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시대의 역사적 배경


신약 성경은 철저히 역사적 배경 속에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성경은 다른 이방 종교들의 경전과 같이 인간의 사상이나 상상력에 의한 신화나 전설에 바탕을 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속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아울러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약 성경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그분의 사역을 수행하시고 또한 그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기초로하여 성경을 기록한 신약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 될 것 이 다.

 


Ⅰ . 신약의 배경으로서의 중간사의 전개


시대구분

연대

주요사건

바사 시대

B.C 404-331

 

헬라시대

알렉산더

 

 

톨레미 왕조

 

 

셀류크스 왕조

 

 

독립유대시대

마카비 혁명

166-143

 

하스몬 왕조

142-63

 

로마시대

B.C.63-A.D4

 

 

중간사(中間吏)는 흔히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부터 침례 요한이 출현하기까지 약 4세기에 걸친 성경 역사의 공백 기간을 가리킨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공백 기간 동안에는 성경이 기록되지도 않았고 또 뚜렷한 선지자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침묵의 세기들'(Silent centuries)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하지만 중간사라 불리우는 이 시기는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 보다 더 큰 의미에서 신약 성경의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다. 그


것은 신약 성경의 전반적인 맥락과 분위기가 중간사에 대한 연구가 없이 구약 성경에 대한 연구만을 가지고서는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중간사 시기 동안에는 세계적으로 강력한 국가들의 흥망성쇠가 여러 차례 있었고, 그로 인해 새로운 사상과 문화의 발전들이 있어 왔으며, 그것이 또한 신약의 역사적 배경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신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신구약 중간사에 대한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  


한편 중간사에 대한 연구가 다양한 각도에서 이루어 질 수 있겠지만 가장 평이한 방법은 중간사 기간에 팔레스틴 지역을 다스리던 통치세력을 중심으로 시대를 구분하고 그 간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중간사 시대를 대략 구분해 보면 이에 앞의 도표에서 살핀 바와 같이 페르시아 시대. 헬라 시대, 독립 유대 시대, 로마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1. 페르시아 시대(The Persian Era)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B.C.S39-331년)는 바벨론을 멸망시킨 고레스 대왕(Cyrus ll, 539-530년) 으로부터 시작된다. B.C.S46년에 리디아 지방의 크로이소스(Kroisos) 황국과 소아시아 전지역을 정복한 고레스는 이러한 승리를 바탕으로 페니키아와 중부 이란 지역에 페르시아 제국을 세웠고 B.C.S39년에는 당시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페르시아를 세계적인 제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때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분산 이주 정책을 폈던 바벨론과는 달리 각지에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대하 36 : 21-23 ;스 1장). 이에 바벨론과 앗시 리 아 제 국에 의 해 각지 에 흩어졌던 이 스라엘 백 성 들은 페 르시 아 제 국의 보호 아래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고레스 왕이 치세하던 B.C.S39-B.C.S38년(스 2-6장)과 아닥사스다 1세가 치세하던 B.C.458년(스 7-10장) B.C.444년(느 1, 2장) 등 크게 세 차례 걸쳐 진행되었다.  


한편 페르시아 제국은 될 수 있는 대로 식민지 국가의 자율성(自律性)을 허용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이스라엘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에 그들은 파괴되었던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다시 건축하여 이스라엘의 부흥을 죄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페르시아 황실의 허락하에 유대를 통치한 자는 대제사장이었다. 이 때부터 대제사장은 종교 지도자라기 보다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되었다.


따라서 대제사장직을 놓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 간에는 자주 암투가 벌어졌는데, 유대 역사 문헌 기록에 따르면 요야다의 아들 요하난(느 12 : 22)이 대제사장을 차지하기 위해 성전 경내에서 자기 형제를 살해했다고도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대제사장직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암투는 이 당시와 양상은 조금 다르지만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도 자주 발생했다. 그리고 또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수 없으나 이 시기에 사마리아의 통치자 산발팎에 의해 그리 심산에 성전이 세워졌다고 한다. 이 성전은 후에 하스몬 왕가의 통치자인 요한 힐카누스(John Hircanus, B.C. 134- 1鎭)에 의해 파괴되었다.  


한편 팔레스틴 땅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의 수보다 돌아오지 않고 페르시아 제국 전체에 흘어져 정착한 유대인들의 수가 훨씬 더 많았다. 이 흩어진 유대인들을 가리켜 우리는 '디아스포라'(Dias렐「a) 라 한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제국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도 그곳에서 따로 공동체를 형성하여 그들 나름 대로 종교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회당을 세웠다. '회당'(헬, 시나고구)과 유대교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본서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을 참조하라.


또한 이 시기에 특징적인 사실 중 하나는 팔레스틴 땅에서나 디아스포라 지역에서나 공통적으로 구약 율법인 모세 오경 연구 및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에 대한 연구 및 교육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대교(Judaisy)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생겨났다.  한편 강력한 제국으로서 그 명성을 떨쳤던 페르시아도 아닥사스다 2세(Artaxerxes ll, B.C.404- 359) 이후 계속된 내분(內分)과 무모한 전쟁으로 인해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B.C.331년 마지막 왕이었던 다리오 3세의 알렉산더 대왕과의 가우가멜라(Gau經melah) 전투 실패를 고비로 마침내 그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2. 헬라 시대(The Greek Era)


헬라 시대는 흔히 알렉산더 대왕의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인해 헬라가 아시아, 팔레스틴, 애굽의 내륙 지방까지 그 영토를 확장하고 세계적인 제국으로 그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B.C.331-B.C. 143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특히 이 시대는 신약시대의 역사적 배경 이해에 있어 그 어느 시대보다 중요하다. 그 이유는 첫째, 헬라어가 세계적인 언어로 통일되어 신약성경의 언어가 되었다는 것이며,


둘째, 셀류쿠스 왕조의 가혹한 팔레스틴 통치를 받기 시작하면서 유대인들에게는 종말론적인 좀더 정확히는 민족주의적이고 정치적인 입장에서 자신들이 최종 세계를 지배하도록 하게 될 한 위대한 왕이 등장할 것이라는 관점에서의 메시야 대망 사상이 생기게 되었고, 이러한 분위기가 예수 당시까지 그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또 이 시기에서부터 히브리 정경에 들지 못한 많은 외경들과 장로들의 유전(遺傳)을 문자로 기록한 미드라쉬(Midrash), 미쉬나(Mishinah) 등의 유대 랍비들와 문헌들이 많이 기록된 사실도 이 시기의 매우 중요한 특징들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무서운 종말과 하나님의 구원 역사로 말미암은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주 내용으로 하는 묵시 문헌들도 이 시기부터 기록되기 시작하여 A.D.2세기 초엽까지 주로 작성되었으며 당시의 종말론적인 메시야 대망 사상도 이런 묵시 문헌들 속에 잘 나타난다.  한편 헬라 시대는 크게 셋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알렉산더 대왕(칠exanderthe Great)의 통치시대와 톨레미(恥olemy) 왕조의 통치시대,그리고 셀류쿠스(5민eucus) 왕조의 통치 시대로 나눌 수 있다.  

 

1)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 시대(B.C,336-323) 

가파른 산맥과 복잡한 해안선 같은 지리적 여건 때문에 초기부터 여러 개의 도시 국가로만 구성되어 있던 헬라 지역을 통일한 알렉산더 대왕은 그의 아버지의 야망을 계승하여 세계 정복의 길에 을랐다.  그리하여 그는 에게 해 지역을 넘어 소아시 아와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 있던 출레스틴 그리고 애굽을 정복하였으며 정복한 지역마다 새로운 도시를 하나씩 건설하였다. 그리고 그 도시들을 통하여 헬라 문화를 제국의 곳곳에 이식시켰다.


이러한 그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지중해를 인접한 전지역에 헬 레 니 즘 문화가 전수되 었고 그 결과 헬라어 가 신약시 대 의 세 계 적 인 언어 로 그 중요한 역 할을 감당하게 되 었다.  한편 32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던 알렉산더는 특별히 그의 후계자를 세울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그가 죽자마자 그의 왕위 계승을 노리는 치열한 권력 암투가 20년 이상이나 지속되다가 결국 제국은 4개 지 역 으로 분활되 었는데 , 애 굽과 팔레스틴은 당시 애굽의 총독이 었던 틀레 미 (糾olemy) 에게, 수리아를 비롯한 소아시아 지방은 셀류쿠스(Seleucus)에게, 트라키아와 비두니아 지방은 리 시마쿠스(Lysimachus)에게 그리고 마케도니아 지방은 카산더(Cassander)에게 각각 맡겨 졌다. 한편 이 네 지역 중 팔레스틴 통치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틀레미와 셀류푸스 왕조이므로 이 두 왕조의 통치에 관해서만 집중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톨레미 왕조의 통치 시대(B.C.301-198) 

톨레미 왕조(The 粒olemy Dynas◎)의 지배를 받던 애굽과 팔레스틴 지역은 비교적 안정된 정세 (政勢)가 유지되었다. 더욱이 톨레미 왕조는 각 민족의 내정(內政)에는 간섭하지 않고 중앙정부로서 세금 징수 문제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과거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서 누렸던 어느 정도의 정치적 자유를 톨레미 왕조 하에서도 누리며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간직할 수 있었다.


애굽에서 발견된 많은 비문과 파피루스 문서들은 톨레미 왕조 지배 하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애굽 지역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매우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한 증거가 되고 있다. 특히 당시 애굽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은 톨레미 왕조의 지원을 받아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을 당시 세계 공용어로 쓰이던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L潑()을 출간하는 등의 왕성한 종교 활동을 벌였다.  


또한 팔레스틴에 거주한 유대인들도 톨레미 왕조 시대에는 매우 자유로운 생활을 누렸다. 물론 애굽에 위치한 톨레미 정부에 조공을 바치기는 했으나 페르시아 시대 이후로 계속된 대제사장의 통치 하에 자치권(自治權)을 누리고 있었다. 이 시대에 유대인 중 가장 위대했던 인물은 의인 시몬(Si- montheJust)으로서 외경 집회서(Ecclesiasticus)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 높으심이며 그의 백성의 영광 중에 크시도라'라는 그에 대한 찬양이 나온다.


그는 톨레미 1세 때 파괴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등의 많은 공적으로 백성들의 추앙을 한몸에 받았다.  한편 톨레미 왕조는 그 말기에 팔레스틴 지역의 정복을 노리는 셀류쿠스 왕조와 자주 충돌하게 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에 톨레미 왕조는 군사적 목적으로 유대의 변방에 돌레마이와 데가볼리, 그리고 가사 지역에 성읍들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이 때 세워진 이 성읍들은 신약 시대에 로마 제국의 직할 도시 들이 되었다.  


3) 셀류쿠스 왕조의 통치 시대(B.C.198-167) 셀류쿠스 왕조(The Seleucus Dynasty)가 등장한 이래 가장 강력한 군주였던 안티오쿠스 3세(Antio- thus 111. B.C.223-187)는 그동안 팔레스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톨레미 왕조와 벌였던 4차에 걸친 시리아 전쟁을 종식시키고 마침내 팔레스틴 지역을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팔레스틴에 거주했던 유대인들은 팔레스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톨레미 왕조와 셀류쿠스 왕조의 전쟁의 정황이 점차 셀류쿠스 왕조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그 전쟁 말기에 셀류쿠스 왕조의 편에 가담했기 때문에 셀류쿠스 왕조가 팔레스틴 지역을 정복한 초기에는 매우 우호적인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안티오쿠스 3세가 B.C.190년 카르타고의 장간인 한니발(Hannibal)과 연합하여 고마와 벌린 서머나(Smyma) 전투에 서 크게 패 한 이 후 셀류쿠스 왕조가 타우러 스 산맥 (the Taurus Moun◎ns) 서 쪽에 있는 소아시 아 지방을 로마에게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할 형편에 이르게 되자 상황은 돌변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셀류쿠스 왕조가 이러한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팔레스틴 지역에 많은 세금을 부과시켰고 심지어는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들까지도 가지고 가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특히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를 헬라화 시키기 위해 예루살렘의 경건한 대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Onias)를 파문시키고 그에게 많은 재정적인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그의 헬라화 정책에 동조하는 야손(Jason)과 메넬라우스(Menelaus) 같은 사람들을 차례로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또 그는 예루살렘의 성전의 중요한 보물들을 약탈하며 유대인들의 고유한 문화를 파괴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 대표적인 예로 유대인들의 할례 금지사건을 들 수 있는데 안티오쿠스는 만약 유대인들이 이를 어길 때는 사형까지 감행했다. 또한 그는 예루살렘 성벽을 파괴시켰으며, 심지어는 유대인들의 순수한 종교 문화를 뿌리 뽑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번제 제단을 헐고 그 자리에 이방신을 섬기는 제단을 만들어 율법에 금지된 돼지를 희생 제물로 바치도록 했다.  


결국 이와 같은 셀류쿠스 왕조의 괄레스틴 통치는 유대인들의 많은 불만을 사게 되었으며, 특히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모독은 유대인들의 감정을 폭발시켜 셀류쿠스 왕조에 대한 유대인의 독립 투쟁, 즉 마카비(Maccabee) 혁명을 유발시켰다.  

 

3. 독립 유대 시대(Independent Judean Era)

 독립 유대 시대는 흔히 셀류쿠스 왕조의 유대 지역의 헬라화 운동에 반대하여 일어난 유대인의

독립 운동에서부터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그들이 정치적으로 독립하여 하스몬 왕조를 세우고 난 이후에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점령 당한 B.C.166-63년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이 시기는 신약 시대에서 발견하는 바와 같이 정치적 성향이 매우 강한 유대교 분파들이 생겨난 때이며, 또 유대교의 근간인 장로들의 유전이 문자로 집성되기 시작한 때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대한 을바른 이해는 신약 시대의 이해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빈번히 등장하는 예수와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라 하겠다. 한편 이 시대는 크게 마카비 혁명이 전개되는 시대와 하스몬 왕조의 시대로 구분된다.  


1) 마카비 혁명 시대(B.C.166-143)

친 헬라정부인 셀류쿠스 왕조는 유대 지역에 헬라 문화를 강제 이식시키기 위해 유대 종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정책을 점으로 인해 팔레스틴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街, Epiphanes, B.C.175-163)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반 발에도 개의치 않고 많은 관리들을 팔레스틴에 파견하여 이 정책을 독려했고 반대자들에 대해서는 가혹한 처벌도 서슴지 않았다.


마침내 이러한 셀류쿠스 왕조의 정책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반란은 모데인(M떨twin)이라는 예루살렘 북서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부터 시작됐다. 즉 이곳에 파견된 셀류쿠스 왕조의 관리들이 당시 그 지역에 원로격의 제사장인 맛다디아 (Mattathias)에게 이방 종교의 제단에 제물을 드리라고 명령을 내린 것에 반발하여 맛다디아를 비롯한 그곳 유대인들이 제사를 드리려던 한 유대인과 왕이 파견한 관리를 죽임으로써 반란이 시작되게 된 것이다.


반란을 주도한 맛다디 아는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유대 인들과 함께 산으로 도피하여 셀류쿠스 왕조에 대한 항전을 시작했는데, 이러한 소식은 팔레스틴 지역에 이내 퍼져 곧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것이 초기 유대 독립 전쟁의 발단이다. 한편 맛다디아는 효과적인 게릴라 전을 펼펐서 셀류쿠스 왕조의 군대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들은 셀류쿠스 왕조가 곳곳에 만들어 놓은 우상들을 파괴시켰을 뿐만 아니라 변절한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행했고 무너진 회당을 다시 건축하였다.  


한편 아버지 맛다디아를 계승한 마카비(유다)는 셀류쿠스 왕조에 대한 유대의 독립 투쟁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했는데, 그는 소규모의 게릴라 전을 지양하고 셀류쿠스 정부군에 대한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하여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B.C, 1醜년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시리아인들에 의해 더렵혀진 성전을 탈환하여 율법의 규례대로 정화시킬 수 있었다. 이것을 가리켜 소위 '마카비 혁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성전을 정화한 뒤 새롭게 성전을 하나님께 봉헐하고 8일간의 봉헌 축제를 지냈는데 이것이 바로 하누카(Hanukkah)라고 하는 히브리 광명제(the Festival of Lights)의 시초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성전은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 모독 당한지 꼭 3년만에 다시 회복되었다.  한편 유대의 종교적 순수성만이 아니라 정치적 독립을 원했던 마카비(Makkabee)는 당시 셀류쿠스 왕조의 내분(內分)을 유도하여 점차 정치적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마카비를 계승한 그의 동생 요나단은 제사장으로서 헬라주의자였던 알키무스(以citrus)를 대신하여 당시 최고 종교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최고 실권을 가지는 대제사장직에 오를 수 있었다(B.C.153년). 그러나 시리아인들의 음모로 요나단이 살해되자 형의 뒤를 이어 군사령관과 대제사장의 직분을 계승한 시몬(Simon)은 그의 형들처럼 시리아군과 정면 대결하기 보다는 주로 외교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스파르타와 로마와 조약을 맺어 원조를 받았으며, 이로써 유대의 독립 투쟁을 다시금 활발히 전개, 마침내 B.C.142년에는 유대 지역에 있던 시리아군을 완전히 격퇴하여 실질적인 유대의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고, 그후 유대의 최고 지도자로 군림하여 하스몬 왕조를 세웠다.

 

 2) 하스몬 왕조 시대(B. C.142-63)

하스몬 왕조 시대(The Hasmon Dynastic Era)란 일반적으로 시몬이 군사령관과 대제사장직을 겸

직하여 유대의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가 된 B.C.142년 이후로부터 B.C.63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당하기까지 마카비 가문의 유대 통치 기간을 가리킨다.  한편 시몬의 뒤를 이어 유대의 혀고 지도자가 된 힐카누스 1세◎ohM Hyrcanus 1, B.C.134-105)는 팔레스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려는 셀류쿠스 왕조의 마지막 시도를 물리치고 난 후 유대의 통치 영역을 급속히 확대해 나갔다.


즉 그는 이미 헬라화 되었던 시리아의 속주인 사마리아와 이두매 지역을 정복하여 그 주민들을 강제로 유대교로 개종시켰다. 이리하여 유대는 힐카누스 때에 이르러 가장 정치적인 자유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국가가 될 수 있었다. 특히 힐카누스는 당시 유대가 발행한 주화에 그의 이름을 새겨넣은 최초의 군주(君主)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힐카누스의 유대 통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경건한 유대인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그 이유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익을 중요시하는 힐카누스의 정책은 율법의 을바른 준수 같은 종교적 문제는 등한시하며, 아울러 비록 왕이란 칭호는 부여받지 않았지만 정치적으로 최고 지도자인 그가 계속 대제사장의 직무를 겸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힐카누스의 유대 통치에 불만을 표시한 대표적인 무리가 바리새인들(Pharisees)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힐카누스의 정책을 지 지하는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사두개파 사람들(Sadducees)이었다.  


결국 유대는 마카비 가문의 통치 기간이 계속 됨에 따라 그 통치에 찬성하는 사두개파와 반대하는 바리새파 사람들 간에 첨예한 대립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바리새파의 일부는 세 속적인 문제에 의해서 그들의 종교적 생활이 간섭받는 것에 반대하여 사람이 없는 광야 같은 곳에 종교적 공동체를 건설하여 경건운동을 전개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에세네파(Essenes) 이다.  


한편 힐카누스의 뒤를 이어 유대 통치자가 된 알렉산더 얀네우스(이exandajannaeus, B.C.103-76) 또한 무모한 강압 정책으로 인해 유대의 내정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즉 그는 마카비 가문의 대제사장 겸직을 반대하는 바리새인들의 계속되는 항의를 분쇄하기 위해 바리새인 6,000명을 살해하였으며 그렇게 해도 바리새인들의 반란이 계속 일어나자 그 주모자 800명을 붙잡아 십자가 처형을 집행했다.  


특히 그는 이 때 800명이 매달린 십자가 앞에서 그들의 가족을 몰살하는 잔인한 행동도 서슴지 않고 자행했다. 이와 같은 통치자들의 횡포는 많은 유대인들의 불만을 고조시켜 내정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을 똴만 아니라 아울러 통치권을 계승하기 위한 마카비 가문 내의 치열한 권력 투쟁으로 말미암아 유대는 결국 세계 지배를 꿈꾸는 로마로 하여금 보다 쉽게 유대 지역을 정복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만들어 주고 말았다.  


한편 유대 역사에 있어 하스몬 왕조가 남긴 업적은 매우 크다. 그것은 첫째 하스몬 왕조는 영토 확장 사업을 계속해서 전개하여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토 만큼 확장했다. 여기에는 롤레스틴 전지역과 이집트 경계 지역에서 갈릴리 호수 북부의 흘라 호수까지와 요단 동편의 베레아, 그리고 아스글론을 제외한 옛 블레셋 지역의 해안 도시들까지 포함된다. 또한 이 시기에 하스몬 왕조는 광범위 한 초등 교육 제도를 설 립하고 모든 젊은이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법 령을 공포하기도 했다.  이에는 학식이 높은 바리새인 학자들의 공이 컸다. 

 


4. 로마 시대(The Roman Era)


B.C.63년 로마의 장군이었던 폼페이(Pompey)의 예루살렘 정복으로 시작된 로마의 유대 통치는 A.D.70년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기까지 계속된다. 특히 하스몬 왕조 내의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Aristobulus ll, B.C.67-63) 간의 권력 쟁탈전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이 탄생하기 직전(A.D.4년)까지의 유대는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따라서 로마 시대는 신약 성경의 직접적인 배경이 된다. 로마 제국 자체의 역사에 관해서는 다음 항에서 살펴보도록 하고 여기서는 중간사 기간 중 로마의 팔레스틴 통치 역사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한편 이 시기의 로마 시대는 로마의 예루살렘 점령 직후 시기와 헤롯 대황의 통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로마의 예루살렘 점령 전후의 역사

예루살렘에 진격했던 폼페이는 당시 반로마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던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로마로 송환하는 대신 친로밑적인 성향을 가졌던 힐카누스 2세(H◎conus ll, B.C.63-脚)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폼페이는 유대의 행정 구역을 예루살렘이 포함된 유대 지역과 베레아 그리고 갈릴리 지역에 국한시켰고, 일찍이 하스몬 왕조가 차지했던 사마리아와 이두매 지역을 다시 시리아의 속주로 편성 했다.  


한편 B.C.48년 폼페이를 물리치고 로마의 최고 통치자가 된 케사르(Caesar)는 그를 도왔던 이두매 지방의 장군 안티파터(Antipater 1, B.C.犯-40)를 유대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힐카누스 2세를 계속 대제사장으로 유임시켰다. 그리고 이때 유대 지방의 총독이 된 안티파터는 당시 대제사장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권한을 박탈하고 대제사장은 종교적인 직무에만 충실하게 함으로써 유대 지역의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한편 그는 로마 정부에 충성을 다하는 동시에 유대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백성들의 인기를 끌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안티 파터의 가문이 이두매(Idomae) 출신의 가문으로서 이방 혈통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로마에 대한 충성이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한 적대감을 더욱 자극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티파터의 유대 통치를 허용했던 로마의 최고 통치자 케사르가 암살된 후 안티파터 또한 큰 곤란을 겪게 되었으며, 결국은 그도 얼마 못가서 한 유대인에 의해 독살당하고 말았다.  


한편 케사르를 암살했던 카시우스를 제거하고 로마의 최고 통치자가 된 안토니우스(Autonius)는 대제사장 힐카누스 2세의 자문을 얻어 안티파터의 아들들인 파사엘과 헤롯을 유대 지역과 갈릴리 지역의 분봉왕으로 각각 임명했다. 그러나 로마의 유대 통치를 거부했던 하스몬 왕가의 아리스토 불루스 2세의 아들인 안티고누스(Antigonus)는 이 때를 이용하여 파르디아인(Pa란hian, 북부 이란에 살던 민족)의 원조를 받아 예 루살렘을 점 령 하고 유대 분봉왕 파사엘을 체포하였는데 , 체포된 파사엘은 자결했고, 갈릴리 지역 분봉왕 헤롯은 로마로 도피하였다.


거기에서 혜롯은 로마 안토니우스의 환심을 크게 얻게 되었다. 한편 로마는 안티고누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시 한 번 팔레스틴 지역의 정복에 나서야 했는데, 이 때 안토니우스는 먼저 헤롯을 로마 원로원의 허락을 받아 유대의 왕으로 임명하였고, 그를 로마군과 함께 팔레스틴으로 보내어 다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유대 왕이 되게 하였다. 한편 안티고누스의 죽음으로 하스몬 왕가는 유대 역사에 있어 마침내 그 자취를 감추고야 말았다.  

 

2) 헤롯 대왕 통치 시기의 역사 

로마의 괴뢰 정권의 수반으로 유대의 최고 통치자가 된 헤롯대왕(Herod the Great, B.C.37-4)은 유대 지역에서 본격적인 헤롯 가문의 통치의 길을 열어 놓았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그는 우선 그의 통치를 반대하는 바리새인들을 가차없이 처벌하였고 하스몬가와 그에 동조하는 유대인들을 완전히 멸절시켰다. 뽄만 아니라 혜롯은 하스몬 왕가의 힐카누스 2세의 손녀인 마리암네(Mariamne)와 대 제사장 시몬의 딸인 또 다른 마리암네와 결혼함으로써 자신이 이두매 출신인 이방인이라는 이미지를 떨쳐 버림과 동시에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이외에도 헤롯은 외교 수완도 탁월하여 이집트의 여왕인 클레오파트라(烈eo멸「a)와도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가 좋 아서라기 보다 당시 로마 통치자 안토니우스를 유혹하여 팔레스틴을 장악하려 한 그녀의 정치적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헤롯은 클레오파트라에게 옛 블레셋인들의 성읍들인 해안 도시들과 여리고를 주었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에 다시 되돌려 받았다.  


한편 헤롯은 옥타비아누스(가이사 아구스도)가 안토니우스를 누르고 새로운 로마의 황제로 즉위 하자 재빨리 그를 찾아가 과거 자신이 안토니우스에게 충성했던 것을 솔직히 자백하고 그에게 긍흘을 구하였다. 이런 헤롯의 진솔한 모습에 감동한 옥타비아누스, 즉 로마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다시 유대 왕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클레오파트라에 의해 로마의 직영지가 되었던 여리고와 옛 블레셋 지역의 해안 도시들 및 가다라, 히포, 사마리아, 가사, 욥바를 되돌려 주었다.  


결국 이렇게 해서 새 로마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의 신뢰와 유대 지역 내에서의 정적을 멸절시킨 헤롯은 이제 전 팔레스틴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헤롯은 헬라와 로마의 건축 양식을 받아들여 왕궁과 항구 그리고 도로와 망대와 같은 중요한 건축 사업을 추진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업이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이었다. 그것은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으로 이전의 스룹바벨 성전을 허물고 새롭게 지은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헤롯은 공중 목욕탕, 공원, 시장, 도로 및 헬라의 사치스런 문화 시설들을 본받아 건축하였으며 많은 도시들을 새롭게 건설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가이사 아구스도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가아사랴라는 도시를 건축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헤롯은 유대인들의 세금 경감 정책도 추진하였다. 그러나 헤롯의 집권 말기에 이르러서는 왕위를 계승하기 위한 자식들 간의 암투와 반대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헤롯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으로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때 헤롯은 동방 박사들의 방문을 받고 베들레헴에 있던 2세 이하의 유아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마 2 : 1-16).


한편 헤롯이 34년간의 유대 통치를 마치고 B.C.4년에 죽게 되자 그의 왕국은 세 아들에게 분할 되었는데. 헤롯 아켈라오(Her럴 Archelaus)는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의 분봉왕으로, 헤롯 안디바(He- r털 Anti멀5)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으로, 헤롯 빌립(Her검 Philip)은 갈릴리 호수의 북 동부에 위치한 드라고닛(Trachonitis)지방의 분봉왕이 되었다(눅3 : 1). 한편 이 세 분봉왕들의 역사는 신약 시대의 역사 기술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ll. 로마 제국의 역사


우리가 소위 신약 성경 시대라고 말하는A.D.1세기 전후의 팔레스틴을 포함한 지중해 지역의 패자는 로마제국(Roman Empire)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 성경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 제국의 역사도 정리할 필요가 있다. 한편 로마 제국 자체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틴 민족이 이탈리아 반도에 정착한B.C.8C경부터 A.D.476년 서로마의 멸망 때까지 약 1300년간의 역사를 다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것은 신약 성경의 배경으로서의 로마 제국의 역사이다. 따라서 먼저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B.C.270년부터 로마가 애굽의 잔존 세력을 쳐부수고 사실상 세계 제국으로 등장하게 된 B.C.31년까지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핀 뒤에 신약 성경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가이사 아우구스투스가 황제로 통치한 B.C.27-A.D.14년 까지의 역사와 그 이후로부터 도미티안 황제가 통치한 A.D.95년까지의 역사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또한 그 이후 A.D.476년 로마 함락때 까지의 로마 제국 말기의 역사에 대해서는 개략에 그치기로 한다.  B.C.8C경 이탈리아 반도 티베르강 유역에 정착하면서 국가의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한 로마의 역사는 대략 다음처럼 크게 셋으로 구분된다.  


1. 왕정 시대(B.C.8C중엽-6C말)

2. 공화정 시대(B.C.SC초-27년)

3. 제정시대 (B. C.27-A. D.476년)

이 가운데 우리가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소위 신약 성경 시대의 로마 역사는 공화정 말기와 제정 초기에 해당된다. 


 

1. 로마 제국의 등장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로마가 세계 제국으로 등장한 것은 갑작스럽게 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숱한 전쟁을 통하여 세워진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B.C.8세기경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 티베르강 유역에 자리잡은 소수 라틴계 민족으로서 이 민족인 에 트루리 아인 (Etrurians)의 지 배 하에 있던 매우 미 약한 민족이 었다.


그러다가 B. C.270년 경에 가서야 비로소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통일함으로써 강력한 국가를 세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 통일 후 크게 세력을 얻은 로마는 점차 지중해 지역으로 진출하여 해상 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한 수많은 전쟁을 치루었다. 그것이 바로 카르타고(Carthago)와의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B.C.2醜-146년)과 동방의 헬라를 정복한 전 4차에 걸친 마케도니아 전쟁(B.C.215-146 년)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로마는 지중해를 완전 장악할 수가 있었다. 계속해서 로마는 시리아의 셀류쿠스(Seleusus) 왕조를 정복함으로써 로마는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이 되었다. 한편 로마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은 B.C.63년 폼페이(Pompey)에 의해서 이며 이 후로부터 유대가 멸망한 A.D.70년까지 로마 제국의 역사는 신약 성경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2. 공화정에서 제정(帝政)으로


로마는 본래 이탈리아 반도의 원주민들인 라틴민족으로 구성된 부족 국가였으나 B.C.8세기부터 이민족인 에트루리아인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왕정 국가(◎政國家)가 되었다. 그러다가 B.C.訓9 년경 라틴 민족들이 서로 힘을 합세하여 에트루리아인 통치자를 축출하고 공화정(共和政)을 수립 하였다.


즉 기존의 왕정 체제에서 왕이 독재(獨裁)를 행함으로써 갖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300명의 귀족으로 원로원(元老院)을 구성하고, 그 원로원에서 선출한 2명의 집정관(執政官, Consul)으로 하여금 1년씩 교대로 최고 권세를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공화정이 수립된 후2세기가 지나고 로마가 점차 해외로 진출하며 많은 전쟁들을 치루기 시작하면서 공화정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즉 공화정 하에서 귀족들이 지나친 권세를 휘두르는 것에 대끌, 많은 전쟁을 통해 공로를 세운 평민들이 불만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 이전부터 평민회 (平民會)가 구성 되 고, 또 평 민들의 여 론을 받아들여 B. C.449년에 는 로마 최초의 성 문법 인 12동판법 이 제정되는 등 평민들의 권익 신장이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귀족들의 지나친 사치와 권력 행사는 여전하였고 이에 결국 B.C.1세기경 율리우스 케사르◎ulius Caesar, B.C.102-설)가 평민회의 지지를 얻어 원로원을 장악하고 제 1회 3두 정치를 성립시켰다.  그러나 제 1회 3두 정치(三頭政治)에서 케사르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제거하고 독재 정치를 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독재 정치는 공화제의 수호를 지지하는 자들에 의해 큰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으며, 결국 그는 B.C.썬년 브루투스(Brutus)와 카시우스(Cassius)의 암살 음모에 회생되고 말 았다.


케사르의 암살로 표면상 공화제는 다시 유지되긴 했으나 포에니 전쟁(B.C.2醜-146년) 이후 만연된 로마 사회의 부조리로 인하여 공화제에서 제정으로의 전환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케사르 살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제 2회 삼두 정치가 실시되었는데 이 때의 3인은 케사르의 조카인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와 레피두스(Lepidlls), 안토니우스(Antonius)였다.


그러나 옥타비 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와의 악티움(Actium) 해전에서의 승리(B.C.31넌)를 계기로 원로원의 추대에 의해 로마 최고의 권세를 가진 종신 집정관이 되었으며 전승장군(戰勝將軍)이라는 뜻의 임페라토르 (Imperator)와 존엄자(尊嚴者)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로써 사실상 로마는 공화정에서 제정(帝政)으로 완전히 바뀌었으며 옥타비아누스는 초대 황제(emperor)가 된 셈이다.  


한편 아우구스투스가 취한 통치 형태는 사실상 케사르와 같은 독재 체제였으나 겉으로는 공화제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비세습적인 군주제(君主制)였다. 이런 면에서 로마의 초기 군주제는 동방 국가들의 세습적인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A.D.3C경부터 로마의 군 주제도 황제의 권위가 크게 강화되면서 동방의 전제 군주제와 같이 세습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통치 하에서 로마 제국은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적 안정, 문화의 발달 등 그야말로 최고의 황금기를 누렸다. 즉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로마의 평화시대, 즉 '팍스 로마나'(PaxRomana)가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평화시대는 이른바5현제 시대까지 계속된다. 

 


3. 로마의 전반기 황제들


아우구스투스는 B. C.27-A. D.14년까지 약 41년간을 황제로 있었으며, 76세의 일기로 죽었다. 그가 사망한 이후 그의 양아들 디베리우스(Tiberius) 및 친족 4명이 연이어 제위를 계승하였으나 그들은 대체로 무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확고히 다져진 통치 기반은 조금도 동요됨이 얼었으며, 이른바 5현제 시대(五賢帝時代)의 마지막 왕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통치 때까지(A.D. 180년) 로마의 평화와 번영은 계속되었다.


  이에 로마 제국은 A.D.476년 서로마가 멸망하기 이전까지 약 80여 명의 황제가 즉위했었으나 여기서는 그 중에 신약 성경과 직접 연관이 있는 초대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로부터 신약 마지막 책인 계시록 심판 시대의 황제였던 제10대 도미티아누스 황제까지와 신약 성경과 직접 관련은 없으나 사도 시 대에 이어 진 소위 속사도와 교부 시 대의 황제들중 로마의 황금기 (Pax Romana)를 주도했던 소위 5현제까지의 역대 로마 황제들과 그들의 특징을 도표화하여 살펴보았다.  

 

4. 제정 말기 


도미 티아누스 이 후 네르바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때까지 이르는 소위 5현제 시 대가 끝남으로써 로마 제국의 평화 시대도 끝나고 점차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2세기 말부터 군인들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게 되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사후에는 군인들에 의해 황제가 세워 지거나 폐위되 었다.  


이와 같은 군인들에 의한 소위 '병영 황제시대'◎극導皇帝時代, 235-2製년)는 디오클레티아누스 (Diocletianus, 285-305년)에 의 해 일단 중지 되고 정치적 혼란이 어 느 정 도 수습되 었으나 궁극적으로는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306-337) 황제에 의해 완전 수습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대한 특기 사항은 ① 313년 밀라노(Milano) 칙령을 반포하여 기독교를 공인한 것, ② 330년 수도를 전략적 요충지인 비잔티움(Byzantium)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비잔티움으로 옮긴 새로운 수도를 가리켜 처 음에는 '신로마'(Nova Roma)라 칭하였다가 후에는 콘스탄티노플(Cons短ntinopre)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의 천도(遷都)가 화근이 되어 콘스탄티누스 사후 로마는 동서로 나누어져 두 황제의 공동 통치가 행 해지다가 A.D.395년에는 동로마와 서로마로 완전 분리되고 말았다. 그 이 후로부터 로마는 계속 쇠퇴하여 서로마가 A.D.476년 게르만 민족에 의해, 동로마가 A.D.1453년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정복됨으로써 로마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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