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발상지 수메르문명


배 철 현 / 세종대 교수. 고대 근동학

16세기 중엽 이스탄불에 파급된 커피와 카페문화는 유럽 카페문화의 전신으로 초기 서민들의 문화였으나 점차 상류계층의 사교의 장으로 정보와 담론의 교환처가 되었다.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 지역의 카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라크 국립박물관은 약 7000년 전 인류 역사가 시작된 문명의 요람인 메소포타미아 유물들을 품고 있는 보고(寶庫)다. 필자는 작년 여름 EBS와 특집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 위해 중동 7개국과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 영국의 영국박물관을 방문하여 거의 모든 고대근동의 유물을 촬영하도록 허락받고 이 유물들을 본격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한마디로 이라크 국립박물관에는 루브르나 영국박물관의 소장품과 비교하여 훨씬 다양하고 소중한 유물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더구나 진열되지 않아 학자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수많은 유물이 지하 보관소에 방치되어 있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4월 13일경 바그다드가 미·영 연합군에 함락되자 30만여 점의 유물 중 17만여 점이 사라졌다고 한다. 박물관 측은 전쟁 전에 귀중한 유물들을 지하수장고로 옮겼으나 그마저 문을 부수고 약탈해 갔다고 한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이 유물들이 벌써 이라크 국경을 넘어 중동 주변 지역에서 불과 10∼200달러에 밀매된다고 한다.

한 나라의 정체성, 가치, 그리고 문명은 그 나라 역사에 의해 결정된다. 만일 한 나라의 문명이 약탈당한다면 그 역사는 멈추고 사라지고 만다. 이라크 박물관의 유물들은 이라크 사람들의 문명일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가장 오랜 유적이기에 이번 약탈은 근대 중동 역사상 최대의 문화 참사로 기록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라크 지역은 인류 문명사에서 왜 중요한가? 거리상 멀리 떨어져 있어 우리와는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고대 이라크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시간상으로도 우리와 적어도 2000년이 넘는 간격을 두고 있다. 이 글을 통해 공간적, 시간적 간격을 초월해 보편적인 가치를 우리에게 주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살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간이 고대문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서양인이 나르시스적인 세계관에 감금되어 있다가 자기 이외의 타자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에 널리 퍼진 산업혁명 덕이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유럽인들이 서서히 비유럽 국가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들은 제국주의의 일환으로 정복한 비유럽적인 것, 즉 ‘오리엔트’를 발견하였다.

유럽인들이 접한 고대 문명은 그리스나 로마의 역사가들, 혹은 성서기자들이 제공하는 이차적이며 다소 왜곡된 정보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리엔트’를 식민화하는 도구였던 유물을 연구하는 고고학(archaeology)과 문헌을 연구하는 고전 문헌학(philology)의 노력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두 가지 사상적인 기둥인‘헬레니즘(Hellenism)’과 ‘헤브라이즘(Hebraism)’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문명의 세 가지 기본 요소는 ‘도시’, ‘자금’, 그리고 ‘문자’다. 그중에서도 도시는 가장 중요하다. ‘문명’이라는 영어 단어 ‘civilization’도 ‘civis(시민)’, ‘civitas(도시-국가)’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다. 기원전 8000년경 이집트에서 팔레스티나,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이른바 ‘비옥한 초승달(Fertile Crescent)’ 지역에서 인간생활의 형태를 바꿀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영국의 고고인류학자 고든(V. Gordon)의 용어를 빌리자면 인류는 ‘농업 혁명’이 일어나면서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도약한 것이다. 정교한 돌도 만든 농기구의 출현으로 인간은 채집하고 사냥하는 생활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와 견줄 만한 사건이 4700년 후인, 기원전 33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남부지역에서 일어났다. 이 사건은 ‘도시 혁명’으로 무문자시대에서 문자시대로, 전역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촌락시대에서 도시시대로 넘어가는 변화였다. 그 전에는 이스라엘의 사해 근처에 있는 여리고(Jerico)성이나 아나톨리아(터키의 옛 지명)에 있는 챠탈 휴육처럼 독립적으로 도시가 존재했지만,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는 지역이란 의미를 가진 ‘메소포타미아’(‘두 강 사이 (지역)’) 남부의 ‘수메르’지역에서 처음으로 여러 도시가 체계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도시 혁명’은 대개 신탑이라고 여겨지는 높이 쌓아 올린 ‘지구라트’와 그 부속 건물을 중심으로 이전의 촌락에서 도시로 탈바꿈한다. 고대 수메르인들은 이전까지 해 오던 유목생활과 상생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도시문화를 형성했고 도시 문명을 이루면서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본격적으로 예술품들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인류 문명의 발상지 메소포타미아의 예술을 대표적인 작품들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기원전 3500년부터 기원전 3100년까지 이라크 남부 도시인 우르크(현재 지명은 와르카, 성서 지명은 에레크)에서 메소포타미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문화를 감지할 수 있다. 처음으로 고대 수메르인들은 이라크 남부 지역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관개시설을 도입한다. 효과적인 농업 방법으로 우르크인들이 이전에는 없었던 장거리 무역을 하면서, 우르크 문화는 동쪽으로 이란의 수사(Susa)까지, 북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올라가 시리아와 터키까지 전파되었다.

‘두 강 사이’라는 의미의 메소포타미아 지역

수메르 예술은 도시의 출현과 함께 출발했지만 자연에 의지하는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신들은 하늘, 땅, 물, 달, 태양, 폭풍, 그리고 번개였다. 약동하는 자연이 바로 수메르인의 신이었던 것이다. 도시를 이룬 이들의 주 경제는 농사였고, 가장 큰 종교행사는 일년의 풍요를 비는 ‘신년 축제’였다. 이 때 자연의 생산을 상징하는 ‘두무지(Dumuzi)’신이 겨울 동안에는 죽고 춘분 때 시작하는 이 신년축제에서 다시 부활한다.

특히 역사 이전의 모신이 수메르 최초의 도시이며 문자가 발견된 우르크시의 주신인 이난나 여신으로 흡수되었다. 특히 신년축제에서 볼 수 있는 두무지 신과 이난나 여신의 성혼례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인간의 바람을 담은 가장 오래된 성혼례의 원형일 것이다. 이라크 국립막물관에 있는 이 시대의 주요 문화재인 〈우르크 꽃병〉은 두무지 신과 이난나 여신의 성혼례를 묘사한 고대 오리엔트의 어떤 유물보다 값진 것이다. 이라크 국립박물관이 약탈되면서 이 유물이 없어졌다는 소식은 인류의 소중한 역사가 사라지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우르크 꽃병〉은 1m 정도 높이에 3개의 단에 성혼례를 자세히 묘사하고 ! 있다. 하단은 가축 행렬과 대추야자나무와 보리 이삭이 보인다. 중앙 기단에는 초기 왕조시대의 수메르인들이 신에게 선물을 바치는 모습이 있다. 그리고 상단에는 이 선물을 받는 여신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 여신이 바로 이난나다. 샛별신이기도 한 이 여신은 곡식창고를 상징하는 두 개의 갈대 기둥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역시 우르크에서 발견된 〈우르크 여인 두상〉은 초기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예술품이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커다란 조각상은 돌을 다듬어 만들었는데 이라크 남부 지역에는 돌이 아주 귀하기 때문에 이 당시 조각상의 돌은 대부분 수입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회석암을 사용해 실제 사람 머리 크기로 만든 〈우르크 여인 두상(Warka Head)〉이다. 이 두상은 기원전 3100년 우르크의 한 신전에서 발견되었다. 여인의 얼굴을 묘사한 이 두상은 뒤가 편편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나무 같은 기둥에 매달렸을 것이다.

후대에 유사한 예술품과 비교해 보아, 없어진 눈썹과 동공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수입된 청금석(lapis lazuli)으로 장식되었고, 안구는 조개껍데기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머리카락과 그 머리 중간의 빈 공간에는 금장식 가발이 있었다. 이 두상이 여신을 묘사했는지, 아니면 한 귀족 여인을 묘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메소포타미아 예술품으로는 처음으로 실제 인간의 모습을 편편한 이마, 부드러운 볼, 그리고 고상한 입술로 묘사한 최초의 현실주의 작품이다. 〈우르크 여인 두상〉 역시 이번 이라크 국립박물관이 약탈당했을 때 ! 사라졌다.

기원전 3000년에 들어서면서 수메르 예술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신전이 메소포타미아의 행정을 주관하게 된 이 시기를 ‘초기 왕조 시대’라고 부르는데, 그림글자에서 더욱 정교해지는 수메르 쐐기문자로 전환되고,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지역에 거주하며 자신들을 키-엔-기라 부르기 시작했다. 후에 이 이름이 바빌로니아어로 ‘수메르’라고 번역되 편의상 이들이 사용한 언어를 수메르어, 이들을 수메르인이라 부른다.

신전에서 발견된 이 수메르인들의 모습은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바그다드 북동쪽에 위치한 에쉬눈나(현재 텔 아스마르)의 아부 신전에서 헌물 동상이 발견되었다. 신전 안 제단위에 놓여 있던 이 제의 동상(수메르어 ALAN)은 바로 곡물의 신인 아부 신을 상징한다. 이 동상에 신이 실제로 내재한다고 믿었던 수메르인들은 동상 받침에 아주 오래 전부터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이 믿어 온 독수리, 사슴의 부조물을 새겨 놓았다.

특히 수메르인의 신앙은 기원전 2100년경 세워진 지구라트라는 신탑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지구라트는 인류 최초의 도시이며 최초의 그림 문자를 사용한 우르크에서 발견됐다. 이 지구라트는 우르크의 주신인 이난나 여신을 위한 것으로 그 뒤로는 에쿠르 신전이 위치해 있다. 지금도 우르크 지구라트의 정상에 서면 사방에 둘러싼 고대 성벽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한편 이 당시 수메르인들의 생활상은 성서에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기록된 우르에서 영국의 고고학자 레오나드 울리 박사가 1929년에 발굴한 우르 왕묘의 부장품에서 엿볼 수 있다. 여기에는 황금 투구, 황금 칼, 황금 하프, 그리고 왕이 즐기던 장기판을 포함한 수많은 일상용품과 남자 6명과 여자 68명의 뼈도 함께 발견되었다. 이들은 왕의 내세를 위해 순장된 부장품인 듯하다.

이 왕묘에서 발견된 유물 중 〈우르 스탠더드〉라는 것이 있다. 일명 ‘전쟁과 평화’라고 알려진 〈우르 스탠더드〉는 역청 위에다 석회암과 조개껍데기, 그리고 청금석 장식을 사용해 한 면에는 전쟁을, 다른 면에는 잔치를 묘사했는데, ‘전쟁’면에는 네 마리 당나귀가 끄는 전차, 포로가 된 적들, 창을 들고 전진하는 보병들, 그리고 왕에게 끌려가는 발가벗은 적들이, ‘평화’면에는 동물, 물고기, 그 밖에 음식들이 전쟁을 축하하는 잔치장소로 들어오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하프를 켜는 연주가들 옆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기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꾀했던 수메르 예술

수메르 초기 왕정시대 이후, 움마시의 왕인 루갈짜게시가 우르크와 라가시를 정복하고 수메르 전체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그는 셈족 계열인 아카드인 사르곤(Sargon)에 의해 멸망당한다. 사르곤은 메소포타미아를 처음으로 통일한 왕이다. 이때부터 수메르어는 사라지고 최초의 셈어인 아카드어(좀더 명확히 말하자면 고대 아카드어)가 왕조비문이나 궁궐문서에 쓰이기 시작하였다. 아카드 시대는 사르곤과 그의 손자 나람신의 놀라운 업적으로 후대에 이 두 왕에 대한 수많은 전설이 생겨나기도 했다.

호전적인 아카드 제국이 등장하면서 신전 중심의 수메르 문화는 왕정 중심의 아카드 문화로 급변한다. 아카드 제국을 건설한 사르곤이 어디 출신이며 어떻게 왕이 되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이름, 사르곤(‘진짜 왕’)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왕위 찬탈자였을 듯하다.

후대의 자료 《수메르 왕조기록(Sumerian King List)》은 사르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아카드에, 아버지가 대추나무꾼인 사르곤은 아카드를 건설한 아카드의 왕인 (키시의) 우르-짜바바의 시종장이었다. 그는 (아카드의) 왕이 되어 56년간 치리했다.”

동으로 만든 사르곤의 두상은 수메르인들이 지향하는 신들을 위한 문화가 아니라 전쟁을 통해 정복하고 제국을 만들려는 제왕의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 심지어 사르곤의 아들인 나람신은 스스로 신이라 칭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예술에서 신들은 뿔 달린 머리 장식을 한 모습으로 〈나람 신 왕 전승비〉에 묘사되어 있다. 아카드제국의 왕 나람신(기원전 2254∼2218년)이 이란 쪽 산지에 사는 거주인들을 정복하는 모습을 묘사한 〈나람 신 왕 전승비〉는 1898년 프랑스의 고전학자 모르간이 이란의 수사에서 발견하였다.

기원전 12세기 당시 이란에 거주하던 엘람인들이 아카드를 침공하면서 이 부조물을 수사로 약탈해 왔기 때문이다. 〈나람 신 왕 전승비〉 중앙에 있는 나람 신 왕은 중앙에서 적들의 시체를 밟고 산 위에 있는 신들을 상징하는 두 별 밑에서 승리는 기념하는 돌기둥이다. 이 돌기둥의 아름다움은 나람 신 왕의 아름다운 몸매와 배경 그림, 그리고 이들의 적절한 배치에서 극치를 이룬다. 이 부조물의 극적인 힘은 공간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시간과의 긴장관계다.

아카드 군인들은 다가오고, 적들은 도망가고, 나람 신은 중앙에서 승리의 왕으로 등장한다. 고전 그리스 부조물에서나 나오는 예술 작품의 조화와 일관성이 잔잔히 배어 있다. 이 유물은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의 구조, 즉 나람 신의 군인들처럼 축복받은 자들이 왼쪽에서 부활하고 중앙에서 예수가 서 있고, 오른쪽에는 저주받은 자들이 서 있는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

아카드 제국이 북동쪽 산지에서 침공한 구티인들에게 멸망한 후,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는 다시 수메르 문화를 재건하려는 도시들이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라가쉬의 구데아 왕과 우르 제3왕조 시대(기원전 2112∼기원전 2004)는 수메르 문화의 르네상스 시대를 도래케 했다.

라가쉬의 왕인 구데아 왕의 동상은 라가시의 주신인 닌기르수 여신의 종으로 두 손을 앞에 모아 경배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고, 구데아는 수메르어 비문에서 ‘나는 내 주인 닌기르수 여신의 사랑을 받는 목자다. 내 생명이 길어지게 하소서’라고 쓰여 있다.

구약성서에서는 바벨탑으로 표현된 지구라트(신탑)는 수메르 도시마다 그 도시의 주신을 위해 건설되었다. 우르 제3왕조를 건설한 우르 남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구라트를 건설했다. 우르의 주신인 달의 신 난나 신을 위해 3층으로 된 지구라트를 건설하고 신전 옆에는 여자 사제들이 거주하던 ‘기파르’라는 건물도 지었다. 이러한 수메르의 부흥기는 아카드 제국을 멸망시킨 구티인들에 의해 기원전 2004년 막을 내린다.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은 이제 팔레스타인에서 몰려와 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한 유목민 아모리인들에게로 넘어간다.

아모리인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침입하여 북쪽 아수르, 니느웨를 중심으로 아시리아 제국을 건설하고, 남쪽에서는 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하여 이전의 남부 수메르 중심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바빌론을 중심으로 전환시킨다. 함무라비왕(기원전 1792∼기원전 1750)은 바빌로니아 제국의 여섯 번째 왕으로 바빌론의 영토를 확장하고 법을 제정하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은 높이 2.25m, 무게 4톤의 현무암에 286조항의 법을 새겨 놓았다. 이 법전 상부에는 정의의 신이며 태양신인 샤마쉬 신이 신을 상징하는 머리장식을 쓰고 권위를 상징하는 의자에 앉아 오른손으로 왕권을 상징하는 ‘발라’를 그 앞에 겸손하게 서 있는 함무라비 왕에게 선사한다. 함무라비는 겸손의 표시로 신의 손을 입에 댄다. 그 밑에 아카드어로 서문, 286조항, 그리고 결문으로 되어 있는 법이 섬세하게 적혀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박물관 약탈 사건으로 인해 〈함무라비 법전〉이 도난되었다고 보도했지만 원본은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에 잘 보관되어 있다.

기원전 18세기 중엽 함무라비시대가 막을 내릴 무렵, 고대 근동 인종들의 구성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히타이트인은 아나톨리아의 원주민을 지배하고 있었고 후리아인은 북부 시리아와 북부 이라크를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자그로스 산맥 뒤로는 아리아 귀족들이 카사이트인들을 규합하여 군인 국가를 만들고 있었다.

바빌로니아인들이 이러한 조짐을 알았더라도 그들은 내분의 문제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다. 바빌로니아 제국은 함무라비의 카라스마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으나 초기 바빌로니아는 여러 국가의 집합체였기 때문에 이들이 하나의 나라 바빌로니아로 유지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함무라비 왕이 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정치·경제·정신 면에서 하나의 문화로 만드는 데 일시적으로 성공했지만 과거 인류 최초의 문명을 일으켰던 수메르의 도시국가들과 샴시 아다드의 공적을 기억하는 아시리아는 독립의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함무라비가 기원전 1750년에 죽자, 바빌로니아 제국은 산산조각이 났다.

150년 후에 히타이트가 바빌론을 침공했을 때, 바빌론은 조그만 도시로 전락하였다. 이제 바빌로니아 제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이후 400년 동안 카사이트인들이 바빌로니아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카사이트 시대 예술의 특징 중 하나는 이들이 창안한 ‘쿠두루’라는 경계석이다. 쿠두루에는 부동산을 사고 파는 내용이 적힌 비문과 그것을 증명하는 신들의 여러 상징이 새겨져 있다. 이 쿠두루는 후대의 신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 제국에서도 계속 사용됐다.

신바빌로니아 시대의 왕이며 유다 왕국을 멸망시킨 느부갓드네살왕은 함무라비 시대부터 짓기 시작한 바빌론을 재건하였으며,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기원전 6세기 신전과 궁전을 웅장하게 건설하였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헤로토투스는 ‘그 웅장함에 있어 바빌론을 능가할 도시가 없다’고 전한다.

1899년 3월 독일의 고고학자 콜데웨이는 바그다드 남쪽 80km에서 세계 최대의 고대도시인 바빌론을 발굴하기 시작한다. 이때 ‘이쉬타르 여신의 문’으로 널리 알려진 바빌론 입구의 성문도 발견됐는데 성문의 원형은 독일 베를린 페가르모 박물관에 있고 현재 바빌론에 있는 문은 모조다. 헤로토투스는 성벽의 폭이 넓어 4마리 말이 이끄는 전차가 그 위를 달릴 수 있고 최서단의 성벽은 유프라테스강을 접하고 있어 홍수 방파제와 적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하였다고 전한다.

이 이쉬타르 성문은 양 옆에 한 쌍의 거대한 탑이 있고, 구운 벽돌을 역청으로 잇고 그 위에 유약을 발라 빛을 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기독교 이야기 > 유래.역사.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약시대의 역사적 배경  (0) 2018.02.21
신약 시대의 역사   (0) 2018.02.21
성경의 연대기와 세계사 비교  (0) 2018.02.18
이스라엘의 4000년 史  (0) 2018.02.12
히브리어  (0) 2018.02.1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