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아 회의


이  회의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회의로 일컬어진다. 이 회의는 아다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논쟁을 통하여 그리스도론을 확장하였으며, 교회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이단의 세력을 방어하는 중요한 사역의 지침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여러 중요한 공교회에 교리를 확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는 이후에 교회 회의나 교리 논쟁을 통한 파당의식과 편협성으로 말미암아 쓸데없는 것에 많은 힘을 소모하였다. 이후에 교회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많은 이단들을 교화로써 포용하는 대신에 철저하게 물리적인 힘으로 처단함으로써 교회가 세속 권력을 마구 사용하는 근거를 마련했다. 개신교는 이러한 카톨릭의 여러 단점들에 항거함으로써 종교개혁 전통을 이루어냈지만, 특히 한국 교회의 편협성과 분열상 그리고 수많은 이단들을 정죄하기에 급급한 상황은 분명 초대교회 때부터 이어져 온 공교회(우주적 교회)의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니케아 회의는 기독교의 세계적인 회의의 효시(嚆矢)로서 당대의 최고 사건이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분기점이다. 특별히 이것은 교리적인 논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와 비슷하지만 기독교가 아닌 것과 기독교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간의 싸움이기도 하다. 사실 두 학파는 신학적 접근 방법이나 강조점이 크게 달랐다. 그래서 서로를 이단적 경향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니케아 논쟁은 기독론에 기초한 삼위일체 논쟁이다. 그것은 유일신 사상과 기독론의 피상적 부조화에서 오는 아리우스의 오해에 대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로고스 기독론'의 반발에서 시작되었다.



1. 아리우스


 1) 생애

 아리우스(Arius)는 리비아 사람으로서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다. 그는 키가 크고 연설을 잘했으며 열성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많았다. 그는 안디옥 신학교의 교장인 루시안(Lucian 312)에게 배웠으며,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 260-272)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리하여 그의 설교, 서신 그리고 「향연」(饗宴, Thaleia)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극단적으로 종속적인 기독론을 가르쳤다. 318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알렉산더와 충돌한 뒤 니케아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아 추방되었다. 그러나 후에는 다시 귀환하여 니케아 신조에 형식적으로 동의함으로 복직되었다.


 2) 사상

 이미 사모사타의 바울이나 사벨리우스는 성자를 성부로부터 발산된 형태, 또는 성부의 뜻과 행동을 사람들에게 표현하시는 수단 중의 하나로 이해했었다. 이에 대하여 터툴리안, 오리겐 등은 보다 성경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받아야 하는 강제력을 가진 기준은 제시되지 않았었다. 아리우스는 사모사타의 바울의 제자인 루시안에게서 배웠다. 루시안은 어려서 에뎃사의 학교에서 공부했고, 후에 사모사타의 바울에게서 배웠다. 아리우스의 사상이 공적으로 드러난 것은 알렉산더 감독이 삼위일체신의 현현(顯現)에 대해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아리우스가 그것이 사벨리우스설이라고 공격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 없는 홀로 영원하신 유일한 존재이시다.

② 성경에서 아버지인 하나님이 아들을 낳았다고 할 때 아들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없다가 창조함을 받은 것을 가리킨다.

③ 그러므로 아들은 시작이 있는 최초의 피조물로서 진정한 하나님은 아니다.

④ 그리스도의 영(靈)은 인간의 영혼이 아니라 로고스()인데, 이 로고스가 인간 영혼이 있어야 할 자리에 들어갔으므로 그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또한 로고스는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일 수 없다.

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는 '유사한 본질'(homoiousios)을 가지고 계신다.

    결국 그의 주장은 삼위일체설을 부인하는 것으로 알렉산더 감독으로부터 이단적 사상이라는 반박을 받게 되었다.


2. 니케아 회의


 1) 발단

 아리우스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알렉산더는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하여 320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지방 대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아리우스는 직분을 박탈당하였고, 그의 추종자인 세쿤두스(Secundus)와 데오나스(Theonas)도 같은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아리우스와 같이 루시안에게서 배운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를 지지했으며 동방의 교인들은 대부분 아리우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콘스탄틴은 자신이 보기에 '하찮은 것'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고, 그로 말미암아 제국의 통일성이 위협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실 콘스탄틴에게는 교리적인 문제보다 정치적인 통일성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호시우스(Hosius of Cordova)를 파견하여 분쟁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그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그는 세계적인 대회를 소집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2) 과정

 콘스탄틴은 각 지방의 감독들에게 안내장을 띄웠다. 각 지방에서 2인의 장로와 3인의 수행원을 파견하는데, 정부의 운송 수단을 사용하도록 했으며 체재비용과 왕복 여비를 모두 황실에서 지출해 주었다. 그리하여 325년 니케아(Nicea)에 최초의 세계회의가 소집되었다. 모인 인원은 300여 명이었는데 이 문제에 관심이 별로 없었던 서방측에서는 10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크게 3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①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그리고 니케아·칼케돈·에베소 감독들, ② 아리우스를 반대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호시우스 등의 소수와, ③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립파인 기이사랴의 유세비우스 등이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고, 콘스탄틴은 다만 통일과 평화 유지만을 부탁했다. 처음으로 신조를 제출한 것은 아리우스파의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였다. 그러나 즉시 부결되었고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제출한 신조가 수정이 가해져서 채택되었다. 아다나시우스는 '유사본질'(Homoiousios)이 아니라 '동일본질'(Homoousios)이어야 함을 주장했다.


 3) 결과

 니케아 회의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와 아다나시우스의 주장을 수정하여 니케아 신조를 선포했다. 그 내용은 아버지는 창조주시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나 만들어지지는 않았으며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개체성(신성)과 아버지와의 일체성을 확인해 주고 있다. 니케아 신조는 기독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표준적인 신앙으로 남아 있다. 이외에도 니케아 회의는 아리우스의 추방, 부활절 날짜 제정, 멜리티우스(Melitius) 분파 문제 등을 다루었다.


 니케아 회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전례를 남겼다. 여기서 규정된 교회법들은 교회의 조직과 권력 구조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실제로 황제의 법과 같은 양상을 띠었다. 한편 아리우스주의가 그리스도의 이성과 신성을 모두 부인함으로 구원의 능력에 막대한 손상을 입히는 것을 방지함으로 전통적 기독교의 유지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위협하는 세력들이 많이 존재한다. 우리는 단지 그들을 비난하고 멀리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여 우리의 약점을 보완하고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이단 세력은 기존 교회의 약점을 들고 나오므로 그 부분들에 대한 확고한 이해와 정립이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1. 아리우스의 교리체계


 아리우스는 성부 하나님이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은 완전히 구별되며 아들이 아버지께 종속된다고 주장하였다.

하르낙은 아리우스 교리체계를 8개항으로 정리했다.


 ① 단 한 분이신 하나님의 특징은 단독과 영원이다.

     그는 자신의 본질로부터 아무것도 내놓을 수 없다. 하나님은 항상(처음부터) 아버지가 아니셨고 단지 아들을 낳은, 즉 창조한 뒤에야 아버지가 되셨다.

 ② 이 하나님 안에 지혜와 말씀(logos) 이 거하지만 이들은 위격체가 아니라 능력이다.

 ③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기 위하여 한 독립된 실체를 만물 창조의 도구로 존재케 하셨다. 이 독립된 존재가 성경에서는 지혜·아들·형상·말씀 등으로 불린다.

 ④ 아들은 아버지와 별개의 존재이며 실체와 본성에 있어 아버지와 다르다. 아들은 모든 이성적 피조물과 같이 자유의지를 부여받았고, 따라서 변화할 수 있다.

 ⑤ 아들은 참으로 하나님이 아니고 소위 말씀과 지혜에 불과하다. 그는 아버지께 대한 절대적 지식을 갖지 않고 상대적 지식을 갖고 있을 뿐이다.

 ⑥ 하지만 아들은 피조물이지만 다른 피조물들과 다르다. 그는 완전한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독생하신 하나님' 등으로 부른다.

 ⑦ 그리스도는 실제로 신체를 취하였으나 로고스가 영혼을 대신하므로 그것은 영혼이 없는 몸이었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가 아니며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⑧ 기타 피조된 존재들 가운데서 성령은 제2의 독립된 실체로서 아들 곁에 위치하게 된다.

     따라서 아리우스는 성령은 아들의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아리우스주의다. 삼위일체 위격들이 성경 말씀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이교 철학자들의 방법을 통하여 도달된 이론이다.

결국 아리우스주의는 로고스의 존재에 이차적인 하나님의 지위를 허용함으로써 다신교에 귀결되거나 아니면 고유한 그의 신성을 부인함으로써 유대교적

유니테리안주의에 귀착하였다.



2. 아다나시우스 신학


 1) 아들의 신성(神性) 

아다나시우스는 '아들의 신성'을 강조하였다.

아다나시우스는 처음부터 니케아 신조를 받아들였고, 끝까지 그것을 옹호하였다.

아들의 신성에 대해 아다나시우스는 5개의 주장을 하였다.


 ① 그는 삼위일체의 개념으로부터 아들이 부분적으로는 창조되거나 창조되지 않았으며,

     부분적으로는 영원하거나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② 그는 아들을 말씀(lsgo")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아들은 영원하다고 한다.

 ③ 그는 아들이 하나님으로서의 일들, 즉 '창조'와 '구속'에 동참했다고 했다.

 ④ 그는 요한복음과 히브리서를 많이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아리우스주의의 이론이 성경의 표현과 조화되기 어렵다고 지적하였다. 

 ⑤ 그는 모든 기독교인의 의식과 믿음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한 분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인다고 주장했다.


 2) 성령의 신성 : 아다나시우스는 아들에 대한 자신의 가르침을 전개하듯 성령에 관한 교리를 밝혔다.

 ① 그는 삼위일체는 실제적인(영원한) 삼위일체임에 틀림없으며, 그 안에는 어떤 피조물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② 그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성령은 하나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반대하며,

     고후13:13을 제시하고 엡4:6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三位)가 연합되어 한 위격이라고 주장하였다.



3. 니케아 공의회에서의 유세비우스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의 논쟁이 일어났을 때 처음에는 아리우스의 편을 들었다. 이것은 유세비우스가 아리우스의 견해에 동조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리우스파와 개인적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아리우스를 관대히 처분하려는 개인적인 희망 때문인 것 같다. 유세비우스는 이 총회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까닭은 그가 당시 기독교에서 가장 박학하고 저명한 저술가였으며, 황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이 공의회에서 황제의 오른편 최상석에 앉았으며, 개회연설을 했다. 처음에는 유세비우스가 아리우스의 편을 들었지만 결국 유세비우스는 아들은 아버지의 본체로부터 태어났으나 창조되지 않았으며 동일본절이라는 아다나시우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 공의회에서 행한 또 다른 중요한 일은 부활절 날짜를 계산하는 문제를 결정했다. 이 일에서도 유세비우스는 지도적인 입장에서 부활절의 주기를 19년으로 확정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284년경에 이 19년 주기를 아나톨리우스가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 공의회에서 승인을 받아 교회에서 널리 통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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