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참된 방식

 

 
1. 예배를 드리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본능이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인종이나 종족에 대해 이제까지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예배는 너무나 불완전하고 잘못된 방향에 빠져있고 순수하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예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르침이 있다면 그것은 대단히 큰 도움이 된다.


예배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이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전 인격을 다 바쳐 예배하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되지 못한다.


신앙, 사랑, 순종, 충성, 고결한 행위와 삶, 우리는 이런 것들을 모두 번제로 드려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만일 내 안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지 못한 것이 된다.



2. 신앙에서 마술적 힘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예수님의 이름을 수천 번 반복한다 할지라도, 당신이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우리의 뜻대로 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동쪽을 보고 기도한 후 서쪽으로 가면서 마음이 편하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살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다. 제사장이 향기로운 제사의 요소에 악취를 풍기는 요소를 덧붙인다면 어떻게 올바른 제사를 드릴 수 있겠는가? 우리의 마음속에 향기가 아닌 악취를 풍기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훈련되지 못하고 교정되지 못하고 정화되지 못하고 순화되지 못한 것이 우리의 본성에 남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그런 것들은 올바른 예배를 방해한다. 마음속에 불순한 요소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해서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올바른 삶의 태도가 아니다.



3. 만일 당신이 일주일의 7일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일주일에 단 하루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이다.


주일예배 후에 월요일 예배, 화요일 예배, 수요일 예배 등으로 삶의 예배가 계속 이어지지 않는다면 주일 예배도 의미가 없다.


일주일에 오직 주일 하루, 그것도 교회에 한 번 가는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개중에는 주일에 교회에 두 번 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그것을 아주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한 번 가든 두 번 가든, 그것은 모두 동일한 날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차피 주일은 온전히 '예배드리는 날'이지 않은가? 이 말은 만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계속 삶의 예배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주일의 공예배 또한 참예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예배는 무엇인가? 반드시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만을 의미하여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학교에서, 농구장에서, 책상에서, 철로를 달리는 기차 안에서, 수많은 차들 틈에 끼어 운전하면서, 설거지하면서, 다리미질을 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활동이 정당하고 선하고 올바르다면 그 활동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한 후 그 다음 주일이 돌아오기까지 6일 동안 계속해서 우리의 예배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주일에 드리는 예배는 참예배가 아니다. 우리 안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까지 우리는 쉬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행위로 잘못을 범해야만 죄책감을 느껴 회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잘못된 '생각만으로도 나는 하나님과의 교제, 그분의 임재에 대한 느낌, 또한 영적 감각을 잃어버릴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 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통제할 수 있다.



4. 당신의 생각이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성소가 되도록 하라.


삶의 어떤 부분에서도 그분의 영광을 해치지 않도록 노력하라.

한 발짝 내디딜 만한 작은 땅까지도 전부 거룩하게 하라.


모든 시간과 장소를 하나님께 넘겨드려라. 그러면 당신은 그분을 올바르게 예배할 것이고, 그분은 그 예배를 받으실 것이다. 가장 매력적인 사실은, 설령 당신의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것을 모를지라도 하나님이 당신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점이다. 당신이 세상살이의 걱정과 근심에 눌려서 꼼짝 못할 때, 전화벨이 울리고 약속 시간에 쫓겨 잠깐이라도 하나님을 생각할 시간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순수한 동기에서 피어오르는 당신의 향을 맡으실 것이다.


모든 것을 바쳐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이 아신다면, 일시적으로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긴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순수한 동기에서 피어나는 당신의 향내를 맡으실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속죄, 사랑, 은혜, 약속, 그리고 성령님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굳게 결심하여 그분을 찾고 믿고 순종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성소가 될 것이며, 그 성소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성찬과 예배를 통한 교제가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당신이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활동에 몰입해 있는 순간에도, 당신의 모든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향기로운 예배의 초소가 될 것이다. 내 삶 속에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면 나는 온전히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주일에 참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월요일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주일 예배는 결국 진정한 예배가 아니다. 주일에 기쁨에 찬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한 후 월요일과 화요일에 일신상의 문제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린다면 주일 예배는 의미가 없다.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리는 것이 내 안에 전혀 없어야 비로소 나의 예배가 그분을 온전히 기쁘게 해드릴 수 있다.



5. 예배의 매력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온전히 정신을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주님을 위해 기꺼이 일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자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려고 하는 자는 무엇보다 우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아야 한다. 예배를 드릴 줄 아는 자가 주를 위하여 일하면 그의 사역은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예배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일하는 자는 하나님이 온 세상을 불태우시는 날, 그때 타버리고 말 나무와 건초와 그루터기를 쌓아놓을 뿐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바쁜 스케줄' 에 대해 지적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한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이 우리를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을 위해 우리를 다시 부르고 계신다. 그 본래의 목적이란,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전심으로 참예배를 드린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의 권위에 근거하여 분명히 말한다. 예배를 지겨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천국에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다!



6. 복잡한 세상에서 날마다 조용히 은밀한 장소로 물러나라.


주위의 소음들이 당신의 마음에서 사라지고 하나님의 임재가 당신을 감싼다고 느낄 때까지 그곳에 조용히 앉아 있어라.

불쾌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그것을 듣지 않겠다고 결심하라.

내면에서 들리는 음성을 인식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 그 음성에만 귀를 기울여라.



7.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지 말라.

하나님께 당신을 드려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당신 자신이 되어라.

 당신의 관심을 두세 가지 일에만 국한시켜라.



8. 순간순간 마음속으로 기도하도록 스스로 훈련하라.

그러면 얼마 후 당신은 심지어 일을 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겸손하고, 진실하고, 어린애처럼 정직해지도록 스스로 훈련하라.



9. 성경을 혼자 묵상하는 기술을 연습하자.


성경을 펴서 책상 위에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라. 그러면 성경 말씀이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며 하나님의 영이 오셔서 당신을 도와주실 것이다.
우선 한 달만이라도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조용히 말씀을 묵상해 볼 것을 강력히 권한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의문들을 개의치 말고 잊어버려라.


이제까지 깨닫지 못해서 빈칸으로 남겨둔 것이 있다면 굳이 메우려고 애쓰지 말라. 쓰레기 같은 것들은 모두 버리고 성경을 집어 들라. 무릎을 꿇고 "아버지여,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가르치소서."라고 믿음으로 고백하자.



10.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개인 기도의 훈련을 쌓아야 한다.


성경말씀을 오래 묵상하면 우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을 향하게 될 것이다. 교회 출석은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고 다른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게 해줄 것이다. 봉사, 일, 활동은 모두 선하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의 뿌리가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내적 습관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너무 바쁘거나 너무 완고하여 그 음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주의 깊게 듣는 자는 하늘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의 종교는 시끄러운 소리, 지속적인 활동, 자기주장이 강한 목소리, 그리고 대형화가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만든다는 해괴한 이단을 받아들였다.


하나님은 거대한 투쟁의 격동에 사로 잡혀 있는 백성에게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46:20)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힘과 안전이 시끄러운 소리에 있지 않고, 고요함에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11.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경배는 참 경배가 아니다.


경배드리기 위한 모든 것들이 다 갖추어져 있는데도 한 가지 불길한 결핍 요소를 들라면, 바로 성령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지만 그중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경배가 많다는 것이 참으로 비극적인 사실이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경배는 참 경배가 아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수백만의 교양 있는 크리스천들이 단지 교회의 전통에 따라 관습적으로 경배를 드리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께 상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잠을 이루기 힘들다.


많은 현대인들이 경배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과 태도를 생각할 때 나는 마음이 무척 불편하다. 은밀히 사람들을 조정하거나 교묘한 방법을 써서 경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참 경배가 아니다. 나는 교인들이 목회자를 가리켜 ‘영적 기술자’라고 부를 날이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떨치지 못하고 있는데, 당신은 어떤가?
당신이 삶의 각 부분들을 둘로 나누어 한 부분은 경배를 드리고 다른 부분은 경배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참 경배가 아니다.


교회에서만 경배를 드린다거나, 위험한 폭풍이 불어 닥치거나, 혹은 자연의 신비롭고 장엄한 아름다움에 압도되었을 때만 경배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아찔할 정도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커브 길에 섰을 때 아주 영적으로 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참 경배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참 경배를 드리려면 우리 안에 반드시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셔야 한다. 그러므로 경배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우리에게 찾아와, 마치 거울에 반사하듯이 다시 그분께로 돌아간다. 하나님은 이런 경배가 아닌 다른 경배는 받지 않으신다.



12. 내 삶 속에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리는 것들이 있음을 내가 안다면, 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게 해드리는 경배를 드릴 수 없다.


내가 주일에 즐겁게 하나님을 경배했다 할지라도, 월요일에 그분을 경배하지 않는다면, 나는 주일에 참 경배를 드린 것이 아니다. 주일에 즐거운 노래로 찬양하며 하나님을 경배했다 할지라도, 월요일과 화요일에 사업상의 문제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린다면, 나는 주일에 참 경배를 드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경배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구약에서 그분은 가인의 경배를 받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들 사이에 속죄가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인이 하나님께 드린 경배에는 세 가지 중대한 잘못이 있었다.

첫째, 가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이 주권적이고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경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가인은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알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의 문제를 절대적으로 심각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둘째, 가인은 자신이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지 못했으면서도 그런 관계를 맺고 있다고 착각했다. 가인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가 없이도 그분이 자신을 받아들이실 것이라고 태평하게 믿었다. 그는 인간이 죄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셋째, 가인은 죄의 심각성을 모르고 그것을 아주 가볍게 여겼다. 이것은 가인뿐만 아니라 가인 이후 수많은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의 기록을 자세히 읽고 진지하게 생각해볼 용의가 있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시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신다. 죄 때문에 세상에는 고통과 슬픔이 가득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인간은 인생 최고의 목적과 기쁨, 즉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쁨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신다. 가인이 드린 경배는 부적절하고 무의미한 경배였다. 이것을 지금의 신약시대에 적용해서 말해보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속죄의 필요성을 가르치기 거부하는 교회가 있다면, 나는 그런 교회에서는 단 한 시간도 경배를 드리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드려지는 경배는 몹시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경배드리기 위한 모든 것들이 다 갖추어져 있는데도 한 가지 불길한 결핍 요소를 들라면, 바로 성령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건의 모양은 충분하다. 그것은 사람들을 사로잡을 정도로 충분히 아름답고 웅장하다. 예복에 나타난 여러 가지 상징, 음악, 시, 그림, 웅변술, 엄숙한 말투, 좋은 음향시설,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서 경배자들의 마음을 한껏 사로잡는다. 그러나 종종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감동이 없을 때가 있다. 목회자와 회중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을 알지도 못하고 갈망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말 그대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더욱 비극적인 사실은 여기에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걸려 있다는 점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을 경배하지만, 삶으로는 그분을 경배하지 않는 일을 쉽게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당신의 삶이 경배하지 않는다면, 결국 당신의 입술도 경배하지 않는 것이다.



13. 우리의 전부, 즉 우리의 삶 전체가 경배해야 한다.


믿음, 사랑, 순종, 충성, 행위, 생명, 이 모든 것들이 경배에 동참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삶의 각 부분을 둘로 나누어 한쪽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참 경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죽음의 목전에서, 장엄한 신비 앞에서, 우리의 영성이 깊어진다고 믿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사마리아인의 경배’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이단적인 경배를 뜻한다. 이단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진리를 전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은 받아들이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들은 거부하는 편협한 사람이다. 삶의 각 부분을 둘로 나누어 한쪽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단적 경배, 즉 사마리아인의 경배이다.


‘자연 경배’라는 것도 있다. 이것은 종교적 시이다. 이것은 장엄한 자연을 즐기며 명상하는 것이다. 자연 숭배자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은 아주 많다. 그들은 눈과 귀가 아닌 마음을 아름다움에 집중시킨다. 당신의 귀가 아름다움에 집중할 경우 그것은 음악이 되고, 당신의 눈이 아름다움에 집중한다면 그것은 미술이 된다. 그러나 음악이나 미술 없이 아름다운 생각을 한다면 그것인 시이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 음악을 경배로 착각한다. 마음을 고양시키고 영혼을 거의 몰아의 경지에 몰아넣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경배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경배를 다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는 문명사회에는 많은 종류의 경배가 있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서 그것들을 받지 않으신다. 종교적인 체험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전부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교인들끼리 어울리면서 서로 따뜻한 우정을 느낄 수 있다. 교회에서는 아름다운 오르간 소리와 찬양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곧 참 경배는 아니다. 참 경배가 되려면 성령님과 진리가 있어야 한다.



14.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경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경배하라”는 것은 마귀의 속임수이다. 또한 그것은 회심과 거듭남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오직 머리에 ‘장엄함’이라는 혹을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말이다. 그들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나님을 경배하면 된다고 가르친다. 구속과 관계없이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회심하지 않고서도,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으면서도,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다. 가인도 종교적 체험을 했다. 가인은 하나님께 말씀드렸고, 하나님도 그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경험했지만 그 경험이 구원과 관계없는 경험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경배를 드리지만 잘못 경배드릴 수 있다.


경배는 성령님 안에서, 성령님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누구든지 경배를 드릴 수 있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이다. 성령님 없이 우리가 경배를 드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성령님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그분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분의 감동의 불을 끄고, 그분의 인도에 저항하면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경배를 드리겠다는 생각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할 이단이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경배를 드리는 방법을 아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시다.


먼저 경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일도 할 수 없다. 성령님은 오직 경배하는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는 일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경배드리지 않고 단지 종교적 활동에 몰두하면서 우리 자신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언젠가 착각에서 깨어날 때 말로 다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을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교육에서 가장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경배이다. 경배를 열심히 드리는 사람이 복음에 따른 실천적 삶을 소홀히 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은 곧 거룩한 섬김의 책무를 강하게 느껴서 섬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5. 하나님과의 교제는 곧 순종과 선행으로 이어지는 법이다. 일보다 경배가 앞서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서이다. 이 순서를 뒤집어서는 안 된다. 나를 성경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제아무리 무해하게 보일지라도 나의 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나님과 영원한 것들에 대해 묵상해야 할 시간에 나의 주의를 다른 데로 이끄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의 영혼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생활의 근심 걱정 때문에 성경을 멀리한다면 큰 손실을 입을 것이며, 또한 그 손실은 극복하기 힘들 것이다. 성경 대신 다른 무엇에 의지한다면 나는 영적으로 도둑맞고 사기를 당해 영원한 혼란에 빠질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이상은 우리가 최대한 온전한 경배를 드리는 것이다. 내 존재의 모든 부분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부분이 내 존재 안에 있으면, 내 존재 안에는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부분이 없는 것이다. 당신의 모든 시간, 장소, 날, 달, 해를 성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도록 힘쓰라.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당신의 경배를 받으실 것이다.



16.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그분의 속성, 성품, 사역, 인격에 관하여 묵상하면서, 그분이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해 전적으로 몰입하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최고의 직업은 경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경배라고 칭하기를 원하지 않을지라도 우리 모두가 무엇인가에 경배를 드린다는 것은 누구든지 인정하는 분명한 사실이다. 

 
예를 들면 많은 호주인의 신은 스포츠이다. 다른 이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신은 돈, 음악, 출세, 자동차, 배우자이다(사 2:8). 이 교제에서는 매주 첫 날, 빵을 부수는 기념 잔치에서 드리는 성도의 단체적 경배에 관하여 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배를 명령하셨음은 성경에서 분명하게 증거되어 왔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가장 중요한 명령은 경배에 대한 것이다. 비록 우리가 지금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지만, 이 명령들은 여전히 우리와 관련된다.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출 20:1-7)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 4:23-24)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주님께 드리라. 헌물을 가지고 그 분 앞에 나아가 거룩함의 아름다움으로 주님께 경배하라.(역대상 16:29)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자. 이것이 그분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그밖에 출 34:14; 대상 16:29; 시 29:2, 66:4, 86:9, 95:6, 99:8; 사 66:23, 빌 3:3; 계 4:10; 15:4를 볼 것)



17. 경배란 무엇인가? 어떻게 경배를 드리는가? 경배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경배가 각 믿는이에게 장자권의 특권이며 마땅히 끊임없이 드려야 하는 것이지만(히 13:15),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은 자신의 백성이 단체적으로 그분께 경배를 드리는 것이며, 그 계획은 지금도 동일하다. 이 목적을 위하여, 경배의 동기로서, 주님의 만찬이 제정되었다. 우리가 주님의 만찬을 행하는 것은 주로 그분을 기억하기 위한 것임에 틀림없다(고전 11:24). 그러나 그분을 기억하는 것과 특별히 그분의 대속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경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야 한다(시 62:7-8).

경배란 전 존재가 무엇인가에 점유되는 것이다.  이는 곧, 경배의 대상에게 완전히 사로잡히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그분의 속성, 성품, 사역, 인격에 관하여 묵상하면서, 그분이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해 전적으로 몰입하는 것이다. 

 
경배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본성과 대립하는 우리의 참된 본성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서서히 가르쳐 주는 모든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그 결과 그분을 숭앙하고 올바르게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천박함과 전적인 종속성을 깊이 생각하고 깨달은 후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숭앙하고 그분의 영광스러운 존함과 속성과 인격을 강조하는 기도를 통하여 그분을 경배한다.  우리는 특히 그분의 승리, 호칭, 영광과 본성에 관하여 말하는 성경 구절을 읽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한다.  우리는 그분의 뛰어나심과 경이로움에 관한 영적 노래를 그분께 그리고 그분에 대하여 노래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한다.  우리는 자신에 관하여 말하거나, 한 주 동안 그분이 우리에게 역사하신 것, 설교, 고백 또는 간구의 긴 기도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다.



18. 예배에 참석한 믿는이들 각자가 예배를 돕든지 아니면 방해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살아 있고 매우 민감한 유기체이다. 주님과 교제 밖에 있거나 고백하지 않은 죄에 빠진 형제나 자매는 모임의 진행에 무거운 짐으로 작용할 것이다. 많은 자들에게 있는 훈련의 부족, 다른 이에게 있는 성령님의 억제 당하심, 다른 이에게 있는 육적 충동, 등은 모두 성도들의 경배의 존엄과 영광을 떨어뜨리는 요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자신들을 살피고, 알고 있는 죄들을 고백하여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참으로 성취하신 바를 묵상하며(골 1:12-14),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마땅히 계셔야 할 자리를 자주 빼앗으려는 우상들을 제거하자. 

 
우리가 의, 지혜, 깨달음에 목마르면, 잠언서 2 장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주님을 경외하거나 두려워하게 될 것이며, 자연스럽게 경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아이들아, 내 말을 받아들이고, 내 명령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여라.  지혜에 네 귀를 기울이고, 명철에 네 마음을 두어라.  슬기를 외쳐 부르고,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여라.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고, 보화를 찾듯 그것을 찾아라.  그렇게 하면, 너는 주님을 경외하는 길을 깨달을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터득할 것이다. (잠 2:1-5)
다윗은 시편이 경배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한 것과 같이 그렇게 주님을 경배하였다. 시편 1:2; 63:6; 77:12; 119:148; 143:5 을 보라. 그는 묵상과 의, 지혜, 깨달음에 목말라 했으며, 그 결과 시편 96, 111, 112 등을 낳았다.

19. 거룩함의 아름다움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그분은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는 믿지 않는 이들과 우리의 모임을 증거하는 정사들과 권능들에게 빛나는 증거가 되며,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을 행하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와 조화를 이루며(갈 5:16), 육적인 마음을 갖게 되지 않을 것이며, 진실함과 단순함으로 서로를 더 사랑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의 소망을 중심 삼을 것이며, 우리의 삶은 의의 화평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20. 어째서 우리의 공적예배는 그토록 자주 침울에 빠지는 것일까? 우리의 예배는 어째서 그토록 미력하고, 어째서 그토록 황무하고, 어째서 그토록 헤매고 다니는 듯한

예배로 마치게 되는 것인가? 어째서 우리의 찬송이나 기도는 예배의 흐름과 상관없이 이것저것, 되는대로 하게 되는 것일까?


어째서 예배라고 하는 이름(예배의 Worship은 '가치가 있다(worth)'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음)에 합당하지 못한 채로 마치게 되는 것일까? 어째서 우리의 예배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것이 그토록 부족한 것일까? 왜 우리의 예배는 주님께서 "그 소제의 고운 기름 가루 한 움큼과 소제물 위의 유향을 다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살라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레 6:15)는 예배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 그토록 적을까?


우리는 예배시에 너무 자아와 그 부산물인 우리의 욕심, 우리의 연약, 우리가 겪고 있는 시련, 그리고 우리가 처한 어려움들로 가득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념물로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는 예배없이 그저 하나님을 떠나온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사실상 하나님에게서 그분의 마땅한 권리이며, 그분이 진정 바라시고 기대하시는 예배를 도적질하고 있는 것이다. 

 

21.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예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중요한 영적 예배를 등한히 해서는 안된다. 예배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에 대해서(곧, 그분의 본체의 광대하심에 대해서)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해주신 일에 대해서(곧, 그분의 크신 사역에 대해서) 하나님께 찬미를 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해온 마음이 넘쳐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말한다.  무릎을 꿇는 것이 기도를 드리는 사람의 신체적 자세이듯이, 예배도 찬미를 드리는 사람의 영혼의 자세이다. 예배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22. 그렇다면 예배가 왜 그렇게 필요한 것일까? 성경에서 몇 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찾아볼 수 있다.

1)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사 43:7 - 나의 이름을 부르는 나의 백성,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창조한 사람들, 내가 빚어 만든 사람들을 모두 오게 하여라' 하고 말하겠다). '인간의 제일 중요한 목표가 무엇입니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는 서슴치 않고 '인간의 제일 중요한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2) 우리가 하나님께 존귀와 찬미를 드리게 하기 위하여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엡 1:12 - 그것은 그리스도께 맨 먼저 소망을 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돌아가신 것은 하늘과 땅을 예배하는 자들로 가득 채우기 위해서였다.

3)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의 예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요 4:23 -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그분이 받으시는 예배는 구원 받은 사람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예배이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아버님을 예배할 수 있다.
 
4)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을 닮아가기 때문이다(고후 3:18 -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 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본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께서 하시는 일이다.).


23. 성경에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예배에 관한 예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 우리는 이것들을 주의 깊게 공부하는 것이 좋다.

신약성경에 나온 다음의 네 경우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지니고 있다.

1) 동방박사들의 예배(마 2:1-11)
먼 나라에서 여행해 온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귀한 예물을 가져왔는데 이 때 가져온 황금은 그분의 신성을 가리키고, 유향은 향기로운 그분의 죄 없는 삶을 가리키며, 몰약은 그분의 쓰디쓴 고난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은 예배를 이 사실과 연관지어 다음과 같이 잘 표현했다. "동방 박사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들(wise men)은 지금도 여전히 그분에게 예배를 드립니다."

2) 어떤 여자가 향유가 든 옥합으로 드린 예배(마 26:6-13, 막 14:3-9)
그녀는 아주 귀한 것을 주 예수님께 아낌없이 드렸다. 하지만 주님의 제자들은 그것을 낭비로 여기고,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어떠한 예배의 행위도 결코 낭비가 아니다.

3) 마리아의 예배 (눅 10:38-42)
이 말씀에서 마리아의 예배는 섬김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마르다가 식사 준비에 바빠 있는 동안 마리아는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예배와 섬김은 둘 다 중요한 것이지만 42절에 나온 주님의 말씀은 예배가 앞서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주님의 발 아래 앉아 휴식을 취할 여유도 없이 바삐 수고하는 것을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결코 요구하지 않으시네. 종종 그분은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리는 태도를 완전한 섬김으로 여기시네."

4) 깨끗케 함을 받은 문둥병자의 예배(눅 17:12-19)
열 명의 문둥병자가 깨끗케 함을 받았지만 그 중에서 오직 한 명만이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는 주님의 슬픈 질문은 많은 사람들이 그분에게 고침을 받아 기뻐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감사와 찬미를 주님께 드리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24. 이제 문제는 "영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기느냐?"하는 것이다.


들은 어떻게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을 제안하고 싶으며, 이 두 가지 방법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모두 필수적인 것이다.
 
1) 개인적으로
각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드릴 때마다 예배를 포함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말씀드릴 때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믿는 자에게 지니고 있는 모든 의미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감사를 드릴 수 있다는 뜻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시편은 예배에 관한 놀라운 본들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들 중에서 일부를 암송하여 우리 자신의 언어로 사용하는 것은 좋은 습관이라 할 수 있다. 또 기도 시간에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부르거나 인용할 수 있는 예배 찬송가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잘 아는, 아름다운 찬송 하나를 예로 든다면 다음과 같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못 박힌 손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2) 단체적으로
우리는 교회의 공적인 집회 때에 예배를 드릴 수 있다.

특히 이 예배와 관련된 교회의 집회의 한 형태가 초대교회 때부터 있어 왔는데 이것이 바로 "성만찬", 또는 "떡을 뗌"으로도 알려진, 주님의 만찬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다음과 같이 일을 하도록 팔리시던 날 밤에 이 의식을 제정하셨다.

그분을 기념하도록 하기 위해.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

그분의 죽으심을 보여 주도록 하기 위해.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보여 주는 것이라"(우리 말 성경에는 "전하는 것이라"로 나와 있음-역자주. 고전 11:26).

그분의 다시 오심을 고대하도록 하기 위해. "(그분이) 오실 때까지"(고전 11:26).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됨을 증거하도록 하기 위해. 한 떡과 한 잔은 우리에게,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그 영광스러운 교제, 곧 그리스도의 몸의 교제의 지체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고전 10:16-17).
 
이 기념 잔치(만찬 예배)가 얼마나 자주 열려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명령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사도 바울은 그저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고전 11:26). 하지만 성경에는 초대 교회의 제자들이 매주일 첫째 날(일요일)에 함께 모여 이 엄숙한 기념 의식을 행했던 것으로 강하게 암시되어 있다(행 20:7). 구주의 고난과 죽음을 자주자주 기념할수록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자극을 받아 하나님의 그리스도에게 예배와 흠모를 드리게 될 것이다.


25. 예배에 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중요한 두 원칙을 깨닫는 것이 좋다.
 
참된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져야 한다(요 4:23-24). 참된 예배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복장이나 정교하게 다듬은 의식, 또는 다른 어떤 물질적인 보조물들이 필요하지 않다.

이 땅에는 우리가 예배를 드려야하는 어떤 특별한 장소가 없다(요 4:21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나의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 위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데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은 찬미와 더불어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는 다음과 같은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는 히브리서 10:19-22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6.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예배란 거듭난 영혼이 경험하는 최고의 경험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성소를 세우고 성소에서 예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참된 기독교가 누리고 있는 예배하는 영혼의 기쁨을 도적질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기 전까지는 아버지를 예배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으며, 참된 예배를 드릴 영적인 상태에 이르지도 못합니다.  예배하는 사람은 속사람이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데 제한을 받아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그 진리로 심령이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W. W. 페러데이  

예배란 거듭난 영혼이 경험하는 최고의 경험이다. 여기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의 영광에 들어간 후에도 여전히 그러할 것이다. 기도와 감사는 모두 그 합당한 위치에 놓일 때, 말할 수 없이 복된 실체이다. 곧 기도는 우리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그 필요를 아뢰는 것이며, 감사는 하나님이 그 은혜를 통해 우리를 복주신 신령한 축복을 아뢰는 것이다.

그러나 예배란 하나님의 뛰어나심과 그 완전하심을 깊이 묵상한 결과로 우리 심령이 압도된 상태에서 하나님께 직접 올려 드리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 안으로 들어가게 될 때 곧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배는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배만이 우리가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할 때에도 그 충만하고, 완전한 모습으로 드려지게 될 것이다.

예배는 여러 세대를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그 특징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족장 시대에 하나님은 "엘 샤다이" -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예배를 받으셨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믿음으로 기다렸던 믿음의 선진들은 전능하시며, 신실하시고 미쁘신 하나님 안에서 안식 가운데 예배를 드렸다. 그 당시 예배는 가정 예배 형태로, 믿음의 선진들은 가정의 머리이자, 가족들을 위한 제사장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욥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욥 1:5).


27. 이제 이스라엘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냄을 받았을 때 큰 변화가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무죄상태에서나 혹은 타락한 상태에서는 결코 경험해 볼 수 없었던 더할 나위 없이 귀한 특권이자 엄청난 축복이었다.

이 시대의 예배는 제사장 제도를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항상 희생제사가 드려졌다 (레위기서에 분명히 언급되진 않았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제사장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거리를 두게 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출 19:6)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이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통해 회복을 받게 될 다른 날까지 기다려야  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예배를 드렸다. 제사장들은 희생제사의 피를 통해, 그리고 성소에서 여호와 앞에서 향기로운 제사를 통해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이 모든 것들은 모두 대치되어야 했다. 하나님은 더 이상 휘장 뒤에 계시지 않고, 그 사랑하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셨다. 따라서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게 된 것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구속이 완성되었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돌아가서 지극히 높은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따라서 이 은혜의 시대에 속한 예배는 그 성격이 완전히 변경된 것이다.


28. 요한복음 4장에서의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에서 우리는 주 예수께서 우물가의 여인의 마음과 양심을 다루시는 것을 보게 된다.


주님은 말씀으로 여인의 양심을 찔러, 그녀로 하여금 그 추구의 대상을 예배로 돌리게 하셨다. 이를 위해 주님은 은혜로 그 여인을 대하셨고, 예배에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셨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그리심 산을 언급했는데, 그곳은 사마리아인들이 자신들만의 헛된 성전을 자랑삼아 가지고, 유대인의 예배의식을 모방하는 장소였다. 그 여인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는 유대인들의 주장을 상기했다.

그때 주님은 "여자여, 나의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 위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데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 4:21-24)

여기서 몇 가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다. 먼저, 주님은 사마리아 예배방식을 완전히 거짓되고 악한 것으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두 번째, 주님은 유대 예배방식을 합당하고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인정하셨다.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그리고 나서 주님은 그 두 가지 방식이 모두 폐해지게 되고 더 나은 예배가 세워지게 될 것을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참된 기독교에는 성소와 같이 예배를 위해 따로 구별된 장소의 개념이 없다. 단순한 이 사실을 참으로 깨닫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드문지 모르겠다. 지금 이 땅에서 성소를 세우고 성소에서 예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참된 기독교가 누리고 있는 예배하는 영혼의 기쁨을 도적질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오늘날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세기 동안 행해오고 있는 관습과도 같은 것이다. 

 
또 한가지 우리는 "아버지"를 예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 속에는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친밀함과 애정이 녹아있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를 누리고 있으며, 아들됨의 자유 속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우리의 마음을 예배를 통해 올려드리고 있다. 이러한 예배는 우리가 우리 죄짐으로 인해 견딜 수 없어 신음하면서, 주님께 우리의 허물과 우리 조상의 죄를 기억치 말아주시며,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지 말아 주십사 하고 비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매우 복되고 더 높은 실체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된 실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하나의 비밀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기 전까지는 아버지를 예배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으며, 참된 예배를 드릴 영적인 상태에 이르지도 못한다.

아버지께서는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러나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이다. 이 말씀은 곧 예배하는 사람은 속사람이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데 제한을 받아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그 진리로 심령이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나 성령님이 상관하지 않는 형식적인 예배와는 완전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예배를 받으실 리가 없다.


29. 예배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무엇인가?

아버지께서는 신령한(종교 의식적인 것과 대조되는) 예배를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예배는 반드시 신령해야 한다고 엄히 말씀하셨다. "예배하는 자가 (반드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must worship)." 이제는 하나님의 본성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예배의 본질이 완전히 계시되었다. 즉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가 무엇인지 - 이 이제 차례로 선포되었다. 사람이 순전히 외적인 종교의식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면, 이는 마치 하나님을 이방종교의 죽은 신처럼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신령한 예배만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임을 깨달아야 한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진리를 소개하고 있다. 히브리서 전체를 살펴보면, 우리 믿는 사람들을 광야의 노정(거쳐 지나는 길이나 과정.)에 있으며, 하나님의 안식을 향해 순례하는 순례자로 묘사하고 있다. 믿는 사람들은 그 연약함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을 통해 광야노정에서 도움을 받게 된다.

예배에 관해서는 우리가 믿음을 통해 하늘성소에 들어갈 담력과 자유가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예배에 대해 교훈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우리의 하나님과의 가족관계는 분명한 것이다. 우리는 자녀로서 여전히 아버지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0:19-2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또는 자유)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율법 아래서 예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아갈 수 없다. 휘장이 그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휘장이 제해졌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기 때문에 휘장이 찢어지게 되었고, 지성소에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의 양심도 정결함을 입게 되었으며, 따라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화목된 자로서 평안 가운데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단번에 드리신 영원한 제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으며,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하셨음을 확신하고 있다. 우리 주님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심은 죄 문제가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해결되었다는 영광스러운 사실에 대한 증거이다. 우리가 만일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이러한 확신이 없는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분에 대해 불확실한 사람은 예배하고자 하는 좋고, 선한 의도가 있을지라도 예배를 드리기에 합당한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이다.

예수님의 육체가 찢어졌다. 이는 곧 십자가의 사역이 완성되었으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고, 모든 믿는 자들은 거룩한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

"믿음의 확실한 담력(또는 자유)"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옳고 합당하다고 여기는 어떤 상태를 정해놓고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는 정죄감에 자주 빠지곤 한다. 그러한 생각을 떨쳐버리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리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곧 두려움과 영혼의 떨림 가운데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특권은 주 예수님의 사역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자주 자기 정죄에 빠짐으로써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불완전한 우리 자신의 상태에 대해 잘 알고있다. "양심을 항상 정결케" 하는 것이 모든 면에서 완전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는 하나님의 표준에 이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대하는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한 일이 죄로 인해 오게 된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그러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이 필요하게 된다.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대제사장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드리는 모든 신령한 예배가 하나님께 받으심직 하게 드려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자신의 복된 영원한 인격과 사역의 탁월함과 및 그 생명의 향기로 더불어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의 심령에 위로와 위안을 가져다 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광야에서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새로워진 심령 가운데 최고의 예배를 드릴 때조차도, 우리 주님을 얼마나 의지해야 한다.

22절에 보면, 우리는 아론 제사장 직분이 세워지는 절차에 대한 암시를 보게 된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란 말씀은레위기 8:6-24에 기록된 희생제사의 피를 뿌리고, 회막문 앞에서 씻었던 구약시대의 예식을 기억나게 한다. 피를 우리 마음에 뿌린다는 것은 새로운 출생에 대한 모형으로, 거듭남이 없이는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몸을 맑은 물로 씻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깨끗케 되었으며, 우리를 송사할 죄가 전혀 없게된 것을 예표하는 것이다.


30. 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를 회복하라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생생한 이상 (vision)도 없이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아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것에 대해 무관심한 세대입니다. 데이빗 던랩
 
"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시다."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사 6:3,5)

이사야는 앞선 다른 선지자들과는 달리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펼쳐 보이고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특별한 능력과 확신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사야는 지극한 위엄으로 모든 피조물보다 높은 곳에 계신 주님으로 인해서 겸손케 되었다. 그는 이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었던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거룩치 못함 사이에 엄청난 간격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전혀 새롭고 권능으로 가득한 모습을 볼 필요가 있는 상태였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 - 웃시야 왕은 유다를 52년간 통치했다. 비록 웃시야 왕이 대적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고, 엄청난 경제적인 번영과 안전을 가져다주었지만, 내적인 면에서 이 나라는 도덕적으로 부패했으며, 영적인 면에서 빈곤했고, 표면적으로만 하나님을 예배했다. 그 결과로 이사야 5장에서, 이사야는 유다를 향한 6가지 저주를 선포했습니다. 유다의 많은 백성들은 경제적인 번영으로 인해서 자신들이 영적으로 합당한 상태에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B.C. 740년경, 웃시야 왕이 문둥병으로 죽음을 맞이했는데, 이는 하나님이 그의 교만으로 인해서 그를 치셨기 때문이다. 웃시야 왕이 죽었을 때, 그 나라의 안전에 대한 생각은 산산조각 나게 되었고,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 이사야 6장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임재와 거룩에 대한 경외심으로 이사야를 붙드신 것이다. 이사야는 지극히 높이 들린 주님을 뵈었다. 그리고 스랍들이 왕래하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3절)며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이사야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비탄에 젖었다. 이사야는 우리에게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의해 압도될 때, 우리의 즉각적이고 유일한 반응은 경배와 경의를 표하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한 계시나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드릴 수가 없다. 거룩과 경외심은 예배의 핵심(lifeblood)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생생한 이상(vision)에 의해서 특징되는 예배는 결코 가벼이 대하거나, 경박하거나 또는 피상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참된 예배자는 경외함으로 무릎을 꿇는 준비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진실한 예배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에 대한 깊은 확신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사야 시대에 엄청난 영적인 무감각이 있었듯이, 오늘날 교회 안에도 영적인 무관심과 가벼움이 팽배해있다.
 
31. 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의 필요성 -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천박성에 대해서 우려를 표하고 있다. 예배에 있어서 경외심이 없는 것이 이제는 현대 교회의 일상사가 되어 버렸다. 불행하게도, 신약 교회의 원리를 따라 모이고자 하는 사람들조차도 이러한 재난에 예외가 아니다. 계속해서 신자들은 조금도 미안한 마음이 없이 예배시간에 10-15분 늦게 와서는 슬며시 자리에 앉는다. 개인적인 사담을 나누거나, 특별히 좋아하는 찬송만을 택해서 부른다거나, 어떤 경우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일이 거룩하고 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를 대신하고 있다.

시편 111편 9절은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라고 권고하고 있다. 전에 그리스도로 충만했던 마음은 이제 자신의 관심사로 가득하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참석은 하고 있지만, 그들의 처음 사랑을 버린 듯이 보인다. 믿음을 분발시키는 찬송을 여전히 부르고는 있지만, 열정과 확신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즐겨 읽지만, 그에 대한 뚜렷한 헌신과 진심 어린 사랑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유창한 기도와 감사 예배는 공허하게만 들릴 뿐이다.
 
모임의 예배가 항상 이러했던 것은 아니다. 초기에 모임은 하나님의 아드님을 예배하는 열정에 있어서 필적할만한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알려졌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농장 건물이나 신축한 건물에 모이곤 했는데, 그 모임의 중심 (Center)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이는 장소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찬송도 마음으로 노래했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한 애정과 헌신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모든 참된 성도들을 사로잡는 거룩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집회를 특징지었던 거룩함과 경외심이 모두에게 분명히 나타났다. 그러한 집회의 특징들에 대해서 어떤 분은 이렇게 썼다.

'사역자들이 새로운 형태의 건물이 예배 분위기를 만들 것이라고 추측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면, 저는 그냥 웃고 맙니다. 제가 청년이었을 때, 저는 종종 '플리머스 브레드린(Plymouth Brethren)'으로 알려진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그냥 성경구 절들이 기록된 간판들이 걸려 있던 집회소에서 가졌던 예배는 제가 지금까지 참석한 예배 모임 중 가장 경배의 영으로 충만한 예배였습니다. 오르간 연주자의 아름다운 선율도 없고, 반주에 맞추어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인사하는 소리,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 속삭이는 소리, 그리고 기침하는 소리 등은 모두가 '기적적인 약'인 경외감에 의해 삼켜져있었습니다. 아이들도 모두 조용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머리를 숙이고 있거나 자기 성경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앉고자 하는 자리로 갈 때는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갔습니다. 모인 사람들 각자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성령님의 민감한 움직이심에 따라 찬송을 선택하거나, 성경을 읽거나, 또한 기도를 드림으로써, 깊은 경외심을 느끼는 순간들로 이어졌기 때문에, 많은 개혁주의 교회의 예배의 왁자지껄하는 분위기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존 드레이크포드, 「The Awesome Power of a Listening Heart」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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