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최초로 방문한 서구인 - 세스페데스


아랍인들이 9세기 무렵에 신라를 언급한 이후로 한국은 오랫동안 서구인에게 잊혀진 나라였고 1592년 이전 서구의 선교사들은 조선을 매우 잔인하고 야만적인 섬나라로 왜곡해서 기술했다. 이처럼 쇄국 정책을 편 조선 땅에는 공식적으로 입국한 서양인은 16~17세기에도 없었다. 그만큼 당시의 코라이(한국)는 서양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나라였다. 1627년(인조 5년)에 일본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도착한 벨테브레(박연)와 1653년(효종 4년)에 역시 일본으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도착했던 네덜란드 선원 헨드릭 하멜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일찍 한국을 방문한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바로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소속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였다. 그는 1593년 12월 27일, 일본군과 함께 방한하여 서구인으로서는 최초로 조선 땅을 밟았다. 임진왜란을 직접 목격한 유일한 서구인이기도 했던 그는 조선 땅에서 서간문을 기록하여 미지의 나라 코라이(한국)를 서양에 알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세스페데스는 1551년(또는 1552년)에 마드리드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당시 마드리드 시장이었다. 18세가 되던 해에 살라망카에 있던 예수회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사제가 될 생각보다는 당시 학문의 중심인 살라망카 대학에서 수학하기 위하여 갔던 것이다. 그는 살라망카 대학에서 공부를 하던 중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 1569년에 예수회에 입회했다. 세스페데스는 1571년, 아빌라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서원했고, 후에 신학 공부를 시작할 무렵에는 동인도로 가서 선교 활동을 했다.


그 후, 세스페데스는 예수회의 일원이 되어서 일본에서 열심히 선교 사업을 수행했다. 1579년부터 1587년까지 예수회 신부들과 세스페데스 신부는 복음 전파와 문화 사업을 통해 일본의 많은 귀족 계급과 친분을 맺었으며,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西)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에 대한 추방령을 발표하여 세스페데스와 다른 예수회 신부들은 한때 많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1592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을 정복한다는 구실로 조선 땅을 침범했다. 그는 조선 침략을 위해 15만 명의 병사들을 동원했는데, 그중에는 천주교 신자인 병사들과 장군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일본에서 조선 땅에 도착한 뒤로는 전쟁 때문에 신부의 미사와 강론을 거의 듣지 못했다. 이에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면서 서구의 선교사들과 긴밀한 친분 관계를 맺고 있던 일본군 총대장 아우구스티누스(고니시 유키나가의 세례명)는 모든 천주교도 병사들에게 미사와 강론을 담당할 신부를 조선으로 모셔왔다.

세스페데스는 우선 일본의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대마도에 도착하여 약 18일을 머문 후, 성탄 나흘 전에 60척의 일본 함대에 편승하여 조선으로 출항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강한 폭풍을 만나 다시 돌아온 후, 두 번째 출항으로 조선의 남해안에 도착했다. 1593년 12월 27일이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에 약 1년 동안 머물면서 당시 임진왜란에 참전한 천주교 신자였던 일본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방한 1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세스페데스의 방한 활동은 그와 친분이 두터운 일본 귀족들의 요청에 따라 비밀리에 취해진 것이었는데, 후에 세스페데스의 방한 사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발각되어 처벌을 받게 되었으나, 고니시 유키나가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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