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음악의 역사에 관하여



 1. 교회음악의 흐름
 
<초기 기독교 시대 ∼ 중세의 찬송>

기독교 시대의 음악적 흐름을 살펴보면, 구약의 순수한 히브리음악의 시대와 박해를 당하면 서도 전례음악을 전승해가면서 이방의 문화적 영향으로 변모해가는

초기 기독교의 시기, 그리고 기독교의 공인된 확고한 위상으로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융합된 문화권에서의 교회음악의 형태로 선명하게 구분이 가능하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해당되는 '박해의 시대'에는 성도들이 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찬송을 불렀으며 (행16:25∼26), 그 때문에 그들의 신앙생활과 찬송은 은밀하고도 결사적인 모습이었다. 음악의 형태는 전례되던 기악과 함께한 찬양이 성전에서도 없어지고 회당의 순수한 무반주 찬양으로 바뀌었고, 기악의 사용은 2세기에 이르러 조심스럽게 하프와 비파만이 허용되었다.


음악의 느낌은 당시의 음란한 이교도의 천박한 노래와 달리 영혼을 감동시키는 순수함과 자연스럽고도 깊은 신앙의 흐름이 표현되었다.

초기의 2백년 동안은 기독교 음악이 체계가 잡히지 않았으며, 3세기에 이르러 많은 이교도들이 개종해서 합류하게 되므로 이교도의 나쁜 영향이 미치지 못하도록 기독교 음악을 잘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히브리의 음악은 신자의 정신 속에서 종교적 실천과 연결된데 반해 헬라와 로마의 음악은 세속적 영향을 방어하는 양상이었다.

A.D. 313년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는 공인을 받아 백해에서 벗어나고, 380년에 로마의 국교로 인정된 이후에는 기독교가 특권세력으로 바뀌면서 교회당이 세워지며 음악적 체계와 수준도 높아갔다. 기독교 당국은 이단적 찬송을 막기 위해 악기의 사용과 창작을 규제했고 시편과 찬송 가만 부르게 했다. 회중들은 예배에서 찬송이 금지되고 훈련된 성가대가 찬양하였지만, 교회 밖에 서는 회중들의 창작 찬송이 불려졌다.

식스투스 교황 시대에는 성가연습을 위해 수도단이 설립되었고, 대 교황 레오(440∼461)는 성가 학교(스콜라 칸토룸)가 부설된 성 요한과 성 바울의 수도원을 개설하였다.
교회음악의 본격적인 발전을 맞게된 이 때에는 교회음악이 일반 회중으로부터 전문인에게로 옮 겨진 시대이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교회음악의 찬송과 성가의 종류는 암브로시우스 성가(Chant)와 그레 고리안 성가(Chant)이며, 군소적으로는 갤리칸 성가와 모자라비크 성가도 있다.


암브로시우스 성가 (Ambrosian Chant)


밀라노의 대주교 암브로시우스(340∼397)는 '라틴찬송의 아버지'라고도 일컬어진다.
그는 정통신 앙을 고수하기 위해서 삼위일체의 교리적 찬송을 부르게 하였다. 그의 찬송은 당시의 민요와 같 이 한 음에 한 음절씩을 사용한 형식으로써 종교적 민요라고 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암브로시우스 찬송의 특징은 언어의 액센트 취급에 있다. 고대의 시(詩)는 구어체의 액센트를 무시 하는 경우가 많지만, 암브로시우스는 시적인 운열에 어울리는 액센트를 사용했다. 그의 운율의 특 징은 오늘날 찬송의 기본 형태중 하나인 '장 운율'(8.8.8.8)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장운율은 각 절이 4행으로 되어있고 짧고 긴 모음이 교대로 나타나는 운율 형태이다.


암브로시우스는 서방교회에 처음으로 교송법을 도입하여 교회음악에 혁신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당시의 다른 찬송작가들이 암브로시우스 찬송을 모방했는데, 암브로시우스 찬송은 이렇게 모방된 찬송까지 통칭하는 것이며, 이후 독일 개신교의 회중찬송인 코랄(Choral)의 모델이 되었다.

암브로시우스의 업적은 교회음악의 체계를 갖추기 위한 초석을 쌓은 것이다. 암브로시우스 찬 송은 몬테카지노에서 교황 스테판 4세(1057∼1058)가 그레고리안 성가의 공식적인 사용을 위해서 암브로시우스 성가를 버릴 때까지 사용되었다.


그레고리안 성가 (Gregorian Chant)


그레고리안 성가는 무반주의 단선율 음악이고, 전적으로 전음계를 사용한 라틴어 가사의 산문 적 리듬을 따른 낭송풍의 노래이다. 선율의 특징은 강조하기 위한 도약이나 리듬적 요소가 없이 단순히 반복되는 조용한 선율을 가지고 여러 성서적 요소를 일련의 지적 문절 속에다가 결합시키 는 인상이다. 그것은 잔잔한 음성처럼 은은하면서도 호소력이 있으며, 색채와 갈등으로 표시되는 세곡음악과는 달리 안정감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는 로마의 성가학교 교육을 강화시켰고, 그레고리안 성가는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 교회음악의 모범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레고리안 성가는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여러 가지 로 변형되어 사용되었다. 세속적인 곡조가 예전에 끼어들고,라틴어가 아닌 모국어의 가사가 사용되는 등의 헌상 때문에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개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 는 승인된 단성성가(plainsong)들이 수록된 공인된 책들이 출판되었다.

13∼14세기에서 둘 이상의 다른 멜로디가 결합된 대위법적 다성음악(polyphony)이 출현하게 되 면서 로마 카톨릭의 정화운동과 옛 단선율 노래로 복귀하려는 시도가 심한 장애를 받게 되었고 결국에는 차츰 멀어지게 되었다.

19∼20세기에는 성당이나 수도원에 리이드 오르간이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자 그레고리안 성가의 순수한 무반주 영창의 모습은 사라지게 되고 오르간 반주에 의존하게 되었다.



2.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음악

종교개혁의 발단은 표면적으로는 성서적이지 못한 엉터리 교리의 산물인 면죄부의 발행이었지만, 이미 신앙의 정서적 환경은 대중찬송에 비 신앙인의 작품이 다량 유입되고, 종교적인 노래와 세속적인 노래의 범주가 없이 혼합되는 문란함과, 종교적 선전과 이상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한 노래들의 그 왜곡된 오염이 심각해서 개혁의 필요를 더욱 느끼게 하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의 개혁이 교리적인 개혁만 되었으면 절반의 성공만 될 수도 있었지만, 마틴 루터는 교회음악적인 환경과 예배의식을 모두 개혁함으로써 완전한 개혁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종교개혁은 유럽역사에 크나큰 변혁을 일으켰고 동시에 세속음악과 교회음악 모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기독교는 동서로 갈라졌지만 서방 교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로 통일되어 용어도 라틴어 하나를 사용하게 되었고, 예배의 양식이나 교회음악과 성가 한 곡까지도 교황의 허가 없이는 가감이 허락되지 않았다.

종교개혁시대의 교회음악적 특징은 중세시대에 교회음악의 참여에서 제외되었던 회중들이 개혁주의 교회에서의 〈'만인 제사장직'〉의 주장으로 모든 예배음악에 참여해서 대중적인 노래가 예배에 도입되었으며, 자기나라 말과 언어로 직접 찬양할 수 있는 회중찬양의 시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시대는 카톨릭의 획일적인 노선에서 벗어나서 각 국가별로 자신들의 민족정서와 시대적 환경에 맞는 찬송이 발전하게 되었으며, 개인적 신앙의 자유는 종교적인 예술음악의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코랄(Choral)


코랄은 4성부로 쓰여져서 초기에는 테너에 있는 선율(멜로디)을 회중들이 유니슨으로 제창하고 3성부는 소년들이 주축된 성가대가 화음으로 함께 불렀다. 이렇게 노래하는 습관은 조금은 부적절한 언어구조를 가지고도 세계 제일의 노래 잘하는 국민정서를 일궈내게 되었다. 초기 코랄 작가들은 새롭게 가사와 곡조를 창작하기도 했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전인 그레고리안 성가의 선율과, 종교개혁 이전의 비예전적 찬송, 세속민요 등에서 자료를 가져다 만들기도 하였다.


[구조적 특징]은 A-A-B 형식의 소절형식(Barform)인데 이것은 15∼16세기의 시인과 작곡가들이 정기적으로 시와 음악의 기예를 닦던 '마이스터징어'(meistersinger)의 음악적 전통에서 온 것이며, 당시의 모든 계층이 애창하는 소박하고 유머러스하며 민요조의 무반주 단선율 노래였다.

[음악적 특징]은 리듬의 생동력을 들 수 있으며, 신앙의 찬송은 악구가 짧은 음표로 시작되고, 명상이나 기도의 찬송은 긴 음표로 시작되는 특징이 있었다. 개혁 당시의 코랄은 순박하고 힘찼으며, 잘 알려진 옛 선율만을 사용하였다. 음악적으로는 단순하지만 그 선율에는 독일 민족의 신앙과 고뇌 그리고 환희와 평화가 포함되어 있으며, 코랄 칸타타, 코랄 모테트의 합창곡과 코랄 전주곡,코랄 변주곡의 오르간곡 그리고 수난곡,칸타타,오라토리오 같은 종교적 예술작품 등의 많은 예술음악의 원천이 되었다.

루터는 그 당시의 가장 진보적인 음악이론에까지 손을 대어 8개의 교회선법을 12개로 확대하여 오늘날의 장조와 단조의 조성을 낳게하는 길을 열었으며, 그의 음악적인 공헌은 코랄 제작에 있어서 오늘날의 C장조인 이오니아 선법을 독창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루터의 회중 찬송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중 찬송의 발달은 그 속도가 빠르지 못하였고 16세기 말 경에 가서야 회중찬송이 예배용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3. 종교적 예술음악

종교개혁 이후 17∼18세기에 유럽은 문화적으로 바로크 시대를 맞이한다.

바로크(Baroque)는 궁정과 귀족들의 웅장한 건축양식에서 시작된 것으로서 음악에 있어서는 질서의식과 함께 모든 요소를 종합 해서 대형화시킨 바로크양식이 꽃을

피우게 된다. 바로크 음악의 특징인 통주저음의 사용하며, 개성화된 것보다는 객체화된 인간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개혁으로 인한 신·구교의 갈등과 반목에 급기야 전쟁에까지 치른 후에 서로 독자적인 변화와 성장을 추구하는 바로크 중기에는 정신사와 생활 전반을 규제하던 교회의

긴장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사람들의 문화적 욕구가 발산되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대단한 발전을 하게 되었다.


새로운 예술양식인 오페라의 창작은 17세기 음악의 가장 위대한 공헌이지만 여러 막(幕)으로 구성된 것은 10세기의 교회극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새로운 이 형식은 음악적인 낭송을 통한 자연스러운 표현을 하려는 새로운 시도의 결과로 얻어진 17세기 바로크의 특징이며, 정열적이고 현란하며 즐겁고 화려하고 웅장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오페라 작곡가들은 가사를 음악으로 표현하는데 극적인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악기들이 개발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실내 기악음
악, 독주악기 등이 발전했고 이런 모든 것이 교회음악에 영향을 미쳤다.


바로크 교회음악은 기보법의 발전과 악기의 발달에 힘입어 기악음악이 많이 사용되었다.
바로크시대의 직업적인 음악가들은 자신의 능력과 박식함을 나타내기 위해 다양한 형식으로 대단한 양의 작품들을 쏟아내었는데 세속 칸타타와 오라토리오 등이 나타났고, 오르간과 오르간 음악이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교회음악가들도 이런 흐름에 그들의 창작의욕을 예배와 직접 관련된 순수 교회음악에서 다 표현할 수 없으므로 종교적 성향의 수준 높은 연주회 성격의 예술 음악을 창작하게 되어 칸타타, 오라토리오, 수난곡 등이 탄생되었다.



모테트(motet)


모테트는 중세 르네상스 시대를 전성기로 하는 중요한 성악곡의 명칭이다. 중세에는 테너에 있는 정선율의 지배와 다성의 각 성부에 가사가 각기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하여 폴리포니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3세기 초 노트르담 악파에 의해 정형화 되었다. 14세기까지는 세속적인 가사가 우위를 차지했으나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다시 종교적인 내용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뒤파이 등의 부르고뉴 악파에 의해서 중세 모테트의 2대 특징인 정선율의 지배와 多歌詞性이 사라지고 4성부가 표준화되고 각 성부가 공통의 가사를 사용하게 되었다. 15세기의 중요한 발전은 각 성부가 평등하게 모방에 참여하는 通模倣方式이다.


바로크 시대에는 독창이나 통주저음에 의한 기악반주의 도입으로 독창 모테트와 몬테베르디에 의한 협주양식의 모테트가 확립된 것이 특징이다. 독일의 모테트는 종교개혁 이후 요한 발터 등 의 손으로 코랄을 중심으로한 프로테스탄트 특유의 코랄 모테트가 성립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모노디에 의한 독창 모테트가 지배적이었고, 독일의 모테트는 합창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칸타타(cantata)


칸타타는 종교적 설화에 근거를 두고 관현악을 수반하는 아리아, 레시타티브, 이중창, 합창을 서정적이고 극적인 몇 개의 악장으로 구성한 17세기에 시작된 혼성곡이다. 어원은 이탈리아어의 cantare(노래부르다)이며, 기악곡 형식의 소나타에 대하는 말이 된다. 가사의 내용에 따라 실내 칸 타타(cantata da camera)와 교회 칸타타(cantata da chiesa)로 나뉜다. 칸타타라는 말은 원래 실내 칸타타에 적합한 것이었지만, 18세기 초부터 독일 개신교의 독창용 칸타타를 시초로 전용하게 되었다.


교회 칸타타는 그 가사의 소재에 따라 코랄 칸타타, 시편 칸타타, 격언 칸타타, 복음서 칸타타 등으로 나뉘지만, 전반적으로는 코랄의 멜로디로 사용되었다. 바흐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실내 칸타타는 격렬하고 긴장된 표현이 특색이었으며 오페라의 前身이었다.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베버, 브람스, 생상스, 댕디, 설리번, 본 윌리암스 등이 작곡되었지만, 칸타타는 차츰 오라토리오로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오라토리오(oratorio)


오라토리오는 오케스트라나 오르간 반주에 의한 코랄과 독창을 포함한 연주용의 종교적인 극시 이며, 종교적 오라토리오는 17세기 초에 로마에서 생겨났다. 그것은 성서에 바탕을 둔 전레적 모 테트에서 발원하였고, 기독교의 전례 음악극을 대체하여 나타난 것이다.


음악적으로는 칸타타의 발전에 대한 해결과 바로크 음악가들의 폭넓은 창의력의 수단으로써 애용되었다. 칸타타보다는 더 큰 규모이며, 칸타타에 없는 劇적인 활동이 큰 규모의 칸타타와도 구별하는 방법이다.


오라토리오의 발전에는 교회 칸타타 작곡에 헌신한 '카릿시미'(1605∼1674)의 공헌이 크다. 그는 구약성서의 인물을 소재로 많은 오라토리오를 썼으며, 라틴어 오라토리오를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고전적 오라토리오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극적인 줄거리에 생생한 현실감을 주는 단순한 호모포니 합창이 중심으로 되어있다.


라틴 오라토리오에는 교회의 사역자들을 성인으로 추 대하는 일이 많았다. 카릿시미의 제자인 스카를랏티(1660∼1725)도 500여 편의 교회용 칸타타를 작곡했으며,

오페라의 작곡에 뛰어났고 오라토리오의 발전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의 발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오라토리오와 오페라의 발전은 이탈리아에서 16세기 교회음악의 깊은 종교적 정신을 사라지게 하였고, 카발리에리(1550?∼1602) 이후 로시니에 이르기까지 주로 즐기려는 것이 되었다.


독일에서 오라토리오가 점점 발전하게 되자 전례성가 대신 코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고, 칸타타와 오라토리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바흐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하여 그의 2대 걸작 수난 오라토리오(마태, 요한)와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불후의 명작인 오르간 음악을 남기게 하였다.


수난곡 (passion)


수난곡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음악으로 얘기한 것"이라 할 수있다. 수난곡은 전례적인 것과 비전례적인 것이 있는데, 전례적인 것은 초대 교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그것은 성서의 수난 장면을 낭독하는 것으로써 그레고리안 성가풍으로 각자의 맡은 역할들을 서로 다른 음역이나 속도(Tempo)로 부르던 것이 수난곡의 기원이 되었다. 福音史家들이 부르는 방식에 따라 낭창으로 응창적 수난곡과 다성부로 부르는 通作的 수난곡으로 분류한다.


비 전례적인 수난곡은 응창적이고 통작적인 방식과 다르게 통주저음의 반주에 의한 단선율의 독창(모노디)인 레시타티브가 사용된 오라토리오 수난곡을 말한다. 17세기 중엽부터 나타난 비 전례적인 수난곡은 수난 이야기를 여러 가지로 편집하기도 하고, 성가집에서 가사를 따오기도 했으며, 묵상적인 종교시를 많이 도입하여서 수난 칸타타와 수난 오라토리오가 출현하게 된다.


수난 칸타타는 교회 칸타타와 같이 성서 낭독이나 설교에 이어 연주되었으며, 수난 오라토리오는 노이마이스터의 칸타타 전용으로 작사된 대사에 의해서 태어났다.

바흐의 2대 걸작 <요한 수난곡>과 <마태 수난곡>은 성서적 성격이 강하면 서 서정적이고 극적인 요소로 가득 찬 수난 오라토리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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