건으로 인한 네로 황제의 박해 사건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된 복음 전파로 결국 스데반, 야고보, 베드로, 바을 같은 대부분의 사도들과 많은 성도들이 유대와 로마 정부에 의해 순교를 당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이 흘린 순교의 퍼는 헛되지 않고 기독교의 초석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있어 기독교의 놀랄만한 업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신약 성경의 작성이다. 즉 서신서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작성이 되었고 또 사복음서도 이 시기에 작성된 것이다. 한편 이러한 시기의 유대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아그립바 1세의 유대 통치 

본디오 빌라도가 로마로 소환된 뒤에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사람은 마르켈루스(A.D.37년)와 마룰루스(A.D.37-41년)였다. 이들은 유대 지역을 얼마 통치하지 못하고 로마로 소환되었으며 그뒤 잠시 동안이지만 유대 지역은 로마 총독의 직접 통치가 폐지되고 헤롯 아그립바 1세(He「of Ag「ip멀 1 , A,D,41-씬년)에 의한 분봉왕 통치가 다시 실시되었다.


그는 헤롯 대왕의 손자로서 과거 헤롯 대왕이 통치하던 유대와 사마리아 전역을 통치하였다. 그리고 아그립바 1세는 유대인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유대교를 웅호하고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아그립바의 박해에 의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가 순교를 당했으며, 베드로가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행 犯 : 1-5절). 그는 A.D.桃년에 갑작스런 질병으로 인해 죽고 말았다.  한편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사망할 당시 그에게는 17세된 아들이 있었다.


로마는 그가 그의 부친을 이어 유대 지역 통치자가 되기는 너무 어리다고 판단하여 그를 잠시 로마 황실에 머물게 하였다가 후에 현재 레바논 지역에 위치한 칼키스(Chalcis)의 왕이 되게 하였다가 다시 헤롯 빌립이 다스린 지역의 분봉왕이 되게 하였다. 아그립바 2세는 유대인들로부터는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으며 유대 전쟁이 발발하고 A.D.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까지 로마 총독들과 친밀한 관계로 지내다가 예루살렘 성전 파괴 후 디도(Titus)와 함께 로마로 가서 그곳에서 행정관이 되었다. 

 

2) 로마 총독의 유대

통치 아그립바 1세의 사후 유대 지역은 다시 로마 총독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아그립바 1세 이전의 유대 지역 초기 로마 총독들은 대개 세금 징수 및 대제사장 임명의 권한을 행사했다는 점 이외에 신약 성경의 배경에 끼친 영향은 별로 없다. 그러나 헤롯 아그립바 1세 이후 로마의 총독들은 유대 출신의 분붕왕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유대 지역에 대한 전권(全權)을 행사했다. 한편 A.D.桃-46년 사이, 즉 헤롯 아그립바 1세 이후로부터 유대 전쟁 발발 이전까지 로마는 유대 지역에 7명의 총독을 차례로 파송했다.


그들은 곧 쿠스피우스 파두스(Cuspids Fadus, 桃-46년),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더 (Tiberius Julius Alexande, 46-48년, 행 11 : 28) , 벤티 디 우스 쿠마누스(Ventidius Cumanus, 48-52년) , 안토니 우스 벨 릭 스(Antonius Felix, 52-59년) , 포르키 우스 베 스도(Porcius Festus, 59-61 년, 행 25'1). 알비누스(이bines, 61-65년), 게시우스 플로루스(Gecius Florus, 65-70년)였다.  


한편 로마의 총독 제도는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대인들의 많은 불만을 사게 되었다. 그것은 첫째 유대교를 이방 종교와 혼합시키려는 로마 정책에 대한 불만과 둘째는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빈번하게 시행된 인구 조사가 그 원인이었다. 따라서 총독 정치를 실시하는 로마 정부와 유대인들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쿠마누스와 벨릭스 총독 때의 유대인 학살 사건이 다.  


쿠마누스(Cumanus, A.D.48-52년)가 총독으로 있던 시기에 한 로마 병사가 유월절에 성전을 모독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성전 뜰에 있던 로마의 수비대가 화가 난 유대인 무리들로부터 투석을 당하였다. 이어 지원 요청을 받고 출동한 로마군에 의해 이번에는 그 곳에 있던 유대인들이 무참히 학살되었다. 또한 A.D.S2년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 때 쿠마누스 총독은 일방적으로 사마리아인들의 편에 서서 사마리아에 침입한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시키고 살아 남은 사람들은 투옥시켜 버렸다. 하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얼마 후에 그는 로마로 송환되어 직위 해제되었다.  


한편 벨릭스(Felix, A.D.S2-脚년) 총독은 유대인들을 다루는 데 있어 그의 전임자들 보다 더욱 강력한 정책을 폈다. 더욱이 그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 네로가 로마의 황제가 되었는데, 네로는 열렬한 헬라주의자였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는 모든 지역에서 헬라화 정책을 시도하도록 했다. 특히 네로는 자신을 아폴로 신의 아들로 숭배하도록 권장했다. 결국 이와 같은 정책은 유 대인들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일이었다.


따라서 네로가 황제가 된 이후부터 유대인들의 반란은 자주 발생했으며, 그때마다 유대 지역의 총독이었던 벨릭스는 그 반란을 진압시켜야만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유대인들의 반란은 더욱 조직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으며, 그 중에는 자신을 유대인의 메시야로 자처하여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투쟁을 자극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행 21 : 38). 한편 유대인들의 계속되는 반란을 진압하는 로마의 방법 또한 더욱 가혹한 형태를 띠었다. 벨릭스는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요나단을 반란의 배후 조종자로 보고 그를 암살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벨릭스의 조치는 유대인들의 반란을 더욱 자극하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3) 유대인의 반란과 예루살렘 멸망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의 통치를 받던 시기에 일어난 반란은 대부분 열심당원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었다. 열심당원들은 율법의 엄수를 추구하는 바리새파에서 유래된 극단적 분파로 이들은 율법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로마와의 투쟁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특히 그들은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유대 지역에 대해 실시한 로마의 인구 조사가 선민(選民)인 유대인의 거룩성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반발 하였다.


아울러 다윗 왕조와 하스몬 왕조 때 누렸던 자유를 그리워 했던 그들은 오직 투쟁만이 유대 민족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반란을 조장하였다. 대중적인 반란이 여의치 않을 때는 로마 정부의 주요 인사나 유대 민족 내에서의 변절자를 암살하는 개인적 투쟁 형태도 취했다. 이때부터 이렇게 로마와 관련된 유명 인사들을 암살하는 이들을 가리켜 '단검을 가진 자'(dagger-men), 즉 시카리(Sicarii)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주로 단검으로 암살을 행했기 때문이다.


행 21 : 38에는 시카리가 자객(as- sassins)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투쟁 형태는 유대 지역에 대한 로마 총독의 압제가 점차 강화되는 시기를 맞이하여 많은 유대인들의 호응을 얻었다. 결국 로마 제국과 유대인들 간에는 대규모의 충돌을 가져을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A.D.騎년 로마 제국에 대한 유대인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 나고 말았다 당시 유대 지역의 총독이었던 플로루스(Floras)는 예루살렘 성전의 창고에서 몇개의 보물을 가져 玆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것을 신성 모독으로 간주했고 이 기회가 로마의 멋에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에 유대인들은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들은 때마침 플로루스를 원조하러 온 수리아 총독 갈루스(Gallus)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그리고 이 승리에 고무된 유대인들은 그들의 투쟁을 유대 전지 역으로 확산시켰다. 하지만 이 반란을 진압하러 온 베스파시안(Ves떨sign) 장군과 그 군대에 의해서 예루살렘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 지역의 반란은 곧 진압되었다.


그리고 베스파시안 장군이 네로의 뒤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되자 그 아들 디도(Titus)가 예루살렘의 정복에 나섰는데, 그는 A.D.70년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이 지켜지던 3월 경부터 예루살렘 성을 5개월간 포위한 끝에 그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요세푸스◎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이 때 1백만이 훨씬 넘는 유대인이 살해당했고, 7만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아울러 한 로마 병사의 방화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전소되었다.


이로써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했던 예수의 예언이 완전히 성취되었던 것이다(눅 21 . 20-2뀨.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인해 유대인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게 되었으며 이러한 유대인 공퐁체는 대대로 오늘날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이어져 오고 있다.  


 

3. 예루살렘 멸망에서 계시록 작성까지 


예루살렘의 멸망 후에도 구레네. 애굽, 구브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에 의해 유대의 독립을 위한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로 인해 크게 좌절한 나머지 세계 각처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족으로서의 유대는 계속 존재하였으나 국가로서의 유대는 A.D.1製8련 이스라엘이 탄생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한편 이 시기의 역사 가운데 주목할 것은 기독교의 세계 전파이다. 즉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대 민족의 분산 이주는 기독교의 쇠퇴를 가져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로마 지도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38 신약 총론


기독교는 여전히 로마 제국 내에서 꾸준히 성장하여 로마 제국 곳곳에서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즉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그곳에 유대 공동체를 건설하여 나름대로 그들의 독자적인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이전과는 달리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러한 분산된 유대 공동체, 소위 디아스포라 (Dias멜「a) 유대인들의 회심은 바로 기독교가 세계에 전파되는 데 있어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멸망시켰던 디도 장군이 로마 황제가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가 기독교에 대해 가혹한 박해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와 달리 디도 치하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별로 없었다. 다만 그가 황제로 있던 시기에 다른 사람이 특별히 기독교인이라 하며 고발을 하는 경우에만 기독교인을 처벌하였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기독교인은 계속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 시기를 맞이하여 조직을 재정비하고 복음 전도 활동을 계속 진행했는데, 그 결과 복음은 소아시아 전역과 에게해 지역을 넘어 그리이스 반도까지 전파될 수 있었고 심지어는 몇몇 로마 귀족들도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디도를 이어 도미티안(Domitianus)이 로마 황제가 되자 상황은 급변했다. 헬라 문화에 깊이 심취해 있던 그는 제국 내에 여러 개의 신전(神驗)을 건립하고 이방 신 숭배를 강요했다. 아울러 그는 황제 숭배 정책(Emperor-Worship Policy)을 확산시 켰는데, 이를 반대하던 유대인과 기독교 인들을 가혹히 처벌했다. 더욱이 이로 인해 제국내 여러 지역에서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자 그는 반란의 진압과 동시에 철저한 유대인 분산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 때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었다 (71 1.9).



한편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계속 성장되어 온 기독교인들의 종말 의식은 도미티안 황제 박해시에 매우 고조되 었다. 뿐만 아니 라 로마 제 국 내 에서 는 헬 레니 즘에 영 향받은 많은 이 단 사상이 번성 하였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답변이 요청되게 되었고. 이러한 필요를 인식했던 사도 요한은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며, 기독교에 대항하는 이단 종파에 대한 경고로서 요한 서신과 계시록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이 작성되는 것을 끝으로 신약 성경이 모두 완 성되었고, 이로써 사도 시대는 그 막을 내렸던 것이다.  

 


4. 계시록 작성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까지 


도미티안 왔제 이후에도 기독교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는 주기적으로 있어 왔지만 기독교는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하였다. 특히 이 기간 동안에는 기독교 역사에 크게 몇 가지 특징적인 일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사도를 계승한 속사도의 출현과 아울러 이단 사상의 발흥 그리고 A.D.313년에 있었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306-337년) 대제에 의한 로마 제국의 기독교 공인이다.  

 

1) 속사도의 출현 

계시록이 작성될 때까지 기독교는 예수에 의해 직접 부름받은 사도들(A렐stales)의 주도 하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조직되었다. 아울러 사도들은 교회와 성도를 감독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주요 교리들을 가르치고 변증하는 일에 주력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도들이 박해로 인해 순교당하고 또한 유배되어서 죽게 되자 지금까지 사도들이 감당했던 역할을 대신할 교회의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미리 예견했던 사도들은 그들을 대신할 제자들을 양육하였다. 따라서 사도들이 죽은 이후에 그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전수받았던 제자들에 의해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되며, 교회가 유 지되고 감독되었는데, 그들이 바로 제2세대 사도, 즉 속사도들(Sub-A멜stles)인 것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속사도는 폴리갑(「olyca聯, 69-155년), 이그나티우스(Ignatius, 35-107년), 로마의 클레 멘트(Clement Romanus, 30-101년) 같은 사람들이다. 한편 속사도 시대에 이어 교회의 정통 교리를 고수하며, 변증 전수한 사람들은 교부들(Fathers of the Church)이다. A.D.3세기 이후로부터 5세기 신약 시대의 역사적 배경 39

말까지를 일반적으로 '교부 시대'라 하며, 그 이후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주교가 아닌 아동들을 교육하는 일반 교사들에게도 '교부'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왔다.  

 

2) 이단 사상의 발흥

 기독교의 복음이 당시 로마 제국이 통치하던 전 지역에 전파되어 많은 결실을 맺은 반면 기독교가 전파된 지역에 존재하고 있던 헬라적 사상이나 유대적 율법주의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시키는 이단사상들도 함께 번성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나타난 대표적인 양대 이단 사상은 영 지 주의 와 몬타누스주의 이 다.  

 

3) 로마 제국의 기독교 공인 

도미티안 황제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8차례에 걸쳐 기독교에 대한 대박해가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되는 로마 제국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실로 박해 받는 교회 안에서 끝없이 지켜주신 성령의 역사의 결과임과 동시에 박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앙을 쓸지 아니하며 또 일상 생활 속에서 이방인들 앞에서 도덕적으로 본이 되었던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익 시기에 기독교의 복음은 일반 민중들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 내의 귀족들과 공직자들에게도 전파되어 많은 개종자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몇몇 로마 황제들은 더욱 극심한 박해를 가하며 재산 몰수, 공직 추방, 십자가 처형. 원형 경기장 내에서 맹수와의 사투 및 그리스도인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화형을 시키기까지 했지만 그럴수록 기독교는 위축되기는 커녕 도리어 그것은 더욱 기독교를 성장시키는 기폭제가 되 었 다.  그 결과4세기 초 로마 제국 내에서는 상당한 기독교인들이 존재하게 되었으며 이제 이들을 수용하지 않고서는 제국 내에서 더이상 효과적인 통치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마침내 A.D.313년 기독교를 로마 제국 내의 합법적인 종교로 공인하였으며, 얼마 후에는 그 자신도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로써 기독교는 박해와 수난의 시대를 지나 안정과 번영의 시대를 맞이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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