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와 교회음악


 

영국 국교회에서는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오랫동안 비합법적인 것으로 여겼다. 1819년 쉐필드 교구목사 토마스 코테릴(Thomas Cotterill)은 예배 때에 찬송가책을 사용했다는 것 때문에 교회법정에 의해 고소당하였다. 판례가 된 이 소송사건을 통해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은 국교회내에서 다소간 합법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코테릴의 찬송가책은 제임스 몽고메리(James Montgomery)가 지은 많은 찬송가를 포함하였다. 쉐필드의 급진적 저널리스트인 몽고메리는 “기도는 영혼의 진지한 욕구”와 “일어나 주를 찬송하라”는 찬송시를 썼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찬송가는 1827년 감독 레지널드 헤벨 (Reginald Heber)의 찬송가가 발간되었다. 그 찬송가집은 시인 로버트 사우디(Robert Southey)와 소설가 월터 스코트(Walter Scott) 경이 조언을 한 장점이 있었다. 감독들로부터 확보한 문학적 진가와 공인은 국교회에서의 찬송가의 사용을 확장시키는데 이바지하였다. 헤벨의 찬송가집은 그 자신의 찬송가 “가장 밝고 훌륭한 아침의 아들들”과 그의 고전적 선교 찬송 “저 북방 얼음산과”, 딘 밀맨(Dean Milman)의 “타라! 당당하게 타라!”를 포함하였다.


옥스포드 운동은 초기의 헬라어와 라틴어 찬송가에 대한 관심을 소생시켰다. 니일(J. M. Neale)은 많은 초대교회와 중세의 찬송가들을 번역하고 개작하였다. 니일은 또한 “착한 왕 웬세스라스” 같은 캐롤을 작시하였다. 죤 케블의 명문집 기독교시대(The Christian Year)는 1827년에 초판이 나왔고 1867년까지는 100판 이상 계속 출판되었다.'


 그의 찬송가 중 몇몇은 오늘날도 불려지고 있는데 “새로운 매일 아침”과 “영혼의 햇빛 예수여”가 있다. 옥스포드 운동의 다른 지도자 뉴맨은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와 “높은 곳에 계신 가장 거룩한 분께 찬양하라”를 작시하였다. 개인적 헌신에 대한 옥스포드 운동의 강조는 파버(F. W. Faber)의 “왜 너희는 사람멸의 영혼을 흩어버리느냐”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감상적 분위기는 아주 용이하게 뒤를 이어받았다.


여성 찬송가 작시자로는 19세기에는 많은 여성 찬송가 작시자들이 있었다. 알렉산더(C. F. Alexander) 부인은 가장 유명한 어린이 찬송가들 가운데 몇 편을 작시하였다. 그녀는 “빛나고 아름다운 만물들”과 “옛날 임금 다윗 성에” “저 멀리 푸른 언덕에” 같은 찬송가들을 통해서 기본적 기독교 신앙을 상설(詳說)하였다. 장년들을 위해 그녀는 교회력을 위한 찬송가를 지었다.


다른 여성 찬송가 작시자들 중에는 살로트 엘리오트(Charlotte Elliott, “큰 죄에 빠진 날 위해”)와 사라 애덤스(Sarah Adams, “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가 있었다. 요한 웨슬리 이후 가장 뛰어난 독일 찬송가 번역자인 캐더린 윌크워드(Catherine Winkworth)는 “다 감사 드리세”를 영어로 옮겼다. 1800년에서 1880년 사이에 국교회 내에서만 220종의 찬송가책이 나왔다.


많은 작시자들은 오늘날 거의 잊혀졌다. 그러나 장로교도 호라티우스 보나르(Horatius Bonar, 1808-1889)의 600편의 찬송가 중 많은 찬송가가 오늘날도 불려지고 있다. “나의 생명을 채우소서, 오 주 나의 하나님” “내게로 와서 쉬어라” 같은 작품이 있다(“양떼를 떠나서”, “날 위하여”도 보나르의 찬송시이다). “가시관 쓰셨던 머리”를 지은 아일랜드 교회의 목사 토마스 켈리도 760여 편의 찬송시를 썼고, 그 가운데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


옥스포드 운동에 의해서 1861년에 새로운 찬송가집 (Hymns Ancient and Modern)이 나왔다. 그것은 폭 넓게 발췌한 찬송가집이었기 때문에 결국 모든 국교도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었다. 이 모든 찬송가의 총 판매량은 1900년 중기에 1억 5천만 부 이상이었다. 찬송가는 거듭 개정되었고, 19세기말까지는 그 주요한 경쟁자들이 찬송의 벗 (Hymnal Companion, 1870)과 교회 찬송가 (Church Hymns, 1871)를 훨씬 능가하였다. 어느 곳이나 널리 보급된 유일한 찬송가는 1876년에 개정된 감리교 찬송가(Methodist Hymn Book)였다.


미국의 찬송가 미국에서의 종교음악은 억제를 덜 받았다. 남부 침례교도의 서민 전통과 음악교습소 운동을 통해서 단순하지만 독특한 회중음악이 생겨났다. 복음찬송(gospel song)들은 반복적인 리듬과 화성을 갖고 있었다. 1797-1805년의 켄터키 부흥운동은 노예상태에서의 해방을 열망하는 흑인 영가에 생기를 주었다 (예: “하늘나라 가는 마차”(Swing low, sweet chariot). 그러나 19세기의 미국찬송가들은 문학적이긴 하나 자유주의적이고 유니테리언적(Unitarianism)이었다. 이것은 특히 영의 찬송(Hymns of the Spirit, 1864)의 경우에 해당된다.


이 찬송가집은 사무엘 존슨과 형제 시인 롱펠로우(Samuel Longfellow)가 편집한 것이다. 존슨의 찬송가 가운데 하나는 교리에 대한 그의 반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도성! 아주 넓고 아득히 멀도다 웅대한 당신의 성벽을 펼치소서” 다른 비슷한 작시자들은 올리버 호움즈(Oliver Wendell Holmes, “저 해와 달과 별들”) 프레드릭 호스머(Frederick Hosmer, “당신의 나라가 임하도다 ! 꿇은 무릎 위로!”, 윌리암 메릴(William Merrill, “너 주의 사람아”, 에드워드 시어즈(Edward Sears, “그 맑고 환한 밤중에”)였다.


오늘날도 부르는 이러한 가장 대중적인 찬송가 가운데 하나는 퀘이커교도 죤 그린리프 횟티어(John Greenleaf Whittier)의 시로부터 작시한 “인류의 사랑하는 주 와 아버지”이다. 반면에 “예수여, 이 눈이 결코 보지 못하였나이다”의 작시자 레이 팔머(Ray Palmer)는 그리스도 중심의 심오한 신앙심으로 작시하였다.


1870년 무디와 생키는 복음전도운동을 위해 찬송가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전기간 동안 바하의 작품을 들은 사람보다 1875년에 생키의 찬송을 들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고 한다. 무디와 생키의 성가집 (Sacred Songs and Solos) 은 6페스의 책자(1873)에서 1200곡의 책(1903)으로 커졌다. 그 제한된 제재(題材)와 대중적 호소력은 부흥집회를 위해서 이상적이었으나 일반회중의 찬송을 위해서는 덜 적절하였다.

엘리자베드 클레판(Elizabeth Clephane)의 “양 아흔 아홉 마리는” 같은 보다 훌륭한 찬송들 중 몇 편은 표준적인 찬송가책에 들어갔다. 이러한 수집을 통해 음악당의 음악이 교회로 들어왔고, 이야기를 하는 것(story-telling)이 찬송가로 바뀌었다. 가장 많이 작시를 한 공헌자들 중에는 퍼니 크로스비(Fanny Crosby)와 블리스(P. P. Bliss)와 프란세스 해버걸(Frances Ridley Havergal) 그리고 데이비드휘틀(David W. Whittle)이었다.


19세기에 또한 많은 찬송가 곡들이 작곡되었으나 그 곡들은 종종 화성적구성과 화음의 반복진행에 지나친 관심을 가졌다. 죤 바커스 다이크스(John Bacchus Dykes)와 죤 스테이너(John Stainer) 경은 고대와 근대의 찬송가를 위해 많은 곡을 작곡하였다. 다이크스는 “거룩 거룩 거룩”을 위해서 니케아(찬송가원명)를 작곡하였고,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를 위하여 룩스 베니그나(찬송가 원명)를 작곡하였다.


그는 기억하기 쉽고 부르기 쉬운 멜로디를 작곡할 수 있는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었다. 스테이너의 작품들 특히 그의 성담곡(오라토리오) “십자가의 예수”는 여전히 교회 성가대가 즐겨 부르고 있다. 죠셉 반비(Joseph Barnby) 경은 유명한 성가대 지휘자이며 5권의 찬송가책의 편집자로서, “아침이 하늘을 금빛으로 칠할 때”를 위한 라우데스 도미니를 포함하여 200여 개의 찬송가 곡을 썼다.


찰스 웨슬리의 손자 사무엘 세바스찬 웨슬리는“광야”와 같은 훌륭한 성가와 많은 찬송가 곡을 작곡한 유력한 오르간 연주자였고, 교회음악의 개선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고대와 근대의 찬송가는 각 찬송가에 “적당한” 곡을 붙여 주었다. 그것은 그와 같이 곡을 붙인 최초의 찬송가 책이 아니었으나,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일반적 관례가 되었다.


시인 로버트 브리지스(Robert  Bridges)는 그의 아텐돈 찬송가(Yattendon Hymnal, 1895-1899)에서 찬송가의 곡과 찬송시를 위해 새로운 높은 표준을 정하였다. 그는 다이크스와 반비의 다소 싫증나게 하는 곡에 반발하였다. 브리지스와 그 밖의 사람들이 재발견한 독일의 합창곡과 옛 시편 곡들은 랄프 보건 윌리암스(Ralph Vaughan Williams)의 영국 찬송가(The English Hymnal, 1906) 안에 수집되었다.


는 시네 노미네와 “왕의 웨스톤” 같은 그 자신의 강렬한 곡을 제공하였고, 또한 곡을 위해 민속의 멜로디들을 채택하였다. 19세기 하반기 동안에 자유 교회들은 비록 여전히 핫츠와 웨슬리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고대와 근대의 찬송가의 경향을 따라 그들의 찬송가책을 만들었다. 그 책들은 전회중이 찬송을 부르게 함에 있어서 국교도들이 무시할 수 없는 지침을 제공해 주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19세기 중엽까지 오직 시편만을 불렀다. 찬송가가 소개되었을 때 그들은 주로 영국의 곡을 사용하였다. 한편 복음주의적 부흥은 웨일즈에서 잊혀지지 않는 선율의 흐름을 발표하였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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