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의 믿음과 야고보서의 믿음의 신앙적 이해



우리가 신앙 교회 생활을 시작할 때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가 "예수를 믿느냐?" 즉 믿음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믿음은 구원에 관한 귀한 진리를 담고 있기에 어쩌면 당연한일이다. 특별히 사도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는 믿음의 교리를 완성시킨 책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 3년간 직접보고 배운 12제자들과 달리 예수님께 직접 배우지도 못한 자이다. 그가 만난 예수님은 순간적으로 만난 다메섹도상에서의 부활하신 예수님이 전부이다. 그러기에 초대교회 초창기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 12사도들처럼 그렇게 주목받지도 인정받지도 못한 사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그는 성령의 역사로 이방인 교회들을 세워나갔으며 신약교회에서의 참된 믿음의 교리를 완성시켰다.

오늘날 우리 교인들이 믿음의 교리를 말할 때 믿음과 대조되는 역할은 행위이다. 특별히 로마서의 교리적인 논쟁은 "행위냐 믿음이냐"로 설명된다. 하지만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면 로마서가 교리의 논쟁인 것은 분명하지만 논쟁의 출발은 "행위냐 믿음이냐"의 논쟁이 아니다.

로마서의 진정한 논쟁은 믿는자들의 삶에 관한 문제에서 시작된다.

주를 믿는자들의 삶의 방식이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그 문제로 이방인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의 갈등은 성경 곳곳에서 나타난다. 특별히 이방인들에게도 자신들의 삶의 방식과 전통을 강요한 유대인들의 배타성이 잘 나타난다. 이미 오래전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강요한 유대인들을 거짓 선생들이라고 경고했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삶에 관한 문제를 설득하기 위해 보다 근본적으로 돌아가 믿음과 행위를 말하며 구원은 행위(율법)가 아닌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음을 상기시키고 설득한다.

따라서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며 믿는 자의 삶은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살 필요가 없으며 지역과 인종에따라 상관없이 누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사는 것이 율법의 요구를 대신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외적인 형식의 율법이 아니며 마음에 새겨진 양심의 법을 따르는 것이다. 외적이고 형식적인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임을 가르친다. 시간이 지나서 사도 바울은 승리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오늘날처럼 "행위냐 믿음이냐"의 교리적인 것에만 머물면 큰일난다.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이나 교인들이 믿음에 관해 오해하거나 실수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만 머물러 있기때문이다. 교리적인 부분의 믿음만 가르치고 배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믿음은 단순히 교리적인 믿음이 아니다. 그 믿음은 로마서 11장 12장을 넘어가면서 정말로 살아있는 산믿음이다.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삶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믿음이다. 육신을 쫒는 삶이 아닌 영을 따라 사는 믿음인 것이다. 영적예배자의 믿음이다.

이것이야 말로 율법의 모든 요구를 넉넉하게 완성하는 믿음이다.

초대교회 종교개혁가들은 종종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믿음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실제로 그렇다 우리가 삶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한걸음 더 나아가 사람들이 로마서의 믿음을 교리적으로만 가르치고 받아들이게되면 야고보서의 내용을 읽고는 그때부터 혼동을 느끼게 된다. "구원은 행위대신 믿음이다"의 로마서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는 야고보서는 겉으로만 본다면 논리적인 모순임을 쉽게 알아 차린다.

로마서를 교리적인 부분으로만 이해한다면 분명하게 행위와 믿음이 구분되어 있다. 행위 대신 믿음이다. 하지만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에서 행함과 믿음이 붙어있음을 말한다. 누가 잘못인가? 루터는 야고보가 잘못이라하여 야고보서를 버리려하기까지 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그것은 로마서의 믿음을 전체적으로 산믿음으로 보지 못하고 부분적이고 교리적인 믿음으로만 보았기 때문이다. 로마서를 전체적으로 본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께 삶을 드리는 살아있는 믿음이며 이 산 믿음은 당연히 행위와 믿음이 구분되지 않는다. 따라서 산믿음에 관한 야고보서와 내용이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야고보서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는 말씀은 신자들의 믿음이 산믿음이 아닌 형식적이고 교리적으로만 믿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며 죽은 것임을 나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로마서나 야고보서는 얼핏 교리적으로만 이해하면 대립되어 보인다. 그러나 살아있는 진정한 믿음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대립되지 않는다.

둘다 하나님을 삶으로 예배하는 진정한 산믿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야고보서와 로마서를 하나로 묶어주고 논리적 모순을 극복하기위해 로마서를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로마서나 야고보서를 부분적으로만 인용하지 말고 전체적으로 볼 때 날마다 변화되는 삶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예배하는 진정한 믿음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게 된다.


로마서의 믿음과 행위,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함


로마서에서는 믿음과 행위가 사용되고 야고보서에서는 믿음과 행함이 나온다. 두 단어는 헬라어가 같다. 로마서는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한다(롬 3:28). 야고보서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데 그것만이 아니라 행함으로도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한다(약 2:24).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라는 표현이 뜻하는 바이다. 모순이다. 문자적으로는. 앞으로는 행함으로 통일하겠다.

 

가장 일반적인 설명이 행함은 믿음의 열매라며 풀이한다. 그 표현을 로마서에 대입하면 믿음의 열매인 행함으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 된다. 야고보서에 대입하면 믿음의 열매인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라는 것이 된다. 모순이 해결되었는가? 전혀 아니다. 여전히 모순이다.

 

고로 성경은 내용적으로 모순이다. 지금까지의 글에 의하면 그렇다.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모순이 되는 문자와 모순을 벗어나지 못하는 해석을 직시하고 인정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아니라고 한다. 성경이 영감 되었고 모순은 없다는 교리가 있기에 말이다. 성경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지금까지의 해석으로는 모순을 벗어날 수 없는데 모순은 아니라고만 한다면 피할 수 없다.

 

다른 길은 없는가? 다르게 말하면 지금까지의 해석이 바른 것인가라는 물음이기도 하다.

 

로마서에서 말씀하는 바가 무엇인가?

 

로마 교회는 로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롬 1:6~7)이고 그들은 그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진심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였다. 그때에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죄 곧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받아 의롭다함을 받았다.

 

바울 사도가 들은 바에 의하면 로마 교회는 유대인 교사들이 가르친 바인 율법 준수를 수용하고 지키는 중이었다. 유대인 교사들은 율법 준수가 예수 그리스도 안의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원리라고 생각하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렇게 율법을 준수하면 현재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로마 교회는 그것을 수용하고 있었는데, 바울 사도는 그것을 행함으로 표현하고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씀하였던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그의 말은 로마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현재적인 삶의 원리가 율법 준수가 아니라는 말이다. 율법 준수는 로마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원리가 아니었다. 다른 것이었다. 바울 사도는 율법 준수가 아닌 다른 것을 삶의 원리로 제시하는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가 말하는 믿음은 새 언약의 백성으로 삼으신 로마 교회와 현재적으로 교제하시는 새 방편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서의 믿음이다. 율법이 삶의 원리로 주어졌던 유대인들과는 다른 내용의 삶의 원리를 주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것으로서의 믿음이다.

 

이는 아브라함 인용을 통하여서도 확인된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 여기에는 창 15:6이 인용되어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민족에 대한 약속을 주셨으나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 말씀드린다. 하나님은 그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대답하신다. 그리고 하늘의 별과 같이 자손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아브라함은 이미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히 11:8).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왔다. 다만 자손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는 아무런 조짐이 없었다. 종을 상속자로 생각하였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현재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은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함에 대하여 의롭다고 하신 것이다. 이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몸을 통하여 자손을 주실 것이기에 종을 상속자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동시에 자신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사실에 대하여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다.

 

과거에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을 요구하셨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가나안을 눈앞에 둔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러 이스라엘은 열두 정탐꾼을 보낸다. 돌아온 열 정탐꾼의 말을 듣고 가나안 정복이 아니라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그것을 막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쳐죽이려고 하였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음에도 언제까지 나를 믿지 아니하겠느냐고 강하게 책망하신다(민 14:11). 광야 생활 40년과 출애굽 1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심판이 뒤따랐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며 하나님을 믿었다(출 14:31).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영접한 것이다. 가데스바네아에서도 그 사실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가나안 정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진 않았다.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것이다. 믿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을 믿었다면 그들은 기꺼이 가나안 정복을 향한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출애굽과 홍해 도하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따랐지만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음으로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영접한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을 의지하면 현재적으로 그들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된다. 의지함인 믿음과 하나님의 뜻을 따름 곧 순종이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만약 앞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하고서는 뒤에서 여전히 종을 자신의 후사로 생각한다면 그때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하시겠는가? 당연히 아니다. 그랬다면 아브라함은 불의하다는 평가가 뒤따랐을 것이다. 현재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삶의 구체적인 모습에서 이전과는 다른 변화를 가져온다.

 

로마교회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대인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요구하신 삶은 어떤 것인가? 곧 삶의 원리는 무엇인가? 유대인들에게 주셨던 것인 모세의 율법 준수인가? 아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내주하심과 그 성령님께서 새 언약의 백성들을 다스리시는 방편인 성령님의 (율)법이다(1). 로마 교회는 성령님의 내주하심과 그분이 로마 교회를 다스리는 방편인 성령님의 (율)법을 신뢰하여야 했다. 오직 그것만이 연약한 인생을 끌어당겨 올무를 뒤집어씌우려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길이다. 율법은 연약한 인생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지 못한다(롬 8:3). 율법 아래 있었던 옛 언약의 백성들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오직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의 (율)법 아래에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다. 바울 사도 자신이 그 예증이다. 그는 율법이 아닌 성령님의 (율)법 아래로 나아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롬 8:2). 그것은 그 자신의 노력으로 이룬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바로서 은혜이었다. 그가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니”(행 24:16)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상)라고 고백하는 이유이다.

 

로마서에서 부정적으로 이야기되는 행함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모든 행동을 행함이라는 말로서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옛 언약의 법인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로마 교회에게 있어서 율법 준수는 불순종이다. 로마서에서 거부하는 행위는 불순종이다. 바울 사도는 성령님의 (율)법 준수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까지의 교회가 그것을 제대로 읽지 못하였다는 것이 정확한 말이다. 로마서12장 이하의 모든 내용이 성령님의 (율)법의 내용인데, 교회가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로마서에서의 이신칭의는 율법 준수가 아니라 현재적으로 로마 교회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성령님의 (율)법을 준수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 말은 불순종으로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순종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모든 죄가 용서되어 의롭다함을 받았었다는 것은 전제되어 있는 상태이다.

 

야고보서에서 말씀하는 바-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4)-는 무엇인가?

 

야고보 장로가 말씀하는 ‘행함’이란 회당에 찾아온 가난한 자, 약한 자, 고통 받는 자를 외면하지 않고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돌보는 것이다(약 2:1~16). 그가 말하는 것은 좀 더 앞으로 가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 1:25), 자유의 율법(약 2:12)을 준수하는 것이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자유의 율법이란 옛 언약의 법으로서의 율법이 아니다. “자유하게 하는”이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인생을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온전한 율법”이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서 율법을 완전케 하신 것을 뜻한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란 인생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는 완전하게 된 율법을 뜻한다. 곧 새 언약의 법으로서 성령님의 (율)법을 뜻한다. 율법 자체는 인생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지 못하고 오직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의 (율)법만이 해방시킨다(2). 야고보 장로는 새 언약의 백성이 새 언약의 법을 준수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야고보에게 형제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하나님의 한 자녀인 것이다.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아 진심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들이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인 로마교회와 같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거듭나게 씻어주심과 성령님으로 새롭게 해 주심으로 주어지는 의롭다함을 받았다. 믿음으로. 영접함인 믿음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의롭다함을 받았으나 새 언약의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마치 귀신이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는 것과 같다. 귀신이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고 두려워하는 것은 정확하고도 바른 지식이다. 야고보 장로가 말씀하는 귀신의 믿음이란 거짓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고백으로서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성도가 사도신경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정확하게 고백하는 것과 같다. 귀신이 사도신경을 고백한다는 말이 아니다. 귀신이 하나님이 한분이시라고 믿는 것과 신자가 사도신경을 바르게 고백하는 것은 내용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른 신앙고백을 하는 자리에만 머물러 있는 믿음 곧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하였지만 삶에서 지체를 외모를 따라 차별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베풀지 않는 모습에 대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고 말씀하였다. 믿음이 거짓된 것이라고, 거짓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 믿음은 참 믿음과 거짓 믿음으로 나누어지지 않다. 믿음이냐, 믿음이 아니냐만 있을 뿐이다. 야고보 장로는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자유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아무리 바른 신앙고백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믿음은 죽은 것이다. 귀신은 바른 지식으로 인하여 두려워하기라도 하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조차 없다. 그렇게 믿음이 죽으면 현재적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 그러한 신자를 하나님께서는 현재적으로 불의하다고 판정하신다.

 

야고보 장로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진리를 설명한다.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약 2:21-22). 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태어난 아들인 이삭을 바치라고 하심에 대하여 순종하는 내용(창 22:9-14)을 인용한다. 하나님께서 그 모습에 대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평가하셨다. 그 평가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의롭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비록 아브라함이 이전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조상이었지만 현재 자신에게 요구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경외함을 확증하게 되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하지 않았다면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가 그 이전에는 경외하지 않았던 것이 아님에도 현재적으로 순종하지 않음에 대하여 경외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를 따라서 경외하느냐, 경외하지 않느냐를 판정하신다. 히브리서에서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된 일이라고 말씀하였다(히 11:17-19).

 

의롭게 되는 것과 관련하여 성경이 예시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함은 그 원리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 동일한 것이다.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현재적으로 요구하시는 바에 대하여 받아들이고 그 요구하심에 자신을 맡김으로 주어진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4)는 말씀과 같다. 이 구절에서 믿음은 영접함인 믿음이다. 야고보 장로는 현재에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영접함인 믿음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행함 곧 순종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였다.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과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다”는 야고보 장로의 가르침은 같은 내용이다. 바울 사도가 부정적으로 말씀하는 행함이란 율법 자체를 준수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불순종인 행함이다. 바울 사도가 긍정적으로 말씀하는 믿음이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신뢰이고 이는 성령님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야고보 장로가 부정적으로 말씀하는 믿음이란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머물러 있는 믿음이다. 긍정적으로 말씀하는 행함이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곧 성령님의 (율)법을 준수하는 행함 곧 순종이다. 로마서의 믿음과 야고보서의 행함은 내용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로마서의 행함은 이방인 신자들의 율법 준수로서 불순종이다. 야고보서의 믿음은 과거에 진심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것이다.

 

이신칭의는 하나님의 은혜로 과거에 영접한 신자들이 현재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뜻이다.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현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 곧 현재적인 그분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 이방인이었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로마교회가 율법을 준수하는 것으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고 바울 사도가 진술한 것과 같다.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내용적으로 모순이 없다. 문자적으로 읽고 믿음의 열매인 행함이라는 것을 대입하면 여전히 모순이지만 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게 되면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루터나 칼뱅과 같은 종교개혁자들과 그 후대들은 로마서의 이신칭의를 바르게 읽지 못했다. 그로 인한 폐해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대로 읽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에 그나마 바르게 교회다움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1) 율법, 법은 모두 같은 헬라어(노모스)의 번역이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노모스는 계속적으로 율법으로 번역되었다. 율법, 법이라는 뜻을 가지기에 법으로 번역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그렇지만 문맥적으로 볼 때 율법으로 번역함이 적절하다. 그렇게 되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과도 쉽게 연결시킬 수 있다. 성령님, 그리스도와 율법의 연결을 어색하게 생각하는 풍토가 개선되어야 한다.

 

2)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율법과 자신에 의해 완전하게 될 율법을 대조하셨다.

율법에서 간음은 부부 이외의 누군가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하셨다. 율법에서는 육체적인 관계를 맺지만 않으면 정죄가 없다. 제사를 통하여 사함을 받아야 하는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마음에 음욕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든지 표출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음욕의 지배를 받고 살게 된다. 죄와 사망의 법의 지배이다. 육체적 관계만이 아니라 음욕에서도 벗어나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다. 간음의 죄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율법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다(약 1:25). 그리스도의 율법이다(갈 6:2). 성령님의 율법이다(롬 8:2).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기독교 이야기 > 기독교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   (0) 2017.06.13
성경기자가 인용한 책  (0) 2017.06.12
신약성경의 신학적 구조  (0) 2017.06.11
[스크랩] 십일조 바른이해  (0) 2017.06.09
장로들의 유전  (0) 2017.06.0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