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은 어떻게 임하는가?


단일한 성령 충만이 우리의 삶과 사역을 따라서 다양하게 여러 가지 형태로 역사하신다.

항상 인도, 주관, 은혜를 주심으로써 우리의 삶의 여러 가지 사역에 따라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강건케 하고 이끄신다.

우리에게 특별한 사역과 임무가 주어졌을 때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으로 임하신다.

핍박에서는 그것을 극복할 힘을, 기도할 때는 기도의 영을, 설교에는 능력과 감동과 확신으로, 상담 시에는 지혜의 영, 위로할 때는 위로의 영으로...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편하다.

 

헬라어로 구분이 가능하다면 다음과 같다.

 

① The Acts of Spirit's filling - πιμπλημι : 성령의 충만케 하시는 주권적 역사, 행위를 좀 더 강조한다. 충만케 하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는 우리가 주관할 수 없는 것이다. 항상 선재적이다. 성령이 선재권을 가졌다. 우리가 조절할 수 없다. 항상 성령이 우리를 충만케 하시고 인도하시고 주관하신다. 이런 측면에서 성령충만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기도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이 조건이 아니라 사실 무조건적으로 예수의 공로에 의해서 우리에게 무조건 주어지는 축복이다. 생수의 강이 이미 흐르고 있다. 주권적 역사이므로 우리가 주관할 수 없다. 선재적으로 내주하시고 충만히 인도하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그 은혜를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이 이미 와 있다는 의미이다. 오히려 성령께서 간청하신다. “제발 나의 이 충만한 은혜를 거부하지 말라. 이 역사를 따라 살라!” 생수의 강이 흐르는 길을 따라 걸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그 길을 따르지 않고 정반대되는 광야의 길을 헤매고 있다. 육신의 길을 따라서... 그래서 이 측면에서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어떤 조건이 요구되지 않는다. 물론 기도해야 한다. 강조점이 무엇인지를 묵상해야 한다.

 

② The State of fullness - πληρης, πληροω : 좀 더 성령충만 상태의 지속성을 강조한다. 

상태의 측면에서는 우리에게 책임이 따른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역하지 않고 항상 순종할 책임이 있다. 그 충만한 역사를 거스르거나 소멸하지 않고 그 충만한 은혜가 머물게 할 책임이 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해서는 성령을 거스르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함으로써 그 은혜에 젖어서 살아야 한다. 그러면 시냇가에 심긴 나무가 풍성한 열매를 맺듯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이런 측면에서는 기도해야 한다. “나를 도와주옵소서...” 내가 성령 충만한 사람, 열매의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성령 충만에 대해 쓰인 경건서적을 보면 혹자는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나”는 제하에 여러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자기를 죽이고, 깨끗하게 하고, 순종, 믿어야 한다 등등... 그러나 이런 가르침이 많은 도움은 주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한 혼돈을 준다. 그 조건을 다 이룬 후 이루어진다면 죽어도 못 받는다. 얼마나 깨끗하게 해야 하나? 내가 깨끗하게 된 상태가,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사는 자체가 성령 충만의 상태인데 다른 무엇이 필요한가? 그래서 그들이 성령 충만 이라는 말을 할 때 어떤 의미로 말하는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만약 주권적 역사(The acts of Spirit's filling)를 말하면서 성령 충만해야 한다고 말하면 잘못된 것이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항상 충만하게 내재하신다. 성령께서 우리보다 더욱 강하게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원하신다. 문제는 우리들 자신이다. 성령은 언제나 열심히 은혜를 주시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그 축복을 간구해야 한다.

 

그러나 상태의 지속성(The state of fullness)적인 의미로 말하면 인간의 책임을 말할 수밖에 없다. 자기 부인, 죄 청산, 거룩한 삶, 양도, 순종의 삶... 이런 책임들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순서를 우리가 뒤 바꾸어 버리면 성령론적 율법주의에 빠진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않은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다. 생수의 강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다이내믹하게 흐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활용하지 않고 있다. 거룩한 삶을 살려는 갈망이 있어야 생수의 강을 누릴 텐데 그것을 원하지 않으니... 은혜가 소모되고 있다. 우리의 문제는 성령 충만의 은혜를 못 받는 것이 아니라, 계속 멈추지 않고 폭포같이 흐르는 은혜를 무한히 소모하고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도, 『...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라고 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은 특권인 동시에 우리의 책임이다. 특권과 책임이 하나로 맞물려 있다.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생수의 강을 주시는 것은 무조건적이다. 성령 충만케 하시는 주권적 역사, 생수의 강의 선물은 예수의 공로에 근거한다. 예수의 그 엄청난 희생의 대가로... 우리로 성령 충만케 하시려고 주님이 그토록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왜 주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나?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케 하시기 위해서이다. 성령충만은 특권이요 축복이다.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특권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부어지지만 우리의 심령이 강퍅해서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 은혜를 소멸키시지 않도록 조심스런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은 예민한 분이다. 조그만 부주의한 교만과 죄로 성령의 은혜가 소멸된다. 작은 죄라도 엄청나게 심각한 죄이다. 작은 죄악으로 너무도 엄청난 은혜를 상실하고 있다 삶을 돌이켜 보라. 엄청난 죄를 짓고 있는가? 삶에 작은 부주의로 엄청난 은혜가 소멸된다.

 

성령 충만은 특권인 동시에 책임이다. 이런 측면세서 성령 충만은 indicative/imperative의 구도에서 이해할 수 있다. indicative는 성령충만의 특권이 주어졌다는 것이고, 그에 근거에서 imperative가 주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성령 충만하라’는 말에는 이 두 의미가 다 내포되어 있다. 성령이 은혜 가운데 주권적으로 역사해서 충만케 하신다. 그러니 이 역사를 제발 거스르지 말라는 것이다. 성령님은 이미 충만하게 와 있다. 그것을 거스리면 안 된다. 특권과 책임의 의미가 다 내포되어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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