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성경적 근거와 현대적 적용


고대의 어느 사회나 신들을 형상화한 우상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나무로 만든 것들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구운 흙이나 주로 돌로 만든 것은 지금까지 지구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전세계를 다니면서 만날 수 있는 이런 고대인들의 물품들을 볼 때 어떻게 사람이 이런 상들을 섬길 수 있을까 하는,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다. 이런 현상은 불신자에게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고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런 현대인들에게 오히려 근본적으로 무엇인가 빠진 게 없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싶다. 현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로 주위를 장식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가치관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상태로 지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의 소리가 점점 많이 들리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인간문명의 발전 최첨단에 서 있다는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닐까? 고대인의 입장에서 현대인들을 바라본다면 우리만큼 신성(神性)에 대해 무지하며 따라서 인간성(人間性)에 대해서도 무지한 사람이 있을까라고 탄식할 지도 모른다. 현대인들은 서양의 물질문명 위주의 세속사회 속에 살고 있는 자신을 자각하지 못하며 살아 가고 있는 것을 이제는 어디서나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현대적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본래적인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할 가능성이 많고 실제로 그러하다. 물질이 아닌 영적이며,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또한 당장에 결과가 안보이나 결과적으로 나타나게 될 진정한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기가 어렵게 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과 같이 변화가 빠르고 외향적이며 급속하고 피상적인 결과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한 상황에서 더욱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현대적이고 세속적인 상황에서 기독교회에서 행하는 신성과의 만남과 교제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예배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행해지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과제다. 예배의 본질과 의미를 생각하고 또 그것이 세속사회에 사는 현대인에게 어떻게 다가가느냐를 찾는 게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적 상황은 특수하다. 한국은 전통적 종교가 세 가지나 있는 가운데 기독교가 들어왔기 때문에 이 세 종교의 영향 아래서 기독교적인 내용, 그 가운데 특히 예배를 이해하고 행동하는 것을 정리해야 하는 과제가 더 주어져 있다.



예배 이해의 혼돈(1):

한국적 전통방식으로의 이해된 예배


우선 한국에는 대표적이며 세계적 종교인 유교와 불교의 기본개념이 예배의 상황에서 늘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실례가 장례식에서 유교적인 세 번의 예식을 그대로 따라 기독교에서도 입관예배, 발인예배, 하관예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교나 불교에서 예배는 일반적으로 신에게 어떤 것을 해 드린다(예 : 치성을 드린다)는 의미를 뜻하고, 그것이 그대로 기독교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개념으로 표현되는 차원에서 동일하게 사용되는 것 같다. 어떤 제물을 드린다든지 어떤 행동을 함으로 신을 기쁘게 한다는 기본적인 사상은 기독교적 근본 출발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믿음 외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내용과 전혀 배치되는 개념이다. 이런 근본적인 출발이 올바로 되지 않은 데서 혼란이 시작된다. 이런 혼돈들이 한국 사회가 개화기, 일제시기와 6.25 등의 엄청난 혼돈을 겪고 나서도 여전히 한국민의 심성에 내재하기 때문에 예배 이해에 혼돈이 일어난다. 어떻게 이전 종교로 인해 혼돈 된 예배 개념에 성경적 기독교 예배의 본질로 돌아가게 할 수 있을까?



예배 이해의 혼돈(2): 개신교적

전통의 한계 속에만 머무는 예배


예배의 본질을 본래적인 차원에서 넓게 이해하지 못한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개신교적인 전통에 너무 집착하는 것이다. 이것은 더 근본적으로 종교개혁은 하나님나라 진리를 새롭게 발견하는 하나의 출발점에 불과한데 그것이 최종적으로 발전된 모습으로 이해한다는 데 원인이 있다. 종교개혁은 근본적으로 그 출발점이 로마카톨릭에 대항한 것이었고 그래서 로마카톨릭과 상관되는 것을 버리면서 거기에 남아있는 전통적 기독교 예배의 중요한 요소까지 버리는 모습을 보이게 됐다. 그럼에도 종교개혁의 중요한 출발 이후 지난 500년의 세월 동안 어떻게 더 완전한 형태의 성경적 기독교를 모든 방면에서 형성할 것인가를 찾는 과정이 거의 무시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모든 개신교 예배의 핵심은 설교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설교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그러나 설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는 행위이지만, 거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으로서의 결단, 기도와 찬양이 동일한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지고 행해져야 한다. 그런데 설교만 중요한 요소가 되다보니 실제에 있어 개신교는 좋은 설교를 듣고만 가는, 귀 높은 교인들, 이른바 목사들의 설교를 품평할 능력이 있는 ‘평신도 설교학 박사들’을 양산하게 되었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설교와 기도, 찬양, 결단 등이 하나의 맥락 속에 있을 수 있을까 ?



예배 이해의 혼돈(3):

현대적 방식으로만 이해된 예배


또 하나의 한국의 기독교에 있어서 발견할 수 있는 예배의 혼돈은 현대적으로 무분별하게 적용을 위주로 한 예배 변용에 있다. 현대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인정되는 것은 적용과 예배의 효과에 있는 것 같다. 즉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에게 어떤 효과가 있을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다. 어떻게 일주일간 피로에 찌든 청중에게 주일의 설교가 효과적으로 전달될 것인가를 위해서 매끄러운 도입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설교자들은 연구한다. 또 성경내용만 전달하면 무미건조하니 어떻게 절묘한 예화를 제공할 것인가에 머리를 싸맨다.


그리고 찬양에 있어서도 개신교 전통에는 성가대가 없었는데 부흥운동에서 찬송가를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개념이 바뀌어서 공예배에 있어서도 고난도의 음악가들이 할 수 있는 찬양을 하는 성가대를 조직하고 탁월한 음악가를 모시는 것을 정상적인 모습으로 여기게 되었다. 신약의 찬양의 본질은 회중찬양인데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또 현대에는 많은 시간에 걸쳐서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앞에서 존재하고 빠른 비트와 신코페이션을 과다하게 섞으며, 부담 주지 아니하는 부드러운 곡에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부정적 냄새를 풍기면 안 되기 때문에 장조로만 작곡을 하는 것이다. 거기에 가능한 현란한 악기와 압도하는 스피커 시스템을 동원해서 ‘음악적으로만’ 청중들을 사로잡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가운데 가장 약해지는 부분이 기도다. 실제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인데, 우리는 그 내용에 있어 얼마나 빈약한가? 정작 기도는 하나님 편에서의 행동인 설교에 대한 하나의 반응과 같기 때문에 만약 설교가 탁월하다면 기도도 그렇게 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공기도를 들어보면 내 건강, 내 가족의 출세, 기껏해야 내가 다니는 교회의 부흥정도의 너무도 유치한 차원에 머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예배를 너무 참여하는 쪽의 일반인의 차원에서만 생각하지 또 다른 더 중요한 예배의 참여자인 하나님은 진정으로 고려하지 않은 가운데 진행되는 것이다. 창조주되시고 구속주되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참여가 그 속에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진정한 참여가 보장되는 예배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예배,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이렇게 예배의 구체적인 요소들 자체가 어떻게 충실한 예배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런 다양한 요소들이 총체적으로 포함된 예배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전체가 제대로 이해되지 않으면 부분은 결국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배의 요소를 좁은 의미에서 보면 몇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보통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곧 설교, 기도, 찬양. 여기에 예배로의 초대와 회개와 설교 후의 결단 등이 포함될 수 있다. 이것은 좁은 의미의 예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예배는 우리가 성만찬예식, 세례식으로 부르는 것이 포함되고, 더 넓게는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예식들이 포함된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의 예배를 하나로 포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을가?


예배의 성경적 근거


예배, 즉 성도들이 공동체로 하나님과 공적인 만남과 예식을 행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신약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구약에서는 주로 에스라와 느헤미야에서 그 역사적인 실체를 발견하고 더 앞으로 나가 열왕기서나 사무엘서 속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배의 근본적인 내용을 구약의 근원인 오경에서 발견하려는 시도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오경의 상고성이 부인되었고 오경의 본질적인 모습이 그 동안 분석적인 학문의 경향을 따라서 근원을 알 수 없는 여러 문서들의 집적체로 보았고 그 결과 오경을 의미 있는 체계로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경향은 지나가고 오경을 우선 그 있는 그대로의 의미체계를 인정하는 출발이 새롭게 조성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오경에서 엄청난 연구결과들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예배의 근본적인 기원에 대한 중요한 열쇠를 얻게 된 것이다. 그 본문이 바로 출애굽기 19∼24장까지이며, 그 예식을 갱신한 내용이 신명기 4∼28장이다. 첫 번째 본문은 시내산언약을 다루는 본문이며 두 번째 본문은 그것을 갱신한 모압(세겜)언약을 다루는 본문이다.1


이 본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최초로 언약(berith)을2 맺고 갱신하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실제적으로 이루는 내용을 소개한다. 그러므로 바로 이 본문들이 우리가 연구하는 예배에 대해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근본적인 내용을 소개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후의 기록과 역사는 여기서 파생되거나 발전된 형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시내산 혹은 모압(세겜)에서의 언약체결은 여러 과정으로 이루어졌고 이 과정들이 현대의 여러 가지 예배의 요소로 발전된 것이다. 여기서 그 과정들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배의 첫 번째 요소는 초대


먼저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berith)을 맺을 때에 인격당사자에 대하여 공적으로 어떤 관계를 가지는 것인가를 규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신명기 26장 17∼19절에는 쌍방간의 공적인 선포가 균형 있게 표현됐으나 출애굽기 19장 3∼8절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공적으로 받아들이시는 지에 대해서만 표현한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존귀한 자’(segullah)라는 고대의 조약에서 강대국이 약소국을 조약의 공식적인 파트너로 인정할 때의 표현을 사용해 받아들이신다. 반면 이스라엘은 여호와만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인다. 마치 고대의 결혼문서에 남자가 여자를 향하여 당신은 나의 아내라고 표현하고 여자도 남자를 향하여 동일한 것을 선언한 것을 공적으로 표기해 놓은 것과 같다.


이제 현대적 예배에 있어 이것을 적용한 요소가 바로 고대의 언약체결의 초두에 나온 것과 같은 ‘예배로의 부름(초대)’이라 할 수 있다. 그 어떤 어려운 상황이나 실패/좌절 혹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시는 공식적인 위치를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필요하다. 성공을 자만하지 않으며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공적으로 인정하시는 그 언약적 인정만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예배자임을 의식하도록 해야 한다.


예배의 두 번째 요소는 죄 고백


두 번째로 고대에서는 중재자를 통한 교섭이 끝나고 이제 언약당사자들이 공적인 대면을 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 만남을 위해 약한 당사자인 이스라엘은 자신의 옷을 빨고 아내와의 성적 관계를 금하며 삼일 간 그 날을 준비했다. 그리고 일제히 모세의 인도를 따라 나가서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며 정렬해 섰다(출 19:9∼15, 비교 시 15, 24편). 그런 가운데 하나님이 천지를 진동시키면서 강림하셨다. 하나님이 자신의 위엄을 인간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까지 보이시면서 만남을 이루신 것이다. 그 속에서 이스라엘은 두려움에 떨었다.


현대의 예배에서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마음의 옷을 빠는 행위가 필요하다고 적용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개인적인 공동체적인 죄를 고백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 시간 이후에 예배 인도자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죄를 선포하고 이런 거룩하게 된 공동체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간구해야 할 것이다. 죄의 고백과 사죄의 선포가 없는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면 인간은 그 즉석에서 죽고 말 것이다. 예배시에 하나님의 임재는 설교할 때가 아니라 설교하기 전에 경험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어야 죄의 고백으로 겸손하게 된 인간 속에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예배의 세 번째 요소는 성경 읽기와 설교


세 번째로 그런 언약 당사자의 공적인 만남 속에서 정작 일어나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언약법을 듣고 순종하는 과정이다. 이것이 고대에는 먼저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행하신 십계명의 선포로 나타났다(출 20장, 신 5장).3 이 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랑의 언약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고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어서 그것에 대해 백성이 계속 듣는 것을 두려워하므로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 십계명을 세부적인 상황 속에서 적용한 세부법이다(출 21∼23, 신 12∼26장).


현대에 있어서 이것은 두 가지 요소로 나타난다. 하나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신교에서 평신도들이 담당하는 관습이 생겼는데 그것은 종교개혁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생긴 것이다. 당시에는 신부가 성경과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막기 위해 성경 자체를 평신도가 봉독하는 습관이 생긴 것 같다. 그러나 성경봉독은 엄격히 말하여 그 본문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설교자가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봉독을 할 때에 자신의 경험과 감정상태를 초월하여서 마치 하나님이 이 자리에서 그 말씀을 선포하시는 듯이 봉독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그 봉독된 말씀에 대한 설교이다. 세부법이 주어진 것과 같이 원리적으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이 시대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선포를 해야 할 것이다.


예배의 네 번째 요소는 결단


네 번째로 그런 언약법의 선포가 있고 난 뒤에 공적인 체결예식을 행했다. 그 체결의 중요한 요소는 몇 가지가 된다. 먼저 언약법을 공적으로 기록하고 그것을 언약의 증빙문서, 즉 ‘언약의 책’(the book of the covenant, 출 24:7)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같이 생명을 걸고 언약에 동참함을 나타내는 번제와 화목제를 행하고 피를 뿌리는 서약식을 하였다. 이 생명을 건 서약식에는 이스라엘만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참여하였는데 하나님도 언약의 책임 있는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예배에 있어 이 부분이 가장 많이 간과되고 있다. 즉 설교자가 언약법을 선포하고 설교하고 난 뒤 그 법을 목숨 걸고 행하겠다고 작정하는 서약식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개별적인 차원의 결단의 기도로 나가든지 아니면 공동체 전체가 주어진 행동을 하겠다는 명확한 결의를 하는 것이든지 간에 이런 결단의 시간이 예배에 거의 고려되지 않고 있다. 그저 선포된 설교가 이해되는 것으로 만족하고 마는 것이다. 이 서약식에는 사실 하나님도 동참하신다. 설교의 내용에는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약속이 포함될 수 있는데 이스라엘은 언약의 당사자인 하나님의 명령을 듣기로 작정, 결심, 서약을 행해야 하고, 하나님 편에서도 그 약속을 이행하는 서약을 행한 셈이다.


예배의 다섯 번째 요소는 축제


다섯 번째로 이제 체결된 언약예식을 축하하는 피로연이 베풀어졌다. 이 피로연은 긴장된 언약체결의 순간은 지나가고 그 체결된 평화의 상태를 누리며 즐기는 축제의 차원이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언약의 당사자들이 서로 만나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요소가 거기에 포함된다.

현대의 예배에서 이 축제의 요소가 많이 상실되기도 한다. 이제 결단의 시간이 지나고 하나님과 새롭게 한 언약관계를 즐기는 차원의 먹고 마시고 즐기는 차원이 열려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자녀로서의 축복을 감사하고 그것을 누리며 또 그것을 나누어주는 축복의 현장이 벌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 축제의 요소의 상실은 예배를 하나님과 나의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가운데 일어날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주(註)

1. 이 본문들에 대하여 본인이 쓴 학위논문을 압축 번역한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솔로몬, 1998)을 참조하라.

2. 여기서 언약은 한문(言約)의 뜻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언약(berith)은 인격당사자 간에 공적 관계를 법적으로 맺는 것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에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남편과 같은 하나님이 될 것이요 이스라엘은 아내와 같은 그의 존귀한 자가 될 것이며 이것을 합법적으로 맺는 것이다.

3. 십계명이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모세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주신 것으로 오해할 수 있게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고대적 표현법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동일한 사항을 말하는 신 5:22~27에는 이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표현한다.

자세한 것은 본인의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을 참조하라.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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