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방법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4:23~24)

 

   앞 부분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영적예배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이다. 질그릇과 같은 우리 몸을(고후4:7) 어떻게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뒷 부분에서 언급될 영, 혼, 육에 대한 개념이 바로 확립되면 쉽게 이해가 갈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그런데 본 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 두 가지의 명제가 지극히 당연하고 단순한 말씀인 것처럼 보일는지는 모르겠으나, 돌이켜 보면 이 보다 더 막연하고 피상적인 말씀도 별로 없을 것이다. 도대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비록 이것이 하나의 명제로 정의하기란 어렵겠지만 말씀을 통하여 다각적인 방법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해 보고자 한다

 


1. 사마리아인의 예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라 하는 동네에 잠시 들러 야곱의 우물에 계실 때, 어떤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러 왔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4:20~22) 

는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사마리아인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한 후(BC721), 사마리아의 상류계급들은 앗수르에 의해 다른 지역으로 강제로 이송이 되었고, 다른 이민족들이 사마리아로 들어와 사마리아인들과 강제로 결혼을 하면서부터 사마리아인은 혼혈 유대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이들을 이교시하여 멸시하고 조롱하며, 이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자(마19:1, 눅17:11등), 사마리아인은 별도로 그리심산(신11:29)에 성전을 세우고 그들만의 성서를 편찬하여 하나님을 섬겼다.


   본 절의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께 대하여 예배의 장소에 관하여 논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예배의 내용에 관한 문제였다. 즉 사마리아인은 알지 못하는 것, 막연한 것에 대해 예배를 드렸다는데 있다. 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는 있으나,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바라는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밑도 끝도 없는 막연한 사실로 예배를 드렸다. 다시 말해서 주어진 혹은 나타난 사실로서의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의 생각과 전통과 고정관념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마리아인들의 ‘알지 못하는 것’은 율법적 교훈으로서의 예배를 의미하고, ‘아는 것’은 복음의 말씀에 의한 예배를 의미한다.


   본문에서 알지 못하는 것으로 예배를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즉 성경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하고, 아는 것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복음의 말씀을 마음으로 깨달아 감사와 은혜로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사마리아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혹은 헬라인들이나 율법적인 가르침에 의해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행위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격노케하는 행위들이 된다. 따라서 영적예배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무슨 형식에 구애 받아서도 안된다. 오직 말씀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의뢰하기만 하면 된다. 여기에는 소위 유명하다고 하는 자들의 가르침이나 책들이나 무슨 모임이나 종교적 행위등, 그 어느 것도 영적 신앙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의 올바른 영적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첫째는 영적으로 거듭나야 하겠고, 그 다음에는 복음과 진리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공급 받아 자기 스스로 성장하여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알지 못하는 것’ 바로 율법으로서의 예배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열심히 혹은 방만하게 섬기고는 있으나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월급을 주어 가며 고용한 목사들의 설교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 마냥, 그들의 설교에 입각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생활이 결국 종교적이고 율법적인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기독교가 복음의 말씀으로 깨어야 할 때이다. 각자의 영혼에 관한 문제는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스스로 해결하여야 한다. 목사도 장로도 그 어느 누구도 영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제는 기독교가 그동안의 전통과 관습과 종교성으로부터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에는 오해도, 오류도 없다. 말씀만이 우리 신앙의 유일한 길잡이요 지표가 되어야 한다.


본절에서 예배할 곳이 사마리아인들이 말하는 그리심산도 아니요,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말하는 예루살렘도 아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 옛날 예수님 당시, 혹은 그 이전·후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리심산으로 가거나 혹은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주일만 되면 무수한 사람들이 교회라는 장소로 모여 든다. 이 얼마나 무지에서 비롯되는 행위들인가?

 


2. 예배장소에 대한 견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17:25)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주일이면 으례히 교회로 모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손으로 지으신 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들의 섬김을 받으시는 분도 아니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지으시고 우리의 생사하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시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시40: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6~17)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면 얼마나 어떻게 섬길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은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이시다. 각종 감사헌금이나 십일조, 작정 헌금등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무슨 유익이 될까? 이러한 것들은 사람들이 손으로 지은 교회의 유지와 번창을 위해서 필요할 뿐이지, 하나님께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물론 복음전파나 하나님의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약간의 돈이 필요도 하겠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필요조건일 뿐이지 절대조건은 아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무관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은 어떠한가? 그것이 복을 받는 절대조건인 것처럼 설교하고 있고, 성경에도 그렇게 나와 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 마냥 주장하고 있다. 만약 이런 것들을 무리하게 강조하거나 혹은 주장하는 교회가 있다면 장담컨데 그러한 교회는 소위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자기의 유익을 꾀하는 거짓교사(목사)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번지르러한 교회 외형, 수 많은 교인 수, 참람한 설교, 이러한 것들은 사탄교회의 대표적 예이다.


   성전건축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짓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처름 생각될런지 모르겠으나 담임목사나 사람들의 욕심에서 비롯된 현상에 불과하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사66:1)

 

   아무리 교회 건축헌금을 많이 하여도 그것이 하나님 사업에 쓰임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신다.

   그 오랜 옛날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모형 곧 성막에 임재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교통하셨고, 솔로몬시대에 이르러서는 성막이 성전으로 바뀌어 그곳에서 인간들과 교통하셨다. 그러나 이 시대의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담당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직접 교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원래 교회란 보이는 건물을 교회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되고 성별되어 하나님께로 부르심을 받은 각 개인이 교회이고, 이러한 각 개인의 모임이 교회들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부르심을 받은 각 개인, 즉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시고, 이러한 교회의 모임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고 성도간의 교제의 장소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하시는 것은 무수한 제물이나 교회 일에 대한 맹목적인 열심이 아니라,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대하여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없고, 다만 그 분의 긍휼과 은혜와 자비하심을 바라며,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그 분의 뜻에 의뢰하는 신앙생활이 필요하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영적예배이다.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산다는 의미를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후, 우리 안에 내재해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의미로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거듭난 순간 우리는 이미 우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다.

 


3. 예배형태에 대한 견해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祭物)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月朔)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66:11:10~15)

 

   우리는 기록된 성경말씀, 복음의 말씀에 귀를 기울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우리가 말씀을 들음으로 우리의 영에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어야 하지 그것이 우리 신앙에 무거운 짐이 되어서는 안된다. 말씀을 순종하고 지켜야 한다는 멍애로부터 벗어나야 하는데, 이는 주께로 즉 복음의 말씀으로 돌아가면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나 종교생활이 아니라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거짓교사가 나타나고 우리의 신앙을 기만하게 되고, 우리의 자아가 살아나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사고 안에서 받아 들이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겻들의 결과는 율법적인 신앙생활과 종교적인 신앙생활로 나타나게 된다.


   본 절에서 이사야도 소돔의 관원들과 고모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그들에게 향한 이사야의 말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당시의 제사방식에 있어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죄에 대하여 혹은 의식에 대하여 백성들은 양이나 소나 염소등을 잡아 하나님께 바쳤다. 그러나 이들은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고 하나의 의식에 불과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제사방식의 전통과 관습에 따라 으례히 행하는 의식으로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더 이상의 번제를 요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히 여기는 행위로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마음이 수반되지 않은 그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는 열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예배 형태도 이들의 제사 형태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께 대하여 각종 종교성과 형식은 갖추고 있으나 말씀에 근거하지 아니하고 전통과 관습에 따라 습관적으로 행하여 지는 모든 행위가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행위가 되고 말았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이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의 생각은 항상 부패하고 타락되어 있기 때문에 기록된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본 절은 또한 성회와 월삭과 안식일과 각종 대회로 모이는 것도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1.월삭(月朔)에 관하여

 

   월삭 즉, 매월 초하룻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다.(민28:11~14, 대상23:31, 스3:5, 민10:10, 시81:3, 호5:7, 왕하4:23등) 당시 목축업과 농업을 주로 하는 이들에게는 달(월(月))에 대해 깊은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이 날은 안식일과 함께 하나님께 제사의 날로 엄격히 지켜졌다.(레23:24~,삼상20:5,18,25, 겔45:17, 46:1,3,6등) 이것은 심지어 유대교적 색체가 강한 초대교회에서 조차 가장 지켜야 할 것으로 강조되기도 했다.(골2:16)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이러한 것들에 의하여 구속받지 말고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다 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골2:16~)


   오늘날도 매월 혹은 정기적으로 교회에서 무슨 행사나 모임을 정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형태는 취하고 있으나,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는 커녕,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는 행위들이다. 모임이나 행사같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보고 또한 깨달아 그것이 우리의 영을 지배하고, 우리 영은 우리의 혼과 육에 지배하여, 하나님의 뜻이 우리 몸을 통해 이루어 지는 것이 우리의 영적예배의 진정한 형태가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영적예배는 영과 혼과 육이 말씀에 의해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될 수 있다. 율법적 행위나 인간의 노력으로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2. 안식일(安息日)에 관하여

 

   안식일은 창2:1~3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을 마치시고 제7일째 되는 날에 안식하시고, 이 날을 축복하여 성별하신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모세의 십계명 중 제4계명에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것을 명하고 있으며(출20:8~11, 31:18, 신5:12~15, 9:10등), 이날은 휴식의 날일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위하여 거룩한 성회(聖會)로 지켜야 할 것을 명하고 있다.(레23:3, 왕하4:23, 암8:5등) 이것은 시편의 작가나 이사야, 예레미아, 느혜미아도 안식일 성수에 대해 강조하였다.(사56:2~6, 렘17:21~27, 느13:15~22등)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와서 안식일의 정신이 망각되고 형식화되어, 율법적 속박의 구실로 전락되고 말았다. 바리세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제사장, 율법사,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되 위선적이고 독선적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구실로 하여 안식일에 행하여 질 수 있는 최소한의 행위, 즉 구제라든가 자선, 봉사등 기본적인 행위마저 율법으로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위선과 율법과 종교성으로부터 벗어나 안식일의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마12:1`~14, 막2:27~28, 3:4, 눅13:15~17)

   당시의 회당예배에서는 안식일이 일주일 중 제7일에 해당하는 토요일에 행하여 오다가(마12:9~10, 행13:14), 사도시대의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안식일이 일주일의 첫 날, 즉 일요일로 행하여 졌다.(행20:7)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날이 바로 일주일의 첫 날이었다는데서 비롯된 것이다.(마12:8, 막8:31, 16:9, 요20:19, 행20:17, 고전16:2, 계1:10등) 사도바울도 고린도와 갈라디아 교회들에 대하여 매주 첫날에 모일 것을 권면하고 있다.


   여기서 안식일에 관하여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안식일이 구약시대 처럼 일방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날이 아니요, 거듭난 그리스도인(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서로 나누고 사랑의 교제를 하는 날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를 한번 둘러 보면 주어진 예배식순에 의거하여 찬송, 대표기도, 설교, 헌금, 축도, 주기도문을 외우는 형태로 구성되어져 있다.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이 형식적으로, 혹은 오랜 전통과 관습에 의해 습관적으로(무의식적으로) 드리는 제사의 형태와 오늘날 일반교회에서 행하여 지는 예배형태와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는 건물(예배당)에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또한 예배드리는 장소가 반드시 예배당이어야만 한다는 것도 아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과거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안식일(주일)에 성전에 나가 하나님께 예배를 돌려야 할 의무가 있다. 물론 그것이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겠지만,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필요는 있다. 율법을 경험하더라도 적당히 율법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열심적으로 율법에 얽매어야 죄사함을 받았을 때, 은혜 또한 그 만큼 크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안식일이나 절기나 행사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고 있지 않은가?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죄사함의 복음을 통하여 거듭난 우리도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영이 거듭난 순간 하나님의 양자(養子)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거나 섬겨야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이 안식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안식일의 주인이기도 하고 또한 삶의 주인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안식을 누리며,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2:27~28)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12:7~8)

 

   거듭나기 전 기독교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섬겨야 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이 복음의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의 말씀에 얽매어 종의 신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으로 거듭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치심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한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누리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아들의 신분이다. 종은 안식일을 지키고 섬겨야 하지만, 아들은 안식을 섬길 필요가 없고 오히려 안식을 누린다. 우리는 일요일마다 돌아오는 주일을 안식일이라 규정하지 않고 우리의 모든 삶을 안식일로 간주한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몸이 이 세상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불가분 몸의 구속을 당하나, 우리의 영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영의 자유함을 누린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폅론하지 못하게 하라”(골2:16)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4:5~7)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연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하노라:(갈4:8~11)

 

   비록 하나님과 안식일과 종교성에 열심일지라도 그 영이 하나님께 대하여 거듭나지 못하면 종의 신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종노릇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거듭난 우리는 종의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요 또한 유업을 이을 상속자로서 천국기업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난 형제자매들 중에 상당수가 신앙생활에 관한 복음을 깨닫지 못하여 거듭나기 전의 율법과는 다른, 오히려 더 무거운 율법에 얽매이는 경향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이미 이루어 진 구원의 사실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거듭난 후 더 이상 초등학문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깨달아 그 영이 온전한데 나아갈 수 있도록 영의 자유함과 아울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까지 더욱 성장하자는 것이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자식을 낳아 그 자식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부모는 자녀들의 성장을 통하여 기쁨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의 신앙이 성장함으로 영광을 얻는다. 신앙생활에 관한 복음을 자칫 잘못 받아 들이면 돌이킬 수 없는 오류를 낳기도 하고, 자기만의 아집에 빠질 수가 있다. 많은 형제들 중, 이제는 거듭났으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 볼려고 한번쯤 노력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육으로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다. 지킬려고 하는 행위 그 자체가 거듭난 후 새로운 율법의 올가미에 빠져 들게 만든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에 관한 복음을 통하여 누려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러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그 방법은 내가 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부탁하여야 한다. 우리가 거듭난 것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기 때문에, 혹은 우리가 노력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보니 우리의 영이 거듭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 관한 복음도 내가 이룰려고 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 주야로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깊은 사정까지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히4장 참조)


   거듭난 후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무슨 거치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 나는 거듭났고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데 나의 삶을 돌이켜 보니 말씀대로 살지 못해 심한 갈등과 고민을 하게 된다면 복음의 말씀이 더 이상 복음으로서 작용하지 못하고 율법으로 작용하게 된다. 따라서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우리에게 거치는 것이 있다면 복음의 말씀을 통해 이를 해결하여야 한다.


 

3. 대회와 성회에 관하여

 

   대회나 성회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성소, 성전, 예배당등에 소집된 종교적 집회를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의 첫째날과 일곱째날에 성회가 소집되었고(출12:16, 민28:18, 레23:4~8), 일년에 6회에 걸쳐 중요한 축제일이 열렸다.(민28:26, 29:7, 레23장)


   히브리어의 “미크라-,코-데-슈(miqra’qodesh)”는 거룩한 소집이라는 뜻이고,(출12:16, 레23:2) “모-에-드(mo‘ed)”는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장소에 집합하는 것을 뜻하며,(애1:15, 겔46:11) “아차-라-(‘atsarah)”는 거룩한 의미를 담고 주를 위한 집회를 나타낼 때 씌었으며,(레23:16, 민29:35대회) 또한 주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바벨을 위한 대회에도 ‘아차-라’가 씌었다.(왕하10:20) 그리고 “아체레스(‘atsereth)”는 거룩한 의미는 없이 단지 종교적 집회를 가리켜 쓰이는 말로서 성회로 번역되고 있다.(레23:36, 민29:35, 스8:18, 대하7:9, 암5:21등)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혹은 종교적 모임을 위해 대회나 성회로 자주 모였다. 그러나 성경 곳곳에서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들이요 가증히 여기시는 행위들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본 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임과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오늘날 기독교회들도 마찬가지이다. 주일이면 습관적으로 으례히 모이는 것도 그러하고, 청년회, 장년회, 여전도회, 심령대부흥회, 기도회등과 같이 각양각색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바라시는 실질적 의미를 모르고, 즉 말씀에 의한 깨달음이 없이 사람들의 뜻과 생각에 의해 모이는 이러한 각종 종교행사가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스럽게 여기는 행위이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더러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부분이 많기도 했지만, 이들에게도 부끄러운 부분 또한 많았다. 따라서 바울의 서신서를 통하여 볼 때 바울은 많은 질책과 권면의 말로서 믿음의 경주에 게을리하지 않을 것을 부탁하고 있다. 바울의 서신서의 대부분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쓴 것이 아니라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쓴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우리도 거듭났다고 해서 완전한 객체가 된 것이 아니다. 육신의 성장과 유지 보전을 위해 매일마다 음식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듭난 영의 성장과 유지보존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 거듭난 영혼이라고 해도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개인적인 사상이 개입되어 큰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초대교회로부터 약 2000여년이 지난 지금,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산다는 것은 실로 어렵다. 그리고 진정한 교회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하나님께서는 헌금이나 충성이나 봉사나 예배양식을 보시는 분이 아니시다.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그 영이 어떻게 성령의 열매를 맺는가를 보시기를 원하신다. 거듭난 형제자매들 중에서도 교회의 중요성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 지체로서 각 마디마다 역할과 사명이 있어 서로 상호작용을 통하여 성장하고 유지해 나간다. 또한 교회는 우리 사랑의 실천 장소로서, 영적교제 장소로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진정한 뜻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가지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교회 밖에서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믿음의 형제자매들도 무수히 많다. 교회 내에서 덕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가 말씀 위에 굳게 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형제의 신앙정도를 우리의 사고로 쉽게 판단해서는 안된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 거듭났을 때 그는 어찌 했는가?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 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돌아 갔노라”(갈1:16~17)

 

바울이 거듭난 후 그는 혈육과 의논하거나, 혹은 베드로나 야고보와 같은 사도들을 찾아가 교제한 것도 아니요, 예루살렘 교회로 가서 교회 내에 묻혀 신앙생활을 한 것도 아니다. 그는 아라비아로 가서 약 10년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을 연구한 후, 다메섹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3년간 복음을 더 깨닫고,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을 다니면서 비로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말씀으로 거듭난 후,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 내에서건 혹은 교회 밖에서건(여기서 교회라 함은 보이는 건물‘예배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형제자매들의 모임을 의미)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충만히 깨닫기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교회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생활도 중요하고, 형제간의 교제도 중요하고, 교회에서 충성·봉사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교회의 개체, 곧 거듭난 각자가 은혜의 말씀을 바로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본 절 이사야서1:10~15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헛된 제물, 분향, 월삭, 안식일, 대회, 성회등 모든 종교성을 배제하신다. 형식적 종교생활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요, 하나님을 견디지 못하게 하는 행위들이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영적예배는 예배의 양식이나, 예배의 장소나, 예배의 형태와는 무관하다. 영적예배의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의 말씀을 통한 우리의 깨달음과 그 깨달은 바에 대한 실천, 즉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 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들을 금지할 법이 없느 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을 십자 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2~24)

 

   우리가 이러한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기 위해서는 첫째는 우선 죄사함의 복음을 깨달아 그 영이 거듭나야 하겠고, 그 후에는 은혜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상고함으로서 은혜의 복음을 지속적으로 깨달아 그 영이 하나님 앞에 성장 하여야 한다. 우리 영이 거듭 난 것도 말씀을 통하여 거듭났고, 우리의 영이 성장하는 것도 말씀을 통하여 성장한다. 교회 내에서의 생활도 중요하지만 우리 신앙의 궁극은, 우리가 참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 주야로 말씀을 묵상할 때, 비로소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게 된다. 여기에는 우리의 감정이나 사상등 그 어떠한 것도 개입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가 개입되어서도 않된다. 오직 기록된 말씀께 우리를 부탁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만을 바라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해야 한다.


  현재 성령님은 말씀으로 계신다. 무슨 이상한, 신비한 영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교통할 수 있는 말씀의 영으로 계신다. 따라서 말씀으로 계시는 성령님, 말씀으로 계시는 하나님, 말씀으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충분한 이해와 깨달음이 필요하다. 이러한 이해와 깨달음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행위는 은혜에 의한 행위가 아니라 율법에 의한 행위이다. 이것으로는 결코 하나님께 영적예배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깊게 상고함으로서 말씀의 인도함을 받는 삶, 이것이 바로 영적예배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이 책의 진도가 여기에까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어떠한 것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일반적인 개념정립에는 약간의 도움이 되었을런지는 모르겠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리는 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며, 또한 어떻게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릴 수 있을 것인가?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성령과 우리 몸의 구성에 대해 올바른 개념의 정립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는 영적예배여야 한다. 영적예배란 성령으로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


   본 장에서 영적예배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고, 또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념적이고 개괄적인 정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제부터 이러한 영적예배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성령에 의한 예배는 무엇이고, 어떻게 우리의 몸이 거룩한 산 제물로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 몸의 구성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죄와 정욕으로 구성되었던 우리의 몸이 무엇이관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원하시는 것일까?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 우리의 몸이 그토록 중요하다는 말인가?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온전한 구원은 우리 몸의 구속, 곧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이 온전히 구원을 받는 것을 말한다.


   영적예배는 우리의 마음이나 생각으로 드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의 몸만으로 드리는 것도 아니고, 성경책을 만이 보는 것만으로 영적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드리는 것이 영적예배인가? 아마도 이책이 끝날 즈음 영적예배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발견하리라 확신한다. 부디 무슨 꼬투리나 비판거리를 찾기에 마음을 써지 말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푯대를 향하여 나가가는 마음으로, 더불어 교제하는 마음으로, 다소 지루하고 귀에 익은 듯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다시 한번 주의하여 정독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렇게 할 때 앞으로 더불어 교제할 때 많은 신앙의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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