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4000년 史



  고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에서 일어났던 역사의 전개는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의 지정학적 위치와 밀접한 상호 관계성을 갖고 있다.

그러한 상호 관계성의 요소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지역에서 세계의 중심지였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라는 거대한 두 제국 사이에 끼어 교량적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이 두 세력은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언제나 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세력 충돌을 벌렸다. 그러나 서로간에 평화가 유지될 때에 이스라엘은 두 세력을 연결해 주는 무역로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지나는 국제도로는 자연히 정치적으로 큰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 도로들을 장악하려는 정치적 욕구는 이 지역을 정복하여 자신들의 통제아래 두겠다는 야욕으로 표출되었다. 그런 점에서 가나안의 통치는 세력의 균형에 따라 지배자가 반복적으로 뒤바뀌는 역사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이 나름대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양대 세력이 극도로 약화되어 더 이상 이 지역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때로 국한된다. 


   (2) 기후분포 면에서 사막과 농경지의 경계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두 지역간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점철되어왔다. 막강한 제국의 정치적 통제가 약화되고 농경지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상태가 태만해 지게되면, 사막의 유목민들은 경작지 지역으로 쳐들어와 정복과 약탈을 감행하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유목민 침입자들은 사막과 농경지의 경계지역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으로 정착하게 되고, 급기야는 그 지역 인구로 흡수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렇게 정착된 이주민들은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또 다른 유목민들에게 공격을 받게 되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3) 이스라엘의 거주지역과 행정 중심지는 역사의 변화와 통치자의 성격에 따라 산지, 해안평야, 혹은 내륙의 계곡지역 등으로 바뀌어왔다. 문명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내륙지방 출신들은 대체적으로 산지를 선호하였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을 비롯한 아랍인, 터키인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해안으로부터 온 민족들은 국제무역의 기술과 지식을 갖고 있었고,  자신들에게 익숙한 해안 쪽에서 그들의 중심지를 발전시켰다. 뵈니게인, 불레셋인, 헬라인, 로마인, 십자군들, 그리고 오늘날의 유대인들이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거대한 두 대륙인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좁은 지상적 가교로서의 특성을 지닌 이스라엘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복잡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지역에서 인류 역사는 오래 전부터 시작이 되었던 것으로 입증되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는 청동기시대 이후부터였다. 그런 점에서 청동기 이전의 석기시대는 이스라엘에서 선사시대로 취급된다. 본 장에서 4000여 년에 걸쳐 이루어진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간략하게 개관하려는 목적은, 중요한 시대마다 이 지역에서 일어났던 역사의 특성들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려는데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발견된 최초의 인간 유골은 대략 기원전 50만년 이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인들은 주로 요단계곡에서 살았었다는 흔적이 남아 있으며, 갈멜산 동굴에서도 고대인들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당시 이 지역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비가 내렸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강이나 호수 근처에서 생활을 하였다. 당시 이곳에는 사바나형태의 대초원이 형성되어 있었고 몸집이 큰 동물들이 많이 서식하였다. 사람들은 이 야생동물들을 자유롭게 사냥함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부싯돌로 연장을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였고 그런 연장들은 석기시대의 문명을 크게 발전시켰다.  최초로 불이 발견된 것은 기원전 20만년 경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변혁은 기원전 10,000년에서 8,000년 사이에 발생한 수집형태로의 경제적 구조 개편이다. 이때에 유목민들은 가축을 길들이고 곡식을 경작하면서 한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변화로 인하여 사람들은 도시 중심의 새로운 사회구조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여리고가 등장하게 된 것은 대략 기원전 830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원전 6700년경부터는 도자기가 돌그릇들을 대신하게 되었다.      


   기원전 4000년에서 3200년경까지 계속된 동석기시대에 이스라엘을 비롯한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도시문명이 크게 발전하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는 주도적 역할을 하는 도시들이 많이 세워졌다. 팔레스타인에서도 마찬가지로 도시중심의 문명이 크게 발달하였다. 엔게디와 브엘세바에서 발견된 상아와 구리제품들은 이 시기에 섬세한 수공기술이 얼마나 발전하였는가를 잘 보여준다.


  청동기시대는 근동지역에서 처음으로 역사의 기록이 있게 된 2000년간을 의미한다. 당시의 역사적 문서들은 대부분이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 이집트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그 중에서 팔레스타인의 역사에 대해 직접적인 자료를 제공하는 문서들은 별로 없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히브리 족장들의 역사는 주로 청동기시대에 해당되며, 이스라엘민족의 출애굽 역사도 청동기시대의 마지막 기간에 해당된다. 근동지역에서 청동기시대는 역사적으로 초기, 중기, 후기의 세 시대로 구분된다. 


   나일강이나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과 같은 거대한 강 유역에서는 문화가 급속히 발전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강력한 왕조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흩어져 있는 작은 규모의 도시국가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었던 이집트 왕들은 해안의 평야지역들을 장악하게 되었고, 이러한 지배권은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가나안 지역으로 이주하여 왔었던 기원전 1800년경까지 계속되었다. 가나안으로 이주하여 온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은 흉년으로 인하여 당대 최대의  곡창지역인 이집트로 이주하기까지 주로 산간지역에서 생활하였다. 그들은 모세의 영도 하에 이루어진 출애굽사건이 있기까지 이집트에 머물렀다.


여호수아가 산간지역으로 진입하는 동안 이집트에서 축출된 해양민족인 블레셋은 이스라엘 해안의 남부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1. 초기 청동기 (기원전 3200-2200년)


   기원전 3200년경부터 시작되는 초기 청동기시대는 약 1000년간 지속되었다. 초기 청동기시대는 보다 포괄적인 사회조직과 강력한 정치세력이 형성되었던 시대였다. 이 시대에 비옥한 반달형 지역에서는 도시들이 크게 발전하였다. 특히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수멜과 최근에 발굴된 시리아의 에블라는 당대에 유명한 도시였다. 도시에는 일반주민들의 가옥보다 큰 공공시설 건물들이 주로 세워졌다. 그러한 건축물들은 거주민들의 결집된 노력으로 만들어 졌다. 


  강력한 아카디아제국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건설되었고, 그 통치세력은 유프라테스강 유역과 지중해 해안지역까지 확장되었다. 특히 아카드제국의 사르곤왕은 여러 지역을 점령한 왕으로 유명하였다. 당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지역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서부 셈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였다. 아카디아 제국 통치는 제국 내의 모든 곳에 설형문자를 도입시켰고 이를 각 지역의 언어에 적용시켰다. 반면에 피라밋 시대의 번영을 누렸던 이집트인들은 레바논 지역의 해안도시들과 무역 관계를 증진시키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통제권을 공고히 구축하였다. 당시의 국제 무역은 주로 요단동편 고원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던 '왕의 대로'를 통하여 이루어졌고, 이 도로 주변에 살고 있었던 주민들은 상당한 번영을 누렸다. 이 시대가 끝나갈 무렵 이집트의 지배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인근 사막 유목민들로부터 자주 공격을 받았다.  이로 인하여 이 지역의 많은 도시국가들이 파괴당하였으며, 요단동편의 도시들 역시 유목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왕의 대로'는 얼마동안 국제도로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이집트는 첫 번째 중간기를 맞게되었다. 


2. 중기 청동기 (기원전 2200-1550년)


   중기 청동기시대 초반, 메소포타미아에는 많은 도시들을 중심으로 아모리인들의 왕조가 세워지게 되었고, 이집트에서는 중왕국이 새롭게 번영을 이루면서 통치력을 확장시켰다. 팔레스타인에서도 도시국가들이 점차적으로 발전하였다. 이 시대로부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여 주는 중심도로는 '해안길'(Via Maris)이 도맡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의 해안지역을 통과하는 이 도로는 갈멜산의 이론계곡, 이즈르엘 계곡, 갈릴리지역, 그리고 골란고원을 거쳐 다메섹에 이른다. 이 시대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곡식과 과실을 경작하면서 동시에 양과 소떼들을 길렀다. 이 당시 팔레스타인에서의 생활과 정치적 상황은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 속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 문서 속에는 아스글론, 아벡, 세겜, 하솔 등과 같은 도시들이 언급되고 있다. 


  중기 청동기의 후반기인  기원전 18세기에 이르러 대규모의 이주 물결이 소아시아와 근동지역을 휩쓸었다. 이러한 이주 물결은 북쪽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의 전지역을 휩쓸고 지나갔고, 더 나아가 이집트에 외국인 통치시대를 가져오게 하였다. 이집트에서는 힉소스라는 외국 정복자들이 이집트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다. 힉소스가 전쟁에 도입한 두 가지 기술적인 혁명은 말과 전차의 이용이었다. 힉소스는 나일강 델타지역의 타니스(소안)에 그들의 수도를 세우고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지역까지 자신들의 통제아래 두었다. 서북 네게브의 '샤루헨' 도시는 팔레스타인지역에 있었던 힉소스 통치의 중심지였다. 200여 년 후 힉소스가 이집트의 한 지방 세력에 의해 축출되었을 때에도 팔레스타인에 대한 힉소스의 통치는 얼마동안 유지되었다. 그들의 마지막 후퇴로 팔레스타인에서의 중기 청동기 시대는 끝나게 되었다. 


3. 이스라엘 족장들의 시대


   히브리 족장들이 가나안땅에 도착한 것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창세기의 기록과 고고학적 연구 결과에 의하여 그 시기가 대략 중기청동기일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 시기와 관련하여 특별히 관심 있는 사건은 창세기 14장에 기록된 엘람왕 그돌라오멜을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의 네 왕들이 가나안 다섯 왕들과 벌린 전쟁이다. 네 왕들의 가나안 원정은 다메섹에서 시작되었다. 오늘날의 골란고원의 중심부에 위치한 아스다롯-가르나임에서 르바족속을 친 그들은 길르앗의 함과 모압지방의 사웨리랴다임을 거쳐 에돔의 세일산, 그리고 오늘날의 아카바 근처의 엘바란에 이르렀다. 이들이 군사활동을 벌리며 남진하였던 길은 요단 동편지역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왕의 대로이다. 엘바란에서 그들은 엔미스밧 곧 가데스바네아와 하사손다말을 거쳐 싯딤골짜기에서 가나안의 다섯 왕과 맞서 싸웠다. 


  또 다른 흥미로운 사건은 서부 셈계통 민족의 이동이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과 이집트까지 이르게 되었다. 당시대의 문헌에 의하면, 이 이동하는 민족을 '하피루'라고 통칭하였다. 많은 학자들은 그들이 곧 히브리민족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히브리인이었던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은 이동하는 하피루들처럼 반유목민이었다. 새로 이주해온 아브라함은 가나안 원주민들로부터 거주의 권리를 얻고자하였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은 헤브론에서 가족의 무덤으로 쓸 막벨라 굴을 사기 위하여 은 400세겔이라는 많은 돈을 지불하였다. 그의 아들 이삭은 네게브 땅에서 농사로 거부가 되었다. 제3 세대인 야곱과 그의 자녀들은 자기들 스스로 이 지역의 완전한 주민으로 여겼고, 그곳에서 생활기반을 확고하게 다졌다. 세겜에서 있었던 사소한 분쟁은 당시 도시국가 형태의 작은 왕국들과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었던 부족들 사이에 계속 되었던 분쟁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단조로운 목축생활을 하였던 족장들은 주로 산지길을 선호하였다. 이 길은 비교적 인구가 많지 않은 지역을 지나는 도로로서, 보다 풍요를 누렸던 비옥한 해안평야의 도시들과는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성경은 이러한 목자들의 생활, 특히 그들의 독특한 습관과 전통들을 생생하게 묘사해 준다. 그들의 나그네 환대에서 볼 수 있는 친절함, 상속권을 지키는 열정 등이 그러한 예이다.    


4. 후기 청동기(기원전 1550-1200년)


   이집트의 새로운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땅으로부터 힉소스를 몰아 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제국의 힘을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도시국가들에게 미치려고 노력하였다. 오랜 포위 공격 끝에 힉소스의 마지막 보루였던 샤루헨이 그들의 손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기원전 15세기 중엽, 이집트에서 신왕국의 번영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바로왕 투트모세 3세는 북쪽지역으로 군사원정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트로이의 말과 비슷한 작전으로 욥바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므깃도도 포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렇게 진행된 그들의 승리는 북부 시리아의 오론테스강까지 확대되었다. 투트모세 3세는 점령지역마다 이집트인으로 하여금 현지 관리직을 맡도록 하였고, 군대를 주둔시켜 점령지역의 왕들을 감독케 하였다. 이 지역들은 매년 많은 양의 곡물, 과일, 재목, 금속 및 많은 노예들을 이집트로 보내야만 했다. 


   당시 이집트와 경쟁적인 관계에 있었던 나라는 아나톨리아의 힛타이트 제국이었다. 힛티이트 제국은 기원전 14세기경 이집트가 점차 약화되는 틈을 이용하여 유목민들로 하여금 이집트 지배하의 여러 도시들을 공격하도록 선동하였다. 당시 이집트의 통치자였던  아멘호텝 4세는 종교적인 개혁에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었음으로 이집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지역 관리는 매우 소홀하였다.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고 있었던 통치자들과 수비대가 보내온 외교서신들은 아카디아의 설형문자로 기록하여 아케나톤이 새롭게 건설한 오늘날의 '엘-아마르나'라는 수도에 보관하였다. 이 외교서신들의 내용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유목민들에 대항할 수 있도록 급박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몇몇 도시 통치자들은 하피루 침략자들과 동맹을 맺어 이집트로부터 독립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 서신들은 답지하는 대로 왕의 보관소에 그대로 보관되었지만, 누구도 이 요청에 응답하거나 이집트인들의 유익을 위하여 앞장서서 행동한 사람은 없었다. 아마르나 사신은 당시 팔레스타인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중요한 문서이다. 아마르나 문서에는 아스글론, 게셀, 예루살렘, 세겜, 므깃도, 악고, 하솔 등과 같은 여러 중요 도시들이 언급되어 있다. 


  기원전 13세기경 또 다시 이집트에서는 강력한 왕조가 일어났다. 이 왕조의 세티 1세는 벧산에 대해 보복적인 토벌 작전을 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상형문자로 된 비문을 새겼다. 그 후 라암셋 2세는 오론테스강에서 힛타이트 제국과 싸웠다. 어느 쪽도 대승을 거두지 못하였지만, 야르묵강을 중심으로 두 제국 사이에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이 시기 초반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땅을 정복하기 시작하였다. 메르넵타 통치시대(기원전 1236-1223년)의  한 비문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이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성경 이외의 자료에서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언급되는 중요한 자료로서, 이때에 이미 이스라엘은 한 민족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철기시대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국으로부터 페르샤 제국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약 1000년간의 시기를 의미한다. 이때는 이스라엘 왕들과 예언자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던 시대로서, 구약 역사기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간이었다. 편의상 이 시기를 전기 철기시대, 후기 철기시대, 페르샤시대 등으로 나누기로 하겠다. 


1. 전기 철기시대(기원전 1200-925년)


   전기 철기시대는 청동기시대를 통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을 계속 장악하여 왔던 이집트의 세력이 기울어지고, 그 대신 작은 왕국들이 세력을 얻는 시대이다. 에돔, 모압, 암몬, 블레셋, 뵈니게를 비롯한 이스라엘이 모두 이 시기에 독립된 왕국으로 성장하였다. 이들 왕국 중에서 지중해 해안지역의 다섯 도시였던 아스돗, 아스글론, 가사, 에글론은 블레셋이란 나라로 연합되었으며 이스라엘과 맞수가 되어 영토 확장과 무역 경쟁을 벌렸던 대표적 적대국이었다.

   에게해 근처의 해양민족이었던 블레셋은 처음에는 이집트를 침략하였다. 그러나 이집트의 라암셋 3세에 의하여 패배를 당한 후 가나안의 남부 해안평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들을 '블레셋'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에게해 연안의 한 종족이었던 '펠라스기안'(Pelasgian)과 관련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들은 샤론평야와 갈멜산까지 그들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당시 블레셋은 철을 개발하였으며, 철병거를 사용하여 산지를 비롯하여 평야와 넓은 계곡들을 장악하였다.(삿1:19) 블레셋을 통하여 이스라엘에는 철기시대가 도입되었다. 또한 블레셋의 영향과 억압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느슨한 부족 동맹체제를 버리고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군주제도를 채택하게 되었다.


   초기의 이스라엘은 지파 동맹체제를 유지하면서 중앙산지와 갈릴리, 그리고 요단동편의 일부 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그러나 사무엘의 영도 하에 시작된 왕정제도는 사울과 다윗 시대를 거치면서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솔로몬의 통치시대를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통일왕정은 짧은 역사로 끝나게 되었다. 통일왕정이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나게 되었는지를 정확하게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기간을 대략적으로 기원전 1000년에서 927년까지 약 75년간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인물은 이스라엘에서의 왕정을 확고하게 구축한 다윗왕이다. 초대왕 사울의 뒤를 이은 다윗은 이스라엘에 새로운 조직체계를 확고하게 구성하였다. 그는 새로운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이곳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결속을 상징하는 언약궤를 상주시킴으로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로 만들었다. 다윗은 그러한 예루살렘 위치의 강화를 통하여 자신의 입지도 놀라울 정도로 공고히 만들어 나갔다. 마침내 다윗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 일에 성공하였다. 다윗은 조직된 상비군을 창설하였고, 궁중의 대신들을 세워 행정기관을 통괄하게 하였다. 


   다윗 당시 이스라엘 주변국가들의 세력은 어느 때보다도 약화된 시기였다. 이러한 주변 여건들을 이용하여 다윗은 블레셋을 정복하고 이스라엘 영토 내에 남아있었던 모든 이방인 지역들을 합병시킴으로서 자신의 통치권을 가나안 전 지역으로 확대해 나갔다. 


   다윗의 후계자인 솔로몬은 엄격한 정치와 경제적 조직을 통하여 다윗이 남긴 업적을 더욱 견고히 계승시켰다.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있는 모리아산에 성전을 건축하였고, 왕국을 여러 지역단위로 나누어 지방장관들이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그는 나라의 방어를 위하여 전국의 중요한 지역마다 요새화된 도시들을 건설하였다. 그러한 정책들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는 무거운 세금과 과중한 강제노역을 백성들에게 부과시켰다. 외교문제에 있어서도 그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외국과의 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으며, 주변 여러 왕국들과 정치-경제적 계약을 많이 체결하였다. 그러나 주변국가들의 상황은 서서히 바뀌어 이스라엘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특히 이집트는 시삭이라는 강력한 왕을 중심으로 제국의 세력을 회복시키고 있는 단계였다. 시삭왕은 과중한 세금과 무거운 부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불만을 역이용하여, 여로보암의 반역을 도와줌으로서 이스라엘의 분열을 은밀히 조장하였다. 


2.  후기 철기시대(기원전 925-539년)


  솔로몬의 여러 가지 업적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관료적 통치와 과중한 세금으로 큰 부담을 갖고 있었다. 솔로몬이 죽게되자 통일왕국 이스라엘은 양분되어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남북 왕국으로 양분된 약 350여 년의 기간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세계 열강의 세력 균형에 따라 힘없이 밀려다녔던 시기였다. 남북 분열 직후 이집트의 시삭왕은 북왕조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북쪽과 동쪽의 많은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다. 유다왕 르호보암은 유다산지의 서쪽과 남쪽지역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함으로 갑자기 닥친 난세를 타개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십으로부터 라기스, 아제카 그리고 소라를 거쳐 아얄론에 이르는 외곽방어 진지들과 베들레헴으로부터 에담, 드고아, 벧술, 그리고 아둘람을 거쳐 소고에 이르는 도시들은 이스라엘의 내부 방어진지들이었다. 그러나 유다의 왕들은 북왕조 이스라엘과 맞대고 있는 북쪽 국경지역을 강화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남북 왕국의 분열이 일시적인 것으로 믿고 있었고, 언젠가는 다윗과 솔로몬시대의 경계선까지 그들의 통치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 같다.


   기원전 9세기 중엽 이집트가 다시 쇠퇴하기 시작하자 유다의 여호사밧과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은 동맹관계를 맺음으로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힘을 다소 회복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상황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모압왕 메사는 유다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오므리 왕가에 대항하는 예후의 강한 세력으로 인하여 내부적인 불안이 절정에 이르는 최대 혼란기를 경험하였다.


   기원전 8세기 중엽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와 유다의 웃시아 통치 때 두 나라는 다시 한번 정치-경제적으로 새로운 부흥기를 맞게 되었다. 여로보암 2세는 그의 통치영역을 바산까지 확장하였고, 후에는 다메섹까지 정복하여 왕국의 국경을 유프라테스강까지 확대시켰다. 그런가 하면  남왕국 유다의 웃시아는 요단 동편의 남부지역과 에일랏, 그리고 네게브 지역의 통치권을 확고히 하였다. 웃시아왕은  농업발전과 구리광산업에도 크게 노력을 기울였으며, 홍해를 통하여 외국과의 교역을 증대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여로보암  2세가 죽고 난 지 30여 년이 되는 기원전 722년에 북왕조 이스라엘은 신흥 앗수르제국에 의해 멸망당하게 되었다. 유다왕국 역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앗시리아제국은 사마리아를 정복하고 고위층 인물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리고 유다산지에 인접해 있는 아제카와 라기스 등의 요새들을 점령하였다. 후에는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기도 하였다. 당시 히스기아 왕은 지하수로를 만들어 기혼샘으로부터 예루살렘 성벽 안의 실로암까지 물을 끌어들여 예루살렘에 대한 앗수르의 포위 공격을 적절하게 대비하였다. 


   유다의 마지막 번영은 요시아 왕의 통치기간 동안에 있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신흥 바벨론제국이 앗수르제국을 대신하여 일어났던 때였다. 모세 오경이 성전에서 발견되었고 율법이 국가의 기본법전으로 제정되었다. 그와 더불어 유대인들에게는 영적 부흥이 일어났다. 요시아는 북왕조 이스라엘에 속하였었던 사마리아와 갈릴리지역까지 자국의 국경선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이집트 역시 짧은 기간이나마 새로운 부흥기를 맞게되었다. 이집트의 바로 느고는 바벨론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하여 원정군을 조직하여 출정시켰다. 바벨론을 지지했던 요시아는 므깃도 근처에서 느고의 군대를 맞아 싸우다 전사하였다. 요시아 이후 유다의 마지막 왕들은 열강 세력의 향배에 따라 이집트와 바벨론제국 사이를 오가는 형편이 되었고, 마침내 바벨론의 손에 의하여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다. 예루살렘을 파괴한 바벨론은 그들의 정복정책에 따라 유다백성들 중 상류계층의 지도자 부류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이때로 부터 페르샤제국의 고레스가 유대인들에게 귀환령을 내린 기원전 539 년까지의 역사를 바벨론 포로기'라고 부른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국시대는 위대한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시기였다. 이스라엘의 예언자시대는 기원전 9세기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동으로 시작되었으며, 위대한 정치가이자 설교가였던 이사야의 활동에서 그 전성기를 맞게되었다. 그리고 성전의 파멸을 예고했던 예레미야와 바벨론 포로 중에 활동하였던 에스겔과 포로기 이후의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예언자시대의 종말을 보았던 선지자들이다. 그들은 일반 백성들과 지도자들을 향하여 사회정의를 외쳤고 우상숭배를 철저히 배격하였다. 그리고 왕을 비롯하여 당대의 권력층과 부유층들을 향하여 닥쳐올 심판에 대하여 엄중한 경고를 전하였다. 반면에 일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면서 인간 정신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3. 페르시아 시대(기원전 539-333년)


   기원전 539년 바벨론을 정복하고 페르샤제국을 건국한 고레스왕이 취한 첫 번째 조치는 바벨론제국에 끌려와 있었던 모든 포로들에게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이 귀환령에 따라 유대인들 역시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첫 번째 귀환자의 숫자는 약 4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포로기 동안 유다지역은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남아있던 유대인들의 숫자가 줄었을 뿐 아니라 유대인 이외의 타민족들의 유입과 영향이 크게 늘어났다. 본토에서 쫓겨난 에돔족속이 헤브론산지와 유다산지의 경사지에 정착하였다. 앗수르제국의 정복 이후 북왕조 이스라엘 땅에 남아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앗수르가 이주하여 정착시킨 타민족 사이에 태어난 사마리아인들은 북부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블레셋과 뵈니게인들은 해안지역에서 나름대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땅은 오래 동안 방치되어 황폐되었고, 이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던 원주민들은 귀환해 오는 유대인들에게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예루살렘은 기원전 5세기 중반인 다리우스 1세 때까지만 하여도 외형적으로 아직 도시다운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수룹바벨, 여호수아, 학개, 스가랴 같은 카리스마적인 인물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힘입어 예루살렘과 예루살렘의 성전이 재건되었다. 제2차 유대인 귀환을 주도하였던 에스라와 느헤미아의 노력으로 예루살렘 성벽도 재건되었다.


   페르시아 시대의 이스라엘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어느 시대보다 매우 부족한 편이다. 특별히 에스라와 느헤미아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더욱 알 수가 없다. 단지 고고학적인 증거에 의하여 이 지역에 인구의 감소가 있었고 경제와 문화적 측면에서 크게 쇠퇴기를 맞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상황은 다소 개선되었다. 인구도 증가되었고, 농업과 수공업, 그리고 해안 도시들의 무역이 헬라의 영향하에서 크게 증진되었다. 네게브 지역에는 나비티안 족속들이 정착하면서 네게브에 여러 도시들이 세워졌고, 물을 저장하는 기술도 크게 개발되었다. 저장된 물을 사용하여 생산한 농산물들은 네게브 지역을 지나가는 대상들에게 비싼 값으로 판매되었다.


   기원전 333년 잇수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알렉산더대왕은 빠른 속도로 페르샤제국을 점령하였다. 이것은 근동지역에 그리스 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심어주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가 점령한 지역들이 네 명의 후계자들(Diadochoi)인 부하 장군들에 의하여 분할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프톨레미(Ptolemy)는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차지하였고, 셀룩커스(Seleucus)는 시리아를 포함한 옛 바벨론의 거대한 지역을 차지하였다. 리시마쿠스(Lysimachus)는 비두니아와 트리기아 지방을, 그리고 카산더(Cassander)는 마게도니아를 각각 차지하였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제1성전시대 후반기 때와 마찬가지로 외부세력들에 의해 그들의 운명이 좌우되는 역사를 다시 경험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거의 250여 년간 이집트의 프톨레미왕조와 메소포타미아의 셀룩커스왕조 사이에 있었던 정치적 갈등에 크게 영향을 받는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 후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시모니안왕조를 세워 헬라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100여 년간 지속하였다. 당시의 프톨레미왕조와 셀룩커스왕조는 계속되는 두 나라사이의 전쟁과 내부의 갈등으로 인하여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결국 헬라의 두 제국은 얼마 가지 못하여 서쪽으로부터 새롭게 부상하는 로마에게 이 지역에서의 통치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이러한 세력의 열세로 인한 힘의 공백기 동안 유대인들은 제한된 기간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독립된 왕조를 세울 수가 있었다. 


1. 프톨레미왕조와 셀룩커스왕조의 갈등시대


   두 왕조 사이의 국경지역을 이루고 있는 팔레스타인지역은 자연히 국경분쟁의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다. 프톨레미 1세(기원전 323-285년)는 이곳이 자기들의 법적인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셀룩커스 1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지역을 차지하였다. 초기에는 두 나라가 영토문제로 인한 서로간의 무력충돌을 최대한으로 억제하였다.
   그러나 셀룩커스왕조의 통치자들이 대륙사이를 연결하는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이 증대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두 나라는 팔레스타인을 놓고 모두 네 차례의 전쟁을 벌렸다. 첫 두 전쟁은 프톨레미 2세(기원전 285-246년)가 안티오커스 1세(기원전 280-261년)와 안티오커스 2세(기원전 261-246년)와 벌렸던 전쟁이었다. 이 두 차례의 전쟁에서의 승리는 프톨레미왕조에게 돌아가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프톨레미왕조의 통치권을 강화시켜 주었다. 세 번째의 전쟁은 프톨레미 3세(기원전 246-221년)와 셀룩커스 2세(기원전 246-226년) 사이에 있었고, 네 번째 전쟁은 프톨레미 4세(기원전 221-203년) 때에 일어났다. 이 두 전쟁 역시 프톨레미 왕조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프톨레미 5세(기원전 203-181년)가 미성년자로서 왕위에 오르게 되자 상황은 바꿨다. 이미 20여 년간 셀룩커스왕조를 통치하고 있었던 안티오커스 3세(기원전 223-187년)에게 그는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안티오커스 3세는 기원전 198년 바니아스(신약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프톨레미 군대와 격렬한 전쟁을 벌려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안티오커스 3세의 셀룩커스왕조는 이스라엘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하여 기원전 64년 폼페이가 이끄는 로마군의 침공이 있을 때까지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프톨레미의 통치기간 동안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비교적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비록 생활은 가난하였지만, 정치적으로 대우를 받았으며 대제사장들은 행정과 사법에 관하여 많은 것을 위임받았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히브리어를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칠십인역'(LXX; Septuagint)이라고 알려진 헬라어 성경으로 번역하였다. 


2. 셀룩커스왕조의 통치시대


   프톨레미왕조로부터 팔레스타인 통치권을 넘겨받은 안티오커스 3세는 오론테스 강변에 우치한 안디옥에서 팔레스타인을 직접 통치하였다. 프톨레미와의 국경문제가 정착되자 그는 정치적 관심을 헬라 쪽으로 돌렸다. 기원전 196년 안티오커스 3세는 그리스를 침략했지만, 오히려 로마로부터 공격을 받아 기원전 190년 로마에게 패배를 당하였다. 그리고 로마의 요청에 따라 소아시아의 모든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포기한다는 조약에 서명하였다.


   셀룩커스 4세(기원전 187-175년)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안티오커스 4세(기원전 175-163년)는 유대 역사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안티오커스 4세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는 제국 내의 다양한 민족들이 헬라문화를 통하여 하나의 문화권으로 통일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왕권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을 제우스신의 현현이라 하여 자신을 경배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래서 그는 '신의 현현'이라는 의미를 가진 '에피파네스'(Epiphanes)라는 별칭을 자기 이름에 덧붙이기도 하였다. 


   그는 팔레스타인에 살고있는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헬레니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었다. 안티오커스 4세는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 3세(Onias III)를 대제사장에서 물러나게 하고, 그 대신 예루살렘에서 헬레화 운동을 강력히 추진하겠다고 나선 그의 형제 야손(Jason)을 대제사장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야손은 베냐민지파 출신의 메넬라우스(Menelaus)에게 자신의 대제사장직을 빼앗기게 되고, 메넬라우스는 안티오커스에게 뇌물을 바침으로서 자신의 대제사장직을 공식화시켰다. 기원전 169년 안티오커스 4세가 이집트를 침공하고 있는 동안, 야손은 다시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메넬라우스를 축출하려 하였다. 이런 계획을 사전에 알게된 안티오커스 4세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위기에 처한 메넬라우스를 구출하였고, 이 때 그는 성전에서 보물을 강탈하는 일을 감행하였다.  


   기원전 168년에 다시 이집트로 돌아온 안티오커스 4세는 알렉산드리아 근교에서 로마와 교전하였지만, 참패를 당하고 결국은 본국으로 퇴각하는 처지가 되었다. 굴욕적인 참패를 경험한 안티오커스는 본국으로 귀국하는 길에 예루살렘을 거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이집트에서 겪은 참패의 비통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을 무참히 학살하였으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돼지고기를 제우스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명령을 내려 예루살렘 성전에서 계속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공포하였다. 이것이 마카비혁명운동이 일어나게 된 당시의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3. 마카비 혁명운동


   안티오커스 4세는 팔레스타인의 모든 지역에 제우스를 위한 제단을 세우고 제물을 바칠 것을 명령했다. 이때 모디인(Modiin)의 제사장이었던 마타티아스(Mattathias)는 이 명령을 거절했다. 마타타아스는 그의 다섯 아들들과 더불어 안티오커스 4세에게 항거하는 '마카비 혁명운동'이라 알려진 무력투쟁을 시작했다. 그들은 헬레니즘에 반대하며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는 경건한 유대인들과 힘을 합쳤다. 마타티아스는 혁명을 일으킨 직후 죽게 되었고 그의 아들 유다(Judah)가 그의 뒤를 이어 혁명의 주동자가 되었다. 초기의 혁명운동의 진두 지휘를 맡았던 유다는 그의 놀라운 게릴라 전법 때문에 '마카비'(의미는 '망치')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유다는 기원전 164년 예루살렘을 점령하였고,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케 하였다.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이 사건을 '하누카'(수전절; 요 10:22 참조)라는 명절로 기념하고 있다. 초기 단계에서는 단지 종교적인 핍박들을 종식시키려는 반란운동이었지만, 전쟁이 확대되면서 그러한 한계를 넘어 정치적인 독립을 쟁취하려는 혁명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유다 마카비의 예루살렘 점령은 전쟁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그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지만 셀룩커스왕조의 군대는 '아크라'라는 예루살렘 내의 한 요새에 여전히 주둔하면서 대치상태를 유지하였다. 기원전 160년 유다 마카비가 엘리아사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자 그의 형제 요나단(Jonathan)이 혁명의 주도권을 쥐었다. 요나단은 혁명운동을 재정비하여 셀룩커스 군대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이스라엘의 북동지역과 트랜스요르단 지역들을 점령하였다. 기원전 153년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였고, 그것은 앞으로 있게될 새로운 왕조(하스모니안왕조) 창설의 기초를 놓는 일이었다. 그러나 후에 그는 셀룩커스왕조의 정치적인 음모에 의하여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요나단의 뒤를 이어 혁명의 지도자가 된 시몬(Simon)은 오랜 투쟁 끝에 기원전 141년 셀룩커스왕조로부터 완전히 정치적인 독립을 성취하였다. 그는 게셀과 욥바를 점령하여 유대인들이 바다를 통하여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4. 하시모니안(Hasmonean) 통치


   마카비 혁명군들과 25년 가까이 전쟁을 치르고 난 셀룩커스왕조는 결국 유다의 독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데메트리우스 2세(기원전 150-145년)는 팔레스타인에게 세금 및 곡물징수를 면제하여 주었다. 시몬 마카비는 권력의 계승권을 갖고 있는 왕이면서 대제사장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여 결국 정치와 종교의 두 권력을 한사람이 쥐게되었다. 시몬 때부터 기원전 63년 로마의 팔레스타인 점령 때까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직을 계승하여온 왕가를 가리켜 '하스모니안'이라고 부른다. 이 명칭은 마카비가문의 시조격인 '아스모내우스'(Asmonaeus; 히브리어로는 Hashmon)이란 이름에서 연유되었다. 시몬의 통치하에서 이스라엘은 얼마동안 번영과 평화를 누렸다. 


   하시모니안왕조의 전성기는 시몬의 아들인 요한 히루카누스 1세(John Hyrcanus I; 기원전 135-104년) 때였다. 그는 하시모니안왕국을 강력한 나라로 확장시켜 나갔다. 그가 확장시켜 왕국의 영토에 병합시킨 지역은 유다의 남쪽지역인 에돔과 네게브의 북부, 욥바와  아스돗 사이의 해안평지, 사마리아의 인근지역, 벧산계곡 및 남부 샤론지역 등이다. 이렇게 합병된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유대교로의 개종이 강요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 종파간의 논쟁이 일어나 유대교는 심각한 내분을 겪게 되었다. 이것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주도권을 서로 차지하기 위하여 다투게 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두 종파는 구성배경 및 율법관에서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바리새파는 마카비 반란 직후 결성된 독자적 집단으로서 경건한 하시딤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은 헬레니즘의 확대를 거부하면서 동조세력들과 연합하였다. 바리새파가 주장하는 율법은 두 가지 곧 기록된 율법인 '토라'와 토라에 대한 보충적 성격을 가진 구전법이다. 그들은 예언자들의 가르침도 구전법과 같은 성격으로 취급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두개파는 다윗시대의 대제사장 사독(왕상1:8, 2:35)의 후손이라는 점에 자신들의 권위를 두고 있었다. 이들은 오직 기록된 율법인 토라만을 인정하였다. 제사장들과 부유한 귀족들로 구성된 사두개파는 유대교의 최고의회인 산헤드린의 운영을 지배했다. 그들의 관심은 주로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통치에 있었다. 반면에 바리새파는 대체적으로 평신도계층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며 회당 중심으로 율법을 가르치며 활동했다. 


   히르카누스의 아들로서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유다 아리스토불러스 1세(Judah Aristobulus I; 기원전 104-103년)는 갈릴리를 정복함으로서 하시모니안의 통치영역을 북쪽으로 더욱 확장시켰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미망인인 살로메 알렉산드라(Salome Alexandra)는 아리스토불러스의 동생이며 호전적 인물이었던 알렉산더 야네우스(Alexander Jannaeus; 기원전 103-76년)와 결혼하였다. 야네우스는 오늘날의 이스라엘의 영토와 거의 비슷한 크기로 하시모니안 왕국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그의 통치기간 중 유대사회는 안정되지 못하였고,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그의 통치기간 중에 유다지방을 떠나갔다. 그가 취하였던 조치 중 후대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헤롯의 아버지인 안티파터(Antipater)를 이두메의 지방장관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살로메 알렉산드라(기원전 76-67년)는 알렉산더 야네우스에 의해 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그녀는 큰아들 하르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고, 백성들 대다수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던 바리새파를 가까이 하였다. 알렉산드라가 죽게되자 히르카누스 2세(기원전 63-40년)는 자연스럽게 대제사장직 뿐 아니라 왕권까지 얻게 되었다. 약체의 히르카누스 2세는 그의 동생 아리스토불러스 2세(기원전 67-63년)에게 도전을 받았다. 그는 재빠르게 권력을 장악하였고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 내의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로마의 폼페이는 유대 쪽으로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로 경쟁자적 관계에 있었던 아리스토불러스 2세와 히르카누스 2세는 각각 로마의 폼페이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폼페이가 기원전 63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을 때 히르카누스의 지지자들은 그에게 성문을 열어 주었다. 폼페이가 히르카누스 편에 있다는 것을 알게된 아리스토불러스는 피신을 하였지만 후에 살해되었다. 히르카누스는 대제사장직으로 복권되었고, 분봉왕(ethnarch)라는 호칭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가 통치했던 영역은 전체 이스라엘 중에서 일부분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대부분 지역은 로마제국의 시리아 총독 지배하에 있었다. 이것이 팔레스타인지역에서 로마 통치가 시작되었던 초기 상황이었다.


   로마의 폼페이는 기원전 64년 수리아의 셀룩커스왕조를 정복하고 팔레스타인을 로마의 영토에 합병시켰다. 그 이듬해 폼페이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하시모니안 왕가의 복잡한 왕위다툼에 개입하여 하시모니안 왕가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고, 결국은 이스라엘을 로마의 종속국으로 삼았다. 이렇게 시작된 로마의 팔레스타인 통치는 그후 약 350년간 계속되었다. 


1. 전기 로마시대(기원전 63-기원 70년)


   히르카누스 2세가 대제사장이며 유다의 분봉왕이었지만 이두메를 통치하였던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터는 그의 왕권 뒤에서 실권을 쥐고 있었던 실력자였다. 로마가 폼페이와 율리우스 시져의 군력투쟁으로 인하여 내전에 휘말렸을 때, 안티파터는 시져 편에 있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로마시민권을 보상으로 받았고, 유대의 행정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직위는 실제적으로 히르카누스보다 더 큰 것이었다. 안티파터는 자기의 권력을 이용하여 그의 큰아들 파사엘을 예루살렘 통치자로 임명하고, 작은아들인 헤롯을 갈릴리의 통치자로 임명하였다. 기원전 43년 안티파터가 암살되자 로마는 헤롯과 파사엘을 로마가 임명하는 유대의 공동 지배자로 삼았다.


   기원전 40년 카스피바다 남쪽에 있던 파르티안 민족이 팔레스타인을 공격하였다. 파르티안 군대는 대제사장직을 원하고 있었던 안티고누스 마타티아스(Antigonus Mattathias)와 연합했다. 그의 도움으로 침입자들은 히르카누스와 파사엘을 생포하였지만, 헤롯은 마사다로 피신하였고 후에는 페트라를 거쳐 로마로 도망갔다. 히르카누스는 왕위에서 물러났고, 수족을 절단하여 대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대신 안티고누스(기원전 40-37년)를 유다의 통치자로 삼았다.


   헤롯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그는 영웅으로 존경받았다. 후에 로마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아는 로마 원로원을 설득하여 헤롯을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안티오고너스가 왕으로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헤롯의 왕권은 의미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롯은 로마로부터 얻은 왕위를 가지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로마군대의 도움으로 기원전 38년 갈릴리로부터 전쟁을 전개하였다. 그후 2년만에 헤롯은 로마가 지명해 준 모든 영토를 점령하였다. 기원전 37년 예루살렘은 헤롯 군대의 수중에 들어갔고, 안티고누스는 처형되었다. 이두메 출신인 헤롯은 명실공히 유대의 실제적 왕이 되었다. 권력을 확보한 후 헤롯은 자신을 반대하였던 자들을 처형하였고, 그를 지지하였던 자들에게는 크게 보상을 내렸다. 헤롯은 45명의 안티고누스의 지지자들을 처형하면서 그들의 사유재산을 몰수했다.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였지만, 유대인들은 그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싫어하였던 것은 헤롯이 이두메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헤롯의 조상은 요한 히르카누스 시대 때 강제적으로 유대교로 개종하였다. 그것 때문에 헤롯은 비록 하시모니안의 공주 마리암과 결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통 유대인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헤롯은 이스라엘내에 아직까지도 현존하는 많은 건물들을 지었던 위대한 건축가였다.  자신의 통치를 확고히 하기 '헤로디움' '마사다' '마카이러스' 등과 같은 견고한 요새들을 건설하였다. 그는 지중해 연안에 가이사랴 항구를 건설하였고, 옛 사마리아 언덕에 '세바스티아'라는 로마식 도시를 세웠다. 여리고에는 거대한 수영장을 갖춘 완벽한 겨울 별장을 만들었으며, 예루살렘에는 궁전, 극장, 성벽 위의 탑들, 안토니아 요새 등과 같은 건물들을 신축하였다. 


   오랜 세월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복원한 것은 그가 남긴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헤롯은 성전뜰을 확장시키면서 그 중앙에 예루살렘성전을 재건하였다. 헤롯이 성전 재건하는 일에 비용을 아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이 일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발로가 아니라 그의 허영심에 의한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헤롯은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국내 문제로 많은 괴로움을 당했다. 그에게는 많은 아내들로 인해 여러 명의 상속자가 있었는데, 그들 모두는 헤롯의 왕국 일부를 맡기를 원했었다. 기원전 4년 헤롯이 죽자 로마의 옥타비아누스는 헤롯왕국을 헤롯의 세 아들 곧 아겔라오(Archelaus), 안티파스(Antipas), 빌립(Piliph)에게 분배하였다. 유다와 사마리아의 통치자가 된 아켈라오(기원전 4-기원 6년)는 그의 통치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벌린 소요사건으로 기원 6년 로마에 의해 통치권을 박탈당하였다. 그 이후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은 로마의 총독이 다스리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예수를 재판하였던 본디오 빌라도는 기원 26년에서 31년까지 이 지역을 통치하였던 로마의 다섯 번째 총독이었다.


   헤롯 안티파스는 기원 39년까지 갈릴리와 뵈뢰아지방을 통치하였다. 그는 갈릴리바다의 서쪽 해안에 티베리아라는 도시를 건설하여 자신의 수도로 삼았다. 그는 정치적으로 로마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유대인들과는 종교적인 갈등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기원 39년 로마황제에 대한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는 혐의로 통치권을 박탈당한 채 골지방으로 추방되었다. 예수의 활동시기와 같은 기간에 통치하였던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와의 결혼문제와 관련하여 세례요한을 처형하였던 인물이다. 예수는 그를 '여우'라고 혹평한 적이 있다.(눅 13:32)


   갈릴리의 북부지역과 북부 트랜스요르단 지역은 헤롯 빌립에게 분배되었다. 그는'바니아스'를 재건하여 자신의 수도로 삼으면서 이 도시를 '가이사랴 빌립보'로 개명하였다. 그는 또한 갈릴리 바닷가의 벳세다를 중건하여 아우구스터스의 딸 이름을 빌어 '   '로 개명하였다. 그는 성격이 원만하고 공정하게 재판을 시행한 왕으로 유명하였다. 그가 통치하는 지역의 대부분 주민은 헬라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었다. 기원 34년 빌립이 왕권의 상속자 없이 죽게 되자 그의 영토는 시리아에 예속되었다. 몇 년이 지난 기원 37년 헤롯의 손자였던 헤롯 아그립바 1세(Herod Agrippa I)는 로마황제 가이우스에 의해 빌립이 통치하였던 영토를 다스리는 왕으로 임명되었다. 기원 41년 그는 다시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까지 통치하는 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의 조부인 헤롯대왕이 다스렸던 전 지역을 위임 맡게 된 셈이었다. 그는 제3의 성벽으로 알려진 예루살렘의 북쪽 성벽을 증축하였다. 사도 야고보가 죽임을 당한 것과 베드로가 투옥된 것은 모두 그의 통치하에 일어난 일이었다.(행 12:1-19) 기원 44년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있은 이후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총독이 통치하는 식민지가 되었다.


   기원 6년 아겔라오가 추방되고 유다와 사마리아가 로마의 식민지로 바뀐 이후, 이 지역의 로마 통치자들은 자기들의 공직을 이용하여 맘껏 부를 축척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 사람들의 생활은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렀다.  아그립바 1세가 통치하였던 기간은 일말의 희망이 보였던 시기였다. 영적 분위기는 매우 고조되었고, 유대교의 영향력은 근동의 다른 지역에까지 퍼져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럽게 죽음으로 인하여 모든 소망이 없어졌다. 그런 상황 속에서 로마 통치자들과 이방인 거주자들과 심각한 갈등관계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결국 로마에 대항하는 유대인전쟁(기원 63-73년)을 일으켰다.


   비록 내부의 갈등으로 인하여 세력이 약화되긴 했어도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인 로마는 힘을 결집하여 유대반란군과 싸웠다. 초기의 로마 지휘관이었던 베스파시안 장군이 전쟁 중에 로마의 황제로 즉위하자, 그의 아들인 티토가 뒤를 이어 전쟁을 수행하였다. 기원 70년 그는 오랜 포위 공격 끝에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의 성전을 불태웠다. 성전 내에서 완강히 버텼던 유대방어자들은 완전히 패배되었지만, 사해 근처의 마사다 요새로 빠져나간 1000여명의 열심당원들(Zealots)과 그의 가족들은 그후 2년 이상이나 로마군과 대항하며 버티었다. 


   기원전 200년에서 기원 200년 사이 팔레스타인 지역은 전쟁과 핍박과 가난의 고통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 지역의 거주자들은 오히려 영적인 일에 깊이 몰두하였다. 그들은 율법과 전통들을 연구할 뿐 아니라 그것을 지킴으로써 위로를 찾았다. 이때에 최초의 수도원형태의 신앙 공동체들이 등장하였다. 1950년 이후 약 20여 년에 걸쳐 유대광야를 중심으로 발견된 문서들은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은둔생활을 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사해문서들이 발견된 쿰란동굴 이외에도 엔게디 근처의 헤벨동굴과 마사다요새 등에서 많은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당시의 이러한 상황들은 신약성경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고 있다. 


2. 후기 로마시대(기원 70-324년)


   기원 70년 많은 희생자들을 남기면서 끝난 로마와의 전쟁 결과로 수많은 유대인들이 노예로 끌려갔다. 로마는 군대를 예루살렘 근처 지역에 주둔시켰으며 유대인 거주자의 숫자는 극도로 줄어들었다. 전쟁의 결과로 인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은 유대교 내에서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희생제사는 더 이상 드릴 수가 없었고 제사장 중심의 귀족정치는 그 주도권을 율법주의자들에게 넘겨주어야만 하였다. 유대인의 중심지는 예루살렘에서 해안지방에 위치한 야브네(Jabneh)로 옮겨졌다. 야브네은 로마와의 전쟁 중 예루살렘의 랍비였던 요하난 벤 쟈카이(Yohanan ben Zakkai)가 베스파시안 황제의 동의를 얻어 율법학교를 세운 곳이었다. 초기의 야브네 율법학교는 소수의 유대 랍비들만이 참여하는 제한성을 가지고있었다. 그러나 기원 96년 가말리엘이 주도권을 쥔 이후 야브네의 학문적 권위는 로마 당국 뿐 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 의하여 인정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이곳에서 내려지는 율법해석은 전체 유대인들에게 그대로 적용이 되었다. 야브네에서 이루어진 업적들 중에 중요한 것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정경화와 기도문을 비롯한 유대인 의식서의 확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여전히 유대인들에게 영적인 중심지로 남아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예루살렘이 오히려 민족주의적 경향을 띈 유대인들에게 열망의 대상으로 부각하자, 로마는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런 계획이 알려지면서 팔레스타인에는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러한 상황 전개는 기원 115년에 시작하여 삼 년간 계속되었던 디아스포라의 유대인 반란운동으로 연결되었다. 당시 로마의 황제 트라얀(Trajan)은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하여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반란을 제압한 후,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을 억압하는 강경 노선을 선택하였다.


트라얀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하드리안(Hadrian)은 초기에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약속하는 유화적인 자세를 보였지만, 얼마 후에는 정책을 바꾸어 예루살렘에 로마식 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한 정책의 변화로 말미암아 로마 통치에 대항하는 두번째의 무력혁명(기원 132-135년)이 바르 코흐바(Bar Kochba)의 주도아래 일어났다. 초기 2년간 유대인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전쟁의 영역으로 갈릴리지역까지 확대하기도 하였지만, 반격에 나선 로마군들에 의하여 항쟁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축출되어 유대산지로 후퇴하였다. 항쟁자들의 마지막 요새였던 예루살렘 남서쪽의 베타르가 함락된 후, 로마군대는 유대인들에게 잔인한 방법으로 보복을 가하였다. 일부 생존한 항쟁자들은 사해 근처의 동굴 속에 숨어지면서 마지막 최후를 마쳤다. 


   제2차 유대인 반란운동의 결과는 매우 혹독하였다. 로마군은 수많은 유대인들을 투옥시키거나 노예로 삼았다. 그리고 모든 유대인은 예루살렘과 유다지방으로부터 추방당하였다. 이렇게 됨으로 유대인의 중심지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쪽의 갈릴리로 옮겨지게 되었다. 완전히 파괴되었던 예루살렘은 하드리안 황제에 의하여 '아엘리아 카피톨리나' (Aelia Capitolina)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재건되었다. 유대인의 예루살렘 출입은 성전 파괴일(아브월 제9일)을 제외한 다른 날에는 전면 금지되었다. 이를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해지는 법도 도입되었다.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해안평야 지역에서는 유대인 인구가 거의 없었지만, 갈릴리지역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피난민들의 유입으로 유대인 인구는 크게 증대되었다. 산헤드린 공의회가 야브네에서 하부 갈릴리로 옮겨지면서 유대인의 중심지도 그에 따라 바뀌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초기에 벧세아림으로 옮겨졌다가, 후에는 치포리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티베리아로 옮겨갔다. 


   유대인에 대한 억압은 셉테미우스 세베루스(기원 193-211sus)와 그의 후계 황제들이 통치하는 동안 많이 가벼워졌다. 당시의 대표적인 랍비였던 유다 하나쉬(Judah the Patriarch)는 티베리아에서 산헤드린 공의회의 의장이 되었고, 세금수납과 같은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도록 허락받았다. 랍비 유다의 지도하에 이루어진 업적 중 중요한 것은 토라에 대한 방대한 구전법들을 모아 편집한 미쉬나(Mishnah)의 완성이다. 이 지역에서의 농업은 다시 번창하였으며, 거대한 건물들이 이곳 유대인 지역에 세워졌다. 특히 갈릴리 지방의 메론, 비람, 가버나움 등과 같은 도시에는 아름답게 장식된 큰 회당들이 건축되었다. 수 천 개의 아름답게 조각한 석관들이 자리하고 있는 벧세아림 지하동굴 무덤은 당시 유대 공동체의 경제적 상황이 어떠하였는가를 잘 보여준다. 또한 그들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도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가를 증명해 주고 있다.


   기원 313년 서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콘스탄틴 대제는 당시 동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리시니우스와 함께 로마제국 내의 모든 종교에 동등한 자격을 허락하는 밀라노칙령을 발표하였다. 그후 콘스탄틴은 동로마제국의 황제 자리까지도 차지하게 되었으며, 기원 325년에는 비쟌틴 근처에 있는 니케아에서 제1차 교회공의회를 주재하였다. 그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았으며 기독교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그로 인하여 성지 이스라엘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고, 그의 모친 헬레나는 이스라엘의 성지를 직접 방문하여 그리스도와 관련된 유적지들을 성역화하였다.  예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과 그의 죽음, 부활, 승천이 있었던 예루살렘에 거대한 기념교회들이 지어졌다. 이때부터 기독교 순례자들이 성지로 몰려들었고, 그에 따라 여러 분야의 발전이 이스라엘의 전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수많은 교회들이 각지에 세워졌고, 유다광야에 세워진 많은 수도원들은 사막을 하나의 거대한 도시로 만들었다. 예루살렘은 다시 성장하여 헤롯대왕이 통치하던 시대와 거의 맞먹는 크기의 도시로 발전되었다.   


   콘스탄틴은 수도를 로마에서 비쟌틴으로 옮기고, 기원 330년 이 도시의 이름을 콘스탄틴노플로 바꾸었다. 그가 죽고 난 후인 기원 379년 로마제국은 다시 양분되면서 콘스탄틴노플은 기원 7세기 아랍의 침공이 있기까지 약 300년간 비쟌틴제국(동로마제국)의 수도로 남게 되었다. 로마가 다시 동서로 나뉘고 난 후 팔레스타인은 비쟌틴제국에 예속되었다. 이 시대에 팔레스타인은 경제적으로 번창하였고 인구는 급속히 증가하였다. 유대인들은 핍박 속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아니면 타국으로 이주함으로 그 숫자가 크게 감소되었다 그러면서 기독교는 점차 이 지역 거주자들의 중심적 종교가 되었다.


   무역, 학문 그리고 예술 등이 이 시기에 번성하였다. 비쟌틴 예술은 벧세안과 타브카에 세워진 교회들과 수도원 내의 아름다운 모자이크 장식들, 그리고 벧알파와 티베리아 지역에 위치한 유대인 회당 바닥의 모자이크 장식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인구밀도의 증가는 사막지역까지도 거주지역으로 확장해야 할 필요성을 가져왔다. 네게브산지와 브엘세바 근처에 살고 있었던 나바티안 계통의 기독교인들은 아브닷, 맘쉬트, 쉬브타, 니잔나, 하루자 등과 같은 당시의 번성하는 도시들을 건설하였다. 그곳에서의 도시계획과 시민행정은 주로 물을 저장하는데 최대의 목표를 두고 있었다. 그곳의 모든 거주민들은 각자 자기 집 근처에 큰 바위를 이용하여 저수조를 마련하여야만 했다. 이 저수조는 철처히 방수시설이 되어 있었고, 지붕에서부터 빗물을 끌어들이는 수도관도 마련되어 있었다. 당시의 교회들, 가정집들, 일터 그리고 거리들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쉬브타에는 간선도로에 노상 도수관들을 마련하여 도시 중앙에 있는 거대한 공동 저수조에 빗물을 모으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수도관은 지역 주민들이 번갈아 가며 청소를 하여 언제나 청결하게 보관되었다. 저장된 물은 가정에서 필요로 하는 용도와 더불어 공중목욕탕과 농사를 위해서 사용되었다. 물 사용의 대가로 도로 이용자들에게 부과되는 높은 통행세는 이 도시의 주요한 수입원이 되기도 하였다. 


   기원 5세기 후반부터 다양한 기독교 종파들간에는 주도권 투쟁이 벌어졌고, 페르시아의 세력은 비쟌틴제국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팔레스타인에서 비쟌틴이 마지막으로 영화를 누렸던 시기는 저스티안 황제(기원 527-565년) 때이다. 그 시대는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던 시기로서, 수로 시설들이 마련되었으며 화려한 교회당들도 많이 건축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 페르시아의 신흥 세력은 비쟌틴제국에 위협적인 요소가 되었다. 기원 614년 페르시아인들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기원 629년까지 이 지역을 지배하였다. 기원 629년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페르시아인들을 이 지역으로부터 몰아내는 일에 성공하였지만, 곧 이어 아랍 모슬렘들의 공격에 시달림을 받게 되었다. 기원 630년 비쟌틴 군대는 야르묵강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티베리아와 갈릴리 지방을 모두 모슬렘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로부터 8년 뒤인 기원 638년 모슬렘세력들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기원 640년 모슬렘은 해안지역의 가이사랴를 점령함으로서 팔레스타인 정복을 완수하게 되었다.


   모하마드(Mohammad)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옮겨갔던 기원 622년은 이슬람의 원년이다. 모슬렘과 비쟌틴 군대가 처음으로 격전을 벌린 것은 기원 629년 남부 트랜스요르단의 마우타에서다. 이 전쟁에서 모슬렘은 일차적으로 패배를 당하였지만, 그후 기원 636년 야르묵강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후 약 4년간 계속된 전쟁을 통하여 모슬렘들은 이집트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전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7세기 말경에는 근동지방을 비롯한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지역까지 모슬렘 통치가 확대되었다.


   모하마드가 죽은 후 모슬렘지역의 통치는 모하마드의 직계 후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들을 '칼립'(caliph)이라고 명명되었는, 초기의 칼립들은 메디나를 중심지로 이슬람 통치를 전개하였다.(기원 632-661) 이 초기 칼립 통치기간동안 모슬렘은 근동지역에서 급속도로 그들의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다. 636년 8월 20일 모슬렘들은 야르묵강 전쟁에서 비잔틴군대를 패배시킴으로 이 지역에서의 비잔틴 통치를 마감하게 만들었다. 2년 후 모하마드의 후계자인 제2대 칼립 오마르(Omar)는 예루살렘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은 모슬렘들에게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 세 번째로 중요한 성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예루살렘은 모슬렘 성지순례자들이 모여드는 또 하나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모하메드 이후 네 번째 칼립이었던 알리 통치시기에 이르러 모슬렘 통치는 강력한 가문이었던 우마야의 도전에 부닥치게 되었다. 얼마동안의 내전을 거치면서 우마야 가문이 승리를 거두게 되면서 이 가문은 '우마야드 왕조'(Ummayad dynasty; 기원 661-750)를 시작하였다. 우마야드 왕조는 다메섹을 중심지로 삼았으며, 많은 비잔틴문화를 채택하였다. 비잔틴의 영향은 특히 우마야드 왕조의 건축에서 발견된다. 칼립 아붓 알 말리크에 의하여 건축된 예루살렘의 '바윗돌 사원'(Dome of the Rock)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히고 있다.


바윗돌 사원은 그 건축이 688년에 시작하여 691년에 완성되었음으로 우마야드 왕조 때임이 분명한데도 이 사원을 일명 '오마르의 사원'이라고 통칭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전통에 근거를 둔 것이다. 우마야드 왕조는 나라의 경제를 유지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아랍은 경제적 측면에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을 박해하지 않았다. 유대인 공동체들은 그 당시에 요단강 서편과 모압, 에돔, 미디안 그리고 에일랏 주변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티베리아는 당시 가장 큰 유대의 영적 중심지가 되었다. 그곳에서 예루살렘 탈무드가 완성되었고, 히브리어의 모음체계가 개발되었으며, 종교적 문헌들과 시들도 많이 씌어졌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비 모슬렘의 토지 소유자들에게는 보다 높은 세금이 부과되었다. 그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농사를 포기하고 베짜기, 염색, 금은 세공 등에 종사하게 되었다. 일부는 상업과 무역으로 생업을 바꾸기도 하였다. 


   칼립 하샴이 죽고 난 이후 우마야드 왕조는 급속히 약화되었고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 나라가 분열되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옛 바빌론과 페르샤 지역에서는 자신의 선조가 선지자 모하마드의 삼촌이었다고 주장하는 모하마드 알 아바스가 세력을 규합하였다. 근동의 동부지역에서 시작된 그의 세력은 급기야 서쪽의 우마야드 왕조를 공격하여 그들을 패배시키고 아랍세계의 새로운 통치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우마야드 왕조를 대신한 '아바시드 왕조'(Abbasid dynasty; 기원 750-969)는 바그다드를 그들의 중심지로 정하였다. 아바시드 왕조 시대는 모슬렘 역사상 가장 크게 문화가 발전한 시대이다. 유명한  '천일야화'도 아바시도 왕조의 칼립 하룬 알 라쉬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왕조는 팔레스타인과 너무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큰 간섭 없이 통치하였다. 


   10세기에 이르러 자신들이 모하마드의 딸이었던 파티마(Fatima)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모슬렘들이 일어나 이집트의 카이로를 중심으로 '파티미드 왕조'(Fatimid dynasty)를 세웠다. 당시 아바시드 왕조는 바드다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집트까지 자신들의 통치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였다. 파티미드 왕조는 곧 이스라엘과 시리아 지역을 자신의 통치영역으로 확장하였다. 파티미드 왕조가 이스라엘 지역을 점령한 후 이 지역의 상황은 많이 악화되었다. 당시의 아랍 통치자들 사이에서는 계속적인 권력투쟁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그러한 공백기를 틈타 사막 유목민들은 이 지역을 침공하는 횟수가 점차 증가하였다. 결국 1058년 소아시아에서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였던 셀죽 터키인들(Seljuk Turks)은 그후 이스라엘 지역을 공격하였고, 드디어 1077년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통치자들이 되었다. 셀죽 터키의 지배가 있기 전까지는 성지를 찾는 순례객들이 아무런 제제없이 이스라엘 성지를 방문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셀죽 터키에게 점령되면서 그와 같은 순례의 자유가 제한 받게 되었다. 이것은 유럽 사람들의 종교적 열정을 실망을 시키는 일이었다. 이런 일을 계기로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는 성지 해방을 위한 십자군 창설을 제창하였고, 그의 제안은 압도적인 지지 속에 이루어졌다.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된 셀죽 터키는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지역을 점령하면서 급기야는 성지 이스라엘을 침공하였다. 다메섹은 1055년에, 그리고 예루살렘은 1077년에 각각 셀죽 터키에게 점령당하였다. 셀죽 터키로부터 심각한 위협을 느꼈던 비잔틴 황제는 1095년 로마의 교황 우르반 2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청과 함께 성지 순례자들이 셀죽 터키에 의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는 보고를 접한 우르반 2세는 십자군 원정을 제안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십자군 원정대는 드디어 1099년 6월 15일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그들이 가장 먼저 행한 일은 이스라엘 내의 모든 모슬렘 거주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이었다. 십자군들은 이스라엘의 유대인들도 모슬렘과 동등하게 취급하여 함께 학살하였다. 이때 많은 유대인들은 박해를 피하여 이집트로 도망하였다. 이런 경솔하고 광신적 처사는 그 이후 모슬렘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해 심각한 적대감을 갖게 만들었다. 


   첫 번째 십자군 원정군은 근동지역에서 4개의 십자군왕국을 에데사, 안디옥, 트리폴리, 예루살렘 등지에 세웠다.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들은 이곳에 십자군왕국을 세우고, 그 첫 번째 왕으로 볼드윈 1세를 옹립하였다. 그는 같은 해 아스켈론에서 이집트의 파티미드 군대를 패배시킴으로서 그의 영역을 확대시켰다. 이스라엘에 세워진 십자군왕국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실상은 이스라엘 전 지역을 통치하는 위치에 있었다.


   십자군왕국은 초기 100여 년 동안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185년 볼드윈 4세가 죽으면서 누가 왕위에 오를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내분이 일어났다. 또한 십자군들은 메카로 가는 모슬렘 순례자들을 공격함으로 당시 이집트까지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던 셀죽 터키의 살라딘(Saldin)과 부닥치게 되었다. 1187년 살라딘은 힛딘의 뿔 지역에서 십자군을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 그해 말경 예루살렘을 비롯한 해안지방의 모든 십자군 도시들이 살라딘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그후 십자군들은 거의 100여 년간 성지의 완전한 재탈환을 위하여 여러 차례 새로운 십자군 원정을 시도하였지만, 어느 십자군들도 제대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십자군들이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스라엘은 마므륙(Mamluk)과 몽골이 맞붙어 싸우는 전쟁터로 바뀌었다. 13세기 징기스칸에 의해 세워진 몽고제국은 중국을 거쳐 동부 유럽 쪽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몽고제국은 1258년 바그다드를 점령하였고, 1260년에는 다메섹을 점령하였다. 몽고의 정복 전쟁은 이즈르엘 골짜기의 아인 얄루드에 진을 치고 있었던 마므륙 군대에 의해 저지를 당했다.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마므륙 군대는 이스라엘 땅으로부터 십자군을 영구히 추방하는 전쟁을 벌리게 되었다. 1291년 십자군의 마지막 다섯 성이었던 아트리트, 악고, 두로, 시돈, 베이루트가 점령당하였고, 십자군들은 이스라엘을 영구히 떠나게 되었다. 마므륙 군대는 십자군들이 더 이상 팔레스타인에 재상륙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지중해 해안을 따라 세워진 모든 십자군 성채들을 모래 속에 파묻어 버렸다. 이러한 십자군 성채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가이사랴 성채이다. 


   마므륙은 대부분이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었던 터키족 출신들이었다. 이집트의 아유비드왕조(Ayyubid dynasty; 기원 1171-1250) 통치하에서 노예신분으로 있었던 그들은 대부분이 군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적으로 특권을 갖고 있는 군인계급으로 부상하였다. 1250년 이후 그들은 아유비드 왕조의 칼립을 대신하여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어 새로운 마므륙왕조(기원 1260-1517)를 시작하였다. 초기 마므륙의 장군이었던 바이바르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그곳에 있었던 터키인들을 몰아내고, 그 이후 약 250년간 지속되는 이스라엘의 마므륙 시대를 열었다. 그는 1260년 벧산 근처에서 몽고족을 격퇴시킨 후 이집트의 슐탄으로 선출되었다. 마므륙 왕조는 1516년 오토만 터키에게 패배 당할 때까지 약 275년 동안 이집트를 비롯하여 이스라엘을 지배하였다. 오토만 터키가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에도 마므륙은 여전히 이집트에서 큰 힘을 발휘하였다.

 

   오토만 터키족들(Ottoman Turks)이 셀죽과 몽고족의 뒤를 이어 소아시아 지방에 침입한 것은 1300년경이었다. 그들은 1393년 유럽의 남동부와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나의 제국을 형성하였다. 1453년 오토만의 모하마드 2세는 비잔틴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비잔틴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바꾼 뒤, 이곳을 그들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포대를 갖춘 막강한 화력의 오토만 터키군은 셀림1세 때인 1516년 시리아의 알레포 부근에서 마므륙 군대를 대파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마므륙 왕국 내에 증폭되고 있었던 혼란을 적절히 이용하여 이집트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이것은 그 동안 마므륙 통치아래 있었던 이스라엘이 오토만 터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술레이만 대제(기원 1520-1566)는 정복을 통하여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하였다. 당시 오토만 제국의 통치권은 북쪽의 비엔나로부터 남쪽의 아라비아반도 남단까지 미쳤다. 이때가 오토만 제국이 누린 최고 번영기였다. 그는 제국내의 질서를 회복했고 무역을 권장하였으며 많은 도시들을 재건하였다. 특히 그는 1537년에 현존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시작하여 1540년에 완성하였다. 


   술레이만은 제국의 질서와 안전을 위하여 자신의 영토를 여러 개의 지방행정구역으로 나누었는데, 팔레스타인은 다메섹 지방에 속하였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농업과 산업이 크게 부흥하였는데, 올리브기름과 이 기름으로 만든 비누는 이 지역의 명산품이었다.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 살고 있었던 기독교인들은 순례객들에게 판매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종교적 성격의 제품들을 만들었다. 이 시기에 많은 유대인 이민자들이 갈릴리지역에 정착하였다. 16세기에 이곳에서 가장 큰 유대인 공동체는 싸페트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곳에서는 유대교의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카발라'라는 유대교의 신비주의가 발전하기도 하였다.


   술레이만 대제 이후 오토만 터키 제국은 무능력한 왕들이 연이어 나타나 국력이 점차 기울어졌다. 국력이 쇠약해짐에 따라 행정권을 위임 맡았던 지방장관들의 세력은 반대로 점차 증대되게 되었다. 이러한 지방화의 경향은 18-19세기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었다. 각지의 지방장관들은 명목상 오토만 제국에 속한 것이지 실제적으로는 지역마다 독립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오토만의 통치하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나폴레옹의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침공(1798-1801) 이후 오토만 제국의 운명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러시아에 의해 많이 좌우되었다. 나폴레옹의 원정은 중동지역, 특히 팔레스타인에 있어서 유럽 국가들의 관심을 새롭게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프랑스가 1820년대와 1830년대에 이집트 통치자 알리에게 원조를 제공하였던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오토만 시대의 마지막 200년간 이스라엘에서는 이곳을 방문하였던 순례자들과 고고학자들에 의해 고대의 유적들이 조직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하였던 시기이다. 


   유대인들은 이 기간동안 급속히 자신들의 공동체를 확장시켰다. 유럽과 러시아에서 거주하였던 많은 유대인들은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비교적 반유대주의 경향이 별로 없었던 팔레스타인을 찾아들었다. 유대인들은 주로 네 도시 곧 예루살렘, 사페드, 헤브론 그리고 티베리아 등지에 모여 살았다. 그러나 일부 유대인들은 가자, 악고, 하이파 등지에 모여 살기도 하였다. 


   본격적인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로의 이민은 19세기말 시온주의 운동의 고조로 급증하였다. 이스라엘에서 오토만 제국의 통치가 종식되었던 세계1차대전이 일어나기 전, 유대인들의 이민은 크게 두 차례 있었다. 제1차 이민은 주로 러시아와 루마니아 출신으로 이루어진 개척자들이었는데, 이들의 이민은 1882년에 시작하여 몇 년간 계속되었다. 이들 초기 이민자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농업인구가 증가하였으며, 경제적인 여건도 많이 호전되었다. 제2차 이민은 1904-1914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2차 이민은 주로 사회주의적 이상을 주장하는 러시아 출신들로 이루어졌다. 2차 이민자들은 최초로 키브츠와 모샤브를 이스라엘에 건설한 장본인들이다. 1909년 유대인들로만 구성된 최초의 유대인 도시 텔아비브가 욥바 근처에 세워진 것도 이러한 이민자들의 유입이 한창 진행중이던 때이었다. 

 

   세계 1차대전이 일어났던 기간 동안(1914-1918) 오토만 터키는 독일 편에 있었다. 이것 때문에 세계 1차대전의 승리는 곧 이스라엘에서 약 400년동안 지속되었던 터키의 지배를 종식시켰고, 유럽국가들의 이 지역에 대한 위임통치(mandate)시대를 가져왔다. 이때로부터 아랍-이스라엘의 갈등은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었다.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결성된 국제연맹은 중동지역에 위임통치(mandate)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1920년 국제연맹의 결정에 따라 불란서는 시리아와 레바논 지역을, 영국은 트랜스요르단과 팔레스타인 지역을 각각 위임통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해외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대거 유입하는 일을 촉진시켰다. 특히 동부 유럽의 유대인들이 대거 이스라엘로 몰려들었다. 이민이 급증하면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였지만, 현지 아랍인들과유대인 간의 갈등이 깊어졌다. 이러한 두 민족 사이의 갈등과 긴장은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1차대전 중 터키군과 싸웠던 아랍 지도자들은 이런 결정을 약속의 위반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후세인 가문 출신이었던 압둘라는 베두윈 군대를 조직하여 메카로부터 트랜스요르단 지역으로 침입하였다. 영국은 압둘라와의 협상 끝에 팔레스타인을 요단강 중심으로 양분하기로 결정하였다. 요단강 서안지역(West Bank)은 영국의 직접적인 위임통치지역으로 정하였다. 반면에, 요단강 동편지역은 압둘라를 왕으로 하는 아랍왕국으로 삼아 영국의 보호를 받도록 하였다. 이런 상황은 1948년 영국이 이 지역에서의 위임통치를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영국의 위임통치 하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은 능률적인 행정력에 힘입어 급속하게 발전하였으며, 현대적인 경영 구조의 사회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급증하는 유대인 이민은 이곳에 살고 있었던 이랍인들과 인종적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영국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영국은 이 문제를 유엔에 위임하였고, 유엔은 1947년 팔레스타인에 아랍과 유대인을 분할하여 두 나라를 세우는 안건을 상정하였다. 분할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국가와 아랍국가를 세우겠다는 유엔의 결정은 아랍 측의 단호한 거부로 무효화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48년 5월14일 영국이 철수하자 유대인과 인근 아랍국들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1948년 7월 18일 휴전이 받아들여져 요단강 서안지역(West Bank)과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아랍인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그후 1950년 주민들의 결정에 의하여 이 지역은 요르단의 압둘라 왕국에 예속되었다. 신생 이스라엘 공화국은 예루살렘의 서부지역과 요단강 서안지역 이외의 다른 지역들을 차지하였다. 시나이반도의 대부분과 가자지역은 이집트의 통치지역이 되었으며, 갈릴리바다의 동북부지역인 골란고원은 시리아의 통치지역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주변의 아랍국가들과 여러 차례(1956년, 1967년, 1973년, 1982년)에 걸친 전쟁을 벌렸다. 특히 이스라엘은 1967년 6월에 있었던 6일전쟁의 승리로 인하여 이집트가 통치하였던 가자지역과 시리아가 통치하였던 골란고원, 그리고 요단강 요르단이 통치하였던 동부 예루살렘과 서안지역을 점령하여 군사 식민통치를 실시하고 있다. 


1. 독립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되자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 국가들은 곧 이스라엘을 침공하였다. 이스라엘은 선조들의 옛 땅에서 되찾은 주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스라엘 방위군은 독립 전쟁 기간 동안에 조직되어 매우 빈약하였으나 15개월 동안 지속된 맹렬한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때 이스라엘의 사상자 수는 당시 이스라엘인구 1%에 해당하는 6천 여 명 이상이었다. 1949년 초 수개월간 유엔의 후원으로 이라크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과 여러 차례의 협상을 거쳐서 종전 상황을 반영한 휴전 협정을 체결 하였다. 해안 평야 지대인 갈릴리와 네게브 지역은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다.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은 요르단이 통치하게 되었고, 가자 지구는 이집트의 행정권 아래 편입되었다. 예루살렘은 양분되어 요르단이 구시가지가 포함된 동부를 관할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이 서부를 관할하게 되었다.


2. 정부 수립


   전쟁이 끝나고, 오랫동안 힘겨운 투쟁으로 되찾은 국가의 건설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유권자의 85%가 참가한 총선(1949년 1월 25일)으로 초대 의회인 제1회 크네세트가 개원하였다. 이스라엘 독립의 주역이 되어온 두 명이 국가의 지도자가 되었다. 유태인 사무국의 사무총장 다비드 벤구리온이 초대 총리로, 세계 시온주의자 협회 의장 하임 와이즈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국회에서 선출되었다. 1949년 5월 11일 에는 유엔의 5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모든 유태인이 이스라엘로 돌아와 아무런 제한 없이 살 수 있는 권리가 오랜 투쟁으로 주어진 것이다. 독립 후 4개월 동안 나치 대학살의 생존자들 5만 여명이 이스라엘로 왔다. 1951년 말까지 아랍 각지에서 피난 온 30만 여명 이상을 포함하여 모두 68만 7천 여 명으로 유태 인구가 급증하였다. 아랍 인구는 60만 명 이상이 독립 전쟁 동안 떠나고 16만 7천 여 명이 남거나 가족 재결합 계획에 따라 돌아갔다. 이후 몇 년 동안 아랍 각국에서 온 30만 명 이상의 이민자들은 이스라엘을 떠난 아랍인들 간에 실질적인 인구교환을 하게 되었다. 독립 전쟁에 의해 엄청난 경제적 부담이 야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급격히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만큼 이스라엘 국내에서의 내핍은 물론이며 외국으로부터의 재정적 원조가 불가피하였다. 미국의 원조와 미국 은행들의 차관, 재외거주 유태인들의 기부금, 전후 독일의 배상금 등이 모두 주택 건설, 농업의 기계화, 상선대 제작, 국영항공사 설립, 자원 개발, 산업 발전, 도로? 전기? 통신망의 구축 등에 사용되었다. 


   건국 10년 후에는 산업 생산과 고용은 2배로 늘고 산업 수출은 4배로 증가 하였다. 농업의 큰 발전으로 곡물과 육류를 제외한 기초 농산물을 자급하게 되었으며, 경작지가 놀랄 정도로 늘어나 대부분 황무지였던 약 5만 에이커(2만 헥타르)가 조림되었으며, 거의 5백 마일(800km)에 이르는 고속 도로 변에 나무가 심어졌다. 건국 이전부터 유태인 공동체에 의해서 개발되었고, 이제 아랍계도 포괄하는 교육 제도가 크게 확산되었다. 5~14세의 모든 아동들에게 우상 의무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1978년부터는 16세까지는 의무교육, 18세까지는 무상 교육이 실시되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이주해온 유태인들이 자손 대대로 거주해오던 국가의 각 분야의 문화와 함께 그들 공동체의 독특한 전통을 가지고 옴에 따라 문화 ㆍ예술 활동이 중동, 북아프리카, 서유럽의 여러 요소들과 혼합되어 다양한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건국 10주년 무렵에는 인구는 2백만 명 이상이 되었다. 


3. 1956년 시나이 분쟁


   심각한 안보 문제들이 건국 후 수년 동안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1949년의 휴전 협정은 처음에 의도한 대로 영구적인 평화에 이르는 길을 닦지 못했으며, 협정 위반 사례가 빈발 하였다. 1951년 9월 1일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에 반하여 이스라엘 선적 및 이스라엘행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과가 금지되었으며, 티란 해협의 봉쇄가 강화되었다. 살인과 방해 공작이 목적인 인접 아랍 국가들의 테러 공격대의 이스라엘 침투가 날로 증가 했다. 게다가 시나이 반도는 점차 거대한 이집트의 군사 기지로 변모해 갔다. 1956년 10월,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이 3국 군사 동맹을 체결함에 따라 이스라엘의 생존에 긴박한 위협이 대두되었다. 이에 8일간의 전투로 이스라엘 방위군은 시나이 반도 전역과 가자 지구를 점령하였으며, 수에즈 운하의 동쪽 10마일(16km) 선상에서 정지하였다. 이집트의 에일라트 만 자유 항행에 대한 보장과 유엔의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선에 대한 유엔 긴급 파견군(UNEF) 배치 결의안에 따라 이스라엘은 몇 주 전 점령했던 지역에서 1956년 11월 ~ 1957년 3월의 위치로 철수하는 데 동의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페르시아 만으로부터 석유를 수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동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교역을 증가 시킬 수 있도록 티란 해협이 개방되었다.


 4. 확립기


   이스라엘의 제2기 10년간(1958년~ 1968년)에는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가 강조되었다. 수출은 급증하였으며 GNP는 매년 10%씩 증가하였다. 수입해오던 종이, 타이어, 라디오, 냉장고 같은 품목들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갓 태동한 금속, 기계, 화학, 전자 분야에서도 대단히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농산물에 대한 국내 시장이 급속히 포화 상태에 이르자 농업 부문은 수출용 청과문 뿐만 아니라 가공 산업을 위하여 매우 다양한 곡물 재배에 착수하였다. 급증하는 교역량을 소화하기 위하여 기존의 하이파 항 외에도 지중해 해안 아슈도드에 수심이 깊은 항구를 건설하였다. 이스라엘은 미국, 영국,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 그리고 거의 모든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국가들과 밀접한 유대 관계를 맺음에 따라 외교 관계가 꾸준히 확대 되었다. 이 10년간은 수백 명의 이스라엘 의사 엔지니어 교사 농학자 관개전문가 청소년 조직원 등이 그들의 지식과 경험을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개발도상국들로 기술을 이전하여 광범위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 1956년 나치 정권 아래에서 행해진(1933~1945년) 유태인들에게 자해졌던 범죄에 대한 쓰라린 기억 때문에 그때까지 지연되어 온 독일연방공화국의 대사 교환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양국의 국교 정상화에 앞서 격렬한 반대와 대중의 논란이 있었다. 예루살렘에는 국회 의사당이 지어졌으며, 하다사 의료 센터와 헤브루 대학교의 부속 시설들이 독립 정쟁 후 스코푸스 언덕 위에 버려져 있던 옛 건물 터에 세워졌다. 유태민족의 문화 유산과 보물들을 수집하여 보존 연구하고 전시할 목적으로 이스라엘 박물관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5. 아이히만(Eichmann)재판 사건


   1960년 5월 23일,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의 유태인 말살 계획의 주창자의 한 사람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1950년에 제정된 나치와 나치 협력자 처벌법에 따라 재판을 받기 위해 이스라엘로 압송되었다. 1961년 4월에 열린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인류와 유태국민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 받았다.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후 1962년5월 30일에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스라엘 법에 의해 사형이 집행된 사건은 이것이 유일한 것이었다. 


6. 1967년 6일 전쟁


   이집트와 요르단 국경, 너머 아랍 테러 단체들의 기습이 격화되고, 북부 갈릴리 지방의 농경 정착촌에 대한 시리아 포대의 지속적인 포격과 인접 아랍 국가들의 막대한 군비 등으로 이스라엘의 평온이 깨지게 되었다. 1967년 5월, 이집트가 시나이 사막으로 군대를 이동시키고, 1957년 이래 그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유엔 평화 유지군에게 철수를 요구하고, 티란 해협에 대한 봉쇄를 재개하였으며, 요르단과 군사 동맹을 체결했을 때 이스라엘은 모든 전선에서 적대 받는 아랍 군대들과 대치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956년 시나이 분쟁 뒤에 합의된 협정을 회복하는 데 실패함에 따라 이스라엘은 고유란 자위권을 발동하여 1967년 6월 5일 남부의 이집트에 대하여 선제 공격을 가했으며, 뒤이어 동부의 요르단에 대하여 반격을 가했다. 그리고 시리아 군대의 진로를 북부 골란 고원에서 저지시켰다.  6일간의 전투 뒤 기왕의 휴전선은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 새로운 휴전선, 즉, 유다 ㆍ사마리아 ㆍ가자ㆍ 시나이 반도ㆍ 골란 고원 등으로 대체되었다. 결과적으로 북부의 촌락들은 19년간 계속되어온 시리아의 포격에서 드디어 해방되었으며, 이스라엘 선적과 이스라엘행 선박의 티란 해협 통과가 확보되었고, 1949년 이래 이스라엘과 요르단 간에 계속 양분되었던 예루살렘이 재통합되었다.



 7. 전쟁에서 전쟁으로


   1967년 여름 이스라엘 외교의 지향점은 그 지역 내 모든 국가들의 주권, 영토의 통합, 정치적 독립, 군사적 위협과 행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국경과 안전 속에서 각 국민들이 평화롭게 살 권리에 대한 상호 인정을 촉구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42호를 기초로 자국의 군사적 성과를 항구적인 평화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랍의 입장은 1967년 8월 하르툼 정상회담에서 공식화된, '이스라엘과의 비평화, 비협상, 비인정'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1968년 9월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의 둑을 따라 산발적이고 정적인 군사 행동으로 소모전을 개시하였으며 양측에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그 후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를 따라 새로 그어진 휴전선을 수락한 1979년 여름에야 적대 행위는 막을 내렸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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