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


1. 이상민 목사 좋은 인간관계 빌립보서 2:19-30
2. 류철량 목사 좋은 관계 전도서 4:9-12
3. 박정근 목사 바람직한 성도의 관계 데살로니가전서 2:17-3:8
4. 윤성호 목사 인간관계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3:1-7
5. 김홍도 목사 성공적인 대인관계 누가복음 6:27-31



좋은 인간관계


빌립보서2:19-30
이상민 목사(대구서문교회)

바울은 지금 모든 것이 부자유스러운 감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에바브로디도를 통하여 빌립보 교회의 신앙적인 어려움에 대해서 전해 듣고 바울은 마음이 많이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래서 훌륭한 목회자인 디모데를 빌립보교회로 보내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바브로디도가 로마에 와서 심한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빌립보 교회가 걱정하며 기도하자, 완쾌된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돌려보내어 기쁨을 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은 바울의 빌립 보교회를 향한 아름다운 배려와 깊은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차 전도 여행 때 개종하였으며 2차 전도 여행 때 할례를 주었던 믿음의 아들 ꡐ디모데ꡑ는 ꡐ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ꡑ라 표현하고 있으며(20절), 하나님과 사도 바울과 뜻을 같이 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열정적인 사람이라 하여도 서로 뜻이 맞지 않으면 주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21절에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일만을 구하고 주 예수께 헌신하여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22절에서는 디모데는 연단 받은 사람이며 준비된 사람이며 좋은 지도자라고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한편 디모데가 목회자라면 에바브로디오는 평신도 지도자로 한 때는 개 같은 이방인이었지만, 복음 안에서 만나 바울과 영적인 삶을 함께 나눈 사람이었습니다.
25절에 보면 에바브로디도를 형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이런 에바브로디도와 같이 헌신된 일꾼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진정으로 사랑했으며 빌립보교회에 기쁨을 주기 위해 에바브로디도를 보내기로 결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울이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빌립보교회를 자기보다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가 지금 어렵고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은 나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했던 것입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를 위함이라고 고백하며 이것이 바울의 교회 사랑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과 믿음의 아들 디모데, 그리고 평신도 사역자 에바브로디도의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누리며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섬기는 모습 배우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섬기며 헌신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약
바울과 디모데, 그리고 에바브라디도는 교역자, 그리고 평신도 지도자라로서 서로 섬기며 사랑하며 헌신하는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누렸습니다. 우리도 주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품어주는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누립시다.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3년 8월 24일





좋은 관계


전도서 4:9-12
류철량 목사(부천동광교회)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발명한 사람이 그 공로로 과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시상식이 열리는 식장으로 가는 도중 점심을 먹기 위해 휴게소에 들렸습니다. 옆의 테이블에 한 가족으로 보이는 네 사람이 둘러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식사를 하면서 한마디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각자 이어폰을 끼고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만 듣는 것입니다.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사람은 자신의 발명품에 대해서 심각한 회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만든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가장 가까운 가족 간의 대화를 빼앗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계문명은 우리에게 편안함과 즐거움을 제공하고 사람과 사람사이에 담을 쌓게 합니다. 컴퓨터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은 현대인들의 큰 병통입니다. 도시인의 매너는 외롭고 쓸쓸함으로 착각할 정도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살인 강도 같은 범죄자의 태반이 무관심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외로운 사람 지쳐 있는 그 사람과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넜더라면 그 사람이 범죄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는 관계에 의해 엮어져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사회의 기초관계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여자와 남자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활 없는 화살은 아무리 날카로워도 쓸모 없습니다. 화살 없는 활은 아무리 보기 좋아도 소용없습니다.
사람이 좋은 사람과 만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그 사람과 좋은 관계를 가지느냐 입니다. 나와 만난 사람이 더 좋아진다면 이보다 더 좋은 만남은 없습니다. 성경은 좋은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쉽게 번역된 성경을 읽겠습니다.

9절/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은 것은,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더 큰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을 때, 여러 가지 골고루 먹게 됩니다. 한 가지만 먹어도 될 만큼 모든 영양소를 가진 식품은 쉽지 않습니다. 두부만 먹지말고 미역과 함께 먹으면 두부에 부족한 것을 미역으로 보충합니다. 국수를 먹을 때 콩국에 섞어 먹으면 더 좋습니다. 된장에는 부추가 좋고 딸기에는 우유가 좋습니다. 흔히 말하는 음식 궁합이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근과 오이는 같이 먹는 것이 아닙니다. 커피와 크림 장어와 복숭아는 음식 궁합이 안 맞습니다. 당근과 오이를 같이 먹는 것보다는 오이만 먹든지 당근만 먹어야 합니다. 커피 마셨으면 된 것을 크림까지 먹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좋은 관계를 가질 때에 유익하지만 두 사람이 좋은 관계를 갖지 못하면 혼자만도 못합니다.
미국 어떤 양로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거린 이라는 흑인 노인은 4년 전에 중풍으로 쓰러져 오른쪽 몸을 못쓰는 할머니입니다. 루스라는 유대인 노인은 5년 전에 중풍으로 쓰러져 왼쪽을 못쓰는 할머니입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평생을 피아노를 가르쳐 온 것입니다. 둘 다 아주 잘 웃고 유머가 있는 노인들입니다. 두 사람은 양로원에 들어와서 알게 된 사이였습니다. 하루는 흑인 할머니가 피아노 앞에 앉아 그의 검은 왼손으로 피아노의 낮은 소리나는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유대인 할머니가 휠체어를 타고 피아노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른손으로 오른 쪽의 높은 소리 건반을 같이 쳐주니까 피아노의 화음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마음을 맞추어 쇼팽의 왈츠를 쳤습니다. 혼자서 할 수 없는 피아노 연주가 두 사람이 힘을 합하니 가능해졌습니다. 흑인은 왼손으로 백인은 오른손으로 피아노를 치는 것입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손은 옆에 있는 할머니 무릎에 얹혀 있습니다. 양로원 노인들이 보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두들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드디어 두 사람은 다른 양로원에 다니며 피아노를 연주하여 노인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었습니다. 상이군인 휴양소 병원을 방문했고, TV쇼에도 출연하여 영감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언제나 좋은 관계로 힘을 합해서 큰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10절/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일으켜 준다 그렇지만 넘어져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는 사람은 불쌍하다.

아주 친절한 사이인 친구 두 사람이 깊은 산으로 등산을 갔습니다. 그들은 가면서 둘이 같이 가게 돼서 다행이라고 말했습니다. 위급한 일이 생기면 서로 도울 수 있어서 좋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곰 한 마리가 나타나서 떡 버티고 서 있는 것입니다. 한 친구가 얼른 등산화를 벗고 가벼운 운동화로 바꿔 신었습니다. 옆에 있는 친구가 "여보게 운동화를 신는다고 곰보다 빨리 달아날 수는 없지 않나, 우리는 힘을 합해 묘책을 세워보세"라고 하니 신발을 신고 난 친구는 대답합니다. "내가 저 곰보다 빨리 달아나지는 못해도 자네만 떼어놓고 뛰면 되는 거야" 하더랍니다. 자기만 살고 친구는 어찌되든지 알 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사람은 친구가 이닙니다. 잘못 사귄 것입니다.
유대인의 속담에 친구가 없는 사람은 오른 손을 잃은 왼손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좋은 친구였습니다.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할 때마다 정보를 주고 피신시켰습니다. 요나단이 없었다면 다윗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욥에게도 좋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가 모든 재산을 잃고 어려울 때 친구 친척들이 찾아와 위로해주고 돈과 금고리를 선물로 주었습니다(욥41:11). 그것을 밑천으로 재기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11절/ 둘이 함께 누우면 따뜻해진다 하지만 혼자라면 어떻게 따뜻해 질 수 있겠는가

함께 눕는 사람은 부부입니다. 부부 사이는 사랑이 매개물이요 부부관계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서로가 자기를 내어주고 상대방을 용납하며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여기에 참된 관계가 성립됩니다. 이것을 사랑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팔레스틴 지방의 기후는 한 여름이라도 새벽이 되면 추워요. 여행 중에 길가에서 노숙하게 되면 동행자와 서로 끌어안고 잡니다. 체온으로 서로를 따뜻하게 해줍니다.
부부처럼 가까운 인간관계는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부부처럼 부지불식간에 상처를 주는 사이도 없습니다. 고슴도치가 겨울을 지날 때는 서로의 체온을 주고받으며 삽니다. 가시가 상대를 찌르지 않도록 조심조심 상대와 살을 맞대고 끌어안습니다. 고슴도치도 상처를 주지 않는데... 사람은 가시도 없는데 상처를 주면 되겠습니까? 상처를 주지 마오 영원히!
고부 관계가 문제입니다. 며느리가 생선을 굽는데 뒤집지 않아서 타는 냄새가 납니다. 시어머니가 마늘을 까면서 "얘야 생선 뒤집어라 탄내 난다" 며느리가 "내버려두세요 뜨거우면 제가 뒤집겠죠" 그 집은 고부간의 갈등이 좀 심했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참 좋은 고부 관계의 모델입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지극히 받들어 섬겼고, 시어머니는 젊은 며느리의 행복을 계획했습니다. 쓸데없는 자존심 같은 것은 버리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힘쓰십시다. 따뜻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면 얼마나 불편하고 살기가 힘듭니까?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

12절/ 혼자서는 원수에게 패하더라도 둘이라면 능히 방어할 수 있다 세 겹으로 꼰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 법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혼자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화장실에서 큰 일을 보고 났는데 네 일은 네가 처리하라면서 손이 팔장 끼고 있다면 어찌합니까? 손이 이를 닦아주지 않으면 이는 다 썩을 것입니다. 몸의 지체 중 도움 없이 존재하며 제 기능을 다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외톨이는 넘어져도 일으켜 줄자가 없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3)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친구와 함께 갔더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혼자서 외딴길을 걷다보니 강도의 표적이 된 것입니다. 그래도 참으로 다행한 것은 지나가던 사람 중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보고 도와 주어서 살아 날 수 있었습니다.
달밤에 기러기가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 나라를 향해 가는 철새인 기러기는 언제나 V자형으로 날아갑니다. 기러기가 V자형으로 날아가면 앞에 날고 있는 기리기의 날개 바람이 뒤에 가는 기러기에게 위로 뜨는 부력을 제공해 줍니다. 서로 위로 뜨게 해주면 먼 나라까지 갈 수 있습니다. 혼자서 날아가는 것보다 V자형으로 날아가면 71%를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공하게 되는 것은 무엇을 얼마나 아느냐 보다 누구를 얼마나 아느냐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지식보다 중요한 것이 사람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그분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영원한 운명이 좌우됩니다. 그분을 모르고 그분과 상관없이 사는 것은 결국 천국과 상관없는 운명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시면서 가지가 나무와 생명적 관계를 가져야 살고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과실을 많이 맺습니다. 가지와 나무의 좋은 관계란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께 붙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왜냐? 주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만이 모든 좋은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 참된 평안과 기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비유합니다. 신랑 신부는 한 몸으로 같이 살아가는 사이를 말합니다. 부부는 오래 참고 끝까지 참아야 끝까지 살 수 있는 관계입니다. 불만스런 일이 없지 않아요. 성나는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고전 13:4,5) 라고 했습니다.
온유하다는 말은 친절하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친절하면서 남편에게는 아내에게는 불친절하면 안됩니다. 힘든 일을 했으면 수고했다고 말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남자에게는 여우처럼 웃으면서 자기 남편에게는 왜 곰 노릇하나 다른 여자에게는 신사처럼 대하면서 자기 아내에게는 볼멘소리해도 됩니까?

생명적 관계는 서로 희망과 용기를 주고받은 관계입니다. 기쁨을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사랑을 교환하는 사이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피로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피로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십니다. 하나님과 하나되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게 하십니다. 하나와 하나가 합하여 하나되면 하나 하나에서 나오는 둘의 힘보다 세배 네 배로 힘이 더 크게 발생합니다. 이것이 힘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주의 피를 받아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교회와의 관계가 잘 되고 사람과의 관계가 잘되어 자연과의 관계, 즉 물질과의 관계까지 잘되시기 바랍니다. 좋은 관계로 좋은 일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2년 6월 30일





바람직한 성도의 관계


데살로니가전서 2:17-3:8
박정근 목사(영안교회)

미국에 상당히 유명한 공원이 하나 있습니다. 레드 우드 스테이트 파크(Red Wood State Park)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붉은 나무가 있는 도립 공원" 정도가 되겠습니다. 우리나라도 국립공원, 도립공원이 있는데 그 차이를 아시죠? 국립공원은 무조건 좋은 곳입니다. 주왕산 국립공원, 설악산 국립공원 등 이런 곳은 다 국립공원입니다. 그리고 도립 공원이 있어요. 조금 격이 낮은 곳이죠. 도립공원이지만 이곳은 다른 곳보다도 큰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데 다 붉은 색이에요. 그 나무 이름이 '레드 우드'라고 해서 '레드 우드 스테이트 파크 ' 이렇게 정했습니다.

이 공원이 사람들의 많은 방문을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나무가 붉은 색깔을 띠기도 했지만 굉장히 크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로 큰가? 아주 큰 나무에 시범적으로 그 나무 둥치에 터널을 뚫어 놨는데 2대의 자동차가 왔다갔다합니다. 2차선 도로가 나 있어요. 이게 나무예요. 어느 정도 큰지 상상이 가십니까? 제일 큰 나무는 장정 20명이 손을 잡고 둘러서야 그 아름드리를 겨우 두를 만큼 큽니다. 키도 얼마나 큰지, 밑에서 보면 그 끝을 잘 볼 수가 없어요. 이런 나무들이 우거져 있으니까 사람들이 구경할 만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아이들을 데리고 그 공원에 가 봤어요. 얼마나 굵고 높은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지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학자들은, 이렇게 굵고 큰 나무니까 그 뿌리가 얼마나 깊이 들어갔을지 궁금해서 그 뿌리를 파헤쳐 보기 시작했습니다. 보통은 나무의 높이만큼 뿌리가 깊이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레드우드는 뿌리가 전혀 깊이 내려지지가 않았어요. 깊지도 않은데 어떻게 이 큰 덩치를 유지할 수가 있을까? 사람들이 계속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큰 덩치를 깊지 않은 뿌리로 감당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레드우드 나무의 뿌리는 서로 옆의 나무와 굳건하게 연결되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옆의 나무와 서로 뿌리가 연결되어 있으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서 그 큰 덩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저는 그 공원에서 가끔 쓰러져 있는 레드우드 나무를 보았습니다. 쓰러져 있는 것은 반드시 홀로 서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혼자 서 있으면 뿌리가 깊게 들어가지 못하는 까닭에, 어느 정도 자라면 덩치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다고 공원 안내자들이 저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에 사람들이 별명을 붙이기를 '더불어 사는 나무' '혼자서는 살수 없는 나무' 라고 붙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 역시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시고 우리를 만드실 때, 동역자들을 만들어 주셨어요. 같이 살도록 만들어 주셨어요. 우리는 같이, 더불어 살아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싫든 좋든 우리 성도들은 같이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단 두 기관을 만드셨는데, 하나는 가정이요, 또 하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 세상에 유일하게 만드신 이 두 기관을 하나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가정을 무엇에 비유해 주었습니까?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엡 5:31)

부부는 두 사람이지만, 각각의 개체가 아니라 한 몸이라고 가르쳐 주신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은 교회를 이 땅에 만드시고 몸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교회라고 하는 곳은 더불어 사는 곳입니다. 인간은 같이 사는 존재라는 거예요. 부부가 따로 다른 마음을 가지고 살면, 부부이긴 하지만 그 부부는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어요. 자랄 수가 없고, 성숙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축복과 행복을 누릴 수도 없어요. 왜? 한 몸이 따로따로 사니까요. 여러분, 이런 몸을 생각해 봤어요? 눈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그런데 이 눈이 날마다 발에게 "아이고, 등신! 매일 발 고린내 나고!" 그래서 발이 살짝 가까이 오면 "야야 가까이 오지마! 저리 가!" 이런 몸을 상상해 보셨어요? 이런 몸은 고통받는 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신기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오늘날과 같이 과학이 발달된 때에 무엇 하러 이 설날에 고생하며 이렇게들 많이 오셨습니까? 저는 오늘 반쯤 자리가 빌 줄 알았는데 꽉 찼어요. 인터넷으로 예배드릴 수 있잖아요. 컴퓨터만 켜 보세요. 저는 앉아서 서울에 있는 목사님의 설교를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목사님 설교를 들을 수 있어요. 여러분, 아십니까? 여러분이 멍하게 앉아 있는 그 표정이 독일도 가고, 미국도 같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인터넷 생방송, 생중계가 되어 있어요. 어떤 분이 저보고 왜 이름표를 안 다냐고 그래요.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어요. "목사님, 그 이름표가 교회에는 참 좋지만 세계 사람들이 다 보는데 좀 이상합디다. 떼어 주세요" 제 설교를 미국에서 보고 감사 편지가 와요. 독일에서 제 설교를 보고 편지가 와요. 앉아서 모든 설교와 예배를 드릴 수 있어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만드셨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 혼자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없기 때문이에요. 혼자서는 언젠가 반드시 쓰러질 때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신 거예요.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서 우리가 한 몸같이 함께 해야만 우리의 신앙이 자라나고, 우리의 믿음이 성숙할 것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에 나오는 많은 성도들이 이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혼자서 열심히 성경 봅니다. 그리고 혼자 예배도 드립니다. 혼자 테이프를 통해 말씀도 듣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왔다갔다합니다. 1년, 2년이 지나도 옆의 사람과 전혀 뿌리가 얽히지 않은, 관계를 맺지 않은 성도들이 오늘 영안 교회에도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떤지 아십니까? 혼자 있는 레드우드 나무가 쓰러지듯이, 그는 언젠가 큰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비전과 주님의 비전에 동역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바람직한 성도는 어떤 성도인가? 오늘 데살로니가 2장 후반 절에서 3장 전체에 걸쳐서 하나님은, 이 중요한 이슈인 성도와의 관계, 성도간의 교제에 대해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옆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신앙생활 해야 하는가를 자세히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다른 교회말고 이 영안 교회에 나오셔서 누군가와 끈끈하게 뿌리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대답해 보십시오. 혹시 피상적인 관계는 아닌가요? 어릴 때부터 10년, 20년 신앙생활 해 와서 서로 알기는 잘 압니다. 집안끼리도 알고 자녀들도 잘 압니다. 그러나 정말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몇 분이나 계시나요? 오늘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한 지체와 한 몸의 지체로서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옆 사람과 신앙 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가를 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이 굳건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풍랑과 이 세상의 어려움을 능히 헤쳐 나가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며 천성을 향해 순례의 길을 성공적으로 떠나기 위해서,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이 있는데, 옆의 성도와 이러이러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하나님은 설명해 주십니다. 먼저 우리가 맺어야 할 관계를 하나님은 이렇게 정의 하셨습니다. 서로 위로하는 관계를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1. 서로 위로하는 관계를 가지자

2절을 보십시오.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7절을 보세요.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사도 바울과의 관계는 어떠한 관계였는가? 어떻게 이 교회가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소문난 교회가 되고 세계의 모델이 되는 교회가 되었는가? 어떻게 그들의 신앙이 이렇게 급성장할 수 있었는가? 그 비결을 하나님은 이렇게 정의해 주십니다. "그들은 서로 서로를 위로하는 관계로 뭉쳐 있었다". 우리는 왜 부르심을 받았는가? 위로하기 위해서 우리는 같은 영안 교회에 부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적인 의미의 위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사람을 돕기 위해 옆에 서 있는 것입니다. 공간적으로 서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옆에 붙어 서서 그 사람이 어려울 때 도와주는 거예요. 여러분, 이 세상에 위로가 필요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인생은 내리막 길이 있고 고갯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하고 심지가 굳은 사람일지라도, 때로 낙심과 좌절의 날이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다 위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누구나 위로가 필요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2장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해가 갑니다. 사도 바울이 갓 태어난 새 신자를 위로한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7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는 놀라운 말씀이 있어요. 누구에게 위로를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까? '너희에게' 너희가 누구예요? 1년도 안 된 햇병아리 새 신자. 예수를 안 지 1년도 안 된 데살로니가 교인들로부터, 그 대사도(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도요, 그의 손수건만 갖다 대어도 병자가 낫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졌던, 삼청천에 가서 천국을 구경했던) 바울이 위로를 받았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라서 위로가 필요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저는 위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까? 아니에요. 때때로 이유도 없는 낙심이 저를 찾아와요. '월간 목회'라는 유명한 잡지에서 지난주에 저를 인터뷰하러 왔어요. 저는 부산에서 사람을 보낼 줄 알았더니, 서울에서 큰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이 월요일에 친히 오셨어요. 다음다음 호에 아마 제 기사가 나갈 겁니다. 그 분이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제가 '한국의 10대 설교가'라는 책에 나오는데, 그 책에 대해 얘기하면서 "목사님은 설교를 잘하는데 혹시 설교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어요. 제가 "있다"라고 했어요. "많다"고 했어요. 믿어지지 않겠지만, 저는 때로 설교에 대해서 열등감을 느껴요. 사람들은 저를 칭찬할지 모르지만 저는 제 테이프를 듣지 못해요. '내가 설교를 저렇게 밖에 못하는가?'라는 생각 때문이에요. 그리고 설교를 잘 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많은 열등감을 느낍니다. 저의 이런 얘기를 듣고 그 인터뷰하는 목사님이 "고맙습니다. 솔직한 말씀을 해 주셔서.. 이 기사 나가면 목사님들이 매우 좋아 하시겠네요"

여러분, 누구라서 위로가 필요 없겠습니까? 우리 모두 다 나약한 존재예요.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존경할지 몰라도, 부러워할지 몰라도, 우리 마음 안에는 다 약함이 있어요. 나의 못남을 나 자신은 알고 있어요. 우리 모두 위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를 만드셨고, 우리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너희가 너희의 신앙이 자라나기를 원하느냐? 그리스도의 몸으로 다 같이 성숙하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서로 옆에 있는 자를 먼저 위로해 주어라. Comfort! 위로하라!"

참으로 건전한 관계는 어떠한 관계인가? 서로 서로 위로하는 관계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위로하고, 남편이 아내를 위로하고, 자녀가 부모를 위로하고, 부모가 자녀를 위로하는 관계, 슬픔과 좌절과 고통의 때에 옆에 서서 도와주는 관계, 이것이 우리 신자들이 가져야 할 관계라고 하나님은 말씀해 주십니다. 위로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실제로 이 위로와 격려는 경우에 따라서 그 받은 사람에게 엄청난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의 말 한마디가 영혼을 살릴 수 있고, 여러분의 작은 위로 하나가 그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위로는 능력이 있습니다.

옛날에 '진 겟츠'라고 하는 한 청년이, 무디 선생이 세운 시카고에 있는 신학교인 무디 바이블 인스티튜트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에게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어요. 본래 신학교에 가면 설교에 도움이 되니까 글을 많이 쓰게 합니다. 저도 많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숙제를 내면 교수들이 문법도 고쳐주고, 문장도 고쳐주곤 합니다. 진 겟츠라는 학생은 자기 나라말인데도, 특별히 영어를 잘 못썼어요.
우리나라 말을 우리가 다 잘 쓸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숙제를 하면 교수가 기록한 게 더 많아요. 빨간 글씨가 더 많아요. "네가 이래서 목사가 될 수 있겠는가?"하고 꾸짖는 교수도 있었어요. 그래서 진 겟츠는 학교를 그만 둘까도 생각했습니다. 한 학기를 마치고 굉장한 고민에 빠졌어요.

그런데 모든 과정을 지켜본 한 노교수, 헤롤드 가드너라는 교수가 어느 날 진 겟츠를 불렀습니다. 그의 재능을 본 거예요. 그는 비록 서툴지만 그에게 많은 잠재력이 있음을 보고 그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진! 나는 네가 반드시 훌륭한 목사가 될 거라고 믿어! 내가 곧 은퇴하게 될텐데 열심히 공부해서 내 뒤를 이어서 교수가 되거라" 이렇게 그를 위로했어요.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주위의 학생들도 믿지 않았고, 진 겟츠 자신조차도 자기가 교수가 된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노교수, 헤롤드 가드너의 위로 때문에, 4년 동안 엄청난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는 17세에 대학에 들어갔던 사람인데, 4년 과정을 3년 만에 졸업해 버리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무디 바이블 인스티튜트 역사에 없는, 최초의 최연소 교수 즉 23세에 교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진 겟츠 교수가 무디 바이블 인스티튜트에서 공부를 더 하고, 다른 곳에서 더 공부하고, 달라스 신학교에 와서 저의 은사가 되셨어요. 저는 그 은사님을 너무 존경합니다. 그는 달라스 신학교 교수 가운데 책을 많이 쓰신 분 중에 한 분입니다. 얼마나 문장력이 좋은지 그의 책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위로에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는 위로가 아닙니다. 내가 위로할 때 성령 하나님이 내 옆에 서서 도우십니다. 내 말에 능력을 주십니다. 작은 말 한마디가 그의 영혼을 바꾸고, 그의 인생을 통째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위로와 격려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때로 죽음의 늪에서 소생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명령하시는 첫 번째 성도의 관계는 다름 아닌 위로의 관계임을 꼭 명심하십시다. 주님은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얘들아 내가 떠나간다고 실망하지 마라!"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내가 가고 나면 다른 하나님, 제3의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실 것이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너희에게 오실 텐데-" 그리고 그의 이름을 말씀해 주셨어요. 별명이죠. 그의 별명을 "보혜사"라고 하셨어요.

여러분, 보혜사가 무슨 뜻이에요? 저는 신학교를 4년 동안 다녔는데도 이것을 몰랐어요. 보혜사 성령! 몰랐어요. 제가 유학 가서 이 단어를 연구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파라클레토스! '파라'는 '옆에' '같이' 'With' 라는 뜻이에요. '옆에 서서 도와주는 사람'
여러분, 이것이 성령 하나님의 별명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 무엇인 줄 압니까? 우리 옆에 서서 저와 여러분을 위로해 주는 사람이에요. 위로자예요. 그래서 NIV 성경에는 성령하나님, 보혜사를 번역하기를 Comfort! 위로자라고 직접 번역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옆에 서서 위로하고 계시다면, 하나님의 영을 우리 마음속에 받은 저와 여러분도, 다른 사람을 위로해야 할 줄 믿습니다. 위로하십시오! 오늘부터 결심하십시오. "주여! 내가 주일날 한 번 만나 다섯 사람이상 위로하고 돌아가겠나이다! 제가 제 아내를, 제가 제 남편을, 제 자녀를 위로하겠습니다. 정죄하지 않고 그들을 위로하겠습니다. 그를 격려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위로의 관계를 맺어갈 때, 이 교회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교회가 살아 움직여요. 심장이 잘 움직이면 그 혜택을 누가 받습니까? 심장 혼자 받나요? 심장 옆에 있는 폐만 받나요? 아니요. 발가락 마지막에 있는 새끼발가락까지도 받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특별히 발이 굉장히 찬 사람이에요. 우리 집사람이 저의 발을 만지면서 "왜 당신은 이렇게 발이 차요?"해서 제가 정답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보, 내 다리를 봐. 심장에서 다리까지 거리가 멀잖아! 피가 오다가 중간에 다 식어서..."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심장이 튼튼하면 모든 혜택을 몸이 보는 거예요.

여러분이 고통 가운데서 위로하고, 어려울 때도 위로하고, 우리 본성은 다 위로받기를 좋아해요. 남을 위로하기보다는 누가 나를 위로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의 위로를 기다리지 않고, 교회에 나와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때, 그 혜택이, 그 그리스도의 몸의 건강이 당신에게 옴을 믿으십시오.
우리는 어떤 관계로 이 세상을 살아 나가야 되는가? 위로하는 관계입니다. 두 번째 성도의 바람직한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친밀한 관계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2. 친밀한 관계를 가지자

6절을 보세요.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여기 굉장히 재미있는 말이 두 번 나와요. '간절히 보고자' 계속 나오죠? 2장 17절 보세요.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조금 전엔 '간절히 보고자'였으나, 여기서는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입니다. 그리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너희를 떠난 것은' 여기서 '떠난다'는 단어도 부모가 자식을 떠날 때 쓰는 단어였어요. '어느 부모가 자식을 잊어버리고 떠나겠느냐! 어느 부모가 여행을 가서 자식과 육체적으로 헤어져 있다고 해서, 그 자식을 마음에서부터 잊어버리겠느냐! 우리의 떠남은 완전한 이별이 아니었다. 나는 너희를 떠나고서도 부모가 자식을 남겨둠과 같이 너희를 그리워했노라! 그래서 내가 간절히 너희를 보고자 했다. 그래서 내가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낸 것이다.'라는 말씀이에요.

3장 1절을 보세요.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참다 못하여' 아덴에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내 주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들을 얼마나 그리워했던지. 이 말씀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사도행전 17장부터 제 2차 전도 여행을 읽어보시면, 사도 바울이 아덴에 도착합니다. 이미 제가 설명한 대로 아덴은 굉장한 도시였어요. 사도 바울은 기대가 너무 컸어요. 왜냐하면 그 아덴에는 소크라테스가 살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로마와 세계 철학의 본거지가 바로 이 작은 수도 아덴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을 좋아했고, 철학을 공부했던 사도 바울이 그 아덴에 들어갔을 때, 가슴이 두근거렸을 거예요. '이 아덴을 전도할 수 있다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을 거야! 아덴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아덴에 들어가 철학적인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게 좋지 않았어요. 그는 그곳에서 힘든 싸움을 했습니다. 다른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돌아왔는데, 아덴은 그렇지 못했어요. 반응이 없었어요. 지식층이 반응을 하지 않는 거예요. 그가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어려울 때 옆에 서 있는 동역자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 디모데를, 그 어려운 순간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하여 떠나보내 주었다고 얘기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와 바울의 관계는 이러했어요. 보고 싶어 못 사는 관계요, 그를 생각해서 나를 희생하는 관계였어요. 그 단어를 3장1절에 우리가 읽은 말씀으로 표현해 준 것입니다. '참다 못하여' 3장 5절에 보세요.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제가 '참다 못하여'라는 단어를 연구해보고 참 재미있는 것을 느꼈어요. 이 단어는, 원래 물을 담는 그릇 같은 것을 의미했어요. 딱딱한 그릇이 아니고 비닐 봉지 같은 것 말입니다. 물을 가득 넣으면 물 풍선 같은데, 풍선에 물을 넣으면 점점 커집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어느 순간 물을 조금 더 넣으면 퍽 터져 버려요. 이것이 '참다 못하여'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감정을 이렇게 표현해 줍니다. 내가 그들을 보고 싶어서 참았어요. 참았어요. 참았어요. 그런데 그 감정이 어느 순간 참다 못하여 내가 디모데를 보냈다는 거예요. 그렇게 그들을 그리워하고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다고 얘기합니다.

저는 '참다 못하여'라는 이 단어, 헬라어 원어의 단어를 직접 경험한 사람입니다. 한국에도 요즘 뷔페 식당이 많아졌죠. 거기에 가면 아이스크림 기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 기계에 그릇을 받치고 레버를 내리면 아이스크림이 쫘악 나옵니다. 저는 그것을 볼 때마다 생각해요. '색깔이 하야니까 망정이지 정말 그것과 닮았다' 레버를 잠그면 뚝 그칩니다. 그 기계가 미국에도 15년 전쯤에는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미국의 기계는 조금 까다로웠는데, 내릴 때는 그냥 내리면 아이스크림이 나옵니다. 그런데 잠글 때는 오른쪽으로 밀면서 소리가 "탈칵" 하고 나야 그치는 것이었어요. 목사님 열 몇 분이 관광을 오셨어요. 제가 안내를 하게 되어서 뷔페 식당에 모시고 갔습니다. 식사가 끝나 갈 즈음에 저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요. 한국말로 도와 달라고 소리쳐서 그 쪽을 보니까, 한 목사님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려고 기계를 작동했는데 조그만 아이스크림 그릇이 금방 다 찼어요. 오른쪽으로 밀어서 올려야 되는데 그냥 올리니까 안 올라가죠. 이미 아이스크림은 그릇 위에 흘러 넘치고 있었어요. 이 목사님이 소리를 지르면서 손을 갖다 대고 "도와 달라!"고 하고 있었어요. 저는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어요.

어느 날, 데살로니가 설교 공부를 하다가 그 장면이 생각나더라고요. 이게 '참다 못하여'예요. 내 감정이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는 것이죠. 여러분, 성도간의 관계가 이러해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관계가 형성되어야 비로소 우리의 신앙이 올바로 성장할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5년, 10년을 교회에 나와도 교회 안에 전혀 보고 싶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이사를 가도 영안 교회가 생각나지 않아요. 여러분 그렇게 신앙생활 하시면 그 결과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은 병들 수밖에 없어요.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에서 가끔 이사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미국에 이사 가신 강정원 집사님을 비롯해서 서울로 이사 가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분들이 가끔 저에게 편지와 안부 전화를 주면서 "목사님, 그리워 죽겠어요. 영안 교회 교인들이 그립고 예배가 그리워요. 목사님, 보고 싶어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런 관계가 형성될 때, 우리의 신앙이 성장한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어떻게 이런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까요? 예배만 드리고 간다고 될까요? 5년, 10년을 예배만 드리고 갔다왔다 해 보십시오. 대예배에 딱 한 번 나와주는 교인이 있어요. 나와 주는 교인이에요. 왔다가 그냥 갑니다. 다음 달도 오셨다가 가십니다. 5년 후에도 오셨다 가시고, 그 다음 10년 후에 보면 왔다가 안 보입니다. 혼자 쓰러지는 거예요. 우리 교회에 이렇게 인원이 많지만, 저는 마음속으로 정교인, 준교인, 비교인을 만들어 놓았어요. 제 마음 안에 있는 정교인이 누군 줄 압니까? 소그룹에 소속되어 있는 교인입니다. 우리 교회가 40개의 목장으로 출발해서, 90개의 목장으로 자랐습니다. 12개의 위원회가 있고, 20여 개의 남녀 선교회가 있습니다. 60여 개의 팀이 있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거예요. 목장에 소속되든, 선교회에 소속되든, 팀에 소속되든, 어디에 소속되든, 소그룹에 소속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그 소그룹의 몇 사람을 친밀하게 보고 싶어하고 사랑하라는 거예요. 만나서 일 주일에 한 번씩 밥을 먹으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 땅에 있는 우리의 모든 관계는 일시적인 관계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일시적이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도 일시적이에요. 천국에 가서도 계속 이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단 하나의 영원한 관계를 말씀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의 관계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것은 굉장한 거예요. 오늘날 성도들이 "교회론"을 몰라요.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라요. 모든 신앙의 축복이, 여러분의 행복이 교회에서 나옵니다. 영적으로 이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소그룹 가운데, 여러분 지체 가운데 몇 분과 연결되어 있을 때, 레드우드 나무 뿌리가 서로 얽혀 있듯이, 단단히 연결되어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은 하늘을 향해 올라가듯이 자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아무리 자라나도 그 뿌리가 튼튼하기에 견딜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부부간의 관계를 이렇게 만드십시오. 성도간의 관계를 친밀하게 만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2장 19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훗날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서 다 심판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하나님 앞에 영광과 기쁨과 면류관이 무엇인가? 하나님, 저 세상에 있을 때 100억 벌었습니다. 통장이냐? 제가 금배지 달았습니다. 국회의원입니다.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믿으십시오.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면류관과 기쁨과 영광은, 성도와 성도간의 관계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해 주셨어요.
"너희가 이 소자 한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옆의 성도와의 관계에서, 그가 고난 당할 때 위로하고, 그가 낙심할 때 그를 일으켜 세우고, 그가 눈물 흘릴 때 손수건을 꺼내 그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자! 훗날 하나님께서 심판대 앞에서 이렇게 물으실 거예요. "너 어디서 신앙생활 했니?" "예. 영안 교회에서 했습니다" "성도가 몇 명이나 되니?" "예, 한 천 여명 되는 큰 교회입니다. 아이들도 많고요" "그래? 그러면 그 성도 가운데 너와 붙어 있는 사람, 너와 친밀한 관계를 이룬 사람 (계모임 말고) 신앙으로 끈끈하게 붙어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니?" 내일로 미루지 마시고 오늘, 바로 지금 대답해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척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라갈 바탕이에요. 뿌리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자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성도의 바람직한 관계는 서로를 위로하는 관계요, 밀접하고 긴밀하며 친밀한 관계요, 마지막 세 번째 관계는 서로를 성숙시키는 관계입니다.

3. 서로를 성숙시키는 관계가 되자

4절부터 8절을 제가 다시 한번 읽을 테니까, 잘 보고 의미를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바울과 데살로니가 성도의 관계는 어떤 관계였는지 아세요? 상대가 굳게 서면 나 자신도 사는 관계였어요. 한국 속담에 이런 속담이 있나 하고 찾아봤더니 없더라고요. 그런데 반대되는 속담은 다 있더군요. 완전히 정반대 되는 속담은 '사촌이 땅 사면 배가 아프다'입니다. 이게 반대되는 의미예요. 너희가 굳게 섰은 즉, 이제는 우리가 살리라!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상대가 IMF 인데도 불구하고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래서 십일조를 많이 합니다. 그것이 "내가 이제 살았구나!"입니다. 한 형제가 고통을 당합니다. 그를 위해 중보 기도실에서 열심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살아났어요. "아! 그가 살아났구나! 이제는 내가 살리라!" 이것이 바로 서로를 성숙시키는 관계입니다.

살 뿐 아니라, 그는 9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그리고 나서 기뻐할 뿐만 아니라 감사했고, 감사할 뿐만 아니라 계속 성장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11절부터 13절의 내용입니다. 11절에 무엇을 위해 기도했나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인의 튼튼한 관계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12절에는 데살로니가 교인끼리 서로 사랑할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 결과 13절에서 그들이 믿음 안에 굳게 서기를 위해, 계속해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최근에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 사람의 믿음의 성숙을 위해 간절히 하나님 앞에 간구해 보신 적이 있는가요? 한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해 여러분의 물질의 얼마를 써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지난 한 달 동안 그와 더불어 몇 시간을 보낸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는 서로 믿음을 성숙시켜 주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나로 인해 내 옆의 사람의 믿음이 자라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관계는 무엇인가? 서로를 위로하는 관계요, 친밀한 관계요, 서로의 믿음을 성숙시켜 주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머리로만 안다고 되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의 관계에는 어려움이 있어요. 여러분 알잖아요? 부부간에 그렇게 사랑하며 결혼했는데 왜 어려움이 있을까? 성도간에 한 몸이라 그랬는데 왜 어려움이 있을까? 어떤 교인은 그래요. "목사님, 정말 힘들어요. 막 때려주고 싶어요" "집사님도 때려주고 싶어요? 나는 패주고 싶어요" 저는 꼭 이렇게 위로합니다. 저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그 대답이 2장 18절에 나와요. 보세요.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 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태권도 4단이 막은 게 아닙니다. 사탄! 여러분, 이 사탄이 인격적인 존재임을 믿으십니까? 믿으십시오. 여러분이 사탄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어요. 사탄은 현존하는 존재예요.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일하는 존재예요. 저는 왜 관계가 파괴되는가를 볼 때, 이유를 다 따져 보면 이유가 없을 때가 있어요. 이유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데 관계가 틀어져요. 왜 그래요? 사탄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 의미 없이 한 말인데, 그 말이 상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힌단 말이에요. 왜 그래요? 사탄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사탄이 우리의 관계를 파괴함을 아셔야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사탄은 성도간에,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해요. 성도와 성도간에,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파괴하려고 하는 거예요. 에덴 동산에 와서 그는 부부의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파괴하고,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파괴하고, 아벨과 가인의 관계를 철저히 파괴한 그! 그는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에요? 이 관계는 저절로 형성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교회에 왔다갔다한다고 저절로 형성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해야 합니다. 한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시간을 들여야 되고, 물질을 들여야 돼요. 내 정성을 쏟아야 돼요. 그리고 때로는 욕을 먹어야 합니다. 험한 고갯길을 올라가야 합니다.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사탄의 공격을 물리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교회를 주셨어요. 아멘! 요즈음 우리 교회가 생각보다 많이 소문이 나고 있더라고요. 서울에 있는 사람들도 우리 교회 소문을 듣고, 우리 교단 아닌 장로 교단 사람들도 많이 알아요. 저는 때로 두려울 때가 있어요. 소문만 무성하고 안은 텅 빈 교회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는 아니 되겠다! 어떻게 하면 훌륭한 교회가 될 것인가? 서로 서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관계를 맺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서로를 위로하십시다. 새해에는 친밀하게 서로 붙으십시다. 그리고 서로를 성숙시키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1년 1월 21일





인간관계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3:1-7
윤성호 목사(물가에심기운교회)

사람은 누구나 같이 생활하기 불편한 사람 몇 사람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보다 내 마음을 바꾸는 것이 더 쉽습니다.
우리들이 대인관계에 성공해야 하는 이유는 창세 이래로 대인관계에 성공하지 못하고 인생을 성공으로 이끈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카네기는 실질적으로 강철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카네기는 인간관계가 좋았습니다. 또한 그가 그의 회사의 총책임자로 선택했던 찰스 쉐아브라는 사람 역시 강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당시 하루에 200만원씩을 지불하면서까지 고용을 했습니다.
바로 인간관계가 좋다는 것, 그리고 사람을 잘 다스릴 줄 안다는 그 자체가 바로 큰 자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인간관계에 대해서 잘해도 그만이고 못해도 그만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고기는 물이 아무리 싫어도 물을 떠나서 살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 것같이 생각을 하지만 혼자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인간관계에 성공을 해서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성공을 해야합니다. 인간관계에 실패하면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성공해보고자 하는 것은 무리한 생각입니다.
우리들은 85%가 실력이고, 15%가 인간관계라고 생각을 하지만 실질적으로 카네기 연구소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사람은 15%가 실력이고 나머지 85%가 인간관계라는 것입니다.
실력이 아무리 우수해도 인간관계가 좋지 못한 사람들은 몸은 담은 직장이나 단체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하고, 지금보다 더 괜찮은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 인간관계를 반드시 지금보다 더 한 단계 끌어올려야 됩니다.

대인관계를 지금보다 더 좋게 하려면

첫째, 오래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고전 13:4)

한 기숙사에 두 친구가 생활을 했습니다.
한 사람은 폴이라는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프랭크라는 사람이었습니다.
폴은 금전관계가 아주 안 좋았습니다. 학교생활에서도 그는 좋지 못한 금전관계 때문에 많은 신용을 잃었습니다.
마침내 폴은 프랭크에게까지 돈을 빌려달라고 말했습니다. 결코 적은 액수의 돈이 아니었습니다. 폴이 지금까지 한 행동을 보면 돈을 빌려준다는 것은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랭크는 폴에게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역시 예측대로 폴은 돈을 빌려서 멀리멀리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폴에게 돈을 빌려주고 돌려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번 일을 계기로 폴을 잡아서 혼을 내야한다고 주장을 했지만 폴은 흥분한 그들을 진정을 시켰습니다.
"우리 한번 기다려 봅시다."
15년이 지났습니다. 15년 만에 나타난 폴은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전에 빌렸던 돈의 목록을 가지고 와서 울면서 다 갚았습니다.
그 친구를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준 프랭크는 후에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었습니다.

오래 참는 일에 실패하면 대인관계는 실패합니다.
물론 오래 참음이 무한정 참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라고 하실 때까지 참는 것이 오래 참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만 참아도 될 때가 되었을 때는 일대일로 만나 권면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 18:15)

둘째, 온유해야 합니다.

"사랑은 온유하며…"(고전 13:4)

온유란,

매사에 온유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처칠이 연못에서 물고기 잡는 내기를 했다고 합니다.
히틀러는 권총을 꺼내서 연못에 대고 사격을 했습니다. 히틀러는 한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무솔리니는 직접 연못으로 들어가서 잡아보았지만 역시 한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처칠은 조용히 물을 다 퍼낸 다음 연못에 나뒹구는 물고기들을 주워 담았습니다.
처칠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그 시신이 안장되어 있고, 런던 피커딜리 공원에 그 동상도 서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명예가 보존되어지고 있습니다.
온유한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이 결국 인간관계에 성공합니다.
거칠고 사나운 사람들은 결국 사자나 호랑이처럼 고독하게 혼자 살아가야만 합니다.
명예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줌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지 동물이나 물질이 명예를 얻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온유하지 않은 사람의 명예를 누가 높여주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결코 명예로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잠언 기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잠 22:1)

양보하는 것입니다.

억울하다고해서 법정소송을 하고 변호사를 선임하고 하는 것보다는 억울하더라도 참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때까지 참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명예로운 쪽으로 해결해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삭은 우물을 계속해서 양보함으로써 결국 더 많은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창 26:12-33)
이처럼 온유한 방법은 양보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배가 고파 기차의 식당 칸으로 갔습니다. 종업원을 불렀지만 대답도 하지 않고 즉시 오지도 않고 부른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왔습니다. 아주 불친절한 종업원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종업원에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다. 저 조리실은 더 덥겠습니다. 식사하는 승객들을 위해서 정말 고생이 많습니다."
종업원은 그 말을 듣더니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면서 말했습니다.
"제가 기차 식당 칸에서 종업원을 19년 했습니다. 종업원들 덥다고 위로하는 손님은 19년 만에 처음 만나봅니다. 제가 조리실에 가서 선생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로마서 기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

온유한 것은 결코 승리하는 지름길이지 실패하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온유한 방법을 사용하지 못하고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해왔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셋째, 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고전 13:

'투기하지 말라.'는 말은 남 잘되는 것을 질투하는 감정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투기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닥쳤는데 투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에게 너무 손해를 입히는 생각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었을 때 우리들이 그것을 싫어하고 비판하고 질투하면 그 감정이 잠재의식으로 그대로 전달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잠재의식이 있는데 이 잠재의식은 바로 영입니다. 이 영은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이 전달될 때 그 감정들을 그대로 다 이루어냅니다.
예를 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싫어하고 질투하면 우리의 영은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들이 싫어하는 것을 받아들여서 우리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면 절대 비판이나 투기하지 말고 축복을 하고 내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고 비판적인 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실패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자신의 잠재의식을 잘못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비판하고 투기하는 마음은 결국 그 사람 자체도 멀어지게 됩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실패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언제나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넷째,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우리가 자랑을 하지 말아야할 이유는 우리의 자랑을 듣는 사람들이 절망하기 때문입니다.
자랑만 하는 사람과 가까이 있고 싶어하는 사람 보았습니까?
자랑하는 사람은 결국은 인간관계에 실패합니다. 또한 자랑은 대부분 부풀려지게 되어있습니다.

신문에 개구리 3,000마리를 구한다는 광고가 나왔습니다.
한 논을 가진 주인이 그 신문 광고를 보고 즉시 연락을 했습니다.
"우리 논에 개구리가 한 6,000마리 정도 있습니다. 그러니 트럭을 가지고 오십시오."
전화를 받고 급히 트럭을 몰고 달려온 사람이 그 논에서 잡은 개구리는 모두 3마리였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았더니 이 논 주인은 자신의 논에서 개구리 울음 소리가 굉장히 크게 들리니까 한 6,000마리 정도는 살고 있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펠레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비전도 좋지만 현재 자신의 능력을 바로 평가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사람들은 너무 자기 자신의 현실적 평가를 현재보다 더 높게 평가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잠언 기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창세 이래로 교만하고 낮아지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다섯째, 무례히 행치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고전 13:5)

사람은 자신은 행동이나 언어가 형편이 없어도 언제나 상대는 자신에게 언제까지나 정중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예의 없는 행동으로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중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본능을 넣어 두셨습니다. 만일 인간에게 본능이 없다면 사람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만약 식욕에 대한 본능이 없으면 인간은 영양실조로 죽게되고, 물을 마시고 싶은 본능이 없으면 인간은 갈급해서 죽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강한 본능은 중요하게 여김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에게 비판, 판단, 원망, 불평, 책임 전가, 예의 없이 행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여섯째, 자기의 유익을 먼저 구하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사랑은…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고전 13:5)

자기 자신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사람들은 지금 당장 손해를 보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손해를 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유리한 조건이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런 이기적인 사람을 사람들은 제일 싫어합니다.

링컨이 변호사 개업을 했을 때 스탠튼이라고 하는 사람도 변호사 개업을 했습니다. 스탠튼은 링컨보다 고참이었습니다.
어느날 법정에 같이 서게 되었을 때 스탠튼은 링컨같은 애숭이하고는 같이 일을 하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후에 링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스탠튼을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아니 당신을 그렇게 비방하고 조롱하던 스탠튼을 어떻게 장관으로 임명을 하셨습니까?"
링컨 대통령이 대답했습니다.
"스탠튼이 비록 나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지만 국가적으로 볼 때는 도움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스탠튼을 임명했습니다."
나중에 링컨이 총맞아 죽었을 때 가장 슬프게 울었던 사람이 스탠튼이었습니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 죽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우리 자신에게 조금만 잘못하면 그 사람을 매도하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러한 사고로는 인간관계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실패한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계산합니다. 사람들은 결코 그러한 사람을 원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일곱째, 성내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성내지 아니하며…"(고전 13:5)

사람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기 전에는 절대 남에게 관심 가져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믿어줄 때 그 사람을 위해서 목숨도 바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인정해주지도 않고 관심도 가져주지 않기 때문에 성을 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성을 내면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일본에 유명한 마쓰시다 전기 창업자인 마쓰시다 고노스케라는 분은 쌍갈래 전기 소켓을 발명했습니다. 계속해서 주문이 밀려들고 바쁜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어느날 주문이 밀려 야근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외부에 일이 생긴 마쓰시다는 나가면서 직원들에게 당부했습니다.
"여러분, 반드시 내일 납품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 저녁 수고를 해주십시오."
말을 마친 마쓰시다가 나가자마자 직원들은 일에서 손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 한 직원은 계속해서 일을 했습니다. 계속해서 일을 하던 이 직원은 다른 직원들이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일을 중단하고 앉는 순간 마쓰시다가 갑자기 들어왔습니다.
마쓰시다는 그 직원을 보며 말했습니다.
"아니, 당신마저 일을 안한단 말이야.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다 일을 하지 않아도 당신만은 할 줄 알았는데."
이 직원은 마쓰시다가 자신을 믿어주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 자리에서 통곡을 하고 그때부터 최선을 다해 일을 해서 그 회사의 총책임자까지 되었습니다.

물론 누군가 잘못을 하면 화를 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화를 내서는 그 사람의 단점을 고친다고 하더라도 한가지 밖에는 고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 사람을 믿어주면 그 사람의 여러 가지 단점을 동시에 고칠 수가 있습니다.

주먹구구식으로 장사를 해서 성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관계 또한 주먹구구식으로 해서 성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의 원리에 따라서 인간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자기 비리가 많은 사람들은 감추어진 비리가 많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작은 잘못 하나만 지적을 받아도 쉽게 흥분합니다. 그래서 자기 비리가 많은 사람들은 예의가 없습니다. 자기 이기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결국 대인관계에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보장을 얻은 것이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인간관계 또한 자연히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다고 해서 행동하지도 않고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는 만큼 행동도 똑바로 해야 지금보다 더 성공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왜 똑같이 한평생을 살고 가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고, 존경받는 성공하는 삶을 살지 않고 실패자의 길을 가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제시한 일곱 가지만 원치만 지키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일곱 가지의 원칙을 성실하게 잘 지켜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기쁘시고, 사람들이 봐서도 감동할 수 있고, 나 스스로도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0년 8월 6일





성공적인 대인관계


누가복음 6:27-31
김홍도 목사(금란교회)

사람들이 사회생활이나 직장 생활에서 실패하는 원인은 능력이나 지식이나 기술 부족 때문이 아니라 대인관계가 나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의 통계에 의하면 15%가 능력과 기술의 부족이요 85%는 대인 관계가 나쁘기 때문에 패배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부모 형제와의 관계 속에서 태어나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다 가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1. 누구와 관계를 맺는가가 중요합니다.

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이브는 오직 하나님과만 관계를 맺고 대화하고 교제했어야 하는데 간교한 사탄과 대화하고 교제를 가지다가 마귀의 세뇌를 받고 나니까 마귀의 말이 진짜처럼 보여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금지한 선악과를 따먹고 저주받아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탄의 종교로 둔갑한 잘못된 종교와 신비주의 빠져 멸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참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사상이 바뀌어지고 생애가 바뀌어지고 운명이 바뀌어집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면 받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담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이 막히지 않도록 항상 자신을 살펴 잘못한 것이 있으면 회개하여 주님의 보혈로 정결함을 얻어 깨끗한 심령 상태를 지켜 나가야 합니다.

② 어떤 사람과 교제하느냐가 또 한 중요합니다.
투전꾼과 교제하면 투전꾼 되기가 쉽고 사기꾼과 교제하면 역시 사기꾼이 되기 쉽습니다. 특히 우리 성도들은 마귀의 사람과 교제하면 같이 마귀의 사람이 되어 영육 간에 인생을 망치게 되고 저주받은 인생이 되고 맙니다. 고린도전서 5장 11절에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 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6절에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특히 믿지 않는 사람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
즉 믿는다고 하면서 완연히 영적으로 잘못된 사람들은 아예 사귀지도 말고 대화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속한 사람과 사귀면 결국 마귀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2. 올바른 대인관계는 어떻게?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사회생활이나 직장 생활에서 실패하고 패배자가 되는 것은 대부분이 대인관계가 좋지 않기 때문이지, 능력이나 기술 부족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① 남이 싫어하는 말이나 행동을 삼가야 합니다.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비수를 꽂는 말이나 행동하는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농담으로라도 남에게 상처를 주면 그 사람은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가 기회가 오면 복수를 합니다. 물론 충고할 말이나, 꼭 시정해야 될 것이 있을 때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해 줘야 하겠지만 쓸데없이 남의 마음에 상처 주는 말이나 행동은 삼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다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
이것을
"황금률"(Golden Rule)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이 말씀에
"대접"이란 말이 나오니까 밥 상 차려 놓고 대접하는 것을 생각하기 쉬운데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네게 해주기를 바라는 행동을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서 네가 먼저 그렇게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So in everything do to others what you would have then do to you for this sums up the Law and the prophets) 이런 마음의 자세로 대인 관계를 맺어 나가면 그 사람은 반드시 칭찬 받고 존경받고 신뢰받는 인물이 될 것이며 따라서 승리의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 학자 하이렐(Hilel) 선생님께, 어떤 사람이 묻기를
"내가 한발로서 있는 동안에 율법의 전부를 요약해서 설명해 주십시오"했더니
"네 자신에게 싫은 것은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의 전부요 나머지는 해설에 불과하다"라고 했답니다. 공자도
"네 자신이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칭찬 받는 것이 좋으면 남을 먼저 칭찬하고, 남이 나에게 거만한 태도로 대하는 것이 싫으면 내가 남에게 겸손한 태도를 취하고, 남이 나를 용서해 주기를 바라면 내가 먼저 남을 용서하고, 남이 나를 이해해 주기를 바라면 나도 남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는 버릇을 키워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의 입장을 생각하고, 자식은 부모의 입장을 생각하고,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입장과 형편을 생각하고,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입장을 생각하면 웬만한 갈등은 해소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생활에도 성공할 것입니다.
미국 최대의 감리교회 목사인 휴스턴 감리교회의 찰스 알렌(Charles Allen)목사가 성공자들을 연구해 본 결과 다음 다섯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a.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다.
b. 다른 사람을 비평하지 않는다.
c. 이득을 얻겠다는 생각을 버린다.
d.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배운다.
e. 대인 관계의 화평을 이룬다.

나폴레옹(Napoleon Hill)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또 하나의 다른 요인을 보았다. 성공자는 일반적으로 성공자를 칭찬하고 실패자는 성공자들을 비난하는 것을 발견했다."
로마서 12장 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고 했고 히브리서 12장 14절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 도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② 남의 장점을 칭찬하는 생활
누구나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는 법입니다. 장점만 가진 사람도 없고 단점만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지그 지글러(Jigjigler)씨가 100명의 백만 장자들을 조사해 보니까 공통점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70%가 가난한 시골 출신이고, 둘째는 타인의 장점을 보는 눈을 가졌고 칭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한 자가 되려면 타인을 행복하게 해 주라"고 칭찬이 가장 큰 대접이며 대인 관계에서 성공하는 비결입니다. 매사에 부정적인 눈과 비판적인 생각으로 남의 결점과 단점만 파 내 려는 사람을 세상에 그 누구도 좋아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 아무리 일류 대학을 나오고 아이큐가 놓아도 패배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장점이 무엇인가, 칭찬해 줄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서 칭찬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부간에도
"여보! 참 수고 했소"
혹은
"당신, 이런 점은 당신 만 가진 장점이야!"
혹은
"당신이 최고야!"등 그러면 더 잘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또 실제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식들도
"이런 면이 착해, 저런 면이 착해, 이다음에 참 효자, 효녀 될 거로 나는 믿어"
한다든지
"너는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하면 실제로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저놈은 소망이 없어, 저놈 은 별 볼일 없어"하면 실제로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하루에 다섯 번 이상 다른 사람의 장점을 칭찬하는 습관을 가지면 우리의 대인 관계는 놀라울 정도로 원 만해지고 따라서 성공이 다가 올 것입니다. 존슨 씨는(Johnson)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도 한 인간을 심판하시되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신다"고 했습니다.

③ 남의 말을 들어 주도록 하라
상담학에서 제일 중요하고 제일 첫째 되는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남의 말을 들어주라는 것입니다. 피상담자가 문제를 가지고 왔을 때, 조급하게 판단하고 처방을 내리지 말고 가만히 들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경우에 스스로 말을 하다가 스스로 해결을 받고 간다는 것입니다.
남의 지도자가 되는 사람, 대인관계를 좋게 가지려는 사람이 꼭 명심 할 것은 화가 나도, 못되 먹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꾹 참고 들어주는 버릇을 키워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방적으로 기관총 쏘듯이 이야기 하다가 벌떡 일어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 이야기 들어주는 것이 좋으면 나도 남의 얘기를 들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④ 의무 이상의 초월적인 행동
산상 수훈에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십리를 가 주라"는 말씀은 우리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개인 생활에 적용하라는 말씀이지 불신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옷 한 두벌 양보했다고 죽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 사는 집 나주시요"한다고 선뜻 길거리에 나 앉으면서 주라는 것도 아닙니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는 말씀도 누구에게 수모를 당했을 때 한 대 더 맞아 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대하라는 것이지
"더 때려, 더 때려!"하면서 돌려 대라는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북한 인민군이 서울도 쳐들어오는데
"어서 오십시오 서울도 가지고, 부산까지 가지십시오"하라는 뜻은 더욱 아닙니다. 이것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개인 생활 대인 관계에서 적용하라는 말씀입니다.
6.25 사변 때 북한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한 예수 믿는 집사를 붙잡아다가 불볕더위에 무거운 군수품을 지고 가자고 했습니다. 이 집사님이 불평 한마디하지 않고 몇 십리를 걸어가서 지정된 장소에 이르자 인민군이 퉁명스럽게
"내려놔"
그러더랍니다. 그때 이 집사님은 웃으면서
"아직 힘이 있습니다. 더 갈 수 있습니다"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한 십리 더 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인민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젠 됐소. 어서 내려놓으시오"하더니 사실은 지정된 장소에 도착하면 총살시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집사는 의무 이상의 초월적인 사랑과 친절을 베풀었다가 생명이 살아났습니다.

⑤ 주는 생활
대인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기회 있을 때마다 힘닿는 데까지 필요한 자에게 주는 생활을 힘써야 합니다. 주는 사람 싫다는 사람 없습니다. 반면에 누구에게 줄줄 모르고 움켜쥐기만 좋아하고 제 욕심만 채우려는 사람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대할 때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이용해서 내 잇속을 차릴까?"
이것부터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성공하지 못합니다. 순수하게 도와 줄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성공적인 대인관계를 수립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복을 받습니다. 사람에게 주기를 좋아하는 자, 하나님께로 바치기를 좋아하는 자는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 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이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
고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물위 에 식물을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니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한 말씀을 전했습니다만, 하나님께도 드리고 사람에게도 도와 주는 것이 축복의 씨앗을 뿌리는 생활이요 하나님과의 관계도 사람과의 관계도 원만히 맺는 비결입니다. 움켜쥐기만 좋아하는 욕심쟁이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⑥ 겸손한 자세로 사는 것
대체로 교만하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똑똑하고 잘난 줄 아는데 사실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지위가 높아도 낮은 자 같이 지식이 많아도 지식이 없는 자 같이 부요해도 가난한 자 같이 겸손한 태도로 사는 것 이 성공적인 대인관계의 비결입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한 말씀대로 교만한 자, 거만한 자는 패배자가 되고 맙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대는 항상 겸손만을 지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그대보다 높이는 것이 지혜로울 뿐 아니라, 그대보다 다른 사람을 낮출 때 그대는 다치게 됩니다. 영원한 평화는 겸손 속에 있지만 교만한 마음속엔 항상 자만과 질투만 가득 차 있을 뿐입니다."
마태복음 23장 12절에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고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리라"고 했습니다. 성공적인 대인 관계를 가지려면 자기를 낮추고 바보처럼 겸손해야 됩니다. 교만하면 패배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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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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