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 비둘기, 물로 상징되는 성령



성령의 여러 이미지는 우리가 지닌 영성의 다양한 모습 반영

그리스도교 영성의 독특함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발현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이 다양한 종교문화와의 교류 속에서 형성되고

있지만, 이 세 존재와의 영의 소통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고유한 독특함은 유지되어야 한다. 이웃 종교의 영성과 그리스도교 영성을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성령에 대한 이해다. 이웃 종교 안에도 그리스도교의 성령의 역할에 상응하는 신적인 존재가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사뭇 다르다. 우리가 지닌 영성의

다양한 모습은 바로 성령의 존재가 우리의 영을 통해서 드러난 모습이다.

우리의 영성이 성령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말은, 우리의 영성이 인간의 현실적인 조건이나 성향에 관계없이 성령의 일방적인 주도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혜의 영이신 성령은 각 사람의 영적인 색깔이나 성향, 심성, 성격 등의 조건들을 활용하여 영적인 성숙을 도모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한 영성의

지향점을 유지하려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영성의 다양한 모습과 지향점은 존중되어야 한다. 성령은 한 분이지만 그 활동과 나타나는 이미지가 다양한 것처럼 우리의 영성 또한 그것에 걸맞게 형성될 수 있다.

성서는 성령의 이미지를 바람, 불, 비둘기, 물로 상징하여 설명한다. 물론 상징은 실재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 실재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네 가지 상징을 통해 성령의 다양한 기운과 역할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것이 우리의 영성과 어떻게 맞물려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바람 같은 성령

예수가 하늘로 승천한 후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초기 예수의 제자들은 성령을 바람 같은 그 무엇으로 체험했다. 그것은 모두 다 같이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세찬 바람이었다. 이때 바람은 생명의 기운을 의미한다. 바람이신 성령은 우리의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으신다. 이러한 성령의 모습은 이미 하나님의 사람 창조 이야기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하나님이 진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이후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자 비로소 사람이 영적으로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사람 안에 생명의 기운, 하나님의 영이 우리 인간의 생명의 기원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에스겔은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숨으로 말미암아 생명 있는 존재로 변화되는 과정을 본다(겔 37:4~6).

숨, 기운, 바람 등의 이미지들은 성령의 생명력을 보여준다. 성령이 생명이다(롬 8:10).

바람은 또한 자유를 상징한다.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제 마음대로 부는 듯 보인다. 거침이 없고 거추장스러운 것을 쓰러뜨리고 새롭게 한다. 성령은

자유로운 생명의 움직임이다. 그러기에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람은 자유의 사람이다. 이것이 영성이 깊은 사람일수록 자유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까닭이다.

불 같은 성령

성령이 불 그 자체는 아니지만 성서는 성령의 활동하심의 한 모습을 불로 상징한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행 2:3).

이 불 같이 내린 성령으로 인해 당시 모여 있던 사람들은 존재의 변화를 경험한다. 불은 변화의 상징이다. 특히 이 변화는 점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급변하고 아주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예수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눅 2:49)." 예수는 거짓평화나 불의로 인한 안정된 사회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질서로 이 세상의 궁극적인 변화를 희망했다. 이때 불은 이 땅의 모든 쭉정이를 태우는 정화를 상징하기도 한다(마 3:12).

불은 또한 열정의 상징이다. 성격이 불 같은 사람은 열정이 너무 뜨거워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한다. 성령은 우리의 열정을 일으키시는 분이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찾고, 그와 연합함을 갈망하게 하신다. 또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 대한 불붙는 사랑의 마음을 지니게 하신다. 우리 자신이 고통에 이를지라도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복음의 삶을 살게 하시는 이 또한 불 같은 성령이다.

비둘기 같은 성령

이스라엘의 문화에서 비둘기는 창조나 새로운 존재, 시대의 변화를 상징한다. 노아 홍수 이야기에 등장하는 비둘기는 홍수 이후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알리는 전령의 모습이었다. 노아의 방주 안에 있는 사람과 동물들은 비둘기의 움직임으로 변화된 세계를 감지했다. 비둘기 같은 성령은 무엇인가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이다. 그런 성령의 모습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예수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성서는 성령이 예수에게 비둘기처럼 내려앉았다고 묘사한다. 이것은 예수가 이제 사람들 앞에서 새로운 존재로 드러남을 의미한다. 다음에 들려오는 하늘의 소리가 이를 증거한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전통적으로 비둘기의 이미지는 평화와 온순함의 상징이다. 비둘기의 이미지로서 성령을 생각할 때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성령의 온유함, 부드러움이 가슴에 새겨진다. '비둘기 같이 온유한 은혜의 성령 오셔서 거친 맘 어루만지사 위로와 평화 줍소서'라는 찬송처럼 성령은 우리의 상한 영혼을 치유하시고 평화를 가져다주시는 분이다.

물 같은 성령

예로부터 물은 다양한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 생명의 기원, 삶과 죽음, 정화 등의 이미지를 내포한다. 성서도 물의 이러한 다중의 의미를 사용하고 있다. 성서가 창조 전의 모습을 물위에 하나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고 묘사할 때에는 생명의 움틈을 상징화한 것이며, 노아의 홍수의 물은 심판과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요 7:37~38)." 이러한 예수의 말을 기록한 성서기자는, 이 물은 바로 성령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이 물은 해갈의 물이며, 생명의 물이다. 우리의 영적·육적인 목마름을 해소시키는 해방의 물이다. 성령의 현존으로 우리의 영혼이 생명력 있게 변화됨을 의미한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물로써 자신의 생명력을 이어가듯 영의 사람은 성령의 용솟음으로 살아간다.

정서적으로 물은 자연스러움을 뜻하기도 한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며, 작위적인 거스름이 없는 무위의 상징이기도 하다. 성령의 역사나 활동은 우리의 영의 상태와 삶의 현실에 맞게 자연스러운 변화로 이끄신다. 억지나 강요 없이 감동과 감화로 우리의 감격을 이끌어내신다. 맑은 물처럼 우리를 되비치게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성찰하게 하고 돌이켜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이끄신다.

세례의 물은 이러한 삶의 변화를 가름하는 성령의 모습이다. 물에 잠길 때 옛 존재가 씻겨짐을 나타내고, 물위로 솟아오를 때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된 모습이다. 이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함께 다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표현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신비를 체험하게 되는 것은 결국 성령으로 말미암는 은총이다.

김진 목사 / 크리스챤아카데미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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