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讚揚)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그로인한 문제점 분석


 

이 글은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에 1996년 7월 - 11월 까지 '최용덕' 간사님께서 연재하신 글입니다.

100명중 90 명이상이 쓰고 있는 용어이기에 쉽게 바뀌진 않겠지만 일생에 한번은 꼭 읽어야 할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긴 글이지만 꼭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전도사님 자랑 좀 해 보세요" 
제가 목(성대)이 성했을 때의 일입니다. (너무 과도한 성대 혹사로 인해 4년째 저는 노래는 물론이요 정상적으로 전화 통화를 하기 힘들 정도로 성대 사용에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미(讚美)」음악 선교 팀 리더로서의 사역 외에도 제게는 소위 「찬양 세미나」라는 제목의 강의 사역이 자주 주어지곤 했습니다. 그런 강의를 하게 되면 저는 언제나 칠판에다 '찬양이란?' 라는 제목을 쓰고는 강의 전에 반드시 먼저 한가지 순서를 진행했습니다. 회중들에게 그들의 지도자에 관해 이런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아... 저를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러분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모두와 개별적으로 인사를 나누기는 어려울 것 같고...음...여기 계신 여러분의 목사님(혹은 전도사님, 선생님)께 대해 여러분이 저에게 소개를 좀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자... 어디 여러분께서 여러분 목사님 자랑을 좀 해 주시겠습니까? 누구라도 좋습니다. 도대체 이 분은 어떤 분이세요?" 


그 시간은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회중들과 그들의 지도자가 친밀할수록 여하튼 이 첫 순서의 시간은 난리 법석이 되기 십상입니다. 저는 특히 1992년 언젠가 서울 어느 교회 고등부·청년부 대상의 「찬양 세미나」를 잊을 수 없습니다. "여기 계신 이 전도사님 자랑 한 번 해 보세요. 도대체 어떤 분이세요?" 라는 저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온 회중들이 벌떼처럼 왕왕 거리며 저마다 뭐라고 마구 외쳐 대는 것이었습니다. 하도 소란스러워 제가 진정을 시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와.... 대단하군요. 안 되겠습니다. 한 분씩 일어나서 말하세요. 그러면 저는 그걸 한 가지씩 여기 칠판에다 적겠습니다. 자, 한 사람씩..." 
그러자 한 남학생이 벌떡 일어나 외쳤습니다. 


"우리 전도사님은요, 첫째, 너무나 자상하십니다. 마음이 너무나 따뜻하시지요." '맞아요 맞아요'하는 고함소리들과 함께 누군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 전도사님은요, 못하는 것이 없어요. 노래도 끝내 주게 잘 하십니다." 
"배구도 잘하시고 기타도 잘 치셔요: 
"육상도 잘 하세요." 
"설교도 너무 잘 하십니다." 
누군가 또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미남이시잖아요!" 학생들이 옳다며 깔깔거리고 박수를 치고 야단이 났습니다. 저는 정신없이 그 내용들을 칠판에 적어 나갔습니다. 또 누군가 외쳤습니다. 
"전도사님은요, 저희한테 떡볶이도 잘 사주시고, 댁에 가면 라면도 잘 끓여 주세요" 모두들 박수를 치고 발을 구르며 '맞아요 맞아요' 하고 야단입니다. 
"키도 늘씬하시잖아요" 
"박력이 넘쳐요" 


"저희들의 고민을 잘 들어주시고, 상담을 아주 잘 해 주세요." 
"머리가 아주 좋으셔서요. 한 번 들은 이름은 절대 안 잊어버리세요. 그치?" 
"맞아요. 맞아요! 그리고 무슨 가르침이든 직접 행동으로 보여 주시려고 애쓰세요" 등등등등...... 


제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손을 들어 외쳤습니다. "그만 그만! 이러다가는 강의는 시작도 못하고 날 새겠습니다. 아니...여러분...전도사님이 그렇게 좋아요?" 그러자 100여명의 학생들이 깔깔대고 웃으며 입을 모아 일제히 외쳤습니다. 
"네-좋아요! 싸랑해요!" 
제가 그들을 진정시킨 후 말했습니다. 


"아- 저는 오늘 너무 기분이 좋네요. 여러분들이 전도사님을 그토록 자랑스러워하고, 또 낯선 사람에게 그토록 마음껏 소개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워 보이는지요. 여러분의 전도사님은 정말 행복하신 분이네요 그렇죠. 전도사님?" 


그러면서 제가 그 전도사님을 바라보니 오, 저런! 학생들로부터의 열화와 같은 칭찬과 자랑에 쑥스러움+기쁨+행복감+감격이 뒤범벅되어 벌겋게 상기된 얼굴에다 입도 못 다물고 어쩔 줄을 몰라 하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거의 황홀경에 빠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오픈 게임(?)'입니까? 
저는 칠판 한 모퉁에다 다시 깨끗이 정리를 하여, 전도사님께 대해 학생들이 외쳐 댔던 내용들을 옮겨 적었습니다. 
그것은 이런 내용들입니다. 

△○X전도사님께 대한 자랑 
1.자상하심 2.따뜻한 마음 3.대접을 잘 하심 4.친절 5.잘 들어주심 6.상담을 잘해 주시는 마음 7.박력 8.노래 잘함 9.배구와 육상을 잘함 10.기타도 잘 침 11.설교도 잘하심 12.훌륭한 상담가 13.뛰어난 기억력 14.모범적 행동력 15.쉽게 잘 가르침 16.키가 큼 17.미남 

저는 이제 칠판 앞으로 다시 나아가 거기에 적혀 있는 '찬양이란?'이라는 글씨에 크게 동그라미를 치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오늘 이 제목의 첫 강의는 거의 절반을 마쳤습니다." 


그러면 회중들은 '아니, 아직 강의는 시작조차 안 해 놓고선 뭘 절반을 마쳐?'라며 의아해 하면 웅성거립니다. 그러나 사실상 실제로 '찬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이미 다 나왔으므로 이 첫 강의는 절반이 아니라 거의 전부 다를 마친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저는 결론적으로 단호하게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찬양'이란 무슨 뜻일까요?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찬양」이라고 할까요? 여러분, 찬양이란 조금 전에 바로 여러분이 저를 향해 여러분의 전도사님께 대해 20여분간 행하셨던 그 모든 행위들, 바로 그 모든 행위들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여러분이 하신 게 바로 진짜 찬양입니다." 
회중들은 어안이 벙벙합니다. 저 촌뜨기가 지금 무슨 해괴한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는 듯이 말입니다. 

'찬양(讚揚)의 남용'


'찬양'이라는 용어만큼 기독교인의 삶에서 많이 사용되는 말도 드물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습니까? 이런 경우들입니다. 얼마나 많은지 보십시오. 
·예배 인도자나 대표 기도 자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매 주일 예배 순서지(주보)에는 찬송이라는 순서가 나오고, 설교 직전에 「찬양」이라는 순서가 나옵니다. 
·방송국 프로그램 진행 자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000목사님 말씀이셨습니다. 자, 이번엔 찬양 한 곡 듣고 다음 말씀을 듣지요. 함께 들을 찬양은 '예수 믿으세요'라는 곡으로, 최미 집사님이 찬양해 주시겠습니다. 


·어느 목사님 왈, "아, 나는 찬양의 은사가 없어요. 그러다 보니 영 찬양에 취미가 없지요. 목사가 이렇다 보니 우리 교회의 찬양 수준도 전반적으로 낮아요. 어허허, 다 목사가 찬양을 잘 못하기 때문인 것 같애요." 
·자, 준비 찬양 한 곡하면서 자리 정돈합시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주일 저녁(오후)예배를 「찬양 예배」라고 합니다. 
·성가 음반 자켙에는 이런 표기들이 있습니다. 『반주 : 아무개, 찬양 : 누구』 
·교회 내 부서에는 '찬양부'가 있습니다. 그 외에 이런 용어들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찬양 사역자 ·찬양과 경배 ·찬양 선교단 ·새로운 찬양 ·찬양 문화 ·찬양신학원 ·찬양 신문 
*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위에 나열된 '찬양'이라는 용어들은 다 같은 의미일까요? (1. Yes 2.No) 
성경에는 '찬양'이라는 용어가 무수히 등장합니다. 성경은 '찬양'을 명령하면서 「인간의 본분」이라고 단호히 못박고 있습니다. 이 구절들을 보십시오. 
·호흡이 있는 자 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시 150:6) 
·그들(성도들)의 입에 하나님을 향한 높은 찬양들이 있게 하고(시149.6)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시 113:3) 
* 여러분께 두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앞서 나열한, 한국 교회들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찬양'이라는 용어는, 바로 위에 언급된 성경 구절들

안에 있는 '찬양'이라는 용어와 같은 의미의 말일까요? (1. Yes 2.No) 

위에서 드린 두 질문에 대해 여러분은 어떤 답을 선택하셨습니까? 'Yes'였습니까? 아니면 'No'였습니까? 만약 두 질문에 꼭 같이 'Yes'라는 답을 선택하셨다면...귀하는 심각한 혼돈을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인입니다. 'No' 라는 답을 선택하셨습니까? 귀하 역시 '그 점 때문에' 마찬가지로 혼돈에 빠지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닌 것 같은 데 뭐가 어떻게 아닌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요?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혼돈'은 도대체 어떤 내용일까요? 
이 문제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 드리자면 바로 이것입니다. 영어에서의 Praise, Hymn, Song, Sing, music 같은 서로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한국 교회 안에선 '찬양'이라는 단어 하나로 다 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문맥상 'Song'의 의미인데도 '찬양'을, 'music'의 의미인데도 '찬양'을, 'hymn'의 의미에서도 '찬양'을, 혹은 'Sing'이라는 의미에서도 '찬양'이라는 말을 마구 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좀 과장을 한다면 이것은 기절초풍할 일입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찬양'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Praise'라는 영어로 번역했다간 매우 심각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예를 들어 "나는 찬양의 은사가 없어도. 나는 찬양에 취미가 없어요"라는 목사님(실제로 직접 들은 이야기임)의 고백을 그대로 영어로 옮겨 놓으면...그 목사님은 목회를 그만 두셔야 합니다. 나아가 그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찬양 예배, 찬양사역자, 찬양선교단, 찬양신학원, 찬양문화' 등의 용어는 한국에서만 통하는 엉터리 용어들입니다. 순진하게 이 용어들에 있는 '찬양'이라는 한글 단어를 문자적으로 그대로 'Praise'라는 영어로 번역했다간 큰 코 다칩니다. 한 마디로 말해 한국 교회 안에서 사용되고 있는 '찬양'이라는 용어의 본질적 의미의 왜곡과 광범위한 오용(誤用)은 총체적 난국(亂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엉망진창'이라는 말입니다. 


표현이 너무 심했나요? 그러나 이렇게 흥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찬양'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도 '찬양'은 너무나 중요한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이 용어는 지금 우리가 아무렇게나 사용하고 있듯이 그런 식으로 엉터리 의미들로 남용해도 되는 용어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찬양'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 해석에 심각한 오류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향에 영향을 줍니다. 이 단어 하나를 잘못 이해함에 따라 성경에 명시된 '인생의 목적'자체가 왜곡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럴 수 있는가에 대해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찬양(讚揚)에 대한 오해


우리 한국 교회가 '찬양'이라는 용어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장 고질적이고 심각한 오해는 자꾸만 이 용어를 '음악'과 연관지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찬양'이 무엇이냐? 는 질문을 해보면 거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음악'과 관련시켜 설명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들만 그렇습니다.) 앞에서도 예를 들었듯이 '찬양'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모든 경우들이 다 '음악'과 절대적인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출발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심각하게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 과연, 성경에서 너무나 중요하게 무수히 언급되고 있는 '찬양'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듯이 절대적으로 음악과 관련 있는, 음악적인 용어일까요? 


다소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게 됨을 양해 바라며 이 말씀을 드립니다. 단언컨대 '찬양' 그 자체는 음악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용어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음악과 관련이 없다는 말은, 음악이 전혀 개입되지 않더라도 '찬양'의 본질적 의미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음악이 전혀 없어도 '찬양'은 100%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얘기냐구요? 

찬양(讚揚)의 본질적 의미


우리 한글에서 '찬양'은 무슨 뜻의 단어일까요? 이 단어는 두 한자(漢字)로 이루어진 한자어인데 사전에선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찬양(讚揚): 아름다움을 기리고 착함을 표창함 <이희승 감수 사전> 
이 단어를 이루고 있는 두 한자의 순한글 훈은 '기리다(讚)'와 '날리다(楊)'입니다. 이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기리다 : 좋은 점이나 잘 하는 일을 들추어서 말하다. 찬사를 드리다. 
·날리다 : 공중으로 높이 날게 하다. 명성을 떨치다. 명성이 드날리게 하다. 
따라서 이 모두를 종합하여 '찬양'이라는 우리말의 의미를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찬양(讚揚): 좋은 점이나 잘하는 일을 드러내어 칭찬하고 그것을 높이 들어올리다. 
이것이 우리말 '찬양'의 본질적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영어에서는 어떨까요? 
우리말로 '찬양'이라고 번역되고 있는 영어 성경 구절을 찾아보면 거기에는 언제나(거의) 'Praise'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어떤 의미의 용어일까요? 영한 사전에선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Praise[preiz] n. 1 칭찬, 찬양 2. 숭배, 찬미 


--vt. 1. 칭찬하다, 찬미하다 


영어 단어 'praise'의 뜻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바로 어떤 대상을 칭찬하다 는 뜻인 것입니다. (우와 쉽지요?) 


그렇다면 성경에 사용된 단어들은 어떨까요? 사실 이 문제는 그리 간단치가 않습니다. 성경에는 '찬양'이라는 말이 약200회 이상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서로 다른 30여 개의 히브리어와 헬라어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두를 다 살펴보기란 이 지면에서 어렵겠지만 우리말로 '찬양'. 영어로 'Praise' 로 번역되는 대표적인 단어들(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됩니다. 


구약 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히브리어는 '할랄'입니다. (99번) 이 단어가 사용된 대표적인 문장이 바로 '할렐루야'입니다. 흔히 그대로 음역되기도 하는 이 짧은 문장은 '할랄(Hallal)+u+여호와(Jah)'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할랄'이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일까요?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책(요단출판사 刊)의 저자 책.R.테일러는 권위 있는 히브리어 학자들의 도움에 의해 이 단어의 정확한 뜻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할랄: 1.칭찬하다 2.자랑하다 3.축하하다 4.바보스럽게 보일 정도로 시끄럽게(자랑)하다 
「할랄」에 이어 많이 사용된 단어로는 '야다'와 '바락'등이 있는데도 이는 각각 '두 손을 치켜올려 경배하다, 감사하다', '무릎을 꿇어 경의를 표하다, 송축하다(bless)' 등의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사용된 '찬양'의 단어들의 본질적인 의미는 '우리를 압도하여 마음속에서 경의가 저절로 솟아오르게 하는 어떤 업적과 능력 혹은 성품에 대한 칭찬과 자랑' 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할랄'이나 영어의 'Praise'나 한자의 '讚揚' 등의 단어들을 단순히 '칭찬하다. 자랑하다'라고 번역하기엔 뭔가 뉘앙스가 맞지 않고 부족해 보입니다. 그저 상투적인 칭찬이 아닌 칭찬, 남들의 눈에 제 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의 그 누군가를 향한 열렬한 칭찬, 진정어린 경의(敬意:respect, honor)와 감탄이 동시에 터져 나올 정도의 칭찬, 이런 칭찬을 의미하는 또 다른 우리말은 없을까요? 아닙니다. 여기 있습니다. 바로 이 말들입니다. 


"격찬(激讚), 극찬(極讚)" 


그렇습니다. 우리 한글 성경에 언급된 '찬양', 영어 성경의 'Praise', 원어 성경의 '할랄'이라는 단어들은 바로 "(누군가를)격찬하다, 극찬하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이 단어들의 본질적인 의미입니다. '본질적 의미'란 그 단어를 말하거나 접했을 때 최우선적으로 떠올리는 그 단어의 '뜻'이 바로 그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가 점검해 보아야 할 중요한 사항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찬양'이라는 말을 사용 할 때 그 단어의 의미가 '격찬, 극찬, 칭송, 자랑(하다)'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염두에 두고 있습니까? 우리가 태연히 곳곳에서 무수히 사용하고 있는 '찬양'이라는 말은 과연 성경의 '찬양'--곧 '격찬하다. 자랑하다'의 의미를 지닌 바로 그 말입니까?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다음에 나오는 '찬양'이라는 글자 대신에 '하나님을 격찬하고 자랑하는(것)'을 넣어서 읽어보십시오. 


·나는 찬양의 은사가 없어요. 나는 찬양에 취미가 없어요. 
·이제 찬양 하나 듣지요. '주여 이 죄인이'라는 찬양인데, 전용대 전도사님 찬양으로 듣습니다. 
·어떤 찬양을 좋아하세요? 
·찬양 예배 ·찬양사역자 ·찬양 집회 ·찬양문화 ·찬양 신문 ·찬양신학원 ·찬양선교단 


한가지를 더 여쭙습니다. 어떤 대상을 열렬히 칭찬하고 자랑하는 행위는 반드시 음악적인 행위 인가요? 이 글 서두에서 어느 교회 학생들이 보여준 모든 행동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이 한 '찬양(Praise)'은 음악과 어떤 관련이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Praise; 격찬, 칭송, 자랑) 하는 데엔 어떨까요? 
 


*찬양(讚揚)이라는 용어에 대한 한국교회의 오해

 

  1992년 2월, 충북 옥천 모 교회에서 성가대원들을 대상으로 열린 {찬양세미나}. 제가 그 교회 교역자 한 분을 지목하며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전도사님, 지금 하나님을 찬양해 보시겠습니까?"
  "네에? 지금요?" 그는 누이 휘둥그레진 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네, 지금요. 전도사님과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께 대해 찬양해 보십시오."
  "....그..그렇게 갑자기 시키시니 무슨 찬양을 해야 할지..."
  "아니, 어렵게 생각마시고...한  두가지라도 좋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해  보십시오."
  "......" 그는  한참이나 멀뚱멀뚱 서  있다가 "갑자기 뭘 해야  할지..."라고 하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른 이들에게 무슨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 그에게 찬송가책을 건네주었고 그는 서서 그것을 뒤적뒤적하며 시간을 허비했습니다.그래서 제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시 재촉했습니다.


  "전도사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게 그렇게도  어렵습니까? 하나님을 찬양할 내용이 그렇게도 없나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해 보세요." 그러자  그는 당황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고, 또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몰라서 말입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때서야 그는 입을 열었습니다.  그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는 갈길 모-르니 주여 인도합소서. 어디 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 합소서."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1절을 다 불렀습니다.  사실 저는 그를 곤경에 그가 거의 5분  이상이나 주저하며 혼이 났기에 차마  저는 이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전도사님,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애써 부른 그 노래 는...죄송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부른 노래는  성경에서 말하는,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찬양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기도'입니다. 멜로디에 담겨진 '기도'말입니다.


  지금도 자주 이런 편지를  받습니다. {선생님, 저는 평생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고 싶어요. 찬양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잖아요. 우리 인간의 창조 목적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제 소망과 달리...제가 노래를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피아노도  못 쳐요. 그래서 너무나 괴로워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는것이 너무 괴로워요. 찬양을 잘 하는 방법이 없을까요? 도와 주세요. 저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고 싶어요.}


  애처로운 사연입니다. 그런데  이런 편지를 받으면 그만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사실 이런 내용의 편지는 말도 안 되는 하소연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며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찬양'을 너무나 엉뚱하게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번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앞의 그  전도사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이런 것이 한 두 사람에게 국한된  오류가 아니고 우리 한국교회 전반에 걸친 심각한 오류라는 데 있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하나님을 찬양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격찬해 보십시오"라는  제안에 대해 제대로 반응한 목회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면 일반 신자들은 더 물어볼 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해 보십시오"라는  말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이 말은 바로 "하나님을 자랑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격찬해 보십시오"라는 말과  꼭 같은 것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바로 그 말입니다.


  누군가를 (혹은 어떤  장소나 물건을)다른 사람 앞에서 아주 많이  칭찬하거나 자랑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지난 호에 장황하게  기술하였던, 모교회 중고등부 학생들의  자기 전도사님 자랑 사건(?) 기억나십니까? 무려 20분 간이나 계속된 그 일 말입니다. 하도 열띤  전도사님 자랑이어서 제가 도중에 중단을 시켰습니다.


  어떤 대상 대한 격찬과 자랑은 우리 삶의 일상사입니다. 너무나  탁월한 어떤 기능이나 작품을  보았을 때, 너무나 탁월한 미모나 어느  곳의 절경을 보았을 때, 너무나 감동적인 경험을 하였을 때, 너무나 존경스럽고 경외로운 인품을 지닌 이를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것에 대한 격찬의 반응을 보입니다. 그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신나게 자랑합니다. 흥분하여, 온갖 몸짓으로, 큰  소리로, 침을 튀겨가며 말입니다. 우리가 응원하는 팀의 선수가 역전  만루홈런을 쳤을 때의 열광과 환호, 위대한  연주자나 성악가, 가수의 공연후의 기립박수와  환호, 올림픽 마라톤이나 추구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승리를 쟁취하는 순간 우리가 보이는 모든 반응들 - 그것이 바로 격찬입니다. 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찬양(讚揚, praise, 할랄, 아이네오)입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찬양'의 진짜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안에서 사용되는 '찬양'이라는 용어에선... 이 개념이 어디론가 증발해 버렸습니다.  엉뚱한 개념들로 대치되어 버렸습니다. '찬양'을 이야기 할 때  어떤 설교자도 이와 같은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무슨 주술이나 입버릇처럼 "할렐루야"를 마구 외쳐대면서도 그 말이 "여호와(하나님)을 격찬합시다. 여호와를 칭찬하고 자랑합시다"라는 의미임을 피부로 선명히 못  느낍니다. {여호와를  찬양(할랄)하라}의 '찬양'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해 보십시오"라고 하면 하나님을 찬양(격찬, 자랑) 할 생각은 못하고 찬송가 책자를 뒤적이거나 반주자를  찾는 것입니다. 우리는 '찬양'은 반드시 음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우리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격찬과 자랑(찬양)에는...음악이 거의  없습니다. 지난 호에 소개되었던 서울 어느  교회 중고등부 학생들은 20여분간이나 자기들 전도사님을 칭찬하고 자랑하면서 100여명 중에 단 한  명도, 단 한 번도 '음악'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피아노 반주자조차도 음악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한국교회에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있어 음악이 없으면 죽는 줄 압니다.  음악과 관련없는 '찬양'은 상상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음악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것은 찬양이 아니라고까지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평생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고 싶은데 도대체 음악적 소질이 없으니 원통하고  억울하다"는 어처구니없는 하소연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이나 성가대원들이나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같이 노래를  할 수 없는 사람이나 벙어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불가능한 줄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찬양'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두가지는 이것입니다. 


  1. 첫째는, 하나님을  찬양(praise) 하기 위해선 반드시 음악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음악이 없는 찬양은 아예 상상을 하지 않습니다.


  2. 둘째는, 가사 내용이야  어떻든(그것이 기도나 간구이든, 회개나 권면의 내용이든 상관없이) 일단 음악적인 옷을 잘 입혀 놓기만 하면 그 노래가 곧 '찬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식 예배 프로그램  중 {찬양(praise)}이라는 순서(*흔히 설교  직전에 행해짐)에서 성가대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 내용이야 어떻든 4부 화음으로 멋지게  노래만 잘 하면 그것으로 예배의 필수 요소로서의 {찬양}순서는 성공적으로 메꾸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생각이 오류인지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음악(music)이란 가락(melody)과 리듬과 화성, 음색등의 요소를  여러 형식으로 조립하여 놓은 곡( )을 목소리나 악기로 연주하는 것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물론 음악적 표현 그 자체로 어떤 메시지를 담을 수도 있지만 엄밀히 말해 음악 그 자체에 노랫말(가사)이 덧붙여지기 전까지는 음악은  텅빈 그릇에 지나지  않습니다. 꼭 같은 멜로디라도 그것에 어떤  가사를 붙이느냐에 따라 그 음악의 질(質)과 성격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자, 여기에 멜로디와 리듬과 하모니로 이루어진 음악의  그릇이 하나 있습니다.(※)
    
  이 음악은 거룩한가요? 혹은 악한 것인가요? 그  어느쪽도 아닙니다. 이것은 아무런 내용물도 담겨 있지 않은 '빈 그릇'일 뿐입니다.

  위의 멜로디와는 상관없이, 여기에 여러가지  글이 있습니다. 말(言)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엄마 요리솜씬 세계 최고야
     우리엄마 노래솜씨 정말 끝내줘
     우리엄마 최고엄마 진정 사랑해
    엄마 엄마, 용돈 조금 올려 주세요
    형제들아, 내일부터 청소 잘하자


엄마 엄마, 내가 정말 잘못했어요


첫째  엄마께 대한 '칭찬과 자랑-찬양'입니다. 
둘째 엄마께 우리가  아뢰는 '요청과 간구'입니다.  
세째 앞으로 청소  잘 하자고 형제들끼리 나누는 '권면'의 말입니다.
네째 이것은 엄마께 아뢰는 '회개와 사죄'의 말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이 네가지 내용을 저 위의 (※)멜로디에 각각 담을 수 있습니다.

 우리엄마 요리솜씬 세계 최고야  
 엄마엄마 용돈조금 올려 주세요
 형제들아 내일부터 청소 잘하자
 엄마엄마 내가정말 잘못 했어요


  오늘은 어머니의 생신날입니다.  삼남매가 "오늘, 우리가 어마를 기쁘시게 해 드리자. 우리가 엄마를 칭송하고 자랑하면 제일 기뻐하실  거야"라고 마음을 모았습니다.
  막내딸이 일어나 어머니께 말했습니다.  "엄마 엄마, 지금까지 다른 데 가서 많은 음식을 먹어 봤지만 우리 엄마가 만드신 요리만큼 맛있는 건 구경도 못했어요." 그러면서 손을 휘두르며 외쳤습니다.  "우리엄마 요리솜씨가 세계 최고야!"


  언니 오빠가 환호성을 내지르며 손뼉을 쳤습니다. "와- 옳소!"
  언니가 일어나더니 소리쳤습니다. "그뿐인지 아니?  우리 엄마 노래실력은 어떻구? 만약 세계 어머니 노래자랑 대회에 나가시면 1등은 문제없을걸? 안 그래? 우리 엄마보다 노래 더 잘 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옳소! 짝짝짝짝-"
  그러자 대학 국문학과에 다니는 둘째 딸이 일어나더니 "저는 엄마를 칭송하는 3행시를 지었어요"라면서 시를 읊었습니다.
          "우리 엄마 요리솜씬 세계 최고야
           우리엄마 노래솜씨 정말 끝내줘
           우리엄마 최고엄마 진정 사랑해."
  "와- 옳소! 짝짝짝짝-"
  엄마는 감격해서 눈가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그때 아빠가 나섰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 시에다 곡을 붙이지. 자- 여기 있다. 우리 같이 불러볼까?"
  아빠와 딸들이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C   G7 C   Dm   C G7     C F C G7        C
    
 우리엄마 요리솜씬 세계 최고야               
 엄마엄마 용돈조금 올려 주세요
형제들아 내일부터 청소 잘하자
 엄마엄마 내가정말 잘못 했어요


  함께 있던 외삼촌이  "이야, 난 그 시를 붓글씨로 멋있게 써서 아파트 단지 안에다 다 돌려야겠다."더니 즉석에서 붓을 들어 서예 작품을 만들었습
니다. 엄마는 하도 감격해서 엉엉 우십니다.


  그 때 오빠가 일어섰습니다. "나도 엄마를 기쁘시게 하는 칭송의 노래를 부르겠어요.' 그리고는 기타를 치며 멋진 성악 발성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엄마엄마 용돈조금 올려 주세요


  모두들 '에잉?' 하며 눈이 휘둥그레졌고 엄마는 냅다 소릴 내지릅니다. 
"이놈아, 그게 날 칭송하는 노래냐? 돈 달라는 얘기지." 
  오빠가 말합니다. 
"기타 반주라서 그러세요? 그러면 파이프 올갠이나 오케스트라 연주에다 200명 남녀혼성 4부 합창으로 편곡해서 들려드리면 어떨까요?"
  엄마, "야, 이녀석아, 제 아무리 그런대도 돈 달라는 얘기지 그게 날 칭찬하는 노래가 되니?"
  "그러면...다른 노래를 불러 드릴께요."

 엄마엄마 내가정말 잘못 했어요
 엄마엄마 이아들을 용서 하세요

  엄마, "아니 얘, 그게 날 칭찬하고 자랑하는 노래니? 네가 잘못했다고 사죄하는 거지."  "...그래도 엄마께 바치는 노래예요."
  아빠, "아니, 그건  좋은데...이 시간은 오늘의 주인공인  네 엄마를 칭송하는 시간 아니니?"
  "...이상하네? 교회에선 이런 게 다 통하는데... 성가대가 하나님 찬양한다며 회개나 기도하는 내용의 노래 부르던데... 그럼 이 노래는 어때요?"


 형제들아 내일부터 청소 잘하고
 이제부터 엄마말씀 더욱 잘듣자


  모두들, "글쎄...  어떻게 보면 엄마가  좋아하실 내용인 것  같기도 한데... ㅡ 그렇다고 그게 엄마를 칭찬하거나 자랑하는 건 아니잖아."


  자, 이제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려는지 눈치채셨을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이시든 사람이든, 어떤 대상을 향한 찬양(praise, 격찬,칭송,자랑)은 음악이라는 그릇에 담겨지기 이 전의 상태, 예를 들어 말(言) 이나 글,  글씨 등의 표현만으로도 완벽한  '찬양'이라는 사실입니다. 음악이 덧붙여  졌기 때문에 '찬양(praise)'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음악(music)은 단지 어떤 대상을 찬양하는 내용물(말,글)을  담을 수 있는 수많은 '그릇' 중 하나일 뿐입니다. 지난 호에서  서울 모교회 중고등부 일이나 앞의  '엄마 생신잔치' 예화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  개입되기 이전에 이미 그 전도사님이나 엄마는 사람들에  의해 충분히 찬양(격찬,칭송,자랑)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도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둘째로, 아무 가사 내용이라도 일단 음악적으로 잘 포장이 되어 연주되어지기만 하면 그것이 곧 '찬양'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찬양이냐 아니냐는 순전히 가사 내용이 그 대상에 대한 격찬과 칭송과 자랑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없는지로 구분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설령 음악의 그릇에 담겨졌다고 하더라도 그 가사가 '기도'이면 그 노래도 '기도'이며 '회개'의 내용이면 그 노래도  '회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성가대가 불렀다고 그 노래들이 하나님께 대한 찬양(praise,; 격찬, 칭송, 자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음악적으로 제한시키는 것(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은 성도들의  삶과 예배생활에 커다란 문제점을 일으킬 수 있는 오류입니다. 어쩌면 오늘 날 우리 교회의 예배에선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격찬과 칭송과 자랑- 곧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찬양(praise)  이 사라졌거나, 있다고 해도 형식적인 프로그램으로 전락하진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찬양(praise)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능력과 성품과  행하신 일을 진정으로 격찬하며 칭송하며 마음껏 자랑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의 예배에선 얼마나  이런 행위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성도들의  심령이 이런 일(찬양)에 대해 얼마나 고양(高揚), 도전되고 있습니까?

<다음 호에 계속>

 

찬양(讚揚)이라는 용어에 대한 오해와 그로인한 문제점 분석 (제3회)

 

우리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오해는 '찬송(讚頌)'이라는 용어에 관한 것입니다.
'찬송'이라는 단어는 우리 한국교회 안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음악적인 용어로 이해됩니다. 기독교와 관련된 '노래'를 지칭할 때 '찬송'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렇게 된 데는 '송'이라는 글자가 '노래'를 뜻하는 영어의 'song'과 음이 같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도 이 '찬송'이라는 글자가 나오면 '반드시' 하나님과 관련된 노래 혹은 그런 노래를 부르는 행위로 이해하고 풀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오류입니다. 성경에서는 물론이고 표준적인 우리말에 있어서도 '찬송'이라는 용어는 결코 음악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음악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여 가르칠 때 이 '찬송'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문장을 지금 우리가 그릇 이해하고 있는 개념을 적용하여 설명하게 되면 문맥의 의미 자체가 달라지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찬송'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문장을 지금 우리가 그릇 이해하고 있는 개념을 적용하여 설명하게 되면 문맥의 의미 자체가 달라지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찬송(讚頌)'이라는 말은 우리말과 성경에서 '찬양'이라는 말과 꼭 같은 의미입니다. 지난 내용에서 우리는 '찬양(讚揚)'이라는 말은 누군가를 '칭찬하다, 격찬하다, 자랑하다'라는 의미임을 누차 강조하였습니다. '찬송'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송(讚頌)이라는 말은 어떤 대상을 칭찬.칭송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 자체는 음악(노래)과 아무 상관없는 용어입니다 음악과 관련지어서도 안되는 단어입니다. 다음 두 문장은 꼭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네 형 칭찬(자랑) 좀 해 봐라."
."네 형 찬송(찬양) 좀 해 봐라."


이것은 적어도 지금 한국교회들이 공용으로 쓰고 있는 [개역성경]이 번역될 당시만 하여도 상식적인 지식이었습니다. 번역자들은 같은 원어(原語)를 가지고 자유스럽게 때로는 '찬양'이라는 말로, 때로는 '찬송'이라는 말로 번역하였습니다. 같은 말이니까요.


찬용 혹은 찬송과 함께 성경번역시 같은 의미로 사용된 단어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찬미(讚美)'라는 말입니다. 찬양, 찬송, 찬미, 칭찬 등은 다 같은 말입니다. 결코 서로 다른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아래의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십시오.


<구약성경>
 시편84:4-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할랄)하리이다.
 시편102:18-창조함을 받은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할랄)하리로다.
 시편113:3-해돋는데서부터 해지는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할랄)을 받으시리로다.
 시편119:164-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할랄)하나이다.
 시편22:3-이스라엘의 찬송(테힐라)중에 거하시는 주여 대상16:35-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테힐라) 하게 하소서
 신26:19-여호와께서 너의 칭찬(테힐라)과 명예와 영광으로...


<신약성경>
 눅2:13-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아이네오)하여 가로되
 눅19:37-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아이네오)하여 가로되... 마21:16-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아기와 젖먹이들의입에서 나오는 찬미)아이노스)를 온전케 하셨나이다'함을 너희가..."
 눅18:43-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아이노스)하니라.


 행2:47-하나님을 찬미(아이네오)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롬15:11-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아이에오)하며, 모든 백성들아... 롬13:3-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에파이노스)을 받으리라 고전4:5-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에파이노스)이 있으리라 엡1:6-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에파이노스)하게 하려는 것이라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거듭 강조드리거니와 성경에 언급되고 있는 찬양, 찬송, 찬미, 칭찬은 다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말 성경과는 달리 영어 성경은 더욱 간결하고 명확합니다. 위에 언급된 성경구절들(우리말로는 찬양, 찬송, 찬미, 칭찬 등의 각기 다른 던어로 번역한)을 찾아보면 거기에는 오직 한 단어가 나올 뿐입니다. 바로 'praise'입니다. 그리고 영어 'praise'는 '칭찬하다, 자랑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선 이 상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찬송'은 '찬양'과 또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각 교회 예배 순서지(주보)를 보면 이 사실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예배순서에 [찬송]이라는 항목이 나오고 그와는 다른 별도의 순서로 [찬양]이라는 항목이 설교전에 나옵니다. 무언가 이 두가지가 서로 구분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영어권의 교회에선 우리 한국교회의 [찬송]이라는 예배 순서를 뭐라고 표기하고 있을까요? 그들의 주보에는 Hymn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영한사전에서 이 단어 'Hymn'을 찾아보면 '성가, 찬송가'라고 나와 있습니다.


[찬송] [찬송가]

 

'찬송'과 '찬송가'는 다른가요?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영어로 '찬송'은 'praise'이고 '찬송가'는 'Hymn'입니다. '찬송(찬양, 찬미, praise)'은 결코 음악적인 용어가 아니지만 '찬송가(Hymn)'는 음악적인 용어입니다. 영어에선 이 두가지가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찬송가는 무엇입니까? 바로 찬송이라는 말에 '가(歌:노래,song)'이라는 글자가 더해진 말입니다. 이것을 풀이하면 바로 이 말입니다.


[(어떤 대상을)찬송(찬양,찬미,칭찬)하는 노래]기독교에서 말하는 '찬송가'는 '하나님(혹은 구세주)을 어떤 형태로든 격찬하고 칭송하고 자랑하는 내용이 담긴 노래'를 말합니다. '찬송'은 노래와 상관없지만 '찬송가'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에선 언제부턴가 이 두가지 개념에 혼란을 일으키고 말았고, 지금은 이것을 바로 잡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그 혼돈이 깊어진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합시다"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노래를 부를 준비를 하지 노래 이외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찬송(praise:격찬,자랑,칭송)할 생각은 꿈에도 없습니다. 그런게 있는지 아예 상상조차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교회들이 말하는 [찬송가]의 개념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이것, 즉 찬송가공회에서 엄선하여 편집한 558곡, 이것만이 [찬송가]입니다. 그렇다면 그 588곡 이외의 모든 기독교 성가들은 무엇일까요? 한국교회에선 그 노래들은 죄다 [복음성가]라고 합니다. 그 노래들이 [복음성가]로 된 유일한 이유는 한국 찬송가공회에서 결정한 558곡에 포함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해서 [복음성가]로 분류된 모든 성가들(558곡을 제외한)은 어떤 취급을 받습니까? 이 노래들은 558곡의 신성하고 거룩한 [찬송가]보다 저급하고 덜 거룩하고 유치하고 저차원의 노래들이라서 공식 예배 때는 '절대'불러서는 안되는 노래들로 강력한 제재를 받아 왔습니다. [복음성가]를 어떻게 거룩한 예배 때 하나님 앞에서 부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지식은, 아는 바로는 적어도 전 세계에서 우리 한국교회가 유일한 듯 합니다. 대단한 주체성이요 독창성인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대단히 위험하고 극단적인 편견이요 오류하는 사실입니다. 세계 어느 교회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께 대한 노래들)기독교 성가)'을 오직 558곡의 [찬송가]와 나머지 [복음성가]로 이원화시켜 그 거룩성과 용도에 차별을 두는 교회는 없습니다. 그리고 극히 일부 국내곡(13곡)을 제외하고는 공용 찬송가집에 수록된 곡들이 전부가 오직 1938년 이전에 작사작곡 되어진 노래들로만 구성된 교될들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한국교회만이 그럴 뿐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 558곡만의 [찬송가]로도 충분합니다. 아니 그보다 형편없이 적거나 아예 없더라도 문제가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앞에서 우리 한국교회의 [찬송가지식이 '위험한 편견'이라고 하였을까요? 그것은 '558곡의 신성한 찬송가'만을 강조하는 분들이, 그 558곡 이외의 귀한 성가들을 (혹은 그 노래들을 부르는 성도들을) 천박하고 저속히 여기거나 정죄하는 죄를 범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무서운 죄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가장 큰 문제는 '찬송(찬양, 찬미)'과 '찬송가'의 올바른 개념과 참 의미를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선 언제부턴가 [찬송가]라는 말을 신학적, 음악적, 국문학적 점검을 거쳐 엄선한 558곡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인식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입니다. [찬송가(Hymn)]는, 하나님을 격찬하고 자랑하고 칭송하는 내용의 모든 노래들(songs)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일반명사(一般名辭)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수 천 수 만곡의 [찬송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책과 함께 가지고 다니는 '찬송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찬송가]가운데 뽑고 뽑아서 단지 558곡만으로 묶어서 "자, 우선 이것으로 우리 한국교회들이 통일적으로 사용하자"고 약속한 악보집일 뿐입니다. 그것만이 거룩한 [찬송가]인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앞으로 머지 않아 새로운 공용 '찬송가집(Hymn Book)'을 편집하게 될 땐 한국교회에서 지금가지 예배중에 '절대' 불러서는 안되는 저급한 노래들이라고 멸시했던 소위 '복음성가'들 가운데 많은 곡이 포함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제까지는 덜 거룩하고 저급한 노래(복음성가)였는데 오늘 갑자기 거룩한 [찬송가]로 변하게 되는 것일까요?


혹 어떤 이들은 "복음성가를 예배중에 못 부르게 하는 것은 그 노래들이 저급해서가 아니라 [복음성가]는 '인간이 인간들을 향해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에 못 부르게 하는 것이지요. 예배는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여 드리는 것이잖아요. 뭘 모르면서 자꾸 삐딱하게 보십니까?"라고 항변합니다. 언뜻 대단히 옳아 보이지만 이 항변은 많은 모순점을 안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 분이 말하는 '복음성가'가 만약 558곡짜리 '찬송가' 이외의 모든 성가들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위의 항변은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최근에 [찬미예수 1500]이라는 성가 악보집을 편집하였는데 여기에 수록된 1500여곡 가운데 적어도 절반 가까이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아뢰고 고백하는 노래들이었습니다. 그 직접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위의 항변은 분명한 오류입니다.


둘째로는, 이 분이 말하는 '복음성가'가 정말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복음성가-즉 인간이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개하고 회심을 촉구하며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권고하는 수평적 노래]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 또한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 공용 통일 '찬송가' 558곡 가운데 60% 이상이 바로 이런 노래들, 즉 전형적인 [복음성가]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자 근래에 어떤 분들은 "어? 그렇네. 그렇다면 558곡 안에 들어있는 그런 노래(수평적 복음성가)들도 예배때 부르지 않도록 하자"라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배때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인간이 하나님께 직접 아뢰는 노래)은 그 수가 558곡 중에서도 기껏 100여곡도 안 되게 됩니다.


이것도 아닌 것 같으니 또 어떤 분들은 "아니다. 찬송가 558곡 안에 포함된 복음 성가들은 요즘 복음성가들과는 차원이 달라서 예배중에 불러도 된다. 찬송가에 포함된 것만 봐도 그렇지 않느냐. 이곡들은 그래서 '복음성가(Gospel songs)'가 아니고 '복음 찬송가(Gospel Hymns)'라고 하는 곡들이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분들께 "그러면, 지금 통일 찬송가집에는 편집당시 포함된 국내곡 13곡 외에는 1938년도 작곡된 곡이 최신(?)곡인데, 그렇다면 1938년 이후에는 더 이상 수준높고 거룩한 노래들이 만들어지지 않았느냐?"라고 물으면 묵묵부답입니다.


왜 이런 상황이 되었을까요?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우리 한국교회가 '찬송가'라는 명칭에서의 '찬송'이라는 단어를 본질적인 의미, 즉 영어에서의 'praise-격찬하다, 자랑하다'와 꼭 같은 의미로 해석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찬송.찬양'이라는 말을 음악용어가 아닌, 다른 대상을 격찬하며 자랑하다라는 본래의 의미로 정확히 해석해 주기만 하여도 지금 한국교회 내에서 교회음악을 가지고 벌이고 있는 수많은 논쟁들의 상당수는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신 하나님을(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격찬하고 자랑하고 칭송하려고 정해진 시간에 한 자리에 모였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우리의 입에선 어떤 고백들이 터져나올 것이며 우리가 내 보이는 감정적 표현과 행동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리고 바로 그 고백들에 음악적인 멜로디를 붙였다면 그 노래들은 어떤 가사내용을 지녔을 것이며 우리는 어떤 반응으로 그 노래들을 부르게 될까요? 
바로 그것이 [찬송가(중국에선 찬양가, 일본에선 찬미가)]이거늘...† <다음호 계속. 마지막회>

 

찬양(讚揚)에 대한 오해 (제 4회)

 

지난 8월, 저희 가족들은 지난 해에 이어 다시 올해도 거제도에 사시는 서은경 전도사님의 배려로 여름휴가를 거제도로 갔습니다. 시원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2층 베란다에 서 전도사님을 비롯해 여러 자매들이 서서 바다 구경을 하고 있는데 저희 딸 로아도 거기 함께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아가 자기가 신은 흰색 샌들을 들어 보이며 전도사님과 이모들에게 자랑을 했습니다.


"내 신발, 우리 아빠가 고쳐줬어." 끈과 바닥이 떨어졌기에 그 전날 저녁에 본드로 붙여서 깨끗이 고쳐 주었던 것입니다. 뒤이어 로아는 뒷짐을 지고 오른 손은 치켜들어 엄지를 내세우고는 '만약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간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거만한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우리 아빠가 최-고야! 우리 아빠는 키도 크구 힘도 쎄구 뭐든지 다 고칠 수 있어! 씨."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서 전도사님은 두고두고 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로아가 인상을 잔뜩 쓰고는 잡아먹을 듯이 입술을 내밀어서는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께 여쭐까요? 거제도 2층집 베란다에서 저희 딸이 사람들 앞에서 한 일이 무엇이지요?  이제는 금방 대답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옳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아빠에 대한 찬양(讚揚, praise)였습니다. "이 신발 우리 아빠가 고쳐줬어. 우리 아빠가  최고야! 우리 아빠는 키도 크고(?) 힘도 세고 뭐든지 다 고칠 수 있어." 이게 무엇입니까? 바로 '찬양'입니다. 이게 바로 찬미요 찬송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찬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누군가 그렇게 제안한다면 이제 바로 여러분의 입으로 정말 찬양하실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이 연재의 제일 첫 회를 기억해 보십시오. 서울 어느 교회 중고등부 학생들이 강사인 제 앞에서 20분 가까이나 소리쳐 떠들며 자신들의 전도사님을 자랑하고 칭찬했던 그 일과 그 내용들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떤 대상에 대한 '찬양'이요 찬양의 '내용'입니다.


어떤 대상(인격체)에 대한 찬양은 그 대상의 능력과 성품과 업적 등에 대하여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그것을 선포하거나 격찬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찬양'에는 왜 무엇 때문에 찬양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자,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라고 부르는 노래들 가운데는 이러한 가사들로만 이루어진 노래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다 함께 주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찬양, 찬양. 오, 주님을 찬양합니다. 소리높여, 손뼉치며, 춤추어 찬양합니다. 정성을 다해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놀라지 마십시오. 엄밀히 말해(그렇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런 가사만으로는 진정한 '찬양'일 수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저의 생일날 [낮해밤달] 독자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일어나 "우리 이 시간 최용덕 간사님 칭찬 좀 합시다. 돌아가면서"라고 제안했고

다들 환호로 동의했습니다. 광주에서 온 한 자매가 일어나 외쳤습니다. 


"오, 칭찬을 받기에 합당하신 최용덕씨 당신을 진정으로 칭찬하고 자랑합니다. 우리 다 함께 최용덕씨를 칭송합시다."
그리고는 그녀가 앉자 대구서 온 한 형제가 기타반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오, 최용덕씨. 당신을 칭찬합니다. 소리 높여, 손뼉치며 당신을 칭찬합니다. 칭찬, 칭찬, 격찬, 자랑, 아..."그가 앉자 이번엔 부산서 온 자매가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읊었습니다.
"오, 최.용.덕. 이 시간 우리가 모여 당신을 칭찬하노라. 신령과 진정으로, 온 마음을 다해 그대를 칭송하노라. 아, 최.용.덕. 다함게 칭찬, 칭찬!"그쯤 되면 최용덕이 머리가 열을 받지 않겠습니까?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쳐댈 것입니다.


"아 이보시오들! 나를 칭찬한다고 했으면 칭찬을 해야 할 것 아니오? 왜 칭찬은 안 하고 자꾸 엉뚱한 소리들만 하고 있는거요? 칭찬을 한댔으면 칭찬을 하시오. 구체적으로 말이오.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다는 것이오? 도대체 무엇을 칭찬하겠다는 것이오? 앙? 최용덕이는 잘생겼다든지, 키가크고 우람하다든지, 똑똑하다든지, 뭘 잘 한다든지(*해당되는 게 하나도 없네) 좀 설명을 해야 될 것 아니냐는 말이오!"


여러분, 이해가 되시는가요?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모여 놓고는 정작 하나님의 어떤 부분을, 어떤 능력과 어떤 업적을 찬양(격찬, 자랑, 칭송)할 생각은 안하고 밤새도록 음악에 맞추어 "찬양 찬양"만 외쳐대고 가면 그게 진짜 '찬양'이냐는 말입니다. 심지어 '할렐루야'라는 말도 '여호와를 찬양하라'의 히브리어 문장이지 그 말 자체가 찬양의 내용인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으며 여러분이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것을 이야기하십시오. 그것을 하나님께 직접 고백해도 좋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도 좋습니다. 경험한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우면 외치십시오. 그거라고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켜 놓으셨는지 그 하나님께 대해 사람들에게 자랑하십시오. 구체적으로 말입니다.말로 하다가 부족하거든 그 내용에다 멜로디를 붙여 노래로 하십시오. 아니면 그 내용을 그림이나 글로 표현하여 나누십시오. 말을 못하겠거든 그저 눈물과 환희의 미소만으로도 족합니다.
그것이 진짜 '찬양'입니다. 성경이(아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진짜 찬양입니다.


"내 신발, 아빠가 고쳐줬어. 우리 아빠가  최고야! 우리 아빠는 키도 크고 힘도 세고 뭐든지 다 고칠 수 있어!"누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거든 32개월(만 두 살 8개월)짜리 저희 딸이 사람들에게 자기 아빠(저)를 찬양하는 이상으로 찬양하십시오. 그 정도도 고백할게 없다면 당신은... 조금 문제가 있는 크리스챤이겠군요. 하나님께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신자라면 또 모르겠지만....자, 보십시오. '찬양'은 음악만으로 표현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천만의 말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찬양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만의 '독과점 품목'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아닙니다. 음악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글, 시, 가사)을 담아서 표현하는 또 하나의 수단일 따름입니다.오히려 대부분의 찬양은 우리의 말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한국에서 '찬양사역자'라는 말은 그 사용여부를 심각하게 논의해봐야 합니다. 오직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역자들만이 이 용어를 독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 용어 자체가 불합리한 합성어입니다. 세상에 '찬양사역(선교):Praise Mission'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찬양(praise)은 mission 그 자체이지 mission의 방법(수단)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말하는 '찬양사역(선교)'의 '찬양'은 영어로 'music'밖에 될 수 없습니다. 선교의 방법에 있어 'music'은 music(음악)일 따름이지 그것이 곧 'praise'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라서 한국에서의 '찬양사역(자)'라는 말은 '기독교 음악사역(자)'로 바뀌어야 합니다.
주일저녁(오후)예배를 다들 '찬양예배'라고 일컫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배는 글자 그대로 특별히(다른 예배모임과는 달리) '하나님을 격찬하고 자랑하고 칭송(praise)하는' 예배를 뜻합니까? 아니면 단지 '음악적인 요소가 더 많은' 예배 모임을 뜻하는 것입니까? 앞의 경우라면, 우와! 정말 굉장한 예배가 될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찹니다. 


전 교인이 한 마음이 되어 한시간 내내 시나 노래나 언어로, 온 몸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과 업적등을 소리높여 격찬하고 자랑한다면 정말 굉장한 모임이지 않겠습니까? 아니, 이런 굉장한 예배를 주일 저녁에 드려서야 되겠습니까? 주일 낮 시간을 이렇게 해야지요.


그게 아니라 뒤의 경우라면, 그 예배 모임은 실제로는 '음악예배'가 아닌가요? 아니, 그나저나 그 예배가 음악예배가 맞긴 합니까? 노래를 서너 곡 더 부르고 구역별 특송(?)이나 가족창을 한다고 그것이 곧 음악예배인가요? 정말 음악에배라면 예배의 모든 순서를 음악화 시키는 것입니다. 기도도, 심지어 성도들에게 하는 멧시지나 권면, 격려도 음악(노래)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에배는 나름대로 또 다른 의미와 열매가 있게되는 것입니다. 이때는 설교자도 자신의 말을 최소화하고 전하려는 멧시지가 담긴 노래를 활용하게 됩니다. 때로는 한 곡의 성가가 한 시간짜리 설교보다 더 큰 감동과 교훈을 줄 수도 있기에.그러나 우리의 '찬양예배'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그냥 명칭만 거창하게(뭐가 그 속에 있는 것처럼) '찬양예배'입니다. 그러니 이 용어도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따져나가면 우리 한국에서 '찬양'이라는 말을 집어넣어서 쓰는 대부분의 경우가 다 걸려듭니다. '찬양신학교'는 '하나님을 격찬하고 칭송하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특별히 양성해 내는 신학교'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많은 방법 가운데 특히 음악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선교하는 음악 사역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인가요? '찬양교단, 찬양 경연대회' 등의 용어에 있어서도 그 '찬양'이 'praise'인가요? 아니면 'music 혹은 song'이나 '성가'의 의미인가요? "다음은 찬양 한 곡 듣습니다.


'주여 이 죄인이'라는 찬양으로, 이 찬양은 전용대 전도사님이 찬양했습니다."라는 아나운서의 멘트는'찬양'이라는 용어가 본질적인 의미로 정확하게 사용되었나요?

이 모든 경우가 자꾸만 '찬양'을 음악적인 것으로 국한시키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앞에서 '찬양은, 하나님께 대해 구체적으로 자랑하고 격찬하는 것'이라고 설명드렸고 여러분도 동의하셨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보십시오. 어떤 집사님이 일어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저는 지난 주간에 재정적으로 이러이러한 큰 어려움중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남편과 함께 하나님께 간절히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기적과 같은 방법으로 그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좋으신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것입니다. 아, 멋지신 하나님!"
여러분, 이것이 무엇입니까? 네 옳습니다. 물론 오리지널 '찬양'이지요. 그것 말고 다른 말로 이런 것을 뭐라고 합니까?
맞추셨습니다. 이런 것을 바로 '간증'(干證;a confession)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또 한가지 중요한 결론이 얻어졌습니다.
[크리스챤의 간증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최고의 찬양행위입니다.]


다시말하면 크리스챤의 간증 그 자체가 가장 실제적인 찬양인 것입니다. 간증에는 '찬양'의 모든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에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그분이 내게 행하신 일과 능력, 하나님께 대한 칭송과 감사, 사람들에게 하는 자랑 등이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 하나님 찬양, 찬양, 할렐루야, 찬양"이라며 4부 합창의 완벽한 하모니의 성가대와 초호화 일류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부르는 노래보다, 못배우고 미천한 한 서리집사의 눈물섞인 1분짜리 간증이 진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찬양-진짜 찬양'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성가대가 거창하게 불렀다고 그게 곧 찬양인 줄 안다면 큰 오산입니다. 성가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게 아닙니다. 진짜 찬양은 음악의 '음'자도 모르는 산골 교회 할머니 집사님이 하나님께 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어떤 교파에선 주일예배 시간에(아니 모든 예배모임에서) 반드시 성도들의 '간증'을 중요 순서로 집어 넣습니다. 간증은, 지난 한 주간 동안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동행하시고 우리 개개인의 삶 가운데 깊이 개입하셔서 역사하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성도들의 생생한 증언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늘 이런 간증이 고백되어져야 하기도 하겠지만 그리스도인들 서로간에도 이러한 살아있는 간증의 나눔은 절대 필요합니다. 간증은 서로를 격려하고, 기쁨과 감격과 감사를 배가시키며, 한 사람의 성령충만함의 영적 에너지를 다른 연약한 성도들에게도 전이(轉移)시키는 놀라운 효과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간증은 함께듣는 온 무리들로 하여금 동일한 뜨거움과 감격으로 하나님을 찬양케 합니다. 지난호의 [약송의 땅]이라는 저희의 간증을 일고 많은 분들이 저희와 동일한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고백을 전해 왔습니다. 바로 그것이 간증의 위력이자 열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에는 성도들 개개인의 살아있는 간증(진짜 찬양)이 없습니다. 아니, 있어도 그걸 나눌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오직 모든 예배와 모임에선 설교자의 일방적인 설교가 있을 뿐입니다. 교회가 대형화되어 갈수록 나눔은 점점 불가능해지고, 한쪽에선 일방적으로 외치고 한쪽에선 내내 앉아서 듣기만 하고 있는 시스템에 모두가 아주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간증이라고 하면 흔히 무슨 큰 병을 앓다가 나았다거나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한 이야기인 줄로 아는 이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한국교회들이 신앙간증 문화(?)를 그런 식으로 이끌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경험되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비록 사소해 보이는 것일지라도-를 성도들이 서로 나누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작은 것에서도 감사하고 감격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삶의 태도는 '전염'이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고백이 많아질수록 언제나 행복한 사람이요 행복한 가정이요 행복한 교회인 것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이 연재를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제가 건강을 잃고 모든 사역을 중단한 채 산골에서 살고 있을 때 많은 분들이 애타는 마음으로 조언을 주셨습니다. 그중에는 이런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최선생, 당신의 육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디어디에 사는가 의사를 찾아가 보시오. 한의사인데 아주 경험도 많고 진맥도 잘 하고 한약 처방에 탁월할 뿐만 아니라 침을 특히 잘 놓는다고 합디다. 꼭 그분께 가도록 하시오. 그가 최선생을 도와줄 것이오. 그는 믿을 만한 사람이오."그런데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와 아주 비슷한 방식의 조언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김선생, 당신이 안고 있는 영혼의 문제-죄와 죽음과 영생-를 해결하기를 원하시거든 예수 그리스도께로 오시오.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실 유일한 분이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이오. 그분은 당신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며, 당신을 행복하게 하실 분이오. 그분은 믿을만한 분이라오. 그분께 곡 나아가시오. 그가 당신을 도와 주실거요."이런 말이 무엇입니까? 바로 '전도'입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의 해결자를 소개하는 말을 자세히 살펴 보면 그 안에는 온통 그 해결자에 대한 격찬과 자랑과 신뢰로 가득 차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찬양입니다. 찬미요 찬송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것, 그것은 가장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찬양'행위입니다. 복음을 소개하고 전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최대 최고의 '찬양(찬송, 찬미)'행위입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예배당에 모여 "찬양, 찬양, 여호와를 찬양"하며 한 두 시간씩 목이 터져라 노래하는 것보다 더 크고 더 실제저인 '찬양'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찬양(찬송,찬미)하는 노래-즉, 찬양가, 찬송가,찬미가'의 개념에는 이러한 가장 실제적인 찬양이 다 포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성도들이 개인적인 간증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나 복음을 소개하고 전하는 내용의 노래들은 가장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찬양가, 찬송가, 찬미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위의 노래들이 무엇입니까? 순수한 의미에서의 '복음성가'가 아닌가요?


그러므로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서로 대립되는, 전혀 다른 주제의 노래들인 양 말하는 것은 굉장한 오류입니다. 모든 '복음성가'는 '찬송가(찬양가, 찬미가)'의 핵심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공용 통일 [찬송가]안에 60%에 가까운 복음성가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복음성가들도 동일한 대접(?)을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찬양(讚揚)에 대한 오해 (제 5회) 

기독교계 방송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이제 우리나라 교회 안에서 '찬양'이라는 말을 음악적인 용어로 국한시켜 말하는 것을 고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아니, 어떤 면에선 방송 매체 자체가 점점 그것을 강화시켜 나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방송에서 진행자들이나 설교자들이 말하는 '찬양'은 거의 90%이상이 음악적인 측면에서의 '찬양'입니다. 하나님을 찬양(praise)하는 방법이나 수단이 음악 외에도 무수히 많음을 언급하는 것을 아직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찬송'이라는 용어는 100% 음악적인 용어로 확고하게 굳어졌습니다. 이제는 이 말이 본질적인 의미에 있어 음악과는 아무 상관없는 '어떤 대상을 칭찬, 칭송하는 것(praise)'이라고 말했다간 저 혼자 아는체 하는 놈이나 이단으로 몰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방송 용어에서 '찬양과 말씀, 찬양의 꽃다발, 찬양의 광장'등의 프로그램 이름에 나오는 '찬양'은 100% 음악적인 용어입니다. 심지어는 '노래, 노래하다'라는 말 대신에도 반드시 '찬양, 찬양하다'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찬양'이라는 말을 원래의 개념 그대로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는 언론인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로 일반 언론매체(일간지 신문, TV)의 기자들입니다. 그런데 씁쓸하게도, 이 '찬양'이라는 말이 기독교에서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곳이 없는데다 하나님께 대하여만 사용되고 있는데 반해 일반 언론매체에선 하필 북한의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언급할 때 꼭 이 말을 씁니다. 특히 요즘은 부쩍 많이 이 말이 귀에 들리고 눈에 띕니다. 무슨 이야기냐구요? 이런 표현들을 듣거나 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한총련 사무실에서 압수된 노트와 쪽지에는 김일성 부자를 찬양하는 내용이 가득 적혀 있었고....북한의 ㅇㅇㅇ는 돌연 김정일을 찬양하며 언성을 높여....북한에서 공중으로 풍선을 통해 날려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삐라에는 온통 김일성에 대한 찬양과 추모로...지금 이 기자들은 '찬양'이란 말을 잘못 쓰고 있나요? 아니면 여기에 나오는 '찬양'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어떤 노래일까요? 북한인들과 추종자들은 노래를 불렀나요? 그게 아니라면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할랄'과 같은 히브리어나, 영어 성경에서의 'praise'나, 우리말 성경의 '찬양, 찬송'이라는 말을 어떤 음악적인 개념으로 국한시켜 이해하는 것과 본질적인 원래의 의미(격찬, 칭송, 자랑...)대로 이해하는 것엔 성경구절의 해서과 적용에 있어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 한 예가 여기 있습니다. 흔히 '찬양, 찬송'에 대한 설교를 할 때 사용되는 성경 본문으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하나님)" <시22:3>

오, 세상에! 이 구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시고 늘 머물러 기거(?)하시는 곳이 있는데 바로 성도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가운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머물러 계시니 거기서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까? 아니, 하나님께서 머물러 기거하신다구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의 '찬송'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열심히 찬송가를 부르는 것인가요? 혹은 또 다른 어떤 구별된 노래들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르는 것인가요? 그러면 그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친히 거하신다구요? 물론 결코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음악적인 행위(노래)에만 국한된 얘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영어성경 본문대로 '찬송'이 'praise'가 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노래는 한 마디도 안 불러도, 우리가 그저 말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능력과 그분의 성품에 대해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어도, 예수님을 안 믿는 자에게 자랑하며 전하는 가운데도, 그저 하나님 지으신 작은 풀 한포기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감탄하고 탄성을 지르는 가운데에도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시며 기쁨으로 거하신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행위들은 음악과 아무 상관없어도 되는 것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나의 혀가... 종일토록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35:28>

이 본문을 가지고 "우리는 종일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앉으나 서나, 밥할 때나 설거지 할 때나, 버스나 전철 안에서도 입에서 늘 찬송가가 흘러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안보고도 1∼4절 다 부를 수 있도록 찬송가를 죄다 외우세요"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설교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성경의 '찬송'은 찬송가 같은 노래가 아니라 'praise'입니다. 다시말해 위의 본문은 이런 뜻입니다.


"나의 입으로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고 칭송하며 격찬하리이다."

그 해석과 적용 넓이나 깊이가 얼마나 달라집니까? (이해가 잘 안되시나요?)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시150:6)

이 성구는 어떻게 해석되고 있고 또 성도들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습니까?


'찬양, 찬송'의 본질적 의미의 대폭 축소 및 왜곡 현상에 대해 "에이, 골치 아프게 뭘 그런 걸 따지나? 그런 거 좀 틀려도 예수 잘 믿고, 구원받는데 지장도 없으니 그냥 넘어갑시다"라고 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해 본다면(특히 목회자 입장에선) 이것은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명령되어지고 있는 '찬양(찬송)하는 삶'의 의미를 어떻게 설교하고 가르치느냐에 따라 성도들의 삶의 반응과 적용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겠습니까?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음악적인 측면에 국한된 의미로서의 '찬양, 찬송'이라는 말의 사용을 자제하고 나아가 다른 적합한 용어로 대체해야겠습니다. 현재 '찬양'이라는 말을 넣어서 쓰는 말 가운데 그것이 '음악(music)'이라는 개념이라면 당연히 '음악'이라는 말로 대체해 주고, '노래, 노래하다'라는 의미라면 당연히 '노래, 노래하다'라는 말로 바꾸어주어야 하겠습니다.


(*기이한 것은, '음악, 노래, 노래하다, 노래를 부르다'와 같은 말을 쓰면 불경스럽거나 뭔가 덜 거룩한 것처럼 느끼는 풍조입니다. 오, 아닙니다. 왜 이런 용어들이 그렇게 느껴져야 합니까? 이 용어들은 '사람, 가구, 시(詩), 소설, 영화...'등과 같은, 너무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명사(名詞)입니다.(혹은 동사(動詞)입니다). 이 용어들이 불경스럽거나 덜 거룩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성경도 다시 쓰거나 새로이 번역해야 할까요? '노래, 노래하다'라는 말은 성경 시편에만도 수없이 나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노래, 음악'의 개념으로 '찬양'이라는 말을 대신 쓴 적이 없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가끔 있어도...)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지난 호에 이미 거론한 것도 있습니다.)


 나는 영 찬양의 소질이나 은사가 없습니다. → 나에겐 음악적인 소질이나 은사가 없습니다. (혹은, 노래하는) 다음에 우리가 들을 찬양은 '주여 이 죄인이'라는 찬양으로, 전용대 전도사님이 찬양했습니다. → 다음에 우리가 들을 노래는 '주여 이 죄인이'라는 곡으로, 전용대 전도사님이 노래했습니다. (*노래는→곡은) 찬양예배 → 음악예배
 찬양선교단, 찬양팀, 찬양단 → 음악선교단, 음악팀 찬양사역자 → (기독교)음악사역자
 찬양문화 → 기독교음악문화


이 글을 쓰는 저 역시 어설프게나마 기독교 음악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우리 음악사역자들이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찬양사역, 찬양사역자'라는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이 용어는 현재 유독 음악사역자들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회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을 찬양(praise)하는 사역(일)'은 음악하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찬양사역, 찬양사역자'라는 용어도 음악사역자들만의 '독과점품목'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노래는 못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로, 간증과 전도로, 그림이나 만화나 조각으로, 연극이나 영화나 인형극 등으로, 사진이나, 시나 소설같은 문학 작품으로, 혹은 단지 말 없는 선행으로 하나님을 찬양(격찬, 자랑, 칭송, 영광을 돌림)하는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런데도 그 분들은 '찬양사역자'가 아니란 말입니까? 오직 음악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었는 도구란 말입니까? 천만의 말입니다. 음악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이점(利點) 때문에 온 회중들이 다 같이 한 목소리로(혹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을 아뢰고 나누기에 음악이 대단히 효과적인 도구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음악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찬양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음악사역자들은 스스로를 '찬양사역자'라고 칭하는 대신 '기독교 음악사역자'라고 이름하는 것이 음악 이외의 도구들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분들께 대한 예의요 겸손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여전히 '다음에 들을 찬양은...' 대신 '다음에 들을 노래는...'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그릇된 선입견 때문에) 뭔가 부족한 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그저 '노래(song)'라고 하는 말 대신에 쓸 수 있는 용어는 없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노래'라는 말에는 이 세상의 모든 노래들도 포함되므로 그런 세속적 일반 노래와는 구별된 노래로서의 의미를 지닌 별도의 용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말 그대로 '구별된 노래(be divided song) 즉 성가(聖歌)라는 용어입니다.


'성가'는 물론 'a sacred song'이라고 번역되기도 하지만 'a hymn'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hymn'은 '찬송가'라는 말의 영어 단어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말 '성가(聖歌)'는 'hymn'보다도 더 넓은 영역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속적인 노래들과는 구별되는 모든 교회음악(혹은 기독교음악)을 통털어 일컫는 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음악'은 '노래'보다 더 넓은 개념의 용어입니다.)


일반적인 세상 노래와는 구별된 노래라는 개념이 필요할 때는 '찬양'이라는 말 대신 바로 이 '성가(聖歌)'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다름과 같은 경우입니다.

 

 찬양경연(?)대회→성가경연대회
 찬양가수→성가가수(singer)
요즘 많이 불리는 찬양(찬송)은...→요즘 많이 불리는 성가는...
 찬양단→성가단


특히 우리나라의 '복음성가 경연대회'라는 말은 하루빨리 '성가경연대회'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정말 그 대회가 순수한 복음성가만을 경연시키는 대회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실제 입상곡들 가운데는 복음성가의 범주에 들지 않는 곡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일반 언론인들이 '찬양'이라는 말을 쓰듯이 우리가 제대로 이 용어를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기 위해선 아마도 엄청난 어려움이 뒤따를 것 같습니다. 
특히 '찬송'이라는 말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갰습니다.

그래서 성경상의 '찬송'은 '찬양(praise)'과 같은 의미로 철저히 해석해 주되 교회 내에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의 노래'라는 의미로서도 이 '찬송'이라는 말을 계속

사용하게 한다면... 그건 또 하나의 혼돈이 될까요? 혹은 어쩔수 없는 선택인 셈일까요?†

 

찬양은 권세


 찬양은 아주 귀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지만 하늘나라에 가서는 오직 찬양으로 섬기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하고, 그 찬양으로 모든 어두운 권세를 이기는 것이다.


   어떤 부부가 있었다. 부부간에 재미있게 살아야 하겠는데, 부인이 잔소리가 많아 바가지를 긁기 일쑤였다. 어느 주일날 교회에 나왔다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부인이 또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자꾸 시비를 걸어왔다. 견디다 못한 남편은 대꾸했다가는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큰 소리로 찬송을 불렀더니3절 부를 때에 부인도 따라 부르더란다. 


  2절까지가 문제이다. 잔소릴 들어가면서 끝까지 찬송을 부르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찬양으로 모든 절망, 모든 어두움을 다 이길 수 있다. 이것이 곧 예배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찬양의 뜻 


찬양은 아주 귀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지만 하늘나라에 가서는 오직 찬양으로 섬기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하고, 그 찬양으로 모든 어두운 권세를 이기는 것이다.

 
   어떤 부부가 있었다. 부부간에 재미있게 살아야 하겠는데, 부인이 잔소리가 많아 바가지를 긁기 일쑤였다.

어느 주일날 교회에 나왔다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부인이 또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자꾸 시비를 걸어왔다.

견디다 못한 남편은 대꾸했다가는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큰 소리로 찬송을 불렀더니3절 부를 때에 부인도 따라 부르더란다. 


   2절까지가 문제이다. 잔소릴 들어가면서 끝까지 찬송을 부르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찬양으로 모든 절망, 모든 어두움을 다 이길 수 있다.

이것이 곧 예배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찬양의 능력 
 
폭탄충격증후군이라는 병명이 있다.

전쟁 중에 폭탄이 터지는 현장에 있던 사람이 살아난 후 실어증이나 불면증 대인기피증 등으로 시달리는 질환이다.  
 
2차대전후 이 증후군에 의해 실어증으로 크게 고통받던 퇴역군인이 있었다. 
어느 주일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는데 그 때 시편100편이 낭송되고 있었다.  
 

그 순간 퇴역군인은 자신이 실어증에 걸렸다는 사실도 모른 채 입을 열어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런 모습을 본 참석자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찬양의 힘은 위대하다.

 

 찬양의 사명


  1. 찬양의 사명


 @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인간 최대의 사명이며 특권이다.
 @ 찬양은 하나님의 집주소이다(하나님께서는 찬양 중에 거하신다)

 

2. 개인적인 찬양의 삶
 @ 찬양은 24시간의 일이다:항상 하나님을 찬양하라
 @ 찬양에 대해 연구하라:성경에서 찬양을 연구하고 성경구절로 찬양하라
 @ 하나님의 호칭을 찬양에 사용하라: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공부하고 왜 하나님이 우리의 찬양 대상인가를 인식하라.
 @ 찬양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라 :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역사하신 그능력과 은혜를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라.

 

 3. 교회에서의 찬양의 축복(신 33:7)
 @ 기도에 대한 응답:찬양은 하나님의 역사를 움직인다.
 @ 온전한 단합:찬양은 교회의 성도들을 온전히 하나로 연합하게 한다.
 @ 권능의 부여:능력을 받고자 하는 교회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 하나님의 보호하심:찬양하는 교회는 보호를 받는다.

 

 개교회 적용지침

1. 교회에서 찬양 사역팀을 만들어 봅시다.
2. 찬양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칩시다.

 

찬양의 회복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예수쟁이치고 말 못하는 이가 없고, 노래 못하는 이가 없다"고 합니다. 교회가 그 신앙적인 활동에 있어 전도와 음악을 그 만큼 중요하게 인식시켜 왔다는 뜻이 될것입니다. 요즈음에는 말뿐 아니라, 음악에 복음을 실어 전하는 것도 많이 보게 됩니다.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교에 있어 음악적인 역활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종교에 있어서도 음악적인 역활을 배제한 종교는 없을만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종교적인 예식과 의례에 있어서 음악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 있어서는 그런 보편적인 역활과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음악을 조력(助力)적인 측면에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본질(本質)적인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지으신 목적이 찬송을 부르게 하려는데 있다고 말합니다(사43:21).

그것은 다시 말하면 우리 인생의 목적이 찬양을 드리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을 깊이 인식하지만, 그와 함께 다른 갈등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시대는 찬양과 세속적인 음악이 너무 많이 혼합되고, 뒤섞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속의 멜로디와 리듬이 갑작스레 교회 안으로 들어와 혼동을 주는가 하면, 교회의 거룩한 성가들이 세속적인 가사로 뒤바뀌어 무대에서 불려지기도 합니다.

어제는 강단에서 경망스럽다고 질책을 당하던 악기들이 이제는 '찬양예배'라는 교회의 새로운 양식을 따라가기 위하여 교회마다 앞다투어 구입하는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옳은 것일까요?  정말 키타를 치면서 예배시간에 찬양을 드려도 되는 것일까요? 또는 어떤 리듬, 어떤 형식까지를 우리는 찬양으로 인정하여야 할까요?

이런 것들이 찬양을 하는 현재의 우리들에 있어서 고민거리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18세기 말에 세속의 음악을 연주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던 피아노는 현재에 거의 모든 교회에서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교회에 있어서는 대단한 반대를 겪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피아노는 경건한 예배용 악기가 될 수 없으며, 예배는 오르간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모짜르트(W.A.Mozart 1756-1791)의 몇몇 교회음악은 음표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교회 지도자들의 비난을 들어야 했습니다. 바하(J.S.Bach 1685-1750)의 교회음악도 너무 기악적이라는 이유로 충고를 들어야 했습니다. 이는 음표가 너무 많으면 예배에 적당한 음악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짜르트나 바하보다 200년이나 앞선 16세기의 음악에 있어서도 세속음악에 대한 논쟁은 마찬가지였습니다.


1517년 루터에 의하여 종교개혁이 시작된 이후, 북부 유럽은 거의 개신교의 영향권에 들게 되었습니다. 구교인 카톨릭에서는 점차 내부개혁의 소리가 높아졌고, 급기야는 반동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이 1545년에서 1563년까지 이태리 북부 트랜트에서 열렸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트랜트 종교회의(The council of Trent)'입니다. 이 회의에서도 당시 교회음악에 대한 비판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교회음악이 세속화되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상의 음악을 정선율로  작곡을 한다든가, 세상의 음악을 모방하여 예배음악에 사용하는 일이 빈번하게 행하여졌기 때문입니다.


둘째, 너무 복잡한 다성적 선율로 인하여 청중들이 가사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세째, 교회 내에서의 과다한 악기 사용에 대하여도 비평의 소리가 나왔고, 그 외에 성가대원들의 불경건한 태도나 나쁜 발음에 대하여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교회지도자들은 교회 안에서 다성(多聲)음악의 금지조치를 취하기를 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복잡하다고 여겨지던 당시의 다성음악, 소위 팔레스트리나 양식이라고 불리던 16세기의 다성음악은 18세기 바하의 다성음악에 비하면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단순한 음악이었습니다.


팔레스트리나(G.P.Palestrina 1525-1594)는 교회음악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는 트랜트 종교회의에 6성부 미사인 '마르셀로 미사(Mass of Pope Marcellus)'를 보내어 다성음악도 영적으로 경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고민을 '역사적인 고민'이라고 받아들여도 무난할것 같습니다. 시대마다 교회가 세속화(世俗化) 되어간다는 자각(自覺)의 소리는 있어왔고, 그런 소리에 의하여 우리의 교회가 여기까지 그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왔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혹시라도 우리 자신의 아집(我執)에 사로잡혀 나와 다른 것을 무조건 무시하는 병패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반성해야 합니다.

교회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교회에 음악적인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제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음악을 오늘 받아들인다는 것은 실로 인간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취향이 변하신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찬양은 음악보다 심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단지 귀에 들리는 소리의 규칙적인 구성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나아가서는 영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하나의 의미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 있어 찬양의 내적인 의미는 그 그릇을 달리할 수 있지만, 역시 그 내면에 흐르는 중심(中心)은 같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단순한 선율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사람들의 정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화려한 선율과 다양한 리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사람들의 정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우리 모두 랩을 부르며, 디스코에 맞추어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방식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젊은 사람들은 기성세대의 정서를 이해하고, 기성세대는 젊은 사람들의 정서를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찬양의 바른 회복은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하나라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의식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의 합일을 이룰 때, 우리는 이 시대에 옳은 찬양과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브리서 13장 15절)


하나님의 감격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수 년 전 나와 아내는 한 달 가까이 유럽을 여행하던 중 아르헨티나에 남아있던 우리 아이들이 부친 편지를 로마에서 받은 적이 있다. 두말할 나위없이 우리는 단숨에 아이들이 보낸 편지를 뜯어 보았다. 여섯 살바기 큰 아이는 자기가 쓸 줄 아는 글이란 글은 죄다 썼다. 엄마, 아빠, 삼촌, 소, 말 등 이런 것들 말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편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애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코 끝이 찡해 옴을 느꼈다. " 이것 좀 보세요." 우리는 서로에게 말했다. "기특한 녀석!"


다섯 살바기 둘째 아이는 그나마 글을 몰랐다. 그래서 신랑신부가 서 있고 내가 주례를 보는 결혼식 그림을 그려 보냈다. "이 그림을 보구려!" 우리는 그림을 보고 너무 기뻐서 한참을 웃었으며, 아이들이 무척 보고 싶어졌다.


그 다음에 우리는 막내가 보낸 구겨진 종이를 폈다. 거기에는 뜻모를 선과 원, 사각형 등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 좀 봐요!" 아내가 울기 시작했고, 곧 나도 따라 울었다.

우리에게 그 편지를 전해 준 이탈리아 목사님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우리를 쳐다 보았다. 나는 그 목사님께 편지를 내밀었다. "참 멋진 편지들이지요?" 하고 물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그 편지들을 보고서 왜 아무런 감격도 느끼지 못했을까? 그것은 자기 아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와 아내가 우리 아이들의 부모인 이상 그 편지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들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것들을 집에 보관하고 있다.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여, 여러분 자신의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라. 비록 그것이 매력적이지 못하며 하찮은 내용일찌라도 하나님은 헨델의 '할렐루야 합창'보다 여러분의 새 노래를 더 사랑하실 것이다. 노래를 시작하라. 하나님을 향한 바른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새로운 말과 노래를 그분께 드려라. 주님께 오늘 당신에게 일어난 일들, 주위에서 본 것들, 그분의 권능과 영광을 나타내는 어떤 것들에 대하여 아뢰고 그것을 찬미하라.


그러면 자식들의 편지를 받았던 우리 부부처럼 하나님은 하늘에서 감격하실 것이고 천사들은 그 이탈리아 목사님처럼 어리둥절해서 하나님을 바라 볼 것이다. 하나님은 소리치실 것이다. "천사들아, 이 찬양을 들어 보아라."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자, 이제 죠니(Johnny, 말라깽이라는 뜻, 후안 까를로스 목사의 애칭)의 떠듬거리는 찬송을 잠시 들어보자."
당신의 빈 상자를 당신 자신의 새로운 말들과 노래들로 채우라. 그분의 전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그분을 찬양하라.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제자입니까」중에서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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