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지배에 대한 페르시아인과 유대인의 저항


세계적인 지배력을 확보한 헬레니즘 문화와 로마의 지배에 도전했던 두 민족은 페르시아와 유대 민족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매우 달랐다. 기원전 246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2세(Antiochus II: B.C. 261~246) 사망 후, 페르시아인으로 그리스의 통치에 대항해서 성공적인 반란을 이끈 사람은 아르사케스 1세(ArsacesⅠ: B.C. 250~211)였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박트리아(Bactria 또는 Bactriana) 지역1)의 그리스 왕 디오도투스(Diodotus)가 지배하는 지역의 총독이었는데, 반란을 일으키고 서쪽으로 피신해 자신의 나라를 세웠다.

그 결과 그는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서 그들의 종족과 연고지 이름을 따서 역사상 파르티아(성서의 바대, Parthia: B.C. 247~224)로 알려진 독립 왕조를 세웠다. 마케도니아의 패권을 회복하려는 로마의 계속된 시도가 있었지만 파르티아는 존속했고 더 나아가 정치적 독립을 확대해나갔다. 이 제국은 당시 주요한 정치세력으로 로마의 위험한 경쟁자가 되었다.

미트리다테스 1세(MithridatesⅠ: B.C. 171~138)와 아르타바누스 1세(Artabanus Ⅰ: B.C. 127~124)는 유프라테스 동쪽의 전 지역을 파르티아 수중에 넣었다. 파르티아의 힘은 유목민 기병대와 조로아스터(Zoroaster) 신앙 그리고 헬레니즘에 대한 문화적 저항에 있었다. 그들은 셀레우코스왕조가 확립한 사회조직을 잘 이용했고 봉신국들의 발전을 허용했다. 파르티아인들은 창의적인 민족은 아니었지만 아시아와 그리스 - 로마 간의 무역로를 대부분 장악하여 상당한 부()를 쌓았다.

파르티아 제국은 유목민의 동북부 국경선 침입과 로마 제국의 위협에 시달렸다. 그러나 기원전 53년에는 카레(Carrhae)에서 로마 군대와 싸워 그 유명한 전승을 거두었다. 비록 후에 로마가 그들의 수도 중 하나인 크테시폰(Ctesiphon)을 점령했지만 파르티아인들은 적어도 로마가 동쪽으로 팽창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는 성공했다. 견고한 국내 통치력이 부족했던 파르티아 제국은 224년 남부 이란의 지방 통치자 아르다시르 1세(Ardashir: 224~241)가 일으킨 반란으로 멸망했다. 아르다시르 1세는 그곳에 사산 왕조(Sāsānian Persia, Sāsānian dynasty: 224~651)를 건국했다.

한편, 유대인들은 그리스와 로마에 대한 정치적 저항에서 참혹한 시련을 겪었다. 기원전 1800년 이전 팔레스타인에는 헤브루인(Hebrew)보다 먼저 아랍 가나안인(Canaan)들이 살고 있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아랍인의 조상은 필리스틴인과 아랍 가나안인들의 후손이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기원전 1800년경 아브라함을 족장으로 하는 헤브루인들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그 후 기원전 1700년경 이들은 기근을 피해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을 족장으로 이집트로 이주했는데, 기원전 1290년경 모세(Moses)의 인솔로 이집트를 탈출해 시나이 일대를 방랑한 후 팔레스타인에 귀환했다. 이 지역(가나안 지방)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약속의 땅(이스라엘2) 자손의 땅)’(여호수아 11:22)이었다.

기원전 1050년경, 하나님이 유대민족에게 선물했다는 이 땅에서 유대인들은 사울 왕(King Saul: B.C. 1079~1007)을 중심으로 독립 국가(the united Kingdom of Israel)를 세워 번영을 누렸다. 초대 왕이 된 사울은 암몬, 블레셋, 모압, 에돔 족속과 전쟁을 치르면서 이스라엘을 방어하려 했다. 그러나 성서에 따르면 그는 제사장만이 수행할 수 있는 제사를 자신이 직접 집전하는 등 교만해져(사무엘상 13: 8~15)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었다. 그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고(사무엘상 31: 3~13) 왕권은 자신의 후손이 아닌 다윗에게 넘어갔다(사무엘하 5: 3~5).

2대 왕 다윗(King David: B.C. 1003~970)은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정했으며 하나님의 법궤를 이곳에 옮겨 예루살렘을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만들었다(사무엘하 6: 12~15). 다윗은 정복 사업을 활발히 벌여 영지를 확장했으며 통치를 위한 행정조직도 갖추었다(사무엘하 8: 15~18). 3대 솔로몬 왕(King Solomon: B.C. 971~931)은 다윗이 마련한 토대 위에 무역을 진흥시켜 국가 수입을 늘리고 이스라엘의 부흥을 꾀하는 등(열왕기상 4: 20~34, 10: 14~29) ‘솔로몬의 영화’를 누렸다. 그는 제1신전을 건축하는 등 중요한 업적을 이루기는 했지만 절대군주적인 행동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열왕기상 12: 1~15).

솔로몬 왕 사후 북방 종족은 사마리아(Samaria)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왕국(Kingdom of Israel, Samaria: B.C. 931~722년경)을 건설하여 남방의 유대 왕국(Kingdom of Judea: B.C. 930~586)과 맞섰다. 이들은 자신들이 인구도 많고 영토도 넓지만 왕정으로부터 얻는 이익보다는 불이익이 크다고 판단해 다윗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열왕기상 12: 16~24). 남북 왕조의 분열은 약화되었던 주변 국가들이 다시 세력을 얻어 이스라엘의 정치·경제에 타격을 주는 요인이 되었다.

북방의 이스라엘 왕국은 여로보암 왕조(Jeroboam: B.C. 931~911), 바아사 왕조(Baasha: B.C. 910~887), 오므리 왕조(Omri: B.C. 886~875), 예후 왕조(Jehu: B.C. 841~814) 등을 거치지만 왕조 말기 아시리아 세력이 커지면서 존립에 위협을 받게 되었다. 호세아 왕(Hoshea: B.C. 732~722)은 이집트에 의지해 아시리아에 대항했지만 3년간의 포위 끝에 수도 사마리아가 아시리아에 점령되면서 북왕조는 기원전 722년경 멸망했다.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 유대인들을 오늘날 이란과 이라크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아시리아는 또한 외부의 지배층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려는 의도로 북이스라엘 민족과 타 민족을 혼합시키는 민족 혼합정책을 시도해 북왕조 사마리아에는 아시리아에 점령당한 타 민족들을 정착시켰다. 결국 사마리아는 혼혈민족이 되고 순수한 남왕국 유대인들은 그들을 같은 민족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사마리아인들과는 더는 약속받은 땅을 공유할 수도 없었다. 예수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천대받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남왕국 유대는 다윗 왕조를 계속 유지해갔지만 아시리아의 뒤에 일어난 신()바빌로니아 제국(칼데아: B.C. 625∼539)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Nebuchadnezzar Ⅱ: B.C. 630~562)가 정복하여(B.C. 587) 많은 유대인이 포로로 바빌론에 끌려갔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수도 바빌론에 ‘바벨 탑’을 건립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징발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바로 ‘바빌론 유수(, Babylonian Captivity)’다. 징발된 유대인들은 48년 만에 페르시아 아케메니드(The Achaemenids: B.C. 550~331) 왕조의 창시자 키루스 대왕(성서 이름 고레스, Cyrus the great, Cyrus Ⅱ: B.C. 559~530)이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하면서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향하게 된다. 페르시아는 약간의 자치를 허용해 이 시대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두 번째 성전을 지을 수 있었다. 일부 유대인은 페르시아 제국의 군인이 되었고 나머지는 농업을 계속했다.

기원전 2세기 내내 유대 예루살렘은 이집트와 시리아라는 두 강대국의 압박하에 놓여 있었다.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시리아는 셀레우코스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 두 국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 그 제국이 20여 년에 걸쳐 해체되고 남은 국가들이었다. 유대는 원래 헤브루(Hebrew, 히브리) 왕국으로 독립국이었지만 솔로몬 사후에 둘로 분열되어 멸망한 뒤 유대의 주인은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이집트 등으로 바뀌었고 마지막으로 기원전 198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AntiochusMegas: B.C. 223~187)가 유대를 이집트로부터 분리시켜 자신의 영토에 병합시켰다.

이집트의 지배하에서 유대인들은 많은 자유를 누렸다. 이집트는 유대의 자치를 허용했으며 유대인들은 아무런 방해 없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자신들 고유의 전통과 종교 등을 지켜나갔다. 유대를 새로 병합한 안티오쿠스 3세도 이 지방의 전략적 중요성을 감안해 오래전부터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 공동체의 지원을 얻기 위해 이들이 자신들의 율법에 따라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특권을 부여해 유대인들이 누리던 자유를 그대로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그 아들인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osEpiphanes: B.C. 175~164)가 집권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그가 왕위에 오르던 기원전 175년 주변의 상황은 시리아에 불리하게 조성되고 있었다. 메디아와 파르티아가 기세를 떨치며 동쪽 국경을 위협하는 동안 유대 지역을 상실한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PtolemaiosEpiphanes: B.C. 204~181)가 이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로마와 동맹을 체결했다. 당시 공화정이던 로마는 카르타고와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겨루었던 제2차 포에니 전쟁(Poeni war: B.C. 218~201)에서 승리를 거두고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지중해를 제압한 로마는 동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욱 강력한 신민들의 결속력이 필요했던 안티오쿠스 4세는 헬레니즘 문화로 신민들을 하나로 통합시키려 했다. 야심만만한 정복자였던 그는 종교와 문화, 전통이 각기 다른 여러 지역을 헬레니즘으로 통합시키면(Hellenizing) 신민들의 일체성이 강화되어 더욱 강력한 국가로 도약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시리아인들은 그리스 문화에 열성적이었다. 그리고 안티오쿠스 4세에게 문화란 바로 선()의 추구였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 지배(B.C. 334~323)이후 중동 전역에 확산되던 헬레니즘화()를 지향하는 문화적 신민화 과정을 강행하려 했다. 끊임없이 묻고 창조하는 그리스의 과학 정신은 바로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세계관은 헬레니즘과는 판이했다. 유대인들은 헬레니즘을 자연숭배의 한 형태 내지 여호수아 시대 이후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신앙과 대립되었던 가나안 종교의 정신적 연속물로 간주했다. 그들에 의하면 가나안 신들은 변덕스러운 인간 마음속의 분노, 증오, 욕망, 시기, 탐욕 등이 신격화한 것일 뿐이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을 초월적인 하느님 야훼가 선택한 백성이라고 주장했다.

야훼는 사람과는 전적으로 다른 거룩한 존재였다. 사람이 신들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사람을 창조했으며,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을 밝혀주는 빛’(이사야 49:6)으로 하느님이 선택한 백성이었다. 야훼와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가 지니는 의미를 세상에 입증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였다. 이스라엘의 임무는 인간의 힘과 욕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지배하는 올바른 인간사회를 만들어서 하느님의 계시를 의미 있게 하는 것이었다.

안티오쿠스 4세는 귀찮은데다 그가 보기에는 이상하고 배타적이며 ‘비타협적인’ 유대 민족의 종교를 제거하기로 작정했고 그때까지 이집트 영토였던 유대 지방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신앙을 말살하기 위해 그들의 종교의식을 탄압했으며, ‘질투심 많고 편협한 신’이 제정했다는 이유로 안식일과 전통적인 유대교 축제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그 대신 그리스 경기를 치를 대규모 체육시설이 건립되었다. 이러한 여파로 인해 유대인들은 안티오쿠스 4세의 헬레니즘화를 지지하는 파와 전통을 고수하는 파로 갈라졌다. 결국 갈등은 대제사장을 임명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폭발하였다.

기원전 168년 예루살렘에서는 예루살렘의 헬레니즘화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대제사장을 감금하며 봉기했다. 당시 이집트를 침공하여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하다가 로마의 개입으로 인해 전쟁을 포기하고 굴욕적인 퇴각을 하고 있던 안티오쿠스 4세는 이를 반란의 징후로 단정하고 아폴로니우스(Apollonius)의 군대를 유대로 파견했다. 이듬해 아폴로니우스가 이끄는 시리아 군대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성전을 약탈한 뒤 성전을 제우스를 섬기는 신전으로 바꾸어버렸다. 그리고 이 신전 맞은편의 언덕에 아크라(Acra)라는 요새를 건설하고 이곳에 시리아군을 상주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많은 유대인은 보편적인 새 조류와 타협하는 쉬운 길을 택했으나, 한편에서는 안티오쿠스 4세의 불경스런 행동으로 저항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저항운동은 ‘하시딤(Hasidim)’이라는 종교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하시딤은 히브리어로 ‘경건’을 의미하는데, 이 운동은 한마디로 말해 ‘회개운동’이었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안티오쿠스 4세의 잔인한 종교탄압을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향한 진노를 풀고 구원의 날을 내려주도록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안티오쿠스 4세는 나머지 지방에서도 유대인들의 전통을 없애기 위해 군대를 보냈는데 그중 아펠레스(Apelles)가 이끄는 한 부대가 모데인(Modein)이라는 예루살렘 북서쪽의 마을로 파견되었다. 이에 저항한 그 지방의 사제 마타시아스(Mattathias)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오늘날의 라말라(Ramallah) 북서쪽에 있는 고프나(Gophna) 산으로 피신해 들어갔다. 그의 다섯 아들 요한 가티, 시몬 타시, 유다, 엘르아잘 아바란, 요나단 아푸스도 그와 함께했다. 이 지역은 주로 해안지방에 퍼져 있는 시리아군의 수비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산악 지형이라 방어와 게릴라전을 하기 유리한 곳이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게릴라전을 준비하며 유대교의 율법을 따를 것을 맹세하고 지방에 있는 마을 사람들을 규합해나갔다. 안티오쿠스의 강압적인 헬레니즘화 정책에 반대하던 사람들과 하시딤들이 그의 진영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마타시아스는 반란을 일으킨 지 1년 만인 기원전 166년에 죽었다. 그러나 마타시아스는 이스라엘 독립의 영웅이 되었고, 그의 고향 모데인은 저항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가 죽자 군() 조직에 많은 역할을 담당했던 셋째아들 유다(Judas: B.C. ?~B.C. 161)가 지도자가 되었다.

초기 전황은 전력상 소규모 유대 저항군에게 가망이 없었다. 그러나 저항군은 자신들의 민족과 종교를 지키려는 확실한 목적이 있었고 그곳 지리에 밝은 사람들이었다. 주민들의 많은 도움도 있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예루살렘의 시리아군이 거의 고립되다시피 하자 사마리아에 주둔 중이던 아폴로니우스가 이들에 대한 토벌에 나섰다. 이에 대해 기습 포위공격으로 맞섰던 저항군은 고프나 북동쪽에 있는 나할 엘 하라미아(Nahal el-Haramiah) 협곡에서 시리아군을 상대로 의미 있는 첫 번째 승리를 거두었다.

세론(Seron)이 증강된 병력으로 새로운 군사작전을 시도했지만 벳호론(Beth-horon) 고개에서 자신이 전사함으로써 시리아 군대는 와해되고 유다에게 두 번째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 후 유다는 엠마오(Emmaus), 벳호론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했다. 그 후 기원전 164년 12월, 그는 시온 산을 되찾아 헬레니즘적 종교의식을 일소하고 토라(Torah)의 규정에 따라 성소를 재건해 이를 야훼(Jehovah)의 경배에 바쳤다. 안티오쿠스 4세가 성전을 함락하여 더럽힌 지 3년 만이었다.

그가 유격전을 감행하여 연전연승을 거두자 많은 유대인들이 그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다. 그 뒤 혹독한 압박을 당하는 자기 민족을 구출하기 위한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유다의 세력은 유대 지방뿐 아니라 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그 과정에서 유다는 유대인들의 민족적인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굳혀나갔다. 유다는 전쟁에서 승리의 공로로 ‘마카베오’ 또는 ‘마카비(Maccabee)’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뒤에 이 이름은 그의 가문, 특히 유다의 아버지 마타시아스와 유다의 4형제 요한, 시몬, 엘르아잘, 요나단에게 주어졌다. 이는 또한 고대 이스라엘의 마지막 독립 왕조의 이름이자 그 지배 일가의 이름이 되었다.

이후 유다는 갈릴리(Galilee)와 트란스요르단 등지에서 전투를 계속했으며, 기원전 164년 안티오쿠스 4세가 죽은 뒤 얼마간의 평화가 있었지만3) 곧 재개된 전쟁에서 유다는 도움을 얻기 위해 로마로 사절단을 보냈다. 이로써 로마로부터 정치적 승인을 얻는 성과가 있었지만 이는 결국 훗날 로마가 유대를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다 자신은 예루살렘의 나머지 부분에서 시리아군을 몰아내기 위해 아크라(Acra) 요새의 시리아 수비대와 싸웠으나 벳세 즈가리야 전투(the Battle of Beth Zechariah: B.C. 162)에서 패배하고, 이듬해 엘라사(Elasa) 전투에서 사망했다.

마카비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모데인의 제사장 마타시아스의 다섯 아들은 하스몬가()(Hasmonean)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혁명이 성공하자 하스몬 왕조(Hasmonean Dynasty: B.C. 164~63)로 이름을 바꾸고 군주정치를 실시했다. 이렇게 성립된 왕조는 셀레우코스 왕조가 내분에 휩싸이는 동안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주변 민족들을 정복해 영토를 확장하고 독립국가의 번영을 누렸다. 알렉산더 야나이(Alexander Jannaeus) 집권시절 절정에 달한 하스몬 왕조는 기원전 67년 그를 계승한 부인 살로메 알렉산드라(Salome Alexandra)가 죽자 두 아들의 왕위 다툼을 둘러싼 내분에 빠지게 된다. 외부세력을 끌어들여 왕권을 차지하려는 형제들 간의 전쟁은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끝이 났다. 이와 함께 유대인의 독립 국가는 사라지고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지중해 세계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로마는 이스라엘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은 소아시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고 있었고 주변에는 로마가 정복하지 못한 나바테아인(Nabataeans)과 파르티아 왕국이 남아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하스몬 치하에 있던 많은 헬라 도시들을 점령했다. 로마 제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정복한 후, 처음에 헤롯과 같은 꼭두각시 왕을 세워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다가 폰티오르 필라토스(Pontior Pilatos, 한국어 성서 이름은 본디오 빌라도)와 같은 행정관을 두었으며 나중에는 직접 통치했다.

페르시아가 로마보다 유대인들에게 더 나은 대접을 했기 때문에 유대교 열성자들(Zealots)은 로마의 지배에 대항해 66년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73년까지 계속되었다. 전쟁 중 70년 로마의 총사령관 티투스(Titus Flavius Vespasianus)는 예루살렘을 함락하여 ‘통곡의 벽’만 남기고 두 번째 성전을 전부 파괴했다. 유대인들은 사해()를 내려다보는 마사다 언덕에서 로마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웠으나 960명이 자결하는 비극적 종말을 맞았다.

로마의 지배가 그렇게 억압적이었다고 할 수 없었지만 132년 바르 코크바(Bar Kochba)는 20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제2차 유대인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에서 로마를 축출했다. 이후 135년 로마군이 다시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바르 코크바의 반란은 종식되었다. 이 반란 이후 로마인들은 이 골칫덩어리 민족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전에 바빌로니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부분의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서 유배시켰다. 이로써 팔레스타인/유대(Palestine/Judea)는 자율성을 상실하고 시리아 팔레스티나(Syria Palestina)라는 로마 식민지가 되었다. 일부 유대인들은 갈릴리 호반의 도시 티베리아(Tiberias, 헤브라이어로는 Tverya)와 사페드(Safed)로 이주해 살았지만 대다수는 유럽 등지에서 1900년 동안의 이산(, the Diaspora)을 겪어야 했다.

로마인들은 유대인의 역사적 명칭마저 말살시켰다. 하드리안 황제(Hadrian, Publius Aelius Hadrianus: 117~138)는 예루살렘을 로마의 식민지로 바꾸고 예루살렘을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개명했다. 그는 성전이 있었던 곳에 유피테르(Iuppiter 또는 Iupiter) 신전을 세우고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지했다. 이전에 유대인들이 가나안(Canaan) 또는 유대 사마리아(Judea and Samaria)로 불렀던 이름은 사라지고, 나라의 이름은 오랫동안 잊혀 있던 필리스틴(Philistines)이라는 이름을 따서 ‘필리스틴인이 살던 땅’이라는 뜻의 팔레스타인(Palestine)으로 바뀌었다.

이 모든 것은 이 지역을 지배하던 로마가 서기 2세기 후 두 번의 유대인 민족반란을 겪은 후 유대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시도된 것이었다. 이러한 억압적인 조치로 인해 유대국가 독립의 희망은 사라지게 되었으나 일부 유대 공동체는 해안평야와 갈릴리를 중심으로 계속 유지되었다. 이때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예루살렘 등지에는 유대인이 거의 살지 않았다.

각주

  • 1)

    중국이 대하(大夏)라고 불렀던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힌두 쿠시(Hindu Kush)와 옥서스(Oxus) 강 사이에 있다.

  • 2)

    야곱이 얍복(Jabbok)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이긴 후에 새로 쓰게 된 이름이다(창세기 32: 28).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으로, 야곱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민족을 일컫는 이름이 되었다(출애굽기 12: 37, 민수기 1: 45).

  • 3)

    시리아 군대가 권력 투쟁의 문제로 귀국을 해야 했기 때문에 종교적 자유를 허용한다는 조건으로 마카비에게 화해를 제의했으며, 경건한 하시딤은 종교 자유의 획득에 만족하고 전쟁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정치적인 자유(독립)가 목표였던 마카비는 이에 대해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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