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사용되는 “영성”이라는 말


근래 15-20년 사이에 한국교회에 가장 유행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는 “영성”일 것입니다. 영성이란 말이 곳곳에 쓰이고 있습니다. 직장영성, 공부영성, 교제영성, 관계영성, 등 온갖 것에 영성이란 말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밥상 영성이란 말이 들릴 정도입니다. 그와 함께 “영성 훈련”이라는 말도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영성훈련원이라는 간판을 붙인 기관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이 영성이란 말, 혹은 영성 훈련이란 말을 들을 때,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평범한 것이 아니라 비범한 것,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것,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신비한 것, 흔한 것과는 다른 어떤 특별한 일을 하는 것,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 보통 사람들이 모르는 어떤 세계를 접촉하는 것, 보통 신자들은 알 수 없는 어떤 신비한 세계를 아는 자로 사는 것 등을 떠올리지 않나요?

 

   영성훈련원이라는 곳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어떤 영성 훈련원이라는 곳에서는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듯이 찾아온 사람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고, 의사가 환자에게 처방을 해주듯이 특정의 처방을 해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당신은 이러이러한 죄가 있으니까 한 달 동안 일주일에 두 번씩 당신 교회에 가서 청소를 하시오. 당신은 영적으로 지금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으니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열다섯 번 읽으시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거기 찾아온 사람의 딸의 이름을 적어주면서 이 딸은 잘못된 남자를 만나고 있으니까 그 사람을 정리하라고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할 때 알고 지내던 어떤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예배는 우리 교회에서 드리고 교회 봉사도 하지만 실질적인 신앙생활의 지도와 인도는 영성훈련원이란 곳에 가서 원장에게 받아 옵니다.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영성 훈련을 시킨다는 명분으로 무엇을 해결 받으려면 헌금을 얼마 하고 또 성경 어디를 몇 번을 쓰라는 처방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평범한 것이 아니라 비범한 것, 보편적인 것이 아닌, 신비한 어떤 것, 이 세상의 삶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어떤 것,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경험 따위를 영성이란 말에 다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할 수 있도록 누군가에게 그런 재능을 개발시켜 주는 것을 영성훈련이라고 하고 있다면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경건

 

   개혁주의에서는 영성이란 단어를 쓰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쓰지 않도록 권합니다. 그러면 제대로 써야 할 단어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경건이라고 합니다. 영성이란 말 자체가 위험하고 잘못 쓰이고 있으므로 제대로 써야 할 말로 바꿔서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건이란 말에 대해서도 오해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경건하다, 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제가 청바지를 입고 강단에 걸터앉아서 설교를 하면 저는 경건할까요, 경건하지 않을까요? 경건하지 않다고 합니다. 목사가 경건치 않게 왜 저래, 라고 할 겁니다. 제가 말을 함부로 하고 비속어를 쓰면 여러분도 금방 저 목사는 경건치 않게 말을 함부로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하다는 것은 외향적인 어떤 모습이나 차림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때는 경건하지 않다고 할 것이 아니라 점잖지 않다고 말해야 합니다. 점잖은가, 점잖지 않은가는 매너나 외모의 문제이지, 경건의 문제는 아닙니다. 경건은 어떤 외형의 모습이거나 태도거나 매거거나 옷차림이거나 걸음걸이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의 외양이나 매너를 가지고 경건하거나 경건하지 않다고 판단을 하곤 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경건은 무엇일까요? 경건이란 그 사람의 종교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특성을 말합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일상 속에서 어떻게 삶으로 실천되고 있는가를 말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경건이라고 합니다. 참된 경건이란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제시해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보서1:27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곧 참된 경건을 일차적으로 무엇과 관련시켜 말씀합니까? “하나님 앞에서”와 관련시킵니다. 경건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윤리적인 수준이나 도덕적인 수준이거나 인간다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관련을 맺고 있는 어떤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참된 경건은 무엇입니까? 흔히 쓰는 말로 바꿔 말하면 참된 영성이란 무엇입니까? 신비한 세계를 지배하고 초월적인 세계에 들락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고 그 관계가 일상의 삶 가운데서 드러나고 일상의 삶에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방향으로 표현됩니다.

 

 경건의 수직적 차원

 

   첫째는 수직적 차원에서 표현되는 경건의 모습입니다. 본문은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과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은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이기 위한 가장 중요한 필수적인 핵심 요소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는 가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경건의 수직적인 방향입니다. 어떤 사람을 두고 경건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확인이 됩니까? 신비한 세계를 들락거리고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여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등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현실 세상에 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바르게 된 것이 아닙니다. 현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참된 경건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 세상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경건해지기를 소원하여 세상을 등지고 현실 도피적인 삶을 사는 것을 동경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경건을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악하니까 여기를 버리거나 도망가거나 피하거나 딴 세상으로 가서 안주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무시하거나 내세를 바라보며 이놈의 세상 죄 많은 세상 여기서 무슨 관심을 갖고 사느냐 주님 나라 사모하며 가야지 하며 내세 지향적으로만 살겠다고 하는 것은 경건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경건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을 책임 있게 살지 않는 무책임입니다. 세속에서 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의 것은 아닌 것이지요. 그러나 절대로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궁에서 삽니다. 그들이 이방 바벨론에 물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 까요? 하루 속히 느부갓네살 왕궁을 빠져나와서 그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다른 곳에 가서 살아야 했을까요? 바벨론의 왕궁 안에 있는 것 자체가 이미 바벨론에 물들어 있는 증거일 수밖에 없는 증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는 바벨론 왕궁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았습니다. 그것이 세상 속에 살면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이 우리의 주인이 되지 않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사람으로 사는 것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라고 알아보게 됩니다. 그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을 사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현실이 바벨론 궁이 되었든지 우상의 세력이 지배하는 사회이든지, 거기에 물들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8:38) 예수님은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에서 살 것인지,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이 아닌 곳에서 살 것인가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그 세상에 물들어서 그들처럼 그렇게 사는 사람이 참으로 경건한 사람입니다.

 

 경건의 수평적 차원

 

   둘째는 수평적 차원에서 표현되는 경건의 모습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아와 과부는 구약시대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서 실천해야 할 자비와 긍휼을 말할 때 언제나 결정적인 기준으로 등장합니다. 고아는 실제로 부모가 없는 아이를 말하기도 하고 과부는 실제로 남편이 없는 여인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생존을 유지할 능력이 없는 사람, 그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내세우면서 “나는 도와주려고 내 주변에는 고아와 과부가 없어, 고아와 과부를 보살피려고 하는데 우리교회에는 없어”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가 돕지 않으면 스스로 생존할 수 없을 만큼 약한 자,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한 상황에 처한 연약한 사람을 돌아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을 돌아보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수준이 높아서이거나 혹은 인간적 동정심이 발동해서가 아닙니다.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수평적으로 다른 연약한 사람들에 대하여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도록 행동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신자라면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모습으로 그 관계가 증거 되는 법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으로 요약되고 상징화 된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사랑해야 합니다.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할까요? 인격이 수양되고 도덕수준이 높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맺은 관계의 반영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이웃을 돕고 똑같이 구제를 해도 외형은 같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하고 교회가 그렇게 할 때와 세상이 그렇게 할 때는 본질이 다릅니다. 근본 동기가 다릅니다. 우리가 신자와 교회로부터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살 때는 내가 남보다 너그러워서도 아니고 내가 남보다 여유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나의 도덕 수준과 인격이 높아서도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나로 하여금 그렇게 살게 해서 그런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것이 참된 경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적 모습은 동일할지라도 하나님과 관계없이 단순히 인간적 동정심이나 선행으로 행하는 것을 놓고 경건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결구 수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수평적으로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것이 참된 경건입니다.

 

 근본적인 문제

 

   오늘날 한국교회는 능멸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욕을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기관과 지도자들이 나서서 여러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교회 세습하지 말자. 재정을 투명하자 운영하자. 헌금을 더 많이 사회에 보내자. 정직하게 살자. 이러한 행동들은 매우 귀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운동들의 근본 의도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에 도덕과 윤리 수준이 이 지경이 되어 이러한 모욕을 받고 있으니 이제 이런 일들을 해서 도덕 수준과 윤리 수준을 높아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도덕 수준이 낮아지고 윤리 수준이 낮아졌으니까 이런 저런 일을 힘써서 하고 이런 저런 비난 받는 일은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수준을 높이고 그래서 이 사회로부터 도덕적 신뢰를 회복하자는 것이라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그런 일을 하는 동기와 목적 설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안팎으로부터 이렇게 비난받고 모욕당하는 이런 상황이 된 근본원인은 도덕 수준이 낮아지고 윤리가 파탄 나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입니다. 우리가 교회 세습을 안 하는 것, 교회 재정 투명하게 운영하는 것, 민주적으로 하는 것, 이런 항목들을 구슬을 꿰듯이 하나씩 갖춰서 목걸이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항복 하나하나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일들이 벌어지게 한 근본적인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덕 재무장 운동으로 갈 일이 아니고 신앙회복운동으로 가야 합니다우리가 신앙을 회복하면 즉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도덕 수준은 높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 수준이 높아지고 윤리 수준이 높아진다고 그것이 자동으로 교회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제대로 믿기 운동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맺고 그 관계를 근거로 살아가는 운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경건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행위와 신앙을 이원화하여 행위들을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신앙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행위들이 무엇과 연관을 맺고 제시되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장에 보면 이스라엘 인구가 급격히 불어나니까 바로 왕이 두려워서 이스라엘 인구를 억제시키려고 합니다. 남자가 태어나면 죽이라는 왕명이 히브리 산파들에게 떨어집니다. 왕명을 어기면 죽습니다. 칼날이 목에까지 와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산파들이 아이를 죽이지 않습니다. 왜 안 죽였습니까? 이 산파들이 도덕 수준이 높아서가 아닙니다. 휴머니스트들이어가가 아닙니다. 생명경외 사상으로 철저하게 무장된 사람들이어서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1장을 자세히 읽어보세요.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죽일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도덕적 수준을 지키기 위해서 안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하나님과 맺은 관계대로 살기 위해서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아이들을 죽이지 않았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었다고 출애굽기는 말합니다.

 

참된 경건

 

   우리가 읽은 야고보서가 참된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단순한 자선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라는 눈에 보이는 표현입니다. 결국 참된 경건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그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또 참된 경건이란 삶의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임을 드러내면서 사는 삶입니다. 그 핵심을 요약하기를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누군가를 도우려면 돈 있는 사람을 돕든지, 아니면 장차 큰 권력을 얻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돕든지 하는 것이 지혜일 것입니다. 베푼 것에 대한 대가를 보상 받을 수 있을 것이니까요. 고아와 과부는 아무리 도와봤자 무엇인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을 왜 돕습니까? 

그들에게 나중에 보상을 받기 위한 투자 가치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연약한 자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따라서 오늘을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이런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란 것의 삶 속에서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참된 경건이라고 합니다.

 

 정창균 목사/'경건'(영음사)  p.137-150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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